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한자의 풍경 - 문자의 탄생과 변주에 담긴 예술과 상상력
이승훈 지음 / 사계절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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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었다. 

문자에 대한 이야기지만, 문자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은 순간들에 그렇지 문자란 살아 움직이고 언제나 변화하지,라고 생각했다. 

뼈 위에 새겨지던 문자가, 청동기 위에 남기던 문자가, 대나무 위에, 나무판 위에서 비단 위에 종이 위에 옮겨지고, 지배계층의 제사와 전쟁에 사용되던 문자가 모두에게 사용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떤 삶들이 문자에 남아있는지 이야기한다. 

종교적인 의미들로 형상을 묘사하던 한자의 초기 모습이 어떻게 간략화되었고 변화되었고, 다시 소리를 의미하는 방식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았음을 듣는다. 오래 전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축소된 형상 가운데 추정하고, 그 때 모두들 알아차린 그 형상이 지금은 그저 한자로만 남아 있다. 간략화되고, 변화하고, 피와 살이 튀던 원형은 은유로 남고, 사람들의 삶 속에 아직까지 살아남았다. 이런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책의 모습은 고대의 제사장 이야기였다가, 춘추전국의 전쟁이야기였다가, 발굴되는 죽간들로 한 번씩 점프하는 연구의 이야기였다가, 서체로 묘사되는 어떤 예술에 대한 이야기도 된다. 재미있다. 


문자를 사용했던 5000년이라는 시간은 인간 진화의 전체 과정에서 볼 때 너무나 찰나이기 때문에, 뇌에 문자를 읽기에 적합한 구조가 만들어질 여유가 없었다. 인간의 뇌는 오랜 기간 동안 수렵채집자로서 생존에 적합한 구조로 진화되었다. 그래서 『글 읽는 뇌』의 저자 스타니슬라스 드앤은 인간의 뇌와 문자의 관계를 간명한 한 문장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아프리카 초원에서 생존하도록 설계된 뇌를 이용하여 셰익스피어를 즐기고 있는 것이라고. - 16%


그러나 문자를 배운 도시인들은 이런 자연의 신호 앞에 까막눈이 되어버린다. 한번 문자 상자를 활성화시킨 사람은 문맹자가 쉽게 구별해내는 자연계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는 a와 A가 같은 문자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문맹자를 무시하지만, 그들은 바로 눈앞에 찍힌 맹수의 발자국도 구별하지 못해 곧 죽을 운명이 닥쳐오는 것도 모르는 우리를 보면서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문자를 얻은 인간은 생존에 필요했던 섬세한 시각 분별 능력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17%


새것을 만들 때는 아무런 바탕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할 수 없다. 익숙한 무언가를 기점으로 삼아 그곳에서 상상을 시작한다. 창의성이란 아무런 토대가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경험에 축적된 뇌의 영역 간 새로운 연결을 통해 생겨난다. - 32%


『한비자』의 "세상에서 제일 그리기 어려운 것"에 얽힌 이야기는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한 것이다. 

제나라 왕에게 그림을 그려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제나라 왕이 물었다. "세상에서 제일 그리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화가가 대답했다. "개와 말이 가장 어렵지요."

왕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리기 가장 쉬운 것은 무엇인가?" 

화가가 대답했다. "귀신 따위를 그리기가 가장 쉽지요. 개나 말은 사람들이 다 아는 것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종을 치면 눈앞에 나타나기에 아무렇게나 추측하여 그릴 수는 없지요. 그러나 귀신은 형태가 없으며 종을 쳐도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니 그리기 쉬운 것입니다." - 『한비자』「외저설좌상(外儲設左上)」- 31%


하지만 음악을 통한 이런 동질화는 유가가 강조하는 차별적인 예를 구현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예기』에서 『악경』의 나머지 부분을 복원하지 않았던 이유도 이렇게 차별적인 예를 구현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음악의 속성을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은 서로를 같아지게 하는 것이고, 예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다. - 33%


주나라 초기 천의 개념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아직 인격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지만, 상제는 더 이상 마음대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상나라의 멸망은 신의 변심이나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왕이 절제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도덕적인 기준을 지키지 못해 자초한 것이다. 하늘의 결정 기준은 하늘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이 세상 인간들의 행위에 있었다. 이제부터 인간은 스스로 도덕과 원칙을 지킨다면 하늘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45%


최근 연구에 의하면 한족이라는 범주는 유전적 계통으로도 구분되지 않는 비과학적 범주이다. 그렇다면 한족이라는 정체성을 설명할 유일한 요소는 한자를 지속적으로 사용해온 사람들의 집합이라는 것뿐이다. - 47%


여기서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이 진행되지 않았고, 철학자에 의해 이성과 감성, 진리와 가상을 구분하는 이중 세계가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이오니아학파 철학에서 진리는 도덕이나 감정과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결국 문자의보급이 세계관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 49%


높다는 개념이 이렇게 추상적인 의미까지 확장된 것은 인간의 거의 모든 언어에서 나타난 공통적인 현상이다. 대부분의 언어에서 높다(高, high)라는 단어는 '높은 계급[고관(高官, high-class)]'에 있는 '고귀한 분(高貴, Highness)'의 '고결하고(高潔, high-souled)' '숭고한(崇高, high-minded)' 태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추상개념은 주로 인간의 신체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감각을 빌려 표현된다.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이를 개념 은유라는 틀로 설명한다, - 50%


공자는 주공의 세계관을 이상으로 따르며, 상나라의 주술적 세계관을 일관되게 부정한다. 주나라 초기 사회야말로 죽은 조상에 대한 숭배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 질서로서 예를 강조하고, 외형적 겉치레와 화려한 의식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건한 덕을 중요시했다고 믿었던 것이다.- 62%


그런데 중국의 청동기 시대에 청동제 생산도구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주장은, 인류 사회의 보편적 역사 발전 단계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유물사관 설명과 부합하지 않는다. 유물사관은 기술의 3단계 발전 순서를 따라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인류가 진보했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중국 청동기 시대의 독자적인 특수성을 강조했던 뇌해종과 진몽가는 한 때 유물사관에 반하는 반혁명 우파로 몰려 학술 활동이 금지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 64%


이 지역 사람들은 황하라는 큰 강을 끼고 있지만, 정작 필요할 때는 물이 부족하고 필요하지 않을 때 오히려 물이 넘쳐나는 역설적 환경 속에서 생존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옛날부터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여 홍수 방지용 제방 공사를 추진할 막강한 권력자의 출현을 반기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춘추 시대 최초의 패자 제환공과 진문공이 등장했던 곳이 바로 산동에 위치한 제나라와 진나라였다.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기후 환경적 요소는 이 지역의 정치 구조를 결정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 69%


그렇기 때문에 전통 시기 지식인은 유가 사상가로서 관리가 되어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소명이었지만, 자유분방한 노장의 예술적 상상력을 겸비하지 않으면 속된 사람으로 천시받기도 했다. 유(有)의 철학으로서 유가와 무(無)의 철학으로서 노장이라는 두 사상이 지식인의 마음 속에서 서로 대립하면서도 조화를 이루어야 했다. - 72%


서쪽 변방의 진(秦)나라가 강국이 된 것은 급진적 법가 사상가 상앙이 기원전 356년 무렵 시행했던 일련의 정책 덕분이었다. 이때부터 진은 기존의 봉건적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조직을 갖춘 제국으로 발전했다. 대규모 종족 조직을 상호 감시가 가능한 소규모 가족 단위로 재조정하고, 위법한 자에게 가혹한 조치를 취했다. 세습적 지위나 특권은 점차 사라졌고 국가에서 인정받은 공로가 있어야만 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 - 75%


이 모든 문제의 발단은 오래된 자형인 소전체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당시 통용되는 예서체 글자를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끼워 맞춘 것이다. 이런 문자 왜곡은 단순한 오락에 그치지 않고 한 사회의 정서에 해악을 끼쳤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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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요시노 겐자부로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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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다음에 책을 구해 읽었다. 

어른이 아이들을 위해 쓴 책이다. 아버지를 잃은 소년의 외삼촌이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적어서 건네는 노트와 같은 구성이다. 소년이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있고, 그 사건들 다음에 외삼촌이 소년에게 건네는 이야기가 있다. 어렸을 때 읽은 '사랑의 학교'가 생각났다. 

영화를 볼 때는, 잘못을 저지른 자국에 대한 변명이다,라는 식의 평가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소설로 읽으니까, 뭔가 불편한 감정이 생기는 게 신기했다. 소년은 아버지가 없지만, 부유하고, 그 부유함의 배경은 없다. 1930년대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부유한 소년과 소년의 친구들 사이에서 식민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결국 아이에게 어른이 해 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나는 이미 어른인데다가 식민지 조선인이었을 거라서 걸리는 감정들이 생긴다.

아이에게, 얼마나 정직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닥치고, 어른이 가지는 모순된 감정들이 닥친다. 아이들은 단순하고 극단적이기 때문에, 이야기 가운데 아이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어서 이 소설의 단순하고 밝은 톤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다가도, 억울하다는 마음이 생기는 거다.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어른들이, 아이들은 보호한답시고, 아이들에게 다른 미래를 주겠다고, 아이들을 집에 두고 밖에 나가 나쁜 짓을 하고 있었어. 이 정도 이야기조차 금서라고 막았다고.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 다시 어른이 되었을 때, 나쁘지 않은 세상은 가능한가 생각하는 거다. 잔인함을 적당히 막아서야 하지만, 지나치게 톤 다운시킨 이야기 가운데, 삶의 잔인함을 직시할 수도 없는 아이들을 키웠던가 회의하기도 하는 거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을 아이들도 느낄 지 궁금한다.

아이들의 요구를 들으면서, 부모인 내가 어때야 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는지 생각한다. 


네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또는 세상이 인정하는 대로만 살아간다면 언제까지나 자립한 사람이 될 수 없단다. 어린아이일 때는 그렇게만 해도 돼. 하지만 지금 네 나이라면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단다. 중요한 건 세상의 눈이 아니라 네 눈이야. 네 눈이 무엇에서 사람의 훌륭함을 찾고 있는지, 그것을 네 영혼이 알고 있어야 한단다. 그리고 진심으로 네가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져야 해.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 때도, 네가 그것을 좋아한다고 확신할 때도 그 감정은 언제나 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단다. 기타미를 따라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삶에는 "누가 뭐래도"하는 오기가 필요하단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와 네 엄마가 바라는 것처럼 훌륭한 사람은 될 수 없어.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꿈꾸면서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단지 겉으로 '훌륭해 보이는 사람'이 될 뿐 네 자신에게 떳떳한 '훌륭한 사람'은 되지 못한단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그들은 남들 눈에 비치는 자기 모습에만 신경 쓰다가 결국 진짜 나는 누구인지 잊어버리고는 하지. 나는 네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코페르, 다시 한번 말하는데 네 마음이 감동받을 때와 네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렴. 그 기분을 잊지 말고 언제나 그 뜻을 생각해 보도록 해 -p52~53, 용감한 친구


어머니는 코페르를 보지 않고 뜨개질을 계속하면서 말했다. 

"너도 언젠가는 엄마가 겪은 일과 비슷한 경험을 할 거라고 생각해. 어쩌면 엄마가 겪었던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몰라. 그리고 엄마보다 더 많이 후회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네 인생에 손해가 되지는 않을 거야. 단순히 그 일만 놓고 본다면 되돌리고 싶을 만큼 잘못했다 싶겠지. 하지만 그렇게 후회해서 중요한 것을 알게 된다면 그 경험은 절대로 나쁜 게 아니야. 그런 일을 겪으면서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 가는 거란다. 너도 그만큼 훌륭한 인간이 되는 거고.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너 자신에게 실망해서는 안 돼. 네가 실수를 이겨 내고 다시 일어선다면 누군가는 그 노력과 마음을 알아 줄 거야. 사람들이 몰라주더라도 하느님은 분명히 보고 계실 거야."-p215~216, 돌층계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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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나를 찾고 너를 만나: 유학자와 함께 일상에서 철학하기
금장태 지음 / 바오로딸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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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학에 호감이 있고, 기독교에는 편견이 있다. 

유학이 꽤나 이성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의심이 들 때는 꼭 물을 것을 생각하고(사자소학의 구사九思 중)-, 이렇게 이성적인 유학자가 어떻게 기독교도가 될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 https://blog.aladin.co.kr/hahayo/11596640 ) 를 구해 읽기도 했었다. 나의 호기심에는 먼저 읽은 책보다는 이 책이 더 맞는 거 같다. 

영성에 대한 이야기다. 

무언가 설명을 듣다가, 그래서 그게 뭔데?라는 질문이 닥치는 순간 조용히 눈을 들여다보면서 해야 하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글을 쓰는 동안 필자의 생각이 어둡고 이해도 얕아 벙어리가 꿈 이야기를 하려는 듯하여 말하는 사람으로서 답답함이 심했으니, 듣는 사람까지 답답하게 할까 두려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4%(머리말)


따라서 내가 '나'에게 어떤 나를 바라고 있는지, '나'를 어떤 품격의 존재로 알고 있는지 끊임없이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져 있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구절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인간존재로서 숙명적인 한계를 알라는 말도 되고, 사회 안에서 자신의 처지나 분수를 알라는 말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결코 고정된 사물이 아니다. 

'나'에는 이미 굳으져 형체를 드러내는 부분이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부분이 지금 형성되는 도중이고, 언제 어디로 얼마나 큰 힘이 터져 나올지 모르는 활화산같은 존재다. -5%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를 사랑할 수 있고, 자기를 가르쳐 준 스승을 사랑할 수 있으며, 조국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를 사랑하고 스승을 존경하고 조국을 사랑하라고 아무리 도리를 따져 가르쳐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공허한 말일 뿐이다. 그래서 맹자는 "자기를 해치는 자와는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자기를 저버리는 자와는 더불어 일을 할 수 없다 自暴者, 不可與有言也, 自棄者, 不可與有爲也" 맹자 7-10:1 고 했다.-7% (자기를 사랑해야)


사람은 언제나 잘못을 저지르고 난 다음에야 고칠 수 있으며, 마음이 괴롭고 생각이 막힌 다음에 분발하며, 안색에 나타나고 소리로 터져 나온 다음에 깨닫는다. 나라 안에는 법도 있는 집안과 보필하는 선비가 없고, 나라 밖으로 적국과 외환이 없으면, 그런 나라는 언제나 멸망하기 마련이다. 그런 다음에야 '우환 속에서 살아갈 수 있고 안락 속에서 죽게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맹자 12-15:1 - 19% (편안할 때 근심을 잊지 말아야)


자신의 기질이 지닌 문제점을 스스로 고칠 수 있다는 말은, 고칠 수 있는 것도 자신이요 고치지 않고 방치하는 것도 자신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 점이 자전거 같은 사물과 인간존재가 다른 점이다. 스스로 노력하고 있는 동안은 비록 고장이 난 상태라 하더라도 그것은 '자포자기'가 아니다. '자포자기'는 스스로 고치려는 생각도 의지도 없는 자기 파괴요 자기 부정인 것이다. ~ 하늘이 인간의 가능성을 끊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하늘이 주신 가능성을 끊은 죄를 지적한 것이다. '자포자기'란 바로 인간이 스스로 하늘을 끊은 '자절自絶'이라 하겠다.-26~27% (자포자기와 자절)


항상하면 긴장을 풀고 안심할 수 있으니, 그 편안함을 누구나 바란다. 변화하면 긴장해야 하고 불안해지니, 그 불편함을 누구나 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 변화는 숙명적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항상함이란 변화가 없는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그 변화를 조종할 수 있는 원리나 법칙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늘이 영원불변의 존재라는 말도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변화를 다 포함하면서 유지해가는 변함없는 근원이 된다는 것이고, 우리 마음에 항상한 성품과 지조가 있다는 것도 순간순간 변하는 마음에서 그 중심을 지속적으로 지켜주는 힘이라 하겠다.-27% (항상[常]과 변화[變])


우리의 몸이 활동하는 것은 그 바탕에 고요함이 중심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니, 항상 활동[動]과 고요함[靜]은 서로 보완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일하고 쉬는 것도 어느 한 쪽이 결핍되면 다른 쪽도 무너진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만 하고 쉴 줄을 모른다면 그 일의 바탕이 허약해져서 언제 병들고 주저앉을지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쉬기만 하고 일하지 않으면 그 휴식은 쓸모가 없어 저절로 녹슬어버릴 것이다.-30%(휴식에서 얻는 활력)


문제는 어떻게 해야 '덕'을 쌓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상'의 다섯 가지 '덕' 가운데서도 전체를 대표하는 덕이 '인 仁'인데, 정약용은 '인 仁'이라는 글자가 '사람[人]'과 '둘[二]'을 뜻하는 두 글자가 결합된 것임을 주목하여, 두 사람 사이에 행해야 할 도리라 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덕인 '인'은 바로 나와 너 두 사람 사이의 도리를 가르키는 말이다. 결국 사람답게 사는 도리는 내 속에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 속에서 드러나고 실현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했다. -33% (사람답게 사는 도리)


그래서 대중을 좀 더 쉽게 이끌어 덕으로 나아가게 하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깊은 산골에서 시냇물이 흘러내리다가 바위에 막히면 잠시 기다렸다가 가득 차면 바위를 넘어 다시 흘러간다는 점진적 방법이다. 세상 모든 사람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수 없을 때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하여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넓혀간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면 그 사랑이 이웃으로 넘쳐흐르게 한다. 사랑을 넓혀가고 채워과는 확충擴充의 방법이다. 사랑이 자신을 채우고 바깥으로 흘러 넓어질 때 인간다움의 덕도 커지고, 사랑이 자신 속으로 움츠러들 때 인간다움의 가치도 잃게 된다.-34% (사람답게 사는 도리)


예절이 질서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법률은 질서의 방어선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도 법률의 한계선조차 어기는 사람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으니, 이들은 형벌로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사람들이 사회의 아름다운 풍속과 질서를 자율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36%(예절과 준법정신)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사방에서 많은 은혜를 입는 것인데 감사하고 보답하기는 쉽지 않다. 반면 원망은 너무 쉽게 분출된다. 조금만 섭섭하거나 불편과 손해를 입으면 격분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것이 반복되거나 심화되면 원한을 품고 쉽사리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니 받은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더라도 남에 대한 원한이 맺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또 은혜를 베풀지는 못하더라도 원한을 사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 41% (은혜와 원한)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가장 대조되는 양상은 서양의 그리스도교와 동양의 유교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육신이야 부모에게서 받지만 생명의 핵심인 영혼은 하느님이 각자에게 부여한다. 그렇다면 영혼은 하느님 앞에 홀로 서는 존재이고, 육신은 영혼의 밑받침 역할을 하는 부차적인 것으로 본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그리스도교적 인간관, 곧 하느님 앞에 홀로 서는 존재로서의 인간관이 확산되어, 조상에 대한 관심이 희미해지고,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서 나의 위치는 더욱 뚜렷해졌다. 그만큼 개인주의가 팽배하게 된 것이다. 법률은 가족이 연좌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조상의 명성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비해 유교문화는 대대로 이어져 온 연속선 속에서 개인의 존재를 인정할 뿐이다.개인은 결코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온 사슬 가운데 하나의 고리라 할 수 있다. 하나의 고리로서는 완성된 개체이지만 전체의 사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본다. - 47%(조상과 자손)


율곡은 어두움의 병과 어지러움의 병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이치를 궁구하여 선을 밝힐 것 窮理以明善'과 '의지를 독실히 하여 기질을 통솔할 것 篤志以帥氣'을 제시하고, 나아가 '심성을 배양하여 참됨을 보존할 것 涵養以存誠'과 '성찰하여 거짓됨을 제거할 것 省察以去僞'의 네 조목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좀 더 쉽게 설명하여, "게으른 것이 병이 됨을 알면 부지런하고 독실함으로써 치료하며, 욕심이 병이 됨을 알면 이치를 따름으로써 치료하며, 자신을 엄격하게 단속하지 못함이 병이 됨을 알면 엄숙하고 장중함으로써 치료하며, 생각이 어지럽게 흩어짐이 병이 됨을 알면 한결같이 집중함으로써 치료하는 것이다. 병이 비록 나에게 있지만 약을 밖에서 구하지 않는다" [贈洪㽒(錫胤)說]고 했다. 마음의 병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하면 스스로 치료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95%(마음의 병과 치유법)


그러나 동시에 하늘은 인간을 감시하며 인간의 악에 재앙과 질병을 내리는 한없이 두려운 존재이기도 하다. 공자는 "하늘의 명령을 두려워한다 畏天命"[논어]16-8라 하여, 군자가 천명을 두려워하도록 강조했고,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天喪予"[논어]11-9라 하며 통곡하기도 했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려주셨고 나를 알아주신다고 믿고만 있을 수는 없다. 하늘은 언제 나를 버리고 죄 줄지 알 수 없는 두려운 존재다. 그만큼 하늘이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마음대로 나를 뒤흔들고 뒤바꾸어 놓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는 믿고 의지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하고 조심하지 않을 수 없지만, 더욱 절박한 것은 믿고 의지하는 것보다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것이다. - 99%(하늘을 우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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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나목.도둑맞은 가난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1
박완서 지음 / 민음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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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비를 보다가 나목,이 박완서 작가가 젊은 날에 만난 박수근 화백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서 읽어보고 싶었다. 책을 골라 읽기 시작했는데, 표제작은 나목,과 도둑맞은 가난이고 훨씬 많은 단편소설이 들어있는 단편소설집이다. 

전쟁과 가난, 속의 여자들이 화자다. 


(나목)전쟁의 참화 속에 가족을 잃은 젊은 여자는 살아남은 어머니에게 왜 너는 살고, 오라비들은 죽었는가 원망의 말을 들으면서 반쯤 무너진 집에서 산다. 미군부대의 초상화 그려주는 가게에서 통역으로 일하는 젊은 여자는, 모두 다 불행해졌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나에게 이미 불행이 닥쳤으니, 이 전쟁이 계속되어 모두 다 똑같이 불행해지기는 미래를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암울한 태도 가운데, 만난 화가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서 선망하게 된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살아갈 수 있지,라는 선망의 태도가 드러난다. 


(부처님 근처) 해방 이후 좌우대립과 전쟁으로 가족의 죽음을 온전히 애도하지 못하는 여자가 화자다. 똑같은 처지의 어머니는 불교에 매달리고, 여자는 듣지 않는 이야기를 계속 하고 싶어한다.  


(지렁이 울음소리) 안온한 삶에서 모험을 바라는 여자는 여고시절 불만 많던 선생님을 다시 만나서는 젊은 시절 거친 성정을 잃은 듯한 스승이 다시 한 번 거칠어지기를 바라면서 만난다.


(이별의 김포공항) 화자는 할머니, 전쟁을 겪었고, 모진 세월 속에 아이들을 길렀지만, 아이들은 가난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나라를 지금은 떠나 뿔뿔이 흩어져 있다. 미국,이라는 이상향으로 떠난 딸에게 가는 비행기 안에서 희망에 부풀어 떠나는 젊은이들 가운데서 뿌리뽑힌 심정이 된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전쟁과 가난 끝에 무언가를 잃고 질주하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양공주가 되어서라도 가족 건사하기를 요구받던 젊은 여자는 내쳐지듯 결혼한 첫 결혼에서 아이없이 이혼하고, 글을 통해 흠모하던 지방의 시간강사와 결혼해서는 글과 다른 삶의 모순에 참지 못하고 이혼하고, 지금 세번째 투명하게 부를 추구하는 장사꾼과 결혼해서 다시 무언가 참지 못하는 순간들을 직면하고 있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내가 그건 잘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다. 


(카메라와 워커) 오빠의 아이, 조카를 애지중지 키우는 고모와 할머니는 생각이 많은 게 화가 될까 봐 기술을 배우라고 아이를 다그치고 경로를 정해주고는, 멀리 고속도로 현장에서 일하는 조카를 만나서는 혼란에 빠진다. 


(도둑맞은 가난) 가난을 견디지 못하는 어머니는 허영심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죽었다. 살아남은 딸인 화자는 꿋꿋이 가난 가운데 살아내는 와중에, 남자를 만나 사랑한다고 믿었다. 같이 살자는 말은 자기가 했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듣고 싶었는데, 남자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 가난하지 않은 자신이 부자 아버지의 시험 가운데, 가난을 겪었던 거라면서 시혜를 베풀려 한다. 가난조차 도둑맞은 기분이 되는 여자의 이야기다. 


이 책을 읽을 때 '전쟁같은 맛'도 읽고 있었는데, 아래는 화자가 자기자신을 거대하게 생각하지 않는 태도가 대조적이어서 남겨두기로 했다. 젊은 여자가 세상 모든 걸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아니면 세상을 가진 남자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자신만만할 수도 있었을 젊은 여자가 '나는 꼭 그만큼만 다른 여자와 다를 뿐인데' 라고 말하는 게 듣기 좋았다. 사랑하지 않은 남자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싶지 않은 태도가 있는 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태도가 나는 좋았다. 


사람들이 제각기 생김새나 성격이 조금씩 다른 것만큼 꼭 그만큼만 나는 딴 여자들과 다를 뿐인데, 태수가 나한테 바라는 것은 그만큼만은 아닌 모양이니 말이다. 그는 내가 마치 시궁창 속에서 피어난 장미꽃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눈치였고, 나는 그의 간절한 태도를 봐서라도 다소곳이 그런 척이라도 해줘야겠는데 그게 도무지 쑥스럽고 귀찮았다. 결국 나는 서툰 연기를 하면서까지 그의 마음에 들어야 할 까닭이 없는 거였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는 사이의 홀가분함을 한 발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80/462 나목)


적당히 크고 든든한 손이었다. 사람들이 육신을 지녔다는 것 얼마나 크나큰 축복일까?

"아직도 볼이 붉은 소년이 있는 집을 꿈꾸나요?"

"왜 나빠? 볼이 붉은 사내아이, 착한 아내, 찌개 끓는 화로, 커튼 늘어진 창, 그런 건 너무 평범해서 경아야 뭐 흥미 있을라구."

"흥미가 있어지는군요, 점점."

"점점?"

"네, 점점 색칠을 하듯, 눈에 보이게 그런 것이 흥미 있어지는군요. 꿈이 아닌 모든 것이, 수증기가 아닌 모든 것이. 다시는 꿈을 꾸기도, 남의 꿈이 되기도 싫어요, 다시는."- (276/462 나목)

인간은 몸이 있어 경험한다. 어쩌면 소박한 소망들이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서 이 대목을 남겼다. 


모든 체험은 시간과 함께 뒤로 물러나 원경이 됨으로써 말초적인 것들이 생략되는 대신 비로소 그 전모를 드러낸다. -(309/462 부처님 근처)


꼭 뭣에 홀린 듯 신나는 분주 끝에 오는 절망적인 우두망 찰 (365/462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나는 그럴 때 정신이 나가는 게 아니라 드는 느낌이었다. 비행기 소리가 멀어지고 들들대던 유리창도 멎은 후의 해맑은 정적의 일순, 나는 우리 살림이 얼마나 어벙한 허구 위에 섰나를 똑똑히 보는 것이었다.(365/462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도둑맞은 가난,은 읽으면서 100년이 지난 것도 아닌데, 말이 참 많이 달라졌구나, 느꼈다. 

얼마나 많은 말들을 잃고, 사람들을 잃고, 생각을 잃고 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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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 지음, 주해연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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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겪고, 미국인 남성과 결혼해서, 동네의 유일한 동양인 아내가 되어 홀로 키우던 아들과 남편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키운 자신의 엄마에 대해, 그녀의 딸이 쓴 이야기다.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사회학자가 된 딸이, 조현병을 앓는 자신의 엄마를 돌보며, 어쩌면 음식을 통해 화해하는 이야기인가, 싶기도 하다. 

피의 책,이라는 공포소설을 읽을 때, 인간의 몸을 피의 책,이라고 묘사하는 게 기억에 남았다. 피의 책, 한 권의 피의 책,이라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 

전쟁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미국에서 전쟁이 아니라면 멀어지지 않았을 어떤 상황들과 엄마가 겪는 괴로움과 고통에 대해 쓰는 이야기가 나는 썩 좋지만은 않았다. 

사회학자라고는 하나, 너무 자아가 깊게 개입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의 이야기인데다가, 서양인의 태도는 언제나 지나치다는 인상을 받는다. 박완서의 '나목, 도둑맞은 가난'을 거의 동시에 읽어서 그런 인상이 커지기도 한다. 

전쟁을 직접 겪고도 자기연민에서 멀찌감치 물러난 글을 읽다가, 전쟁을 직접 겪지도 않았으면서도 자기연민에 쓰러져 버릴 것 같은 글을 읽고 있자니 서양인의 지나친 자아감각에 거부감이 드는 거다. 

소수자로서 겪는 괴로움의 무게를 나는 알지 못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물러나게 되는 거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무언가 의도가 있어야 할 텐데, 소수자가 겪는 괴로움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내가 모르겠어서, 이런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것에 회의하는 거다. 소수자성은 이야기될수록 문제가 있다,라는 생각만 든다. 개개인의 개별성, 각각의 괴로움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고, 다른 점보다 같은 점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괴로움에 잠길 뿐이다. 어떤 이야기가 의미있을까. 

스스로의 마음을 탐색하지 못하고, 어머니와 지나치게 결속된 작가의 삶도 걱정스럽다. 나는 작가보다 작가의 엄마에게 공감한다. 한번주면 정없어, 이건 정,이라며 한 주걱을 더 더하고, 음식 버리면 죄받는다는 전쟁의 고초를 겪은 엄마. 내가 겪어서,가 아니라 여전히 나는 그런 문화에 둘러싸여 있어서다. 아니면, 그런 문화가 얼마나 건전한지 계속 자각하는 엄마,가 되었기 때문인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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