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지상의 양식' 앙드레 지드

알제리 제밀라·비스크라에서
야자수의 바다엔 지드의 관능이 숨쉬고…
신혼때 묵었던 호텔·호화 아파트 폐허로
'생명의 빛' 발견한 거리는 예나 지금이나
글·사진=김화영 고려대 교수·불문학
입력 : 2005.06.02 19:05 37' / 수정 : 2005.06.02 19:12 22'

앙드레 지드의 자취를 찾아가는 남쪽 여행은 알제 동쪽 300킬로미터, 제밀라를 거쳐 가는 긴 우회의 길이었다. 세티프 평원 북쪽의 메마른 산악지대에 위치한 이 거대한 로마 유적 제밀라, 그리로 가는 ‘꼬불꼬불한 길’의 풍경은 보기 드문 절경의 구릉지대로 온갖 봄꽃들과 연두색 밀밭으로 채색된 양탄자 조각보였다.

이 인적 없고 바람 드센 폐허에서 오후를 다 보내고, 찾는 이 없는 박물관의 관장에게 카뮈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의 책상 맞은편 벽에 붙여 놓은 인용문을 가리켜 보일 뿐.

“여러 사람들과 여러 인간사회들이 이곳에서 일어났다가 스러졌다. 정복자들은 이 고장에다가 졸병(卒兵)급 문명의 자취를 찍어 놓았다. 그들은 위대함에 대하여 저속하고 우스꽝스러운 관념을 지니고 있었으며 정복한 땅의 넓이로 제국의 위대함을 가늠했다. 신기한 것은 그들 문명의 폐허가 그들의 이상(理想)의 부정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이다.”(‘제밀라의 바람’)


▲ 앙드레 지드의 소설 '배덕자'의 무대가 된 도시 비스크라
이튿날 나는 거만한 문명의 ‘부정’과도 같은 ‘사막의 열쇠’ 비스크라를 향해 남으로 수백 킬로를 달렸다. 지드는 카뮈가 태어나기도 전인 1893년에 11월에 처음으로 알제리를 방문한 이래 근 반세기에 걸쳐 이곳을 되풀이하여 찾았다. 그 자취는 소설 ‘배덕자’, 감동적 산문시 ‘지상의 양식’, 회고록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그리고 여행 노트 ‘아민타스’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남았다. 남으로 내려갈수록 초원지대는 사라지고 엉겅퀴만 드문드문 먼지를 쓰고 웅크린 사막. 문명에 대한 집요한 부정.


▲ 김화영 교수가 알제리의 사막에서 만나 아이들.
지드가 “마침내 바위가 열린다. 이것이 문이다”라고 말했던 엘 칸타라의 협곡을 통과. 첫 오아시스 마을이다. 엘 우타야의 소금 산과 은빛 소금의 호수를 지나면 곧 비스크라. 200만 그루의 야자나무가 광막한 바다를 이루는 도시. 지드의 문학 속에서 가장 이국적 매혹을 자아내는 곳이다.

호텔에 짐을 풀고 빈속을 채울 겸 시내로 나섰다. 길가에서 오래된 느낌의 어느 공원 하나를 발견. 이곳이 혹시 ‘배덕자’에서 주인공이 머물렀던 호텔 앞의 그 ‘길쭉한’ 공원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지금은 앙드레 지드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 도시에서 우연은 나를 문득 그의 문학의 한 심장부로 곧장 인도했다. 그 공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온실처럼 덥다. 그 한쪽 우거진 숲에 묻힌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겉만 교회일 뿐 도서관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배덕자’의 첫머리에서 주인공 미셸과 그의 아내 마르슬린이 묵었던, 아니 지드와 그의 신부 마들렌이 묵었던 호텔이 그 공원 건너편에 그대로 있다고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그 도서관의 사서였다.

소설의 주인공은 ‘거의 다 죽다시피 된’ 병든 몸으로 비스크라에 도착한다.

주인공이 든 아파트는 “거의 한 개의 테라스에 지나지 않았다. 그 테라스! 거기에 내 방과 마르슬린의 방이 있었다. 제일 높은 곳에 이르면 눈 아래 집들 너머로 종려나무가 보이고 종려나무 너머로는 사막이 보였다. 테라스의 또 다른 편은 길쭉한 마을의 공원에 접해 있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 지드가 '지상의 양식'에서 감탄한 엘 칸티라의 바위문
‘배덕자’, ‘지상의 양식’, 그리고 ‘한 알의 밀알…’의 화자는 모두 지드 자신의 한 모습이다. 그는 바로 이 호텔, 이 공원, 이 거리, 이 도시, 이 인근의 여러 오아시스 마을에서 비로소 죽음으로부터 헤어나 싱싱한 생명의 ‘맨발’을 발견한다. 그리고 외친다. “나타나엘이여, 내 너에게 열정을 가르쳐 주마!” 아랍 소년 바시르, “웃을 때에 굉장히 흰 이빨이 드러나 보였다. 그는 장난으로 피 흐르는 상처를 핥았다. 그의 혓바닥은 고양이 혓바닥처럼 장밋빛이었다. 아 아 얼마나 건강한 놈이냐! 이 작은 몸뚱이의 건강.” 이때부터 지드의 관능은 잠을 깬다.

동성연애자 지드는 소년에게서 생명의 빛을 보고 절규한다. “중요한 일은 죽음의 날개가 나를 스쳤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대단히 놀라운 일로 되었다는 것이다.”


▲ 김화영 고려대 불문학 교수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원 바로 건너편에 아주 오래된 건물이 하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길과 공원 쪽으로 한껏 멋을 낸 회랑이 나 있고 그 한가운데 정문엔 판자에 못이 박혀 오랫동안 폐쇄된 채인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가까이 가 보니 정문 옆 벽의 검은 대리석 판에 새긴 ‘호텔 뒤 사하라’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버려진 지 20년. 이곳은 원래 ‘백인 신부들의 집’이었다. 2층 테라스 쪽으로 난 세 개의 방은 라비즈리 추기경을 위해 마련한 아파트였으나 오기도 전에 사망하였으므로 지드가 이 호화로운 방들을 쓰게 된 것이었다. 그 추기경의 침대에서 일어난 관능적인 일들을 여기서 자세히 말할 생각은 없다.

나는 비스크라 인근의 오아시스 마을들을 찾았다. 셰트마, 드로흐, 우마슈…. 키 큰 종려나무들과 토담 아래 흐르는 섹히아에 손을 적신다. 물은 따뜻하고 부드럽다. 삶처럼. 인적 없는 골목에서 소년 하나가 나타나 까만 눈으로 쳐다본다. 오아시스의 환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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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페스트' 알베르 카뮈

②알제리 오랑에서
바다에 등 돌린 채 달팽이처럼 맴도는 길 순수와 해방이 걷고 있다
실직·결혼·증오로 점철된 ‘방황의 무대’ 몸 의탁했던 처가는 아랍식
거리에 그대로
글·사진=김화영 고려대 교수·불문학
입력 : 2005.05.26 18:51 25' / 수정 : 2005.05.26 19:19 14'

카뮈의 소설 ‘페스트’의 무대인 오랑은 알제에서 서쪽으로 423㎞나 떨어진 항구 도시다. 공항에 마중 나온 오랑 여행사 하데피는 카뮈에 대해서 잘 아는 체 했다. 그러나 그는 2차대전의 상징인 ‘페스트’가 정말 1940년대 오랑에 퍼져 많은 사람이 죽은 것으로 오해하여 열심히 소설 같은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카뮈는 소설 ‘페스트’의 첫머리에서 오랑을 ‘특이한 것도 없고 초목도 없고 영혼도 없는’ 평범한 도시로 소개했지만, 내겐 상쾌하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가도는 해변을 따라 시원하게 뻗어 있고, 종려나무들이 규칙적으로 늘어선 넓은 인도에는 철제 벤치들이 놓여 있으며, 사람들은 난간에 기대어 한가로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뮈의 작품에서 오랑 자체는 늘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페스트’로 폐쇄된 도시. 이 도시에 바친 긴 산문 ‘미노타우로스’에서 카뮈는 이렇게 묻는다. ‘공허, 권태, 무관심한 하늘, 이런 곳들의 매력은 무엇인가?’ 그러나 권태는 오랑 자체라기보다는 그곳에 머물었던 카뮈 자신의 내면풍경이었다.


▲ 카뮈의 소설‘페스트’의 무대가 된 오랑 시내 풍경.
‘페스트’의 화자가 오랑을 ‘완벽하게 금을 그어놓은 듯한 만을 등지고 있어서 바다를 바라볼 수가 없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가야만 바다를 볼 수가 있다는 점’이 유감이라고 한 것은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도시 서쪽 언덕에 위치한 터키 요새에 올라가서야 깨달았다. 눈앞에 펼쳐진 도시가 바닷가 ‘언덕들에 에워싸인 채 헐벗은 고원 한가운데’ 올라 앉아 있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과연 요새 뒤에 파묻힌 시가지는 ‘바다에 등을 돌린 채’ 길들이 ‘달팽이 껍질처럼 맴돌며’ 위로 뻗어 오르고 있었다.(‘미노타우로스’)

높은 산타 크뤼즈 산허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내려다본다. 오른쪽으로 구시가 가장자리 절벽들, 왼쪽은 메르 엘 케비르. 주름 하나 없이 짙푸른 바다. 그러니까 오른쪽 도시는 권태와 ‘페스트’, 일부러 찾아가야 하는, 보이지 않는 모래밭은 순수함과 해방의 공간인 것이다.

카뮈는 전쟁 중 두 번 오랑에 체류했다. 두 번 다 실직자 신세였다. 1939년 여름, ‘알제 레퓌블리켕’ 신문이 폐간 위기에 처하자 젊은 기자 카뮈는 실직자가 되었다. 친구들과의 그리스 여행계획도 2차대전의 발발로 무산된다. 군에 입대하고자 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그마저 좌절. 1940년 초 그는 오랑에 자리 잡는다. 오랑 출신 여자 프랑신 포르와 약혼했다.


▲ 푸르디푸른 지중해를 품에 안고있는 도시 오랑의 전경.
그녀의 어머니 페르낭드는 세 딸과 아르죄 가의 65번지에 산다. 카뮈는 잠시 그곳에 몸을 의탁한다. 나는 시내 한복판에 있는 폭이 좁고 긴 아르죄 가로 가 보았다. 아랍식 이름, 라르비 벤 므히디 가로 바뀐 거리에 그 집은 건재하고 있다. 알제에서처럼 그 65번지의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줄 안내자는 없었다.

얹혀 지내는 처지가 마음에 편할 리 없다. 지식인 타입과는 반대인, 말 없고 투박한 피에르 갈랭도와 친했다. 그와 함께 산책도 하고 술도 마시고 권투시합 구경도 갔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의 모델 중 하나로 지목되는 인물이다.

‘갈랭도의 패거리’ 덕분에 카뮈는 ‘이방인’의 가장 중요한 한 장면, 즉 바닷가 살인사건 장면의 소재를 제공받는다. 어느 날 오랑의 서쪽 부이스빌 바닷가 모래밭에서 소설 ‘이방인’의 제1부 6장, 일군의 프랑스인들과 아랍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백주의 결투장면이 거의 그대로 벌어졌다. 갈랭도 패거리의 대다수는 수영과 축구를 즐기고 있었는데 벵수쌍 형제 중 라울과 두 명의 아랍인 사이에 시비가 일어났고 즉시 다른 친구들이 거기에 가세하게 되었다. 아랍인에게 권총을 발사하는 사태만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 번째 오랑 생활은 1941년 1월부터 1년 8개월 동안 계속된다. 전쟁 중 파리 스와르의 기자 알베르 카뮈는 1940년 12월 3일 피난지 리옹에서 프랑신과 결혼하지만 곧 감원대상이 되어 실직, 오랑의 처가로 되돌아왔다. 아르죄 가 65번지. 발코니는 거리를 향하고 있다. 아파트는 거실 하나, 침실 두 개로 넓었다. 27세의 이 깡마른 사내는 여전히 무직. 아내 프랑신은 임시교사 자리를 얻었다. 카뮈는 알제에도 자주 갔고 가정교사, 사립학교 선생을 하며 지냈다. 그는 벌써 ‘페스트’를 구상 중. 처가인 포르 집안에 대해 느끼는 카뮈의 역정은 그 도시에 대한 증오로 나타났다. 그래서 그는 가끔 혼자 혹은 친구와 같이 오랑을 벗어나기도 했다. 그가 즐겨 찾는 곳은 서쪽 해안 멀리 난 인적 없는 그 바닷가.

나는 그가 즐겨 찾던 아인 엘 튀르크, 레 장달루즈, 마다그 바닷가 모래밭을 차례로 찾아가 보았다. 기울어가는 저녁나절. 카뮈는 그곳에서 일주일간이나 혼자 야영했고 그때의 고독과 행복감을 노래했다. ‘오랑 지방의 이런 해변에서의 여름 아침은 날마다 세상의 첫 아침 같다. 황혼은 날마다 마지막 황혼인 양 온갖 빛깔로 짙게 물든 마지막 광선이 장엄한 임종을 마친다.’

지금은 여름 시즌 준비를 위하여 방갈로 수리가 한창이고 담장 밑에 한껏 부풀어 오른 꽃들이 폭발하고 있다. 1942년 5월 19일 ‘이방인’ 초판이 파리에서 나오고 얼마 뒤 폐병이 재발한 카뮈는 프랑스 고산지대로 요양하기 위하여 오랑을 떠난다. 나도 알제로 돌아오는 마지막 비행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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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페스트’는

박해현기자 hhpark@chosun.com
입력 : 2005.05.26 18:48 47'


소설 ‘페스트’가 1943년 프랑스에서 출간됐을 때 카뮈는 34세의 젊은 작가였다. 첫 구상에서 탈고까지 7년이나 걸린 이 소설은 알제리의 도시 오랑이 페스트의 공격을 받는 상황 속에서 실존의 부조리와 한계 상황을 형상화했다.

당시 유럽이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페스트는 전쟁의 은유였다. 전쟁은 질병이나 죽음과 마찬가지로 어처구니 없는 것이라는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전 5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구조와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폐쇄된 도시에 갇히는 상황에 직면해 도피와 반항·체념 등등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과정을 그리면서, 운명을 주체적으로 극복하는 인간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한다. 카뮈 스스로도 ‘이방인’이 부정의 표현이라면, ‘페스트’는 긍정의 표현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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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이방인' 카뮈 … 알제 티파사에서

은빛 지중해, 태양이 작열하는 거리
가난한 다섯식구 살던 집 지금은 카페로
글·사진=김화영 고려대교수·불문학
입력 : 2005.05.19 18:57 23' / 수정 : 2005.05.19 19:46 49'

알제에 도착하던 날 한국 대사관저의 간단한 파티에는 알제의 여러 문인들, 그리고 테시에 대주교가 왔다. 50년대 알제 서부 벨쿠르 동네에서 부제로 일하신 그분은 카뮈가 어린 시절에 살던 옛 집을 알고 있었다. 이튿날 그분의 안내로 서민들이 사는 벨쿠르 거리 리용가 124번지를 찾아갔다. 거리 이름도 지금은 독립전쟁 영웅의 이름을 따서 모하메드 벨루이자드 가. 소설 ‘이방인’에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난 뫼르소가 일요일 날 오후, 발코니에 나앉아 거리를 내다보며 무료하게 보내는 장면이 길게 묘사되어있다.

아마 거기일 것이다.

‘맞은 쪽 보도 위에 담배 가게 주인이 의자를 문 앞에 내다놓고 등받이 위로 두 팔을 고인 채 거꾸로 타고 앉아 있었다.’(‘이방인’중)

아파트의 파란 덧문 사이로 지금은 카페가 된 그 담배 가게의 아랍어 간판이 내다보였다. 어둑한 계단을 올라가면 왼쪽 첫 문. 식당 하나 거실하나, 침실 하나, 방 3개에 카뮈네 가난한 다섯 식구가 살았다. 지금 주인 슈누프 무스타파는 1951년 이 집에서 태어났단다. 2003년 지진으로 많이 파괴된 이 동네에서 이제 무스타파를 제외하고 알베르 카뮈가 누구인지 아는 아랍인은 없다. 뫼르소는 자기가 살던 동네에서도 이방인이 되어 버렸다.

카뮈의 ‘티파사에서의 결혼’ 첫 구절이다. 오래 전부터 이 문장은 에게 해의 섬들처럼 머리 속에 떠돌고 있었다. 늘 그 티파사에 가고 싶었다. 거기에 가면 매 순간이 돌 더미 속에서 푸드득 튀어 오르는 새처럼 돌연한 빛이 되어 번뜩일 것 같았다.

티파사로 가는 길은 멀었다. 1974년 봄, 프랑스에서 카뮈에 대한 학위논문을 발표하고 나서 귀국 직전, 티파사에 가기 위하여 파리 주재 알제리 대사관으로부터 입국 비자가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허사가 되고 말았다. 알제 대학의 강연 초청장도 무용했다. 당시 한국과 알제리 인민공화국 사이에는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알제시의 높은 곳인 프란츠 파농 대로에 우뚝 솟은 엘 오라씨 호텔의 객실에 앉아 이 글을 쓴다. 봄바람이 가끔 흔들고 지나가는 커튼 사이로 저 아래 알제 시가 전체가 하얀 레고를 조합해 놓은 듯 바다를 향해 경사를 이루며 펼쳐져있다. 그 앞으로 ‘세상에서 가장 선명한 물굽이’에 안긴 지중해 바다는 주름하나 없다.

즉시 알제에서 서쪽으로 해안을 끼고 티파사를 향해 달렸다. ‘내게는 그 69킬로미터의 길에서 어느 곳 하나 회상과 감동으로 뒤덮여있지 않은 데가 없다’고 2차대전 직후 ‘티파사에 돌아온’ 카뮈가 말했던 길이다. 벌써부터 갈대밭 저쪽 파란 바다에 와 엎드린 ‘이끼 낀 신(神)’ 슈누아가 눈에 들어온다. 고요한 마을을 지나서 유적지 안으로 몇 발자국 들여놓자 벌써 황갈색의 해묵은 페허의 돌과 꽃들의 ‘혼례‘잔치다. 보라색 엉겅퀴 꽃들과 노란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계단을 올라 바다 쪽으로 나서자 오른 쪽에는 슈누아 산의 ‘시커먼 등뼈’, 동쪽 산등성이 쪽에는 등대가 보인다.


▲ 카뮈의 산문‘티파사에서의 결혼’을 낳은 티파사의 고대 유적지.
‘결혼. 여름’을 쓰던 1936년의 젊은 카뮈는 지금의 유적지 공식적 입구 쪽이 아니라 마을 초입 어항 곁으로 난 폐허로 들어온 것 같다. ‘항구의 왼쪽으로 난 마른 돌계단이 유향나무와 금작화들 사이의 페허로 인도한다. 길은 조그만 등대 앞을 지나서 들의 한복판으로 빠져 들어 간다’고 썼으니 말이다.

지금 등대 앞길은 막혀있다. 그 사이에 알제리 독립 전쟁이 있었고 카뮈는 1962년 알제리가 독립하기 2년 전에 세상을 떴다. 그리고 회교 원리주의 ‘테러리스트’들과 정부군 사이의 피아를 구별하기 어려운 살육의 공포가 불과 3년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제 알제리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고대 로마의 폐허에도, 최근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폐허에도 봄은 잊지 않고 돌아왔다.

‘폐허와 봄의 결혼 속에서 폐허는 다시 돌이 되어, 인간의 손길로 닦여진 저 반드러운 손때를 이제는 다 버리고 자연 속으로 되돌아왔다. 탕아의 귀향을 위하여 어머니 대자연은 꽃들을 아낌없이 피워놓았다.’

나는 구태여 기행문을 쓸 필요도 없다. 내가 좋아하는 카뮈의 문장을 옮겨놓기만 하면 그대로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러나 변한 것이 있다. 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풍경 속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 속에,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이 넓고 찬란한 고대 도시 속에 서 그날 아침나절 내가 만단 사람은 모두 열 사람이 채 되지 않는다. 이 나라는 오래 동안 관광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지냈던 것이다. 폐허 속에 서있는 눈에 익은 카뮈의 문학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나는 사람들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거리낌 없이 사랑할 권리다.’


▲ 글·사진=김화영
고려대교수·불문학
‘티파사에서의 결혼’에서 인용한 말이다. 그런데 알제리아가 독립하여 프랑스인들이 모두 본토로 쫓겨 가고 아랍 사람들의 나라가 된 이후, 누군가가 ‘CAMUS’라는 이름을 파서 그 일부분을 지워 놓았다. 이것은 사람의 손이 한 일이지만 자연도 세월을 따라 변했다. 카뮈는 땅에서 파내놓은 석관들을 보면서 ‘옛날엔 그 석관들 속에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샐비어와 향 꽃 무가 그 속에서 자란다’고 썼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나서 내가 그곳에 갔을 때 석관 속에는 노란색 들꽃이 소복하게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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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카뮈와 알제리

박해현기자 hhpark@chosun.com
입력 : 2005.05.19 18:58 02'


 

“나는 언제나 테러를 규탄했다. 나는 알제의 거리에서 맹목적으로 자행되고 언젠가 내 어머니와 가족을 덮칠 테러리즘을 규탄해야만 한다. 나는 정의를 믿지만, 정의 앞에서 내 어머니를 보호할 것이다.”

프랑스의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난 작가 알베르 카뮈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 주창한 알제리 민족이란 개념에 의구심을 품었다. 알제리는 유태인, 터키인, 그리스인, 이탈리이안, 아랍인, 프랑스인 등 다양한 민족의 이민자들이 흘러들어와 공동체를 형성했기 때문에 알제리 단일 민족론은 성립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프랑스인들과 이슬람 교도들이 통합된 알제리 공화국을 수립하고, 프랑스 연방의 일원이 되는 제3의 해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카뮈는 프랑스와 알제리 양쪽에서 모두 외면당했다.

카뮈의 대표작 ‘이방인’은 죽음의 숙명을 지녔으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무용한 정열을 그렸다. 실존의 부조리를 탐구한 소설이기 때문에 실존주의 문학의 상징적 소설로 꼽힌다.

지중해의 푸른 물결과 작열하는 태양, 눈부시게 빛을 반사하는 흰 벽의 집이 형성하는 풍경 속에서 전개되는 이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는 카뮈처럼 알제리의 프랑스인이다. 그는 해변에 산책을 나갔다가 한 아랍인과 말다툼을 벌이게 되고, 그 아랍인이 꺼내든 단도를 꺼내들자 본능적으로 총을 발사해 그를 죽인다. 뫼르소는 법정에서 “단지 태양때문에”라며 변호하지만, 그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이방인이 된다.

뫼르소는 사형 집행일 전날 밤 감옥 창살 너머에서 풍겨오는 별, 흙, 소금 냄새를 맡으면서 멀리서 울리는 뱃고동 소리를 통해 대우주의 품 속으로 새로운 여행을 떠난다는 환상 속에서 죽음을 넘어서는 삶의 쾌감을 만끽한다. 카뮈의 산문 ‘티파사에서의 결혼’은 매혹적인 문체 미학을 통해 신화와 현실이 공존하는 지중해가 바로 카뮈의 푸르디 푸른 영혼을 낳았음을 보여준다. 지중해의 자연과 인간이 결합하는 신성한 공간에서 정오의 태양은 강렬한 빛의 세례를 선사한다. 카뮈의 문학은 그 백색의 풍경 속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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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보르헤스

 

▲ 부에노스 아이레스 거리를 산책하는 보르헤스.
 
 
 
부에노스 아이레스=최홍렬기자 hrchoi@chosun.com
 
 
환상과 사실이 뒤섞인 환상적 사실주의를 주창해 20세기 소설 미학에 새 장을 열었다.

1899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탄생한 작가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청소년기를 보낸다. 1923년 고향으로 돌아온 작가는 이듬해 첫 시집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를 내면서 시인으로 출발했으나 1935년 소설집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출간하면서 소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책을 읽은 데다 유전적 요인으로 30대 후반부터 서서히 시력을 상실해 인생의 후반부를 암흑세계에서 지내게 된다. 1937년 도서관에 처음 취직한 이래 평생을 사서로 지낸 그는 1955년부터 20여년 동안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으로 재직했다.

그의 소설집 ‘픽션들’은 경이롭고 충격적인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바벨의 도서관’은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도서관을 선택한다. 우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도서관에는 모든 책들의 가이드 같은 ‘책 중의 책’(=진리)이 존재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찾지는 못한다. 인간은 개별적인 책으로만 접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대적인 진리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원형의 폐허들’의 주인공은 꿈을 꾸면서 인간을 만들어낸다. 가상으로 만들어진 그 인간은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다. 어느날 주인공의 신전에 불이 나는데, 자신의 몸도 불에 타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 또한 누군가의 꿈에 의해 만들어진 가공의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이 소설은 우리가 확고부동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자아와 세계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픽션들' 보르헤스

 
 
보르헤스 문학의 맥박은 탱고에 실렸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 관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그는 인간의 살과 뼈가 부딪치고 땀냄새가 풍기는 탱고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이곳은 유럽 이민이 건설한 도시다. 신대륙에서 새 삶을 찾으려던, 혹은 새 운을 만날까 기대하던 사람들의 좌절과 욕망을 한데 버무린 음악 탱고…. 보르헤스의 청년시절은 탱고의 시대였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해질 무렵과 밤이 없다면 탱고는 만들어질 수 없다.” 그렇게 탱고를 품었던 작가는 탱고 가사를 쓰기도 했다.

고층건물이 있는 도심에서 남쪽으로 달리면 ‘탱고의 거리’ 보카지구가 나온다. 보르헤스의 말대로, 황혼이 드리울 무렵이 되자 돌로 포장된 좁고 고풍스런 거리에서 결렬한 리듬과 관능적인 몸짓이 어우러지는 즉석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카를로스 가르델 같은 대가수를 낳았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대형 극장이건 조그만 광장이건 매일 밤 탱고 공연이 끊이지 않는다. 보르헤스가 단골로 찾은 카페 토르토니(Tortoni)에는 카를로스 가르델, 시인 알폰시나 스토르니 등과 보르헤스가 탁자에 앉아 있는 밀랍인형을 구경할 수 있다.

보르헤스가 소설을 쓴 단초는 그의 작품 세계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193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는 아파트 계단을 뛰어올라가다가 창문에 머리를 부딪혀 한 달간 사경을 헤맸다. 회복기에 접어든 보르헤스는 혹시 지적 능력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빠졌고, 시험 삼아 단편소설을 써보기로 했다. 이 단편들이 오늘의 보르헤스를 만들어낸 명작들이 되었다. 거울과 미로, 도서관과 꿈 등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는 눈을 제공한 보르헤스는 20세기 현대소설의 탈출구를 열었다.

50대 이후 보르헤스에게는 훤한 대낮도 탱고가 흐르는 밤이었다. 56살에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에 임명됐지만, 그때는 이미 시력을 거의 잃어 책을 읽을 수 없게 된 상태였다.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심경을…’(‘축복의 시’). 그토록 좋아했던 책의 바다에서 단 한줄의 글도 읽을 수 없는 극단적 불행을 ‘축복’이라고 노래한 보르헤스의 심정을 헤아릴 길이 없다.

눈먼 보르헤스가 걸었던 부에노스 아이레스 거리를 부인 마리아 코다마(68)씨와 함께 걷는다. 한낮의 더위가 식어가는 저녁 8시 쯤 되자 애완견을 데리고 거리로 나선 시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보르헤스가 살았던 마이푸 994번지에는 그가 즐겨 걸었던 지역을 표시한 지도가 거리에 붙어 있었다. 유럽풍 고옥(古屋)의 현관 아치와 격자창들을 느끼기 위해 작가가 이따금 걸음을 멈추곤 하던 거리는 수십년 전 정취를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단편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이 거리를 걸으며 구상한 것은 아닐까. 작품에서 계속 왼쪽으로만 갈라지는 길을 따라 들어가 모든 사람들이 길을 잃는 미로(迷路)로 연결된다는 내용은, 실명(失明)으로 거리를 걷는 작가를 연상시킨다.

“남편은 노란색과 파란색, 그리고 초록색 외엔 온통 어둠뿐인 암흑의 세계에 빠졌죠. 그렇지만 한번 산책에 나서면 코스를 정하지 않고 몇 시간이고 걸었어요. 수십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책에 나선 것은 이 도시의 매혹을 접하지 않고서는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50대 중반에 실명한 보르헤스의 대형사진 앞에 선 마리아 코다마. 그녀는 30여년 동안 보르헤스의 눈이 되어 주었다.
열두살 때 보르헤스를 만나, 비서이자 연인으로 30년을 작가 곁에 있던 코다마씨는 87세의 보르헤스와 결혼했다. 보르헤스는 결혼 두 달 후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거의 20년이 흘렀지만, 코다마는 지금도 보르헤스와 함께 걷던 거리 모퉁이마다 추억이 생생하다. 현재 보르헤스 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그녀는 보르헤스의 손때가 그대로 묻어 있는 지팡이들을 보여주며 “보르헤스의 분신”이라고 했다.

“비록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거리의 건물 색깔이나 특징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그 동네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죠. 산책하며 작품의 영감을 얻곤 했어요.”

투쿠만가 840번지 생가터는 ‘카페 리테라리오(Cafe Literario)가 들어서, 매주 수요일 저녁 문학토론이 벌어지는 문학카페로 변신했다. “아르헨티나에서 보르헤스를 읽고 토론한다는 것은 교양인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통용된다”(가르시아 다리스 살바도르대 교수) “철학·건축·영화 등 문화계 전반에 걸쳐 20세기 작가 중 가장 인용이 많이 되는 작가”(문학평론가 파트리시오 로이사가씨). 이제 신화가 된 보르헤스는 오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어둠에 껴묻혀 숨쉬고 있다.

 

 

▲ 부에노스아이레스 남부에 있는 보카 거리. 즉석에서 탱고 공연이 벌어지기도 한다. 보르헤스는 이 거리를 산책하며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아르헨티나)=최홍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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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 철저한 은둔자로 유명한 JD샐린저가 살고 있다고 인근 주민들이 말한 저택. 뉴햄프셔주 코나슈의 숲속에 있다.
뉴욕 맨해튼의 부유한 가정 출신인 16세 소년 홀든은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한 사립학교에서 쫓겨난다. 5과목 중 4과목 낙제 때문이다. 맨해튼의 집으로 돌아가는 이틀 동안 그의 경험과 생각을 1인칭 시점으로 들려준다. 첫 출간은 1951년이다. 인간 군상의 비열함, 어른들의 허위 의식, 희망을 잃어버린 암울함이 소설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홀든은 그런 세상을 견딜 수가 없다. 그가 바라는 것은 넓은 호밀밭에서 아이들이 뛰어놀다 넘어지면 잡아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바로 책 제목이다. 결국 홀든은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다. 랠프 엘리슨 ‘보이지 않는 인간’(1952), 앨런 긴스버그 ‘울부짖음’(1956), 잭 케루악 ‘노상에서’(1957), 노먼 브라운 ‘죽음에 반하는 삶’(1959), 그리고 제임스 딘 주연 ‘이유 없는 반항’(1955) 등과 더불어 1950년대 안정과 순응의 사회에 도전한 기념비적 명저로 남아 있다.

“그 집에 접근하지 마세요. 바로 체포됩니다. 저도 얼굴을 못봤어요.”(지방신문 기자 존 양씨)

“그 집요? 알지요. 하지만 가르쳐 드릴 수 없네요. 규칙입니다.”(우체국 직원 M씨)

허위의식과 획일주의에 저항하며 시대 정신을 앞서갔던 소설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Salinger·86)는 지금까지 반세기가 넘도록 철저한 은둔자로 살고 있다. 뉴욕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로 6시간 이상 달려가면 뉴햄프셔주의 산간 마을 코니시(Cornish)에 그의 집이 있다. 인근 레바논시(市)에 있는 L 공학박사 집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아침 밤새 내린 눈에 깜짝 놀라며 코니시의 야산들을 훑기 시작했다. 해발고도 100m 안팎의 완만한 구릉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져 있고, 고개 하나 넘으면 겨우 집 한 채가 나올 만큼 숲속에 묻힌 마을이다. 3~5층 높이쯤 돼 보이는 나무들로 울창한 산 속에 누워 있는 도로는 차 바퀴가 빠질 정도로 좁다. 그 길마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어느 집에 샐린저가 살고 있을까.

코니시로 올라가기 전 그의 생가가 있는 뉴욕 맨해튼의 어퍼 웨스트 사이드, 그리고 그가 맨해튼에서 퇴학 당하고 전학 간 펜실베이니아주 웨인시(市)의 밸리 포지 밀리터리 아카데미(Valley Forge Military Academy)를 먼저 찾았다. 그의 대표작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Holden) 역시 퇴학 맞은 고교생이기 때문이다.

회색 구름이 낮게 웅크리고 있던 날, 맨해튼에서 남서쪽으로 자동차로 3시간쯤 떨어진 이 학교에서 샐린저가 남긴 흔적을 더듬었다. 그가 고교생이던 때는 벌써 70년 전이다. 찰스 맥조지(McGeorge) 교장은 “샐린저 말고도 이 학교 출신 중 작가로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11명이나 된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 학생도 10여명이 다니고 있는 이 학교에 대해 맥조지 교장은 “샐린저의 책에 있는 것들은 다 픽션이다. 여기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홀든이 다섯 과목 중 네 과목이나 낙제해서 퇴학을 당하기 때문인지 맥조지 교장은 소설의 내용과 현재 학교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것을 한사코 꺼려하는 눈치였다.


▲ 딸이 쓴 자서전 표지 JD샐린저의 짤 마거리트(폐기)는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 '드림캐쳐'를 썼다. 책 표지 사진에서 어린 폐기가 아빠에게 무등을 타고 있다.
그러나 샐린저와 동기 동창생이었으며 현재는 이 학교 채플에서 교목으로 일하고 있는 사닐리(Sanelli) 장군은 “이 학교에서의 경험이 상당히 많은 부분 그의 소설에 녹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롬은 그때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공공연한 꿈을 갖고 있었지요. 문학 서클에는 가입한 적이 없지만 영화를 좋아했고, 릴에 감아 놓은 영화를 사다가 집에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샐린저의 딸인 마거리트 역시 “아빠의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픽션이 아니라 실제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학교의 켈리 M 드셰인 행정실장이 1930년대 소년 샐린저의 모습이 들어있는 졸업앨범을 찾아내왔다. 1919년 1월 1일 뉴욕 출생인 샐린저가 이곳 밀리터리 아카데미 B 중대 소속이었다는 점, 그리고 드라마클럽(Mask and Spur), 비행기조종클럽(Aviation Club) 같은 9개 동아리 활동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세 줄짜리 화려한 장식 단추의 제복을 입은 샐린저의 사진이 실려 있다. 부리부리한 눈썹과 갸름한 턱선이 누가 봐도 준수한 용모다.

이곳에서 샐린저는 펜싱팀 주장을 맡았는데,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홀든도 펜시 고교의 펜싱팀 주장으로 나온다. 학교에서 쫓겨난 홀든은 서부로 도망치려다 막내 여동생과 정신적인 교감을 하면서 이틀 만에 집으로 돌아간다. 당시는 “속물주의에 찌든” 암울한 시대였다. “미치지 않았다면 마주하기 힘든 일만” 가득한 환경을 “정말 무서운 일”이라고 뇌까렸던 열여섯 소년 홀든이 절망에 잠겨 걸었던 발걸음을 따라가 보고 싶었다.

펜실베이니아 애거스타운 톰슨언덕→앤터니웨인가(街) 스펜서 선생집→기차역→(기차탑승)→뉴욕 34번가 펜역(驛)→그랜드센트럴역→브로드웨이→센트럴파크→47번가 빌트모어 극장→50번가 라디오시티→센트럴파크 동쪽 서튼플레이스에 있는 앤톨리니 선생집→회전목마….

변한 것은 없었다. 50여년 전 소설 속이나 지금이나 위치도 건물도 모두 그대로였다. 심지어 홀든이 소설 속에서 그토록 걱정했던 센트럴파크 연못의 오리떼조차 여전했다. ‘연못이 얼어버리면 그곳에 살고 있던 오리들은 어디로 가게 되는지 알고 계세요?’(소설 ‘호밀밭의 파수꾼’ 25쪽, 113쪽)

그 뒤, 뉴햄프셔로 찾아간 샐린저의 집은 코니시의 ××로드 1××번지로 확인됐다. 우체통에는 지방신문 2부가 들어 있었고, 쌓인 눈 속에 파묻힌 집 외벽에는 전기작가 사라 모릴(Morril)이 얘기했던 대로 위성 접시 안테나가 걸려 있다.

얼마 전까지 샐린저는 수요일이면 다운타운에 내려와 외식을 했다. 식당은 ‘피터 크리스천스’다. 나중에 ‘진스’로 바뀌었다. 샐린저는 이 식당에서 ‘피터 어머니의 특선(特選)’이라는 샌드위치를 주로 먹었다. 기본적으로는 자신이 먹는 야채는 모두 길러 먹었다.

“허위로 가득한 세계가 강요하는 획일적인 가치관에 정면으로 맞섰던” 샐린저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적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던 경계선의 작가”라는 평가도 듣는다. 정작 본인은 세상의 평가를 듣는 듯 마는 듯 아마 죽는 날까지 은둔의 베일을 벗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맨해튼 센트럴파크 샐린저의 기념비적인 출세작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주인공 홀든은 맨해튼의 센트럴파크를 지나면서 "저 오리떼들은 겨울이 오면 어디로 갈가?"라고 걱정하는 대목이 나온다. '호밀밭의 파수군'을 거론할때마다 맨먼저 인용하는 유명한 문구다. 사진은 센츠럴파크 남쪽에 있는 연못과 오리, 그리고 햇볕을 쬐고 있는 뉴욕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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