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德山溪亭

   曺植


請看千石鍾


非大扣無聲

爭似頭流山

天鳴猶不鳴

덕산의 시냇가 정자에 쓰다

천석 무게의 종을 보시게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네
허나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두류산만 하겠는가

이 시는 남명(南冥) 선생이 공부하던 지리산 자락 산천재(山天齋)에 가면 입구에 붙어 있다. 정확한 제목은 제덕산계정(題德山溪亭)이라고 한다. 내가 꼭 10년 전에 그곳에 가서 서원에서 만난 선생님으로부터 이 시에 대한 설명을 처음으로 듣던 기억이 새롭다. 그 당시 방학 때 그 근처 서원에서 공부를 했는데 답사차 온 것이다. 그 후로는 작년 봄에 한 번 더 가 보았는데 문화재 보수를 한다며 주변이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우선 길이 산천제에 너무 바싹 붙었고 앞의 공터도 많이 훼손된 기억이 난다.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것은 그 문화재에 깃든 정신적인 유산을 잘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목표로 하다 보니 문화재 보호라는 말이 역설적으로 들리는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남명은 경(敬) 과 의(義) 를 숭상하고 실천 궁행한 유학자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당시 경상 좌도에서 역시 제자를 기르며 성리학 연구에 몰두 하던 퇴계(退溪) 이황(李滉)과는 학풍을 사뭇 달리 하였다. 둘 다 1501년 생이니 기억하기도 좋은데, 당대의 양 거목이었던 셈이다.  남명의 실천궁행은 정인홍이나 곽재우 같은 걸출한 의병장이 그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된 것으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너무 가볍게 산다 싶으면 이런 고인들이 생각나 잠시 반성을 하고 마음을 다잡으며 숨을 고르곤 한다.

이 시는 부동심(不動心)이랄까,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처사로 일관한 남명의 삶을 잘 보여주는 시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시를 평소에 알고 있다가 덕산(德山)이라고 선생이 표현한 것처럼 혼후하고 장중한 지리산에 가거든 한 번 생각해 보면 더욱 뜻이 깊지 않을까 싶다.

오언 시는 대개 2/3으로 끊어지나 이 시의 둘 째 구는 3/2로 끊어서 크게 치지 않으면, 이렇게 해석해야 자연스러울 것이다.

세번 째 구절에 爭似라는 말이 좀 생소한데, 爭은 어찌,라는 뜻이고, 似는 ~와 같다. 그래서 합치면 어찌~만 하겠는가?, 라는 뜻으로 하사(何似)와 같은 뜻이 된다. 하사(何似)는 한시에 흔히 쓰이는 표현이지만 쟁사(爭似)는 평생 몇 번 못 만날 것 처럼 그리 흔치 않은 표현이다. 대개 ~爭似~ 형태로 쓰여, ~가 어찌 ~만 하겠는가? 이런 의미이다. 즉 억양을 넣어 강조하는 표현이 되는 셈이다.  이 시의 후반부는 직역하면, 어찌 두류산이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것만 하겠는가, 이런 의미인데, 한문은 주어가 앞으로 나오는 습성이 있으므로 우리말 어순으로 배열하면 그것을 뒤집어 어찌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두류산만 하겠는가, 라는 번역이 나오는 것이다.

사실 천석무게의 종만 해도 그 침묵의 깊이는 가늠하기 어려웁건만, 남명은 늘 지리산을 마주하며 호연지기를 길러서인지 천석 무게의 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지리산의 장중미를 깊이 체화하려고 했나 보다. 선생의 깊은 학문 세계를 어찌 그 담장 안이나 엿볼 수 있을까만 이 시 한 수만으로도 넉넉하고도 듬직한 선생의 풍도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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