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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변신' 프란츠 카프카

체코 프라하 환각의 都市… 부조리한 상상력 자욱
뒤늦게 세워진 동상 “카프카스럽다” 탄성
전차로 이어진 도시 전체가 ‘건축 박물관’
프라하=박해현 기자 hhpark@chosun.com
입력 : 2005.07.08 17:55 46' / 수정 : 2005.07.09 01:30 41'


▲ 프란츠 카프카/소설가
“프라하는 우리를 풀어주지 않아. 이 작은 엄마는 발톱을 갖고 있어...”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난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는 변신을 꿈꿨다. 그 도시에서 그는 소설 ‘변신’을 쓰면서 언젠가는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서 생의 변신이 이뤄지길 갈망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세번의 약혼과 파혼을 거듭하면서 독신으로 살았고, 베를린에서의 짧은 동거와 죽기 직전의 요양원 생활을 제외하고는 고향을 떠나지 못했다. 마흔 한 살 생일을 한 달 앞두고 폐결핵으로 죽은 그는 프라하에 묻혔다.

형형색색의 건물들이 운집한 프라하의 구시가지는 현실의 도시이면서도 어딘가 비현실적 분위기를 띤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브르통이 “유럽의 마술적 수도(首都)”라고 탄복했던 프라하. 카프카의 소설 ‘변신’을 낳기에 적합한 환상의 환각제가 이 도시 어디에선가 안개와 함께 떠도는 것이 아닐까.

프라하는 움직이지 않지만, 카프카의 소설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프라하는 거울의 뒷면에 붙은 또 하나의 도시를 펼쳐놓는다. 프라하의 옛 시청 광장. 카프카는 이곳 성 니콜라스 교회 옆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 태어났다. 카프카의 생가 앞 작은 광장에는 ‘나메스티 프란체 카프키’(프란츠 카프카의 광장)라는 동판이 붙어있다. 생가가 있던 자리에 새로 들어선 건물 벽에 턱이 뾰족한 카프카의 얼굴 부조가 붙어있다. 창백한 시선의 카프카가 낯선 방문객을 노려본다. 카프카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 카프카 기념관도 있다.


▲ 카프카 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조각가 야로슬라프 로나가 만든 카프카 동상. 프라하의 새 명물이다/박해현기자
카프카는 이곳에서 낮에는 보험국 관리로 일하고, 밤에는 독일어로 소설을 썼다. 당시 유대인들은 공식적으로 히브리어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독일어와 체코어 중에서 글쓰기를 택일해야 했다. 카프카 집안은 당시 프라하 인구 10% 미만인 상류층이 쓰는 독일어를 선택했다. 엄밀하게 말해서 카프카의 소설은 체코 문학사의 일원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그 누구보다도 프라하의 상징적인 작가로 남아있다.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 가까운 두스니 거리(성령의 거리)에 카프카 동상이 서있다. 가톨릭 교회와 유대인 사원이 마주보고 있는 거리다. 카프카가 매일 저녁 산책을 즐겼던 곳이라고 한다. 조각가 야로슬라프 로나의 작품인 카프카 동상은 절로 “카프카스럽다”는 탄성을 짓게 했다. 머리 없이 걷고 있는 인물상의 어깨에 모자를 쓴 카프카가 걸터앉은 형상이다. 한 사내가 잠에서 깨어났더니 한 마리 벌레로 변해있더라는 황당한 소설 ‘변신’의 작가 카프카에 걸맞은 동상이었다. 들고 갔던 전영애(서울대 독문과 교수) 번역의 카프카 소설 ‘변신·시골의사’의 뒤표지를 들여다봤다. “카프카는 몽상가였고, 그의 작품들은 꿈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짓을 정확히 흉내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를 비웃고 있다”라는 토마스 만의 글이 평소보다 더 크게 보였다.

동상은 카프카 사후 80주년을 맞은 지난해에 세워졌다. 작가는 너무나 오랜 시간 끝에 고향에서 제 대접을 받았다. 고향은 뒤늦게 작가에게 진 빚을 갚으면서 무수한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효과도 거두고 있다.

프라하는 전차의 도시이기도 하다. 신경 세포처럼 이어진 전차 노선과 함께 도시가 꿈틀거린다. 카프카가 살았던 시대에도 전차는 다녔다. 카프카의 눈으로 보면, 전차마저도 부조리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나는 전차의 입구 쪽에 서있다. 이 세계, 이 도시, 나의 가족 안에서 나의 위치를 헤아려보니 여지없이 불확실하기만 하다. 그 어느 방향에서든 간에 내가 이러이러한 권리를 마땅히 내세울 수도 있을거라고는 나는 지나가는 말로라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소하고 순종적인 소시민의 삶을 살았던 카프카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한없이 작아지는 실존의 부조리를 벗어날 수 없다. 흔들리며 어디론가로 가는 입석 승객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종점을 향해, 소멸을 향해 가는 유한한 인간의 소리없는 비명을 불러일으킨다.

카프카가 살았음직한 집의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 없는 방이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삶과 같다. 창문은 어둠을 가르는 빛처럼 숨통을 형상화한다. “쓸쓸하게 살고 있으면서도 여기저기 그 어디든 끼어보고 싶어하는 사람, 하루의 시간이나 날씨, 직장 사정의 변화 따위를 생각하다 보면 그만 그 어느 것이든, 매달릴 수 있을 팔이 보고 싶기만 한 이는 골목으로 난 창이 없이는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지 못할 것이다.”(‘골목길로 난 창’ 부분)


▲ 안개깔린 프라하의 카렐 다리를포착한 사진 작가 지리 수렉의 작품. 사진집‘Prague’에서.
독일 시인 릴케가 “프라하, 풍요롭고 거대한 건축의 서사시”라는 찬사를 던졌을 정도로 프라하는 서양 건축의 화려한 역사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거대한 건축 박물관이다. 카프카의 단편 ‘굴’(Der Bau)은 ‘건축’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는 글을 통해 굴을 파면서 역설적 건축을 시도했다. “굴을 팠는데 잘 된 것 같다. 밖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커다란 구멍 하나뿐이나….”라며 시작하는 이 소설처럼 카프카의 생은 자발적 고독과 소외의 기록이었다. 그렇다고 크게 비명을 지르지도 않은 채 수식이 배제된 건조한 문체로 낯익은 현실을 낯설게 만들었다. 카프카의 소설은 모든 대상을 일그러뜨려서 반사하는 거울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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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체코 프라하에서

혁명의 광장은 존재 압도하는 物神의 거리로
 
 
“소련군에 대한 증오는 술기운처럼 치밀어 올랐다. 증오감에 도취된 축제였다. ”

밀란 쿤데라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1968년 프라하의 봄을 그렇게 회상했다. 프라하 바츨라프광장. 1968년 프라하의 봄과 그 좌절을 모두 지켜봤고, 1989년의 ‘벨벳혁명’을 낳은 곳. 소련군이 탱크를 몰고 들어오자 프라하 시민들은 저항했다. 소설의 여주인공 테레사는 침략과 저항의 현장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사진으로 찍어 외국 기자들에게 필름을 건네줬다.

‘테레사는 소련 침공의 날을 떠올렸다. 미니스커트 차림의 젊은 여자들이 깃대 끝에 국기를 달고 흔들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것은 몇 년 동안 금욕을 강요당한 소련군에 대한 성적 테러였다’고 쿤데라는 썼다. 그러나 체코 공산정권이 무너진 것은 그로부터 20년이나 뒤였다.

사메토바 레볼루체(Sametova Revoluce)!

1989년의 ‘벨벳혁명’을 체코에서는 그렇게 부른다. 벨벳혁명의 무대였던 프라하의 중심가 바츨라프광장은 오늘날 외국 기업과 은행, 대형 상점들로 가득찬 물신(物神)의 광장으로 탈바꿈했다. 36번지에 위치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멋진 건물 발코니를 눈으로 찾았다.

프라하의 봄을 젊은이로 이끌었고, 이후 반체제운동의 지도자였던 바츨라프 하벨이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해방을 선언한 곳은 지금 고급 아파트로 변해 입주자를 기다리고 있다.

▶▶바츨라프광장은 공산사회가 자본주의사회로 이행한 역사의 대표작이다. 테레사와 토마스가 뜨거운 가슴으로 맞부닥뜨렸던 그곳은 광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넓은 길이다. 프라하 중앙역 앞 국립박물관에서 무스텍광장에 이르는 길이 800m, 폭 60m의 이 광장은 바츨라프의 기마상과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군의 침공에 저항하여 분신 자살한 체코 대학생 얀 파라프의 위령비, 대로 양 편의 여행사, 항공사, 레스토랑, 호텔, 은행, 환전소, 백화점 등이 굴곡진 역사를 말 없이 응축하고 있다.

열아홉 살 때 프라하 예술대학에 입학한 쿤데라는 영화를 전공하며 시나리오 작가 수업과 영화감독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대학생이 되던 1948년 공산당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정권을 장악하면서 그는 역사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스가 느꼈던 경멸 그리고 ‘농담’의 주인공이 겪어야 했던 축출의 경험을 이 도시에 가졌다. 프라하는 쿤데라 문학의 산실이고 고향이다. 그는 영화 아카데미에서 세르반테스, 볼테르, 디드로 등 서유럽 작가들을 강의했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소설세계를 구축했다.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체코 출신의 소설가 쿤데라를 일약 세계적 지성의 작가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정작 프라하의 서점에서 그 책을 찾을 수 없었다. 희한한 일이다.

“1975년 이후 파리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쿤데라가 그 책의 체코어판 출판을 아직도 원치 않고 있어요. 쿤데라는 그 책을 1985년 프랑스어판으로 먼저 출판했고, 1985년 캐나다에 망명한 체코 문인들이 만든 출판사에서 체코어판을 냈지만 당시 체코 공산정권 아래에서는 금서였지요. ” 쿤데라가 문학과 미학을 공부했던 카렐 대학에서 20세기 체코 문학과 세계 문학을 강의하는 마리에 므라프초바 교수의 설명이다. 1988년 필립 카우프만 감독이 만든 영화는 벨벳혁명 덕분에 체코에서 상영됐다. 이번에는 쿤데라가 문제였다. 쿤데라는 그 영화에 대해 불만이 많았고, 특히 에로틱한 장면을 싫어했다. 그래서 이미 영화를 본 체코인들이 체코어로 그 책을 읽는 데 거부감을 가졌다는 이야기다. “체코인들은 그 소설을 영어로 읽거나 캐나다에서 나온 체코어판을 누가 여행갔다가 선물로 사다주어야 읽을 수 있답니다. ”

▶▶‘토마스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

쿤데라는 한 번의 리허설도 없이 무대에 서야 하는 인생의 무의미와 무용한 열정을 괴롭게 곱씹는다. 우연히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스스로 기획하고 준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실수를 교정할 수 없고, 인간은 전적으로 자신의 삶에 책임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책임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난,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가 아닌가라고 쿤데라는 물었다.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뼈저린 인식은 쿤데라가 청년 시절에 아무런 예행 연습도 없이 공산주의자로서의 삶을 선택했다가 좌절한 채 ‘생은 다른 곳에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체험의 산물이다.

청년 시절 프라하를 떠난 그는 이제 노년에 이르도록 프랑스 파리를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므라프초바 교수는 “쿤데라는 조국으로부터 잊혀진 작가가 됐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망각을 철학적으로 해석해 왔다”고 지적한다. 그가 1990년대 후반 이후 내놓은 ‘느림’ ‘정체성’ ‘향수’ 같은 소설은 끊임없이 프라하와 그 주변, 체코의 이곳저곳을 기억 속에서 재현하지만 정작 그 이야기의 전달은 프랑스어로 이뤄지고 있다. 쿤데라를 잃은 프라하와 고향을 잃은 쿤데라가 만나는 곳은 어디쯤일까.

 

 ‘프라하의 봄’ 배경 일회적 인생 성찰

 
“영원한 회귀의 신화는 부정의 논법을 통해, 한번 사라지면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인생이란 하나의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그 인생은 아무런 무게도 없고 처음부터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서, 인간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무리 아름답게 살아보려고 해도 그 잔혹과 아름다움이란 것조차도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을 제시하면서 시작한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바탕에 깔면서 일회성의 인생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보여준다.

의사인 토마스와 화가인 사비나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여주지만, 사진작가인 테레사와 박애주의적 지식인 프란츠는 존재의 무거움에 서 있다. 이 소설은 가벼움/무거움이란 대립 구조가 지닌 기묘한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실존을 때로는 엄숙하게, 때로는 유희적으로 그렸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심취했던 쿤데라는 하나의 모티브가 다양하게 변주되는 음악적 구성 방식을 도입했다. 또한 쿤데라는 소설 속에서 화자로 등장해 등장 인물들의 생을 이야기하다가, 종종 개입해 해설을 달면서 독자들의 사고를 요구한다.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국내에서는 1980년대 후반 출간돼 지금까지 100만 부나 팔렸다.
 
프라하=박해현기자 (블로그)hh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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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

‘공상과학 소설의 아버지’ 쥘 베른

프랑스 낭트

루아르江 따라 그의 공상은 여전히 흐르고…
 
“쥘 베른은 우리 고장이 낳은 위대한 작가지요. 제가 다니는 쥘 베른 중학교에서는 ‘80일간의 세계 일주’ ‘지구 속 여행’ ‘해저 2만리’ 등을 학생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쥘 베른 소설을 많이 읽는가요?”

공상 과학 소설의 아버지로 꼽히는 프랑스 작가 쥘 베른(1828~1905년)의 고향 낭트의 시립 도서관에서 만난 중학생 에마뉘엘. 그는 손가락을 들어 “저기 있는 동상이 쥘 베른의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에 나오는 주인공 미셸 아르당을 묘사한 거예요”라고 말했다.

포탄에 몸을 싣고 지구에서 달나라로 떠난다는 황당무계한 소설의 주인공이 포탄 속에 들어가 동료들을 향해 외치고 있는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었다. 미국에서 남북 전쟁 이후 무기 개발 명분을 잃어버린 대포클럽 회원들이 포탄을 타고 인류 최초로 달나라로 가는 우주 여행을 시도하는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는 1865년 발표됐다.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난 1969년 미국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실제로 달에 착륙함으로써 쥘 베른의 몽상은 위대한 상상력으로 격상됐다.

쥘 베른의 고향 낭트는 물의 도시다. 동양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이때 지혜란 물처럼 흐르는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란 점에서 쥘 베른의 상상력은 물의 도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닐까.

프랑스 서부에 위치한 낭트는 1598년 프랑스 국왕 앙리 4세가 신교파인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칙령을 발표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낭트는 대서양으로 연결되는 루아르강을 품고 있기 때문에 쥘 베른의 성장기에는 선박의 출입이 잦은 상공업의 도시였다. 어린 시절 베른은 먼 바다로 나가는 배들을 보면서 더 넓은 바깥 세상을 향한 동경을 품었다. 그는 11세 때 동갑내기 사촌 누이 카롤린을 사랑한 나머지 그녀에게 산호 목걸이를 선물하기 위해 인도로 가는 원양선에 탔다가 아버지에게 붙잡혀 혼이 났다고 한다. 그 사건 이후 쥘 베른은 “꿈 속에서만 여행을 하겠다”고 맹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는 소설을 쓰면서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공상에 탐닉했다.

낭트의 중심가인 쿠르 올리비에 드 클리송 4번지가 쥘 베른의 생가다. “1828년 2월 8일 소설가이자 현대적 발견의 선각자 쥘 베른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는 동판이 그의 얼굴과 함께 붙어 있다. 고향은 그를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니라 현대 세계의 선지자였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난 베른은 과학 기술의 진보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베른은 “나는 동생과 함께 해저 여행을 준비했다”며 “우리는 탐험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정리했다”고 성장기를 회상했다. ‘80일간의 세계 일주’에 나오는 프랑스인 파스파르투(Passepartout)는 프랑스어로 만능 열쇠라는 뜻인데, 베른이야말로 무엇이든 상상력의 열쇠로 여는 작가였다. 그는 육해공을 넘나들다 못해 우주 공간에까지 상상력의 촉수를 뻗었다. 80일 만에 세계 일주에 성공할 수 있다는 내기를 다룬 이 소설은 인류가 세계라는 공간을 시간 개념으로 파악해 장악하는 100년 뒤의 세상을 미리 내다본 것이었다. 바다밑 모험을 그린 ‘해저 2만리’는 원자력 잠수함의 발명을 예견한 것이기도 했다. 20세기 문명사는 쥘 베른의 상상력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는 쥘 베른 서거 100주기가 된다. 베른의 고향인 낭트와 그가 창작 활동을 왕성하게 펼치다가 숨을 거둔 아미앵이 공동으로 올해의 기념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낭트의 언덕에 위치해서 루아르강을 내려다보는 쥘 베른 기념관은 현재 보수 공사 중이라 잠정적으로 문을 닫은 상태였다.

베른 가문이 전원 주택으로 썼다는 집을 찾아갔다. 생 마르탱 교회를 마주하면서 루아르강을 내려다보는 그 집은 과거에 정원까지 딸린 저택이었지만, 지금은 동네의 개인 병원으로 사용되는 본채만 남아 있다. 베른은 그 집에서 루아르강을 오가는 대형 선박들을 보면서 상상 여행을 떠나곤 했고, ‘지구에서 달까지’와 ‘해저 2만리’를 그 집에서 구상했다고 한다.

오늘날 프랑스 문단에서 베른의 문학적 후계자라면 소설 ‘개미’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단연 꼽는다. 베르베르는 올해 베른의 서거 100주기를 맞아 일간지 르 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해저 2만리’의 주인공 네모 선장을 지목하면서 “그는 이해받지 못했지만 자신의 꿈을 지켰다”며 자신과 동일시한 적이 있다.

베른의 고향에서 루아르강과는 별도로 에르드르강에는 유람선과 요트가 오간다. 그 배들 중의 하나는 ‘해저 2만리’의 잠수함과 똑같은 이름(노틸러스)을 달고 있다. 보통 배가 아니라 배를 개조해서 어느 사진 작가의 아틀리에로 쓰이고 있다. 비록 항해에 나서는 배는 아니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이 배는 무한한 꿈을 인화하면서 늘 멀리 나가 있는 것이다.

 

 

 쥘 베른은 누구

 
쥘 베른은 비약적인 과학 기술의 진보를 겪었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유럽의 상상력을 대변한 작가였다. 62편의 장편 소설과 18편의 중·단편 소설을 남긴 그는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이 남긴 백과사전의 영향을 크게 받아 세상의 모든 지식을 향한 탐구욕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작가였다. 그의 소설은 인간의 과학 기술이 신앙과 미신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던 시대의 욕망을 가장 분명하게 반영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그의 소설이 지닌 묘미는 1세기 전 인류의 상상력을 읽으면서 미래의 세계를 나름대로 상상하는 길을 연다는 데 있다.

베른은 성년이 된 뒤 고향 낭트를 떠나 파리의 증권거래소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교양오락 잡지에 틈틈이 소설을 발표했다. 그는 기구를 타고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모험담을 쓰면서 출판업자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그는 1863년 ‘기구를 타고 5주간’을 발표하면서 일약 유명 작가가 됐다. 그는 ‘경이의 여행’ 시리즈란 이름으로 ‘해저 2만리’ ‘80일간의 세계 일주’ 등 대표작을 내놨다.

그는 당대에 이미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로 부와 명성을 누렸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문학성도 인정받았다. 그가 77세로 숨을 거뒀을 때 전 세계에서 조전(弔電)이 답지했다.
 
낭트=박해현기자 (블로그)hh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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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카페거리엔 실존주의 향수가…
탄생100주년 맞아 사상 재조명 학술대회 열기
"대안문화 선봉" "한물간 사상가" 평가 엇갈려
글·사진/파리=박해현기자 hhpark@chosun.com
입력 : 2005.06.23 17:58 23' / 수정 : 2005.06.23 18:03 47'


▲ 사르트르의 단골카페 '되 마고' 카페를 장식한 '두 개의 중국 도자기 인형'을 뜻하는 이름을 가진 이 카페에서 1940년대 후반 사르트르는 왕성하게 글을 썼다.
“사르트르? 한마디로 말하기에는 복잡하지만, 그는 사상사에서 최후의 공룡이었다고나 할까요….”

프랑스에서 대학 위의 대학으로 불리는 그랑제콜인 시앙스 포에서 정치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에마뉘엘 비레. 파리 13구에 위치한 국립도서관(BNF)에서 공부하는 이같은 젊은 세대에게 오늘날 사르트르는 한물간 사상가로 치부되고 있었다. 그런데 국립도서관에서는 20세기 프랑스 문학과 철학의 스타였던 장 폴 사르트르 탄생 100주년을 맞아 특별 전시회(3월 9일~8월 21일)가 열리고 있었다.

“인간은 부단히 자기 밖에 있는 것이며 자기 밖으로 스스로를 투사(投射)하고 스스로를 잃어버림으로써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라며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의 시대를 주도했던 사르트르의 육필 원고와 저서들의 초판본, 사르트르의 생애와 20세기 주요 사건을 엮은 사진과 동영상 자료 전시 등으로 꾸며진 이 유료 전시회는 석 달 만에 1만2000여명의 관람객을 동원했다. 1980년 사르트르의 장례식에 3만여 명의 군중이 몰렸던 장면이 기억의 갈피를 헤집고 솟아나왔다. 그리고 “죽음,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다. 어느날 내 삶이 멈추겠지만, 내 죽음이 내 삶을 규정하지 않고, 내가 늘 생의 충동이기를 바란다”고 사르트르는 말하지 않았던가.

정치학도 에마뉘엘 비레는 사르트르의 사상사적 사망을 재확인하는 젊은 지식인의 호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사르트르처럼 모든 문제와 운동에 참여하는 총체적 지식인의 시대는 갔다”며 “요즘 프랑스 젊은이들은 고교 시절에 교과 과정의 일환으로 사르트르의 책 몇 권을 읽을 뿐”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지식인은, 푸코가 말했듯이, 전문 분야의 지식으로 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특수한 지식인이고, 사실 요즘 프랑스에서 지식인의 종말이 자주 거론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100번째 생일이었던 지난 21일이 도래하기 전 연초부터 프랑스 언론과 출판계는 올해를 사르트르의 해로 선포했다. 사르트르가 창간을 주도했던 좌파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70쪽이 넘는 특집호를 마치 단행본처럼 팔고 있다. 사르트르의 활동 무대였던 소르본 대학 앞의 서점들에는 ‘사르트르 희곡전집’을 비롯해 ‘사르트르―21세기를 위한 사상가’ ‘카뮈와 사르트르―우정과 전투’ 등등 새로 나온 전기서들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사르트르 사상을 재조명하는 학술 대회가 연중 내내 전국 각 도시에서 열리고 있는 중이다. 사르트르의 공과(功過)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사르트르 전문가인 아니 코앙-솔랄(캉대학 교수)은 “예언자, 전복자, 시민 사회 신봉자였던 사르트르는 사후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대안(代案) 문화의 선봉장”이라며 “20세기의 사상가였던 그는 21세기에도 유효한 사상가”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알바니아 출신으로 파리에서 활동 중인 세계적인 소설가 이스마일 카다레는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을 지지했던 사르트르의 수치스러운 현실 참여에 대해 느꼈던 공포를 다시 떠올리는 것은 나의 도덕적 의무”라며 “지금도 여전히 나는 그의 맹목주의와 정신분열증을 납득할 수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역사학자 미셸 비노크는 “분명히 공산주의에 대해서 사르트르는 실수를 저질렀고, 이 자유의 철학자는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 사회주의와 자유를 합일시키는 데 실패했다”면서도 “그는 알제리 독립 지지와 베트남 전쟁 반대에서 옳은 편에 섰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사르트르의 생애에 대한 평가가 크게 갈리지만, 정작 그의 실존적 흔적은 파리 센강의 좌안(左岸) 지역에만 집중되어 있다. 파리 16구의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외조부 밑에서 컸다가 어머니의 재혼과 함께 라 로셀로 내려갔지만, 파리의 명문 고교 앙리 카트르에 입학한 뒤 지식인들이 몰려 살았던 생 제르망 데프레의 카페 거리, 팡테옹 광장 부근, 몽파르나스 지역을 전전했다. 특히 그는 1946~1949년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유대인 문제에 관한 성찰’ ‘더러운 손’ 등등을 왕성하게 펴냈다. 그가 문학비평의 고전이 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쓴 것은 1947년이었다.


▲ 사르트르가 사춘기 시절을 보냈고, 작가·사상가로서 활동했던 파리5구 대학가를 대표하는 팡테옹 광장 거리
이 무렵 사르트르는 계약 결혼의 동반자 보부아르와 함께 단골 카페 되 마고에 매일 나와 글을 썼다. 오늘날 이 카페 앞은 ‘사르트르-보부아르 광장’으로 불린다. 광장이라고 하지만 도로 한 귀퉁이에 불과한 작은 공간이다. 카페 되 마고 옆에 있는 또 다른 카페 드 플로르는 1950년대에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한 실존주의자들의 본거지였다.

개인의 자유를 외치면서 기성 질서에 대한 반항이 넘쳐났던 이 거리의 고풍스러운 카페들에는 사르트르나 카뮈의 사진 한 장 붙어 있지 않다. 화려했던 실존주의는 이미지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카페 거리를 무한한 상상과 향수의 공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사르트르의 단골 카페들은 현실에 존재하면서도 현실 속에 숨어 있는 과거의 섬처럼 거기를 가려는 사람들을 늘 유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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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무엇인가'는?

문학의 현실참여 천명
좌·우 넘어선 제3의 길
박해현기자
입력 : 2005.06.23 18:00 44'


 


▲ 사르트르
“누구나 익히 알고 있듯이 순수 예술과 공허(空虛) 예술은 동일한 것이며, 예술적 순수주의는 지난 세기의 부르주아들의 교묘한 호신술에 불과했다.”

사르트르(1905~1980)는 1947년 발표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순수 예술을 비난하면서 문학의 현실 참여를 천명했다. 그런데 이 책이 나오자마자 사르트르는 좌우파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에 비판적이었던 사르트르의 참여 문학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다른 차원에서 작가들이 민중을 위한 창작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당연히 공산당을 지지하는 문인들로부터 당과 노동 계급을 배반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또한 사르트르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격렬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우파로부터 “왜 공산당에 들어가지 않는 거요”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냉전 시대의 본격적 개막을 앞둔 좌우 대립 구도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정의를 아우르는 제3의 문학을 지향했다. 그래서 그는 “만일 글쓰기가 단순히 선전이나 오락으로 전락하게 된다면, 사회는 무매개적인 소굴로, 다시 말해서 날파리나 연체동물과 같은 기억 없는 삶으로 빠져들 것”이라며 오늘날도 유효한 경고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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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침묵의 도시에 선 ‘어린왕자’

'어린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프랑스 리옹 벨쿠르광장에서
탄생 100주년… 거리이름 ‘생텍쥐페리’로 문학적 상상력 키웠던 레망에서의 사춘기
리옹=박해현기자 hhpark@chosun.com
입력 : 2005.06.09 18:29 40' / 수정 : 2005.06.09 18:55 56'

“내가 죽은 것처럼 보일 거야. 하지만 그게 아니야….”

프랑스 제2의 도시 리옹의 벨쿠르 광장에 서있는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Saint Exupery)의 동상. 기단에 새겨진 그 짧은 문장이 긴 여운을 남긴다.

생텍쥐페리의 대표작 ‘어린 왕자’에서 왕자가 던진 말이다.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를 만나 꿈같은 우화를 빚어낸 왕자는 자신의 별로 돌아가기 위해 지상을 뜨기 전에 그렇게 말했다.

“내 몸은 버려야 할 낡은 껍데기 같은 거야. 껍데기를 버린다고 슬퍼할 건 없어.”

그 어린 왕자의 작별 인사는 홀연히 인간의 대지를 뜬 생텍쥐페리의 최후를 떠올리게 한다. 1944년 7월 31일 오전 8시 45분 P38 라이트닝 비행기에 몸을 싣고 정찰 비행에 나섰다가 끝내 귀환하지 않은 생텍쥐페리는 확인되지 않은 죽음으로 인해 영생을 누리고 있다.

‘어린 왕자’를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 독자라면 생텍쥐페리의 비행기가 지상을 이륙해서 지구 바깥까지 나갔을 것이라고 믿고 싶을 것이다. 어느 별에서 밤마다 등에 불을 붙여 지구인들에게 별빛으로 인사하는 점등인으로 살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 생텍쥐페리가 태어나서 아홉살까지 살았던 리옹시.
동상에서 눈을 돌리면 곧바로 마주치게 되는 생텍쥐페리 거리 8번지. 생텍쥐페리의 생가다.

“생텍쥐페리는 이 집 3층에서 1900년에 태어났지요. 물론 내가 이 집에 살기 훨씬 전의 일이지요. 그는 우리의 전쟁 영웅이에요. 용감한 사람이었고, 대지를 떠나 신화가 된 삶을 살았지요.”

생텍쥐페리 생가 건물의 1층에 살고 있는 드뤼포르(Druffort)씨. 아침 식사용 바게트 빵을 사들고 오다가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기자를 보자 그는 대뜸 일본인이냐고 물었다. 기자가 고개를 젓자 “일본인 관광객들이 꽤나 많이 찾아오거든…” 했다.

그는 집 옆에 있는 서점에 가면 참고 도서들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줬다. 시킨 대로 서점에 가서 책들을 뒤적거리다가 생텍쥐페리의 전기를 담은 만화책을 한 권 골랐다.

서점 주인은 “리옹 사람이라면 어릴 때부터 어린 왕자가 그려진 연필과 학용품을 쓰면서 자란다”며 “2000년 생텍쥐페리 탄생 100주년을 맞아 리옹시가 이 거리에 작가의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동상도 그때 세워졌고, 리옹 공항은 리옹 생텍쥐페리 공항으로 개명됐다.

생텍쥐페리는 “우리가 죽은 자를 계속 기억한다면, 그는 산 자보다 더 강하다”고 쓴 적이 있다. 고향은 그의 말을 따랐다.

생텍쥐페리는 리옹에서 9살 때까지 살았고. 리옹 부근의 레망에서 사춘기를 보냈다. 그는 언젠가 “내가 리옹에서 태어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라면서 “리옹은 아름다운 침묵 속의 도시”라고 찬미했다. 그의 생가 바로 부근에서 손강이 소리없이 흐르고 있다.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소년 생텍쥐페리는 강의 끝이 어디일까를 상상하다가, 더 멀리 가기 위해 점차 하늘로 눈을 돌렸던 것이 아닐까.

그의 유년기는 최첨단 문명의 상징인 비행기의 선구자들이 현대의 영웅으로 숭상되던 20세기 초였다. 리옹 부근의 비행장에 친구들과 놀러가기를 즐겼던 그는 창공을 누비는 비행사를 선망하면서 상상력을 키웠고, 수업 시간이면 교실 창밖에 어른거리는 나비의 날갯짓에 넋을 놓으면서 문학적 감성에 눈을 떴다고 한다. 그가 하늘과 땅에 그린 삶의 궤적에서 리옹 시절은 짧은 구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대표작 ‘어린 왕자’는 리옹에서 보낸 유년기와 떼어놓을 수 없었다.

그는 이 책의 첫장에 죽마고우였던 레옹 베르트를 위한 헌사를 쓰면서 “어린아이였을 때의 그에게 이 책을 바치기로 한다”고 밝혔다. 그는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에는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많지 않다”고 덧붙였다.

생텍쥐페리의 동상을 다시 천천히 들여다보니, 작가는 비행복을 입고서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 벨쿠르광장에 선 생택쥐페리와 어린왕자의 동상.
바로 그 옆에 어린 왕자가 “아저씨, 양 한 마리만 좀 그려줘”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붙어 서 있다. ‘어린 왕자’의 삽화는 생텍쥐페리가 직접 그린 것이다. 그는 ‘어린 왕자’에 넣을 그림들을 먼저 완성한 뒤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해군사관학교에 낙방한 뒤 파리에서 미술에 몰두하면서 익힌 그림 솜씨였다. 어느날 그가 어린 왕자를 끄적거리는 것을 보고 누군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 영혼을 사로잡는 어린 왕자야. 외로운 왕자”라고 그는 말했다. 어린 왕자의 얼굴에 깃든 알 수 없는 슬픔은 작가의 영혼에 어른거리는 실존의 그림자였다.

“마음이 슬플 때는 지는 해의 모습이 정말 좋아…”라고 읊었던 어린 왕자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어린 왕자의 얼굴은 작가의 영혼이 피운 한 송이 꽃이기 때문에 슬픈 아름다움의 잔영이다.

생텍쥐페리의 동상은 어디론가 가다가 지구라는 별에 불시착한 채 먼 곳에서 올 구조대를 기다리는 비행사를 형상화한 듯하다. 하지만 어린 왕자가 바로 곁에 있기에 그는 외롭지 않다. 그가 아름다운 침묵의 도시라고 부른 고향에 영원한 침묵의 깊이를 선사한 생텍쥐페리의 동상을 좀 더 오랫동안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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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 휴머니즘 원초적 순수 그려

박해현기자
입력 : 2005.06.09 18:30 43'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일 거야….”

소행성 B612호에서 홀로 살다가 여러 별을 거친 여행 끝에 지구의 사막에 떨어진 어린 왕자. 생텍쥐페리는 어린 시절의 순수를 잊어버리고 어른이 되어야 하는 인간에 대한 연민 끝에 어른과 어린이가 모두 읽을 수 있는 책 ‘어린 왕자’를 썼다. 1943년 4월 6일 미국 뉴욕에 체류 중이던 생텍쥐페리가 발표한 이 작은 책은 오늘날 120개 언어로 번역된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이 됐다. 한국에서도 30종이 넘는 번역본이 나왔고, 젊은 날 누구나 한 번씩은 읽고 넘어가는 ‘마음의 고전’이 됐다.

생텍쥐페리(1900~43)는 ‘야간 비행’ ‘인간의 대지’ 등의 소설을 통해 자유의 본질적 가치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인간의 희망을 표현했다. 그의 휴머니즘은 이론이 아니라 행동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어린 왕자’는 그 휴머니즘의 원초적 순수를 아름답게 보여주었다.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럽고, 그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시지.”

“무엇인가를 길들이지 않고서는 그걸 정말로 알 수는 없어. 사람들은 이젠 뭔가를 진정으로 알게 될 시간이 없어졌어. 그들은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물건을 가게에서 살 뿐이거든. 그런데 친구를 파는 가게는 없으니까 이제 그들은 친구가 없는 거지. 친구를 가지고 싶다면 나를 길들여줘!”

“아주 간단한 건데… 그건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어린 왕자’는 이처럼 연인에게 편지를 보낼 때 종종 건네주고 싶은 명대사들로 짜여 있다.

‘어린 왕자’는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착한 심성을 일깨워주는 성스러운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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