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지음 / 백선희 옮김/ 문학세계사 


 




 첫날, 그녀가 웃는 걸 보았다. 순간, 나는 그녀가 알고 싶어졌다.


그녀를 알지 못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간다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이었으니까. 나는 언제나 타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내게 다가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학생활이 그랬다. 세상을 향해 나를 열어야지 했으나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일주일 후, 그녀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금세 눈길을 돌리겠지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녀의 눈길은 오래도록 나를 훑었다. 나는 감히 그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발 밑으로 땅이 꺼지는 것 같았고, 숨쉬기가 힘들었다.




도무지 멈출 것 같지 않은 고통이었다. 견디기 힘들었다. 평생 내본 적 없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내게 살짝 손짓하며 웃었다.




그러더니 어느새 남자애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튿날, 그녀가 내게로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인사에 답하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거북해 하는 내가 끔찍이도 싫다.




“넌 다른 애들보다 어려 보여.”




그녀가 말했다.




“실제로 그래. 한 달 전에 열여섯이 되었어.”




“나도. 세 달 전에 열여섯 살이 되었는데. 솔직히 말해봐, 믿어지지 않지?




“응.”




자신만만한 태도 때문인지 그녀는 두세 살쯤 더 들어 보였다. 그 때문에 우리 둘 다 무리에서 튀어 보였다.




“이름이 뭐야?”




그녀가 물었다.




“블랑슈. 너는?”




“크리스타.”




독특한 이름이었다. 감탄해서 또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내가 놀라는 걸 보고 그녀가 말했다.




“독일에서는 드문 이름이 아니야.”




“너, 독일사람이니?”




“아니. 동부 출신이거든.”




“독일어 해?”




“물론이지.”




감탄 어린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잘 가. 블랑슈.”




나는 미처 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미 대강당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큰소리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무리를 향해 걸어갔다.




“벌써 잘도 어울리네.”




어울린다는 말은 내게는 엄청난 의미를 가진 말이다. 나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했으니까. 무리에 잘 어울리는 사람들을 보면 경멸과 질투심 섞인 감정이 들곤 했다.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내가 원해서 혼자라면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설사 금세 다시 외톨이가 되는 호사를 누리게 될지언정 말이다.


나는 특히 크리스타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를 갖는다는 건 나로서는 도무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크리스타의 친구가 된다는 건, 아냐, 꿈도 꾸지 말아야 해.




내가 어째서 크리스타와의 우정을 바라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명확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에게는 무언가가 있어 보였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학 캠퍼스를 막 떠나려는데 웬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런 적이 없었기에 나는 당황했다. 뒤를 돌아다보니 크리스타가 달려오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어디 가?”




나란히 걸으며 그녀가 물었다.




“집에.”




“어디 사는데?”




“걸어서 오 분 거리야.”




“좋겠다!”




“왜? 넌 어디 사는데?”




“말했잖아. 동부라고.”




“설마 저녁마다 거기까지 간다는 얘기는 아니겠지.”




“아니, 맞아.”




“그렇게 먼 곳을!”




“멀지. 기차로 오는 데 두 시간, 가는 데 두 시간 걸려. 버스 타는 시간은 치지 않고도 말이야. 달리 방법이 없어.”




“견뎌내겠어?”




“두고 봐야지.”




그녀를 곤란하게 할까봐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자취 비용을 댈 능력이 없는 게 분명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아래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여기가 네 부모님 집이야?”




그녀가 물었다.




“응. 너도 부모님 집에 사니?”




“응.”




“우리 나이에는 당연한 일이지.”




왜 하필 그런 얘기를 했는지.




그녀가 화들짝 웃었다. 내가 우스운 얘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부끄러웠다.




내가 그녀의 친구가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누군가의 친구라는 건 어떻게 아는 걸까? 분명 어떤 신비스런 기준이 있을 텐데, 한번도 친구를 가져본 적이 없어 알 수 없었다. 이를테면, 그녀는 나를 우습다고 여겼다. 이런 게 우정의 표시일까 아니면 멸시의 표시일까? 그때 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건 내가 이미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통찰력을 동원해 왜 그럴까 생각해보았다. 내가 그녀를 조금, 아주 조금 안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에 들고 싶어하는 내 욕망을 정당화해주는 걸까? 아니면 그녀 같은 사람이 처음으로 나를 쳐다봐 주었다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이유 때문일까?


화요일은 오전 여덟시에 수업이 시작된다. 크리스타는 눈 밑이 시커멓게 그늘져 있었다.




“피곤해 보여.”




내가 말했다.




“네시에 일어났거든.”




“네시! 오는 데 두 시간 걸린다며.”




“말메디 시에 사는 것도 아냐. 내가 사는 마을은 역에서 30분이나 떨어져 있어. 다섯시 기차를 타려면 네시에는 일어나야 돼. 그리고 브뤼셀에 도착해도 학교가 역 바로 옆에 있는 게 아니잖아.”




“네시에 일어나다니 인간도 아니야.”




“다른 방법이라도 있어?”




짜증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는 홱 돌아서 가버렸다.




죽도록 내가 원망스러웠다. 어떡해서든 그녀에게 도움을 주어야만 했다.






그날 저녁, 나는 부모님에게 크리스타 얘기를 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녀를 내 친구라고 말했다.




“너한테 친구가 있어?”




애써 놀란 표정을 감추며 엄마가 물었다.




“네. 월요일 저녁마다 걔가 여기서 자도 될까요? 동부 도시에 살기 때문에 8시 수업에 참석하려면 화요일에는 새벽 네시에 일어나야 한대요.”




“되고말고. 네 방에 접는 침대를 갖다놓지 뭐.”






다음날, 전에 없던 용기를 내어 나는 크리스타에게 얘기를 꺼냈다.




“너만 좋다면 월요일 저녁에는 우리 집에서 자도 돼.”




그녀는 웃는 얼굴로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내 평생 가장 멋진 순간이었다.




“정말?”




그런데 그만 괜한 말을 해서 분위기를 망치고 말았다.




“우리 엄마 아빠도 허락하셨어.”




그녀가 픽 웃었다. 또 바보 같은 말을 하고 만 것이다.




“올 거니?”




전세는 어느새 역전되었다. 그녀의 편의를 봐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탁을 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래, 가지 뭐.”




마치 나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서라는 듯이 그녀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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