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겨울호랑이 2021-09-16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족님께서도 즐거운 한가위 보내세요!^^:)

별족 2021-09-16 13:3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면역에 관하여
율라 비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딸아이가 빌려달래서 노조사무실에서 빌려줬다. 방학이 시작될 즈음, 학교에 반납하는 책 대신 빌려다 준 건데, 여름방학이 다 끝나고 개학도 한참 지났는데, 여즉 읽었다는 말도 없더니, 이제 읽어볼까, 하더니 다음 날, 뭔가 못 읽겠다면서 돌려줬다. 그래서 반납하기 전에 내가 읽었다.

샌드라 스타인그래버의 '모성혁명'(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57957) 이나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https://blog.aladin.co.kr/hahayo/7620022) 가 생각났다. 여성저자가 엄마가 되는 경험 안에서 백신에 대한 논쟁에 대하여 서술한다는 면에서, 모성혁명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여성저자가 쓴 짧은 쪽글들을 묶었다는 면에서, 리베카 솔닛의 책이 떠올랐다.

1세계 여성저자가 자신을 드러내고 썼고,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인 설명보다 언어적인 설명, 언어의 은유에 대해 말하고 있다. 비영어권 동양의 여성 독자가 그대로 공감하며 읽기에는 배경이 너무 다르다. 번역문제라는 불만도 많던데, 번역을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불안이 폭증하는 시기- 첫아이를 낳은 엄마의 죄책감과 불안함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결벽적인 기독교 문화, 이분법적인 언어환경에 대한 묘사들이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라면 좀 작작해라,라고 할 거 같다. 백신에 대한 각각의 쪽글들이 가지는 애매한 포지션- 백신에는 찬성하지만, 왜 반대하는지도 알 것 같아요????-도 독서를 방해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여자들의 테러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1년 5월
평점 :
판매중지


친구가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면서 권했다. 브래디 마카코의 '아이들의 계급투쟁'에서 어떤 일본인 특유의 나약함이 느껴졌었던 나는(https://blog.aladin.co.kr/hahayo/11475164), 살짝 꺼려지는 마음이 있었다.

책은 세 명의 여자를 엮었다. 일본의 가네코 후미코, 에밀리 데이비슨, 마거릿 스키니더. 저자인 브래디 마카코는 영국에서 살고 있는 일본여성이다. 가네코 후미코가 천황제에 저항했던 여성이라면, 에밀리 데이비슨은 여성참정권을 주장했던 급진 서프러제트였고, 마거릿 스키니더는 아일랜드 독립무장투쟁을 했던 여성이다. 나는 이 여성들이 가지는 마음들, 저항하는 마음을 모르지는 않지만, 이들의 강함이 지금 유효한 것인지 생각한다. 지금도 그런 목숨을 건 저항의 서사를 쓰고 싶어한다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여기를 가부장제의 폭압이 존재하는 곳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을 안다. 그렇지만, 정말 그러한가. 그럼 가부장제의 폭압을 깨뜨리기 위해 무엇을 주장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서 나는 뾰족하고도 강경한 대답을 찾지 못한다. 독립도 했고, 천황따위는 없고, 여성에게 참정권도 있고, 호주제도 폐지된 여기에서 이제 도대체 무엇이 더 필요한지 의문이 드는 지경이라서, 책 속의 심장을 끓어오르게 하는 서사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유효한가, 질문하면서 나는 어떤 여성을 강하다고 생각하는지 생각했다. 

내가 강하다고 생각하는 여성을 '한국인의 밥상'을 볼 때마다 만난다. 저것도 먹어, 싶은 풀들로 반찬을 만드는 어머니들,을 나는 강하다고 생각한다. 믿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서 버티고 키워내는 사람들을 강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으로라도 먹이기 위해 어쩌면 비굴을 감당하는 사람이 나는 강하다고 생각한다. 살아남아 전하는 사람, 아이를 키우는 사람, 악착같이 먹이는 사람을 나는 강하다고 생각한다. 강경한 자아가 존재했던 자리에, 다르지만 같은 마음으로 공존하기 위한 태도가 남는다. 살아남는 일, 살아내는 일, 무엇보다 어렵지 않나? 그 자체로 강한 게 아닌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거서 2021-09-08 0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면서 친구가 권하는 상황이 너무 좋습니다. 부럽습니다. ^^;
 

방구석1열에서 21세기로 새로 만든 영화 킹리어를 소개한 적이 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1APc7OK_XBw 

보면서, 나는 세상의 아버지들이란 참, 이라고 비웃었다. 

딸들을 앉혀놓고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고 아첨을 바라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나도 안다.

내가 아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전래동화다. 

세 자매를 앉혀 놓고 아버지는 '너희들이 누구 덕에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느냐?'라고 묻는다. 큰 딸이나 둘째 딸은 '아버지 덕'이라고 말하고, 셋째 딸은 '내 복'이라고 말한다. 내 복,이라고 대답하고 쫓겨난 딸이 가난한 숯장이와 결혼해서 숯가마의 금덩이를 발견해서 부자가 되어, 가난해진 부모를 다시 만나 봉양하는 이야기다. 


비극의 결이 다르고, 나는 자신만만한 어린 딸로 '내 복에 살지요'라고 대답하는 셋째 딸을 좋아했다. 지금 부모가 되어서도 역시 내 복에 산다는 그 자신만만한 셋째 딸을 좋아한다. 


아첨을 바라는 아버지의 의도와 다르게 실상은 어쩌면 각자 '내 복'에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아첨을 바라고 자신의 공을 딸에게 치하받기를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기를 원하지만, 부모 자식이라고 해도 각자의 삶이고, 각자의 삶은 모두 따로다. 부모의 공덕은 물론 있지만, 바랄수록 우스워지는 게 부모의 덕이고, 부모가 져야 하는 자식 삶의 무게는 이미 없다. 다 그저 내 복에 산다. 그걸로 충분하다. 

말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닌데, 도대체 아첨을 바라는 아버지란, 얼마나 어리석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해방 후 조림성공에 대한 자료를 봤다.(https://gang8806.tistory.com/886)

과거에 우거진 숲을 상상하지만 과연 그랬을까에 회의하는 내용이었다. 난방과 요리, 건축에 나무를 사용하는 경제에서 숲이 과연 있을 수 있었을까 질문하고 시작한다. 

조선잡사를 읽을 때도, 나뭇꾼은 한양도성 내 숲에서 나무를 할 수 없었다고, 더 멀리 나가 나무를 해서 팔아야 했다고 묘사한다. 인구가 늘어나고, 밀집되는 도시에서 어떤 에너지원을 쓰는지는 중요하다. 

자료 속에 60년대 70년대 나무 하나 없는 산들의 풍경과 휘몰아치는 조림의 역사가 나온다. 

보면서,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생각이 났다. 

그 책 속에서, 요리를 위해 나무를 쓰는 아프리카의 도시들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나무로 요리하는 도시들이 있는데, 어떻게 나무를 숲을 보호할 수 있겠냐고 항변하는 글이다. 발전소를 지어서 에너지원을 바꿔야 하는데, 그걸 종말론적 환경론자들이 그걸 막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월드뱅크가 나무를 심으라고 돈을 줬구나. 많은 나라들이 그 돈을 착복하고 나무를 심지 않았었구나. 우리 나라도 나무를 심는데 안 쓰고 시멘트공장과 연탄공장을 만들었구나. 그러고 월드뱅크 사람들에게 설명했구나. 나무로 집을 짓고, 나무로 난방을 하고, 나무로 요리를 하는데, 지금 그 돈으로 나무를 심는다한들 나무가 자라서 숲이 될 수가 없다, 석탄을 캐서 연탄으로 난방을 하고 시멘트로 집을 지어야 숲이 생긴다고. 그리고, 우리는 지금의 삶을 지금의 숲을 가지게 된 거구나. 자료 속의 경쟁하는 공무원도 재미있지만, 우리의 지금 산업화는 이미 산업화된 나라들의 돈이 마중물이 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 돈이 마중물이 되어, 잘 잡은 방향 위에 겨우 올라선 현재가 있다. 지금 우리나라와 같은 과정을 거칠 수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에 석탄발전소를 짓기 위한 투자가 좌절된다. 기후악당이라는 묘사 뒤에 아직 가난한 나라들의 에너지전환을 지원하는 비용이 꺽인다.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그 단계라는 게 있어야 하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풍요롭지 못하면 정치적 억압에 저항하지도 못하는데, 에너지전환이 없이 나무로 요리하던 상황에서 벗어날 수는 있나. 

우리가 석탄으로 난방하고, 석유나 가스로 요리하게 된 그 전환의 순간이 그 곳에도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 

지금 우리가 가졌던 어떤 단계나 과정을 다른 나라들이 가질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