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그녀는 실패한 희곡 작가였다!
   헬렌 한프는 뉴욕에서 평생 글을 썼지만 "나는 실패한 희곡 작가였다."(154쪽)라고 자평할 정도로 그리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작가였던 그녀는 한 평론지에 실린 '희귀 고서점' 광고를 보고 런던 채링크로스 가 84번지에 있는 마크스 서점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절박하게 구하는 책들이 있는데, 만약 5달러가 넘지 않는다면 보내달라고 말이죠. 얼마 후 서점 담당자 프랭크 도엘로부터 그녀가 원하는 책과 함께 편지가 날라옵니다. 그렇게 그들의 편지는 시작되었습니다.

   1949년 10월 5일에 시작된 그들의 편지는, 1969년 1월 8일 도엘이 죽었다는 편지가 날아올 때까지 20년 동안이나 계속됩니다. 그들이 주고받은 것은 단순히 주문서와 청구서뿐만이 아닙니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호황을 맞이한 뉴욕은 물자가 풍부했지만, 런던은 한달에 달걀 하나를 배급받을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헬렌은 뉴욕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달걀이나 햄 같은 것들을 편지와 함께 보내주고, 서점 사람들도 사진이나 직접 짠 테이블보 등을 선물로 보내줍니다. 그들의 우정 어린 편지들은 가슴 설레게 했고, 도엘의 소식을 전하는 마지막 편지는 눈물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 편지들을 읽고 있는 독자가 이렇게 애틋하게 느낄 정도이니, 당연히 헬렌 한프는 런던 17번가를 뉴욕 17번가보다 더 가깝게 느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뉴욕 이스트 가와 런던 채링크로스 가가 지리적으로 5,0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여기 이 자리에서는 런던이 17번가보다 훨씬 가깝답니다. 31쪽

   그녀는 항상 런던 채링크로스 가로 휴가를 떠나길 고대하지만, 서점 사람들이 잠자리를 얼마든지 제공해 주겠다고 했지만, 가난한 작가였던 그녀가 비행기 티켓 값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미루다보니 결국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사람들도 하나둘씩 서점을 떠나게 됩니다.

   나는 실패한 희곡 작가였다. 나는 아무데도 가지 못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154쪽

   프랭크 도엘이 죽은 후, 헬렌 한프는 그와 주고 받았던 편지들을 챙겨 출판사로 향합니다. 이 편지들 덕분에 그녀는 작가로서는 누려보지 못한 인기를 얻게 되지만, 전세계에서 날아오는 편지에 답장을 보내느라 인세로 받은 돈이 모두 우표 값으로 나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대로가 나을지도. 너무나 긴 세월 꿈꿔온 여행이죠. 단지 그곳 거리를 보고 싶어서 영국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고요. 오래 전에 아는 사람이 그랬어요. 사람들은 자기네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러 영국에 간다고. 제가, 나는 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찾으러 영국에 가련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더군요. "그렇다면 거기 있어요." 어쩌면 그럴 테고, 또 어쩌면 아닐 테죠. 주위를 둘러보니 한가지만큼은 분명해요. 여기에 있다는 것.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큰 신세를 졌답니다. 145쪽

   그녀는 런던으로 여행을 떠나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지금은 기념 동판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지만,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당신도 입맞춤을 보내주시겠어요?



   저는 전 주인이 즐겨 읽던 대목이 이렇게 저절로 펼쳐지는 중고책이 참 좋아요. 해즐릿이 도착한 날 '나는 새 책 읽는 것이 싫다'는 구절이 펼쳐졌고, 저는 그 책을 소유했던 이름 모를 그이를 향해 '동지!'하고 외쳤답니다. 18쪽

   여러분이 좀 덜 조심하여 카드를 쓰는 대신 속표지에다 글을 남기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행여나 책의 가치가 떨어질세라 노심초사하는, 서적상의 본분이 거기서 발휘된 거겠죠? 현재의 소유자에게는 가치를 높이는 일이었을 텐데 말이에요(그리고 미래의 소유자에게도 그랬을 거예요. 저는 속표지에 남긴 글이나 책장 귀퉁이에 적은 글을 참 좋아해요. 누군가 넘겼던 책장을 넘길 때의 그 동지애가 좋고,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글은 언제나 제 마음을 사로잡는 답니다). 50쪽

   나도 영국행을 감행하여 나의 친애하는 서점을 직접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나한테 그럴 배짱만 있다면 말이야. 5,000킬로미터라는 안전한 거리가 있기에 그 난폭하기 짝이 없는 편지들을 써보낸 건데, 어느 날 거기에 들어가더라도 십중팔구는 내가 누군지 말도 안 하고 그대로 나와버릴 것 같아. 71쪽

   가장 애교 넘치는 부분에서 자꾸만 펼쳐지는 것이 마치 전 주인의 유령이 내가 읽어본 적 없는 것을 짚어주는 듯하답니다. 90쪽

   갈수록 나이가 들고 바빠지지만 더 부자가 되지는 않는군요.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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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01-18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고책 이야기에 공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