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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나목.도둑맞은 가난 ㅣ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1
박완서 지음 / 민음사 / 2012년 7월
평점 :
티비를 보다가 나목,이 박완서 작가가 젊은 날에 만난 박수근 화백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서 읽어보고 싶었다. 책을 골라 읽기 시작했는데, 표제작은 나목,과 도둑맞은 가난이고 훨씬 많은 단편소설이 들어있는 단편소설집이다.
전쟁과 가난, 속의 여자들이 화자다.
(나목)전쟁의 참화 속에 가족을 잃은 젊은 여자는 살아남은 어머니에게 왜 너는 살고, 오라비들은 죽었는가 원망의 말을 들으면서 반쯤 무너진 집에서 산다. 미군부대의 초상화 그려주는 가게에서 통역으로 일하는 젊은 여자는, 모두 다 불행해졌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나에게 이미 불행이 닥쳤으니, 이 전쟁이 계속되어 모두 다 똑같이 불행해지기는 미래를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암울한 태도 가운데, 만난 화가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서 선망하게 된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살아갈 수 있지,라는 선망의 태도가 드러난다.
(부처님 근처) 해방 이후 좌우대립과 전쟁으로 가족의 죽음을 온전히 애도하지 못하는 여자가 화자다. 똑같은 처지의 어머니는 불교에 매달리고, 여자는 듣지 않는 이야기를 계속 하고 싶어한다.
(지렁이 울음소리) 안온한 삶에서 모험을 바라는 여자는 여고시절 불만 많던 선생님을 다시 만나서는 젊은 시절 거친 성정을 잃은 듯한 스승이 다시 한 번 거칠어지기를 바라면서 만난다.
(이별의 김포공항) 화자는 할머니, 전쟁을 겪었고, 모진 세월 속에 아이들을 길렀지만, 아이들은 가난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나라를 지금은 떠나 뿔뿔이 흩어져 있다. 미국,이라는 이상향으로 떠난 딸에게 가는 비행기 안에서 희망에 부풀어 떠나는 젊은이들 가운데서 뿌리뽑힌 심정이 된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전쟁과 가난 끝에 무언가를 잃고 질주하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양공주가 되어서라도 가족 건사하기를 요구받던 젊은 여자는 내쳐지듯 결혼한 첫 결혼에서 아이없이 이혼하고, 글을 통해 흠모하던 지방의 시간강사와 결혼해서는 글과 다른 삶의 모순에 참지 못하고 이혼하고, 지금 세번째 투명하게 부를 추구하는 장사꾼과 결혼해서 다시 무언가 참지 못하는 순간들을 직면하고 있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내가 그건 잘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다.
(카메라와 워커) 오빠의 아이, 조카를 애지중지 키우는 고모와 할머니는 생각이 많은 게 화가 될까 봐 기술을 배우라고 아이를 다그치고 경로를 정해주고는, 멀리 고속도로 현장에서 일하는 조카를 만나서는 혼란에 빠진다.
(도둑맞은 가난) 가난을 견디지 못하는 어머니는 허영심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죽었다. 살아남은 딸인 화자는 꿋꿋이 가난 가운데 살아내는 와중에, 남자를 만나 사랑한다고 믿었다. 같이 살자는 말은 자기가 했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듣고 싶었는데, 남자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 가난하지 않은 자신이 부자 아버지의 시험 가운데, 가난을 겪었던 거라면서 시혜를 베풀려 한다. 가난조차 도둑맞은 기분이 되는 여자의 이야기다.
이 책을 읽을 때 '전쟁같은 맛'도 읽고 있었는데, 아래는 화자가 자기자신을 거대하게 생각하지 않는 태도가 대조적이어서 남겨두기로 했다. 젊은 여자가 세상 모든 걸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아니면 세상을 가진 남자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자신만만할 수도 있었을 젊은 여자가 '나는 꼭 그만큼만 다른 여자와 다를 뿐인데' 라고 말하는 게 듣기 좋았다. 사랑하지 않은 남자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싶지 않은 태도가 있는 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태도가 나는 좋았다.
사람들이 제각기 생김새나 성격이 조금씩 다른 것만큼 꼭 그만큼만 나는 딴 여자들과 다를 뿐인데, 태수가 나한테 바라는 것은 그만큼만은 아닌 모양이니 말이다. 그는 내가 마치 시궁창 속에서 피어난 장미꽃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눈치였고, 나는 그의 간절한 태도를 봐서라도 다소곳이 그런 척이라도 해줘야겠는데 그게 도무지 쑥스럽고 귀찮았다. 결국 나는 서툰 연기를 하면서까지 그의 마음에 들어야 할 까닭이 없는 거였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는 사이의 홀가분함을 한 발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80/462 나목)
적당히 크고 든든한 손이었다. 사람들이 육신을 지녔다는 것 얼마나 크나큰 축복일까?
"아직도 볼이 붉은 소년이 있는 집을 꿈꾸나요?"
"왜 나빠? 볼이 붉은 사내아이, 착한 아내, 찌개 끓는 화로, 커튼 늘어진 창, 그런 건 너무 평범해서 경아야 뭐 흥미 있을라구."
"흥미가 있어지는군요, 점점."
"점점?"
"네, 점점 색칠을 하듯, 눈에 보이게 그런 것이 흥미 있어지는군요. 꿈이 아닌 모든 것이, 수증기가 아닌 모든 것이. 다시는 꿈을 꾸기도, 남의 꿈이 되기도 싫어요, 다시는."- (276/462 나목)
인간은 몸이 있어 경험한다. 어쩌면 소박한 소망들이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서 이 대목을 남겼다.
모든 체험은 시간과 함께 뒤로 물러나 원경이 됨으로써 말초적인 것들이 생략되는 대신 비로소 그 전모를 드러낸다. -(309/462 부처님 근처)
꼭 뭣에 홀린 듯 신나는 분주 끝에 오는 절망적인 우두망 찰 (365/462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나는 그럴 때 정신이 나가는 게 아니라 드는 느낌이었다. 비행기 소리가 멀어지고 들들대던 유리창도 멎은 후의 해맑은 정적의 일순, 나는 우리 살림이 얼마나 어벙한 허구 위에 섰나를 똑똑히 보는 것이었다.(365/462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도둑맞은 가난,은 읽으면서 100년이 지난 것도 아닌데, 말이 참 많이 달라졌구나, 느꼈다.
얼마나 많은 말들을 잃고, 사람들을 잃고, 생각을 잃고 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