行軍九日思長安故園
잠삼(岑參 715-770당 南陽人)

强欲登高去
無人送酒來
遙憐故園菊
應傍戰場開

군중에서 중양절을 맞아 고향 장안을 생각하며

등고하러 가고픈 마음이야 많지만
술 한 잔 보내는 이 없구나
아득타 가련한 고향의 국화는
전쟁터를 따라 피어 있겠지

중국인들은 음력 9월 9일을 중양절(重陽節)이라고 해서 큰 명절로 여기고  온 가족이 높은 산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셨다.

시인은 지금 안록산의 난으로 군중에 있으면서 전쟁터가 되어 버린 고향 장안을 생각하는 것이다. 등고, 술, 국화 이런 것은 바로 중양절하면 생각나는 것인데 지금 자신에게 술을 보내는 가족도 없다. 가족과 친구가 있는 고향 장안에 대한 그리움을, - 어쩌면 지난해만 해도 국화주를 담느라고 형제들과 함께 따고 보고 했을 터이지만, 이제는 전란으로 인해 그저 쓸쓸히 피어 있을 - 국화를 상상해 보는 것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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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枝詞
              鄭文寶

亭亭畵舟+可系春潭
只待行人酒半酒+甘 
不管烟波與風雨
載將離恨過江南

이별의 노래

높다랗게 솟은 유람선 봄 못에 매인 채
떠날 이 거나하게 취하길 기다리네
안개와 파도 바람과 비 아랑곳없이
이별의 한을 싣고 강남을 지나가리

유지사(柳枝詞)는 악부(樂府)의 곡조 이름이다.

얼마전부터 한 손에 들어갈 만한 수진본(袖珍本 소매속의 보배라는 뜻으로 손에 휴대하고 다니며 볼 수 있게 만든 책을 말함) 송시삼백수(宋詩三百首)를 들고 다니며 보고 있는데 이 시의 승구(承句) 첫 두 글자가 해석이 안되었다. 그 판본에는 직도(直到)라고 되어 있었던 것, 이제 다른 책을 구입해서 주석을 참고해 보니 '直到' 대신에 '只向'이나 '只待'라고 되어 있었다. 그제서야 그 구절의 '直'자가 '다만 직' 자인 줄 알겠다. '直到' 자체로는 무엇을 하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다'라는 뜻이므로 잘 해석이 안되었던 것이다.

버드나무는 이별을 상징하는 도구이고 첫 구의 '系' 자에 떠나는 이를 만류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져 있다. 그래서 당연히 첫 구에 배가 매인 것은 버드나무일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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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수록한 3편의 시도 전에 다른 카페에 올린 것인데 이곳에도 실어 보았다.  

앞으로 이곳에다 한 시 번역을 틈틈히 해서 올릴까 생각 중이다.

공부하다 짬잠이 틈나는대로 한수씩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퇴근길에  화문서적에 들러 송시 관련 주석서를 몇 권 사 가지고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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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날, 그리고 忙中閑

계절은 봄이다. 그동안 한 달 정도 아주 바빴는데 이제 좀 여유가 생긴다. 한 3시 쯤에 일을 끝내고 있노라니 마음 한 켠에서 잠자고 있던 思며 愁며 慕, 이런 감정들이 가지를 치고 뻗어 오르며 봄물이 오른다. 이럴 때 예쁜 아가씨가 전화라도 한 통화 한다면 지체없이 달려 나가련만... 나의 옥체(玉體-이해하기 바란다.^^)에는 좀이 쑤신다. 가슴은 답답하다, 바람을 쐬어 다오, 눈은 제발 보여 다오 영화를, 목구멍은 마셔다오 맥주를, 손은 만져다오 보드랍고 싱싱한 것을(오해 없기 바람, 오해해도 그만이고...오해가 아닌지도 모른다.), 하며 성명서를 발표하고 곧 실력 행사로 들어갈 태세이다.

중여동에 들어가 보니 한 바탕 격전이 쓸고 간 자리가 황량하다. 좋은 방향으로 정리되리라 본다. 인사만 하고 가기도 뭐해 시를 한 수 소개해 볼까 한다.
한시에는 영물시(詠物詩)라는 게 있다. 영사시(詠史詩)가 역사 사실을 읊는 것이라면 영물시는 말 그대로 특정한 사물을 읊는 것인데 매미, 대나무 난초 , 벼루 등등 무수히 많다.
오늘은 기러기를 읊은 시 한 수를 소개 할란다.

歸雁


錢起


瀟湘何事等閑回요?


水碧沙明兩岸苔라


二十五絃彈夜月에

 
不勝淸怨却飛來라

돌아가는 기러기

소상강에서 무슨 일로 그냥 돌아가는가
물 푸르고 모래 맑으며 양 안에 이끼도 많은데
이십오현금 타는 달 밤
애절한 사연 듣다 못하여 돌아간다오


기러기는 고래로 시의 소재로 무수히 쓰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기러기는 계절을 알리기도 하고 소식을 전해 주기도 하는 등, 상징들이 있기 때문이다. 잉어를 삶으려고 보니 고깃뱃속에서 편지가 나왔고 기러기 발에 편지를 묶어 천자에게 알린 일이 있어 어안(魚雁)이라고 하면 서신(書信), 즉 편지의 의미로 쓰이게 됨에 따라 옛날 편지글에 보면 어안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이 기러기가 등장하는 시는 대개 가을을 배경으로 하다보니 나그네의 우수를 담지하는 표현물로 잘 등장하는데 왕발의 등왕각 서나 율곡 선생의 화석정 시에 나오는 것들도 다 그런 시적 장치인 셈이다.

전기의 이 시는 기러기가 가지는 상징성을 아주 풍부히 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시로 생각된다. 지난 번에 중국 여행갈 때 사실 이 시의 배경이 된 회안봉(回雁峰)에 가 보려 했었다. 회안봉은 형양에 있는데 기러기가 이 회안봉에서 북으로 다시 돌아가기 때문에 회안봉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다. 나는 처음에 막연히 형산(衡山)의 한 봉우리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기차에서 만난 우체국 공무원들이 나에게 회안봉은 형양에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 중 한 사람은 어린 시절 회안봉 아래에서 자랐다고 나에게 말했었다. 말하자면 천우신조하여 손쉽게 회안봉을 가 볼 수 있었는데 동정호에서 카메라를 분실하는 통에 여행 일정에 차질이 생겨 가 보지 못하고 말았다. 형산도 듣던 것과는 달리 현지인들은 퍽 아름답다고 하니 다음에 다시 기회를 내서 꼭 가볼 작정이다.

소상강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아주 길다. 그래서 다 생략한다. 다만 아황(娥皇)과 여영(如英)의 고사는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요 임금의 딸로 순임금에게 시집갔는데 순임금이 남방 시찰을 나갔을 때 뒤 따라 가다가 태풍을 만나 동정호에 있는 군산(君山)에 피신해 있었다. 후에 순임금이 창오산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대나무를 붙들고 울었는데 그 눈물 때문에 대나무에 얼룩이 생겨 반죽(班竹)이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지난 번에 이곳에 갔다가 무한한 감회에 젖었었다. 조만간 여행기에서 소개할 작정을 하고 있다. 이 두 비를 그래서 상비(湘妃)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여신이 되어 비파를 탄다는 고사가 또 있다.

그러니 이 시는 회안봉을 전혀 얘기 하지 않지만 그 이면에는 회안봉이 깔려 있고 기러기가 돌아가는 것은 날씨가 따뜻해져 북쪽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두 비의 슬픈 마음이 담긴 애절한 비파 곡조를 이기지 못한여 돌아간다고 표현한데서 그 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구에서 물이며 모래, 이끼 등 기러기가 살기 좋은 환경을 제시하여 더욱 그러한 이유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수법들은 고금과 동서를 막론하고 많이 쓰이는 것이지만 문학의 기본적인 사유방식이기도 하다. 다음에 언제 회안봉에 가서 저녁 무렵 술 한 잔 하며 이런 문학 얘기도 하고 그랬으면 좋겠다. 지난 번 동관 집에 갔을 때 이 시를 찾지 못했는데, 요즘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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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題德山溪亭

   曺植


請看千石鍾


非大扣無聲

爭似頭流山

天鳴猶不鳴

덕산의 시냇가 정자에 쓰다

천석 무게의 종을 보시게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네
허나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두류산만 하겠는가

이 시는 남명(南冥) 선생이 공부하던 지리산 자락 산천재(山天齋)에 가면 입구에 붙어 있다. 정확한 제목은 제덕산계정(題德山溪亭)이라고 한다. 내가 꼭 10년 전에 그곳에 가서 서원에서 만난 선생님으로부터 이 시에 대한 설명을 처음으로 듣던 기억이 새롭다. 그 당시 방학 때 그 근처 서원에서 공부를 했는데 답사차 온 것이다. 그 후로는 작년 봄에 한 번 더 가 보았는데 문화재 보수를 한다며 주변이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우선 길이 산천제에 너무 바싹 붙었고 앞의 공터도 많이 훼손된 기억이 난다.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것은 그 문화재에 깃든 정신적인 유산을 잘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목표로 하다 보니 문화재 보호라는 말이 역설적으로 들리는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남명은 경(敬) 과 의(義) 를 숭상하고 실천 궁행한 유학자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당시 경상 좌도에서 역시 제자를 기르며 성리학 연구에 몰두 하던 퇴계(退溪) 이황(李滉)과는 학풍을 사뭇 달리 하였다. 둘 다 1501년 생이니 기억하기도 좋은데, 당대의 양 거목이었던 셈이다.  남명의 실천궁행은 정인홍이나 곽재우 같은 걸출한 의병장이 그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된 것으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너무 가볍게 산다 싶으면 이런 고인들이 생각나 잠시 반성을 하고 마음을 다잡으며 숨을 고르곤 한다.

이 시는 부동심(不動心)이랄까,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처사로 일관한 남명의 삶을 잘 보여주는 시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시를 평소에 알고 있다가 덕산(德山)이라고 선생이 표현한 것처럼 혼후하고 장중한 지리산에 가거든 한 번 생각해 보면 더욱 뜻이 깊지 않을까 싶다.

오언 시는 대개 2/3으로 끊어지나 이 시의 둘 째 구는 3/2로 끊어서 크게 치지 않으면, 이렇게 해석해야 자연스러울 것이다.

세번 째 구절에 爭似라는 말이 좀 생소한데, 爭은 어찌,라는 뜻이고, 似는 ~와 같다. 그래서 합치면 어찌~만 하겠는가?, 라는 뜻으로 하사(何似)와 같은 뜻이 된다. 하사(何似)는 한시에 흔히 쓰이는 표현이지만 쟁사(爭似)는 평생 몇 번 못 만날 것 처럼 그리 흔치 않은 표현이다. 대개 ~爭似~ 형태로 쓰여, ~가 어찌 ~만 하겠는가? 이런 의미이다. 즉 억양을 넣어 강조하는 표현이 되는 셈이다.  이 시의 후반부는 직역하면, 어찌 두류산이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것만 하겠는가, 이런 의미인데, 한문은 주어가 앞으로 나오는 습성이 있으므로 우리말 어순으로 배열하면 그것을 뒤집어 어찌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두류산만 하겠는가, 라는 번역이 나오는 것이다.

사실 천석무게의 종만 해도 그 침묵의 깊이는 가늠하기 어려웁건만, 남명은 늘 지리산을 마주하며 호연지기를 길러서인지 천석 무게의 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지리산의 장중미를 깊이 체화하려고 했나 보다. 선생의 깊은 학문 세계를 어찌 그 담장 안이나 엿볼 수 있을까만 이 시 한 수만으로도 넉넉하고도 듬직한 선생의 풍도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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