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철학자들의 서 -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우며 숭고한 철학적 죽음의 연대기
사이먼 크리칠리 지음, 김대연 옮김 / 이마고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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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마법에 걸린 왕자와 같은 삶을 살았다. 키에르케고르의 다섯 형제들이 차례로 죽어가자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과거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키에르케고르 역시 그 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믿은 아버지는 자신의 죄를 고백함과 동시에 "너는 34세 이전에 죽을 것이다"라는 무시무시한 예언을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그 순간의 충격을 '대지진'이라고 이야기했다. 실로 키에르케고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었다. '대지진' 사건 이후 키에르케고르는 평생 '죄의식'과 '불안'에 사로잡혀 살았다. 자신의 죄의식과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던 키에르케고르는 레기네 올겐과의 약혼도 파기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죽었다. 나는 키에르케고르의 저서들보다 앞서 그의 삶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의 저서들이 어렵기보다 흥미롭게 읽혔다. 평생을 '죽음에 대한 불안'과 함께 살았던 철학자의 고뇌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그는 죽었기 때문이다.

 

 

    10년 후, 20년 후 그보다 더 훗날 아니 당장 내일이라도 내가 지금처럼 살아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 나는 습관처럼 허무감에 빠진다. 무엇인가 소리없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다. 이토록 나는 죽음 앞에서 나약하고 무력하다. 그만큼 더 자주 죽음을 생각한다. 내 지력(智力)으로는 부족해서 이런저런 죽음 관련 책들을 찾아 읽기도 한다. '결국 그 길은 혼자 찾아야 한다' 책을 읽다가도 아프게 쳐드는 생각이 나를 괴롭히기 일쑤. 그러면서도 호기로운 척 '죽음'을 두고 농지거리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태도를 취하든 살아 있는 한 '죽음'과 떨어질 수 없다.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죽음'을 이야기하고, 일상에서도 우리는 자주 '죽음'을 이야기한다. 죽기보다 싫다고 옹고집을 부리거나 죽을 줄 알라며 으름장을 놓아본 적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씹어죽일 년, 똥물에 튀겨죽일 년, 때려죽일 놈, 벼락맞아 죽을 놈 등 죽음 관련 욕설들도 헤아릴 수 없다. 욕설들을 늘어놓다 보니 재미있다. 슬쩍 웃음도 난다. 실제로 누군가를 씹어죽이거나 똥물에 튀겨죽인다면 무시무시한 일일 텐데도 그 모양새를 상상해 보자니 웃음이 나는 것이다.

 

 

   내가 씹어죽여질 위험에 처하거나 내 가까운 이가 똥물에 튀겨죽었어도, 그때도 웃음이 날까. 죽음이 자신의 일로 닥칠 때 그 죽음이 어떤 모습이든 우리는 웃을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죽음은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 '죽음이 있으면 내가 없고 내가 있으면 죽음이 없다'고 하였던 에피쿠로스의 말은 굉장히 명쾌하다.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내 죽음의 당사자는 내가 아니라 타자,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문제는 내가 살아 남았을 때이다. 일찍이 어머니와 할머니의 죽음을 겪었던 나는 상실의 고통을 잘 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남긴다. 가슴 아니라 일상에 뚫린 구멍을 메우는 일만으로도 벅찼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이 남아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도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노심초사한다. 죽음은 결국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내 생애 마지막 날이자 가장 행복한 날에 쓰네. 나는 장과 방광에 병이 생겼는데 정말 고통스럽다네. 세상에 아마 이보다 더 참기 힘든 고통은 없을 것 같네. 하지만 나는 영혼의 만족을 통해 그 모든 고통을 잊고 있다네. 우리가 추론하고 발견했던 것들에 대한 기억이 내게 영혼의 만족을 가져다주고 있다네

 

                                  - 헤르마크로스에게 보낸 에피쿠로스의 마지막 편지 중에서(90)


 

 

    영어로  Philosophy '철학'이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로 '지혜를 사랑하다'라는 뜻에서 기원하였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는 철학자들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나는 삶도 원하고 의로움도 원한다. 둘 다 얻을 수 없다면 나는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택할 것이다. 나는 죽음이 싫다. 하지만 내게는 죽음보다 더 싫은 것이 있다. 옳은 일을 행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바라는 것 중에는 삶보다 더 큰 것이 있으며, 우리가 싫어하는 것 중에는 죽음보다 더 큰 것이 있다. 이런 마음은 현인만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오직 현인만이 그러한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을 따름이다.(100쪽)" 맹자의 말에서 나는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철학자의 지혜와 용기를 본다. 사뭇 진지해지는 가운데 책장을 넘기자니 익숙하고 낯선 철학자들의 죽음 행렬이 이어진다. 죽음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들은 결국 죽었다. 철학자라고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까. 지혜를 사랑하는 자, 그들이 범인(凡人)과 달랐던 점은 죽음에 직면하는 태도였다. 매독으로 파리에서 죽은 하이네의 마지막 말은 참 재미있다. "하느님은 나를 용서하실 거야. 그게 그분의 전문이거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하듯 "이성의 가장 고귀한 기능은 이 세상 밖으로 걸어나갈 시간이 됐는지 안 됐는지를 아는 것이다." 아는 것도 없고 그 어떤 확신도 없이, 철학자는 그 길을 걸어간다.  (24 )


 

     사실을 말하자면 이 책의 서평은 어젯밤 쓰여야 했다.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다 남편과 서로의 죽음관을 이야기했었다. 남편의 이야기도 조금 참고할 요량으로 시작된 대화는 토론으로 이어져 열띤 논쟁과 동의를 주고받으며 길게 늘어졌다. 우리는 신과 우주까지 파고들었다. 몇 시간이 훌쩍 지나 새벽을 달리고 있는 시간에 멈춰선 나는 정말 우주를 한 바퀴 돌고 온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신과 우주를 파고들던 우리는 이제 따듯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이런 것이다. 죽음은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니지만 또한 그것은 저 멀리에 있다. 그렇지만 언젠가 사랑하는 이들은 우리 곁을 떠날 것이고 나 또한 그럴 것이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철학자도 그것만은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가 없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각자의 지혜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재미있다. 제목에서 풍기는 심오한 분위기와 달리 철학자들의 죽음관과 죽음을 유쾌한 터치로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나처럼 우주를 한 바퀴 도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철학자들의 기이한 죽음에 마음껏 웃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웃어도 되겠다. 이미 그들은 죽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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