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을 돌다가 이 기사(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11201500057&wlog_tag3=daum)를 봤다. 젊어서 성폭행을 당한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썼다. 그 책(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5268491)을 영화화하려던 감독이 사건 증거가 부실함을 의심하면서 재심을 했고, 결국 재심 결과 범인은 무죄로 판명되었고, 작가는 무죄판결이 나고 7일만에 사과를 했다는 기사였다.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남자는 감옥에서 16년을 보냈고 성폭행범이라는 오명을 40년이나 뒤집어쓰고 있었다. 유명한 작가라길래 책을 검색했다. 자신의 경험을 쓴 책은 번역되지 않았지만, 다른 책을 내가 읽었더라. 

그 책을 읽었을 때 울기는 했지만 마음 속에 굴러다니던 모래알이 있어서, 다 늦게 써놨던 게 있나 찾았다. 

울었다고만 썼더라. 마음 속에 껄끄러움을 가지고도 나는 이야기에 대해 말하는 게 꺼려졌었다. 

나는, 이 책에서 범인이 너무 전형적이라서 껄끄러웠다. 이웃의 소녀를 강간해서 살인하리라고 모든 사람의 머릿 속에 그리는 그런 인물이 범인이었다. 나는 그게 불편했다.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어떤 이야기가 살아남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100명의 살인 사건 중 95명의 남자 살인자 이야기는 살아남지 못하고, 5명의 여자 살인자 이야기가 유명해지는 것에 대해서 썼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0152825 ) 당연한 이야기는 재미가 없고, 사람들은 신기한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결국 이야기, 일 뿐이다. 이야기들 가운데, 어떤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가,는 전혀 다른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의미있는 이야기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또 생각한다. 전형적인 범죄자가 더 많을 텐데도 비전형적인 범죄자의 이야기가 더 많은 이유는, 소설이 통계가 아니기 때문일까,라고도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는 편견이 있다. 문화가 구성한 편견도, 경험이 만든 편견도 내 안에 있고, 단단해지거나 물렁해지면서 선택의 순간에 힘을 발휘한다. 남자나 여자, 기혼이나 미혼, 동양인이냐 서양인이냐, 아이이거나 어른이거나 고향이 어디라거나, 형제가 있거나 없거나, 맏아이거나 작은 아이거나, 막내거나, ABO식 혈액형에 따른 방식이거나, 종교에 대한 방식이거나, 가족과 함께 사는지나 혼자 사는지나, 사람을 둘러싼 모든 것에 편견은 작동할 수 있다. 그 편견들은 내 안에서 나름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내가 처음 만난 사람을 그 정형화된 편견으로 판단한다면 아예 범인으로 지목하기까지 한다면 그건 다르다. 내 자신이 편견이 있을 수 있음을 늘 조심스럽게, 의심하고, 새로운 사람은 백지위에서 판단을 쌓기 위해 애써 노력해야 한다.80%의 00이 나쁜 선택을 한다고 해서, 내가 만난 그 00이 나쁜 선택을 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세상은 훨씬 더 복잡하고,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전부가 아니고, 심리학도 과학도 사회학도 세상의 전부를 담지는 못하니까, 소설을 읽는다. 그 어느 것도 내가 만난 그 사람을 묘사할 수는 또 없고, 나와 그 사람의 관계는 오직 나와 그 사람에게만 달린 게 아닌가, 생각한다. 

다시 한 번 친구로 대한다면 친구가 된다고. 기대한 대로 되기 위해 얼마나 스스로 애쓰는가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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