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리드 평전 - 사랑과 열정 그리고 혁명의 투혼
로버트 A. 로젠스톤 지음, 정병선 옮김 / 아고라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존 리드(John Reed, 1887.10.22~1920.10.19)는 영화를 통해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의 유명한 저널리스트다. 또한 더 잘 알려진 것처럼 러시아 혁명을 기록한「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라는 르포르타주를 작성한 혁명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기 전 상상속의 그는 이미 뜨거운 사내, 강철같은 사내였다. 그래서였을까, 이 책은 유난히 오래 읽혔다. 왜냐하면 상상 속의 리드를 지우는 일과,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리드를 받아들이는 일이 수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뮤지컬처럼 부풀려진, 낭만적이며 이기적인,존 리드를 만나는 과정은 조금 난감했지만 그가 패터슨에서 '세계산업노동자동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의 헤이우드와 교류하며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모습을 마주하게 되는 대목은, 그에 대한 나의 상상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그곳에서도 그의 객관성을 잃은 시선, 뜨거움이라고 상찬하기에는 부적절한 그의 열정이 적잖이 불편했지만, 리드가 투쟁의 현장에서 빈곤의 추악함과 잔혹한 불평등을 목도하고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또 그것을 실천하는 모습은 그의 진정을 느끼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패터슨에서 자본주의의 '도구주의'와 맞서며 인간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향후 그의 반전운동으로도 자연스레 연결되는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자꾸 마음이 쓰인다. 그럼에도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변명도 구차하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리드는 유럽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 전쟁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본가들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 라며 궁색한 일상이 되어버린 전쟁을 노골적으로 규탄한다. 또한 소모적이고 가혹한 전장에 참전하려는 의뭉한 미국의 움직임에도 거세게 항의한다. 그는 자본가들과 정치가들의 야심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었다. 전쟁은 무고한 젊은이들을 선동하고 죽음으로 내모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애국자(?)들의 깜짝 파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이는 지금의 국제정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리드의 행보를 따라가다 마지막에 만난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내게 몇 가지 의문을 남겨준 채 끝나버렸다. 그것은 리드의 삶이 너무 일찍 막을 내린 탓일 것이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서 그가 좀 더 살아있었다면, 혁명의 추이를 지켜보고, 거기에 개입된 인간들의 어쩔 수 없이 던접스러운 인간성을 확인했다면, 레닌과 카오츠키 다음에 등장할 스탈린에 대해, 그리고 러시아 혁명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이고 독특한 해석을 내놓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하면 리드가 뜨겁게 환호했던 러시아 혁명 그리고 그의 벗 레닌은 인터내셔널의 슬로건 아래 '국가주의적 전체주의'를 실현한 마르크스의 사생아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판단으로는 말이다.

한 위대한 인간의 삶을 되짚는 일은 단순히 그를 거들떠보는 행위를 넘어선다.
그것은 특정한 개인에게 말을 건네는 것에서 시작하여 독자가 처한 현실을 더듬는 일로 치닫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 리드, 그를 읽는 것은 한 세기를 뛰어넘어 21세기를 부유하는 나를 돌아보는 일이며,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 ‘인간은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에 대답하는 소극적인, 그렇지만 고통스러운 행위였다. 그가 처했던 20세기와 달리 현재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혁명은 이미 퇴물이 되어버렸고 자본주의는 폭발해버렸다. 하여 착취, 전쟁, 절대빈곤으로 내몰린 사람들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나불거리는 일은 죄악에 가까운 일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이렇듯 욕지기가 치미는 현실에서 ‘인간은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라는 나의 물음은 공허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만나는 과정에서 느낀 다행스러움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실은 인간 자체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 개념적으로 그러할 것이다,라고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 그러니까 선하기도 악하기도 하다, 그러니까 타이밍만 허락하면 선할 수도 있다라는 신뢰의 회복이었다. 그의 삶에서 엿본 열려있는 사고체계와 신념, 그리고 신념의 중심에 인간을 세우는 행위는 이미 자본과 상품이 신이 되어버린 이 시절에 우리가 되찾아야 할 그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진실로 혁명적인 태도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열정적인 사내를 내려놓지만 내 안의 혁명, 풀리지 않은 숙제들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우 2009-12-10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금 그 설렘은 사라졌지만 한때 설레게 하였던 이름 블세비키 존리드.
지적욕구를 만족시키는 것과 로망의 감동은 반드시 배리하는 것만은 아니지만. 하하

'인간은 기대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가'라는 굿바이님의 자문.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겠어요? 하하 싱거운 대답올시다.

굿바이 2009-12-11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싱거운 대답 아니세요.^^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두될 수 밖에 없었던, 20세기 이전의 사고체계 중 해체가 필요했던 것들이 분명히 있었죠. 계몽이라던가 이성에 대한 신뢰라던가 뭐 이런 것들이 정치논리로 활용되어 낳은 비극이 하나 둘이 아니니까요. 저도 근대를 극복하고 '인간은 기대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 고민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