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 상·하/ 샨사 지음/ 이상해 옮김/ 현대문학 

 

 

 

 

끝없이 이어지는 달들, 불투명한 세계, 으르렁거림, 돌풍, 지진. 휴식의 순간은 드물었다. 무릎에 이마를 대고 팔로 머리를 감싼 채 나는 생각하고, 귀 기울이고, 존재하지 않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거기 생명이 있었다. 천천히 자전하는 별이, 투명한 진주가. 나는 장님이었다. 내 눈은 매일 조금씩 지워지는 다른 세계, 다른 삶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색깔들은 이미 퇴색해버렸고, 이미지들도 흐릿하게 변해버렸다. 귓가에는 여전히 외마디 비명소리와 희미한 울음소리가 맴돌았다. 아득한 기억이 날 짓누르고, 짙은 우수憂愁가 날 태웠다. 난 누구지? 내 발치에 웅크리고 있던 죽음에게 물었다. 죽음은 으르렁거릴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웃음소리,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아들이 틀림없어요, 대감. 아, 움직여요. 성깔이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아요.”


내가 누가 되든, 그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 무한함에 싫증이 나 있었다. 희망하고, 기다리고, 내 자신,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에 싫증이 나 있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날 진정시켜주었다. 나는 흘러내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결코 태양이 뜨지 않는 내 하늘 속에서 어린 소녀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 부드럽고 순결한 목소리가 날 잠재워주었다. 내 언니, 나는 그녀에게 큰 불행이 닥칠까봐 두려웠다. 손 하나가 날 어루만지려 했다. 하지만 벽이 우리를 갈라놓고 있었다. 어머니, 내 생각의 벽에 비치는 그림자여, 당신은 내가 당신의 몸이라는 감옥에 갇혀버린 늙은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호수 깊은 곳, 세피아빛 물속에서 나는 뒤척이고, 움츠리고, 기지개를 펴고, 빙글빙글 돌았다. 몸이 하루가 다르게 붓고 무거워져 날 질식시켰다. 바늘 끝, 모래알갱이, 물방울에 비친 태양이 되고 싶었던 내가 부풀어 터지는 살, 주름과 피의 산, 바닷괴물이 되어갔다. 어떤 숨결이 날 들어올려 흔들어주었다. 나는 걸핏하면 성깔을 부렸다. 내 자신에게, 간수였던 여자에게, 나의 유일한 친구인 죽음에게 화를 냈다.


그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들에게 조照라는 이름을 붙여줄 거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출산준비의 소란이 나의 명상을 방해했다. 그들은 옷, 기저귀, 잔치, 뚱뚱하고 살결이 희며 튼튼한 유모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귀신들이 내 영혼을 앗아갈까 두려워 내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것을 금했다. 그들은 그들의 운명이 끝나는 바로 그곳에서 내가 다시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나는 호들갑스럽고 상냥하고 탐욕스러운 그 존재들이 불쌍했다. 그들은 내가 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그들 세상을 파괴하리라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화염으로, 얼음으로 해방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소스라치듯 놀랐다. 물이 들끓고 있었다. 성난 파도가 내게로 밀려와 부서졌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 호흡에, 진통의 경련에 집중하며 두려움에 대항해 싸웠다. 쇄도하는 늪의 물결은 나를 좁은 하구로 몰아넣었다. 나는 바위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몸에서 피가 났다. 피부가 찢어졌다. 머리가 파열됐다.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누군가가 내 발을 잡아당기고는 엉덩이를 때렸다. 거꾸로 들린 채 나는 울음을 토해냈다. 누군가가 피부가 벗겨질 듯 따가운 천으로 날 감쌌다. 나는 불안으로 가득한 한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들이요, 딸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사내가 나를 안아 배내옷을 찢을 듯이 벗겨내려 했다.


한 여인의 신음소리에 그가 동작을 멈추었다.


“또 딸이에요, 대감.”


“아!” 그가 탄식하며 눈물을 쏟았다.

 

 십여 명의 여자들이 나의 성장을 보살폈다. 세 명의 유모가 번갈아가며 갈증을 해소시켜주었다. 나의 왕성한 식욕이 그들을 겁먹게 만들었다. 나는 벌써 웃었다. 흑진주같이 검고 큰 눈이 안구 속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나는 잠시도 눈을 붙이지 않고 밤낮없이 세상을 바라보았다. 정상적이지 못한 나의 행태에 불안을 느낀 어머니가 귀신 쫓는 중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아무도 내 안에 터를 잡은 악마를 몰아내지 못했다.


나는 결국 그들의 호들갑에 지치고 말았다. 그들이 날 가만히 내버려두도록 나는 망사 모기장 속에서 거짓잠을 청했다. 한 여자는 요람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고, 또 한 여자는 향기 가득한 세계 안으로 비집고 들어온, 몇 안 되는 날벌레를 쫓기 위해 부채질을 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창문 너머 먼 곳으로 생각을 띄워 보냈다.


아버지가 절대적 주인인 왕국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전정前庭은 남자들에게 할애된 공간이었다. 집사, 비서, 회계원, 요리사, 시동, 하인, 마부, 위병, 머슴들이 새벽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관료와 군인들이 명령을 받고는 말을 타고 황급히 어딘가로 떠났고, 병사들은 연병장에서 하루 종일 훈련을 했다. 이 남성적인 세계는 규방이 시작되는 주홍색 대문 앞에서 멈춰졌다. 눈처럼 희고 높은 담 뒤에서 늙거나 젊거나 혹은 어리거나 한 여자 수백 명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쪽찐 머리에 꽃을 꽂았고, 비단 허리띠에 옥고리를 달았다.



무덕武德 여덟 번째 해였던 그해,1) 초봄의 파리한 화사함이 유행이었고, 옷들은 크로커스(사프란 속의 꽃`―`역주)의 황색, 수선화잎의 녹색, 버찌의 사랑스러운 분홍색, 호수에 비친 태양의 양홍洋紅색을 띠고 있었다. 청소하는 여자, 하녀, 옷 짓는 여자, 수놓는 여자, 심부름꾼, 유모, 요리사, 감모監母, 여집사, 치장 담당 시녀, 가희, 무희, 그들은 모두 천천히 걸어다녔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해가 뜰 때 일어났고, 해가 질 때 목욕을 했다. 그들은 아버지의 정원을 장식하는 꽃들로, 단 한 사람을 아름답게 돋보이게 하기 위해 활짝 피어났다.


어머니의 차림새는 검소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침소리와 눈초리에 따라 온 집안이 움직였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우아했다. 유행은 한철 나비처럼 지나갔지만, 어머니는 영원한 봄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본가인 홍농弘農 지방 양씨楊氏 집안은 제국에서 가장 지체 높은 서른 개의 가문 중 하나였다. 승상들의 딸이자 조카, 누이이며, 황실 부인들의 사촌, 황제의 가까운 인척인 어머니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보석, 망토, 후광처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절에 시주를 했고, 걸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줬다. 열렬한 불교신자였던 그녀는 채식만 고집했으며, 소란스러운 세상사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녀는 정성 들여 경전을 베껴 쓰며 눈부신 광채를 발하는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가기를 꿈꾸었다.


어머니는 차갑고 세심하고 부드러웠다. 날이 선 불투명한 그녀의 부드러움은 내 요람 위에 매달려 있던 옥 원반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늘 그녀가 그리웠다. 기다림에 지친 나는 짜증이 났다. 그녀는 며칠 만에 한 번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날 찾을 때면, 땅에 끌리는 비단 옷자락과 끝없이 긴 모슬린 상의가 내 방의 휘장을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그녀의 신발이 닿을 때마다 땅은 쾌락으로 속삭였다. 그녀의 향수가 그녀보다 앞서 왔다. 향수에서는 태양, 눈, 동풍, 행복으로 충만한 꽃부리 냄새가 났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나를 품에 안아주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했다. 나는 그녀를 집어삼킬 듯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은 두 장의 빨간 꽃잎이었다. 털이란 털을 모두 뽑은 그녀의 얼굴은 거울처럼 매끄러웠다. 밀어버린 다음, 매미의 날개 모양으로 다시 그려넣은 눈썹 아래의 반짝이는 두 눈에는 떨쳐버릴 수 없는 실망감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아들을 원했던 것이다.


 석류꽃이 만발하자 여름이 왔다. 그리고 내 백일이 다가왔다. 어머니는 연못 한가운데에 있는 정자를 열게 하고 친구와 친지를 초대해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반짝이는 물에 둘러싸인 정자 안에서 나는 이 손 저 손을 타고 돌아다녔다. 그들은 날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하녀들이 층계를 걸어올라와 선물을 내려놓았다. 어떤 부인은 나에게 에메랄드 팔찌를 선물했다. 그녀는 눈이 이렇게 검고 반짝이니 틀림없이 총명할 거라고 말했다. 다른 부인은 은쟁반에 금괴 아홉 개를 얹어 가져오게 하고는 이마가 이렇게 넓으니 좋은 배필을 만나 유복하게 살 거라고 말했다. 또 다른 부인은 금실 은실로 수놓은 화려한 비단 아홉 필을 선물했다. 그녀는 코가 이렇게 반듯하고, 볼이 이렇게 통통하며, 입이 이렇게 동그라니 틀림없이 아들을 여럿 낳을 거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흡족해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내자 사람들이 잔치판 중앙에 비단융단을 펼치고, 포대기에서 날 꺼내 그 위에 앉혔다. 하녀들이 열 가지 가량의 물건을 여기저기 흩어놓았다. 나는 그 자리에 모인, 호화롭게 치장한 부인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대신 차가운 장난감 하나를 집어, 그것을 들어올리려고 애썼다. 웅성거림이 번져가는 가운데 부인 하나가 입을 열어 평했다.


“이 아이는 아름다움의 분통粉桶도, 고귀함의 옥玉도, 음악의 피리도, 지혜의 책도, 시詩의 붓도, 상商의 주판도, 구도의 염주도 집지 않았어요. 사촌언니, 이 아이의 미래는 아주 특이할 거예요. 사내아이로 태어났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래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다른 부인이 아쉬운 듯 또 한 번 반복해 말했다.


“그렇게 아쉬워할 것 없다.” 위엄이 넘치는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 시대에는 여자들도 얼마든지 위업을 달성할 수 있어. 예전에 평양平陽 공주는 선왕을 대신해 전장에 나갔다. 전사한 그녀의 장례식 때 황제께서는 나팔을 불고 북을 치게 해 남자와 똑같은 예우를 해주셨지. 네 딸은 하늘의 숨결을 받아들일 수 있는 툭 불거진 이마, 반짝이는 눈동자, 단단한 턱, 도톰한 입술을 타고났다. 이 아이가 제 아버지의 검을 집었으니 얼마나 장한 일이냐! 얘야, 앞으로 이 아이를 사내처럼 입히고 타고난 운명에 걸맞는 교육을 시키거라. 장군의 딸은 지휘를 좋아하는 법이니라. 이 아이는 장차 훌륭한 무관 집안의 여주인이 될 게다!”


나는 요람에서 세상을 맞이하기보다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픈 욕구를 느꼈다. 두 발을 딛고 설 수 없었으므로 나는 기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걸음은 내 몸에 있는 모든 근육의 공조를 요구했다. 목표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지르기 위해 입을 벌린 채, 나는 한 팔, 한 다리를 번갈아 들어올려 우주를 가르며 나아갔다.


수염이 덥수룩한 한 남자가 날 굽어보았다. 검은담비로 안을 댄 비단 망토로 몸을 감싼 그는 먼 곳에서, 아주 먼 곳에서 온 것처럼 보였다. 그를 보고 있자니 말발굽 소리, 무기 부딪히는 소리, 바람의 울부짖음, 유녀游女들의 미친 듯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에게서 풍기는 짐승의 냄새는 나를 전율케 했고, 그의 갑작스런 입맞춤은 내 뺨을 찢어놓았다.


한 계집아이가 날 유심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의 홍조 띤 얼굴빛, 수려한 용모, 단단한 다리, 검은 눈동자, 그녀가 끌고 다니는 나무오리에 매료되었다. 나를 요리조리 살펴보던 그녀는 내 손에 손가락 하나를 올려놓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끝내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그 손가락을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언니를 아프게 하지 마세요.” 유모가 나에게 말했다.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먼 훗날, 아무것도 모르던 이 날처럼 언니가 나에게 자신의 처형자가 되어달라고 애원하게 되리라는 것을.


무덕 아홉 번째 해, 황제가 아들에게 권좌를 물려주었다. 열두 달 후, 새 황제가 임무수행차 양주揚州에 가 있던 아버지를 불러들였다. 아버지는 이세민의 난이 일어난 이주利州의 도독都督(지방 장관`―`역주)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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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민음사 







만드는 방법




양파는 아주 곱게 다진다. 양파를 다지면서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다면 자그마한 양파 조각을 머리 위에 얹는다. 양파를 다질 때 눈물이 나오면 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게 그러니까, 한번 눈물이 나왔다 하면 양파를 다지는 동안 내내 울음을 멈출 수 없다는 게 영 안 좋다. 여러분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만날 그랬다. 수도 없이 울었다. 엄마는 내가 양파에 민감한 건 티타 이모할머니를 닮은 거라고 했다.




사람들이 말하길 티타는 증조외할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양파를 다질 때마다 울고 또 울어서 그렇게 양파에 민감한 거라고 했다. 티타가 어찌나 요란하게 울어댔던지 반 귀머거리였던 우리 집 요리사 나차도 그 울음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티타는 하도 울어서 달도 채우지 못한 채 일찌감치 세상 밖으로 나왔다. 증조외할머니가 끙 소리 한번 제대로 내기도 전에 서둘러 세상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그것도 백리향 냄새와 월계수 잎사귀 향, 고수* 향, 끓는 우유 향, 마늘 향과 함께 파스타를 넣은 수프 냄새가 진동을 하는 가운데 부엌 식탁 위로 나왔다. 물론 양파 향도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도 예상했겠지만 아기를 거꾸로 들어올려 엉덩이를 때릴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티타는 자기가 결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미리부터 그렇게 울면서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 나차는 티타가 부엌 식탁과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엄청난 눈물 급류에 떠밀려 세상 밖으로 나왔다고 했다.




그날 오후, 놀라움도 어느 정도 진정되고 햇볕 덕분에 물기도 대충 말랐을 때 나차는 붉은 부엌 돌바닥 위에 흩어져 있던 눈물의 흔적을 쓸어 담았다. 그때 주워 담은 소금이 오 킬로짜리 자루 하나를 가득 채웠다. 그 소금은 요리하는 데 한참 동안 요긴하게 사용했다. 이런 예사롭지 않은 출생 때문에 티타는 부엌에 크나큰 애착을 느끼게 되었고 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부엌에서 보냈다.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거의 부엌에서 살다시피 했다. 티타가 태어난 지 이틀째 되었을 때 티타의 아버지가, 그러니까 나의 증조외할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그때 증조외할머니인 마마 엘레나는 그 충격으로 젖이 말라버렸다. 그 시절에는 분유나 그 비슷한 것도 없었고, 급히 유모를 구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티타의 배고픔을 달랠 길이 없어서 애를 많이 먹었다. 음식과 관련된 거라면 훤히 꿰뚫고 있을 뿐더러 요즘은 사용되지 않는 다른 많은 것들도 훤히 꿰뚫고 있었던 나차가 티타를 책임지고 먹이겠다며 자청하고 나섰다. 나차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지만, 그래도 자기가 ‘아무 죄 없는 어린것의 배를 채워주는 데’는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나차는 글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다. 하지만 음식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마마 엘레나는 나차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녀는 남편을 잃은 슬픔과 농장을 제대로 운영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자식들을 제대로 먹이고 교육도 시켜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갓난아이까지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그날부터 티타는 아예 부엌으로 옮겨 와, 아톨레*와 차를 마시며 아주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랐다. 그러니 티타가 음식에 특별히 뛰어난 감각을 지니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티타가 밥 먹는 시간은 부엌의 일상에 따라 움직였다. 아침나절에 콩 삶는 냄새가 나거나, 정오에 닭 잡을 물이 준비되었거나, 오후에 저녁 식사를 위한 빵이 오븐에서 구워질 때면 티타는 이제 슬슬 자기가 밥 먹을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티타는 나차가 양파를 다질 때 때때로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울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 눈물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둘이 함께 울면서 재미있어하기까지 했다. 티타는 어렸을 때 기뻐서 흘리는 눈물과 슬퍼서 흘리는 눈물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다. 티타에게는 웃음도 울음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티타는 삶의 즐거움과 먹는 즐거움을 혼동했다. 부엌을 통해 삶을 알게 된 사람에게 바깥세상을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부엌문에서부터 집 안쪽까지 연결된 거대한 세상은 티타의 손안에 있었다. 부엌 뒷문이나 안뜰, 밭, 과수원 같은 세상은 완벽하게 티타의 것이었다. 언니들과는 정반대였다. 언니들에게 부엌은 미지의 위험으로 가득 찬 두려운 세상이었다. 언니들은 부엌에서 노는 건 어리석고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티타는 뜨겁게 달궈진 질냄비 위로 현란하게 춤을 추며 떨어지는 물방울이 얼마나 놀라운 장관을 연출하는지를 언니들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티타가 노래 부르면서 젖은 손을 장단에 맞춰 흔들며 질냄비 위로 물방울을 튀겨서 ‘춤추게’ 하는 동안, 로사우라는 자기가 보고 있는 광경에 괜히 움츠러들어서 한쪽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헤르트루디스는 리듬이나 춤, 음악과 관련된 거라면 뭐든지 좋아했기 때문에 그 놀이가 아주 재미있다고 생각했고 신이 나서 함께 놀았다. 그래서 로사우라도 어쩔 수 없이 함께 놀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손도 거의 물에 적시지 않은 데다 겁을 먹어서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기 때문에 별 재미는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티타는 로사우라의 양손이 질냄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했다. 하지만 로사우라가 싫다고 버티는 바람에 둘이 계속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에는 티타가 화가 나서 로사우라의 손을 놓고 말았다.






그러자 로사우라의 양손은 뜨겁게 달궈진 질냄비 위로 맥없이 떨어졌다. 티타는 질리도록 매를 맞았고,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세상인 부엌에서 다시는 언니들하고 놀지 못하는 벌을 받았다. 그때부터는 나차가 티타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항상 음식과 관련된 놀이나 게임을 개발했다. 한번은 마을 광장에서 긴 풍선을 꼬아 동물 모양을 만드는 아저씨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티타와 나차는 초리소*를 가지고 똑같이 해보았다. 두 사람은 평범한 동물 모양만 만든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백조의 목에 개 다리나 말 꼬리를 붙인 이상한 동물 모양도 만들어냈다.






문제는 초리소를 튀기기 위해 그 매듭을 풀어야 할 때였다. 거의 매번 티타가 안 된다며 고집을 피웠기 때문이다. 티타는 크리스마스 파이를 만들 때만 유일하게 좋다고 허락했다. 티타는 크리스마스 파이를 아주 좋아했다. 그때는 동물 모양의 매듭을 푸는 걸 허락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초리소가 튀겨지는 모습을 옆에서 즐겁게 바라보기까지 했다.




파이에 넣을 초리소를 튀길 때는 아주 약한 불에서 튀기되 은근히 잘 익으면서도 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초리소가 준비되면 불을 끄고, 미리 가시를 발라둔 정어리를 붓는다. 물론 정어리의 까만 껍질은 칼로 잘 벗겨내야 한다. 정어리와 함께 양파, 다진 칠레고추, 오레가노* 가루를 섞는다. 파이 속을 채우기 전에 이렇게 미리 준비한 것을 잠깐 재워둔다.




티타는 이 과정을 매우 좋아했다. 파이 소가 양념에 재워지는 동안 거기서 흘러나오는 냄새를 맡는 것은 정말 흐뭇했다. 냄새는 기억 속의 소리와 향을 전하며 과거의 어떤 시간을 떠오르게 하는 특성을 지녔다. 티타는 냄새를 흠뻑 들이마시며 그 각별한 냄새나 향과 함께 자신의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걸 좋아했다.




 







티타는 맨 처음 이 파이의 냄새를 맡은 게 언제였을까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아무 소득도 얻지 못했다. 어쩌면 태어나기 전이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정어리와 초리소의 묘한 조화가 티타로 하여금 하늘의 평화를 저버리고 마마 엘레나의 배 속으로 들어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마마 엘레나의 딸이 될 수 있도록, 초리소로 아주 특별한 요리를 만드는 데 라 가르사 가문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마마 엘레나의 농장에서 초리소를 만드는 일은 굉장한 의식이었다. 하루 전날 마늘 껍질을 까고, 칠레고추를 깨끗이 씻고, 양념을 빻았다. 집안 여자들 모두가 거들어야 했다. 마마 엘레나와 딸들인 헤르트루디스, 로사우라, 티타, 요리사 나차, 하녀 첸차까지 모두 말이다. 오후 나절에 식탁에 둘러앉아 수다 떨고 농담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마마 엘레나가 말했다.




“오늘은 이만 됐다.”




한마디만 해도 모두 알아들었다.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두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먼저 식탁을 정리하고 나서 일을 분담했다. 한 사람은 암탉들을 우리에 집어넣고, 다른 한 사람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 아침에 쓸 수 있도록 준비하고, 또 한 사람은 부뚜막에 불을 지필 장작을 책임졌다. 그날은 다리미질도 하지 않고, 수도 놓지 않고, 바느질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모두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가 책을 보다가 기도를 드리고 잠을 잤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마마 엘레나가 식탁에서 일어나도 좋다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티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페드로 무스키스가 어머니에게 할 말이 있어 올 거라며 얘기를 꺼냈다. 그때 티타의 나이 열다섯이었다.




“그런데 그 청년이 나에게 무슨 얘기를 하러 온다는 거냐?”




마마 엘레나는 티타의 영혼까지 얼어붙을 정도로 기나긴 침묵을 지킨 후 입을 열었다.




티타가 거의 들릴락말락하게 대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마마 엘레나는 티타를 무섭게 한 번 째려본 후 말을 이었다. 티타는 가족 모두를 무겁게 짓누르던 그 따가운 눈총 아래 기나긴 억압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너에게 청혼을 하러 오는 거라면 아예 그만두라고 해라. 그 청년이나 나나 괜한 시간만 낭비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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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말 한 마디가 자녀의 인생을 바꾼다


                     사마광·주희 지음/ 명진출판 







 


백이 숙제의 고집을 버려라


동방삭∙이 자식을 훈계한 글




 


아들아.




지혜로운 사람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도中道를 따르는 처세를 으뜸으로 여긴단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중도를 따를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시킨다.




은나라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성품이 고상하고 순결하였다. 하지만 어질고 덕이 뛰어난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았고, 좋은 친구가 아니면 사귀지 않았으며, 부패하고 타락한 조정에서는 벼슬하지 않았을 정도로 너무나 고집스러웠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처세와 도량度量은 지나치게 졸렬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유하혜柳下惠는 모든 일에서 자신의 지조를 끝까지 지켜 나가는 군자였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니, 네가 설령 내 곁에서 발가벗고 있다고 한들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ꡑ




그는 항상 자신의 원칙과 신념을 갖고 행동했다. 그랬기 때문에 나쁜 임금을 섬기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으며, 자신의 관직이 낮은 것도 비관하지 않았다. 화목하고 평온한 세상을 만나든 어지럽고 살기 힘든 세상을 만나든 늘 변함없는 자세를 유지했다. 이런 점에서 유하혜의 처세는 훌륭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른이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란다. 어떤 때는 하늘을 나는 용처럼 모습을 한껏 드러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물 속에 숨은 이무기처럼 그 모습을 조용히 감출 줄도 알아야 한다. 만물의 변화와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처신할 뿐 고정불변의 견해만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관리로 일하면서 초야에 묻힌 군자처럼 욕심부리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처신하여라. 비록 크게 출세하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재난은 피할 수 있다. 재주를 뽐내면서 자신을 지나치게 과시하면 오히려 신변의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명성을 얻으면 저절로 광채가 나는 법이다. 많은 사람의 신망을 얻으면 주변에 사람들이 늘 머물게 되어 일상이 바쁘게 된다. 반면에 고고한 자세로 생활하면 다른 사람과 쉽게 화합을 이루지 못한다.




아들아, 모든 일에는 여지를 남겨두어라. 막다른 골목에 몰리지 않게 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너는 쉽게 곤경에 빠지고 말 것이다. 부디 명심하여라.




∙동방삭 東方朔. B.C 154년~B.C 93년. 그는 박학할 뿐 아니라 다재다능했으며 특히 문학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해학과 재치가 뛰어난 사람으로서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먹어 죽지 않고 장수했다는 속설 때문에 ‘삼천갑자 동방삭’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호탕한 의리보다 신중한 청렴함을 배워라


마원∙이 조카 마엄馬嚴과 마돈馬敦을 훈계한 글






엄과 돈, 보아라.




너희가 혹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듣거든 마치 부모의 이름을 들은 것처럼 귀에 들리더라도 입에 담지는 말기 바란다.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입에 담기 좋아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마구 정치와 법을 입에 담는 것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다. 나는 내 가족이 그런 언행을 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시집가는 딸에게 반복해서 타이르듯이 내가 너희들에게 거듭 얘기하는 이유는 너희가 이 말을 영원히 잊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마음에 깊이 새겨두길 바란다.




용백고龍伯高는 성품이 곧고 신중하다. 어지러운 말을 입에 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겸손하고 청렴하며 공정하고도 위엄이 있다. 내가 그를 애지중지하니 너희도 그를 본받기 바란다.




두계량杜季良은 성격이 호방하고 의리가 있다. 다른 사람의 근심을 함께 걱정하며 남의 즐거움도 함께 즐거워한다. 또한 현명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모두 친분을 쌓아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의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빈소를 찾아 조의를 표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아끼고 좋아할지언정 너희들은 그를 본받지 말기 바란다.




옛말에 ‘따오기를 그리려다가 오리를 그린다.‘는 속담이 있다. 용백고를 본받고자 노력할 경우 설령 그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착실하고 신중한 사람은 될 수 있다. 반면 ‘호랑이를 그리려다가 개를 그린다.‘는 속담이 있다. 두계량을 본받으려다 실패한다면 자칫 경박한 사람으로 전락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두계량을 본받지 말라는 것이니 새겨듣도록 하여라.




∙마원 馬援. 동한 시대 무릉(茂陵) 사람이다.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에 벼슬하여 명장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친구로부터 칭찬을 받아라




정현∙이 아들 정익은鄭益恩을 훈계한 글






아들아, 들어보아라.




우리 집은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부모님과 동생들은 내가 학문에 힘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학문의 뜻을 접지 못했다. 하여 그나마 몸담고 있던 관직을 사직하고 주周나라와 진秦나라를 돌아다니면서 학문을 익혔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나는 가르침을 간곡히 청하여 육경六經을 공부하고 예로부터 전해오는 글을 대략이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때로는 위서緯書와 도참설圖讖說에 관한 책도 읽어보았다. 마흔 살이 넘어서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부모님을 봉양하고, 논밭을 빌려 농사를 지으면서 가족과 화목하게 지냈다.




훗날 환관이 권력을 휘두를 때 당파를 만들었다는 죄목에 연루되어 14년 동안이나 벼슬살이를 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와 유도과有道科에 추천을 받았고, 대장군이 삼공三公의 자리로 초청했으며, 공거부公車府의 부름을 받기도 했다. 나와 함께 관직에 오른 동료 중에는 재상이 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본래 관직에 뜻이 없었다. 오히려 옛 성현의 말씀을 후대에 전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여러 가지 학설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에 조정의 부름을 한사코 사양했다. 그러던 가운데 황건적의 난을 당해 남북을 오가며 유랑하고, 고향으로 오니 내 나이 벌써 일흔 살에 이르렀구나.




이제 삶의 궤적을 더듬어 되돌아보니 살아오는 동안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구나. 예법에 따라 가사家事를 모두 너에게 물려주고 나는 그 동안 못다 이룬 책을 완성하려고 한다. 임금의 부름을 받거나, 조문을 가거나, 성묘하는 일이 아니라면 집을 나서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집안의 대소사는 모두 네가 책임지기 바란다.




너는 군자의 도리를 구하는데 힘쓰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고, 경거망동한 일을 삼가야 한다. 행동거지는 공손하고 신중하게 하고, 덕행이 있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 동료와 친구로부터 칭송을 받으면 명예가 따를 것이고, 뜻을 세우면 덕행을 이룰 수 있다. 자식이 명예를 얻으면 부모도 영광스럽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기 바란다.




나는 비록 높은 관직에 올라서 많은 녹봉을 받은 적이 없다. 하지만 학문을 추구하는 마음만은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학에 대한 연구와 글쓰기를 즐겨 하였다. 그래서 자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비의 모습을 보여줄 수는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의 묘를 수리하지 못할까 걱정이다. 또한 내가 아끼던 책이 대부분 훼손되었는데 필사본을 만들어 너희에게 전해주지 못할까 걱정된다. 서산에 기우는 해와 같은 몸으로 남은 일을 완수할 수 있을지 두렵다.




집안 형편은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으니, 계절에 맞춰서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면 굶주림과 추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식생활을 검소하게 하고 소박한 옷을 입는다면 나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아들아, 내 말을 명심하여 소홀히 여기지 말길 바란다.






∙정현 鄭玄. 동한 시대 북해군(北海郡) 고밀(高密)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태학(太學)에서 공부했다. 마융(馬融)을 스승으로 받들며 그의 학문을 모두 전수 받았다. 평생을 은둔하며 경전을 연구해 수많은 저술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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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에어/ 샬럿 브론테 지음 / 민음사 











 


 


 


 


 


제1장






그날은 산보가 가당치 않은 날씨였다. 우리는 오전 중 한 시간쯤 잎이 진 관목 사이를 서성거린 터였다. 그러나 점심을 마친 무렵부터(리드 부인은 손님이 없을 때는 일찌감치 식사를 하였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컴컴한 구름과 더불어 몸에 스미는 비를 몰고 왔기 때문에 그 이상 집 밖에서 바람을 쐰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나는 그것이 기뻤다. 오랫동안 산보하는 것이 나는 싫었다. 특히 쌀쌀한 오후의 산보가 그랬다. 손발이 온통 얼어붙고, 유모인 베시의 잔소리에 속은 상하고 또 일라이자, 존, 조지아나에 비해서 체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에 기가 죽은 채 썰렁한 황혼 녘에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방금 말한 일라이자와 존과 조지아나는 이제 객실에서 저희 엄마를 둘러싸고 있었다. 리드 부인은 난롯가의 소파에 누워 있었고, (당장엔 싸움도 않고 울지도 않는) 귀염둥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아주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만은 이렇게 말하면서 좌중에 끼워주지를 않는 것이었다.




"너를 멀리하는 것이 속으로는 안되었다. 그러나 네가 좀 더 상냥하고 천진한 성품을 가지고, 곰살궂고 싹싹한 태도를 취해서, 이를테면 보다 밝고 순진하고 꾸밈이 없는 어린이가 되려고 진정으로 애쓴다는 것을 베시에게 전해 듣거나 실지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태평스럽고 행복한 아이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으로부터 너를 제외할 줄 알아라."




"제가 어쨌다고 베시가 그랬기에요?" 하고 나는 물었다.




"제인, 생트집이나 하고 이것저것 귀찮게 물어대는 아이에겐 나는 정나미가 떨어진다. 더구나 어린아이가 어른한테 그렇게 덤벼드는 게 아니다. 어디 가서 앉으려무나, 사근사근하게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입을 봉하고 있어."




객실 옆에는 조그만 조반 식당이 있었다. 나는 살며시 그 식당으로 들어섰다. 거기엔 책상이 있었다. 나는 그림이 많이 들어 있는 책을 하나 골라잡았다. 그러고는 창 밑의 걸상으로 올라가 터키인처럼 발을 모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붉은 모직의 커튼을 전부 내리니 이중으로 으슥한 곳에 숨어 있는 셈이었다.




오른쪽으로는 붉은 커튼 자락이 앞을 막았지만 왼쪽은 투명한 유리창이어서 그 창은 음산한 2월의 날씨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기는 하였으나 완전히 차단시켜 주지는 않았다. 책장을 넘기면서 이따금씩 나는 겨울 오후의 형세를 살펴보았다. 먼발치로는 안개와 구름이 어슴푸레 보였고 가까이로는 젖은 잔디와 폭풍에 시달린 관목이 보였는데 길고 을씨년스러운 질풍을 맞은 빗줄기가 끊임없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보고 있던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읽고 있던 것은 비윅의 『영국 조류사(鳥類史)』였다.



대체로 본문의 설명에는 흥미가 없었으나 어린 나로서도 그냥 넘겨버릴 수가 없는 서론의 페이지가 있었다. 거기에는 바닷새의 서식지라든가 바닷새만이 살고 있는 "외진 바위산과 돌출부", 남쪽 끝인 린드니스나 네이즈에서 노스케이프에 이르기까지 조막섬(小島)이 산재해 있는 노르웨이 해안 등에 대해 적혀 있었다.




크나큰 소용돌이가 치는 북해가




세상 끝 벌거숭이 외진 조막섬들을 씻고




대서양의 파도는 폭풍 휘몰아치는




헤브리데스 섬 사이로 밀려든다.






나는 또한 라플란드, 시베리아, 슈피츠베르겐, 노바 젬블라,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등의 황량한 해안선을 다룬 부분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북극권의 광활한 벌판, 쓸쓸한 공간의 황량한 지역, 눈과 얼음의 저장지, 그곳에선 몇백 년 동안의 겨울이 쌓아놓은 단단한 빙원(氷原)이 알프스 산을 포개어놓은 듯 우뚝우뚝 솟은 채 극지를 에워싸고 있는 혹한의 몇 배나 되는 강추위를 한 점에 모아놓고 있다." 죽음처럼 하얀 그 지방에 대해 나는 나대로의 짐작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소견에 몽롱하게 떠오르는 반쯤 납득이 간 생각처럼 막연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야릇하게 인상적인 것이었다. 이 서론에 담긴 말들은 뒤에 나오는 그림에 연결되어 있었고, 파도와 물보라가 휘몰아치는 바다에 홀로 서 있는 바위와 쓸쓸한 바닷가에 좌초된 난파선, 그리고 막 침몰해 가고 있는 난파선을 구름 사이로 엿보고 있는 차갑고 섬뜩한 달에 함축성을 부여해 주었다.




비명(碑銘)을 새겨 넣은 묘석이 있고 문과 두 그루의 나무, 무너진 담장에 둘러싸인 나지막한 지평선, 그리고 초저녁임을 말해 주는 갓 떠오른 초승달이 걸려 있는 조용하고 적막한 묘지, 그 그림에 어떠한 감정이 붙어다닌 것인지 나도 모른다.




바람 한 점 없이 잠잠한 바다 위에서 꼼짝 못하고 있는 두 척의 돛배 그림을 나는 바다의 귀신이라고 생각했다.




마귀가 도둑이 진 짐을 등 뒤에서 밀어붙이고 있는 그림은 질겁을 하며 책장을 넘겼다. 정말 무서운 그림이었다.




뿔이 달린 시꺼먼 괴물이 바위 위에 걸터앉은 채 교수대를 에워싸고 있는 군중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그림이나 제각기 이야깃거리를 지니고 있었다. 나의 미숙한 이해력과 불완전한 감정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점이 많았지만 굉장히 흥미로웠다. 마치 겨울밤, 베시가 기분이 좋을 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흥미진진하였다. 베시는 이럴 때 육아실 난롯가에 다리미판을 들여놓고 그 둘레에 우리들을 앉혀놓고는 리드 부인의 레이스 주름 장식을 세우거나 나이트캡 테두리에 주름을 잡으며 옛날이야기나 더 옛날의 민담, 혹은 (이것은 뒷날 알게 된 것이지만) 『파멜라』나 『모어랜드 백작 헨리』 등에서 따낸 연애담이나 모험담을 열심히 귀 기울이고 있는 우리들에게 들려주곤 하였다.




비윅의 책을 무릎에 올려놓은 나는 그때 행복하였다. 적어도 내 나름대로는 행복하였다. 나는 그저 방해받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훼방꾼은 너무나 빨리 나타났다. 조반실의 문이 열렸다.




"왁! 청승덩어리!" 하는 존 리드의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잠잠해졌다. 방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요게 어디 간 것일까?" 하는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일라이자! 조지아나! (이렇게 여동생들을 부르면서) 제인이 여기 없어. 비가 오는데 뛰쳐나갔다고 엄마한테 말해. 고약한 것 같으니라고!"




'커튼을 내리길 참 잘했다!'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렇게 숨어 있는 곳을 들키지 말아야 할 텐데 하고 간절히 바랐다. 존 리드가 찾아낼 것 같지도 않았다. 머리도 눈치도 둔한 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 일라이자가 문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더니 말하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창 근처에 있어."




나는 곧 스스로 나와버렸다. 존에게 끌려 나갈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쳤기 때문이다.




"왜 그래?" 하고 쭈뼛쭈뼛 겁먹은 듯 나는 물었다.




"왜 그러세요, 도련님? 이렇게 말하란 말이야. 이리 와." 그는 안락의자에 앉더니 앞으로 와 서라는 몸짓을 하였다.




존 리드는 열네 살 먹은 학생이었다. 그러니까 열 살이었던 나보다 네 살 위였다. 나이에 비해 크고 뚱뚱했는데 피부색은 우중충하니 건강치 못한 듯한 빛깔이었다. 넓적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큼직하였고 팔다리도 손발도 모두 굵직하였다. 끼니마다 으레 포식을 하기 때문에 걸핏하면 골을 내기 일쑤였고 눈도 몽롱하게 흐릿하고 볼때기의 살도 축 늘어져 있었다. 지금쯤 마땅히 학교엘 가 있어야 했지만 "허약한 체질 때문에" 어머니가 집에 데려다놓은 지 이제 한 달인가 두 달이 된 터였다. 교사인 마일스 씨는 집에서 보내주는 케이크나 사탕 과자의 양을 줄이기만 하면 건강은 걱정이 없다고 단언했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그렇듯 가혹한 의견은 외면해 버리고 아들의 안색이 나쁜 것은 지나친 공부와 집 생각 때문일 것이라는 우아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존은 어머니와 누이들에게도 별 애정을 갖고 있지 않았고 내게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를 보면 골탕을 먹이고 괴롭히곤 했는데 그것도 일주일에 두서너 번, 혹은 하루에 한두 번 정도가 아니라 계속 그러는 것이었다. 내 신경 전체가 온통 그를 두려워했고 그가 가까이 오면 뼈에 붙어 있는 모든 살점이 움츠러들었다. 그가 불러일으키는 공포로 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기가 일쑤였다. 그에게 협박을 받거나 해코지당해도 호소할 길이 내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녀들은 내 편을 들어줌으로써 도련님의 비위를 상하게 하기를 꺼려 했고 리드 부인은 그런 문제엔 전혀 장님이요 귀머거리였다. 존이 어머니 앞에서 가끔, 그리고 보지 않을 때 훨씬 더 자주 나를 때리고 내게 욕설을 퍼부어도 부인에겐 그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이었다.




늘 그렇듯이 다소곳이 나는 존의 의자께로 다가섰다. 그는 나를 향해 혀뿌리가 상하지 않을 정도로 한껏 혓바닥을 삼 분쯤 내밀고 있었다. 곧 나를 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의 주먹질을 겁내면서 나는 곧 내게 주먹을 안겨줄 그의 진절머리 나는 추악한 얼굴을 곰곰이 바라보았다. 내 표정에서 그런 내 마음을 엿본 것이리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느닷없이 그는 나를 세게 쳤다. 나는 비틀거렸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의 의자에서 한두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조금 전에 어머니한테 버릇없이 말대답을 했지. 또 커튼 뒤에 몰래 숨어 있었지. 그리고 그 눈초리는 또 뭐야. 그래서 맞은 거다, 요 계집애야!"




존 리드의 욕설에는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난 대답은 할 생각도 안 했다. 욕설 뒤에 따라올 주먹질을 어떻게 견디어낼 것인가 하는 걱정뿐이었다.




"커튼 뒤에 숨어서 무엇을 했어?" 하고 그가 물었다.




"책을 읽었어."




"책을 내봐."




나는 창께로 가서 책을 가져왔다.




"네가 왜 우리 책을 마구 꺼내가는 거야. 엄마가 그러는데 넌 군식구래. 넌 돈도 한 푼 없어. 너의 아버지가 물려준 것이 아무것도 없단 말이다.




사실은 너는 비럭질을 할 처지인 거야. 우리 같은 양갓집 자녀들과 함께 살고, 우리와 똑같은 식사를 하고 또 엄마의 돈으로 옷을 사 입을 처지가 못 돼. 내 책장을 뒤지면 어떻게 되나 본때를 보여줄 테다. 책은 모두 내 것이야. 이 집은 모두 내 것이야. 몇 해 안으로 그렇게 돼. 거울과 창을 피해서 문 쪽으로 가서 서 있어."


처음에는 그의 속셈을 모르고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그가 책을 번쩍 쳐들어 던지려 할 때는 나는 고함을 지르며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날아온 책에 맞아 나는 넘어졌다. 머리를 문에 부딪쳐 다쳤다. 상처에서는 피가 나고 몹시 쓰렸다. 공포심의 고비를 넘기자 다른 여러 감정들이 북받쳐 올랐다.




"고약한 심술쟁이 같으니라고! 꼭 사람 백정 같아. 노예 감독 같아. 꼭 로마의 폭군 황제 같아!"




나는 골드 스미스의 『로마사』를 읽은 적이 있었고, 네로나 칼리굴라 같은 폭군에 대해서 나대로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혼자서 속으로 존을 폭군에 비유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큰 소리로 내뱉을 생각을 하지는 않았었다.




"뭐라고? 뭐라고?" 하고 존은 소리쳤다. "그런 소리를 내게다 대고 해? 일라이자, 조지아나, 지금 한 소리를 들었지? 내 엄마한테 안 이를 줄 알아? 그러나 우선`""?."




그는 무턱대고 내게 달려들었다. 내 머리칼과 어깨를 잡아채는 것을 알았으나 내 편에서도 필사적이었다. 나는 정말로 그의 사람 백정 같은, 폭군 같은 성품을 보게 되었다. 한두 방울의 피가 머리에서 목으로 흘러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고 쓰리고 아팠다. 이 아픔 때문에 공포심은 도리어 누그러진 셈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막아냈다. 두 손으로 어떻게 했는지는 지금 모르겠으나 그는 "요것! 요것!" 하면서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에게는 구조의 손길이 가까이에 있었다. 이층에 가 있는 리드 부인을 부르려고 일라이자와 조지아나가 달려 나갔다. 부인이 나타났고 베시와 하녀인 애보트가 뒤따라왔다. 우리 둘 사이가 떨어졌을 때 내게는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저런! 존 도련님한테 덤벼들다니 무슨 짓이야!"




"이런 꼴은 처음 보겠네!"




그러자 리드 부인도 끼어들었다.




"저 애를 붉은 방에 데리고 가서 가두어놓아."




네 개의 손이 순식간에 나를 낚아챘다. 나는 이층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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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4-12-01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인 에어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자그맣고, 못생기고, 고집센 제인 에어와 나를 동일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이로운삶 2004-12-01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시는 부분이라니 기쁘네요.^^ 게으른 서재에 놀러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지음 / 백선희 옮김/ 문학세계사 


 




 첫날, 그녀가 웃는 걸 보았다. 순간, 나는 그녀가 알고 싶어졌다.


그녀를 알지 못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간다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이었으니까. 나는 언제나 타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내게 다가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학생활이 그랬다. 세상을 향해 나를 열어야지 했으나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일주일 후, 그녀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금세 눈길을 돌리겠지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녀의 눈길은 오래도록 나를 훑었다. 나는 감히 그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발 밑으로 땅이 꺼지는 것 같았고, 숨쉬기가 힘들었다.




도무지 멈출 것 같지 않은 고통이었다. 견디기 힘들었다. 평생 내본 적 없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내게 살짝 손짓하며 웃었다.




그러더니 어느새 남자애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튿날, 그녀가 내게로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인사에 답하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거북해 하는 내가 끔찍이도 싫다.




“넌 다른 애들보다 어려 보여.”




그녀가 말했다.




“실제로 그래. 한 달 전에 열여섯이 되었어.”




“나도. 세 달 전에 열여섯 살이 되었는데. 솔직히 말해봐, 믿어지지 않지?




“응.”




자신만만한 태도 때문인지 그녀는 두세 살쯤 더 들어 보였다. 그 때문에 우리 둘 다 무리에서 튀어 보였다.




“이름이 뭐야?”




그녀가 물었다.




“블랑슈. 너는?”




“크리스타.”




독특한 이름이었다. 감탄해서 또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내가 놀라는 걸 보고 그녀가 말했다.




“독일에서는 드문 이름이 아니야.”




“너, 독일사람이니?”




“아니. 동부 출신이거든.”




“독일어 해?”




“물론이지.”




감탄 어린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잘 가. 블랑슈.”




나는 미처 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미 대강당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큰소리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무리를 향해 걸어갔다.




“벌써 잘도 어울리네.”




어울린다는 말은 내게는 엄청난 의미를 가진 말이다. 나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했으니까. 무리에 잘 어울리는 사람들을 보면 경멸과 질투심 섞인 감정이 들곤 했다.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내가 원해서 혼자라면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설사 금세 다시 외톨이가 되는 호사를 누리게 될지언정 말이다.


나는 특히 크리스타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를 갖는다는 건 나로서는 도무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크리스타의 친구가 된다는 건, 아냐, 꿈도 꾸지 말아야 해.




내가 어째서 크리스타와의 우정을 바라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명확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에게는 무언가가 있어 보였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학 캠퍼스를 막 떠나려는데 웬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런 적이 없었기에 나는 당황했다. 뒤를 돌아다보니 크리스타가 달려오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어디 가?”




나란히 걸으며 그녀가 물었다.




“집에.”




“어디 사는데?”




“걸어서 오 분 거리야.”




“좋겠다!”




“왜? 넌 어디 사는데?”




“말했잖아. 동부라고.”




“설마 저녁마다 거기까지 간다는 얘기는 아니겠지.”




“아니, 맞아.”




“그렇게 먼 곳을!”




“멀지. 기차로 오는 데 두 시간, 가는 데 두 시간 걸려. 버스 타는 시간은 치지 않고도 말이야. 달리 방법이 없어.”




“견뎌내겠어?”




“두고 봐야지.”




그녀를 곤란하게 할까봐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자취 비용을 댈 능력이 없는 게 분명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아래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여기가 네 부모님 집이야?”




그녀가 물었다.




“응. 너도 부모님 집에 사니?”




“응.”




“우리 나이에는 당연한 일이지.”




왜 하필 그런 얘기를 했는지.




그녀가 화들짝 웃었다. 내가 우스운 얘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부끄러웠다.




내가 그녀의 친구가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누군가의 친구라는 건 어떻게 아는 걸까? 분명 어떤 신비스런 기준이 있을 텐데, 한번도 친구를 가져본 적이 없어 알 수 없었다. 이를테면, 그녀는 나를 우습다고 여겼다. 이런 게 우정의 표시일까 아니면 멸시의 표시일까? 그때 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건 내가 이미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통찰력을 동원해 왜 그럴까 생각해보았다. 내가 그녀를 조금, 아주 조금 안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에 들고 싶어하는 내 욕망을 정당화해주는 걸까? 아니면 그녀 같은 사람이 처음으로 나를 쳐다봐 주었다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이유 때문일까?


화요일은 오전 여덟시에 수업이 시작된다. 크리스타는 눈 밑이 시커멓게 그늘져 있었다.




“피곤해 보여.”




내가 말했다.




“네시에 일어났거든.”




“네시! 오는 데 두 시간 걸린다며.”




“말메디 시에 사는 것도 아냐. 내가 사는 마을은 역에서 30분이나 떨어져 있어. 다섯시 기차를 타려면 네시에는 일어나야 돼. 그리고 브뤼셀에 도착해도 학교가 역 바로 옆에 있는 게 아니잖아.”




“네시에 일어나다니 인간도 아니야.”




“다른 방법이라도 있어?”




짜증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는 홱 돌아서 가버렸다.




죽도록 내가 원망스러웠다. 어떡해서든 그녀에게 도움을 주어야만 했다.






그날 저녁, 나는 부모님에게 크리스타 얘기를 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녀를 내 친구라고 말했다.




“너한테 친구가 있어?”




애써 놀란 표정을 감추며 엄마가 물었다.




“네. 월요일 저녁마다 걔가 여기서 자도 될까요? 동부 도시에 살기 때문에 8시 수업에 참석하려면 화요일에는 새벽 네시에 일어나야 한대요.”




“되고말고. 네 방에 접는 침대를 갖다놓지 뭐.”






다음날, 전에 없던 용기를 내어 나는 크리스타에게 얘기를 꺼냈다.




“너만 좋다면 월요일 저녁에는 우리 집에서 자도 돼.”




그녀는 웃는 얼굴로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내 평생 가장 멋진 순간이었다.




“정말?”




그런데 그만 괜한 말을 해서 분위기를 망치고 말았다.




“우리 엄마 아빠도 허락하셨어.”




그녀가 픽 웃었다. 또 바보 같은 말을 하고 만 것이다.




“올 거니?”




전세는 어느새 역전되었다. 그녀의 편의를 봐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탁을 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래, 가지 뭐.”




마치 나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서라는 듯이 그녀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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