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말 한 마디가 자녀의 인생을 바꾼다


                     사마광·주희 지음/ 명진출판 







 


백이 숙제의 고집을 버려라


동방삭∙이 자식을 훈계한 글




 


아들아.




지혜로운 사람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도中道를 따르는 처세를 으뜸으로 여긴단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중도를 따를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시킨다.




은나라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성품이 고상하고 순결하였다. 하지만 어질고 덕이 뛰어난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았고, 좋은 친구가 아니면 사귀지 않았으며, 부패하고 타락한 조정에서는 벼슬하지 않았을 정도로 너무나 고집스러웠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처세와 도량度量은 지나치게 졸렬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유하혜柳下惠는 모든 일에서 자신의 지조를 끝까지 지켜 나가는 군자였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니, 네가 설령 내 곁에서 발가벗고 있다고 한들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ꡑ




그는 항상 자신의 원칙과 신념을 갖고 행동했다. 그랬기 때문에 나쁜 임금을 섬기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으며, 자신의 관직이 낮은 것도 비관하지 않았다. 화목하고 평온한 세상을 만나든 어지럽고 살기 힘든 세상을 만나든 늘 변함없는 자세를 유지했다. 이런 점에서 유하혜의 처세는 훌륭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른이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란다. 어떤 때는 하늘을 나는 용처럼 모습을 한껏 드러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물 속에 숨은 이무기처럼 그 모습을 조용히 감출 줄도 알아야 한다. 만물의 변화와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처신할 뿐 고정불변의 견해만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관리로 일하면서 초야에 묻힌 군자처럼 욕심부리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처신하여라. 비록 크게 출세하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재난은 피할 수 있다. 재주를 뽐내면서 자신을 지나치게 과시하면 오히려 신변의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명성을 얻으면 저절로 광채가 나는 법이다. 많은 사람의 신망을 얻으면 주변에 사람들이 늘 머물게 되어 일상이 바쁘게 된다. 반면에 고고한 자세로 생활하면 다른 사람과 쉽게 화합을 이루지 못한다.




아들아, 모든 일에는 여지를 남겨두어라. 막다른 골목에 몰리지 않게 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너는 쉽게 곤경에 빠지고 말 것이다. 부디 명심하여라.




∙동방삭 東方朔. B.C 154년~B.C 93년. 그는 박학할 뿐 아니라 다재다능했으며 특히 문학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해학과 재치가 뛰어난 사람으로서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먹어 죽지 않고 장수했다는 속설 때문에 ‘삼천갑자 동방삭’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호탕한 의리보다 신중한 청렴함을 배워라


마원∙이 조카 마엄馬嚴과 마돈馬敦을 훈계한 글






엄과 돈, 보아라.




너희가 혹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듣거든 마치 부모의 이름을 들은 것처럼 귀에 들리더라도 입에 담지는 말기 바란다.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입에 담기 좋아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마구 정치와 법을 입에 담는 것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다. 나는 내 가족이 그런 언행을 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시집가는 딸에게 반복해서 타이르듯이 내가 너희들에게 거듭 얘기하는 이유는 너희가 이 말을 영원히 잊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마음에 깊이 새겨두길 바란다.




용백고龍伯高는 성품이 곧고 신중하다. 어지러운 말을 입에 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겸손하고 청렴하며 공정하고도 위엄이 있다. 내가 그를 애지중지하니 너희도 그를 본받기 바란다.




두계량杜季良은 성격이 호방하고 의리가 있다. 다른 사람의 근심을 함께 걱정하며 남의 즐거움도 함께 즐거워한다. 또한 현명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모두 친분을 쌓아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의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빈소를 찾아 조의를 표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아끼고 좋아할지언정 너희들은 그를 본받지 말기 바란다.




옛말에 ‘따오기를 그리려다가 오리를 그린다.‘는 속담이 있다. 용백고를 본받고자 노력할 경우 설령 그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착실하고 신중한 사람은 될 수 있다. 반면 ‘호랑이를 그리려다가 개를 그린다.‘는 속담이 있다. 두계량을 본받으려다 실패한다면 자칫 경박한 사람으로 전락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두계량을 본받지 말라는 것이니 새겨듣도록 하여라.




∙마원 馬援. 동한 시대 무릉(茂陵) 사람이다.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에 벼슬하여 명장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친구로부터 칭찬을 받아라




정현∙이 아들 정익은鄭益恩을 훈계한 글






아들아, 들어보아라.




우리 집은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부모님과 동생들은 내가 학문에 힘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학문의 뜻을 접지 못했다. 하여 그나마 몸담고 있던 관직을 사직하고 주周나라와 진秦나라를 돌아다니면서 학문을 익혔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나는 가르침을 간곡히 청하여 육경六經을 공부하고 예로부터 전해오는 글을 대략이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때로는 위서緯書와 도참설圖讖說에 관한 책도 읽어보았다. 마흔 살이 넘어서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부모님을 봉양하고, 논밭을 빌려 농사를 지으면서 가족과 화목하게 지냈다.




훗날 환관이 권력을 휘두를 때 당파를 만들었다는 죄목에 연루되어 14년 동안이나 벼슬살이를 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와 유도과有道科에 추천을 받았고, 대장군이 삼공三公의 자리로 초청했으며, 공거부公車府의 부름을 받기도 했다. 나와 함께 관직에 오른 동료 중에는 재상이 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본래 관직에 뜻이 없었다. 오히려 옛 성현의 말씀을 후대에 전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여러 가지 학설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에 조정의 부름을 한사코 사양했다. 그러던 가운데 황건적의 난을 당해 남북을 오가며 유랑하고, 고향으로 오니 내 나이 벌써 일흔 살에 이르렀구나.




이제 삶의 궤적을 더듬어 되돌아보니 살아오는 동안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구나. 예법에 따라 가사家事를 모두 너에게 물려주고 나는 그 동안 못다 이룬 책을 완성하려고 한다. 임금의 부름을 받거나, 조문을 가거나, 성묘하는 일이 아니라면 집을 나서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집안의 대소사는 모두 네가 책임지기 바란다.




너는 군자의 도리를 구하는데 힘쓰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고, 경거망동한 일을 삼가야 한다. 행동거지는 공손하고 신중하게 하고, 덕행이 있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 동료와 친구로부터 칭송을 받으면 명예가 따를 것이고, 뜻을 세우면 덕행을 이룰 수 있다. 자식이 명예를 얻으면 부모도 영광스럽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기 바란다.




나는 비록 높은 관직에 올라서 많은 녹봉을 받은 적이 없다. 하지만 학문을 추구하는 마음만은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학에 대한 연구와 글쓰기를 즐겨 하였다. 그래서 자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비의 모습을 보여줄 수는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의 묘를 수리하지 못할까 걱정이다. 또한 내가 아끼던 책이 대부분 훼손되었는데 필사본을 만들어 너희에게 전해주지 못할까 걱정된다. 서산에 기우는 해와 같은 몸으로 남은 일을 완수할 수 있을지 두렵다.




집안 형편은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으니, 계절에 맞춰서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면 굶주림과 추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식생활을 검소하게 하고 소박한 옷을 입는다면 나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아들아, 내 말을 명심하여 소홀히 여기지 말길 바란다.






∙정현 鄭玄. 동한 시대 북해군(北海郡) 고밀(高密)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태학(太學)에서 공부했다. 마융(馬融)을 스승으로 받들며 그의 학문을 모두 전수 받았다. 평생을 은둔하며 경전을 연구해 수많은 저술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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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에어/ 샬럿 브론테 지음 / 민음사 











 


 


 


 


 


제1장






그날은 산보가 가당치 않은 날씨였다. 우리는 오전 중 한 시간쯤 잎이 진 관목 사이를 서성거린 터였다. 그러나 점심을 마친 무렵부터(리드 부인은 손님이 없을 때는 일찌감치 식사를 하였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컴컴한 구름과 더불어 몸에 스미는 비를 몰고 왔기 때문에 그 이상 집 밖에서 바람을 쐰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나는 그것이 기뻤다. 오랫동안 산보하는 것이 나는 싫었다. 특히 쌀쌀한 오후의 산보가 그랬다. 손발이 온통 얼어붙고, 유모인 베시의 잔소리에 속은 상하고 또 일라이자, 존, 조지아나에 비해서 체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에 기가 죽은 채 썰렁한 황혼 녘에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방금 말한 일라이자와 존과 조지아나는 이제 객실에서 저희 엄마를 둘러싸고 있었다. 리드 부인은 난롯가의 소파에 누워 있었고, (당장엔 싸움도 않고 울지도 않는) 귀염둥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아주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만은 이렇게 말하면서 좌중에 끼워주지를 않는 것이었다.




"너를 멀리하는 것이 속으로는 안되었다. 그러나 네가 좀 더 상냥하고 천진한 성품을 가지고, 곰살궂고 싹싹한 태도를 취해서, 이를테면 보다 밝고 순진하고 꾸밈이 없는 어린이가 되려고 진정으로 애쓴다는 것을 베시에게 전해 듣거나 실지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태평스럽고 행복한 아이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으로부터 너를 제외할 줄 알아라."




"제가 어쨌다고 베시가 그랬기에요?" 하고 나는 물었다.




"제인, 생트집이나 하고 이것저것 귀찮게 물어대는 아이에겐 나는 정나미가 떨어진다. 더구나 어린아이가 어른한테 그렇게 덤벼드는 게 아니다. 어디 가서 앉으려무나, 사근사근하게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입을 봉하고 있어."




객실 옆에는 조그만 조반 식당이 있었다. 나는 살며시 그 식당으로 들어섰다. 거기엔 책상이 있었다. 나는 그림이 많이 들어 있는 책을 하나 골라잡았다. 그러고는 창 밑의 걸상으로 올라가 터키인처럼 발을 모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붉은 모직의 커튼을 전부 내리니 이중으로 으슥한 곳에 숨어 있는 셈이었다.




오른쪽으로는 붉은 커튼 자락이 앞을 막았지만 왼쪽은 투명한 유리창이어서 그 창은 음산한 2월의 날씨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기는 하였으나 완전히 차단시켜 주지는 않았다. 책장을 넘기면서 이따금씩 나는 겨울 오후의 형세를 살펴보았다. 먼발치로는 안개와 구름이 어슴푸레 보였고 가까이로는 젖은 잔디와 폭풍에 시달린 관목이 보였는데 길고 을씨년스러운 질풍을 맞은 빗줄기가 끊임없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보고 있던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읽고 있던 것은 비윅의 『영국 조류사(鳥類史)』였다.



대체로 본문의 설명에는 흥미가 없었으나 어린 나로서도 그냥 넘겨버릴 수가 없는 서론의 페이지가 있었다. 거기에는 바닷새의 서식지라든가 바닷새만이 살고 있는 "외진 바위산과 돌출부", 남쪽 끝인 린드니스나 네이즈에서 노스케이프에 이르기까지 조막섬(小島)이 산재해 있는 노르웨이 해안 등에 대해 적혀 있었다.




크나큰 소용돌이가 치는 북해가




세상 끝 벌거숭이 외진 조막섬들을 씻고




대서양의 파도는 폭풍 휘몰아치는




헤브리데스 섬 사이로 밀려든다.






나는 또한 라플란드, 시베리아, 슈피츠베르겐, 노바 젬블라,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등의 황량한 해안선을 다룬 부분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북극권의 광활한 벌판, 쓸쓸한 공간의 황량한 지역, 눈과 얼음의 저장지, 그곳에선 몇백 년 동안의 겨울이 쌓아놓은 단단한 빙원(氷原)이 알프스 산을 포개어놓은 듯 우뚝우뚝 솟은 채 극지를 에워싸고 있는 혹한의 몇 배나 되는 강추위를 한 점에 모아놓고 있다." 죽음처럼 하얀 그 지방에 대해 나는 나대로의 짐작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소견에 몽롱하게 떠오르는 반쯤 납득이 간 생각처럼 막연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야릇하게 인상적인 것이었다. 이 서론에 담긴 말들은 뒤에 나오는 그림에 연결되어 있었고, 파도와 물보라가 휘몰아치는 바다에 홀로 서 있는 바위와 쓸쓸한 바닷가에 좌초된 난파선, 그리고 막 침몰해 가고 있는 난파선을 구름 사이로 엿보고 있는 차갑고 섬뜩한 달에 함축성을 부여해 주었다.




비명(碑銘)을 새겨 넣은 묘석이 있고 문과 두 그루의 나무, 무너진 담장에 둘러싸인 나지막한 지평선, 그리고 초저녁임을 말해 주는 갓 떠오른 초승달이 걸려 있는 조용하고 적막한 묘지, 그 그림에 어떠한 감정이 붙어다닌 것인지 나도 모른다.




바람 한 점 없이 잠잠한 바다 위에서 꼼짝 못하고 있는 두 척의 돛배 그림을 나는 바다의 귀신이라고 생각했다.




마귀가 도둑이 진 짐을 등 뒤에서 밀어붙이고 있는 그림은 질겁을 하며 책장을 넘겼다. 정말 무서운 그림이었다.




뿔이 달린 시꺼먼 괴물이 바위 위에 걸터앉은 채 교수대를 에워싸고 있는 군중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그림이나 제각기 이야깃거리를 지니고 있었다. 나의 미숙한 이해력과 불완전한 감정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점이 많았지만 굉장히 흥미로웠다. 마치 겨울밤, 베시가 기분이 좋을 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흥미진진하였다. 베시는 이럴 때 육아실 난롯가에 다리미판을 들여놓고 그 둘레에 우리들을 앉혀놓고는 리드 부인의 레이스 주름 장식을 세우거나 나이트캡 테두리에 주름을 잡으며 옛날이야기나 더 옛날의 민담, 혹은 (이것은 뒷날 알게 된 것이지만) 『파멜라』나 『모어랜드 백작 헨리』 등에서 따낸 연애담이나 모험담을 열심히 귀 기울이고 있는 우리들에게 들려주곤 하였다.




비윅의 책을 무릎에 올려놓은 나는 그때 행복하였다. 적어도 내 나름대로는 행복하였다. 나는 그저 방해받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훼방꾼은 너무나 빨리 나타났다. 조반실의 문이 열렸다.




"왁! 청승덩어리!" 하는 존 리드의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잠잠해졌다. 방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요게 어디 간 것일까?" 하는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일라이자! 조지아나! (이렇게 여동생들을 부르면서) 제인이 여기 없어. 비가 오는데 뛰쳐나갔다고 엄마한테 말해. 고약한 것 같으니라고!"




'커튼을 내리길 참 잘했다!'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렇게 숨어 있는 곳을 들키지 말아야 할 텐데 하고 간절히 바랐다. 존 리드가 찾아낼 것 같지도 않았다. 머리도 눈치도 둔한 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 일라이자가 문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더니 말하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창 근처에 있어."




나는 곧 스스로 나와버렸다. 존에게 끌려 나갈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쳤기 때문이다.




"왜 그래?" 하고 쭈뼛쭈뼛 겁먹은 듯 나는 물었다.




"왜 그러세요, 도련님? 이렇게 말하란 말이야. 이리 와." 그는 안락의자에 앉더니 앞으로 와 서라는 몸짓을 하였다.




존 리드는 열네 살 먹은 학생이었다. 그러니까 열 살이었던 나보다 네 살 위였다. 나이에 비해 크고 뚱뚱했는데 피부색은 우중충하니 건강치 못한 듯한 빛깔이었다. 넓적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큼직하였고 팔다리도 손발도 모두 굵직하였다. 끼니마다 으레 포식을 하기 때문에 걸핏하면 골을 내기 일쑤였고 눈도 몽롱하게 흐릿하고 볼때기의 살도 축 늘어져 있었다. 지금쯤 마땅히 학교엘 가 있어야 했지만 "허약한 체질 때문에" 어머니가 집에 데려다놓은 지 이제 한 달인가 두 달이 된 터였다. 교사인 마일스 씨는 집에서 보내주는 케이크나 사탕 과자의 양을 줄이기만 하면 건강은 걱정이 없다고 단언했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그렇듯 가혹한 의견은 외면해 버리고 아들의 안색이 나쁜 것은 지나친 공부와 집 생각 때문일 것이라는 우아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존은 어머니와 누이들에게도 별 애정을 갖고 있지 않았고 내게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를 보면 골탕을 먹이고 괴롭히곤 했는데 그것도 일주일에 두서너 번, 혹은 하루에 한두 번 정도가 아니라 계속 그러는 것이었다. 내 신경 전체가 온통 그를 두려워했고 그가 가까이 오면 뼈에 붙어 있는 모든 살점이 움츠러들었다. 그가 불러일으키는 공포로 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기가 일쑤였다. 그에게 협박을 받거나 해코지당해도 호소할 길이 내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녀들은 내 편을 들어줌으로써 도련님의 비위를 상하게 하기를 꺼려 했고 리드 부인은 그런 문제엔 전혀 장님이요 귀머거리였다. 존이 어머니 앞에서 가끔, 그리고 보지 않을 때 훨씬 더 자주 나를 때리고 내게 욕설을 퍼부어도 부인에겐 그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이었다.




늘 그렇듯이 다소곳이 나는 존의 의자께로 다가섰다. 그는 나를 향해 혀뿌리가 상하지 않을 정도로 한껏 혓바닥을 삼 분쯤 내밀고 있었다. 곧 나를 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의 주먹질을 겁내면서 나는 곧 내게 주먹을 안겨줄 그의 진절머리 나는 추악한 얼굴을 곰곰이 바라보았다. 내 표정에서 그런 내 마음을 엿본 것이리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느닷없이 그는 나를 세게 쳤다. 나는 비틀거렸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의 의자에서 한두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조금 전에 어머니한테 버릇없이 말대답을 했지. 또 커튼 뒤에 몰래 숨어 있었지. 그리고 그 눈초리는 또 뭐야. 그래서 맞은 거다, 요 계집애야!"




존 리드의 욕설에는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난 대답은 할 생각도 안 했다. 욕설 뒤에 따라올 주먹질을 어떻게 견디어낼 것인가 하는 걱정뿐이었다.




"커튼 뒤에 숨어서 무엇을 했어?" 하고 그가 물었다.




"책을 읽었어."




"책을 내봐."




나는 창께로 가서 책을 가져왔다.




"네가 왜 우리 책을 마구 꺼내가는 거야. 엄마가 그러는데 넌 군식구래. 넌 돈도 한 푼 없어. 너의 아버지가 물려준 것이 아무것도 없단 말이다.




사실은 너는 비럭질을 할 처지인 거야. 우리 같은 양갓집 자녀들과 함께 살고, 우리와 똑같은 식사를 하고 또 엄마의 돈으로 옷을 사 입을 처지가 못 돼. 내 책장을 뒤지면 어떻게 되나 본때를 보여줄 테다. 책은 모두 내 것이야. 이 집은 모두 내 것이야. 몇 해 안으로 그렇게 돼. 거울과 창을 피해서 문 쪽으로 가서 서 있어."


처음에는 그의 속셈을 모르고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그가 책을 번쩍 쳐들어 던지려 할 때는 나는 고함을 지르며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날아온 책에 맞아 나는 넘어졌다. 머리를 문에 부딪쳐 다쳤다. 상처에서는 피가 나고 몹시 쓰렸다. 공포심의 고비를 넘기자 다른 여러 감정들이 북받쳐 올랐다.




"고약한 심술쟁이 같으니라고! 꼭 사람 백정 같아. 노예 감독 같아. 꼭 로마의 폭군 황제 같아!"




나는 골드 스미스의 『로마사』를 읽은 적이 있었고, 네로나 칼리굴라 같은 폭군에 대해서 나대로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혼자서 속으로 존을 폭군에 비유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큰 소리로 내뱉을 생각을 하지는 않았었다.




"뭐라고? 뭐라고?" 하고 존은 소리쳤다. "그런 소리를 내게다 대고 해? 일라이자, 조지아나, 지금 한 소리를 들었지? 내 엄마한테 안 이를 줄 알아? 그러나 우선`""?."




그는 무턱대고 내게 달려들었다. 내 머리칼과 어깨를 잡아채는 것을 알았으나 내 편에서도 필사적이었다. 나는 정말로 그의 사람 백정 같은, 폭군 같은 성품을 보게 되었다. 한두 방울의 피가 머리에서 목으로 흘러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고 쓰리고 아팠다. 이 아픔 때문에 공포심은 도리어 누그러진 셈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막아냈다. 두 손으로 어떻게 했는지는 지금 모르겠으나 그는 "요것! 요것!" 하면서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에게는 구조의 손길이 가까이에 있었다. 이층에 가 있는 리드 부인을 부르려고 일라이자와 조지아나가 달려 나갔다. 부인이 나타났고 베시와 하녀인 애보트가 뒤따라왔다. 우리 둘 사이가 떨어졌을 때 내게는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저런! 존 도련님한테 덤벼들다니 무슨 짓이야!"




"이런 꼴은 처음 보겠네!"




그러자 리드 부인도 끼어들었다.




"저 애를 붉은 방에 데리고 가서 가두어놓아."




네 개의 손이 순식간에 나를 낚아챘다. 나는 이층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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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4-12-01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인 에어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자그맣고, 못생기고, 고집센 제인 에어와 나를 동일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이로운삶 2004-12-01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시는 부분이라니 기쁘네요.^^ 게으른 서재에 놀러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지음 / 백선희 옮김/ 문학세계사 


 




 첫날, 그녀가 웃는 걸 보았다. 순간, 나는 그녀가 알고 싶어졌다.


그녀를 알지 못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간다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이었으니까. 나는 언제나 타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내게 다가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학생활이 그랬다. 세상을 향해 나를 열어야지 했으나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일주일 후, 그녀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금세 눈길을 돌리겠지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녀의 눈길은 오래도록 나를 훑었다. 나는 감히 그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발 밑으로 땅이 꺼지는 것 같았고, 숨쉬기가 힘들었다.




도무지 멈출 것 같지 않은 고통이었다. 견디기 힘들었다. 평생 내본 적 없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내게 살짝 손짓하며 웃었다.




그러더니 어느새 남자애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튿날, 그녀가 내게로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인사에 답하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거북해 하는 내가 끔찍이도 싫다.




“넌 다른 애들보다 어려 보여.”




그녀가 말했다.




“실제로 그래. 한 달 전에 열여섯이 되었어.”




“나도. 세 달 전에 열여섯 살이 되었는데. 솔직히 말해봐, 믿어지지 않지?




“응.”




자신만만한 태도 때문인지 그녀는 두세 살쯤 더 들어 보였다. 그 때문에 우리 둘 다 무리에서 튀어 보였다.




“이름이 뭐야?”




그녀가 물었다.




“블랑슈. 너는?”




“크리스타.”




독특한 이름이었다. 감탄해서 또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내가 놀라는 걸 보고 그녀가 말했다.




“독일에서는 드문 이름이 아니야.”




“너, 독일사람이니?”




“아니. 동부 출신이거든.”




“독일어 해?”




“물론이지.”




감탄 어린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잘 가. 블랑슈.”




나는 미처 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미 대강당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큰소리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무리를 향해 걸어갔다.




“벌써 잘도 어울리네.”




어울린다는 말은 내게는 엄청난 의미를 가진 말이다. 나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했으니까. 무리에 잘 어울리는 사람들을 보면 경멸과 질투심 섞인 감정이 들곤 했다.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내가 원해서 혼자라면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설사 금세 다시 외톨이가 되는 호사를 누리게 될지언정 말이다.


나는 특히 크리스타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를 갖는다는 건 나로서는 도무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크리스타의 친구가 된다는 건, 아냐, 꿈도 꾸지 말아야 해.




내가 어째서 크리스타와의 우정을 바라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명확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에게는 무언가가 있어 보였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학 캠퍼스를 막 떠나려는데 웬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런 적이 없었기에 나는 당황했다. 뒤를 돌아다보니 크리스타가 달려오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어디 가?”




나란히 걸으며 그녀가 물었다.




“집에.”




“어디 사는데?”




“걸어서 오 분 거리야.”




“좋겠다!”




“왜? 넌 어디 사는데?”




“말했잖아. 동부라고.”




“설마 저녁마다 거기까지 간다는 얘기는 아니겠지.”




“아니, 맞아.”




“그렇게 먼 곳을!”




“멀지. 기차로 오는 데 두 시간, 가는 데 두 시간 걸려. 버스 타는 시간은 치지 않고도 말이야. 달리 방법이 없어.”




“견뎌내겠어?”




“두고 봐야지.”




그녀를 곤란하게 할까봐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자취 비용을 댈 능력이 없는 게 분명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아래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여기가 네 부모님 집이야?”




그녀가 물었다.




“응. 너도 부모님 집에 사니?”




“응.”




“우리 나이에는 당연한 일이지.”




왜 하필 그런 얘기를 했는지.




그녀가 화들짝 웃었다. 내가 우스운 얘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부끄러웠다.




내가 그녀의 친구가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누군가의 친구라는 건 어떻게 아는 걸까? 분명 어떤 신비스런 기준이 있을 텐데, 한번도 친구를 가져본 적이 없어 알 수 없었다. 이를테면, 그녀는 나를 우습다고 여겼다. 이런 게 우정의 표시일까 아니면 멸시의 표시일까? 그때 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건 내가 이미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통찰력을 동원해 왜 그럴까 생각해보았다. 내가 그녀를 조금, 아주 조금 안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에 들고 싶어하는 내 욕망을 정당화해주는 걸까? 아니면 그녀 같은 사람이 처음으로 나를 쳐다봐 주었다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이유 때문일까?


화요일은 오전 여덟시에 수업이 시작된다. 크리스타는 눈 밑이 시커멓게 그늘져 있었다.




“피곤해 보여.”




내가 말했다.




“네시에 일어났거든.”




“네시! 오는 데 두 시간 걸린다며.”




“말메디 시에 사는 것도 아냐. 내가 사는 마을은 역에서 30분이나 떨어져 있어. 다섯시 기차를 타려면 네시에는 일어나야 돼. 그리고 브뤼셀에 도착해도 학교가 역 바로 옆에 있는 게 아니잖아.”




“네시에 일어나다니 인간도 아니야.”




“다른 방법이라도 있어?”




짜증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는 홱 돌아서 가버렸다.




죽도록 내가 원망스러웠다. 어떡해서든 그녀에게 도움을 주어야만 했다.






그날 저녁, 나는 부모님에게 크리스타 얘기를 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녀를 내 친구라고 말했다.




“너한테 친구가 있어?”




애써 놀란 표정을 감추며 엄마가 물었다.




“네. 월요일 저녁마다 걔가 여기서 자도 될까요? 동부 도시에 살기 때문에 8시 수업에 참석하려면 화요일에는 새벽 네시에 일어나야 한대요.”




“되고말고. 네 방에 접는 침대를 갖다놓지 뭐.”






다음날, 전에 없던 용기를 내어 나는 크리스타에게 얘기를 꺼냈다.




“너만 좋다면 월요일 저녁에는 우리 집에서 자도 돼.”




그녀는 웃는 얼굴로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내 평생 가장 멋진 순간이었다.




“정말?”




그런데 그만 괜한 말을 해서 분위기를 망치고 말았다.




“우리 엄마 아빠도 허락하셨어.”




그녀가 픽 웃었다. 또 바보 같은 말을 하고 만 것이다.




“올 거니?”




전세는 어느새 역전되었다. 그녀의 편의를 봐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탁을 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래, 가지 뭐.”




마치 나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서라는 듯이 그녀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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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프랑수아 슈아르 지음 / 해냄출판사 

 

 

 

1 전설


젊고 매력적이며,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자,


우리 신(神)들의 모습이며, 내가 보는 그대들의 모습이오.


- 라신느, 『페드라』, 2막 6장





알렉산더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들은 어떤 자들인가? 한 특별한 인물의 삶의 궤적을 넘어서서, 우리에게 하나의 신화를 제공한 그 이야기들을 도대체 누가 시작했던 것일까? 역사보다 더 정확하게, 더 본질적으로 핵심에 이르게 하는 그 이야기를? 최초의 증인들이 썼던 저서들은 사라지고 없다. 알렉산더를 찬양하거나 비난하는, 뒤늦게 나온 역사서들과 한 권의 소설, 그리고 종교적 문헌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역사에서 전설까지




알렉산더의 동료들이 전하는 이야기들,


역사적 사실에서 전설적인 이야기까지



알렉산더의 전설이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무궁무진한 일화들과 귀감이 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찬 보물창고 같기 때문이다. 여러 세대를 내려오면서 서로 겹치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역사가들과 이야기꾼들은 서로 확신과 반박을 교환하면서, 수세기 동안 이 보물창고를 끈기 있게 채워오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 한다.


알렉산더의 원정 이야기를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들은 그 놀라운 정복사업에 참여했던 측근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그 정복자 덕분에, 그 때까지는 알지 못했던 놀랍고도 매혹적인 이방국가들과 페르세폴리스, 수사, 바빌론처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부유한 도시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놀라운 모험을 글로 기록하면서, 동시에 느꼈던 깊은 감동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글은 마케도니아를 선전하는 다양한 도구들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역사가들의 붓은 신화학자의 마법의 주문으로, 웅장한 서사 시인의 빛나는 팔레트로, 혹은 찬가를 연주하는 트럼펫 소리로 바뀌어야 했다. 따라서 알렉산더를 신화로 만드는 작업은 비록 그의 사후에 더욱 증폭되기는 했지만 아주 일찍부터 시작되었던 셈이다. 그의 삶을 직접 목격했던 증인들의 글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훨씬 뒤에 나타난 역사가들을 통해 인용이나 차용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동작업자이자 조카였던 칼리스테네스(Callisthenes)는 이 영웅의 정복역사를 찬양할 임무를 띠고, 철학가이자 역사가의 자격으로 알렉산더를 동행했다. 따라서 인도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사건들인 그의 이야기는 동시대에 씌어진 것이다. 그의 글에는, 알렉산더가 이끈 모든 전쟁이 야만족들에 대한 그리스의 복수로 그려지고 있으며, 웅장한 서사시의 옷을 입고 있다.

  

말하자면 알렉산더는 호메로스가 찬양했던 영웅들의 계승자인 것이다. 칼리스테네스는 왕을 신격화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제우스`-`아몬의 피를 받고 태어났다는 알렉산더의 신성(神性)을 공식적으로 최초로 언급한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칼리스테네스는 그 영웅의 친구이자, 기원전 327년 그에게 희생된 자인 동시에, 이 정복자를 따라다니는 어두운 전설의 주요 부분을 이루고 있는 한 요소이다.

칼리스테네스 외의 다른 동료들은 그의 사후에 글을 썼는데, 모두들 역사적인 자료들과 전설적인 요소들을 버무려 놓았다. 예를 들어 항해사이자 지리학자인 오네시크리토스는 알렉산더를 야만인의 관습을 폐지하고 문명의 혜택을 펼치기 위해 세상을 정복한 철학적인 왕으로 그렸다. 그리고 이 영웅과 아마존의 여왕 탈레스트리스가 만나 사랑을 나눈 이야기를 꾸며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파탈라부터 페르시아만 입구까지 알렉산더의 함대를 이끌었던 해군사령관이자 탐험가인 네아르코스(Nearchos)는 인도와 인도의 강들을 묘사하고, 인도에서 수사까지의 여정을 소개하고 있다. 알렉산더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이 원정은 지식에 대한 왕의 갈증과 미지의 세계를 발견코자 하는 그의 열망을 보여주고 있다.


알렉산더를 계승하여 이집트를 통치한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는 알렉산더의 모든 군사작전에 관여했으며, 기원전 330년부터 사령관으로 주요 직무를 수행했다. 그는 ‘디아도코이(Diadochoi, 그리스어로 ‘후계자들’이라는 뜻`─`역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면서, 알렉산더를 전쟁터의 뛰어난 지휘관이자 모범적인 국가원수인 동시에, 냉혹함과 관대함의 대조적인 면을 적절하게 구사할 줄 아는 비범한 개성의 소유자로 역설했다.


기술자이며 건축가인 아리스토불로스는 이 영웅을 비방하는 자들로부터 그의 명성을 지켜주었다. 그의 글에 나타난 알렉산더는 수많은 도시와 기념물을 건축한 군주였고 방탕이나 잔인성과는 상관없이, 오히려 우정의 대화를 좋아하고 여인들 앞에서 수줍어하는 순박함을 지닌 자였다. 그래서 그는 이 정복자가 필로타스의 처형, 클레이토스의 살해, 칼리스테네스의 죽음 등 그의 삶에 나타난 일련의 비극에 대해 ‘죄가 없다’고 보았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클레이타르코스는 너무 어려서 알렉산더의 원정에는 참여할 수 없었지만, 그리스 전역에서 이 마케도니아인을 알았던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들을 모두 모았다. 프톨레마이오스의 부름을 받고 이집트로 갔던 탓일까. 그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해서, 인도에서 알렉산더의 목숨을 구해주었고 그의 뒤를 이어 이집트의 군주가 된 프톨레마이오스와 알렉산더의 관계를 찬양했다. 그는 또 알렉산더의 신성을 계시하고, 알렉산더를 새로운 헤라클레스로 여기며, 앞으로 이루어질 업적들에 대한 신탁을 받았던 이집트의 성지 시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의 이야기는 알렉산더의 친구들이 쓴 이야기들과 후세에 씌어진 이야기들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했다.


현존하는 문헌들, 알렉산더의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현존하는 역사서들은 알렉산더의 생애와 원정보다 3백년 정도 늦게 나타났다. 따라서 그 저자들은 선배들의 작품을 참조하면서 선배들이 이 인물에 대해 내린 판단과, 라틴과 이집트문화 등 이방 문화와 그리스 문화가 합쳐진 세계의 개념에 따라 이 영웅의 이미지를 고정시켰다. 이런 상황은 알렉산더의 전설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약 300여 년 사이에 나타난 많은 양의 문헌을 통해 알렉산더라는 인물의 매력을 볼 수 있다.


기원전 60~30년 사이에 그리스어로 씌어진 『세계사(Bibliotheca historica)』의 17권을 보면, 저자인 시칠리아의 디오도로스 시켈로스(Diodoros Sikelos)가 알렉산더의 열렬한 지지자임을 알 수 있다. 클레이타르코스의 이야기를 주요 근원으로 삼았던 그는 권력이 요구하는 것들을 존중하고 있으며, 그 권력은 개인의 장점들을 무시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가 그린 알렉산더의 초상화는 다분히 이상화되었다. 그는 알렉산더를 영웅적이고 명예를 사랑하며 신중하고, 위대함과 권력이 무엇인지를 아는 감각을 갖고 있는데다 천운까지 타고 났으며, 아시아에서 누릴 수 있었던 절대 권력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거부할 수 있는 인물로 보았다. 그의 저서에는 기원전 329~327년 사이의 이야기가 빠져 있다.


갈로`-`로마 사람인 폼페이우스 토로구스(Pompeius Trogus)는 기원전에서 후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필리포스 역사』를 썼는데, 이 책은 적어도 2세기가 지난 후 유스티누스(Justinus)가 요약한 형태로만 전해지고 있다. 유스티누스가 정리한 알렉산더의 이미지는 훨씬 더 혼란스럽다. 저자는 도덕적인 면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 정복자의 용기와 노련함, 관대함을 칭송하고 있으나 악덕도 감추지 않았다.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혹은 복수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보여준 냉혹함, 적뿐 아니라 자기 사람들에게까지 극한 혈기를 부리게 했던 무절제한 음주벽, 아몬신전의 신관들을 매수하여 자신이 신의 혈통을 가졌음을 선포하게 한 후에 보여준 오만함 등에 대해 얘기한다. 유스티누스가 보기에 알렉산더는 장점뿐 아니라 단점에서도 아버지 필리포스를 능가했을 정도였고, 악에서와 마찬가지로 선에서도 과도한 점이 특징인 인물이었다.


또 한 사람의 로마 역사가 퀸투스 쿠르티우스(Quintus Curtius)의 저서는 기원후 1세기의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앞서 두 권의 책에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이 많은데, 그의 글에는 유스티누스와 유사한 정신이 스며있다. 그가 같은 이야기들을 조금 더 발전시켜 나간 부분이라든지, 필요해서 내린 도덕적 판결들 역시 알렉산더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아몬의 신탁 요청, 이방풍습의 채택, 클레이토스 살해, 칼리스테네스 처형, 카르마니아에서 벌인 디오니소스제(祭) 등이 그렇다. 퀸투스 쿠르티우스는 이 정복자에게 늘 미소를 지어준 행운의 여신 역시 그를 부패하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퀸투스 쿠르티우스의 저서는 12세기에 고티에 드 샤티용(Gautier de Ch?illon)이 라틴어로 쓴 웅장한 서사시 <알렉산더>를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프랑스의 초등학교에도 알려져 있으며, 자주 모방되는 작품인 이 서사시는 플루타르코스의 『알렉산더 전기』와 함께 고전주의 시대에 알렉산더에 관한 지식을 전해준 주요 자원이었다.


이 세 명의 역사가들`―`디오도로스, 유스티누스, 퀸투스 쿠르티우스`―`의 저서는 알렉산더에 관한 한 『불가타(Vulgata) 성서』(라틴어역 성서로 서방세계에서 표준성서로 사용되고 있음`─`역주)라고 불릴만 하며, 오늘날 찾아보기 힘든 고대사까지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고려해 볼 만한 역사서는 두 권이 더 있다. 우선 플루타르코스(46~120)는 역사가의 입장보다는 철학가, 도덕가의 입장에서 저서를 남겼다. 그 저서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로마의 전통에 따라 씌어졌다. 그는 『알렉산더 전기』와 두 권의 논문, 그리고 여러 편의 윤리적 저서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일화들을 통해, 이 영웅에 대해 그런대로 긍정적인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영웅의 약점도 숨기지 않았다. 과격함, 허풍, 냉혹함, 방탕, 미신으로 흐르는 경향 등이 인생행로를 따라 점차 심해지고 있음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도 퀸투스 쿠르티우스처럼, 점점 커가는 알렉산더의 권력이 가공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간파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무엇보다도 알렉산더가 가진 영혼의 위대함을 부각시켰다. 그 위대함은 거의 모두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그의 계획들과 그가 적들과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던 놀라운 관대함과 인내심을 통해 초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수많은 출처들에서 끌어낸 이야기들을 비평적인 시선으로 검토하고, 알렉산더의 서신들과 군무일지 등 공문서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쓴 플루타르코스의 저서는 16세기부터 이 마케도니아인에 대해 알려주는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다.


90년에 태어나서, 플루타르코스가 활동을 시작한 지 수십 년 정도 후인 2세기 전반에 활약한 플라비우스 아리아노스(Flavius Arrianus)의 저서도 빠뜨릴 수 없다. 그는 비티니아 출신의 그리스인으로 철학자 에픽테토스(Epiktetos)의 제자였다. 특히 카파도키아에서 로마를 위해 주요 직책들을 수행했으며, 아테네에서 집정관을 지내다 그곳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아나바시스(원정 이야기)』를 보면, 저자 아리아노스는 알렉산더의 뛰어난 군사전략가적 자질, 고귀함을 풍기는 위엄, 탁월한 정치적 통찰력 등에 설득당한 알렉산더 예찬가로 비쳐진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베수스의 신체를 훼손했을 때라든지 페르시아의 의복을 입었을 때처럼, 필요할 때는 비판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베수스에게 내린 알렉산더의 지나친 징벌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게 신체의 끝부분을 절단하는 것은 야만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메디아와 페르시아에 필적할 만한 부를 누리고, 일상에서까지 왕과 신하 사이에 불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야만인들의 관습을 따랐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두 대륙의 왕이 되었고, 전세계에 그 명성을 떨쳤던 알렉산더가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불로스의 저서들을 바탕으로 씌어진 아라아노스의 저서는 알렉산더의 삶과 5세기의 간격이 있었지만, 알렉산더에 관해 정확하고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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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의 역사, USA/ 에릭 프라이 지음 / 추기옥 옮김/ 들녘 

한국어판 서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인들의 수가 점점 늘고 있다. 여기 백 년 전부터 세계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수를 자처하며 다른 민족들을 파멸에서 구한다는, 오직 그 하나의 순수한 목적을 위해 그들의 아들과 딸을 전쟁터에 보내고 항상 덕과 법의 편을 들었던 나라가 있다. 그러한 미국이 오늘날에는 과거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이 거의 전 세계에서 증오의 대상이 되어 대량살상의 위협에 처해 있다.


자화상 속에는 분명 비판과 통찰력이 들어 있지만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미국식 사회·경제·정치 모델의 원칙적 타당성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이것이 미국의 딜레마다. 이들은 선과 악을 엄격하게 구분하며, 복잡한 회색빛은 참아내지 못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것을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들의 결정이라고 한다. 이러한 결정 속에서 이 무한한 가능성의 나라는 종종 실망스럽게, 때론 재앙처럼 보이기도 한다.


50년이 넘는 한국 내 미군 주둔의 역사는 미국 역사의 갈등을 대변하는 좋은 사례다. 미국은 선의를 가지고 한국에 왔다. 잔인한 북쪽의 형제로부터 공격을 받은 우방을 방어하기 위해 왔던 것이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의 한국전쟁은 유혈이 낭자한 비참한 전쟁으로 미군 역시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원칙적으로는 정당한 전쟁이었다. 미국은 전쟁을 치르면서 수많은 정치적·군사적 실수를 범하여 중국의 개입을 초래했으며 그로 인해 결국 한반도는 통일의 희망을 잃었다. 다시 옛 국경선으로의 복귀라는 삭막한 결과를 놓고 본다면 전쟁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끝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도 한국전쟁이 원칙적으로 긍정적인 결과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50년도 넘는 시점부터 미군은 북한이 다시 한국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 이것은 제국주의가 아니라 파트너십이 존재하는 좋은 예다. 그리고 한국이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지구상의 가장 부유한 나라 중의 하나로 인상적인 경제도약을 이루고, 1990년대 민주화를 이룬 데에는 미국 측의 지원 때문에 비로소 가능했던 부분이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미움을 받고 있으며 젊은이들은 미국을 거부하거나 증오로 맞서기까지 한다.


거기에는 비이성적인 이유를 포함하여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미국은 지난 수십 년간 반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잔혹한 서울의 군사독재를 지원했으며, 이들 정권이 자국 국민들을 괴롭히거나 학살할 때에도 모르는 체 외면하거나 막후에서 도움을 주기까지 했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인권에 대해 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인권 대통령으로 정평이 난 지미 카터조차 우방의 정치적 안정을 전략적으로 우선시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현재 한국 국민들에게는 쉽사리 잊혀질 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니다.


또 미국은 오늘날 북한에 대해 호전적인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별로 생산적이지 않다. 물론 평양의 정권이 정치 결정권자들에게 커다란 문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들은 예측할 수 없고, 위험하며, 위협이나 허용을 통해 이성으로 유도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효과적인 외교를 통해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려는 노력보다는 결연한 태도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상을 점점 더 강하게 풍기고 있다. 특히 조지 W. 부시 대통령 행정부는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우방과의 관계에 있어 문제에 대한 섬세한 접근이나 대화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워싱턴 정가의 신보수주의자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국의 서울에서도 그대로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 반대의견을 표시하거나 저항하는 사람은 이미 적의 공범자로 통한다.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은 이 글의 중심 주제가 아니다. 미국 정치에서 정말로 심각한 잘못과 죄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역시 이 글에서 지적했듯 지난 50년간 미국 외교정책이 저지른 잘못에서 예외가 아니다. 맹목적인 반공산주의, 군사적 수단에 대한 지나친 믿음, 최후의 강대국이라는 자만심이 세계경찰의 역할을 하던 미국의 영향력을 위험한 방식으로 전도시켰으며, 선의에서 수행된 많은 정책들도 결국 다른 나라와 민족들에게 해를 끼치게 되었다. 특히 2001년 9월 11일 이후 부시 행정부가 어긋난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에 대한 전 세계의 불신은 확연히 증가했다.

경제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 최대의 시장경제가 막대한 예산적자를 쌓으면서 전 세계의 자본을 흡수하고 있다. 그들은 자유무역을 주장하면서도 자국의 이익에 따라 거침없이 보호주의적 조치를 취한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철강과 자동차 제조기업들은 자유무역의 기치 아래 정말 미국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경험했다. 그리고 지금 전 세계인들은, 어쩌면 금세기에 지구가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일지도 모르는 기후변화를 무시하는 미국을 바라보고 있다.


또한 미국 내의 잘못이 전 세계로 파급되기도 한다. 전 세계가 미국을 역할 모델로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나라의 가치와 시스템에 관대하지 못한 미국식 소명의식 때문에 그렇다. 모든 산업국가들처럼 한국도 미국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무비판적인 ‘미국화’를 지양해야 하지만, 대신 미국의 경제·사회체제의 장점을 수용하는 방법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격차에서 오는 미국 정치의 딜레마가 이라크에서만큼 공공연히 드러난 적은 없었다. 국제법적으로 의심이 가는 상황이었고 현실적인 위협도 부재했지만, 2003년 이라크 전쟁은 어쩌면 긍정적인 결과를 낼 수도 있었다. 우리 시대 최고로 잔혹한 지배자 사담 후세인이 실각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라크 국민들의 분위기를 잘못 판단해 잘못된 점령정책을 펴고,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내의 이라크 포로들을 잔인하게 대우함으로써, 미국의 도덕적 권위는 심각하게 손상을 입었다. 그리고 아랍 이슬람 세계를 안정시키고 민주화하려는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이 이라크에 주둔한 이래 이라크는 통제불능의 상태나 마찬가지가 되었고 오히려 미국 정부가 군사적으로 타파하고자 했던 바로 그것, 테러리즘의 온상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단순한 난관 이상으로 이미 비극이다.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위해 한국이 강력하고 이성적인 미국을 필요로 하듯 전 세계도 신뢰할 수 있는 질서의 힘을 필요로 한다. 오로지 미국만이 이 역할을 해낼 수 있다. 미국인들이 잘못을 하면 그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가 된다.


에릭 프라이Eric Frey


들어가는 글

미합중국은 멋진 나라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유럽에서 자행된 종교적 박해와 정치적 탄압과 빈곤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건국되었고, 이어 영국 식민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메디슨 같은 초창기 정치가들은 그들의 독립선언서에도 볼 수 있듯 계몽주의의 후손들이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똑같이 창조되었고, 창조자로부터 삶과 자유와 행복 추구권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십 년 후 그들은 전제정치를 종식시키고 여러 그룹의 이익 조정을 최고의 목표로 선언하는 헌법을 제정하는 등, 민주체제를 고안하여 오늘날까지 존속시키고 있다. 그들은 헌법의 수정조항에 종교의 자유, 의사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가폭력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법률을 통과시켰다. 재산권을 확실하게 보장한 덕분에 미국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개발하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미국인들은 또한 세계에 대한 책임도 짊어졌다. 20세기에 미국은 고립주의를 털어버리고 그동안 가장 밀접한 우방국이 된 영국의 편에 서서 유럽전쟁에 참여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1917년 ‘모든 전쟁을 종식시킬 전쟁’을 수행하여 ‘세계를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목표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다. 베르사유 회의에서 발표한 윌슨의 14개 조항은 민중들에게 자결권을 약속하면서 유럽 강대국들이 철면피적인 현실정치에서 방향전환할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구대륙 유럽이 깊은 어둠에 빠져 있던 1941년 미국은 국민사회주의와 파시즘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해 거둔 군사적 승리를 새로운 정치에 이용하여 패자에게도 자유와 행복을 선물했다. 미국은 시대를 초월하여 가장 성공적이었던 마셜 플랜이라는 원조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UN의 지휘하에 다자적 세계질서에 참여할 준비를 갖추었으며, 공산주의가 무너질 때까지 40년을 추격하여 유럽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치하에 다시 통합될 수 있도록 도왔다. 인권이 짓밟히는 곳이라면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러시아 군대나 유럽연합이 아닌 민주주의 초강대국 미국에 구조를 요청했다.


또한 세계 각국 사람들은 희망의 땅 미국에서 ‘아메리카의 꿈’에 동참하고자 매년 백만 명 이상이 합법 또는 불법 이민자로 미국 땅을 밟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방문객들이 활력 넘치는 경제, 수준 높은 대학과 연구시설, 사회의 다면성, 언론의 자유와 비판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긍정적이며 친절한 미국인들에게 감명받고 있다. 이웃이 서로 알고 항상 돕는 곳, 창조주를 믿고 창조주의 명령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곳, 위쪽으로의 신분상승이 가능하다고 누구나 믿는 나라다. 슈타이어마르크 출신 경찰관의 어린 아들이 세계적 스타가 되고, 백만장자가 되어 인구가 밀집된 연방주의 주지사가 될 수 있는 곳.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미국 현실의 일부, 지극히 협소한 일부 현실에 불과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메리카 드림이 악몽이 되는 비참한 경우는 수없이 많다. 미국에서는 모든 아동의 5분의 1이 빈곤 속에서 방치되고 있으며, 무제한의 무기소유가 범죄를 부추기고 있고, 사법 스캔들은 일상사에 속한다. 2백만 명의 사람들이 교도소에 갇혀 있는데 그 중 어떤 사람들은 별것 아닌 범행으로 중형을 받은 사람들이며, 매년 범죄에 대한 충분한 증거도 없이 수많은 재소자들이 처형되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과다체중이 되고, 종교적 무관용주의자들이 늘어나며, 민주주의가 비극적인 조롱거리로 추락하고, 노동자와 주주들을 희생시켜 회사 사장이 부를 축적하는 나라, 이것이 바로 미국이다.


미국의 외교는 특히 부시에 이르러 세계평화의 위협이 되었다. 그들은 국제법을 무시하고, 국제기구들을 파괴시키며, 유일한 맹주로서 세계를 지배할 권리를 요구한다. 입으로는 자유무역을 설교하면서 스스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국 보호주의에 빠지고, 스스로를 너그러운 존재로 평가하면서도 개발도상국 지원에는 인색하다. 눈치 보지 않고 온실가스를 방출시켜 환경을 황폐화시키는 주범이기도 하다. 신이 자기들 편이라고 믿으며 겉으로만 성스러운 척한다. 찬탄받으며 사랑받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의 우방국 내에서조차 점점 거부와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라크에 대한 전쟁은 미국의 위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조작된 증거를 바탕으로 불법적이며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켜 포악한 독재자를 몰아냈으나 그 땅에는 평화도 안정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미국의 역사는, 자신들의 헌법과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노력한다는 이상을 깔아뭉개는 정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음을 보여준다. 인디언들을 거의 전멸에 이르게 하고 흑인들을 노예화한 것에서부터 베트남 전쟁과 제3세계의 수많은 독재자들을 지원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런 예는 비일비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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