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래 전부터 빛은 전능한 신의 중요한 개념이자 이미지 중 하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의 광휘를 받아 지속되는 세상에 대해 얘기했으며 빛의 신성함은 성당을 장식할 스테인드글라스의 예술적 변용을 가져왔다. 어둠은 그 대척점으로써 두려움이고 미지였다. 그래서 전기가 발명되고 빛이 인간의 손에 들어온 순간은 신학적으로도 의미심장하다. '광휘'를 마음대로 다루게 된 다음, 과연 절망은 사라졌는가.
2.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오는 어느 날, 그녀는 아들과 함께 스스로 밀양으로 내려간다. 그곳을 택한 이유는 자신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어서이다. 그러나 밀양은 좁은 도시다. 대로를 따라 걸어서 한시간 내외로 동네를 휭하니 둘러볼 수 있으며 그 시간동안 아는 사람을 서넛은 볼 수 있다. 그녀는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있는 곳을 원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온동네 사람들이 그녀를 알게되며 그래서 그녀의 비밀은 새어나가고 비극이 닥쳐온다.
타자들 안에서 타자가 된 신애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불안해보인다. 그녀는 뻘쭘해하고 서있거나 머뭇거리고 서성거린다. 그리고 자주 비틀거린다. 그녀는 그녀에게 가해지는 노골적인 종교 권유에 당혹해하고 자신을 흉보는 뒷담화를 듣게된다. 그녀는 조금씩, 지친 자신이 선택한 곳이 자신에게 모종의 쉼터가 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아간다. 그곳은 애초에 그녀의 헛된 욕망의 흔적으로 인해 선택된 곳이었기에.
3. 중요한 것은 고통이다. -이창동. "이창동의 <밀양> ② 이창동 감독, 영화평론가 허문영 대담" 씨네21 No.602
4. 그녀는 아들의 장례식 때 울지 않고 그 때문에 시어머니에게 비난받는다. 그녀의 오열은 뒤늦게서야 터져나오며 그 결과로 그녀는 기독교라는 틀에 자신을 맡긴다. 거기까지 이뤄지기까지의 그녀가 보여주는 속도와 적극성은 영화를 이끌어가는 신애의 엇박자적 감정과 태도를 우회해서 보여준다. 그녀는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했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혹은 더이상 후회하지 않기 위해 열성적으로 스스로 구원, 해결책을 찾아나선다. 그것은 맹신이라고 불리는 종류의 것이다. 그리고 맹신이기 때문에 그녀는 처절하게 절망하게 된다. 그녀가 기억하는 모든 고통은 하나님의 의지가 담긴 빛 아래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신의 의지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어째서 고통을 방관하는가. 하나님의 그 심원한 계획은 언제, 어떻게 나타난다는 것인가. 이 너무도 단순하고 당연하며 그저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질문은 하나님에게 귀의한 신애의 입으로 설명된다. 그것은 마치 연애와 같은 것이라고. 시선에 따라선 일방적으로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그 모호한 감정이 답으로 나온 순간 이 이야기는 이성적인 공동체험의 길을 포기한다. 관객은 관찰자가 되거나 적극적으로 동조할 수 밖에 없다. 그저 여기서 묘사되는 기독교에 대한 입장만이 아니라 영화 자체에 대해서 직관의 힘이 필요하게 되는 순간이다.
5. [밀양]은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속이는 연기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영화 초반부에서 자신을 놀리려고 숨은 아들을 불러내기 위해 우는 연기를 하는 신애의 모습은 후반부의 기독교에 귀의한 그녀의 모습과 부합된다. 그녀는 열성적으로 찬송가를 부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지만 그 모든 것은 우는 연기를 했던 그녀처럼 어설프게 보인다. 그래서 정말로 눈물이 나올 때 그녀는 띄엄띄엄 끊어지는 주기도문으로 자신을 추스리려 애쓴다. 그것은 하나님을 어설프게 끌어다놓는 일종의 집착과도 같다. 그리고 고작 그런 걸로 그녀는 자신이 구원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본능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이 자신의 앞에서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말할 때 깨닫게된다. 이어서 순식간에 추락한다. 절망은 무지가 아니라 깨달음에서부터 오기 때문이다.
붕괴 이후의 그녀는 반은 고통 속에 반은 연기 속에 자신을 담근 채로 시간을 보낸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속이고 약속을 깨고 거짓으로 유혹하며 자학한다. 돌아갈 곳은 애초에 없다는 걸 알기에 스스로를 소진하는데 주력하는 그녀가 갈 곳은 하나뿐이다. 이 영화가 가혹하다고 할 수 있다면 그 결말이 아니라 전도연이란 배우가 보여주는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의 생생함 때문일 것이다.
6. 폭발은 어둠 속에서 찾아온다. 신 혹은 그 무언가의 손길이 사라진 밤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대체할 빛, 형광등, 전등을 필사적으로 켜놓는다. 그러나 그것은 빛을 흉내낸 것일 뿐이다. 그것엔 햇빛의 온화함, 따스한 열기, 그리고 세상을 전부 비추는 풍성함이 없기에 절망을 씻어내주지 못한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서 절망은 언제나 벌건 대낮에 찾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위안에 대한 형식적인 애착만 가지고 있는 그녀가 어둠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실질적이고도 지독한 부재, 그 자체다. 결국 그녀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울부짖는다. 빛이 무엇이든 간에, 그녀가 감내해야 하는 밤은 그 무언가의 부재만이 도드라지는 시간이기에 그녀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리라. 자신의 것이라 여기던 것들을 하나씩 잃고난 뒤, 그녀를 지켜보는 무언가마저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그녀는 새롭게 절망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적으로 오열할 수밖에 없게 된다.
7. 영화는 끝까지 관객에게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순간 따위를 제공할 생각 같은 건 없다. 도식적 구원의 기회에 가장 근접하는 말미의 씬에서조차 신애는 (영화적으로) 뻔한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 거기엔 분명 운명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상황이 보여주는 전능한 신이라는 가능성에 진저리가 난 그녀는 종찬에게 짜증을 내며 따진다. 신에게 지지않을 거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그녀에게 있어서 신의 개념은 마니교적인 의문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과연 신은 선한가 악한가. 어느 쪽이든 그녀는 쉽게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그녀는 앞으로도 한동안 방황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곁을 종찬은 항상 따라다닐 것이다. 그녀가 손을 내밀 때마다 기쁘게 받아들이며.
8. 송강호가 연기한 종찬이라는 인물은 결론적으로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에 관한 개인사적인 부분은 오직 두 번의 어머니와의 통화, 그것도 무척 퉁명스러운 통화로만 우회해서 보여질 뿐이다. 그의 세련되지 못해서 우스꽝스러운 맹목적 호의는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밀양]에 비치는 진짜 숨겨진 빛이다. 극장에 가면 다른 관객들과 함께 그의 등장과 행동에서 그나마 웃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모호함으로 보장되는 전형적인 바탕을 통해 영화속 무기력한 구원을 보조해준다. 혹은 아무리 엉망이 된다 하더라도 끝까지 향하는 어떤 따스함과 같다.
9. 그러나 [밀양]은 신애의 영화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맺는 것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행동이 보여주는 의지는 저항으로써의 주체를 보여준다. 어찌되었든 간에 관찰자로 다시 돌아온다면, 신은 애초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면 신은 방관자일 수도 있다. 그저 우연찮게 우주를 만든 다음 어디선가 다른 우주를 꾸미느라 정신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니 광휘 같은 것에 신의 죄, 혹은 의지 같은 건 처음부터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믿고 증오하고 울고 저항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음지의 진흙탕에 닿는 빛은 진정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그녀의 신학이다.
10. 처음, 신애의 질문에 답하여 밀양에 대해 구구절절이 얘기하던 종찬은 말미에 이르러 단 한마디로 밀양을 말한다. "사람 사는데 어디든 다 똑같죠 뭐." 그렇다. 신애는 어딘가 별난 여자가 아니다. 종찬 또한 성자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들과 같은 보통 사람들이며 이것은 어디서든, 누구나가 겪게될 수 있는 절망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다. 마치 인간인 이상 빛을 피할 수 없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