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지상의 양식' 앙드레 지드

알제리 제밀라·비스크라에서
야자수의 바다엔 지드의 관능이 숨쉬고…
신혼때 묵었던 호텔·호화 아파트 폐허로
'생명의 빛' 발견한 거리는 예나 지금이나
글·사진=김화영 고려대 교수·불문학
입력 : 2005.06.02 19:05 37' / 수정 : 2005.06.02 19:12 22'

앙드레 지드의 자취를 찾아가는 남쪽 여행은 알제 동쪽 300킬로미터, 제밀라를 거쳐 가는 긴 우회의 길이었다. 세티프 평원 북쪽의 메마른 산악지대에 위치한 이 거대한 로마 유적 제밀라, 그리로 가는 ‘꼬불꼬불한 길’의 풍경은 보기 드문 절경의 구릉지대로 온갖 봄꽃들과 연두색 밀밭으로 채색된 양탄자 조각보였다.

이 인적 없고 바람 드센 폐허에서 오후를 다 보내고, 찾는 이 없는 박물관의 관장에게 카뮈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의 책상 맞은편 벽에 붙여 놓은 인용문을 가리켜 보일 뿐.

“여러 사람들과 여러 인간사회들이 이곳에서 일어났다가 스러졌다. 정복자들은 이 고장에다가 졸병(卒兵)급 문명의 자취를 찍어 놓았다. 그들은 위대함에 대하여 저속하고 우스꽝스러운 관념을 지니고 있었으며 정복한 땅의 넓이로 제국의 위대함을 가늠했다. 신기한 것은 그들 문명의 폐허가 그들의 이상(理想)의 부정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이다.”(‘제밀라의 바람’)


▲ 앙드레 지드의 소설 '배덕자'의 무대가 된 도시 비스크라
이튿날 나는 거만한 문명의 ‘부정’과도 같은 ‘사막의 열쇠’ 비스크라를 향해 남으로 수백 킬로를 달렸다. 지드는 카뮈가 태어나기도 전인 1893년에 11월에 처음으로 알제리를 방문한 이래 근 반세기에 걸쳐 이곳을 되풀이하여 찾았다. 그 자취는 소설 ‘배덕자’, 감동적 산문시 ‘지상의 양식’, 회고록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그리고 여행 노트 ‘아민타스’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남았다. 남으로 내려갈수록 초원지대는 사라지고 엉겅퀴만 드문드문 먼지를 쓰고 웅크린 사막. 문명에 대한 집요한 부정.


▲ 김화영 교수가 알제리의 사막에서 만나 아이들.
지드가 “마침내 바위가 열린다. 이것이 문이다”라고 말했던 엘 칸타라의 협곡을 통과. 첫 오아시스 마을이다. 엘 우타야의 소금 산과 은빛 소금의 호수를 지나면 곧 비스크라. 200만 그루의 야자나무가 광막한 바다를 이루는 도시. 지드의 문학 속에서 가장 이국적 매혹을 자아내는 곳이다.

호텔에 짐을 풀고 빈속을 채울 겸 시내로 나섰다. 길가에서 오래된 느낌의 어느 공원 하나를 발견. 이곳이 혹시 ‘배덕자’에서 주인공이 머물렀던 호텔 앞의 그 ‘길쭉한’ 공원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지금은 앙드레 지드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 도시에서 우연은 나를 문득 그의 문학의 한 심장부로 곧장 인도했다. 그 공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온실처럼 덥다. 그 한쪽 우거진 숲에 묻힌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겉만 교회일 뿐 도서관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배덕자’의 첫머리에서 주인공 미셸과 그의 아내 마르슬린이 묵었던, 아니 지드와 그의 신부 마들렌이 묵었던 호텔이 그 공원 건너편에 그대로 있다고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그 도서관의 사서였다.

소설의 주인공은 ‘거의 다 죽다시피 된’ 병든 몸으로 비스크라에 도착한다.

주인공이 든 아파트는 “거의 한 개의 테라스에 지나지 않았다. 그 테라스! 거기에 내 방과 마르슬린의 방이 있었다. 제일 높은 곳에 이르면 눈 아래 집들 너머로 종려나무가 보이고 종려나무 너머로는 사막이 보였다. 테라스의 또 다른 편은 길쭉한 마을의 공원에 접해 있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 지드가 '지상의 양식'에서 감탄한 엘 칸티라의 바위문
‘배덕자’, ‘지상의 양식’, 그리고 ‘한 알의 밀알…’의 화자는 모두 지드 자신의 한 모습이다. 그는 바로 이 호텔, 이 공원, 이 거리, 이 도시, 이 인근의 여러 오아시스 마을에서 비로소 죽음으로부터 헤어나 싱싱한 생명의 ‘맨발’을 발견한다. 그리고 외친다. “나타나엘이여, 내 너에게 열정을 가르쳐 주마!” 아랍 소년 바시르, “웃을 때에 굉장히 흰 이빨이 드러나 보였다. 그는 장난으로 피 흐르는 상처를 핥았다. 그의 혓바닥은 고양이 혓바닥처럼 장밋빛이었다. 아 아 얼마나 건강한 놈이냐! 이 작은 몸뚱이의 건강.” 이때부터 지드의 관능은 잠을 깬다.

동성연애자 지드는 소년에게서 생명의 빛을 보고 절규한다. “중요한 일은 죽음의 날개가 나를 스쳤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대단히 놀라운 일로 되었다는 것이다.”


▲ 김화영 고려대 불문학 교수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원 바로 건너편에 아주 오래된 건물이 하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길과 공원 쪽으로 한껏 멋을 낸 회랑이 나 있고 그 한가운데 정문엔 판자에 못이 박혀 오랫동안 폐쇄된 채인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가까이 가 보니 정문 옆 벽의 검은 대리석 판에 새긴 ‘호텔 뒤 사하라’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버려진 지 20년. 이곳은 원래 ‘백인 신부들의 집’이었다. 2층 테라스 쪽으로 난 세 개의 방은 라비즈리 추기경을 위해 마련한 아파트였으나 오기도 전에 사망하였으므로 지드가 이 호화로운 방들을 쓰게 된 것이었다. 그 추기경의 침대에서 일어난 관능적인 일들을 여기서 자세히 말할 생각은 없다.

나는 비스크라 인근의 오아시스 마을들을 찾았다. 셰트마, 드로흐, 우마슈…. 키 큰 종려나무들과 토담 아래 흐르는 섹히아에 손을 적신다. 물은 따뜻하고 부드럽다. 삶처럼. 인적 없는 골목에서 소년 하나가 나타나 까만 눈으로 쳐다본다. 오아시스의 환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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