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동산 열린책들 세계문학 22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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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비극 배우
   거리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계절입니다. 화사하게 폈다가 이내 떨어져버리는 벚꽃이 아쉬워서 체호프의 『벚꽃 동산』을 펼칩니다. 그런데 체호프의 '벚꽃 동산' 역시 봄날은 아닙니다.

   류보비 안드레예브나 오, 나의 순수한 어린 시절! 바로 이 어린이 방에서 잠을 자며 또 여기서 동산을 바라보았지. 아침이면 행복에 젖어 잠에서 깨곤 했어. 그때도 동산은 이랬어,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기뻐 웃으며) 정말 온통, 온통 하얘! 오, 나의 동산! 어둡고 음산한 가을과 추운 겨울을 겪고도 너는 다시 젊고 행복에 넘치는구나. 242쪽

   한때 「벚꽃 동산」은 파란 하늘 아래 하얀 꽃들이 펼쳐진 '정말 아름다운 동산'(243쪽)이었지만, 지금은 빚 때문에 경매에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이 벚꽃 동산의 여지주, 라네프스까야 류보비 안드레예브나─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이름─에게 '벚꽃 동산'이란 아름답고 풍요로웠던 과거의 상징 같은 곳입니다.

   로빠힌 당신의 벚꽃 동산은 빚 때문에 팔리게 되어, 돌아오는 8월 22일 경매에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시고, 안심하고 주무십시오. 벗어날 방법이 있으니까요······. 내 방안은 이렇습니다. 잘 들어 보시죠. 당신의 영지는 시내에서 20베르스따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바로 옆에는 철도가 나 있고. 만일 벚꽃 동산과 강가의 땅을 별장 용도로 분할해서 임대한다면, 1년에 적어도 2만 5천루블을 벌 수 있을 겁니다. (······) 아무 쓸모도 없는 이 집을 비롯한 낡은 건물들은 모두 철거해 버리고, 시대에 뒤떨어진 벚꽃 동산도 벌목해야겠지요······.

   류보비 안드레예브나 벌목? 오, 맙소사,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이 지방에 뭔가 흥미로운, 아니 멋진 것이 있다면 그건 오직 우리 벚꽃 동산뿐이랍니다. 237쪽

   그녀는 상인 로빠힌이 '벚꽃 동산'을 계속 소유하려면 그저 보는 것이 아닌 돈을 벌 수 있는 별장 등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할 때도 듣지 않습니다. 게다가 여전히 씀씀이는 커서 돈을 아낄 줄도 모르고, 집으로 밴드를 초대해 파티까지 엽니다. 당연히 그녀의 벚꽃 동산은 경매에 붙여지고, 상인 로빠힌이 이 '벚꽃 동산'을 사게 됩니다.

   로빠힌 아, 하느님, 벚꽃 동산은 나의 것입니다! (······) 나의 아버지, 나의 할아버지가 무덤에서 일어나 이 일을 모두 보신다면, 매나 맞고 배우지도 못한 예르몰라이가, 겨울에도 맨발로 뛰어다니던 바로 그 예르몰라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지를 산 것을 보신다면······. 나는 아버지, 할아버지가 농노로 지냈던, 부엌에조차 들어가지 못했던 바로 그 영지를 샀습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겁니다. 287쪽

   하루종일 아무일도 하지 않은 채 돈이나 쓰며 방탕한 생활을 하는 지주네 사람들과는 달리, 상인 로빠힌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벌어서 모은 돈으로 '벚꽃 동산'을 산 것입니다. 그는 지주네 사람들을 "경솔하고 비현실적이고 기이한 사람들"(256쪽)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로빠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당신들과 떠들어 대는 것도 이제는 괴롭군요. 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빈둥거리는 두 손이 마치 남의 손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291쪽

   로빠힌 피곤한 줄도 모르고 오랫동안 일을 할 때면, 마음이 가벼워져서 내가 왜 존재하는지 알 것 같소. 그런데 이 러시아에는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293쪽

   '벚꽃 동산'은 상인에게 넘어가고 지주네 사람들은 모두 '벚꽃 동산'을 떠납니다. '벚꽃 동산' 또한 곧 벌목이 되겠죠. 이렇게 막을 내린 희곡을 작가 체호프는 '코미디'라고 주장합니다. 결말은 비극적이지만, 각각의 상황들과 그 상황들을 만들어내는 인물들은 웃음을 쏟아내게 합니다.
   희곡이라는 장르답게 인물들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지만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한다거나 엉뚱한 대답을 해 제대로 연결되지 못합니다. 이 또한 웃음을 만들어내는 요소인데, 이런 대화들은 『벚꽃 동산』에 실려있는 6편의 희곡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체호프의 희곡에서 인물들은 서로 진정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횡설수설에 가까운 불필요한 대사들이 행위의 진행을 방해하여 집중된 대화체가 낳는 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체호프의 인물들은 대화를 나누는 듯하지만 독백하고 있는 것이다. 역자 해설_309쪽

   『벚꽃 동산』에는 표제작인 「벚꽃 동산」을 포함해 모두 6편의 단·장막극이 실려있습니다.
   이웃집 아가씨에게 「청혼」을 하러 갔다가 사소한 일로 아가씨와 싸우는 남자,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의 어려움을 친구에게 하소연하고 있는데 똑같은 일을 부탁하는 친구 때문에 미칠 것 같은 「어쩔 수 없이 비극 배우」, 중요한 「기념일」에 정성껏 준비해 온 연설을 하려고 하는데 사람들 때문에 기침을 하며 연설을 중단해 버린 대표, 사랑하는 여자에게 총으로 쏴 잡은 「갈매기」를 준 극작가, 죽은 누이의 남편이 아내로 맞이한 여자를 사랑한 「바냐 아저씨」, 그들도 역시 비극적인 상황을 코미디처럼 살아가는 인물들입니다. 어쩔 수 없이 비극 배우인 셈이죠.

   체호프는 반드시 읽어야 할 작가이다.
   그는 우리를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예술가이다. ─ 수전 손택

   체호프는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 작가이다. ─ 레이먼드 카버

   현대의 단편소설은 체호프를 통해서 양식과 주제를 습득했고, 현대의 연극은 체호프의 극적 스타일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작가들이 그에게 바친 헌사는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글은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오히려 지금 이 시대에 쓰여진 것처럼 세련됐습니다.
   이런 봄날의 체호프,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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