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몸으로 말을 한다 - 과학과 종교를 유혹한 심신 의학의 문화사
앤 해링턴 지음, 조윤경 옮김 / 살림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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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 관련 서적을 찾다 이 책을 만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썩 흡족한 선택은 아니었다. 내가 기대한 것처럼 건강 실용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음은 몸으로 말을 한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몸과 마음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책은 맞다.

 

 

 

    마음은 몸으로 말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긍할 만한 제목이다. 생각과 감정에 따라 몸은 신호를 보내고 반응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너무 신경을 썼더니 머리가 아파. 신경성이야. 따위의 말을 하거나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마음과 몸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작용한다는 것을 매일 체험하는 사람 중 하나다. 신경성 위장병과 오래된 불면증, 숨쉬는 것보다 더 익숙한 불안에 시달리는 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마음도 아프고 몸도 아프고. 대체 어떻게 해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건강 서적들을 집적거리고 있,는,데 ~

 

 

 

    1장 '암시의 힘'은 비교적 흥미롭게 읽힌다. 신내림과 퇴마의식이 어떻게 과학과 융합하고 충돌하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풀어내고 있다. 퇴마의식을 통해 권력을 휘두르는 퇴마사에 대립해 의학적으로 신내림 현상을 파헤치는 의사의 이야기는 몰입될 만큼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암시'라는 것이 인간 몸과 마음에 어떠한 작용을 하는가, 그 놀라운 힘에 대한 이야기와 역사가 펼쳐진다. 최면과 플라시보 효과를 다루는 부분도 인상 깊다. 플라시보 효과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2장 '말하는 몸'을 읽다 잠시 책을 덮었다. 몸과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읽어내기 벅찼기 때문이다. 무거운 몸과 마음이 생활을 위협한다. 절박하고 위험한 일상 속에서도 내 몸은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힘겨운 몸을 겨우 돌보고 있다. 이제야 다시 책을 펼쳐 본다. 다시, 인간의 몸과 마음에 관한 방대한 역사가 펼쳐진다. 아직 읽고 있는 중이라 확언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생각할 거리를 마련해주고 재미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몸과 마음의 귀중함을 가슴 깊이 새길 것이다. 그리하여 몸과 마음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것이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이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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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빼야 되지 - 365일 행복한 다이어트 친구들
스튜디오 뮤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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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데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생각해 본다.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무엇 하나만 꼽을 수 없다. 머릿속을 떠오르는 당연한 삶의 조건들 중 만족하는 것이 있는가 따져본다. 엉뚱하게도 지난 밤 꿈속에서 맛보았던 빵 맛이 떠오른다. 입이 쓰다. 단 음식이 필요하다. 마음보다 먼저 몸이 움직인다. 내 손이 흙 묻은 감자를 씻어내고 있다.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있던 햇감자에는 독 오른 뿔처럼 싹이 돋아있다. 내 손이 나쁜 싹을 도려낸다. 냄비에 물을 받고 감자를 삶는다. 감자가 익어가는 동안 나는 생각한다. 생존본능이란 얼마나 치열한가. 그것은 감자에 돋은 나쁜 싹처럼 쓰윽 도려낼 수도 없는가 하고.

 

 

 

   이 무거운 인생을 살아내야 한다면 아픈 것보다는 건강한 것이 나을 것이다. 무거운 것보다는 가벼운 쪽이, 울기보다는 웃으면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때로는 생각이 해로울 수 있다. 너무 무거워지면 마음이고 몸이고 탈이 나게 마련이다. 무거우면 괴롭다. 괴로우면 힘들다. 힘들게 사는 건 정말 힘들다. 군더더기는 쫙 빼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언젠가 보았던 글로벌 토크쇼에서 대한민국 여성들이 좋아하는 말을 알았다. "진짜 말랐다." 말하는 사람이나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칭찬이라 여긴다는 것이다. 기성복 두루치수(free size)는 점점 작아지고 있다. 나처럼 비쩍 마른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보통의 건강한 체형이나 뚱뚱한 체형의 사람들에게는 불편할 것이다. 불편함에 앞서 수치심과 모욕감이 들지도 모른다. 텔레비전에서는 비정상적으로 마른 여자들이 긴 팔과 다리를 흐느적거리며 자랑스러운 워킹을 하거나 춤을 춘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추켜세운다. 이런 추세에서 다이어트는 지난 몇년 간 꾸준한 관심을 받아오고 있다. 간혹 다이어트를 하다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의 뉴스를 접하기도 한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통탄할 만하다. 아름다워 보이려는 욕구는 지극히 건강한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기준치에 맞추려고 자신을 혹사시키는 행위는 과연 건강한가. 무엇을 위한 다이어트인가.  

 

 

   마라톤으로 유명한 어느 열대 국가에서는 몸이 푸진 여자들이 제일이라 한다. 엉덩이 크고 몸에 살집이 있는 것을 여성적 아름다움으로 친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 기준은 시대와 유행에 따라 쉽게 변화하는 것이다. 이토록 쉽게 변화하는 가치 기준에 휩쓸려 자신을 인형처럼 다루는 것은 슬픈 일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이제는 건강한 다이어트를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닌가.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뚱뚱한 것에 대한 혐오와 멸시가 있어왔다. 뚱뚱하면 미련하고 게으를 것이라는 편견도 있다. 이 때문에 뚱뚱한 사람들이 살기에 더 괴로울 것 같다. 언제까지 부당한 멸시와 모욕을 참고 있을 것인가. 멸시와 모욕 속에서는 건강할 수도 없다. 자,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샤를 빼야 되지'를 펼쳐보자.

 

 

 

   '행복한 다이어트', '똑똑한 다이어트', '튼튼한 다이어트', '맛있는 다이어트'. 네 개의 단락으로 구성된 이 책을 '똑똑한 다이어트 책'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그에 앞서 책 제목에 대한 간단한 정보부터 흘려야겠다. '샤를 빼야 되지' . '샤를'과 '빼야'와 '되지' 세 명의 돼지친구들의 이름이다. 돼지답지 않게 애처롭게 마른 '샤를'과 건방진 '빼야', 작심삼일 다이어트를 하는 '되지'가 이 책의 주인공들이다. 만화 형식으로 이루어진 재미있는 구성이 여느 다이어트 책과의 특이점이다. 꼼꼼하고 세심한 다이어트 정보들을 재미있게 익힐 수 있다는 점. '샤를' '빼야' '되지' 개성 뚜렷한 세 마리 돼지와 함께 다이어트를 하다 보면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밤중의 폭식 - 야식증후군, 불면증, 운동부족 등 자신과 같은 문제로 실패를 거듭하며 다이어트 정보를 알려주는 돼지들 덕분에 외롭지 않은 다이어트를 할 수 있다.

 

 

 

   이 책의 관건은 '건강'과 '행복'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다이어트이다. 다이어트(diet)는 살을 빼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다. 건강을 위한 식이요법이 본래의 뜻이다. 뚱뚱한 사람들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나처럼 비쩍 마른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잘못 알려진 건강상식들을 바로잡아주고, 건강을 해치는 일상의 작은 습관들을 꼬집어준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우쳐준다. 스스로를 아끼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멸시 당하는 것이 현실. 이제 내 몸은 내가 지켜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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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기술 - 심리학자 가브리엘 뤼뱅의 미움과 용서의 올바른 사용법
가브리엘 뤼뱅 지음, 권지현 옮김 / 알마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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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에서 '기술'은 늘 혼란을 유발한다. 기술의 표명하는 의미를 먼저 이해하고 난 뒤에 이 책을 펼쳐야 한다. 『칭찬의 기술』이라는 책을 선택했다면 분명 재주, 새로운 방법들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책을 펼칠 것이다. 나는 그랬다. 기술을 하나의 재주, 방법으로 여기기가 예사였다. 그런데 동질한 표기의 기술에는 다른 한자어가 있다. 재주 이외에 쓴다, 기술한다는 의미의 '기술'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이 책 『증오의 기술』과 만나야 한다.

 

 

   기술(記述)의 측면에서 책을 찾는다면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지식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이 존재한다. 『증오의 기술』은 다행히도 사례집이었다. 지난 해와 올해에 이어 나는 감정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기술(技述)서를 많이 읽어왔다. 나의 감정이 어디서 돌발적으로 출현하는지 그 이유를 따지고, 어떻게 하면 바람직하게 - 내남없이 상처받지 않게- 다룰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하나하나 천천히 정독해왔다. 득이 있으면 당연 실이 있게 마련이다. 모든 선택된 행동에는 기회비용이 작용한다. 방법론적인 책을 탐독하면서 나는 현실에서 유리된 듯 속이 헛헛했다. 이런 나의 내적 공허를 알아주는 듯 『증오의 기술』이 나를 찾아왔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책을 만나 나는 마음이 평온하다. 감정의 혼란, 홍수 속에서 나는 여전히 방치되어 있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다른 사람을 살펴보며 나와 비슷한 그들이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 반응하는지를 살피게 되었다. 여유가 아니다. 하나의 경험이 누적된 결과이다.

 

 

   『증오의 기술』은 머리말(들어가는말)과 맺음말에 책을 기술한 의미를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통받는 피해자와 무관심한 가해자'(들어가는말), '당신의 증오는 정당하다'(맺음말)을 읽으면 이 책의 초점은 가해자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고 피해자에게만 잘못을 따져 묻는 것 역시 아니다. 소개된 다섯 사례를 하나씩 살피면 글쓴이의 의도가 무엇인지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각 장에 부연된 소제목에서 얻는 실마리는 강력하다. 가학적 가해자, 이기적 가해자, 무고한 가재자, 마조히즘적 피해자, 모스크바 재판.

 

 

   사람과 사람 속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로 살아가는지, 나는 생각해본다. 누구에게 상처를 받았고 상처를 주었고, 나의 무의식에는 어떤 억울함이 억압당한 채 이를 갈고 있을까. 두려워진다. 나는 그때그때 감정을 억눌러 표면적으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데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은 뒤로 감추고 대신 상대방의 기대에 부응하는 행동을 감지하는 데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증오의 기술』에서 소개되는 다섯 사례들 가운데 나는 어느 한 경계에 속할 수도 있고, 이질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심정에 내가 동화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4장 '마조히즘적 피해자'에서 울컥 치미는 것이 있었지만, 나는 만취한 택시에서 구토를 내리누르듯이 억제해버렸다. 실컷 울어도 좋을 것을, 실컷 웃어도 좋을 것을. 지금도 나는 '나의 감정'에 무심하다.

 

 

    소개된 사례나 글쓴이가 사용하고 있는 상담이론에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각각의 사례들이 전달해주는 내용들에서 나는 여러 차례 동일시를 느꼈고, 감정의 정화를 경험했다. 그렇기 때문에 『증오의 기술』은 쓴 칡뿌리 같은 책, 그렇게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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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어디 가?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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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어디 가?

고속도로로 가지. 역방향으로 말이야.


  

    뜨거운 햇볕을 고스란히 맞고 서 있던 뒤틀린 몸을 기억한다. 죄수처럼 박박 깎은 똥그란 머리, 길고 여윈 팔과 다리를 기억한다. 구겨진 목에 허옇게 번져 있던 버짐 위로 해쭉이 웃던 입 모양새를 기억한다. 병신! 아이들은 그렇게 불렀다. 내 친구의 형이었다. 날 때부터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고 했다.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친구도 없던 그는 그래도 잘 웃었다. 동네 어귀 버스정류장에 서서 지나가는 버스와 그 안의 사람들을 쳐다보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스쳐가는 버스를 향해 길고 힘없는 팔을 흔들어댔다. 세상을 향해 힘없는 손짓을 하던 그 사람은 아직 거기 서 있을까.

 

 


아빠 어디 가?

알라스카로 가지. 가서 백곰을 쓰다듬어주자꾸나. 그리고 백곰한테 잡아먹히는 거야.

 


    내 유년의 기억에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구나. 내 가까운 친구는 외팔이었다. 공부를 잘 하고 씩씩한 아이였다. 손가락이 없는 뭉툭한 팔로도 피아노를 아주 잘 쳤다. 왼손으로 쓰는 글씨는 가지런했다. 한 손으로 설거지도 잘 했다. 그림도 잘 그리고 붓글씨도 잘 썼다. 나는 그 아이의 장애를 의식하지 못했다. 여름이 오기 전까지는. 여름 내내  그 아이는 긴 소매 옷을 입고 다녔다. 겨드랑 부근에 그늘처럼 번져있던 땀자국에서 나는 그 아이의 장애를 보았다. 우리끼리 있을 때에 그 아이는 어느 누구보다 건강하고 밝은 아이였다. 세상의 시선이 아이를 '병신'으로 만들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어른이 되었을 때, 동창회에서 만난 그 아이는 무언가 달라 보였다. 그토록 혐오하던 예수쟁이가 되어 있었다. 어색하게 손을 맞잡았을 때, 딱딱하게 감각되는 차가운 의수(義手). 그 아이에게 무거운 가짜 손을 달아준 것은 세상의 편견이 아니었을까.

 

 


아빠 어디 가?

버섯을 따러 간단다. 독버섯을 따서 그것으로 맛있는 오믈렛을 해먹자꾸나.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결함이 있다. 불완전한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 세상이다. 그래, 누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다. 몸과 마음이 불편한 사람을 만나도 뚫어지게 쳐다보면 안 된다고 배우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심각한 불편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기우뚱 흔들리게 마련이다. 저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갈까. 사는 게 즐거울까. 나라면. . . 만약에 나라면, 하고 생각해 보는 때도 있다. 

 


아빠 어디 가?

수영장에 가자. 가서 제일 높은 다이빙대에서 뛰어내리자. 물 한 방울 없는 풀장으로 말이야.

 


    토마와 마튜는 정신지체를 가지고 태어났다. 이제 나는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은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 본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장애를 가진 아이를 만난다면 기분이 어떨까.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아마 세상이 까맣게 변해버리겠지. '눈에 보이는' 장애를 지닌 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괴로울지 짐작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미 세상 '편견'의 일부여서일 것이다. 푸르니에는 토마와 마튜의 아빠이다. 그 역시 '눈에 보이는' 장애를 가진 두 아이를 태연하게 맞을 수는 없었다. 연달아 장애아를 낳은 그는 자신이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큰 죄책감에 빠지기도 했다. 스무 살이 되도록 장난감 큐브와 인형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과 살아보면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아직도 나이가 서른인 것 같다고, 세상 만사가 두렵지 않다고 자조 섞인 농담을 이어가는 푸르니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잠깐 망설이다 웃어버렸다. 크크큭. 크큭큭큭큭. 웃으니 웃겼다.

 

 


아빠 어디 가?

바다에 간단다. 몽셍미셸에 가지. 가서 움직이는 모래 위를 걸어다니자꾸나. 그러다 그 모래 속에 둘 다 빠져 지옥으로 떨어지는 거야.


  

    '눈에 보이는' 장애에 대해 나는 아직도 태연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내 마음은 불편해질 것이다. 자연스럽지 못할 것이다. 섣부른 연민을 품거나 과장된 친절을 베풀지도 모른다. 두려움 섞인 혐오감을 느끼고 자리를 피할지도 모른다. 나 역시 '병신'들이 사는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아빠 어디 가?" 토마의 끝없는 질문이 문책으로 들리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토마를 바라보거나 멀리 간 마튜를 생각할 때면, 과연 아이들을 만들어낸 것이 잘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마 아이들에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이 느꼈던 작은 기쁨, 스누피 인형, 따뜻한 목욕물, 고양이의 부드러운 몸짓, 햇살, 공, 마트 산책, 타인의 미소, 장난감 자동차, 감자 튀김. . . 이 모든 것이 있어 아이들의 삶도 살아볼 만한 것이었다면, 하고 바라본다. " (169쪽)

 

 


    생명 있는 모든 존재는 고귀한가. 우리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사뭇 심각해져버린 내 마음에 대고 토마가 속삭인다. 아빠 어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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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의 싸움 - 세상에서 나를 지켜주는 위로의 심리학
앨버트 엘리스 지음, 정경주 옮김 / 북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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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 원인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얇은 피부 하나만을 뒤집어쓴 나약한 인간에게 자연은 '불안'을 주었다. 덕분에 인간은 지금 여기 살아 남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걱정과 경계심, 불안은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적이고 건강한 불안은 우리를 살려준다. 반면, 비합리적이고 병적인 불안이 있다. 전혀 위험이 없는 상황에도 큰 불안을 느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비합리적인 불안을 두고 하는 말인가 한다. 우리 영혼을 갉아먹는 이 불안을 어쩌면 좋을까.

 

 

 

   불안은 스스로 만들었으니 스스로 물리칠 수 있다고 이 책의 저자 앨버트 엘리스는 쓰고 있다. 우리가 상황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과정에서 건강한 불안이나 병적인 불안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물리쳐야 할 해로운 불안은 대개 '비합리적인 신념'에서 비롯된다. 부정적이고 비합리적인 신념이 중심이 되어 생각과 감정을 지배한다면 우리는 비합리적인 불안에 잠식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사고의 흐름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를 큰 불안에 떨게 했던 '그것'은 우리의 비합리적인 신념이 만들어낸 '허깨비'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를 쥐락펴락하던 검은 불안을 그러나 한 순간에 떨쳐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삶의 불확실성은 언제나 불안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심약한 남자처럼 연못가를 빙빙 돌다 사라져버릴 수도 없다. "날 좀 내버려 둬!" 거미줄처럼 끈적끈적 들러붙는 불안을 향해 소리쳐도 그것은 더 큰 메아리로 되돌아올 뿐이다. 확률론적이고 불확실한 이 세계에서 우리는 불안과 싸워야 한다. 싸우려면 그것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다가서야 한다. 우리를 불안 속에 처넣은 그 '허깨비'들을 만나야 한다.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비하하거나 타인의 행동을 확대해석하여 원망할 때가 있다. 자기 비하와 원망에서 비합리적인 불안은 출발하고 그 불안은 종종 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심각한 불안에 빠졌을 때 화를 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불난 데에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다. 확대해석한 눈앞의 상황에 눈멀어 불안에 휩싸이고 싶지 않다면, 긍정적 사고를 길러야 한다고 이 책은 역설하고 있다.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사고화 단계를 제시하고, 우리가 얼마나 비합리적인 신념에 빠져 일을 그르쳤는가 깨우쳐 준다.

 

 

 

   불안과의 싸움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이길 수 있다. 불안 때문에 불안해하지 말자. 수만 년 전 우리 연약한 인간 존재를 살려낸 것은 '불안'이었다. 여기 살아 남은 우리는 그중 '가장 불안한 인류'였는지도 모른다. 합리적이고 건강한 불안은 우리를 보호해준다. 지금 불안한 당신, 불안의 눈동자를 응시해보자. 당신을 지켜줄 건강한 불안인가. 아니면 당신을 삼켜버릴 해로운 불안인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당신 안에서 자라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제 불안과의 싸움을 시작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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