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경이 이모는 우리 엄마와 20년도 넘도록 친구이다. 그 남편인 현철이 삼촌은 아빠와 친구이다. 아마 이쪽도 년수로 그와 맞먹을 것이다. 어떻게 짜고 만난 것도 아닌데 이런 재밌는 인연의 두 부부가 탄생한 것이다. 세상은 참으로 신기한 곳이다. 그런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다보니 그 집의 남매와 우리 자매가 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피로 이어진 사촌들보다 더 자주 부대끼며 살았으니 할 말 다 했다.
'그 집의 남매'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가족에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있다. 여자아이는 나보다 한 살 적은 경연이고, 남자아이는 우리 동생보다 한 살 많은 상욱이다. 경연이와 머리끄댕이 잡아당기며 싸우던 어린 시절 얘기는 나중에 쓰고 싶을 때 쓰도록 하고, 오늘은 상욱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쓰려고 한다. 결국 나랑 연관되는 이야기다.
박상욱. 그는 부산의 모초등학교 6학년 모반에 재학중인 귀여운 아이다...였으면 좋겠지만 어릴 때는 매우 귀여웠으나 이젠 징그럽다. 내 키가 153cm밖에 안 되다 보니 웬만한 초등학교 고학년생들은 나보다 키가 크지만, 고 쪼끄맣던 박상욱이 나보다 컸다는 건 용납이 안 된다. 흠흠, 아무튼 키에 대한 이야기도 나중에 하도록 하고, 계속 넘어가보자. 나는 어제 무지막지한 정보를 입수해서 꼴딱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 징그러운 녀석에게, 무려,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것이다. 여자친구? 여자친구? 천하의 '박상욱'이 '여자친구'를 만들어?
그런데 이런 맥아리 없는 녀석의 첫데이트기를 들어보니 가관이다. 우선 서면 롯데백화점에서 진여류전을 보고, (상욱이와 그 여자친구의 미술학원 선생님이 진여류회 일원이다.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고. 따라서, 이 전시회에는 우리 엄마의 그림도 있다.) 미니몰로 걸어서 갔다고 한다. 문제는 그 녀석의 길 걷는 방법이 내가 보기에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것이다. 40분 동안 길을 걷는데, 그 여자애가 계속 쫓아왔단다. 쫓아와? 왜 '쫓아'오지? 이유를 물었더니, 자기 걸음이 빨라서 그렇다나 어떻다나! 게다가 그 시간 내내 말을 거의 안 했다는 거다. 그럼 그 여자애는 계속 뒤로 쳐지면서 한마디 말도 안 하고 종종거리며 따라갔단 말인데, 그 동안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아무튼, 그렇게 걸어서 미니몰에 도착해서 둘이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사먹으면서 돌아다녔단다. 2만 5천원을 들여서 목걸이도 샀다고 한다. 어머, 목걸이를 사? 좋지, 목걸이 선물이라, 멋지네. 하지만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니 여기서도 문제가 보인다. 사긴 샀는데, 그 여자친구는 다른 거 보고 있으라고 계속 떼놓고, 몰래 샀다는 것이다! 이 더운 날씨에 그까지 40분동안 걸어가서, 아이스크림 하나 달랑 사주고 다른 거 보고 있으라면서 자긴 딴 데로 갔다는 말을 하는 것이여, 시방? 그래서 그걸 오늘 선물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랜다. 그러면서 수줍게 목걸이를 보여주네. 그럼 대체, 언제 선물할 건데... 한숨이 나왔다. 좋아, 그렇게 별 일 없는 서면 나들이를 마치고, 둘은 집으로 돌아왔단다. 그래, 니가 첫데이트니까 쑥쓰러워서 그랬겠지, 그래. 그래. 하면서 이해를 하려고 하고 있는데 내 귀에 들려오는 말이라니. 잘가라는 인사도 안 했다고!! 아니, 그렇게 애를 고생고생 시켜놓고, 작별인사 한 마디 안 했단 말이냐. 뚫린 입은 대체 어디다 써먹을 건데. 내가 다 안타까워서 고개를 푹 숙이고 이유를 물어봤다. 이유는 더 같잖다. "아니, 그때 버스에 우리 반 남자애들이 타고 있었단 말이야." ...나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이런 박력없는 놈같으니라고~
소심한 남동생을 가진 누나의 마음이 꼭 이와 같을 것이다. 거참... 여동생뿐인 나에게 새로운 감정-안타까움과 한심함과 복장터짐이 한데 어우러진-을 알게 해줘서 무지 고맙긴 한데, 그냥 평생 몰라도 되는 거 아니냐, 이런 느낌은.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 마구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갑자기 이거 상당히 낯익은 에피소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지, 이 희한한 데자뷰는…….
아아, 그랬다. 4학년때부터 중1때까지, 천일을 넘게 사귄 내 남자친구가 꼭 그런 소심쟁이였던 것이다. 하얗고 귀여워서 6학년 때 학교 아침방송으로 하던 반 장기자랑에서는 여장하고 신데렐라도 했던 그런 놈이 내 남자친구였다. (참고로 그 해 우리반 장기자랑에서는 내가 남장하고 흥부전을 각색한 '놀부전'의 놀부를 했다. 뭐냐ㅜㅜ) 그 애는 소심해서 항상 선물도 내가 먼저 했고, 약속도 내가 먼저 잡고, 전화도 내가 먼저 했다. 우리의 첫데이트라... 길을 같이 걸었고, 말도 했다는 건 좀 다르지만 비슷한 분위기였다. 쭈뼛쭈뼛한. 내가 말도 시키고, 천천히 걸으라는 말도 하고 해서 그렇지, 위의 여자애와 같이 그저 말없이 뒤따라 걷기만 했다면 똑같은 짝 났을지도 모른다. 아, 그런 애가 남자친구였더랬지.
하지만 나는 소심해도 그 애가 좋았다. 소심하지만 나한테 고백할 용기가 있었고, 데이트신청도 할 줄 알았다. 내 생일날 선물을 놓고 나왔다고 점심시간에 자기 집까지 뛰어갔다 오기도 했다, 선생님 허락을 안 받고 나간데다 늦게 들어왔기 때문에 한시간 내내 꿇어앉아 벌 서긴 했지만. 밤바카 운전도 능숙했고, 내가 미술시간에 벼루를 떨어뜨려 먹물을 다 쏟았을 때 너는 가만히 있어도 된다며 전부 치워주는 배려도 할 줄 알았다. 언제나 그 애와 있으면 가슴이 뛰었다. 말이라도 할라치면 얼굴이 새빨개지는 그 모습에 나도 전염돼서 그랬을런지도 모르지만. 많이 좋아했다. 귀엽게 입술을 깨물면서, 또 새빨개져서는 날 좋아한다고 말한 그 모습에 넘어갔을 뿐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옛날 생각이 나자 픽 웃음이 같이 나왔다. 어쩌면 상욱이의 그런 어리버리하고 소심한 모습까지, 그 여자애는 좋아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듣고있으면 속터지는 얘기지만, 속이 터지는지 어떤지는 당사자들만 알겠지. 상욱이는 그 애한테 푹 빠진 것 같다. "날 졸졸 따라오는 모습이 강아지 같더라~ 너무 귀여웠어~"라고 말하는 것하며, 받아줄 그 모습을 상상이라도 하는지 목걸이를 쳐다보며 계속 히죽대는 모습하며. 그 여자친구는 어떨지 몰라도, 그 애가 나같았으면 좋겠다. 나처럼, 상욱이를 많이 좋아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