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프랑수아 슈아르 지음 / 해냄출판사 

 

 

 

1 전설


젊고 매력적이며,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자,


우리 신(神)들의 모습이며, 내가 보는 그대들의 모습이오.


- 라신느, 『페드라』, 2막 6장





알렉산더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들은 어떤 자들인가? 한 특별한 인물의 삶의 궤적을 넘어서서, 우리에게 하나의 신화를 제공한 그 이야기들을 도대체 누가 시작했던 것일까? 역사보다 더 정확하게, 더 본질적으로 핵심에 이르게 하는 그 이야기를? 최초의 증인들이 썼던 저서들은 사라지고 없다. 알렉산더를 찬양하거나 비난하는, 뒤늦게 나온 역사서들과 한 권의 소설, 그리고 종교적 문헌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역사에서 전설까지




알렉산더의 동료들이 전하는 이야기들,


역사적 사실에서 전설적인 이야기까지



알렉산더의 전설이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무궁무진한 일화들과 귀감이 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찬 보물창고 같기 때문이다. 여러 세대를 내려오면서 서로 겹치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역사가들과 이야기꾼들은 서로 확신과 반박을 교환하면서, 수세기 동안 이 보물창고를 끈기 있게 채워오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 한다.


알렉산더의 원정 이야기를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들은 그 놀라운 정복사업에 참여했던 측근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그 정복자 덕분에, 그 때까지는 알지 못했던 놀랍고도 매혹적인 이방국가들과 페르세폴리스, 수사, 바빌론처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부유한 도시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놀라운 모험을 글로 기록하면서, 동시에 느꼈던 깊은 감동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글은 마케도니아를 선전하는 다양한 도구들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역사가들의 붓은 신화학자의 마법의 주문으로, 웅장한 서사 시인의 빛나는 팔레트로, 혹은 찬가를 연주하는 트럼펫 소리로 바뀌어야 했다. 따라서 알렉산더를 신화로 만드는 작업은 비록 그의 사후에 더욱 증폭되기는 했지만 아주 일찍부터 시작되었던 셈이다. 그의 삶을 직접 목격했던 증인들의 글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훨씬 뒤에 나타난 역사가들을 통해 인용이나 차용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동작업자이자 조카였던 칼리스테네스(Callisthenes)는 이 영웅의 정복역사를 찬양할 임무를 띠고, 철학가이자 역사가의 자격으로 알렉산더를 동행했다. 따라서 인도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사건들인 그의 이야기는 동시대에 씌어진 것이다. 그의 글에는, 알렉산더가 이끈 모든 전쟁이 야만족들에 대한 그리스의 복수로 그려지고 있으며, 웅장한 서사시의 옷을 입고 있다.

  

말하자면 알렉산더는 호메로스가 찬양했던 영웅들의 계승자인 것이다. 칼리스테네스는 왕을 신격화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제우스`-`아몬의 피를 받고 태어났다는 알렉산더의 신성(神性)을 공식적으로 최초로 언급한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칼리스테네스는 그 영웅의 친구이자, 기원전 327년 그에게 희생된 자인 동시에, 이 정복자를 따라다니는 어두운 전설의 주요 부분을 이루고 있는 한 요소이다.

칼리스테네스 외의 다른 동료들은 그의 사후에 글을 썼는데, 모두들 역사적인 자료들과 전설적인 요소들을 버무려 놓았다. 예를 들어 항해사이자 지리학자인 오네시크리토스는 알렉산더를 야만인의 관습을 폐지하고 문명의 혜택을 펼치기 위해 세상을 정복한 철학적인 왕으로 그렸다. 그리고 이 영웅과 아마존의 여왕 탈레스트리스가 만나 사랑을 나눈 이야기를 꾸며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파탈라부터 페르시아만 입구까지 알렉산더의 함대를 이끌었던 해군사령관이자 탐험가인 네아르코스(Nearchos)는 인도와 인도의 강들을 묘사하고, 인도에서 수사까지의 여정을 소개하고 있다. 알렉산더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이 원정은 지식에 대한 왕의 갈증과 미지의 세계를 발견코자 하는 그의 열망을 보여주고 있다.


알렉산더를 계승하여 이집트를 통치한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는 알렉산더의 모든 군사작전에 관여했으며, 기원전 330년부터 사령관으로 주요 직무를 수행했다. 그는 ‘디아도코이(Diadochoi, 그리스어로 ‘후계자들’이라는 뜻`─`역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면서, 알렉산더를 전쟁터의 뛰어난 지휘관이자 모범적인 국가원수인 동시에, 냉혹함과 관대함의 대조적인 면을 적절하게 구사할 줄 아는 비범한 개성의 소유자로 역설했다.


기술자이며 건축가인 아리스토불로스는 이 영웅을 비방하는 자들로부터 그의 명성을 지켜주었다. 그의 글에 나타난 알렉산더는 수많은 도시와 기념물을 건축한 군주였고 방탕이나 잔인성과는 상관없이, 오히려 우정의 대화를 좋아하고 여인들 앞에서 수줍어하는 순박함을 지닌 자였다. 그래서 그는 이 정복자가 필로타스의 처형, 클레이토스의 살해, 칼리스테네스의 죽음 등 그의 삶에 나타난 일련의 비극에 대해 ‘죄가 없다’고 보았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클레이타르코스는 너무 어려서 알렉산더의 원정에는 참여할 수 없었지만, 그리스 전역에서 이 마케도니아인을 알았던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들을 모두 모았다. 프톨레마이오스의 부름을 받고 이집트로 갔던 탓일까. 그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해서, 인도에서 알렉산더의 목숨을 구해주었고 그의 뒤를 이어 이집트의 군주가 된 프톨레마이오스와 알렉산더의 관계를 찬양했다. 그는 또 알렉산더의 신성을 계시하고, 알렉산더를 새로운 헤라클레스로 여기며, 앞으로 이루어질 업적들에 대한 신탁을 받았던 이집트의 성지 시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의 이야기는 알렉산더의 친구들이 쓴 이야기들과 후세에 씌어진 이야기들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했다.


현존하는 문헌들, 알렉산더의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현존하는 역사서들은 알렉산더의 생애와 원정보다 3백년 정도 늦게 나타났다. 따라서 그 저자들은 선배들의 작품을 참조하면서 선배들이 이 인물에 대해 내린 판단과, 라틴과 이집트문화 등 이방 문화와 그리스 문화가 합쳐진 세계의 개념에 따라 이 영웅의 이미지를 고정시켰다. 이런 상황은 알렉산더의 전설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약 300여 년 사이에 나타난 많은 양의 문헌을 통해 알렉산더라는 인물의 매력을 볼 수 있다.


기원전 60~30년 사이에 그리스어로 씌어진 『세계사(Bibliotheca historica)』의 17권을 보면, 저자인 시칠리아의 디오도로스 시켈로스(Diodoros Sikelos)가 알렉산더의 열렬한 지지자임을 알 수 있다. 클레이타르코스의 이야기를 주요 근원으로 삼았던 그는 권력이 요구하는 것들을 존중하고 있으며, 그 권력은 개인의 장점들을 무시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가 그린 알렉산더의 초상화는 다분히 이상화되었다. 그는 알렉산더를 영웅적이고 명예를 사랑하며 신중하고, 위대함과 권력이 무엇인지를 아는 감각을 갖고 있는데다 천운까지 타고 났으며, 아시아에서 누릴 수 있었던 절대 권력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거부할 수 있는 인물로 보았다. 그의 저서에는 기원전 329~327년 사이의 이야기가 빠져 있다.


갈로`-`로마 사람인 폼페이우스 토로구스(Pompeius Trogus)는 기원전에서 후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필리포스 역사』를 썼는데, 이 책은 적어도 2세기가 지난 후 유스티누스(Justinus)가 요약한 형태로만 전해지고 있다. 유스티누스가 정리한 알렉산더의 이미지는 훨씬 더 혼란스럽다. 저자는 도덕적인 면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 정복자의 용기와 노련함, 관대함을 칭송하고 있으나 악덕도 감추지 않았다.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혹은 복수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보여준 냉혹함, 적뿐 아니라 자기 사람들에게까지 극한 혈기를 부리게 했던 무절제한 음주벽, 아몬신전의 신관들을 매수하여 자신이 신의 혈통을 가졌음을 선포하게 한 후에 보여준 오만함 등에 대해 얘기한다. 유스티누스가 보기에 알렉산더는 장점뿐 아니라 단점에서도 아버지 필리포스를 능가했을 정도였고, 악에서와 마찬가지로 선에서도 과도한 점이 특징인 인물이었다.


또 한 사람의 로마 역사가 퀸투스 쿠르티우스(Quintus Curtius)의 저서는 기원후 1세기의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앞서 두 권의 책에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이 많은데, 그의 글에는 유스티누스와 유사한 정신이 스며있다. 그가 같은 이야기들을 조금 더 발전시켜 나간 부분이라든지, 필요해서 내린 도덕적 판결들 역시 알렉산더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아몬의 신탁 요청, 이방풍습의 채택, 클레이토스 살해, 칼리스테네스 처형, 카르마니아에서 벌인 디오니소스제(祭) 등이 그렇다. 퀸투스 쿠르티우스는 이 정복자에게 늘 미소를 지어준 행운의 여신 역시 그를 부패하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퀸투스 쿠르티우스의 저서는 12세기에 고티에 드 샤티용(Gautier de Ch?illon)이 라틴어로 쓴 웅장한 서사시 <알렉산더>를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프랑스의 초등학교에도 알려져 있으며, 자주 모방되는 작품인 이 서사시는 플루타르코스의 『알렉산더 전기』와 함께 고전주의 시대에 알렉산더에 관한 지식을 전해준 주요 자원이었다.


이 세 명의 역사가들`―`디오도로스, 유스티누스, 퀸투스 쿠르티우스`―`의 저서는 알렉산더에 관한 한 『불가타(Vulgata) 성서』(라틴어역 성서로 서방세계에서 표준성서로 사용되고 있음`─`역주)라고 불릴만 하며, 오늘날 찾아보기 힘든 고대사까지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고려해 볼 만한 역사서는 두 권이 더 있다. 우선 플루타르코스(46~120)는 역사가의 입장보다는 철학가, 도덕가의 입장에서 저서를 남겼다. 그 저서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로마의 전통에 따라 씌어졌다. 그는 『알렉산더 전기』와 두 권의 논문, 그리고 여러 편의 윤리적 저서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일화들을 통해, 이 영웅에 대해 그런대로 긍정적인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영웅의 약점도 숨기지 않았다. 과격함, 허풍, 냉혹함, 방탕, 미신으로 흐르는 경향 등이 인생행로를 따라 점차 심해지고 있음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도 퀸투스 쿠르티우스처럼, 점점 커가는 알렉산더의 권력이 가공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간파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무엇보다도 알렉산더가 가진 영혼의 위대함을 부각시켰다. 그 위대함은 거의 모두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그의 계획들과 그가 적들과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던 놀라운 관대함과 인내심을 통해 초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수많은 출처들에서 끌어낸 이야기들을 비평적인 시선으로 검토하고, 알렉산더의 서신들과 군무일지 등 공문서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쓴 플루타르코스의 저서는 16세기부터 이 마케도니아인에 대해 알려주는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다.


90년에 태어나서, 플루타르코스가 활동을 시작한 지 수십 년 정도 후인 2세기 전반에 활약한 플라비우스 아리아노스(Flavius Arrianus)의 저서도 빠뜨릴 수 없다. 그는 비티니아 출신의 그리스인으로 철학자 에픽테토스(Epiktetos)의 제자였다. 특히 카파도키아에서 로마를 위해 주요 직책들을 수행했으며, 아테네에서 집정관을 지내다 그곳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아나바시스(원정 이야기)』를 보면, 저자 아리아노스는 알렉산더의 뛰어난 군사전략가적 자질, 고귀함을 풍기는 위엄, 탁월한 정치적 통찰력 등에 설득당한 알렉산더 예찬가로 비쳐진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베수스의 신체를 훼손했을 때라든지 페르시아의 의복을 입었을 때처럼, 필요할 때는 비판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베수스에게 내린 알렉산더의 지나친 징벌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게 신체의 끝부분을 절단하는 것은 야만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메디아와 페르시아에 필적할 만한 부를 누리고, 일상에서까지 왕과 신하 사이에 불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야만인들의 관습을 따랐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두 대륙의 왕이 되었고, 전세계에 그 명성을 떨쳤던 알렉산더가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불로스의 저서들을 바탕으로 씌어진 아라아노스의 저서는 알렉산더의 삶과 5세기의 간격이 있었지만, 알렉산더에 관해 정확하고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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