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에어/ 샬럿 브론테 지음 / 민음사 











 


 


 


 


 


제1장






그날은 산보가 가당치 않은 날씨였다. 우리는 오전 중 한 시간쯤 잎이 진 관목 사이를 서성거린 터였다. 그러나 점심을 마친 무렵부터(리드 부인은 손님이 없을 때는 일찌감치 식사를 하였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컴컴한 구름과 더불어 몸에 스미는 비를 몰고 왔기 때문에 그 이상 집 밖에서 바람을 쐰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나는 그것이 기뻤다. 오랫동안 산보하는 것이 나는 싫었다. 특히 쌀쌀한 오후의 산보가 그랬다. 손발이 온통 얼어붙고, 유모인 베시의 잔소리에 속은 상하고 또 일라이자, 존, 조지아나에 비해서 체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에 기가 죽은 채 썰렁한 황혼 녘에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방금 말한 일라이자와 존과 조지아나는 이제 객실에서 저희 엄마를 둘러싸고 있었다. 리드 부인은 난롯가의 소파에 누워 있었고, (당장엔 싸움도 않고 울지도 않는) 귀염둥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아주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만은 이렇게 말하면서 좌중에 끼워주지를 않는 것이었다.




"너를 멀리하는 것이 속으로는 안되었다. 그러나 네가 좀 더 상냥하고 천진한 성품을 가지고, 곰살궂고 싹싹한 태도를 취해서, 이를테면 보다 밝고 순진하고 꾸밈이 없는 어린이가 되려고 진정으로 애쓴다는 것을 베시에게 전해 듣거나 실지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태평스럽고 행복한 아이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으로부터 너를 제외할 줄 알아라."




"제가 어쨌다고 베시가 그랬기에요?" 하고 나는 물었다.




"제인, 생트집이나 하고 이것저것 귀찮게 물어대는 아이에겐 나는 정나미가 떨어진다. 더구나 어린아이가 어른한테 그렇게 덤벼드는 게 아니다. 어디 가서 앉으려무나, 사근사근하게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입을 봉하고 있어."




객실 옆에는 조그만 조반 식당이 있었다. 나는 살며시 그 식당으로 들어섰다. 거기엔 책상이 있었다. 나는 그림이 많이 들어 있는 책을 하나 골라잡았다. 그러고는 창 밑의 걸상으로 올라가 터키인처럼 발을 모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붉은 모직의 커튼을 전부 내리니 이중으로 으슥한 곳에 숨어 있는 셈이었다.




오른쪽으로는 붉은 커튼 자락이 앞을 막았지만 왼쪽은 투명한 유리창이어서 그 창은 음산한 2월의 날씨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기는 하였으나 완전히 차단시켜 주지는 않았다. 책장을 넘기면서 이따금씩 나는 겨울 오후의 형세를 살펴보았다. 먼발치로는 안개와 구름이 어슴푸레 보였고 가까이로는 젖은 잔디와 폭풍에 시달린 관목이 보였는데 길고 을씨년스러운 질풍을 맞은 빗줄기가 끊임없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보고 있던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읽고 있던 것은 비윅의 『영국 조류사(鳥類史)』였다.



대체로 본문의 설명에는 흥미가 없었으나 어린 나로서도 그냥 넘겨버릴 수가 없는 서론의 페이지가 있었다. 거기에는 바닷새의 서식지라든가 바닷새만이 살고 있는 "외진 바위산과 돌출부", 남쪽 끝인 린드니스나 네이즈에서 노스케이프에 이르기까지 조막섬(小島)이 산재해 있는 노르웨이 해안 등에 대해 적혀 있었다.




크나큰 소용돌이가 치는 북해가




세상 끝 벌거숭이 외진 조막섬들을 씻고




대서양의 파도는 폭풍 휘몰아치는




헤브리데스 섬 사이로 밀려든다.






나는 또한 라플란드, 시베리아, 슈피츠베르겐, 노바 젬블라,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등의 황량한 해안선을 다룬 부분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북극권의 광활한 벌판, 쓸쓸한 공간의 황량한 지역, 눈과 얼음의 저장지, 그곳에선 몇백 년 동안의 겨울이 쌓아놓은 단단한 빙원(氷原)이 알프스 산을 포개어놓은 듯 우뚝우뚝 솟은 채 극지를 에워싸고 있는 혹한의 몇 배나 되는 강추위를 한 점에 모아놓고 있다." 죽음처럼 하얀 그 지방에 대해 나는 나대로의 짐작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소견에 몽롱하게 떠오르는 반쯤 납득이 간 생각처럼 막연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야릇하게 인상적인 것이었다. 이 서론에 담긴 말들은 뒤에 나오는 그림에 연결되어 있었고, 파도와 물보라가 휘몰아치는 바다에 홀로 서 있는 바위와 쓸쓸한 바닷가에 좌초된 난파선, 그리고 막 침몰해 가고 있는 난파선을 구름 사이로 엿보고 있는 차갑고 섬뜩한 달에 함축성을 부여해 주었다.




비명(碑銘)을 새겨 넣은 묘석이 있고 문과 두 그루의 나무, 무너진 담장에 둘러싸인 나지막한 지평선, 그리고 초저녁임을 말해 주는 갓 떠오른 초승달이 걸려 있는 조용하고 적막한 묘지, 그 그림에 어떠한 감정이 붙어다닌 것인지 나도 모른다.




바람 한 점 없이 잠잠한 바다 위에서 꼼짝 못하고 있는 두 척의 돛배 그림을 나는 바다의 귀신이라고 생각했다.




마귀가 도둑이 진 짐을 등 뒤에서 밀어붙이고 있는 그림은 질겁을 하며 책장을 넘겼다. 정말 무서운 그림이었다.




뿔이 달린 시꺼먼 괴물이 바위 위에 걸터앉은 채 교수대를 에워싸고 있는 군중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그림이나 제각기 이야깃거리를 지니고 있었다. 나의 미숙한 이해력과 불완전한 감정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점이 많았지만 굉장히 흥미로웠다. 마치 겨울밤, 베시가 기분이 좋을 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흥미진진하였다. 베시는 이럴 때 육아실 난롯가에 다리미판을 들여놓고 그 둘레에 우리들을 앉혀놓고는 리드 부인의 레이스 주름 장식을 세우거나 나이트캡 테두리에 주름을 잡으며 옛날이야기나 더 옛날의 민담, 혹은 (이것은 뒷날 알게 된 것이지만) 『파멜라』나 『모어랜드 백작 헨리』 등에서 따낸 연애담이나 모험담을 열심히 귀 기울이고 있는 우리들에게 들려주곤 하였다.




비윅의 책을 무릎에 올려놓은 나는 그때 행복하였다. 적어도 내 나름대로는 행복하였다. 나는 그저 방해받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훼방꾼은 너무나 빨리 나타났다. 조반실의 문이 열렸다.




"왁! 청승덩어리!" 하는 존 리드의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잠잠해졌다. 방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요게 어디 간 것일까?" 하는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일라이자! 조지아나! (이렇게 여동생들을 부르면서) 제인이 여기 없어. 비가 오는데 뛰쳐나갔다고 엄마한테 말해. 고약한 것 같으니라고!"




'커튼을 내리길 참 잘했다!'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렇게 숨어 있는 곳을 들키지 말아야 할 텐데 하고 간절히 바랐다. 존 리드가 찾아낼 것 같지도 않았다. 머리도 눈치도 둔한 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 일라이자가 문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더니 말하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창 근처에 있어."




나는 곧 스스로 나와버렸다. 존에게 끌려 나갈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쳤기 때문이다.




"왜 그래?" 하고 쭈뼛쭈뼛 겁먹은 듯 나는 물었다.




"왜 그러세요, 도련님? 이렇게 말하란 말이야. 이리 와." 그는 안락의자에 앉더니 앞으로 와 서라는 몸짓을 하였다.




존 리드는 열네 살 먹은 학생이었다. 그러니까 열 살이었던 나보다 네 살 위였다. 나이에 비해 크고 뚱뚱했는데 피부색은 우중충하니 건강치 못한 듯한 빛깔이었다. 넓적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큼직하였고 팔다리도 손발도 모두 굵직하였다. 끼니마다 으레 포식을 하기 때문에 걸핏하면 골을 내기 일쑤였고 눈도 몽롱하게 흐릿하고 볼때기의 살도 축 늘어져 있었다. 지금쯤 마땅히 학교엘 가 있어야 했지만 "허약한 체질 때문에" 어머니가 집에 데려다놓은 지 이제 한 달인가 두 달이 된 터였다. 교사인 마일스 씨는 집에서 보내주는 케이크나 사탕 과자의 양을 줄이기만 하면 건강은 걱정이 없다고 단언했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그렇듯 가혹한 의견은 외면해 버리고 아들의 안색이 나쁜 것은 지나친 공부와 집 생각 때문일 것이라는 우아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존은 어머니와 누이들에게도 별 애정을 갖고 있지 않았고 내게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를 보면 골탕을 먹이고 괴롭히곤 했는데 그것도 일주일에 두서너 번, 혹은 하루에 한두 번 정도가 아니라 계속 그러는 것이었다. 내 신경 전체가 온통 그를 두려워했고 그가 가까이 오면 뼈에 붙어 있는 모든 살점이 움츠러들었다. 그가 불러일으키는 공포로 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기가 일쑤였다. 그에게 협박을 받거나 해코지당해도 호소할 길이 내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녀들은 내 편을 들어줌으로써 도련님의 비위를 상하게 하기를 꺼려 했고 리드 부인은 그런 문제엔 전혀 장님이요 귀머거리였다. 존이 어머니 앞에서 가끔, 그리고 보지 않을 때 훨씬 더 자주 나를 때리고 내게 욕설을 퍼부어도 부인에겐 그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이었다.




늘 그렇듯이 다소곳이 나는 존의 의자께로 다가섰다. 그는 나를 향해 혀뿌리가 상하지 않을 정도로 한껏 혓바닥을 삼 분쯤 내밀고 있었다. 곧 나를 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의 주먹질을 겁내면서 나는 곧 내게 주먹을 안겨줄 그의 진절머리 나는 추악한 얼굴을 곰곰이 바라보았다. 내 표정에서 그런 내 마음을 엿본 것이리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느닷없이 그는 나를 세게 쳤다. 나는 비틀거렸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의 의자에서 한두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조금 전에 어머니한테 버릇없이 말대답을 했지. 또 커튼 뒤에 몰래 숨어 있었지. 그리고 그 눈초리는 또 뭐야. 그래서 맞은 거다, 요 계집애야!"




존 리드의 욕설에는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난 대답은 할 생각도 안 했다. 욕설 뒤에 따라올 주먹질을 어떻게 견디어낼 것인가 하는 걱정뿐이었다.




"커튼 뒤에 숨어서 무엇을 했어?" 하고 그가 물었다.




"책을 읽었어."




"책을 내봐."




나는 창께로 가서 책을 가져왔다.




"네가 왜 우리 책을 마구 꺼내가는 거야. 엄마가 그러는데 넌 군식구래. 넌 돈도 한 푼 없어. 너의 아버지가 물려준 것이 아무것도 없단 말이다.




사실은 너는 비럭질을 할 처지인 거야. 우리 같은 양갓집 자녀들과 함께 살고, 우리와 똑같은 식사를 하고 또 엄마의 돈으로 옷을 사 입을 처지가 못 돼. 내 책장을 뒤지면 어떻게 되나 본때를 보여줄 테다. 책은 모두 내 것이야. 이 집은 모두 내 것이야. 몇 해 안으로 그렇게 돼. 거울과 창을 피해서 문 쪽으로 가서 서 있어."


처음에는 그의 속셈을 모르고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그가 책을 번쩍 쳐들어 던지려 할 때는 나는 고함을 지르며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날아온 책에 맞아 나는 넘어졌다. 머리를 문에 부딪쳐 다쳤다. 상처에서는 피가 나고 몹시 쓰렸다. 공포심의 고비를 넘기자 다른 여러 감정들이 북받쳐 올랐다.




"고약한 심술쟁이 같으니라고! 꼭 사람 백정 같아. 노예 감독 같아. 꼭 로마의 폭군 황제 같아!"




나는 골드 스미스의 『로마사』를 읽은 적이 있었고, 네로나 칼리굴라 같은 폭군에 대해서 나대로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혼자서 속으로 존을 폭군에 비유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큰 소리로 내뱉을 생각을 하지는 않았었다.




"뭐라고? 뭐라고?" 하고 존은 소리쳤다. "그런 소리를 내게다 대고 해? 일라이자, 조지아나, 지금 한 소리를 들었지? 내 엄마한테 안 이를 줄 알아? 그러나 우선`""?."




그는 무턱대고 내게 달려들었다. 내 머리칼과 어깨를 잡아채는 것을 알았으나 내 편에서도 필사적이었다. 나는 정말로 그의 사람 백정 같은, 폭군 같은 성품을 보게 되었다. 한두 방울의 피가 머리에서 목으로 흘러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고 쓰리고 아팠다. 이 아픔 때문에 공포심은 도리어 누그러진 셈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막아냈다. 두 손으로 어떻게 했는지는 지금 모르겠으나 그는 "요것! 요것!" 하면서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에게는 구조의 손길이 가까이에 있었다. 이층에 가 있는 리드 부인을 부르려고 일라이자와 조지아나가 달려 나갔다. 부인이 나타났고 베시와 하녀인 애보트가 뒤따라왔다. 우리 둘 사이가 떨어졌을 때 내게는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저런! 존 도련님한테 덤벼들다니 무슨 짓이야!"




"이런 꼴은 처음 보겠네!"




그러자 리드 부인도 끼어들었다.




"저 애를 붉은 방에 데리고 가서 가두어놓아."




네 개의 손이 순식간에 나를 낚아챘다. 나는 이층으로 끌려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 2004-12-01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인 에어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자그맣고, 못생기고, 고집센 제인 에어와 나를 동일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이로운삶 2004-12-01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시는 부분이라니 기쁘네요.^^ 게으른 서재에 놀러와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