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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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오만과 편견』을 '연애소설'로만 읽을 수 없는 이유!
   1999년 말 영국 BBC 방송에서 '지난 천 년간 최고의 문학가는 누구인가'에 관한 설문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물론 1위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영국이 '인도하고도 바꿀 수 없다.'는 셰익스피어였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뒤를 이어 2위를 차지한 인물이 다소 의외였다. 그 수많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 여왕에게 작위를 받은 대문호들을 제치고 제인 오스틴이었던 것이다.
   제인 오스틴은 사실 평생 단 여섯 편의 작품만 쓴 작가다. 게다가 그 여섯 편의 작품도 모두 자신의 이름이 아닌 가명으로 세상에 내놓았기 때문에,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야 사람들은 그 작품들을 제인 오스틴이라는 작가가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생전에도 그다지 인기를 끈 작가는 아니어서 수십 년의 작품 활동으로 번 돈이 고작 700파운드 밖에 되지 않았다. 사후에도 한동안은 그 유명한 찰스 디킨스나 T.S 엘리엇 등의 빅토리아 시대 소설가들의 유명세에 밀려, 영문학사에 그다지 이름을 올리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소설가 헨리 제임스가 그녀의 작품들을 격찬하면서부터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이 조금씩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20세기에 이르자 신기하게도, 200년이나 묵은 그녀의 작품들이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기의 대상이 되었다. 서수경의 『영문학 스캔들』, 262~263쪽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 『오만과 편견』은 그녀가 23세 때인 1797년에 『첫인상』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쓰여졌지만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오만과 편견』은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1813년에 제인 오스틴이 개작해 발표한 것입니다.

   베넷 家의 둘째 딸 엘리자베스는 엄청난 재산과 지위를 가진 다아시에게 청혼을 받지만 그의 오만하고 냉랭한 첫인상과 청혼하는 태도 때문에 그의 청혼을 거절합니다. 다아시는 그녀의 거절을 상상 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영국 사회에서 여자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었는데, 게다가 자신은 부유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애를 써보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 봤자 안 될 것 같습니다. 제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얼마나 열렬히 사모하고 사랑하는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267쪽

그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감정 외에 다른 감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이야기해야 했다. 애정에 대해서보다도 자존심에 대해 말할 때 더 열변이었다. 그녀의 신분이 열등하다는 것, 그런 결혼은 집안에 수치라는 것, 그녀의 집안을 생각하면 이성은 언제나 감정에 제동을 걸었다는 것 등을 하나하나 열심히 설명했는데, 그렇게 열을 올리는 것은 지금 자신이 스스로 손상시키고 있는 그 신분 때문인 듯했지만, 그의 청혼에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268쪽

   "당신이 어떤 태도로 청혼을 하셨다 해도 그걸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 거예요." 273쪽


   영국에서는 장남에게만 부모의 재산과 지위를 물려주게 되어 있었고, 만약 그 가족에게 남자가 없다면 집안의 다른 남자에게 물려주도록 상속을 한정시킨 법적 장치가 있었습니다. 베넷 家에는 딸만 다섯이었고, 따라서 베넷 씨가 죽으면 그의 모든 재산은 먼 친척인 콜린스에게 상속되어질 예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자신 뿐만아니라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재산 한 푼 상속 받지 못하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재산이 없는 아가씨에겐 오직 결혼만이 명예로운 생활 대책이었고, 결혼이 가져다줄 행복 여부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해도 결혼만이 가장 좋은 가난 예방책임이 분명했다. 177쪽

   "당신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처음 알게 된 바로 그 순간이라 해도 좋을 것 같군요, 저는 이미 당신의 태도를 보고 당신이 거만하고 잘난 체하며 자기 생각만 하면서 남의 감정은 무시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 다른 일들이 쌓이면서 그런 좋지 않은 인상이라는 토대 위에 단단한 혐오감이 자리 잡았다고 할까요. 그랬기 때문에 당신을 알게 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누가 뭐라고 해도 저는 당신 같은 사람과 결혼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말씀 충분히 잘 들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양. 당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이해하며, 지금은 다만 제 감정을 부끄러워할 일만 남았습니다.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은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의 건강과 행복을 빌겠습니다." 273~274쪽


   오만한 다아시와 편견으로 가득 찬 엘리자베스. 다아시의 사랑도 가시 돋친 엘리자베스의 거절 때문에 끝나버리는 것 같지만, 다아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성적이고 신사적인 남자였습니다. 엘리자베스로부터 거절 이유를 들은 다아시는 이성적으로 자기 자신을 반성하며 개선하려고 노력합니다. 오만하고 차가워보이는 인상 때문에 사람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친절을 베풀려고 노력합니다. 엘리자베스는 우연히 들른 그의 영지에서 그의 평판을 듣고는 그동안 자신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특히, 엘리자베스의 막냇동생 리디아의 철없는 행동 때문에 온가족이 힘들어하자, 가족들 모르게 리디아를 도와 사건을 해결해 줬다는 사실까지 알게되자 그를 향한 엘리자베스의 호감은 점점 더 커져버립니다.

   이제 그녀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다아시를 생각하든 위컴을 생각하든 자기가 눈이 멀었고 편파적이었으며 편견에 가득 차고 어리석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한 사람은 나를 무시해서 기분이 나빴고, 다른 한 사람은 특별한 호감을 표시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난 두 사람에 관해서는 선입관과 무지를 따르고 이성을 쫓아낸 거야." 293~294쪽


   그의 태도가 놀랍도록 변해 있었던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자기에게 먼저 말을 건 것부터가 놀라운 일이었다. 거기다 그렇게도 정중한 말투로 가족들의 안부까지 묻다니! 이 예기치 않은 만남에서만큼 그가 위엄을 부리지 않는 것을 그녀는 여태까지 본 적이 없었고, 그렇게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한 적도 없었다. 350쪽


   존경과 존중보다도 더욱더 그녀 마음속에 간과할 수 없는 호감의 동기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감사였다. 한때 자기를 사랑했다는 데 대한 것뿐 아니라, 그를 거절할 때 토라져서 톡톡 쏘아대던 무례함이라든가 그러면서 퍼부은 모든 부당한 비난들을 용서해 줄 정도로 자기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데 대한 감사였다. 366쪽


   『오만과 편견』에는 네 커플이 등장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너무 소극적이라 상대를 놓칠뻔한 제인과 빙리, 순식간에 휩싸인 사랑의 감정 때문에 집을 뛰쳐나간 리디아와 위컴,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사랑 없이 결합한 샬럿과 콜린스, 오만과 편견 때문에 상대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엘리자베스와 다아시. 제인 오스틴은 네 커플이 사랑하는 방식을 통해 당시 영국의 사회상과 가치관은 물론, 각 캐릭터들의 성격까지 정확하게 분석해 보여줍니다.
   이런 제인 오스틴을 혹자들은 비판합니다. 그녀가 작품의 소재나 주제면에서 동시대 남성 작가들과는 달리 너무 소소한 가정사나 남녀 간의 사랑, 결혼만을 다루고 있는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얼핏 보면 제인 오스틴의 방식과 소재는 낡고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나쁜 독자들이 범하는 착각"이라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말했듯이, 20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전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을만큼 그녀의 소설은 세련되고 섬세합니다.
   흔히들 그녀의 소설을 '연애소설'의 원조라고 하는데,
단순히 '연애소설'로만 읽는다면 제인 오스틴과 엘리자베스가 지하에서 가시 돋친 편지를 보내오지 않을까요.

   "여성의 평판이란 아름다움만큼이나 부서지기 쉽다는 것. 무가치한 남성에 대해서 여성은 아무리 몸가짐을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 398쪽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이따위 일에 우리가 감사해야 하니 말이야. 행복할 가망이 거의 없는데도 결혼해야 하고, 남자의 성격이 형편없는데도 우린 기뻐해야 한다는 거지!" 417쪽


   제인 오스틴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결혼하지 않은 언니를 부양해야 했습니다. 결혼을 할 기회도 있었지만, 단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느니 차라리 가난한 작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글을 써서 얻을 수 있는 수입이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버지니아 울프가 그렇게 외쳤던 "자기만의 방" 하나 없이 틈틈히 바느질이며 집안일까지 하며 글을 써야 했고, 끝내 작가로서의 그녀의 이름을 알리지 못한채 마흔셋이라는 나이에 쓸쓸하게 죽었습니다.

   만약 그녀가 남자들과 똑같이 교육받고 사회에 나가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더 다양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겠죠.
  
책을 읽다보면 '엘리자베스'라는 인물에 제인 오스틴이 겹쳐집니다. 작가 스스로도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들 가운데 '엘리자베스'를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로 꼽기도 했습니다. 그럼, '엘리자베스' 아니 제인 오스틴을 만나보러 갈까요?

 

 

오만이란 실제로 아주 일반적이라는 것, 인간 본성은 오만에 기울어지기 쉽다는 것, 실재건 상상이건 자신이 지닌 이런저런 자질에 대해 자만심을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우리들 가운데 거의 없다는 것이 확실해. 허영과 오만은 종종 동의어로 쓰이긴 하지만 그 뜻이 달라. 허영심이 강하지 않더라도 오만할 수 있지. 오만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더 관련이 있고, 허영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것과 더 관계되거든. 31쪽

"결혼에서 행복이란 순전히 운에 달려 있어. 서로의 취향을 아주 잘 알거나, 혹은 서로 아주 비슷하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둘의 행복이 더 커지는 건 결코 아니야. 취향이란 건 계속 변하게 마련이라 나중엔 누구든 짜증이 날 만큼 달라지게 마련이야. 평생을 같이 살 사람의 결점은 될수록 적게 아는 것이 더 나아." 35쪽

"자신의 견해를 절대 바꾸지 않는 사람들은 처음에 판단을 잘해야 할 특별한 의무가 있지요." 135쪽

"그 ‘열렬하게 사랑한다‘는 표현은 너무나 진부하고 의심스럽고 막연해서 감이 잘 안 잡혀. 진정으로 탄탄한 애정만이 아니라 단 반시간 동안의 만남에서 생겨난 감정에도 종종 그런 표현을 쓰곤 하니까 말이야. 빙리 씨의 사랑이 도대체 얼마나 열렬했는데?" 202쪽

조바심치며 기대했던 일이 일어나더라도 예상한만큼의 만족을 오롯이 얻지는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진짜 행복의 출발점으로 다른 시기를 지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의 소망과 희망이 이루어질 그 시점을 정하고, 다시 그것을 기대하는 즐거움을 누림으로써 현재의 자신을 위로하고, 또 다른 실망에 대비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30쪽

마음 맞는 여행 동반자와 함께한다는 점이었다. 마음이 맞는다는 것은 불편함을 견딜 수 있는 건강한 체질, 즐거움을 더해 주는 명랑한 성격, 밖에서 실망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서로 간에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애정과 슬기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3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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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동산 열린책들 세계문학 22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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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비극 배우
   거리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계절입니다. 화사하게 폈다가 이내 떨어져버리는 벚꽃이 아쉬워서 체호프의 『벚꽃 동산』을 펼칩니다. 그런데 체호프의 '벚꽃 동산' 역시 봄날은 아닙니다.

   류보비 안드레예브나 오, 나의 순수한 어린 시절! 바로 이 어린이 방에서 잠을 자며 또 여기서 동산을 바라보았지. 아침이면 행복에 젖어 잠에서 깨곤 했어. 그때도 동산은 이랬어,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기뻐 웃으며) 정말 온통, 온통 하얘! 오, 나의 동산! 어둡고 음산한 가을과 추운 겨울을 겪고도 너는 다시 젊고 행복에 넘치는구나. 242쪽

   한때 「벚꽃 동산」은 파란 하늘 아래 하얀 꽃들이 펼쳐진 '정말 아름다운 동산'(243쪽)이었지만, 지금은 빚 때문에 경매에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이 벚꽃 동산의 여지주, 라네프스까야 류보비 안드레예브나─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이름─에게 '벚꽃 동산'이란 아름답고 풍요로웠던 과거의 상징 같은 곳입니다.

   로빠힌 당신의 벚꽃 동산은 빚 때문에 팔리게 되어, 돌아오는 8월 22일 경매에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시고, 안심하고 주무십시오. 벗어날 방법이 있으니까요······. 내 방안은 이렇습니다. 잘 들어 보시죠. 당신의 영지는 시내에서 20베르스따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바로 옆에는 철도가 나 있고. 만일 벚꽃 동산과 강가의 땅을 별장 용도로 분할해서 임대한다면, 1년에 적어도 2만 5천루블을 벌 수 있을 겁니다. (······) 아무 쓸모도 없는 이 집을 비롯한 낡은 건물들은 모두 철거해 버리고, 시대에 뒤떨어진 벚꽃 동산도 벌목해야겠지요······.

   류보비 안드레예브나 벌목? 오, 맙소사,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이 지방에 뭔가 흥미로운, 아니 멋진 것이 있다면 그건 오직 우리 벚꽃 동산뿐이랍니다. 237쪽

   그녀는 상인 로빠힌이 '벚꽃 동산'을 계속 소유하려면 그저 보는 것이 아닌 돈을 벌 수 있는 별장 등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할 때도 듣지 않습니다. 게다가 여전히 씀씀이는 커서 돈을 아낄 줄도 모르고, 집으로 밴드를 초대해 파티까지 엽니다. 당연히 그녀의 벚꽃 동산은 경매에 붙여지고, 상인 로빠힌이 이 '벚꽃 동산'을 사게 됩니다.

   로빠힌 아, 하느님, 벚꽃 동산은 나의 것입니다! (······) 나의 아버지, 나의 할아버지가 무덤에서 일어나 이 일을 모두 보신다면, 매나 맞고 배우지도 못한 예르몰라이가, 겨울에도 맨발로 뛰어다니던 바로 그 예르몰라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지를 산 것을 보신다면······. 나는 아버지, 할아버지가 농노로 지냈던, 부엌에조차 들어가지 못했던 바로 그 영지를 샀습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겁니다. 287쪽

   하루종일 아무일도 하지 않은 채 돈이나 쓰며 방탕한 생활을 하는 지주네 사람들과는 달리, 상인 로빠힌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벌어서 모은 돈으로 '벚꽃 동산'을 산 것입니다. 그는 지주네 사람들을 "경솔하고 비현실적이고 기이한 사람들"(256쪽)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로빠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당신들과 떠들어 대는 것도 이제는 괴롭군요. 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빈둥거리는 두 손이 마치 남의 손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291쪽

   로빠힌 피곤한 줄도 모르고 오랫동안 일을 할 때면, 마음이 가벼워져서 내가 왜 존재하는지 알 것 같소. 그런데 이 러시아에는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293쪽

   '벚꽃 동산'은 상인에게 넘어가고 지주네 사람들은 모두 '벚꽃 동산'을 떠납니다. '벚꽃 동산' 또한 곧 벌목이 되겠죠. 이렇게 막을 내린 희곡을 작가 체호프는 '코미디'라고 주장합니다. 결말은 비극적이지만, 각각의 상황들과 그 상황들을 만들어내는 인물들은 웃음을 쏟아내게 합니다.
   희곡이라는 장르답게 인물들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지만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한다거나 엉뚱한 대답을 해 제대로 연결되지 못합니다. 이 또한 웃음을 만들어내는 요소인데, 이런 대화들은 『벚꽃 동산』에 실려있는 6편의 희곡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체호프의 희곡에서 인물들은 서로 진정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횡설수설에 가까운 불필요한 대사들이 행위의 진행을 방해하여 집중된 대화체가 낳는 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체호프의 인물들은 대화를 나누는 듯하지만 독백하고 있는 것이다. 역자 해설_309쪽

   『벚꽃 동산』에는 표제작인 「벚꽃 동산」을 포함해 모두 6편의 단·장막극이 실려있습니다.
   이웃집 아가씨에게 「청혼」을 하러 갔다가 사소한 일로 아가씨와 싸우는 남자,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의 어려움을 친구에게 하소연하고 있는데 똑같은 일을 부탁하는 친구 때문에 미칠 것 같은 「어쩔 수 없이 비극 배우」, 중요한 「기념일」에 정성껏 준비해 온 연설을 하려고 하는데 사람들 때문에 기침을 하며 연설을 중단해 버린 대표, 사랑하는 여자에게 총으로 쏴 잡은 「갈매기」를 준 극작가, 죽은 누이의 남편이 아내로 맞이한 여자를 사랑한 「바냐 아저씨」, 그들도 역시 비극적인 상황을 코미디처럼 살아가는 인물들입니다. 어쩔 수 없이 비극 배우인 셈이죠.

   체호프는 반드시 읽어야 할 작가이다.
   그는 우리를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예술가이다. ─ 수전 손택

   체호프는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 작가이다. ─ 레이먼드 카버

   현대의 단편소설은 체호프를 통해서 양식과 주제를 습득했고, 현대의 연극은 체호프의 극적 스타일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작가들이 그에게 바친 헌사는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글은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오히려 지금 이 시대에 쓰여진 것처럼 세련됐습니다.
   이런 봄날의 체호프,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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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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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세상 끝까지 추적하는 이 빌어먹을 쓰레기, 황색 저널리즘의 최후
   어느 일요일 저녁, 카타리나는 뫼딩 경사의 집으로 찾아가 자신이 《차이퉁》 의 기자를 죽였다고 자백합니다.

   자신이 낮 12시 15분경 자기 아파트에서 베르너 퇴트게스 기자를 총으로 살해했으며, 뫼딩이 아파트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그를 "데려갈" 수 있을 거라고 했고, 그녀 자신은 12시 15분에서 저녁 7시까지 후회의 감정을 느껴 보기 위해 시내를 이리저리 배회했지만, 조금도 후회되는 바를 찾지 못했노라고. 12쪽

   27세의 성실한 가정관리사였던 카타리나는 어떤 이유로 기자를 죽였으며, 그 행동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사건은 며칠 전 카니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변호사 댁에서 가정관리사로 성실하게 일하고 있던 카타리나는 카니발 때 우연히 만나 춤을 춘 남자 때문에 신문 1면을 장식하게 됩니다. 그 남자는 은행 강도에 살인 혐의까지 받아 경찰의 추격을 받고 있었는데, 그의 정체를 잘 알지 못했던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그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아침이 돼도 아무런 기척이 없자 경찰은 밤새 그녀의 전화를 도청한 것도 모자라 그녀의 집을 수색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집에는 카타리나 뿐이었습니다. 살인 혐의를 받고 있던 그 남자, 괴텐은 이미 사라진 후였습니다. 밤새 경찰들이 그녀의 집을 지켰는데, 그는 어떻게 빠져나갔을까요? 경찰은 용의자 대신 카타리나를 연행해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신문들 역시 빠져나간 용의자 대신 카타리나에게 일제히 초점을 맞춰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카타리나와 용의자가 어떤 관계였는지, 그녀가 얼마짜리 아파트에서 살며, 그 아파트는 어떻게 구했는지, 평소 그녀의 행동은 어땠는지 주변 사람들을 인터뷰 한 뒤 기자 특유(!)의 상상력까지 발휘해 기사를 쏟아냅니다.
   심지어 암에 걸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까지 찾아가 무리하게 인터뷰를 시도합니다. 이 사건에 대해 잘 몰랐던 그녀의 어머니가 던진 한마디 조차, 기자는 카타리나에게 불리한 문장으로 고쳐 보도합니다.

   그녀는 , "왜 그런 결말이 날 수밖에 없었을까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차이퉁》에는 이렇게 썼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듯이,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겠지요." 블룸 부인의 진술을 다소 바꾼 것에 대해 그는 기자로서 '단순한 사람들의 표현을 도우려는' 생각에서 그랬고, 자신은 그런 데 익숙하다고 해명했다. 107쪽

   얼마 후 잡힌 용의자가 카타리나는 자신의 정체를 몰랐다고 진술하자, 그녀는 혐의를 벗고 경찰에서 풀려납니다. 그러나, 몇몇 신문들이 자주 그러하듯이, 《차이퉁》은 또다른 음모를 제기하며 카타리나를 몰아갑니다.

   경찰이나 검찰청은 블룸의 혐의를 완전히 없애려고 하는 파렴치한 괴텐을 정말 믿을 생각인가? 본지는 수차례 반복하며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의 심문 방법이 너무 부드러운 것은 아닌가? 비인간적인 인간을 인간적으로 대해야 하는가? 118쪽
 
   이 사건으로 인해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살았던 그녀의 일상은 산산조각 나버리고,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세상을 떠납니다. 뿐만아니라 그녀와 함께 일상을 공유했던 지인들도 엉뚱하게 기사의 표적이 되어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는 '이 쓰레기를, 한 사람을 세상 끝까지 추적하는 이 빌어먹을 쓰레기를 읽고 또 읽었지만, 읽을수록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 쓰레기의 날조된 표현들이나 "빨갱이 트루데"라는 표현에 대한 분노가 점점 고조되어, 마침내 항복하고 트루데에게 도와 달라고 비굴하게 부탁했다. 87쪽

   
그들은 살인자이자 명예를 훼손한자라고. 그녀는 물론 그런 것을 무시하지만, 무고한 사람들의 명예, 명성 그리고 건강을 앗아 가는 것이 이런 종류의 신문사 관계자들의 의무인 모양이라고 했다. 110쪽

   선정적이고 날조된 기사들로 인해 하루 아침에 명예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카타리나는 묻습니다. 이렇게 명예를 잃어버린 자신을 위해 국가가 어떤 일을 해 줄 수 있는지 물어봅니다. 어떻게 보면 경찰도 한 몫 한 셈이니까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더 황당합니다. 이것은 경찰이나 검찰청의 소관이 아니며, 언론의 자유는 함부로 침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카타리나는 이틀 치 《차이퉁》을 핸드백에서 꺼내 보고, 국가가 ─ 이렇게 그녀는 표현했다. ─ 이런 오욕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해 주고 그녀의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지 물었다. 그사이 그녀는, 심문이 왜 '삶의 세세한 구석까지 파고드는지'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런 심문이 전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쯤은 아주 잘 알게 되었노라고 했다. 하지만 심문할 때 거론된 세세한 사항 ─ 신사의 방문 같은 문제 ─ 들을 어떻게 《차이퉁》이 알게 되었는지, 게다가 어떻게 하나같이 왜곡되고 오도된 진술로 알게 되었는지 그녀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62쪽

   "논쟁의 여지가 분명한 형태의 저널리즘을 형사적으로 추적하는 일"은 경찰이나 검찰청의 소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언론의 자유를 경솔하게 침해해서는 안 되며, 개인의 소송도 정당하게 취급되고 불법적인 정보의 원천에 대해서는 신원 미상의 인물에 대한 소송이 제기된다는 걸 그녀는 믿어도 좋다고 했다. 여기에서 언론의 자유와 정보의 비밀 보장을 위해 거의 열정적이라 할 만큼 변론을 하며, 질 나쁜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그런 무리(모임)에 끼지도 않는 자는 언론에도 그를 거칠게 묘사할 빌미를 결코 주지 않는 법임을 단호히 강조한 사람은 바로 젊은 코르텐 검사였다. 67~68쪽

   그래서 카타리나는 결심합니다. 자신의 잃어버린 명예를 위해 직접 나서기로 말입니다.

   이 소설은 하인리히 뵐이 1975년에 발표한 것으로, 당시에도 선정적인 황색 저널리즘이 날개 돋친듯 팔리고 있었습니다. 작가는 언론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여론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그로 인해 한 개인이 철저하게 파헤쳐지고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소설 속 《차이퉁》 기자와는 대조적으로 사실만 객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절제된 표현으로 써내려 간 보고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더는 안돼, 더는 안 된다고요. 그자들이 이 아가씨를 끝장내고 말 거야. 경찰이 안 그러면 《차이퉁》이 그럴 거예요. 《차이퉁》이 그녀에 대한 흥미를 잃으면, 사람들이 그럴 거고요." 42쪽

   그녀가 일했던 변호사 댁의 부인이 한 이 말이, 오늘도 선정적인 기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쫓고 있는 스스로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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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3-28 0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있습니다, 소설을 보시고 나서 영화도
보시면 아마 감흥이 다를 것 같습니다.

뒷북소녀 2018-03-28 12:27   좋아요 0 | URL
찾아봤는데 네이버 이런 곳에서는 다운 받을 수가 없네요. 아쉽게도 ㅠㅠ
 
크눌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노은 옮김 / 민음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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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만 헤세가 '아끼고 사랑하는 인물'이라고 소개한 크눌프는 안정적인 삶 대신 평생 여행하며 돌아다니는 고독한 방랑자입니다.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역 어느 도시든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줄 곳은 쉽게 찾을  있을 터였다 점에 대해 그가 느끼는 자부심은 특별해서만일 누구든 그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면 그것을 일종의 영예로 여겨야  정도였다. 7

   크눌프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지는 그를 대하는 친구들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발길이 닿는 곳마다 친구들이 있었고, 그 친구들은 그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기꺼이 내어주면서도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크눌프는 예의 바르고밝고사랑스럽고재주가 많은 사람이라 그가 별 도움을 주지 않더라도 친구들은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합니다. 그 또한 그런 친구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기 때문에, 무두장이 친구의 부인이 그에게 호감을 표현하자 서둘러 친구의 집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천성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따라하기는 어려웠다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을 자신의 친구로 삼았으며모든 소녀들과 여인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매일매일을 일요일처럼 살았다. 사람들은 그가 자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계속해서 살아가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그러다가 그가 좋지 않은 상황에 빠져 피난처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생길 그를 맞이해 들이는 것은 기쁨이자 영광이 되는 것이었다그는 집을 즐겁고 밝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히려 그에게 감사해야할 정도였다. 31~32

   평생 이렇게 여행하며 즐겁게 살 줄로만 알았던 크눌프도 나이가 들고 폐결핵에 걸리자  빛을 조금씩 잃어갑니다. 이런 그에게 의사 친구 마홀트가 말합니다.

   "이 친구야, 자네가 고향에서 계속 살면서 열심히 일하고 아내와 자식도 얻고, 또 매일 밤 편안한 잠자리를 가졌더라면, 아마도 자네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야." 125~126쪽

   과연 그랬을까요? 크눌프는 죽기 전 마지막 여행지로 선택한 고향 땅에서 목적도 없이 계속 돌아다니면서, 생각 속에서 거의 언제나 하느님 앞에 서서 끊임없이 그 분과 대화(129쪽)를 나눕니다.

   하느님과 크눌프는 그의 삶이 무의미했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달라질 있었는지, 이런저런 일들이 그런 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했다. 130

   크눌프가 평생 떠돌아 다니기만한 자기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하느님은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라고 합니. 적어도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를 만난 순간만큼은 즐겁고 행복했으며,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고마워하고 있으니까 그걸로도 의미있는 삶이 아니었냐고 말이죠.

   "이 철부지야, 모든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가 근심 걱정 모르는 방랑자가 되어 이곳저곳에서 어린아이 같은 행동과 어린아이의 웃음을 전달해 주어야만 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니? 그래서 세상 곳곳의 사람들이 너를 사랑하기도 하고 조롱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너에게 고마워하기도 했다는 것을 모르겠니?" 133

   "그래, 넌 지금 신사가 되거나 기술자가 되어 아내와 아이를 갖고 저녁에는 주간지를 읽고 싶은 거냐? 넌 금세 다시 도망쳐 나와 숲속의 여우들 곁에서 자고 새 덫을 놓거나 도마뱀을 길들이고 있지 않을까?" 133~134쪽

   "난 오직 모습 그대로의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조롱받았다. 안에서 바로 내가 조롱을 받았고 안에서 내가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자녀요, 형제요, 나의 일부이다. 네가 어떤 것을 누리든, 어떤 일로 고통받든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했었다." 134


   저마다 추구하는 삶과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는 다르기 때문에 따뜻하고 안정적인 삶 대신 평생 자유롭게, 또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주면서 산 크눌프의 삶도 그 나름대로 의미있는 삶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혼자 쓸쓸하게 아파하며 죽어야 했던 그의 삶이, 게다가 그 스스로도 의미있는 삶이었는지 의문을 가질 정도였다면, 혹여 누군가에게는 즐거움을 줬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에게는 진정으로 의미있는 행보였을까요?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크게 전쟁과 개인적인 아픔을 겪기 이전의 작품과 그 이후의 작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그 이전에 쓴 작품으로, 이후에 쓴 작품들보다 훨씬 쉽게 읽힙니다. 주제 또한 개인의 삶을 다루고 있어서 접근하기 쉽습니다.
   오늘밤은 당신 차례예요. 사랑스러운 '크눌프'의 친구가 되어보세요!

   "이보게, 재단사 친구, 자넨 성경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어. 무엇이 진리인지, 인생이 본래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는 각자가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자 결코 어떤 책에서 배울 있는 아니란 말일세." 36

   누군가가 자신의 행복이나 미덕에 대해 자랑하고 뻐길 경우, 대부분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51

   모든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의 영혼을 다른 사람의 것과 섞을 수는 없어.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도 있고 함께 이야기할 수도 있고 가까이 함께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각자 자기 자리에 뿌리 내리고 있는 꽃과도 같아서 다른 영혼에게로 수가 없어. 만일 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뿌리를 떠나야 하는데 그것 역시 불가능하지. 꽃들은 다른 꽃들에게 가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향기와 씨앗을 보내지. 하지만 씨앗이 적당한 자리에 떨어지도록 꽃이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그것은 바람이 하는 일이야. 바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이곳 저곳으로 불어댈 뿐이지. 79

   아버지는 그의 자식에게 코와 눈과 심지어는 이성까지도 물려줄 있지만 영혼은 아니야. 영혼은 모든 사람들 속에 새롭게 존재하는 것이지. 80

   길고도 힘겹고 의미 없는 여행 내내 그는 어긋나고 뒤엉켜버린 자신의 속에 깊이깊이 빠져들어갔다. 그것은 마치 질긴 가시덤불 속으로 빠져드는 것과 같았는데, 그는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나 위로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12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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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책이 주는 여운 때문에 책장을 덮고나서도 한동안 머릿속을 맴도는 책들이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수레바퀴 아래서』가 그랬습니다다. 한스의 마지막이 어찌나 씁쓸하던지, 그렇게 쉽게 떨쳐버리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인 캐릭터이기도 한 '한스 기벤라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재능 있는 아이(8쪽)였습니다. 얼마나 기품 있고 남다른지, 심지어 사람들이 "지난 8, 9백 년 동안 유능한 시민들은 많이 배출했지만 천재나 재능 있는 인물은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오래된 작은 마을에 정말이지 저 위에서 신비로운 불꽃 하나가 뚝 떨어진 셈"(9쪽)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한스가 태어난 "슈바벤 지방에서 재능 있는 소년들에게는 부모가 부유하지 않으면 단 하나의 좁을 길"(10쪽)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주(州) 시험에 합격해서 신학교에 입학하고, 그후 튀빙겐 대학에 들어간 다음 교사나 목사가 되는 것"(10쪽)이었습니다.
   한스는 경쟁이 치열한 주 시험을 통과해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래서 라틴어 학교에서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기분전환을 위한 취미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모두가 바라는 '영예'를 누릴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은 일이니까요.

   잃어버린 소년 시절의 모든 즐거움보다 훨씬 귀중한 시간을 맛보기도 했다. 자부심과 도취감, 승리감이 넘치는 꿈같은 묘한 시간이었다. 그럴 때면 그는 학교와 시험과 모든 것을 다 뛰어넘어 더 높은 존재의 영역을 꿈꾸고 그리워했다. 20쪽

   다행히 한스는 주 시험에도 2등으로 붙어 원하던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는데도 더 잘하고 싶은 마음과 불안함 때문에 신학교 입학 전 방학 동안에도 쉬지 않고 선행학습을 합니다. 덕분에 한스는 신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1등을 놓치지 않았고, 노력형 모범생이라는 좋은 평판도 얻게 됩니다.

   신학교에서는 동급생 9명이 같은 방을 사용하며 생활했는데, 그 중 시인을 꿈꾸는 헤르만 하일너와 친하게 지냅니다. 그는 한스와는 반대로 천재형이었고, 생각과 행동이 모두 자유분방하고 활달했습니다. 특히, 그는 신학교의 획일적이고 이론만 반복하는 교육방식을 못 견뎌 합니다.

   "수업시간에 겨우 두 줄을 읽고 한 자 한 자 되새기고 구역질이 날 때까지 자세히 살펴보지. 하지만 마지막에는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니까. '이 시인이 얼마나 섬세하게 표현했는지 보았지요. 여러분은 시작(詩作)의 비밀을 들여다본 것입니다!' 흥, 그건 불변화사와 동사과거형에 숨이 막혀 죽지 않도록 소스를 쪽뿌려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그런 식이라면 난 호메로스에 아무 흥미도 느낄 수 없어. 대체 고대 그리스의 잡동사니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지? 우리 중에 누가 그리스식으로 살려고 시도만 해도 당장 쫓겨날걸." 87쪽

   한스가 갖고 있는 걱정과 소원이 그에게는 아예 없었다. 하일너는 그만의 생각과 말을 가지고 있었고, 남들보다 더 뜨겁고 더 자유롭게 살았다. 이상한 고민을 하며 괴로워하고, 주위 사람들을 다 경멸하는 듯했다. 또 오래된 기둥과 담장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자신의 영혼을 시로 표현하고, 상상으로 고유한 허구의 삶을 만들어내는 기묘하고 신비한 재주가 있었다. 명민하고 구속을 싫어하며, 한스가 1년 동안 할 농담을 매일같이 했다. 그는 우울했지만 자신의 슬픔조차 이국의 진기하고 귀중한 보물처럼 즐기는 것 같았다. 88쪽

   이런 생각을 가진 하일너와 가까워지면서 한스도 거기에 대해 생각해 보지만, 그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주목받는 것을 더 꿈꿨기 때문에 하일너와 함께한 시간만큼 더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러나 룸메이트 중 한 명인 힌딩거가 연못에 빠져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 한스에게 하일너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됩니다. 예전보다 더 하일너와 가까워지면서 한스의 성적은 점점 더 떨어지고, 모범생에서 문제아로 낙인 찍히고 맙니다. 그러다가 하일너가 퇴학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 또한 신경쇠약에 걸려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고 가장 위태로운 소년 시절에 왜 한스는 날마다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했을까? 왜 그의 토끼를 빼앗고, 왜 라틴어 학교에서 동급생들을 일부러 멀리하게 만들고, 왜 낚시를 금지하고, 왜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고, 왜 하찮고 소모적인 명예욕을 추구하겠다는 공허하고 세속적인 이상을 그에게 심어주었을까? 왜 시험이 끝나고 힘들게 얻은 방학 때조차 푹 쉬게 하지 않았을까? 141쪽

   고향으로 돌아온 한스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산책 등을 하면서 쉽니다. 때마침 "곤경과 고독 속에서 다른 유령이 병든 소년에게 다가와 점점 친숙해졌고 꼭 필요한 존재"(147~148쪽)가 됩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자살이라는 확실한 목표가 생기자 한스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래서 그동안 피했던 마을 사람들과도 어울리게 되는데, 이때 만난 '엠마'라는 소녀가 그를 다시 살고 싶게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엠마는 소년의 마음을 기만하고 떠나버립니다.

   한스는 어쩌면 너무 일찍 사랑의 비밀을 맛보았다. 그것은 살짝 달콤하고, 많이 썼다. 190쪽

   한스가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것 같기도 하고, 더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한스의 아버지는 한스에게 기계공과 서기 중에 선택하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했지만 라틴어 학교 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아구스트가 기계공으로 일하고 있어서 그에게 물어봅니다. 아우구스트는 체력적으로 만만한 일은 아니지만 머리도 좋아야 하니 같이 해보자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스는 생각지도 않았던 수습공이 됩니다.

   …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고생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땀흘렸는데, 작은 즐거움을 그렇게 많이 포기하고, 그렇게 자부심과 명예욕을 느끼고 희망에 부풀어 꿈을 꾸었는데 모두 허사가 된 것이다. 지금 다른 동료들보다 늦게, 모든 사람의 비웃음을 사며 가장 낮은 수습공으로 작업장에 들어가려고 그 모든 일을 했단 말인가! 191쪽

   한스는 생전 처음으로 노동의 찬가를 듣고 또 이해했다. 그 찬가는 최소한 초보자에게는 감동을 주었고, 기분 좋게 취하게 만들었다. 한스는 자신의 작은 존재와 인생이 커다란 리듬 속에 들어가 어우러지는 것을 느꼈다. 196쪽

   몇 달 만에 다시 일요일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평일에 손이 시커멓게 되고 팔다리가 노곤하도록 일을 해야 일요일에 거리가 더 축제 분위기로 들뜨고, 태양이 더 환하게 빛나고, 모든 것이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다. 199쪽

   인생을 알고 즐길 줄 아는 사람들과 같이 술집에 앉아 그래도 되고 그럴 자격도 있는 사람처럼 일요일을 즐겁게 보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206쪽

   기계공 일을 시작한 처음에는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자괴감이 들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노동의 기쁨과 즐기는 인생의 즐거움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일요일 밤에 아우구스트를 비롯한 기계공 동료들과 함께 술을 마신 후 혼자 집으로 돌아오다가 물에 빠져 쓸쓸하게 죽습니다.

   아버지가 그토록 혼을 내려고 별렀던 한스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시커먼 강물을 따라 조용히 골짜기 아래로 천천히 떠내려가고 있었다. 구역질도 수치심도 괴로움도 모두 그를 떠났다. 푸르스름하고 차가운 가을밤이 어슴푸레 떠내려가는 그의 여윈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커먼 강물이 그의 손과 머리카락과 창백한 입술을 어루만지며 장난쳤다. 날이 밝기 전에 사냥을 하러 나온 겁 많은 수달이 그를 흘낏 쳐다보고는 미끄러지듯 그 결을 스쳐지나갔을 뿐,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그가 어떻게 물에 빠졌는지 아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어쩌면 길을 잃고 헤매다 가파른 곳에서 미끄러졌을지 모른다. 어쩌면 물을 마시려다가 삐끗 균형을 잃었을 수도 있다. 혹은 아름다운 강물에 홀려 몸을 숙였다가 평화와 깉은 안식이 가득 깃든 밤과 창백한 달을 보고, 피로와 두려움의 조용한 강요에 떠밀려 죽음의 그늘에 빠졌을 수도 있다. 213~214쪽

   소년은 한창 꽃필 시기에 갑자기 뚝 꺾여 즐거운 인생길을 벗어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버지도 피로와 외로운 슬픔에 젖어 아들이 살포시 미소 짓고 있다는 행복한 착각에 빠졌다. 214쪽

   그렇게 한스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고, 하고 싶어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말입니다. 그의 죽음이 실족사였는지, 자살이었는지도 알 수 없고, 심지어 그가 눈을 감을 때는 그의 곁에 아무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누구를 위해 살았던 것일까요? 어쩌면 자신을 위해 스스로 눈을 감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들이 살포시 미소 짓고 있었다는 말이 내심 마음에 걸립니다.

   헤르만 헤세 또한 고향에서 촉망받던 소년이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도망쳤고, 열다섯 살에는 자살까지 시도했습니다. 한스 기벤라트는 작가 자신이었고, 헤르만 하일너는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과 행동을 했던 캐릭터가 아니었을까요. 『수레바퀴 아래서』는 분명 1906년에 발표된 소설인데, 지금의 우리 교육 현실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서 놀라울 정도입니다.

   자, 이제 당신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는 것들을 떠올리고 대면해 보세요. 수레바퀴 아래 깔리지 않도록, 즐거운 인생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말이죠.

   "친구, 아무튼 지치면 안 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고 말 테니까." 119쪽

   누구에게나 빛나는 멋진 나날이었다.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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