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해방 후 조림성공에 대한 자료를 봤다.(https://gang8806.tistory.com/886)

과거에 우거진 숲을 상상하지만 과연 그랬을까에 회의하는 내용이었다. 난방과 요리, 건축에 나무를 사용하는 경제에서 숲이 과연 있을 수 있었을까 질문하고 시작한다. 

조선잡사를 읽을 때도, 나뭇꾼은 한양도성 내 숲에서 나무를 할 수 없었다고, 더 멀리 나가 나무를 해서 팔아야 했다고 묘사한다. 인구가 늘어나고, 밀집되는 도시에서 어떤 에너지원을 쓰는지는 중요하다. 

자료 속에 60년대 70년대 나무 하나 없는 산들의 풍경과 휘몰아치는 조림의 역사가 나온다. 

보면서,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생각이 났다. 

그 책 속에서, 요리를 위해 나무를 쓰는 아프리카의 도시들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나무로 요리하는 도시들이 있는데, 어떻게 나무를 숲을 보호할 수 있겠냐고 항변하는 글이다. 발전소를 지어서 에너지원을 바꿔야 하는데, 그걸 종말론적 환경론자들이 그걸 막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월드뱅크가 나무를 심으라고 돈을 줬구나. 많은 나라들이 그 돈을 착복하고 나무를 심지 않았었구나. 우리 나라도 나무를 심는데 안 쓰고 시멘트공장과 연탄공장을 만들었구나. 그러고 월드뱅크 사람들에게 설명했구나. 나무로 집을 짓고, 나무로 난방을 하고, 나무로 요리를 하는데, 지금 그 돈으로 나무를 심는다한들 나무가 자라서 숲이 될 수가 없다, 석탄을 캐서 연탄으로 난방을 하고 시멘트로 집을 지어야 숲이 생긴다고. 그리고, 우리는 지금의 삶을 지금의 숲을 가지게 된 거구나. 자료 속의 경쟁하는 공무원도 재미있지만, 우리의 지금 산업화는 이미 산업화된 나라들의 돈이 마중물이 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 돈이 마중물이 되어, 잘 잡은 방향 위에 겨우 올라선 현재가 있다. 지금 우리나라와 같은 과정을 거칠 수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에 석탄발전소를 짓기 위한 투자가 좌절된다. 기후악당이라는 묘사 뒤에 아직 가난한 나라들의 에너지전환을 지원하는 비용이 꺽인다.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그 단계라는 게 있어야 하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풍요롭지 못하면 정치적 억압에 저항하지도 못하는데, 에너지전환이 없이 나무로 요리하던 상황에서 벗어날 수는 있나. 

우리가 석탄으로 난방하고, 석유나 가스로 요리하게 된 그 전환의 순간이 그 곳에도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 

지금 우리가 가졌던 어떤 단계나 과정을 다른 나라들이 가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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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만난 탄압이나 검열의 순간이다. 적고 보니 일관성은 없지만, 국가는 살아낸 다음에 있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국가없는 삶이란 지나치게 위태롭다. 다양한 인간의 삶은 국가보다 앞서지만, 국가는 그 다양한 인간의 삶을 포용하면서도 스스로 강경하게 존재해야만 한다. 


1.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

조선 천주교 잔혹사,가 배경처럼 묘사된다.

나에게 주어진 적 없는 권력을 상상하고, 내가 왕이었어도 그렇게까지 탄압했을까, 생각한 적이 많다.

중학교 때, 갔던 해미읍성이나, 천주교 순교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렇게까지 잔인한 방식의 탄압에 대해서 생각하는 거다. 왜 죽이기까지 했을까? 

이 책을 읽을 때 놀랐던 것은, 그저 천주교를 믿기만 해서 죽음을 당한 것은 아니었던 거다. 울분에 사로잡혀, 서양을 천국으로 상상한 신자들은 사람을 보내, 서양의 군대가 조선을 복속시키기를 청했다고, 혹은 청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저 인간의 방식 중에 하나일 뿐인데도, 신에 대한 믿음과 신의 왕국인 서양의 평등한 세상을 상상하고-인디오는 인간인가?라는 논쟁을 하는 존재들인 줄은 모르고- 군대를 보내 탄압받는 천주교도를 해방시켜달라고 청했다고. 와, 내가 왕이라도 큰 벌을 줬겠는걸,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2. 문체반정

정조는 문체를 통제했다.

연암의 책들이 금지되었고, 소설체 문장을 쓰는 문사들은 발탁되지 못했다. 

두 권의 책은 문체반정에 대해 다룬다. 역사적 맥락에 대한 분석서와 소설.

교과서와 사회과학책, 인문과학책을 읽다가 소설을 읽으면 신이 나는 순간들이 있다. 소설이라고 해도, 무언가 말하고 싶은 바가 이야기의 형태로 나에게 온다. 

기득권자에게 위험해 보이는 이야기도 살아가는 중에 벌어지는 모순들도 소설은 가리지 않고, 사람들은 체제나 제도 때문이 아니라, 비어있는 공간에서의 삶 때문에 소설들에 끌린다. 사람은 이름이 없어도 살고, 나라가 없어도 살고, 법이 없어도 살고, 삶은 복잡하다.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법도 제도도 국가도 삶의 변화무쌍함을 따라잡을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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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1-08-16 08: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별족님 말씀처럼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프랑스 함대를 청하는 초대 신자들의 행동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기에 일반 신자들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히 제사 거부로 인한 가혹한 탄압 정도로 인식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문제라 여겨집니다. 개인 신앙의 자유와 국가 체제 유지. 둘 다 소중한 가치임이 분명하지만 둘 중 어느 가치에 우선을 두는가와 지키기 위해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는가는 사람마다 다른 듯 합니다...

별족 2021-08-17 06:53   좋아요 2 | URL
예전에 ‘논어 세 번 찢다‘에서 ‘종교로 통합하고 정치가 분열된 서양의 방식보다 정치가 통일되고 종교가 분열된 동양의 방식이 더 낫다‘는 말을 봤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0881133 ) 제가 참으로 정치적인 인간입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조던 B. 피터슨 외 지음, 조은경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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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을 수가 없었다.

주제가 너무 포괄적이라 토론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이뤄지지 않았다.

조던 B. 피터슨의 '질서 너머'를 읽었고, 유튜브도 몇 개 본 다음이라, 그 사람이 견지하려는 어떤 태도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나머지 토론자는 전혀 모른다. 흑인 목사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무기처럼 휘두르며 상대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고, 유일한 여성 토론자는 극단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게 정당성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언어를 교정하는 행위가, 극단적인 폭력을 해소하는 데 과연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고 있지 않다. 정치적 지형이 변화하는 것, 극단적 우익이 출몰하고 세를 확장하는 것에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말들이 기여하는 것은 없는가?에 대답하지 않는다.

네 명의 토론자 중에 굳이 내 입장을 고르라면 스티븐 프라이,를 고를 것이다.

나는 내가 믿는 바가 단단하기 때문에, 검열을 통해 내가 믿지 않거나 좋아하지 않는 것을 걸러서 없애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뭐 그럴 권력이 없고, 있다면 그럴까봐 걱정도 한다. 그럴 때가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전혀 나의 믿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도 생각한다. 설득하는 것, 열심히 설득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하면서도, 그 설득이 어떤 방식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질문하는 거다. 언어를 교정하려는 태도에는 엘리트주의가 드러나고,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가 드러나고, 우월의식이 드러나고, 적개심을 불러일으킨다. 언어에는 이미 가치관이 포함되어 있고, 그 가치관은 누천년 동안 형성된 어떤 것이다. 그렇게 견고한 것을 새로운 언어로 대체하려는 캠페인은 견고한 바닥을 부수고 집을 지으려는 노력처럼 어지럽다. 토론의 순간, 바닥이 되어야 할 언어를 상대가 교정하려 한다면 다음은 전혀 나아갈 수 조차 없다. 공론장이 어지러워지는 것은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해체해왔기 때문이고, 그래서 자유롭게 극단으로 멀어졌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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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다락방님의 "바야흐로 자서전의 시대"

미친 놈은 어디에나 있는데, 그걸 확전시키는 건 누구인가요? 선수가 욕하는 DM을 캡처해서 올렸다면-가능하다면 그 캡처 저도 보고는 싶습니다- 그건 그 미친 놈에 한정일 텐데, 님의 글은 ‘한국의 남자들‘이라고 일반화시키고 있으니까요. 저는 누군가를 대신해서 해명하고 있는 게 아니라, 님이 하는 방식의 일반화가 위험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개개인으로 보지 않고, ‘여자‘로 보고 일반화하는 어떤 행태에 대한 반발,이 제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에는 언제나 있었는데, 지금의 페미니스트들은 왜 똑같이 남성들을 일반화하고 있는지, 질문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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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족 2021-08-10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blog.aladin.co.kr/fallen77/12845367 ,
여기에 단 코멘트입니다. 북플에서는 안 보이네요. 저는 좀 PC기반이라. ^^
 
무협 - 엽서없음
진가신 감독, 견자단 외 출연 / UEK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쉬는 날 아침, 티비에서 하고 있었다. 탕웨이도 금성무도 견자단도 다 좋은데, 나는 왜 안 봤었을까, 궁금해하면서 봤다. 

증언 다음 느리게 재연되는 무협적 서사 다음, 금성무가 보는 사건이 다시 재연된다. 진실은 알 수 없는 상태다. 진실은 알 수 없다는 입장에서 금성무의 어떤 추리?는 망상처럼 보였다. 드러나는 상황에서 상대를 무술의 고수로 볼 수 있을 무언가가 있는지 계속 따라간다. 나는 역시 무협을 모르고, 금성무의 망상이 진실이라고 믿고 따라가던지, 견자단이 노력하는 데로 보통의 사람으로 견자단을 보던지 해야 한다.  

법을 집행하려는 의지를 가진 관료 금성무와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려는 견자단 사이의 긴장은 근대국가의 출현에 대한 이야기 같기도 하고, 영화를 보는 동안 이것은 중국인이 국가를 대하는 태도는 아닌가 생각했다. 법을 집행하려 하나 법을 집행할 힘은 없다. 무술의 고수는 강하고, 권위를 가지고도 막기는 어렵다. 법을 집행하는 자들은 부패했고, 법을 집행하기 위해 행사할 수 있는 힘도 부족하다. 금성무는 의지를 가졌으나, 체포영장은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지경이고, 순간 순간 자신이 죽임을 당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다가, 아버지를 죽이는 아들의 서사가 펼쳐진다. 폭력을 끊기 위해서, 복수의 대물림을 멈추기 위해서 아들은 먼저 자신의 팔을 끊고, 아비를 죽인다. 불가능해 보이는 죽음이 일어나고, 영화는 쓸쓸하게 마친다. 

배경으로 깔리는 멸족의 서사는 복수로 이어지고, 사적 복수가 이어지는 살육을 근대국가는 끊어내지 못한다. 폭력은 끝내고 싶어하는 의지를 가진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나서야, 폭력은 다음 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거대한 나라 안에 얼마나 많은 은원이 흐르고 있을 것인가. 평화를 바라기 때문에 묻어두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국가의 존재 자체가 은원을 해소하지는 못한다. 결국 의지를 가진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선택해야 가능하다. 아버지를 죽이는 서사가 폭력을 끊어내기 위한 것이어서, 권력을 쟁취하는 서사가 아니라 평범한 필부의 삶을 얻기 위한 것이어서 좋았다. 

평화는 개개인의 의지 가운데 겨우 가능하다. 견장을 달고 무기를 가졌다고는 하나, 결국 인간일 뿐인 권력에 의지를 가지고 복종하지 않는다면, 평화는 없다. 어리석다거나 교육받지 않아서가 아니라, 권력의 공백이 가져오는 커다란 불안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의지를 가지고 어느 정도 따르기로 하는 거다. 개개인이 의지를 가지고 수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하고, 수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제도를 운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은둔하고자 하는 무술고수가 폭력을 끊고 선택한 아이와 여자,가 바로 미래라고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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