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보르헤스
▲ 부에노스 아이레스 거리를 산책하는 보르헤스. | |
환상과 사실이 뒤섞인 환상적 사실주의를 주창해 20세기 소설 미학에 새 장을 열었다.
1899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탄생한 작가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청소년기를 보낸다. 1923년 고향으로 돌아온 작가는 이듬해 첫 시집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를 내면서 시인으로 출발했으나 1935년 소설집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출간하면서 소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책을 읽은 데다 유전적 요인으로 30대 후반부터 서서히 시력을 상실해 인생의 후반부를 암흑세계에서 지내게 된다. 1937년 도서관에 처음 취직한 이래 평생을 사서로 지낸 그는 1955년부터 20여년 동안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으로 재직했다.
그의 소설집 ‘픽션들’은 경이롭고 충격적인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바벨의 도서관’은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도서관을 선택한다. 우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도서관에는 모든 책들의 가이드 같은 ‘책 중의 책’(=진리)이 존재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찾지는 못한다. 인간은 개별적인 책으로만 접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대적인 진리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원형의 폐허들’의 주인공은 꿈을 꾸면서 인간을 만들어낸다. 가상으로 만들어진 그 인간은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다. 어느날 주인공의 신전에 불이 나는데, 자신의 몸도 불에 타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 또한 누군가의 꿈에 의해 만들어진 가공의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이 소설은 우리가 확고부동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자아와 세계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픽션들' 보르헤스
보르헤스 문학의 맥박은 탱고에 실렸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 관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그는 인간의 살과 뼈가 부딪치고 땀냄새가 풍기는 탱고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이곳은 유럽 이민이 건설한 도시다. 신대륙에서 새 삶을 찾으려던, 혹은 새 운을 만날까 기대하던 사람들의 좌절과 욕망을 한데 버무린 음악 탱고…. 보르헤스의 청년시절은 탱고의 시대였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해질 무렵과 밤이 없다면 탱고는 만들어질 수 없다.” 그렇게 탱고를 품었던 작가는 탱고 가사를 쓰기도 했다.
고층건물이 있는 도심에서 남쪽으로 달리면 ‘탱고의 거리’ 보카지구가 나온다. 보르헤스의 말대로, 황혼이 드리울 무렵이 되자 돌로 포장된 좁고 고풍스런 거리에서 결렬한 리듬과 관능적인 몸짓이 어우러지는 즉석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카를로스 가르델 같은 대가수를 낳았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대형 극장이건 조그만 광장이건 매일 밤 탱고 공연이 끊이지 않는다. 보르헤스가 단골로 찾은 카페 토르토니(Tortoni)에는 카를로스 가르델, 시인 알폰시나 스토르니 등과 보르헤스가 탁자에 앉아 있는 밀랍인형을 구경할 수 있다.
보르헤스가 소설을 쓴 단초는 그의 작품 세계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193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는 아파트 계단을 뛰어올라가다가 창문에 머리를 부딪혀 한 달간 사경을 헤맸다. 회복기에 접어든 보르헤스는 혹시 지적 능력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빠졌고, 시험 삼아 단편소설을 써보기로 했다. 이 단편들이 오늘의 보르헤스를 만들어낸 명작들이 되었다. 거울과 미로, 도서관과 꿈 등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는 눈을 제공한 보르헤스는 20세기 현대소설의 탈출구를 열었다.
50대 이후 보르헤스에게는 훤한 대낮도 탱고가 흐르는 밤이었다. 56살에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에 임명됐지만, 그때는 이미 시력을 거의 잃어 책을 읽을 수 없게 된 상태였다.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심경을…’(‘축복의 시’). 그토록 좋아했던 책의 바다에서 단 한줄의 글도 읽을 수 없는 극단적 불행을 ‘축복’이라고 노래한 보르헤스의 심정을 헤아릴 길이 없다.
눈먼 보르헤스가 걸었던 부에노스 아이레스 거리를 부인 마리아 코다마(68)씨와 함께 걷는다. 한낮의 더위가 식어가는 저녁 8시 쯤 되자 애완견을 데리고 거리로 나선 시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보르헤스가 살았던 마이푸 994번지에는 그가 즐겨 걸었던 지역을 표시한 지도가 거리에 붙어 있었다. 유럽풍 고옥(古屋)의 현관 아치와 격자창들을 느끼기 위해 작가가 이따금 걸음을 멈추곤 하던 거리는 수십년 전 정취를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단편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이 거리를 걸으며 구상한 것은 아닐까. 작품에서 계속 왼쪽으로만 갈라지는 길을 따라 들어가 모든 사람들이 길을 잃는 미로(迷路)로 연결된다는 내용은, 실명(失明)으로 거리를 걷는 작가를 연상시킨다.
“남편은 노란색과 파란색, 그리고 초록색 외엔 온통 어둠뿐인 암흑의 세계에 빠졌죠. 그렇지만 한번 산책에 나서면 코스를 정하지 않고 몇 시간이고 걸었어요. 수십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책에 나선 것은 이 도시의 매혹을 접하지 않고서는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50대 중반에 실명한 보르헤스의 대형사진 앞에 선 마리아 코다마. 그녀는 30여년 동안 보르헤스의 눈이 되어 주었다. | |
열두살 때 보르헤스를 만나, 비서이자 연인으로 30년을 작가 곁에 있던 코다마씨는 87세의 보르헤스와 결혼했다. 보르헤스는 결혼 두 달 후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거의 20년이 흘렀지만, 코다마는 지금도 보르헤스와 함께 걷던 거리 모퉁이마다 추억이 생생하다. 현재 보르헤스 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그녀는 보르헤스의 손때가 그대로 묻어 있는 지팡이들을 보여주며 “보르헤스의 분신”이라고 했다.
“비록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거리의 건물 색깔이나 특징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그 동네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죠. 산책하며 작품의 영감을 얻곤 했어요.”
투쿠만가 840번지 생가터는 ‘카페 리테라리오(Cafe Literario)가 들어서, 매주 수요일 저녁 문학토론이 벌어지는 문학카페로 변신했다. “아르헨티나에서 보르헤스를 읽고 토론한다는 것은 교양인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통용된다”(가르시아 다리스 살바도르대 교수) “철학·건축·영화 등 문화계 전반에 걸쳐 20세기 작가 중 가장 인용이 많이 되는 작가”(문학평론가 파트리시오 로이사가씨). 이제 신화가 된 보르헤스는 오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어둠에 껴묻혀 숨쉬고 있다.

▲ 부에노스아이레스 남부에 있는 보카 거리. 즉석에서 탱고 공연이 벌어지기도 한다. 보르헤스는 이 거리를 산책하며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아르헨티나)=최홍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