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크눌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노은 옮김 / 민음사 / 2004년 11월
평점 :
헤르만 헤세가 '아끼고 사랑하는 인물'이라고 소개한 크눌프는 안정적인 삶 대신 평생 여행하며 돌아다니는 고독한 방랑자입니다.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지역 어느 도시든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줄 곳은 쉽게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 점에 대해 그가 느끼는 자부심은 특별해서, 만일 누구든 그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면 그것을 일종의 영예로 여겨야 할 정도였다. 7쪽
크눌프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지는 그를 대하는 친구들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발길이 닿는 곳마다 친구들이 있었고, 그 친구들은 그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기꺼이 내어주면서도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크눌프는 예의 바르고, 밝고, 사랑스럽고, 재주가 많은 사람이라 그가 별 도움을 주지 않더라도 친구들은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합니다. 그 또한 그런 친구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기 때문에, 무두장이 친구의 부인이 그에게 호감을 표현하자 서둘러 친구의 집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천성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따라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을 자신의 친구로 삼았으며, 모든 소녀들과 여인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매일매일을 일요일처럼 살았다. 사람들은 그가 자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계속해서 살아가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좋지 않은 상황에 빠져 피난처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생길 때, 그를 맞이해 들이는 것은 기쁨이자 영광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집을 즐겁고 밝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히려 그에게 감사해야할 정도였다. 31~32쪽
평생 이렇게 여행하며 즐겁게 살 줄로만 알았던 크눌프도 나이가 들고 폐결핵에 걸리자 그 빛을 조금씩 잃어갑니다. 이런 그에게 의사 친구 마홀트가 말합니다.
"이 친구야, 자네가 고향에서 계속 살면서 열심히 일하고 아내와 자식도 얻고, 또 매일 밤 편안한 잠자리를 가졌더라면, 아마도 자네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야." 125~126쪽
과연 그랬을까요? 크눌프는 죽기 전 마지막 여행지로 선택한 고향 땅에서 목적도 없이 계속 돌아다니면서, 생각 속에서 거의 언제나 하느님 앞에 서서 끊임없이 그 분과 대화(129쪽)를 나눕니다.
하느님과 크눌프는 그의 삶이 무의미했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달라질 수 있었는지, 또 이런저런 일들이 왜 그런 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했다. 130쪽
크눌프가 평생 떠돌아 다니기만한 자기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하느님은 그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적어도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를 만난 그 순간만큼은 즐겁고 행복했으며,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고마워하고 있으니까 그걸로도 의미있는 삶이 아니었냐고 말이죠.
"이 철부지야, 이 모든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가 근심 걱정 모르는 방랑자가 되어 이곳저곳에서 어린아이 같은 행동과 어린아이의 웃음을 전달해 주어야만 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니? 그래서 세상 곳곳의 사람들이 너를 사랑하기도 하고 조롱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너에게 고마워하기도 했다는 것을 모르겠니?" 133쪽
"그래, 넌 지금 신사가 되거나 기술자가 되어 아내와 아이를 갖고 저녁에는 주간지를 읽고 싶은 거냐? 넌 금세 다시 도망쳐 나와 숲속의 여우들 곁에서 자고 새 덫을 놓거나 도마뱀을 길들이고 있지 않을까?" 133~134쪽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조롱받았다. 네 안에서 바로 내가 조롱을 받았고 또 네 안에서 내가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자녀요, 형제요, 나의 일부이다. 네가 어떤 것을 누리든, 어떤 일로 고통받든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했었다." 134쪽
저마다 추구하는 삶과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는 다르기 때문에 따뜻하고 안정적인 삶 대신 평생 자유롭게, 또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주면서 산 크눌프의 삶도 그 나름대로 의미있는 삶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혼자 쓸쓸하게 아파하며 죽어야 했던 그의 삶이, 게다가 그 스스로도 의미있는 삶이었는지 의문을 가질 정도였다면, 혹여 누군가에게는 즐거움을 줬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에게는 진정으로 의미있는 행보였을까요?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크게 전쟁과 개인적인 아픔을 겪기 이전의 작품과 그 이후의 작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그 이전에 쓴 작품으로, 이후에 쓴 작품들보다 훨씬 쉽게 읽힙니다. 주제 또한 개인의 삶을 다루고 있어서 접근하기 쉽습니다.
오늘밤은 당신 차례예요. 사랑스러운 '크눌프'의 친구가 되어보세요!
"이보게, 재단사 친구, 자넨 성경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어. 무엇이 진리인지, 인생이 본래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는 각자가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자 결코 어떤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일세." 36쪽
누군가가 자신의 행복이나 미덕에 대해 자랑하고 뻐길 경우, 대부분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51쪽
모든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의 영혼을 다른 사람의 것과 섞을 수는 없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도 있고 함께 이야기할 수도 있고 가까이 함께 서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각자 자기 자리에 뿌리 내리고 있는 꽃과도 같아서 다른 영혼에게로 갈 수가 없어. 만일 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뿌리를 떠나야 하는데 그것 역시 불가능하지. 꽃들은 다른 꽃들에게 가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향기와 씨앗을 보내지. 하지만 씨앗이 적당한 자리에 떨어지도록 꽃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그것은 바람이 하는 일이야. 바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이곳 저곳으로 불어댈 뿐이지. 79쪽
아버지는 그의 자식에게 코와 두 눈과 심지어는 이성까지도 물려줄 수 있지만 영혼은 아니야. 영혼은 모든 사람들 속에 새롭게 존재하는 것이지. 80쪽
그 길고도 힘겹고 의미 없는 여행 내내 그는 어긋나고 뒤엉켜버린 자신의 삶 속에 깊이깊이 빠져들어갔다. 그것은 마치 질긴 가시덤불 속으로 빠져드는 것과 같았는데, 그는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나 위로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128~1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