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 진지한 민주주의자를 위한 선언
수전 니먼 지음, 홍기빈 옮김 / 생각의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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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읽히지 않는 날들이다. 겨우 마친 책은 늘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면서도 선택하는 서구 저자의 책이다. 

바댕테르의 책을 읽었던 때의 느낌( https://blog.aladin.co.kr/hahayo/15744499 ) 처럼, 그래도 저자는 좌파,를 버리지 못하는구나, 라면서 읽는다. 나는 그게 뭐 중요한가,라는 태도가 되어, 그래 워크 니들이 좌파 가져라, 나는 나의 믿음으로 움직이겠다,라는 입장이라서 이제는 모르겠다. 제목에서 나는 좌파고 좌파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워크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결의가 나는 없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고,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니, 굳이 옳고 그름을 따져서 분노할 건가, 싶은 날들이다. 

계몽주의가 기독교에 저항하기 위해 겨우 세웠던 공통의 어떤 가치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는 저자의 책에서, 나는 다시 그 담론이 발 딛고 선 종교의 언어들을 느낀다. 


이렇듯 문화는 특수성을 가진 영역이지만, 정치는 그 핵심에 보편주의를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문화적 차이는 그것을 물화시키는 법 없이도 소중하게 다루는 게 가능하다.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란 아마 여러 해골을 모아 놓은 회의장만큼이나 무겁고 딱딱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때는 문화적 범주를 중심 무대에 두어서는 안 된다. - p114


일부 권력 형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푸코가 논의하는 바는 시선을 끌기도 한다. 그의 책을 읽는 독자는 필연적으로 그러한 분석이 단순히 흥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권력 비판과 마찬가지로 해방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하지만 분석과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지식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푸코의 생각을 알게 되면 그런 희망은 완전히 무너진다. 

모든 지식은 불의에 기반한다는 점(즉 인식활동에 있어서조차 진리 혹은 진리의 기초에 대한 권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 지식을 원하는 본능은 악의적이라는 점(즉 인류의 행복과는 반대되는 살인적인 것이라는 점).

그러니 많은 이들이 이 푸코라는 인물은 한마디로 허무주의자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도 당연하다.-127p


만약 권력이 그토록 모든 곳에 속속들이 배어 있는 것이라면, 그 개념으로 이 세상을 분별하여 이해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지조차 의문스러워진다. 만약 모든 것이 다 권력이라면, 이 권력이라는 개념은 만사만물을 다 포괄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푸코의 권력 개념이란 너무나 폭넓은 것이라서 악의 없는 개념이라고 생각할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희망은 그의 설명을 들으면 사그라들게 된다. 

나는 우리 사유의 준거점을 언어와 기호의 거대한 모델이 아니라 전쟁 및 전투의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를 낳고 또 지금의 모습으로 결정지은 역사는 언어가 아닌 전쟁의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의미의 관계가 아닌 권력의 관계인 것이다.(...) 갈등으로 가득한 현실이란 언제나 끝이 결정되지 않은 위험천만한 것이건만, '변증법'이란 헤겔식 논리의 뼈대 위에서 그러한 실상을 회피하게 만드는 방식일 뿐이며, '기호학'이란 그러한 현실의 폭력, 유혈, 살상의 성격을 고요한 플라톤식 언어 및 대화로 환원하여 회피하는 방식일 뿐이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 개념은 전혀 부드럽지 않다. -p129-130 


푸코의 이 인용문에서 보듯, 이들은 모두 평서문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의구심의 형이상학을 펼치려면 의문문을 쓰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그리고 이들의 글은 몽롱하기 짝이 없다. 이들은 보통 니체 애호가들이지만, 니체가 자신이 경멸하는 자들을 까뭉개는 표현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다음의 조롱을 들어 마땅하다. "그들은 연못에 흙탕을 쳐서 심연처럼 보이게 만든다."-p130-131


푸코는 자신의 관점이 인간 세상의 만사만물에 적용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말하면서도, 이를 가리기 위해 거짓 겸손을 떤다. 사르트르와 같은 "일반 지식인"의 시대는 끝났으니, 이제는 자신과 같은 "특정 문제의 지식인"이 발견해낸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여러 정치적 판단에 대해 이유와 논리를 제시하는 것도 완고하게 거부했다. 이유와 논리란 그저 자기합리화의 자작극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권력이란 그저 맹목적 추동력일 뿐이라는 주장은 이성의 경멸과 손을 잡고 함께 이루어진다. 이성의 격하와 권력의 격상 중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들이니까. 푸코, 하이데거, 아도르노와 같이 서로 다른 20세기 사상가들이 공통으로 내거는 주장이 있다. 그들이 부르는 이름으로 "계몽적 이성"이라는 것은 사기의 자작극일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나쁜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이는 자연 그리고(그들이 자연적이라고 생각했던) 원주민들까지 복속시키는 데 혈안이 된 지배욕, 계산욕, 탐욕의 괴물이라는 것이었다. - p133


이성은 분명코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런데 이성을 단지 권력의 한 형태로 본다면 폭력과 신념, 그리고 신념과 의식 조작의 차이를 무시하는 일이 된다. 이렇게 되면, 너는 이것을 해야 해. 왜냐하면 내가 너보다 덩치가 더 크니까 라는 말과 너는 이것을 해야 해. 왜냐하면 이것이 (a)옳기 때문에 (b)공동체에 좋기 때문에 (c)너에게 가장 이롭기 때문에 (d)네 스스로 선택한 정당화 논리 때문에 라는 말의 차이도 무시하게 된다. -p138


그 결과 진화심리학자들 또한 그들을 낳은 사회생물학자들처럼 이른바 이타심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권력과 자기보존의 투쟁을 그럴듯하게 치장한 예를 역사를 뒤져 무수히 찾아낼 수 있다고 해도, 자기들 생명까지 희생해가며 벌거벗은 자기이익과 반대되는 일을 행한 사람들의 예 또한 무수히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메리 미드글리는 이기심이 보편적이라는 주장은 모순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남들을 배려하는 것이 정말로 불가능했다면, 그런 마음을 갖지 못한 상태를 가르키는 단어 자체가 애초에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예는 진화심리학 이론에 심각한 타격을 주지만, 진화심리학자들은 이조차 자기들 도식에 끼워 맞추기 위해 아주 열심히 노력한다. 윌슨은 이 원리를 명쾌하게 말한다. 

이타주의란 궁극적으로 이기적이다. '이타주의자'는 사회가 자기 혹은 가까운 친족에게 보답할 것을 기대한다. 그의 선한 행동은 계산된 것이며, 전적으로 의식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가 많다.(...) 그 심리적 도구는 거짓말, 위선, 기만 등이며, 심지어 자기기만도 들어간다. 행위자 본인이 자신의 행위가 진심이라고 믿을 때 가장 큰 설득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윌슨의 일반적 주장을 스티븐 핑커는 훨씬 더 확장한다. - p164-165


진화심리학자들은 자신의 관점에 반대하는 주장은 곧 과학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넌지시 암시할 때가 많다. 이들은 자신의 비판자들이 몰래 창조론을 믿는 자들까지는 아니더라도 향수에 젖은 감상주의자라고 암시한다. 이타주의와 같은 도덕적 가치가 그 창조주와 함께 죽어버렸다는 니체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p167


그런데 이러한 두려움이 아니더라도 '진보'라는 말로 옮겨간 것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어차피 좌파라는 말도 1789년 프랑스 의회에서 의원들이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자리를 몰려서 앉다가 우연히 생겨난 이름이니까. 게다가 좌파와 우파의 여러 차이 중에서도 진보가 가능하다는 사상만큼 크고 깊은 차이도 없다. 이는 전통적인 보수 사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각이다. 그들은 역사를 기껏해야 머물러 있거나 순환적인 것으로 보며, 아주 나쁜 경우에는 신화 속 황금시대로부터 천천히 쇠퇴해가는 슬픈 이야기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 p181


이 때문에 진보에 관한 표준적인 설명을 해체하는 가운데에서도 루소의 논리는 푸코와는 전혀 다른 톤을 지닌다. 푸코는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의문을(수사적 의문?) 던지는 쪽을 더 좋아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주장을 내미는 것보다는 그저 슬쩍 암시하는 쪽을 더 즐긴다. 그의 책을 읽으면 어떤 하나의 입장을 가진 독자가 되기보다는 어떤 몽롱한 분위기에 빠진 독자가 될 가능성이 더 크다. - p193


그런데 나는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의 희화화에는 더 심층적인 근원이 있다고 생각한다. 볼테르는 비록 당대의 세상에 그득했던 온갖 야만성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인 인물이었지만, 인간 본성이 근본적으로 타락한 것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존재는 아니다. 인간이 사악해지는 것은 병에 걸리는 것과 같다"고 그는 《철학사전》에서 말한 바 있다. 만약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본질적으로 병에 걸려 있는 존재라고 말하는 의사가 있다면, 이들은 아무 병도 치료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숨기고자 하는 구역질 나는 자들이다. 볼테르가 이렇게 바라보았던 이들은 바로 성직자였다. 볼테르의 목적은 우리가 모두 태생적으로 선한 존재라는 유토피아적 관점을 수호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모두 태생적으로 악한 존재라고 보는 기독교의 관점을 공격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p199


우리 손에 있는 모든 데이터는 사실 우리 자신이 마음속에 품은 희망과 공포라는 필터로 한 번 걸러진 것들일 뿐이다. 전쟁이라는 행위는 루소가 보는 자연 상태에 따르면 참으로 변태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지만, 홉스의 비전에 따르면 너무나 정상적인 것이 된다. 독재 체제를 확립하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인간 본성은 야수적인 폭력성에 있으며 인류 스스로가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p202 


포스트잇을 떼면서 옮겨적으니, 내가 이 책에서 뭘 좋아했었는지 생각났다. 

다들 좋다는데, 나는 도무지 뭔 소리인지 모르겠고, 왜인지 음험해보이는 책들에 대해 대차게 씹어주고 있어서 좋아했다. 

푸코와 슈미트, 적과 적 아닌 자로 구분하는 단순한 저작,이거나 억압은 더 교묘하게 변했을 뿐 여전히 어디에나 있다는 몽롱한 저작들. 새 시대의 종교인 과학의 옷을 입고 다시 나타난 어떤 정치적 입장의 저작들. 

그런데도, 역시 저자는 자신의 지적 배경-정치가 분리되고 종교가 통일된 서구의-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을 때 느꼈던 어떤 이질감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서구 지식인은 기독교의 전횡에 대항하고 싶지만, 강한 국가권력은 역시 또 거부한다. 제도나 도덕의 목적에 대해 종교에 의지하는 태도가 여전히 드러난다. 저들의 모순은 어쩌면 거기에 있는가, 싶은 순간들이 있다. 저자는 정답이 있는 문제지-기후위기에 대한 저자의 태도가 그러하다-를 앞에 두고 다른 답을 쓰는 사람을 좌파와 우파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고, 진보를 여전히 믿는 것도 같다. 나는 진보가 뭔지 모르겠다. 독재정권 시절보다 지금이 더하다,는 표현은 끔찍한데도, 이것이 진보인가는 역시 모르겠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믿음이 있고, 급하고도 빠르게 세상을 바꿔온 나라에 살면서도 역시 무엇이 진보인지 모르겠다. 풍요가 진보인가. 기술의 발전이 진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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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09-14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코 읽는다고 나불거리는 사람을...전 결코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냥 같잖은 허세로 보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