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번에 학산판 [에덴]을 14권까지 통째로 구하게 됐습니다. 뭐 시작은 SF였으되 중간엔 밀리터리도 있고 하드보일드한 범죄극 요소도 있었고, 그러다 다시 발라드의 이름을 따 온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답게 [크리스탈월드]의 세계로 직행하고 있는데, 가끔씩 보면 그런 전개에 불만을 가진 분들이 꽤 많은 편이더군요. 소위 '정통SF'가 아니라는 거죠. 작가의 자유로운 창작의 여지는 기호의 영역에선 거부될 수도 있는 것이긴 해도 작품 자체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걸 보면 좀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가끔씩 듭니다. 그러고보면 발라드의 뉴웨이브도 처음 나왔을 당시에는 소위 '정통SF팬'들에게 욕 디지게 먹었었다는 얘기가 생각나는군요.
학산의 [에덴]이 세주판과 다른 점이라면 무엇보다도 권두 날개에 쓰여있는 작가의 한담들을 살려놨다는 것이죠. 첫 시작이 1998년이라니, 벌써 9년이나 전 얘기군요. 내가 이걸 고등학교 다닐 때 봤던 건가. 기억도 잘 안 나네. 아무튼 그림과 내용의 퀄리티가 실로 출중했기에 당시에 꽤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뭐 한마디로 뿅 갔던 거죠. 다시 봐도 여전히 재밌군요.
세주판 번역기보다는 번역이 훨씬 매끄러워졌고, 6권에는 사무라 히로아키의 일러스트가 실려있더군요. 일본판의 8권에 실려있던 엘리야의 텍사스촌 생활기는 세주판처럼 삭제되어있습니다. 역시 강도가 좀 쎄죠 그건. 그래도 전반적으론 삭제 정도가 좀 덜해진 느낌. [에덴]은 뒤로 갈수록 그림쪽 퀄리티가 떨어지는 추세라, 섬세함을 보여줬던 초반의 작화력이 아쉬워지는군요.
8권에선 엘리야 발라드가 아버지와의 과거를 회상하는 씬이 나옵니다. 1권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면서 세상을 나오게 된 엔노이아 발라드는 자신의 아들에게 구원이란 무엇인지, 그 단초에 대해 말해줍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잔인하다는 걸 잊지 말고, 살기 위해 늘 잔인한 행위를 한다는 걸 잊지 말라고. 중요한 것은 용서를 구하고 무언가로 속죄하는 것이라고. 불교에서의 고, 크리스트교에서의 원죄 개념들을 아우르고 있는 이 말이야말로 지금의 인간이 낼 수 있는 불가항력적이면서도 가장 합리적인 대답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인간은 모순을 실천해가는 존재입니다. 손에 남의, 무언가의 피를 묻히면서 살지만 살아가는 걸 포기할 순 없습니다. 그 영역에까지 파고들어가지 않는, 혹은 그 모순을 합리성이란 이름으로 외면하는 철학이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