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다르게 배운다 - 누구나, 언제나, 저마다의 속도로
이수인 지음 / 어크로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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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내가 딱 하나만 읽는다면 읽겠다던 '인재시교'를 떠올리게 해서 골랐다. (https://blog.aladin.co.kr/hahayo/9371196 ) 

아이들을 키우는 중이라, 교육이 뭘까, 라는 질문을 자꾸 자꾸 하게 되서 이런 책을 읽는다. 큰 아이가 고3이라 지금 입시나 교육이 왜 이런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대학은 필수적인 경로나 교육이 아니다. 30프로만 갈 수 있을 때에도 그랬고, 거의 100프로의 수험생이 갈 수 있는 지금도 그렇다. 상승욕구가 있고, 자녀에게 더 나은 삶을 주고 싶은 부모가 방법을 모르는 채로 떠민다. 또래집단 안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압력이 작용한다. 사교육시장은 비대해지고, 사교육시장도, 대학도 살아남기 위해 케케묵은 담론들을 이용하고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한다. 많은 교육관련 책들은 그래서 위험을 안고 있다. 그래서 목표는 무엇인가? 좋은 대학을 보내는 것인가? 좋은 직업을 가지는 것인가? 어떤 삶을 살면 좋은 삶인가? 어떤 것이 성공인가? 질문은 많고 답은 모른다. 

그래서 책들을 읽으면서 생각한다. 

저자는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게임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남편의 유학길에 동행해서 첫 아이를 낳는다. 아이는 유전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고, 아이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느리게 배우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 아이가 적어도 글을 읽고 쓸 수 있을 만큼, 수를 이해할 만큼 적어도 2학년짜리만큼은 되길 바라면서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다. 에듀테크,라고 불리는 분야의 기업가가 되어 쓴 책이다. 엄마의 마음, 기업가의 마음이 드러나는 글들이다. 근원적인 질문을 엄마도 하고 있을 거다. 그래도, 기업가기 때문에 더 하지 못하는 말들이 있다. 엄마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말들도 있다. 할 수 있는 만큼 그래도 최선을 다 해서 말한다. 자신의 일이 좋은 일이기를 기대하면서 일하는 사람의 마음이 드러난다. 배움의 목표는 무엇일까,에 답은 없어도, 여전히 끊임없이 배우고 있는 사람을 본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배움의 목표는 '좋은 사람'이라고 유학의 '군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가능한 목표여야 끝까지 배울 수 있고,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래서 부모는 태도를 가르쳐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을 대하는 태도, 깜깜한 미래를 기쁘게 기대하는 태도, 자기 자신을 귀하게 돌보는 태도,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키워서 사회에 책임을 다하는 태도, 그런 걸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질문하고 의심하고 노력하고 정진하는 저자의 말들에 디지털 교과서에 대한 기대도 조금은 하기로 했다. 


며칠 후 병원의 유전학자인 닥터 골라비가 병실에 찾아와서 무슨 질문이든지 해보라고 했을 때, 나는 "이 아이와 같은 유전 정보의 아이를 찾아서 어떻게 자랐는지 알아볼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 할머니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조곤조곤 말을 쏟아냈다. "너는 유전적으로 정상인 아이를 하나 보면 그 아이가 어떻게 자랄지, 공부를 잘할지 못할지, 착하고 남을 돕는 사람이 될지 악인이 되어 교도소에서 삶을 마무리할지 알 수 있겠니? 장애가 있는 아이든 그렇지 않은 아이든 마찬가지야. 아이가 어떻게 자라고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

나는 머릿속에서 막연히 '장애가 있는 아이'와 '장애가 있지 않은 아이'를 나누고, 그 부모의 인생도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불행한 삶'과 '그렇지 않은 행복한 삶'의 두 갈래로 나눠지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닥터 골라비는 아이와 그 가족의 인생을 예측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라고, 부모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 말해주었다. 더군다나 우리 아이의 유전질환은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조합도 아니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축복이지 않니? 아무도 모른다고!" -p17~18


그러다가 아이가 다른 반 교실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다. 쉬는 시간에 그런 아이들을 마주치면 매우 반가워하면서 말을 걸고 같이 놀고 싶어 한다고 했다. 방학 중 추가 학습이 필요한 아이들이 모인 교실에서 다른 아이들을 도와주고 말을 걸면서 아이는 매우 행복해했다. 이런 광경을 몇 번 지켜보자, 차라리 특수학급에서 비슷한 수준의 또래들과 함께 있게 했다면 아이가 더 행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p200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교육의 목표가 잘목되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았다. 그림 그리는 것의 목표가 직업을 얻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기능을 훈련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결과물의 수준도 목표가 될 수 없다. 또래와 비교해서 미술대학에 들어갈 정도로 잘 그리는 것, 상업적으로 팔릴 것을 목표로 그리면 안 된다. 교육의 목표가 '어떤 수준을 달성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워야 한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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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편과 아내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책이다.

2003년에 나온 책이네, 나오자 마자 사서 읽은 거면 결혼하고 이듬해에 읽었겠네. 

두 권짜리고 기억에 나는 큰 사건도 없어서 엄청 어렵게 읽었다. 그 때는 책을 시작하면 끝내야 한다는 주의였어서, 끝까지 겨우겨우 읽었다. 읽고 나서 써놓고 보면 단순한 교훈을 마음에 새겼다. 

내 기억 속에서 책 속의 부부는 오해 가운데 말로 할 걸 쌓아뒀다가 이혼한다. 왜 부인이 발가벗고 창가에 서 있었는지 물어보면 될 것을, 그걸 보고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있었을 거라고 남편은 혼자 생각하고 결국에는 헤어진다. 보면서 바보 멍텅구리들이네, 말을 좀 하지,라면서 읽었다. 

그런데도 살면서 화가 쌓일 때 한 번씩 책 속의 부부가 떠올라 한 번 더 말해 볼 마음을 먹는다. 고마운 책이라서 다시 읽어볼까 해도, 음, 다시 읽을 수는 없었다. 


2. 싹수없는 며느리 vs 파란 눈의 시아버지

https://blog.aladin.co.kr/hahayo/10409909


이것도 읽기는 2004년쯤 읽고 책에 대해서는 2018년에 썼다. 조금은 지나간 일들에 대해 고마운 맘이 되서 썼다.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고, 함께 살아가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먹고 입고 자고 씻고 살면서 하는 그 많은 일들 가운데, 같이 누리는 것들을 누리기 위해 해야 하는 수고를 누가 할 지 하나 하나가 다툼이 될 수 있다. 

그런 순간에 도움이 되었다. 


결혼하기 전에, 함께 살기 전에는 분명하던 희생과 기생이 정말 그러한가, 질문하게도 되었다. 함께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함께 살기 위해 하는 수고도 돈도, 우열을 가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도 가정 경제에 누가 더 돈을 쓰는지 싸운 적도 있고, 명절을 앞두고 날카로워졌던 날들도 있다. 지금은 조금은 그런 긴장들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까지 있어서, 난이도는 올라갔지만, 아이들이 있어서 오히려 더 어른스러워지려고 노력하면서 조금 더 어른스럽게 문제를 풀어가려고 하고 있다. 

명절 다음 날카로워졌던 그 어느 날 가운데, 너만 힘들었냐? 나도 힘들었어! 라는 남편의 말 다음에, 부모의 다툼에 눈치를 살살 보는 아이들 앞에서,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내가 전을 부쳤다면, 남편은 운전을 했고, 아이들도 그 먼 길을 부모가 부모의 부모를 보기 위해 움직이는 동안 지치고 힘들어도 참은 거니까. 누가 더 힘들었는지는 정말 아무도 알지 못할 테니까. 그저 아이가 아이 몫의 힘듬을 견뎠다는 걸, 엄마가 엄마 몫의 힘듬을 견뎠다는 것, 아빠가 아빠 몫의 힘듬을 견뎠다는 걸 서로 알아주기로 했다. 명절을 쇠고 집에 도착하면 모두 모두를 안는다. 바리바리 짐을 아빠가 들여놓으면, 모두 집 안으로 들어오면, 아직 짐을 정리하지는 않았어도 우선 모두 안는다. 서로서로 고생했다며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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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기독교를 논하다
이제열 지음 / 모과나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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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독교가 편애하는 신의 차별적인 사랑을 구하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독교가 베이스인 서양의 문명은 함께 어울려 사는 삶에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도 생각한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639264)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 이 책을 골랐지만, 또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책이 새삼스럽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나는 종교를 조금은 철학으로 접근하고 있어서, 종교적 방식으로 하는 설명에 삐딱한 태도도 있다. 나는 동서양의 인간이해,가 두 종교를 설명하는 방식이 좋았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903037 )

내가 싫어하는 친구긴 한데, 내가 보기에는 그래도 비슷한 애가 그 친구를 막 욕하는 걸 듣는 기분이 된다. 사실, 책에서 하는 말은 욕도 아니고, 기독교와 불교는 그리 가깝지 않다. 서로 이해하기 어려운 두 종교의 입장을 불교의 입장에서 듣는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종교를 실용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중이라, 천국이나 지옥, 전생이나 내세, 환생이나 이적에 대해 말하는 데에 전혀 관심이 없다. 


만약 세상에 완전한 자가 있다면 그는 몸과 마음이 청정하여 언제나 평화로워야 하고 구하고 원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완전한 자는 세상에 대한 희로애락을 일으키지 않는다. 완전한 자가 어떻게 세상에 대하여 이렇게 되었으면 또는 저렇게 되었으면 하는 욕망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욕망은 무엇인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고 부족하다는 것은 완전치 못하다는 증거이다. -p25


불교의 관점에서 인간은 신의 형벌이 있든 없든 생로병사를 비롯한 갖가지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애초부터 영생할 수 없는 존재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 아니다. '생으로 말미암아 사가 있는 것'이다. -p49


그러나 불교의 지옥은 그 본성에 있어 실제가 아니다. 마치 꿈의 세계가 진실이 아니듯 불교의 지옥은 미혹한 중생이 업으로 만든 환상의 세계이다. 꿈을 깨지 못한 상태에서는 꿈의 일들이 실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꿈을 깨고 나면 아무것도 없듯 지옥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중생이 업의 힘에 의해 꾸는 꿈이다. 지옥의 모든 형틀 기구와 참상과 전경 그리고 사자들의 모습은 그곳에 태어난 중생들의 마음이 만든 허상들이다. - p94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법(法, Dharma)이고, 바로 그 법 속에서 중생들이 업을 지어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숫타니파타》에 전하는 다음 말씀이 이를 뒷받침한다. "세계는 업에 따라 존재하고 사람 또한 업에 따라 존재한다. 수레바퀴가 쐐기에 얽혀져 돌아가듯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업의 속박 속에 굴러간다." -p127 -128


혹 불교 경전에서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나타난다는 부처님이나 보살도 인간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준다거나 그들이 지은 죄를 씻어줄 수는 없다. 다만 그 길을 일러줄 뿐이다. 누가 누구를 대신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방식을 불교는 애당초 부정하고 있다. - p161-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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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 진지한 민주주의자를 위한 선언
수전 니먼 지음, 홍기빈 옮김 / 생각의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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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읽히지 않는 날들이다. 겨우 마친 책은 늘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면서도 선택하는 서구 저자의 책이다. 

바댕테르의 책을 읽었던 때의 느낌( https://blog.aladin.co.kr/hahayo/15744499 ) 처럼, 그래도 저자는 좌파,를 버리지 못하는구나, 라면서 읽는다. 나는 그게 뭐 중요한가,라는 태도가 되어, 그래 워크 니들이 좌파 가져라, 나는 나의 믿음으로 움직이겠다,라는 입장이라서 이제는 모르겠다. 제목에서 나는 좌파고 좌파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워크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결의가 나는 없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고,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니, 굳이 옳고 그름을 따져서 분노할 건가, 싶은 날들이다. 

계몽주의가 기독교에 저항하기 위해 겨우 세웠던 공통의 어떤 가치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는 저자의 책에서, 나는 다시 그 담론이 발 딛고 선 종교의 언어들을 느낀다. 


이렇듯 문화는 특수성을 가진 영역이지만, 정치는 그 핵심에 보편주의를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문화적 차이는 그것을 물화시키는 법 없이도 소중하게 다루는 게 가능하다.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란 아마 여러 해골을 모아 놓은 회의장만큼이나 무겁고 딱딱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때는 문화적 범주를 중심 무대에 두어서는 안 된다. - p114


일부 권력 형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푸코가 논의하는 바는 시선을 끌기도 한다. 그의 책을 읽는 독자는 필연적으로 그러한 분석이 단순히 흥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권력 비판과 마찬가지로 해방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하지만 분석과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지식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푸코의 생각을 알게 되면 그런 희망은 완전히 무너진다. 

모든 지식은 불의에 기반한다는 점(즉 인식활동에 있어서조차 진리 혹은 진리의 기초에 대한 권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 지식을 원하는 본능은 악의적이라는 점(즉 인류의 행복과는 반대되는 살인적인 것이라는 점).

그러니 많은 이들이 이 푸코라는 인물은 한마디로 허무주의자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도 당연하다.-127p


만약 권력이 그토록 모든 곳에 속속들이 배어 있는 것이라면, 그 개념으로 이 세상을 분별하여 이해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지조차 의문스러워진다. 만약 모든 것이 다 권력이라면, 이 권력이라는 개념은 만사만물을 다 포괄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푸코의 권력 개념이란 너무나 폭넓은 것이라서 악의 없는 개념이라고 생각할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희망은 그의 설명을 들으면 사그라들게 된다. 

나는 우리 사유의 준거점을 언어와 기호의 거대한 모델이 아니라 전쟁 및 전투의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를 낳고 또 지금의 모습으로 결정지은 역사는 언어가 아닌 전쟁의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의미의 관계가 아닌 권력의 관계인 것이다.(...) 갈등으로 가득한 현실이란 언제나 끝이 결정되지 않은 위험천만한 것이건만, '변증법'이란 헤겔식 논리의 뼈대 위에서 그러한 실상을 회피하게 만드는 방식일 뿐이며, '기호학'이란 그러한 현실의 폭력, 유혈, 살상의 성격을 고요한 플라톤식 언어 및 대화로 환원하여 회피하는 방식일 뿐이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 개념은 전혀 부드럽지 않다. -p129-130 


푸코의 이 인용문에서 보듯, 이들은 모두 평서문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의구심의 형이상학을 펼치려면 의문문을 쓰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그리고 이들의 글은 몽롱하기 짝이 없다. 이들은 보통 니체 애호가들이지만, 니체가 자신이 경멸하는 자들을 까뭉개는 표현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다음의 조롱을 들어 마땅하다. "그들은 연못에 흙탕을 쳐서 심연처럼 보이게 만든다."-p130-131


푸코는 자신의 관점이 인간 세상의 만사만물에 적용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말하면서도, 이를 가리기 위해 거짓 겸손을 떤다. 사르트르와 같은 "일반 지식인"의 시대는 끝났으니, 이제는 자신과 같은 "특정 문제의 지식인"이 발견해낸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여러 정치적 판단에 대해 이유와 논리를 제시하는 것도 완고하게 거부했다. 이유와 논리란 그저 자기합리화의 자작극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권력이란 그저 맹목적 추동력일 뿐이라는 주장은 이성의 경멸과 손을 잡고 함께 이루어진다. 이성의 격하와 권력의 격상 중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들이니까. 푸코, 하이데거, 아도르노와 같이 서로 다른 20세기 사상가들이 공통으로 내거는 주장이 있다. 그들이 부르는 이름으로 "계몽적 이성"이라는 것은 사기의 자작극일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나쁜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이는 자연 그리고(그들이 자연적이라고 생각했던) 원주민들까지 복속시키는 데 혈안이 된 지배욕, 계산욕, 탐욕의 괴물이라는 것이었다. - p133


이성은 분명코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런데 이성을 단지 권력의 한 형태로 본다면 폭력과 신념, 그리고 신념과 의식 조작의 차이를 무시하는 일이 된다. 이렇게 되면, 너는 이것을 해야 해. 왜냐하면 내가 너보다 덩치가 더 크니까 라는 말과 너는 이것을 해야 해. 왜냐하면 이것이 (a)옳기 때문에 (b)공동체에 좋기 때문에 (c)너에게 가장 이롭기 때문에 (d)네 스스로 선택한 정당화 논리 때문에 라는 말의 차이도 무시하게 된다. -p138


그 결과 진화심리학자들 또한 그들을 낳은 사회생물학자들처럼 이른바 이타심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권력과 자기보존의 투쟁을 그럴듯하게 치장한 예를 역사를 뒤져 무수히 찾아낼 수 있다고 해도, 자기들 생명까지 희생해가며 벌거벗은 자기이익과 반대되는 일을 행한 사람들의 예 또한 무수히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메리 미드글리는 이기심이 보편적이라는 주장은 모순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남들을 배려하는 것이 정말로 불가능했다면, 그런 마음을 갖지 못한 상태를 가르키는 단어 자체가 애초에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예는 진화심리학 이론에 심각한 타격을 주지만, 진화심리학자들은 이조차 자기들 도식에 끼워 맞추기 위해 아주 열심히 노력한다. 윌슨은 이 원리를 명쾌하게 말한다. 

이타주의란 궁극적으로 이기적이다. '이타주의자'는 사회가 자기 혹은 가까운 친족에게 보답할 것을 기대한다. 그의 선한 행동은 계산된 것이며, 전적으로 의식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가 많다.(...) 그 심리적 도구는 거짓말, 위선, 기만 등이며, 심지어 자기기만도 들어간다. 행위자 본인이 자신의 행위가 진심이라고 믿을 때 가장 큰 설득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윌슨의 일반적 주장을 스티븐 핑커는 훨씬 더 확장한다. - p164-165


진화심리학자들은 자신의 관점에 반대하는 주장은 곧 과학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넌지시 암시할 때가 많다. 이들은 자신의 비판자들이 몰래 창조론을 믿는 자들까지는 아니더라도 향수에 젖은 감상주의자라고 암시한다. 이타주의와 같은 도덕적 가치가 그 창조주와 함께 죽어버렸다는 니체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p167


그런데 이러한 두려움이 아니더라도 '진보'라는 말로 옮겨간 것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어차피 좌파라는 말도 1789년 프랑스 의회에서 의원들이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자리를 몰려서 앉다가 우연히 생겨난 이름이니까. 게다가 좌파와 우파의 여러 차이 중에서도 진보가 가능하다는 사상만큼 크고 깊은 차이도 없다. 이는 전통적인 보수 사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각이다. 그들은 역사를 기껏해야 머물러 있거나 순환적인 것으로 보며, 아주 나쁜 경우에는 신화 속 황금시대로부터 천천히 쇠퇴해가는 슬픈 이야기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 p181


이 때문에 진보에 관한 표준적인 설명을 해체하는 가운데에서도 루소의 논리는 푸코와는 전혀 다른 톤을 지닌다. 푸코는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의문을(수사적 의문?) 던지는 쪽을 더 좋아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주장을 내미는 것보다는 그저 슬쩍 암시하는 쪽을 더 즐긴다. 그의 책을 읽으면 어떤 하나의 입장을 가진 독자가 되기보다는 어떤 몽롱한 분위기에 빠진 독자가 될 가능성이 더 크다. - p193


그런데 나는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의 희화화에는 더 심층적인 근원이 있다고 생각한다. 볼테르는 비록 당대의 세상에 그득했던 온갖 야만성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인 인물이었지만, 인간 본성이 근본적으로 타락한 것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존재는 아니다. 인간이 사악해지는 것은 병에 걸리는 것과 같다"고 그는 《철학사전》에서 말한 바 있다. 만약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본질적으로 병에 걸려 있는 존재라고 말하는 의사가 있다면, 이들은 아무 병도 치료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숨기고자 하는 구역질 나는 자들이다. 볼테르가 이렇게 바라보았던 이들은 바로 성직자였다. 볼테르의 목적은 우리가 모두 태생적으로 선한 존재라는 유토피아적 관점을 수호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모두 태생적으로 악한 존재라고 보는 기독교의 관점을 공격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p199


우리 손에 있는 모든 데이터는 사실 우리 자신이 마음속에 품은 희망과 공포라는 필터로 한 번 걸러진 것들일 뿐이다. 전쟁이라는 행위는 루소가 보는 자연 상태에 따르면 참으로 변태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지만, 홉스의 비전에 따르면 너무나 정상적인 것이 된다. 독재 체제를 확립하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인간 본성은 야수적인 폭력성에 있으며 인류 스스로가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p202 


포스트잇을 떼면서 옮겨적으니, 내가 이 책에서 뭘 좋아했었는지 생각났다. 

다들 좋다는데, 나는 도무지 뭔 소리인지 모르겠고, 왜인지 음험해보이는 책들에 대해 대차게 씹어주고 있어서 좋아했다. 

푸코와 슈미트, 적과 적 아닌 자로 구분하는 단순한 저작,이거나 억압은 더 교묘하게 변했을 뿐 여전히 어디에나 있다는 몽롱한 저작들. 새 시대의 종교인 과학의 옷을 입고 다시 나타난 어떤 정치적 입장의 저작들. 

그런데도, 역시 저자는 자신의 지적 배경-정치가 분리되고 종교가 통일된 서구의-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을 때 느꼈던 어떤 이질감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서구 지식인은 기독교의 전횡에 대항하고 싶지만, 강한 국가권력은 역시 또 거부한다. 제도나 도덕의 목적에 대해 종교에 의지하는 태도가 여전히 드러난다. 저들의 모순은 어쩌면 거기에 있는가, 싶은 순간들이 있다. 저자는 정답이 있는 문제지-기후위기에 대한 저자의 태도가 그러하다-를 앞에 두고 다른 답을 쓰는 사람을 좌파와 우파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고, 진보를 여전히 믿는 것도 같다. 나는 진보가 뭔지 모르겠다. 독재정권 시절보다 지금이 더하다,는 표현은 끔찍한데도, 이것이 진보인가는 역시 모르겠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믿음이 있고, 급하고도 빠르게 세상을 바꿔온 나라에 살면서도 역시 무엇이 진보인지 모르겠다. 풍요가 진보인가. 기술의 발전이 진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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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4-09-14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코 읽는다고 나불거리는 사람을...전 결코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냥 같잖은 허세로 보이거든요.
 
잘못된 길 - 1990년대 이후 래디컬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
엘리자베트 바댕테르 지음, 나애리.조성애 옮김 / 필로소픽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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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마치고도 정리할 마음이 안 생겼다. 

난데없이 정리할 마음이 생긴 건, 이 아침에 파리 올림픽 개막식을 보고 올린 카스피님의 글( https://blog.aladin.co.kr/caspi/15727549 )에 댓글을 달고 나서다. 한 나라의 문화적 역량을 세계인에게 전시하는 올림픽 개막식에서 프랑스는 파리는 무엇을 했는가. 

그저 이 책 속의 태도 정도만 견지했어도 저런 소리를 안 들었을 텐데, 싶었다. 

이제 나는 페미니즘 자체를 버렸기 때문에, 자유주의 페미니스트가 지금 '남녀 임금격차가 여전한 데도 페미니즘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책 속의 논조가 동의되지 않았다. 저자는 이 책을 쓸 때에도 여전히 페미니스트이고 페미니즘에 대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서구의 운동가다. 자신의 일생을 바쳐 여성운동을 통한 성취를 이뤄냈고, 59세가 되던 해에 페미니즘의 새로운 사조에 경계하는 마음을 담아 쓴 책이다. 2003년에 나온 책이니, 프랑스에서 20년도 더 전에 드러났던 문제라는 거다. 


여성원자력인모임같은 게 있는데, 메일로 설문조사 요청을 했다. 세계 여성원자력인모임에서 업계의 성차별을 조사한다는 설문을 포워딩한 거였는데, 설문의 첫번째는 '나는 내 자신을 여성 또는 여성에 가깝다고 느낀다'였다. 설문하는 내 자신에 대한 그 질문을 받아들고, 나는 설문 자체를 닫았다. 원자력계에 여성인력이 적다,라는 말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하는 건데, 질문의 시작이 그 시작을 흔든다. 이게 현대 성과 관련한 다양한 운동가들의 발언이 제도에 들어와 벌인 일들이다. 여성,에 대한 정의부터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서 파리의 링에서 XX염색체의 여성복서는 XY염색체의 여성?복서 주먹 한 방에 무릎을 꿇고 기권을 선언했다. 여성주의,라는 운동이 발 딛고 선 이분법의 세상이 흐려지고 있는데, 그래도 여성주의가 남아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여성운동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나는, 남자 여자 화장실이 분리되어 있으면 좋겠다. 성소수자를 위한다면서 만들어지는  공용화장실이 싫다. 누구에게나 아무런 불편이 없는 시스템, 따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여성주의는 극단적이고 모순적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상한 말들을 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에서 가장 유리할 법한 말에 가져다 붙인다. 



이처럼 불운을 당한 '희생자로 자처하기'가 사회에 만연하게 되면서 이들 희생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정의 위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이제 사람들은 가해자들에게 어떤 형벌과 제재를 가할 것인가만을 화젯거리로 삼게 되었다. - 20p


모성애의 개념으로 여성을 정의하는 것은 사실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헌법에서 성의 차이를 인정받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28p


이런 식으로 통계 수치를 부풀려 가면서 여성운동을 진행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여성은 피해자, 남성은 가해자'라는 생각이 일반화되었다. 드워킨이나 매키넌처럼 극단까지 가지 않더라도 결국 여성은 정치적으로 '아동'과 같은 사회 신분으로까지 떨어지게 된다. 연약하고 무력한 어린 아이의 신분 말이다. - 72p


아동이 부모에게 보호를 요청하듯이, 아동과 같은 신분을 갖게 된 여성은 법에 호소해야 한다. - 73p


생리학적 차이를 미덕과 역할 수행의 기본 요소로 보는 이런 접근 방식은 모성애를 알지 못하는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단죄하는 것이다. - 89p


(동성 또는 이성이) 함께 하는 삶은 심리적 억압이나 긴장을 피할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침묵 속에 묻어 두거나 분노를 자아낼 수도 있는 극도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말로 표현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언어폭력을 육체적 폭력과 동일시하면서 폭력을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산이다. 누가 뭐래도 말로 인한 상처는 육체에 가해진 상처와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 폭력을 피할 수 없는, 남녀 모두 똑같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이다. 

언어폭력이 부당하다고 하면서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결국 분노의 표현을 금지하는 것이다. - 160p


마지막으로 우리가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권력 남용의 또 다른 예가 있다. 30년 전부터 여성들은 임신 출산의 권리를 독점하고 있다. 여성이 결정적으로 임신 여부를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 당연한 듯하지만, 만일 남자가 아이의 출산을 원하지 않는 경우 이는 남자의 정액을 이용하는 '권력 남용'이라고 할 수 있다. 무관심해서, 혹은 여자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아서, 한 남자가 아이를 낳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은 상당한 진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남성이 원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혔는데도, 여성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출산한 후 남성에게 부성애를 강요하는 것은 '정신적 침해'라고 할 수 있다. - 164p 


소비된 성[性]에 대한 비판에 이어, 성의 상품화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순식간에 이 페미니즘의 어투는 오래된 유대 기독교의 권선징악적 어투를 닮아갔고, 그렇게도 힘들여 없애려 했던 성에 대한 상투적 개념을 되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 175p


성 정체성을 배우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며, 이런 주장이 어떤 이들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성 정체성은 대립적 개념과 희화화, 그리고 상투적 표현들을 통해 습득된다. 성 정체성이 남자아이들에게 고통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습득된 성 정체성은 차후 이성과 맺게 될 관계에서 필요한 조건이 된다. 남성적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더 이상 문제 되지 않을 때 비로소 경계가 무너지고 합의가 태어날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의 유사성은 도착점에 가서야 생기는 것이지 출발점에서 생기는 것은 분명 아니다. - 245p 


이슬람교도 다른 모든 종교와 똑같이 취급되어야 한다. (...) 학교에서는 머릿수건을 금지해야 한다. - 276p


상반되는 두 가지 페미니즘 이론이 잇따라 나타나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삼사십 대의 요즘 남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첫 번째 페미니즘의 특혜를 누렸다. 그들은 원하지도 않았는데 두 번째 페미니즘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성생활의 자유, 평등이라는 이상, 역할 분담을 굳건히 지지하지만 이 세 가지를 요구할 때는 예전의 믿음과는 철저히 단절되어야 함을 깨닫지 못한다. 십여 년 전부터 생리학이 다시금 대두되고 있지만 페미니스트들은 진화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가운데, 평등을 향한 행진은 어렵거나 불가능해지고 있다. 사랑이라고 말하는 대신 모성 본능을 내세우면서, 남자를 육아와 가사에 끌어들이고 싶어하는 것은 동시에 할 수 없는 일이다. - 28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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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4-08-03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극단적 페미니즘의 지적 천박성이나 저열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