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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정원
위치우위 지음, 유소영 외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이 글을 읽는 내내 나는 맛있는 과일을 씹는 것 같은 은은한 단맛을 만끽했다. 일년 전 겨울에 읽었던 저자의 <중국문화답사기>에서 맡은 깊은 향기를 다시 한 번 느껴보려고 이 책을 샀는데 일이 바빠 서가에 그냥 꽃아 두었다. 황제가 찾지 않는 궁궐의 궁녀처럼 외롭게 지내고 있던 이 책을 그저께 밤에 무심코 집어들어 몇 장 보다가 어제 오늘에 걸쳐 다 읽게 되었다. 역시 문화사학자라는 별명이 붙은 저자의 글답게 품격과 향기가 있었다.
11편의 산문에 녹아 있는 역사와 문화 그리고 문학, 인생, 이런 것들이 그의 예사롭지 않은 사유 속에 누에고치처럼 잘 직조되어 부드러우면서도 윤택한 빛을 띠고 있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는 중국의 유서 깊은 지명과 그 지명에 얽힌 사연, 그리고 인물 이런 것이다. 다만 과거제와 소인을 다룬 것은 여행과는 관련이 적고 수필의 형식을 띤 논문같은 글이다.
청대의 피서산장인 승덕에서 건륭, 옹정. 강희제의 얘기를 풀어가고, 간도 약간 북쪽에 있는 영고탑에서는 유배 문화를 말한다. 그리고 발해의 상경용천부에서는 고대 도시의 몰락을 추억한다. 상인들의 얘기를 다룬 산시의 핑야오 역시 마찬가지이다.
황주를 얘기하면서 소동파가 참소로 유배를 간 이야기를 다룬 글은 너무도 깊은 인상이 남는다. 한 문학가가 질투와 시기로 인해 곤경에 빠지지만 결국 빛나는 재능과 인품은 새로운 차원으로 자신을 옥처럼 다듬는다는 내용이다. 그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문장 한 구절을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성숙이란 밝지만 눈을 자극하지 않는 빛과 같다. 또한 그것은 풍부하면서도 귀에 질리지 않는 음악이거나 더 이상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침착함, 주위에 더 이상 호소를 하지 않아도 되는 당당함, 법석에 동요하지 않아도 되는 미소, 극단을 떨쳐 버린 담담한 태도, 떠벌일 필요 없는 넉넉함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파르지 않은 고도(高度)와 같은 것이다. ---
이 책의 원제는 산거필기(山居筆記)인데 번역자가 <천년의 정원>으로 하였다. 악록서원과 그곳에서 토론 강의를 한 장식, 주자의 얘기와 함께 교육의 문제를 거론한 이 글은 참 강한 인상을 남긴다.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안타깝다는 말밖에… 역자와 나의 안목의 일치에 놀라는 한 편 뒤이어 미소가 번져 나온다. 지난 여름에 악록 서원과 두목의 유적지인 애만정에 가지 못한 것이 퍽 아쉬었는데 이렇게 좋은 글 속에서 악록서원을 만나다니! 이번 겨울이나 내년 봄에 꼭 가볼 작정이다. 작자의 고향인 위야오에 대해 쓴 글도 퍽 감동적이다. 엄자릉, 왕양명, 황종희, 준순수의 고향이 다 위야오라니! 여기도 한 번 가봐야지. 하이난 섬을 다룬 얘기도 좋았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 한 편의 글에 저자의 사유가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며 풀어져 있다는 것을 느끼는데 읽는 중간 중간 음미할 맛이 나는 아름다운 문장과 한 번 책을 덮고 생각에 잠기에 하는 내용이 있다.
중국어를 좀 더 열심히 해서 원전을 구해 읽어볼 작정이다. 틀림없이 원전에서는 예술적인 심미안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그의 아름다운 글을 만나리라 생각한다. 번역도 잘 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시 번역이 좀 미진하고 한문 고사 처리가 약간 불안한 게 흠이랄까.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저자의 다른 글을 구해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