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인숙 선생님의 양성평등 이야기
권인숙 지음, 유지연 그림 / 청년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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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학년이 되는 딸이 읽었으면 하고 샀다. 권인숙선생님이 자신의 딸에게 주는 여성학 입문서는 나에게는 익숙한 담론들이라 새롭지는 않았다. 아이가 어떻게 읽을지는 모르겠는데, 우선 읽기는 할런지 의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있던 나의 상황 때문에, 아주 작은 묘사에 격하게 공감했다. 책에 딱 한 줄 일터에서 여성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일방적이며 순종적 상하 관계로 훈련된 조직 문화에서는 여성이 상대적으로 더 어려움을 겪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여성은 평등하고 정서적 관계에 더 익숙하니까 말이야'라는 설명을 읽었다. 이 대목은 어쩌면, 군대식의 조직문화를 가진 일터의 문제점을 묘사하기 위한 거였고, 여성의 '평등하고 정서적 관계'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 때, 여성들의 모임에서 혼자만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되어서는 누구도 설득하지 못한 지경이어서 왜 이렇게까지 서로 대화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심지어 장,이었으니까, 적어도 장,에게는 좀 더 발언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지경이었는데, 내가 들은 대답은 '장은, 대표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게 아니라, 여러 의견을 대리하기만 해야 한다'였다. 말을 하지도 못하게 하고, 내 말은 듣지도 않는 지경에 처해서 참담한 와중에 결국 그 말들은 남성인 다른 장,에게 가서 깨졌다.
책에서 그 대목을 만난 순간, 나는 아, 여성의 조직은, 평등하고 정서적 관계를 원하기 때문에, 다른 의견을 수용하지 못하는 구나,라고 수긍했다. 나는, 보통은 남자들 가운데 혼자 여자였던 경우가 많아서, 내 의견이 하나뿐인 걸 그 상태로도 이해하고 있었고, 그 하나 뿐인 의견을 말하는 게 꺼려졌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여성인 채로, 말단인 채로, 혹은 지금 고참직원인 채로, 차츰 발언권이 생기고 있다고도 느꼈다. 그런데, 여성의 조직에서, 내가 장이라고 해도-아, 손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장이기는 합니다만- 권위로 의견을 무시하지 않았던 나의 동료나 후배들이, 내 의견이 하나뿐이라고 무시하는 상황에 처해지니, 착잡했다. 언제나 말할 시간은 부족하고, 비어버린 소통 가운데 효율,만이 남아서, 평등하고 정서적 관계, 안에서도 나는 고립된다.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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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7-01-24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절한 예가 되겠지만 모르겠지만, 딸과 딸 친구들의 관계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습니다.

별족 2017-01-24 09:11   좋아요 0 | URL
이러나 저러나, 균형잡기의 문제가 -_-;;;
 
지연된 정의 - 백수 기자와 파산 변호사의 재심 프로젝트 셜록 1
박상규.박준영 지음 / 후마니타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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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조직은, 개인보다 힘이 세다. 하나보다 둘이 강한 것처럼, 늘어난 사람 수 만큼 힘이 세지고, 다시, 책임 질 일을 나눠 진 만큼 무책임해진다. 그래서, 조직에 속한 사람은 조직 밖이 두렵고, 입이 없다. 조직에 속하면서, 나눠 맡은 일은, 내 조직의 일이라도,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고, 자신의 위치나 역할에서는 건조한 극단까지-전체를 보는 존재라면 고민해야 하는 것을, 부분을 보고 고민하지 않는- 치달을 수 있다. 사회 안 에서라면, 교사나 경찰 같은 직업군의 직업병,이 있을 테지만, 다시 그 직업군 안에서는 다시 자기 분야의 특화된 직업병이 존재한다. 조직에 속한 채로 조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조직의 수장 쯤 될 거고, 조직의 수장이라면 벌어지는 일들과는 멀고, 또 조직의 사람들을 책임지는 자리니만큼 한계가 있다. 조직에 대한 어떤 말도, 조직에 속한 사람은 말하기 힘들고, 결국 입은 사라진다. 그래서, 조직에 대한 말들은 대개 조직을 벗어난 자유인들에게서 나오고, 그 말들 속에 조직은 위험하고 한심하고, 때로는 왜 존재하는지 이유조차 알 수 없다. 

책은, 오마이에 기사를 송고하는 언니가 사줘서 읽었다. 사인까지 받아 준 책은, 다음 스토리펀딩으로도 몇 번 구경한 이야기였다. 국가폭력에 살인자로 누명을 쓴 사람들,이 등장한다. 법적 지원없이,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들이 누명을 썼다. 진범이 등장해도, 경찰과 검찰은 그저 실수를 인정할 수 없어서, 인정하기 싫어서, 억울한 사람들을 방치한다. 책 속에 등장한 억울한 다섯사람 중 넷은 수감 중에 진범이 잡혔지만, 형을 모두 살고도 십수년이 지난 후에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나는 조직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서, 그 경찰이나 검찰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계속 생각한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왜 때리고, 협박해서 자백을 받았을까, 왜 진범이 나타났을 때 되돌리지 못했을까.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국가권력의 엄정함,은 얼마나 절대적인 것이길래 그랬을까. 아마도, 책임을 나눠졌으니, 상사가 사건을 이관하라면 넘겼겠지, 싶고, 아마도 평가를 받을 테니 범인을 빨리 잡아 사건을 종결하고도 싶었겠지, 싶다. 중요도의 선과 후가 바뀌고 본말이 전도되어도, 조직 내에서 사건을 빨리 해결한 사람, 잡음이 없는 사람이 아마도 승격했겠지 싶은 거다. 조직은, 조직 안에 사람들이 존재이유를 더이상 성찰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쉽게 타락한다. 그래서 조직 안에 사람들은 조직 안에 책임을 나눠져서 무책임해진 사람의 태도 말고, 결국 조직을 벗어날 사람으로 자신의 일을 보고 대해야 하는 거다. 그런 마음과 그런 태도를 지켜야 한다. 아무리 용맹한 개인이 깨뜨린다고 말해도, 알고 있다. 조직은 개인보다 세고, 조직에 속한 그 각각의 개인들은 조직 속의 개인이 아닌 사회 속의 개인에 대해서 균형감각을 가져야만 하는 거다. 그게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내부적인 노력과, 개개인의 성찰, 조직 바깥에서의 노력, 모두 다 필요하다. 모두, 힘 내서, 조직이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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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가 들려주는 백설 공주 이야기 피리 부는 카멜레온 197
제럴드 게럴스 그림, 낸시 로웬 글, 최용은 옮김 / 키즈엠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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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받아 온 책이다. 이야기 속의 다른 등장인물의 관점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들 중에-늑대가 들려주는 빨간모자 이야기와 야수가 들려주는 미녀와 야수 이야기를 가지고 온 적이 있다- 하나고, 그런 과정에서 주인공에 대한 미화가 사라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백설공주 이야기를 다섯째 난장이 입장에서 듣고 있자니, 친구 뒷담화하는 걸 듣는 것처럼 불편했다. 세 번이나 마녀에게 속아넘어간 백설공주의 어떤 성정을 묘사하기 위해서였겠지만, 건망증이 심하다,라고 묘사하는 것은 거부감이 들었다. 백설공주는 착했던 거야, 불쌍한 할머니가 애써 방문한 그 오두막에서 그 할머니를 그냥 보내기 힘들었던 거라고, 그건 나쁜 태도가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었다. 난장이가 백설공주의 그런 성정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였다고 말하지만, 왕자까지 건망증 대마왕으로 묘사되고 보니, 원래 백설공주 이야기의 교훈은 뭐였나, 이런 생각을 했다. 교훈,따위는 없는 거였어도, 원래 이야기에는 무언가 여즉 살아남을만한 무언가가 있었던 거야,라는 생각 말이다. 

그러다가, 아마도 내가 나이드는 중이라서, 이 이야기가 여즉 살아남은 것은 자명한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름다움이라도, 절세의 아름다움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다음 세대에 자리를 내어주게 마련이라는 것. 그걸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고, 결국 악해진다는 것, 말이다. 아름다움이 아니라, 권력이라도, 그건 마찬가지다. 다들 아는 그 자명한 것이, 이야기 속에 있기 때문에 아직도 여전히 읽히고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권력이나 돈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자명한 것들을 거스르려고 행하는 무수한 노력들이 마녀가 거울을 보며 찬탄하는 태도처럼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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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민주주의거든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조홍민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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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읽고 싶었는데, 이사를 해야 해서, 책짐이 무서워서 이제야 읽었다. 

너무 읽고 싶은 이유가, 책 제목 때문이었는지, 저자가 '사요나라 갱들이여'의 그 작가여서였는지는 모르겠다. 

책은, 2011년 3월부터 2015년 3월까지, 매달 하나씩 쓴 논평을 모아 놓았다. 2011년 3월에 벌어진 후쿠시마 원전의 폭발사고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독도문제도, 혐한시위나 반일감정에 대한 이야기도, 교육의 문제도, 비정규직의 문제도, 거의 세습되다시피하는 정치의 문제도 이야기한다. 

일본의 이야기들이라서 생소한 사건들을 토막의 쪽글로 읽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하고, 글들이 인용하는 사람도, 잡지도 알지 못할 때는 좀 바보같다고 느껴졌지만 다른 풍경은 아니었다. 

오래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진지한 선생님이 그려지는 글들이었다. 


'연민의 바다'를 향해,를 읽다가 소통에 결국 실패한 순간, 내가 느꼈던 막막함을 얼마만큼은 설명해주는 대목이라 연필을 찾아 밑줄을 쳤다. 


'난폭한 주장'따위가 아니야,는 내가 느끼는 두려움, 교실에서 등수를 모두 불렀다는 아이의 담임 선생님께 '그건 교육적이지 않습니다'라고 민원을 넣었다가, 시험 잘 본 딸이 자기 등수를 알려달라고 엄마가 그런 말을 해가지고 선생님이 안 알려준다며 항의하는 지경에 처한 내가 느끼는 그런 고독감,에 대한 말 같아서 작가의 말도 아닌 작가의 인용에 줄을 쳤다. 아이들과 선생님이 교육과정까지 함께 짠다는 실험적 공교육을 운영하던 사람이 한 말이었다. 


'피해자의 아량, 가해자의 신중함'에서 이 대목은 우리나라에서도 결국 절판이나 수정출판된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 부분도 작가가 들어 인용한 부분이다. 

인간은 논리로 세계 전체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하지 않다. 논리야말로 공동체를 닫아버릴 때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외부를 이해하는 별개의 원리를 필요로 한다. 그 탐구 끝에 우리가 도달한 결론은, ‘깊은 생각과 충분한 논의‘가 닫아버리는 소우주의 외부에 ‘연민의 바다‘가 펼쳐지고, 네트워크와 동물성을 통해 임의의 공감이 여기저기서 발화하고 있는 그러한 모델이다. (p44 ‘연민의 바다‘를 향해)

저항이 있는 쪽은 사실 현장의 지자체나 교사나 학부모들이에요(p83 ‘난폭한 주장‘따위가 아니야)

과거는 항상 현재의 심판을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p89, 피해자의 아량, 가해자의 신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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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언트 - 영어 유창성의 비밀
조승연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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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더라. '옆에 한국사람 없으면, 더 잘 말할 수 있어'라고 말한 적 있다. 하고 싶은 말의 수준이라는 것이 얄팍하기 그지없는데, -이게 뷔페인가요? 나 이게 얼마인가요? 정도- 옆에 한국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품평이 무서워서 입이 안 떨어지는 내 자신을 알기 때문이다. 배울만큼 배웠지만, 유창해지기 전까지 말하기보다 듣고 품평하기를 즐기는 사람들 속에서 영어,처럼 계급적인 언어를 입밖으로 꺼내기가 어렵다는 거지. 뭐, 더 잘 말한다고 해도 부끄러운 수준인 건 알고 있다. 다국적의 사람들이 영어로 수업받는 교육에 갔다가 '대학은 졸업했느냐'라는 질문도 받아봤다. 그건, 그 나라가 공식어로 영어를 쓰는 나라였다는 것은 차치하고, 내가 형편없는 영어 말하기를 구사하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는 거지. 그때의 나는 잘하고 싶었지만, 지금의 나는, 도대체 왜,라는 지경이다. 아이쿠, 공식어가 영어가 아니어서 나라에 말과 글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어이쿠, 내가 살면서 여즉 영어쓰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는데, 만났어도 하고 싶은 말이 없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까도 싶고. 영어를 아무리 잘 해도, 하고 싶은 말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싶어가지고는 그래 영어공부 그만하자, 가 되었다.

책은, '인문학적 지식이 풍부하다'는 서재 분의 소개 때문에 읽기로 한 거였고, 동기부여를 위한 도입부에 뚱해졌다가(일본에서 영어는 한 마디도 못하는 박사도 노벨상을 받거든, 그러니까, 언어가 아니라 내용이라고), 영어의 구조나, 우리말의 구조, 동서양 사고방식의 차이 등을 재미나게 읽다가, 유창해지려면, 이것저것 하라는 대목에서 더 읽기 싫어진 거다.

아, 영어가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의사소통하기 위해 구사했던 방식이구나. 영어에 유창해진다는 것은, 그 문화에 유창해지는 거라서, 차라리, 영어를 못하는 이방인으로 나를 대할 때, 그 사람이 내게 더 관대해지는 거구나, 까지 읽은 다음이니. 아 도대체 왜 유창해지겠어,가 되는 거다.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할 수 있어야 소통이 되지요,라고 묻는다면, 아, 제가 최근에 우리말로도 설득에 실패했어요. 라고 말하고 싶다. 문화를 공유하고,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제가 소외감을 느낀다구요. 더 많이 더 얄팍하게 말하면서, 어떤 만족감을 느낄지 알 수 없는데, 우리 말도 못하는 주제에 영어가 유창해질 때까지 어이쿠 그 공부 안 할래요,가 된 거다.

 

그 다국적 수업에서 나는 그 수업에 참여한 선배 여성들에게 묻고 싶은 말을 묻고, 대답도 들었다. 대화를 가로막는 장벽은 발음을 품평하는 나의 태도나, 귀기울여 듣지 않는 나의 무심함이었지, 마구 토막나 흩어지는 엉망진창 영어단어들이 아니었다.


* 지금 막 끝까지 읽었다. 다른 언어를 익히는 게 다른 영혼을 갖는 거라는데, 책 속에 분열된 자아가 폭발한다. 언어학이나 인문학 책으로 만들었다면, 책이 안 팔릴 거라서 이렇게 썼는지 모르겠으나, 언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글로벌 링구아 프랑카인 영어를 마스터하는 것이, 한국이라는 좁은 우물을 빠져나와 세계인을 이해함으로써 세계평화에 기여할 거라는데. 이해가 되냐고 되묻고 싶다. 언어 전쟁에 우리 말이 살아남도록, 우리 말을 더 열심히 써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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