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이방인' 카뮈 … 알제 티파사에서

은빛 지중해, 태양이 작열하는 거리
가난한 다섯식구 살던 집 지금은 카페로
글·사진=김화영 고려대교수·불문학
입력 : 2005.05.19 18:57 23' / 수정 : 2005.05.19 19:46 49'

알제에 도착하던 날 한국 대사관저의 간단한 파티에는 알제의 여러 문인들, 그리고 테시에 대주교가 왔다. 50년대 알제 서부 벨쿠르 동네에서 부제로 일하신 그분은 카뮈가 어린 시절에 살던 옛 집을 알고 있었다. 이튿날 그분의 안내로 서민들이 사는 벨쿠르 거리 리용가 124번지를 찾아갔다. 거리 이름도 지금은 독립전쟁 영웅의 이름을 따서 모하메드 벨루이자드 가. 소설 ‘이방인’에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난 뫼르소가 일요일 날 오후, 발코니에 나앉아 거리를 내다보며 무료하게 보내는 장면이 길게 묘사되어있다.

아마 거기일 것이다.

‘맞은 쪽 보도 위에 담배 가게 주인이 의자를 문 앞에 내다놓고 등받이 위로 두 팔을 고인 채 거꾸로 타고 앉아 있었다.’(‘이방인’중)

아파트의 파란 덧문 사이로 지금은 카페가 된 그 담배 가게의 아랍어 간판이 내다보였다. 어둑한 계단을 올라가면 왼쪽 첫 문. 식당 하나 거실하나, 침실 하나, 방 3개에 카뮈네 가난한 다섯 식구가 살았다. 지금 주인 슈누프 무스타파는 1951년 이 집에서 태어났단다. 2003년 지진으로 많이 파괴된 이 동네에서 이제 무스타파를 제외하고 알베르 카뮈가 누구인지 아는 아랍인은 없다. 뫼르소는 자기가 살던 동네에서도 이방인이 되어 버렸다.

카뮈의 ‘티파사에서의 결혼’ 첫 구절이다. 오래 전부터 이 문장은 에게 해의 섬들처럼 머리 속에 떠돌고 있었다. 늘 그 티파사에 가고 싶었다. 거기에 가면 매 순간이 돌 더미 속에서 푸드득 튀어 오르는 새처럼 돌연한 빛이 되어 번뜩일 것 같았다.

티파사로 가는 길은 멀었다. 1974년 봄, 프랑스에서 카뮈에 대한 학위논문을 발표하고 나서 귀국 직전, 티파사에 가기 위하여 파리 주재 알제리 대사관으로부터 입국 비자가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허사가 되고 말았다. 알제 대학의 강연 초청장도 무용했다. 당시 한국과 알제리 인민공화국 사이에는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알제시의 높은 곳인 프란츠 파농 대로에 우뚝 솟은 엘 오라씨 호텔의 객실에 앉아 이 글을 쓴다. 봄바람이 가끔 흔들고 지나가는 커튼 사이로 저 아래 알제 시가 전체가 하얀 레고를 조합해 놓은 듯 바다를 향해 경사를 이루며 펼쳐져있다. 그 앞으로 ‘세상에서 가장 선명한 물굽이’에 안긴 지중해 바다는 주름하나 없다.

즉시 알제에서 서쪽으로 해안을 끼고 티파사를 향해 달렸다. ‘내게는 그 69킬로미터의 길에서 어느 곳 하나 회상과 감동으로 뒤덮여있지 않은 데가 없다’고 2차대전 직후 ‘티파사에 돌아온’ 카뮈가 말했던 길이다. 벌써부터 갈대밭 저쪽 파란 바다에 와 엎드린 ‘이끼 낀 신(神)’ 슈누아가 눈에 들어온다. 고요한 마을을 지나서 유적지 안으로 몇 발자국 들여놓자 벌써 황갈색의 해묵은 페허의 돌과 꽃들의 ‘혼례‘잔치다. 보라색 엉겅퀴 꽃들과 노란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계단을 올라 바다 쪽으로 나서자 오른 쪽에는 슈누아 산의 ‘시커먼 등뼈’, 동쪽 산등성이 쪽에는 등대가 보인다.


▲ 카뮈의 산문‘티파사에서의 결혼’을 낳은 티파사의 고대 유적지.
‘결혼. 여름’을 쓰던 1936년의 젊은 카뮈는 지금의 유적지 공식적 입구 쪽이 아니라 마을 초입 어항 곁으로 난 폐허로 들어온 것 같다. ‘항구의 왼쪽으로 난 마른 돌계단이 유향나무와 금작화들 사이의 페허로 인도한다. 길은 조그만 등대 앞을 지나서 들의 한복판으로 빠져 들어 간다’고 썼으니 말이다.

지금 등대 앞길은 막혀있다. 그 사이에 알제리 독립 전쟁이 있었고 카뮈는 1962년 알제리가 독립하기 2년 전에 세상을 떴다. 그리고 회교 원리주의 ‘테러리스트’들과 정부군 사이의 피아를 구별하기 어려운 살육의 공포가 불과 3년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제 알제리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고대 로마의 폐허에도, 최근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폐허에도 봄은 잊지 않고 돌아왔다.

‘폐허와 봄의 결혼 속에서 폐허는 다시 돌이 되어, 인간의 손길로 닦여진 저 반드러운 손때를 이제는 다 버리고 자연 속으로 되돌아왔다. 탕아의 귀향을 위하여 어머니 대자연은 꽃들을 아낌없이 피워놓았다.’

나는 구태여 기행문을 쓸 필요도 없다. 내가 좋아하는 카뮈의 문장을 옮겨놓기만 하면 그대로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러나 변한 것이 있다. 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풍경 속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 속에,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이 넓고 찬란한 고대 도시 속에 서 그날 아침나절 내가 만단 사람은 모두 열 사람이 채 되지 않는다. 이 나라는 오래 동안 관광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지냈던 것이다. 폐허 속에 서있는 눈에 익은 카뮈의 문학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나는 사람들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거리낌 없이 사랑할 권리다.’


▲ 글·사진=김화영
고려대교수·불문학
‘티파사에서의 결혼’에서 인용한 말이다. 그런데 알제리아가 독립하여 프랑스인들이 모두 본토로 쫓겨 가고 아랍 사람들의 나라가 된 이후, 누군가가 ‘CAMUS’라는 이름을 파서 그 일부분을 지워 놓았다. 이것은 사람의 손이 한 일이지만 자연도 세월을 따라 변했다. 카뮈는 땅에서 파내놓은 석관들을 보면서 ‘옛날엔 그 석관들 속에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샐비어와 향 꽃 무가 그 속에서 자란다’고 썼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나서 내가 그곳에 갔을 때 석관 속에는 노란색 들꽃이 소복하게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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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카뮈와 알제리

박해현기자 hhpark@chosun.com
입력 : 2005.05.19 18:58 02'


 

“나는 언제나 테러를 규탄했다. 나는 알제의 거리에서 맹목적으로 자행되고 언젠가 내 어머니와 가족을 덮칠 테러리즘을 규탄해야만 한다. 나는 정의를 믿지만, 정의 앞에서 내 어머니를 보호할 것이다.”

프랑스의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난 작가 알베르 카뮈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 주창한 알제리 민족이란 개념에 의구심을 품었다. 알제리는 유태인, 터키인, 그리스인, 이탈리이안, 아랍인, 프랑스인 등 다양한 민족의 이민자들이 흘러들어와 공동체를 형성했기 때문에 알제리 단일 민족론은 성립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프랑스인들과 이슬람 교도들이 통합된 알제리 공화국을 수립하고, 프랑스 연방의 일원이 되는 제3의 해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카뮈는 프랑스와 알제리 양쪽에서 모두 외면당했다.

카뮈의 대표작 ‘이방인’은 죽음의 숙명을 지녔으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무용한 정열을 그렸다. 실존의 부조리를 탐구한 소설이기 때문에 실존주의 문학의 상징적 소설로 꼽힌다.

지중해의 푸른 물결과 작열하는 태양, 눈부시게 빛을 반사하는 흰 벽의 집이 형성하는 풍경 속에서 전개되는 이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는 카뮈처럼 알제리의 프랑스인이다. 그는 해변에 산책을 나갔다가 한 아랍인과 말다툼을 벌이게 되고, 그 아랍인이 꺼내든 단도를 꺼내들자 본능적으로 총을 발사해 그를 죽인다. 뫼르소는 법정에서 “단지 태양때문에”라며 변호하지만, 그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이방인이 된다.

뫼르소는 사형 집행일 전날 밤 감옥 창살 너머에서 풍겨오는 별, 흙, 소금 냄새를 맡으면서 멀리서 울리는 뱃고동 소리를 통해 대우주의 품 속으로 새로운 여행을 떠난다는 환상 속에서 죽음을 넘어서는 삶의 쾌감을 만끽한다. 카뮈의 산문 ‘티파사에서의 결혼’은 매혹적인 문체 미학을 통해 신화와 현실이 공존하는 지중해가 바로 카뮈의 푸르디 푸른 영혼을 낳았음을 보여준다. 지중해의 자연과 인간이 결합하는 신성한 공간에서 정오의 태양은 강렬한 빛의 세례를 선사한다. 카뮈의 문학은 그 백색의 풍경 속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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