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 상·하/ 샨사 지음/ 이상해 옮김/ 현대문학 

 

 

 

 

끝없이 이어지는 달들, 불투명한 세계, 으르렁거림, 돌풍, 지진. 휴식의 순간은 드물었다. 무릎에 이마를 대고 팔로 머리를 감싼 채 나는 생각하고, 귀 기울이고, 존재하지 않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거기 생명이 있었다. 천천히 자전하는 별이, 투명한 진주가. 나는 장님이었다. 내 눈은 매일 조금씩 지워지는 다른 세계, 다른 삶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색깔들은 이미 퇴색해버렸고, 이미지들도 흐릿하게 변해버렸다. 귓가에는 여전히 외마디 비명소리와 희미한 울음소리가 맴돌았다. 아득한 기억이 날 짓누르고, 짙은 우수憂愁가 날 태웠다. 난 누구지? 내 발치에 웅크리고 있던 죽음에게 물었다. 죽음은 으르렁거릴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웃음소리,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아들이 틀림없어요, 대감. 아, 움직여요. 성깔이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아요.”


내가 누가 되든, 그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 무한함에 싫증이 나 있었다. 희망하고, 기다리고, 내 자신,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에 싫증이 나 있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날 진정시켜주었다. 나는 흘러내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결코 태양이 뜨지 않는 내 하늘 속에서 어린 소녀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 부드럽고 순결한 목소리가 날 잠재워주었다. 내 언니, 나는 그녀에게 큰 불행이 닥칠까봐 두려웠다. 손 하나가 날 어루만지려 했다. 하지만 벽이 우리를 갈라놓고 있었다. 어머니, 내 생각의 벽에 비치는 그림자여, 당신은 내가 당신의 몸이라는 감옥에 갇혀버린 늙은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호수 깊은 곳, 세피아빛 물속에서 나는 뒤척이고, 움츠리고, 기지개를 펴고, 빙글빙글 돌았다. 몸이 하루가 다르게 붓고 무거워져 날 질식시켰다. 바늘 끝, 모래알갱이, 물방울에 비친 태양이 되고 싶었던 내가 부풀어 터지는 살, 주름과 피의 산, 바닷괴물이 되어갔다. 어떤 숨결이 날 들어올려 흔들어주었다. 나는 걸핏하면 성깔을 부렸다. 내 자신에게, 간수였던 여자에게, 나의 유일한 친구인 죽음에게 화를 냈다.


그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들에게 조照라는 이름을 붙여줄 거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출산준비의 소란이 나의 명상을 방해했다. 그들은 옷, 기저귀, 잔치, 뚱뚱하고 살결이 희며 튼튼한 유모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귀신들이 내 영혼을 앗아갈까 두려워 내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것을 금했다. 그들은 그들의 운명이 끝나는 바로 그곳에서 내가 다시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나는 호들갑스럽고 상냥하고 탐욕스러운 그 존재들이 불쌍했다. 그들은 내가 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그들 세상을 파괴하리라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화염으로, 얼음으로 해방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소스라치듯 놀랐다. 물이 들끓고 있었다. 성난 파도가 내게로 밀려와 부서졌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 호흡에, 진통의 경련에 집중하며 두려움에 대항해 싸웠다. 쇄도하는 늪의 물결은 나를 좁은 하구로 몰아넣었다. 나는 바위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몸에서 피가 났다. 피부가 찢어졌다. 머리가 파열됐다.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누군가가 내 발을 잡아당기고는 엉덩이를 때렸다. 거꾸로 들린 채 나는 울음을 토해냈다. 누군가가 피부가 벗겨질 듯 따가운 천으로 날 감쌌다. 나는 불안으로 가득한 한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들이요, 딸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사내가 나를 안아 배내옷을 찢을 듯이 벗겨내려 했다.


한 여인의 신음소리에 그가 동작을 멈추었다.


“또 딸이에요, 대감.”


“아!” 그가 탄식하며 눈물을 쏟았다.

 

 십여 명의 여자들이 나의 성장을 보살폈다. 세 명의 유모가 번갈아가며 갈증을 해소시켜주었다. 나의 왕성한 식욕이 그들을 겁먹게 만들었다. 나는 벌써 웃었다. 흑진주같이 검고 큰 눈이 안구 속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나는 잠시도 눈을 붙이지 않고 밤낮없이 세상을 바라보았다. 정상적이지 못한 나의 행태에 불안을 느낀 어머니가 귀신 쫓는 중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아무도 내 안에 터를 잡은 악마를 몰아내지 못했다.


나는 결국 그들의 호들갑에 지치고 말았다. 그들이 날 가만히 내버려두도록 나는 망사 모기장 속에서 거짓잠을 청했다. 한 여자는 요람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고, 또 한 여자는 향기 가득한 세계 안으로 비집고 들어온, 몇 안 되는 날벌레를 쫓기 위해 부채질을 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창문 너머 먼 곳으로 생각을 띄워 보냈다.


아버지가 절대적 주인인 왕국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전정前庭은 남자들에게 할애된 공간이었다. 집사, 비서, 회계원, 요리사, 시동, 하인, 마부, 위병, 머슴들이 새벽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관료와 군인들이 명령을 받고는 말을 타고 황급히 어딘가로 떠났고, 병사들은 연병장에서 하루 종일 훈련을 했다. 이 남성적인 세계는 규방이 시작되는 주홍색 대문 앞에서 멈춰졌다. 눈처럼 희고 높은 담 뒤에서 늙거나 젊거나 혹은 어리거나 한 여자 수백 명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쪽찐 머리에 꽃을 꽂았고, 비단 허리띠에 옥고리를 달았다.



무덕武德 여덟 번째 해였던 그해,1) 초봄의 파리한 화사함이 유행이었고, 옷들은 크로커스(사프란 속의 꽃`―`역주)의 황색, 수선화잎의 녹색, 버찌의 사랑스러운 분홍색, 호수에 비친 태양의 양홍洋紅색을 띠고 있었다. 청소하는 여자, 하녀, 옷 짓는 여자, 수놓는 여자, 심부름꾼, 유모, 요리사, 감모監母, 여집사, 치장 담당 시녀, 가희, 무희, 그들은 모두 천천히 걸어다녔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해가 뜰 때 일어났고, 해가 질 때 목욕을 했다. 그들은 아버지의 정원을 장식하는 꽃들로, 단 한 사람을 아름답게 돋보이게 하기 위해 활짝 피어났다.


어머니의 차림새는 검소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침소리와 눈초리에 따라 온 집안이 움직였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우아했다. 유행은 한철 나비처럼 지나갔지만, 어머니는 영원한 봄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본가인 홍농弘農 지방 양씨楊氏 집안은 제국에서 가장 지체 높은 서른 개의 가문 중 하나였다. 승상들의 딸이자 조카, 누이이며, 황실 부인들의 사촌, 황제의 가까운 인척인 어머니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보석, 망토, 후광처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절에 시주를 했고, 걸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줬다. 열렬한 불교신자였던 그녀는 채식만 고집했으며, 소란스러운 세상사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녀는 정성 들여 경전을 베껴 쓰며 눈부신 광채를 발하는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가기를 꿈꾸었다.


어머니는 차갑고 세심하고 부드러웠다. 날이 선 불투명한 그녀의 부드러움은 내 요람 위에 매달려 있던 옥 원반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늘 그녀가 그리웠다. 기다림에 지친 나는 짜증이 났다. 그녀는 며칠 만에 한 번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날 찾을 때면, 땅에 끌리는 비단 옷자락과 끝없이 긴 모슬린 상의가 내 방의 휘장을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그녀의 신발이 닿을 때마다 땅은 쾌락으로 속삭였다. 그녀의 향수가 그녀보다 앞서 왔다. 향수에서는 태양, 눈, 동풍, 행복으로 충만한 꽃부리 냄새가 났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나를 품에 안아주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했다. 나는 그녀를 집어삼킬 듯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은 두 장의 빨간 꽃잎이었다. 털이란 털을 모두 뽑은 그녀의 얼굴은 거울처럼 매끄러웠다. 밀어버린 다음, 매미의 날개 모양으로 다시 그려넣은 눈썹 아래의 반짝이는 두 눈에는 떨쳐버릴 수 없는 실망감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아들을 원했던 것이다.


 석류꽃이 만발하자 여름이 왔다. 그리고 내 백일이 다가왔다. 어머니는 연못 한가운데에 있는 정자를 열게 하고 친구와 친지를 초대해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반짝이는 물에 둘러싸인 정자 안에서 나는 이 손 저 손을 타고 돌아다녔다. 그들은 날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하녀들이 층계를 걸어올라와 선물을 내려놓았다. 어떤 부인은 나에게 에메랄드 팔찌를 선물했다. 그녀는 눈이 이렇게 검고 반짝이니 틀림없이 총명할 거라고 말했다. 다른 부인은 은쟁반에 금괴 아홉 개를 얹어 가져오게 하고는 이마가 이렇게 넓으니 좋은 배필을 만나 유복하게 살 거라고 말했다. 또 다른 부인은 금실 은실로 수놓은 화려한 비단 아홉 필을 선물했다. 그녀는 코가 이렇게 반듯하고, 볼이 이렇게 통통하며, 입이 이렇게 동그라니 틀림없이 아들을 여럿 낳을 거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흡족해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내자 사람들이 잔치판 중앙에 비단융단을 펼치고, 포대기에서 날 꺼내 그 위에 앉혔다. 하녀들이 열 가지 가량의 물건을 여기저기 흩어놓았다. 나는 그 자리에 모인, 호화롭게 치장한 부인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대신 차가운 장난감 하나를 집어, 그것을 들어올리려고 애썼다. 웅성거림이 번져가는 가운데 부인 하나가 입을 열어 평했다.


“이 아이는 아름다움의 분통粉桶도, 고귀함의 옥玉도, 음악의 피리도, 지혜의 책도, 시詩의 붓도, 상商의 주판도, 구도의 염주도 집지 않았어요. 사촌언니, 이 아이의 미래는 아주 특이할 거예요. 사내아이로 태어났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래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다른 부인이 아쉬운 듯 또 한 번 반복해 말했다.


“그렇게 아쉬워할 것 없다.” 위엄이 넘치는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 시대에는 여자들도 얼마든지 위업을 달성할 수 있어. 예전에 평양平陽 공주는 선왕을 대신해 전장에 나갔다. 전사한 그녀의 장례식 때 황제께서는 나팔을 불고 북을 치게 해 남자와 똑같은 예우를 해주셨지. 네 딸은 하늘의 숨결을 받아들일 수 있는 툭 불거진 이마, 반짝이는 눈동자, 단단한 턱, 도톰한 입술을 타고났다. 이 아이가 제 아버지의 검을 집었으니 얼마나 장한 일이냐! 얘야, 앞으로 이 아이를 사내처럼 입히고 타고난 운명에 걸맞는 교육을 시키거라. 장군의 딸은 지휘를 좋아하는 법이니라. 이 아이는 장차 훌륭한 무관 집안의 여주인이 될 게다!”


나는 요람에서 세상을 맞이하기보다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픈 욕구를 느꼈다. 두 발을 딛고 설 수 없었으므로 나는 기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걸음은 내 몸에 있는 모든 근육의 공조를 요구했다. 목표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지르기 위해 입을 벌린 채, 나는 한 팔, 한 다리를 번갈아 들어올려 우주를 가르며 나아갔다.


수염이 덥수룩한 한 남자가 날 굽어보았다. 검은담비로 안을 댄 비단 망토로 몸을 감싼 그는 먼 곳에서, 아주 먼 곳에서 온 것처럼 보였다. 그를 보고 있자니 말발굽 소리, 무기 부딪히는 소리, 바람의 울부짖음, 유녀游女들의 미친 듯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에게서 풍기는 짐승의 냄새는 나를 전율케 했고, 그의 갑작스런 입맞춤은 내 뺨을 찢어놓았다.


한 계집아이가 날 유심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의 홍조 띤 얼굴빛, 수려한 용모, 단단한 다리, 검은 눈동자, 그녀가 끌고 다니는 나무오리에 매료되었다. 나를 요리조리 살펴보던 그녀는 내 손에 손가락 하나를 올려놓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끝내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그 손가락을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언니를 아프게 하지 마세요.” 유모가 나에게 말했다.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먼 훗날, 아무것도 모르던 이 날처럼 언니가 나에게 자신의 처형자가 되어달라고 애원하게 되리라는 것을.


무덕 아홉 번째 해, 황제가 아들에게 권좌를 물려주었다. 열두 달 후, 새 황제가 임무수행차 양주揚州에 가 있던 아버지를 불러들였다. 아버지는 이세민의 난이 일어난 이주利州의 도독都督(지방 장관`―`역주)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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