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저리 클럽
최인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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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30년을 반추한다. 어머니 뱃속을 나와 서른이라는 나이에 당도할 때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의 흐름에서 나는 다양한 성장을 이루어왔다. 엄마의 젖가슴에서 자연스럽게 손을 뗄 시기가 있었고, 키가 한 해에 10센티가 넘게 자란 적이 있었으며, 소프라노톤 목소리가 굵은 중저음으로 바뀔 시기가 있었고, 상대방에게 말하기 전에 한두 번 이상 꼽씹는 습관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도 있었다. 지난 삼십 년간 겪었던 수많은 경험들과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나는 현재의 모습으로까지 자라왔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장 많은 성장을 이룬 시기를 나는 중고등학생 시절이라고 고백하는데에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다. 그 시절 나는 정말 많이 '성장'했다. 내가 누군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고, 부모라는 존재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이 최초로 시도된 시기였으며, 지구에 나 외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깨닫는 시기였다. 현재의 내 성격과 사회성은 바로 그 시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 아름다웠던 내 십대 시절의 편린들이여..

  그 시절 함께 머리를 맞대고 난해한 수학문제를 풀고,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찼던 내 친구들. 야한 외국잡지를 돌려보기 위해 순서를 정하고,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여인의 사진만 봐도 가슴을 두근거렸던 그 시절. 학업에 대한 부모의 기대치와 엄연한 현실적 수준 사이에서 발생되는 번민과 스트레스로 하루하루 지난한 시간을 지내야 했던 바로 그 시절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좋다', '나쁘다' 등의 단어로 재단할 수 없는 질풍노도의 그 시절은 존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고결하다.

  최인호의 신작 장편소설 『머저리 클럽』은 바로 그 시절 그 아이들의 초상이다. '질풍노도', '사춘기', '주변인' 등 수많은 사회적 철학적 용어로 대변되는 십대 시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성장소설이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을 살아야 했던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사춘기 고등학생들의 이야기가 흥미있게 펼쳐진다. 작가 최인호는 유머러스한 문체와 깊이있는 문장을 적절히 섞어가며 청소년 시절의 성장담을 매우 유쾌하게 그려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작중 화자 동순이를 포함하여 철수, 동혁, 문수, 영구, 영민이가 머저리 클럽의 클럽원들이다. 이들은 학창시절에 동일한 목적과 활력있는 우정으로 사춘기의 소중한 삶을 채워나간다. 기질과 성정이 각기 다른 여섯 명의 고등학생들이 뿜어내는 우정과 사랑, 꿈과 성장, 번민과 성찰의 생명력 있는 성장드라마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 땅의 청소년들과 그 때의 추억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모든 성인들의 가슴을 일렁이게 한다. 

  사춘기 시절에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을 흥분되는 추억이 있다. 그것은 바로 '첫사랑'이다. 사랑을 논하기에는 어린 나이였지만 누군가에게 호감이 가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밤잠을 설치고, 설레임을 감내해야만 했던 그 시절의 짜릿함은 어느 누구나 경험했을 아름다운 추억이리라. 소설 속에서 각 인물들마다 다양하게 발현되는 이성에 대한 순수하고 투명한 열정의 방향성을 보고 있노라면 그 시절의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아 훈훈한 공감이 발산된다.

  무엇보다 사춘기 시절의 가장 큰 아이콘은 자아에 대한 설익은 탐구일 것이다. '대학 입시'라는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키워드를 갖고 있는 한국 고등학생들의 공통된 목표의식은 자아성찰의 가장 순수한 시기를 비효율적으로 낭비하는 안타까움에 내몰리고 있다. 소설 속에서 문수가 일상을 일탈하여 자신만의 시공간을 통해 내면을 성찰하는 행위는 자아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발산되는 청소년기의 표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모습이리라.

  소설의 말미는 고등학교 졸업식으로 끝맺음된다. '끝'은 '시작'을 담보할 때만이 그 의미를 집대성한다. 인간은 종말을 노래하고 종말을 찬미한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끝'이란 없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겨울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새로운 봄이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라는 작은 세계를 넘어 보다 크고 넓은 우주로 그들은 '이동'되어질 뿐이다. 도도히 흐르는 강의 종국이 바다라는 넓은 세계와 마주치는 것과 같이.

  최근 한국 문단에서 성장소설이 새로운 키워드로 대두되고 있다. 해외 문학에서는 불멸의 고전부터 현대문학까지 어린 시절의 성장담을 찬란하게 그리곤 했지만 국내에서는 철저히 외면되어 왔던 게 사실이다. 근자에 들어서야 비로소 소재가 되고 있다. 김형경, 공지영, 황석영, 최인호 등. 그들이 창조해내는 그 시절 그 아이들의 추억 어린 초상은 내 마음속에 깊은 공감과 잔잔한 향수로 잘 저장되었다. 성장소설의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최인호의 신작 『머저리 클럽』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특별하고 소중한 시절의 표상들을 무난하게 잘 담아냈다. 유쾌하고 흥미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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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놀라운 발견 - 시간의 미스터리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시간사용설명서
슈테판 클라인 지음, 유영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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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류에게 '시간'만큼 많은 호기심을 선사했고, 수없이 천착했던 주제가 있을까. 《시와 진실》에서 괴테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잘만 사용하면 언제나 시간이 충분했기에 나는 때때로 2배 3배의 일도 해냈다. 시간은 무한히 길며 채우고자 한다면 정말 아주 많이 들어갈 수 있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시인 에르베 바진은 다음처럼 쓰고 있다. "강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물이 흐른다. 세월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간다." 시간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인간으로부터 가장 농밀히 사유되고, 연구되며, 조명되어 온 인류사 최고의 뜨거운 감자임에는 틀림없다.

  시간에 대한 천착은 비단 과학뿐만 아니라 철학, 문화, 예술, 종교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와 각도에서 이뤄지고 있다. 고대 철학자들에서부터 뉴턴을 넘어 아이슈타인을 거쳐 스티븐 호킹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향한 천재들의 스킨십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그리도 시간이라는 범우주적 물질(물리학적 차원에서 '물질'이라 칭하자)에 대해 쉼없는 관심을 발산하는 걸까. 왜 인간은 시간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할 수밖에 없는가.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에 대한 인간의 특별한 관심은 정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인간의 현재적 '수준'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물리학자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현존의 우주를 '3차원의 우주'라고 언급한다. 1차원은 선으로, 2차원은 면으로, 3차원은 공간으로 이뤄진 세계다. X축·Y축·Z축으로 이루어진 3차원의 세계에 2차원 이상의 시간 흐름이 조화될 수 있는 우주가 바로 4차원이다. 하지만 인간의 과학은 아직 시간의 1차원을 초월하지 못하고 있다. 일관되고 도도하게 흐르는 시간의 1차원 안에 구속된 인간의 모습은 왜 그토록 시간이라는 물질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유럽 최고의 학술칼럼니스트 슈테판 클라인은 시간의 비밀을 찾아 나섰다. 그의 이전 저서인 『우연의 법칙』이 숙명론적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바꿀, 우연을 향한 새로운 시선을 보여줬다면, 또한 『행복의 공식』이 인생을 변화시키는 긍정의 심리학을 심어주었다면, 『시간의 놀라운 발견』은 인류사 최고의 과학적 딜레마이자, 예술적 명제이자, 의문 기호의 집대성인 '시간'을 향해 떠나는 흥미진진한 지적 탐험서다. 이 한 권의 인문서는 과학자와 심리학자들의 솔깃하면서도 기막힌 이야기를 저자 특유의 박진감 넘치는 문체로 흥미있게 서술한다.

  저자 슈테판 클라인과의 만남은 두 번째다. 이 책을 읽기 전 그의 명저 『행복의 공식』을 통해 그가 과외 수준의 학구적 설명을 즐겨하는 학자임을 경험한 바 있다. 이 책 또한 뇌의학과 심리학, 철학과 물리학을 망라하며 전문적인 내용이 많이 소개된다. 하지만 매우 어려운 전문 과학 용어로만 일관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적어도 『행복의 공식』보다는 훨씬 수월한 용어와 문체로―최대한 평이하게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시간을 탐구했던 과학자들의 실험 사례를 소개하는 것에서부터 인간과 시간 사이의 특수한 관계 등 시간에 대한 흥미롭고 신비스러운 이야기가 즐비하다. 더욱이 시간에 대한 과학적 사실만을 전달하는 수준이 아니라 시간을 합리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실용성 있는 방법까지 일러줌으로써 읽는 이의 앎의 폭을 배가시킨다.

  책 속의 내용 중에서 몇 가지 재미있는 부분을 발췌하자면,
  지금까지 알려진 측정 가능한 가장 빠른 시간 단위는 레이저 광선이다. 원자의 특성을 재기 위하여 학자들이 만든 레이저 광선은 빛의 임펄스 중 가장 짧은 것은 몇 아토초 밖에 걸리지 않는다. 아토초는 100만 분의 1초의 100만 분의 1초의 100만 분의 1초, 다시 표현하면 0.000000000000000001초다. 이것이 얼마나 짧은 시간인지를 알고 싶다면 어처구니없는 비교를 해야 하는데 1아토초와 1초의 관계는 1초와 우주의 나이와의 관계와 같다고 할 정도니 혀를 내두를 만 한 시간의 범위가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여행할 때의 상황을 예로 들어보자. 갈 때보다 돌아오는 길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이런 체감은 영화를 볼 때에도 마찬가지다. 같은 영화를 처음 볼 때와 두 번째 볼 때 체감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흐름속도는 확실히 다르다. 이는 우리가 시간으로 느끼는 것이 사실은 정보의 양이며 의식적으로 지각하는 감각적 자극들만이 계산에 포함되기 때문에 그렇다. 다시 말해서 기억 속에서 우리의 시간 감각은 정보의 양에 의거하여 재구성되며 그 경우 시간의 길이는 우리가 새로운 것을 많이 경험할수록, 변화를 많이 경험할수록 길게 느껴진다. 저자는 이에 대해 몇 가지 실례와 사진 샘플을 통해 매우 구체적으로 증명한다.

  한편 후반부에서는 신체의 리듬과 지각과 사고의 메커니즘을 고려한 효과적인 시간 활용법 여섯 가지를 소개하고 있어 자못 도움이 된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⑴ 시간활용 1단계: 시간을 스스로 결정하기
스트레스는 자신의 시간에 대한 주도권 상실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생활 가운데 최대한 스트레스를 줄여야 한다.
⑵ 시간활용 2단계: 생체 시계 맞추기
인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생체 시계에 의해 조절되기 때문에 자신의 타고난 특성을 잘 파악하여 삶의 방식을 생체 시계에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⑶ 시간활용 3단계: 여유 만들기
여가는 해야 할 일이 없을 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할 일이 있는 가운데 적극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주민들이 한가롭게 거닐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지역의 정신 건강을 가늠할 수 있다."   - 미국의 철학자 세바스티안 데 그라치아
⑷ 시간활용 4단계: 현재를 인식하기
지각을 연마하는 사람은 현재에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배우게 되며, 이런 훈련으로 그 사람의 시간 경험은 변한다. 두뇌 속에서 지각을 조종하는 시스템은 즐거움과 호기심을 유발하는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깨어 있는 지각은 시간을 연장시킬뿐아니라 기분을 고양시킨다. 즉 현재에 집중할 때 가장 행복하다.
⑸ 시간활용 5단계: 집중 배우기
집중은 배울 수 있으며 시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비결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더 많이 통제하는 것이다.
⑹ 시간활용 6단계: 원하는 것 하기
일의 속도는 얼마나 집중하느냐에 달려 있고 집중력은 동기에 좌우되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히 안다면 과제를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책의 말미 <더 읽기> 카테고리에서는 뉴턴과 아인슈타인이 시간을 어떻게 천착했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특히 거울을 이용한 손전등 실험과 탑의 위아래에서 중력 차이로 발생하는 빛의 일그러짐 실험을 통하여 아인슈타인 일생의 기념비적 발견이자 인류 과학사 이래 가장 큰 획을 그은 이론이라 할 수 있는 '상대성이론'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또한 '열역학 제2법칙'의 원리도 함께 소개한다. 물리학에 대한 대학 전공 수준의 지식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시프레의 동굴 심험을 시작으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이르기까지 시간에 대한 흥미로운 과학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시에 시간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까지 알려주는 폭넓고 균형이 잘 잡힌 인문서다. 저자가 설명하는 수많은 문장들은 단 한 가지 본류적 명제로 정리된다. 반드시 시간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이렇게 쓰고 저렇게 써야 한다는 상투적 내용의 자기계발서의 가벼움을 원했다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시간에 대한 소중함과 신비성을 과학적 체계로 알려주면서 철저한 실험 논거로 이를 부언하고, 더 나아가 왜 시간의 주인이 되어야만 하는지를 논지하는 깊이있는 책이다. 바로 그 '깊이'를 원하는 이들에게 살포시 권하고 싶은 책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미 100년 전에 절대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시간은 측정하는 사람에 따라, 경험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이다. 시간은 명확하게 흐른다. 과거에서 미래로 도도하게 흐르는 시간의 우주적 메커니즘은 과히 절대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우주로부터 한 개인으로 넘어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상대성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시간의 힘을 발휘하는 역동성은 천차만별이며, 바로 이 차이로 인해 세상의 수없는 성공과 실패는 가름된다.

 

2008년 8월 '책을 좋아하는 사람' 이달의 책 선정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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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08-08-16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축하드려요~^^ 다윗님!

마늘빵 2008-08-18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

다윗 2008-08-19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 뒷북님, 아프락사스님, 고맙습니다. ^^
 
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작가 황석영을 좋아한다. 그에 대한 나의 사모는 거의 맹신 수준이다. 오래전부터 그의 활자는 내게 문학을 읽는 시금석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길임을 알려준 최초의 잠언이었으며, 현재적 삶의 고찰과 미래의 생명수를 소원하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데리다의 말처럼 텍스트 바깥은 없다. 텍스트 바깥도 안이어서 안팍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말이다. 황석영의 텍스트는 황석영 자신의 존재가 안과 밖의 경계를 오롯이 허물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롭다. 응당 작가는 그래야 한다.

  오늘날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으뜸은 단연 황석영이다. 감히 누가 황석영의 문학적 아우라에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내가 읽은 그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모두 찬란하고 위대했다. 그의 기념비적인 걸작 『객지』는 황석영의 문학적 성취가 어떠한 것인지를 찬연히 드러낸다. 리얼리즘 미학의 극치를 보여준 『객지』의 단편들은 각 작품마다 빛나는 문학적 의미를 제시한다. 또한 10부작 대하소설 『장길산』을 비롯한, 더욱이 그가 문단 복귀 후 쏟아낸 『오래된 정원』, 『심청』, 『손님』 모두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압도적인 찬사를 받았다. 작년에 출간된 『바리데기』는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을 통해 관통한 20세기 굴곡진 현대사를 굿의 형식으로 그려낸 '생명수' 메타포와 결합시킨 걸작이다. 그렇기에 그의 신작이 출간된다는 소식은 내게 조국통일 못지 않은 빅뉴스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인내하며 또 인내했다. 참고 또 참았다. 한국문학의 에이스 황석영이 『바리데기』의 다음 작품을 자신의 인터넷 블로그에 연재 형식으로 올린지 어느덧 여섯 달이 지났다. '황석영'이라는 이름 석 자에 한없이 작아지기만 하는 내 자신의 평소 모습과는 배리되도록 나는 단 한 번도 황석영의 블로그에 접속하지 않았다. 그의 신작이 어떤 작품인지의 강렬한 호기심을 훗날 책장을 넘기며 한자리에서 '완독'하리라는 기대와 여망으로 승화시켰다. 인터넷이라는 문명의 편리가 아무리 좋다손 치더라도 종이 위에 담겨진 활자를 읽는, 그것만의 웅숭깊은 맛을 나는 결코 멀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때는 왔고, 내 여망은 기대했던 대로 이뤄졌다. 여섯 달을 기다린 황석영의 신작 『개밥바라기별』은 그렇게 내 손과 머리와 가슴으로 들어왔다.

  『개밥바라기별』은 성장소설이다. 황석영과 성장소설은 언뜻 생각하면 그로테스크한 부조화를 풍기는 듯하다. 하지만 기우였다. 역시나 글 잘쓰는 거장에겐 소재의 벽이란 존재치 않는다. 『바리데기』를 내놓고 나서 전혀 새로운 젊고 어린 독자들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작품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작가 황석영. 그의 이러한 야심은 작심하고 쓴 것처럼 보이는 자신의 자전적 일대기를 투영시키면서 무게감 있는 한 권의 성장소설을 탄생시킨다. 요컨대 그의 신작 『개밥바라기별』은 황석영 자신의 십대 시절의 방황기가 녹아있는 바로 그 시대, 그 젊은이들의 자화상이다.

  소설의 시점은 시종 1인칭으로 일관된다. 하지만 시점을 추동하는 '나'라는 화자는 수시로 이동 교체되면서 다양한 시각을 만들어낸다. 전체적 이야기의 주인공격으로, 더욱이 황석영 자신으로 투영된 유준이 서사의 거대 본류를 이끌어가는 인물이다. 준이의 친구 영길, 인호, 상진, 정수, 선이, 미아는 각기 또다른 각도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각 인물들의 시점 교체가 반복되면서 동년배들의 사춘기 시절의 생생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매력적이다. 꿈과 사랑, 실패와 좌절, 모험과 도전 등 견디기 버겁기만 한 그 시절의 '경험'을 통해 한 단계 한 단계 성숙해가는 인간상들이 잘 그려졌다. 더욱이 준이를 위시한 그들네의 삶의 방식은 기존의 전통과 제도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함으로써 일탈을 꿈꾸는 데 있다. 무엇이 되는가보다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다는 삶의 철학을 기치로 하는 그들의 방황은 바로 그 시절의 '내' 모습과 '우리' 모습을 담아냈기에 공감적이다.

  황석영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낸 유준이라는 인물의 존재성이 특별하다. 유준만이 갖고 있는 방향성이 있다. 그것은 우정의 대상이 아니고, 사랑의 대상도 아니며, 꿈과 희망을 향한 목적도 아니다. 그 방향성의 본질은 바로 나 자신이다. 항상 자기 자신으로 열려있는 유준의 머리와 가슴은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방황 시절의 자아상을 잘 보여준다. 이야기의 뒷부분, 대위 장씨를 통해 겪는 수많은 사람들과 경험들은 나 자신만을 접사화했던 방향성의 특질이 어떠한 것인지를 구체화하며 보다 높은 단계로의 '성숙'을 이뤄내는 계기가 된다.

  소설 제목이 참 이쁘다. '개밥바라기별'은 금성의 또 다른 이름이다. 태양계에서 두 번째로 가깝게 태양을 공전하는 금성은 새벽 동쪽에 나타날 적에는 '샛별'이라고 부르지만 저녁에 나타날 때에는 '개밥바라기'라 부른다. 식구들이 밥을 다 먹고 개가 밥을 줬으면 하고 바랄 즈음에 서쪽 하늘에 나타난다 해서 그리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젊은 시절에 방랑하면서 저녁 무렵 해가 지자마자 서쪽 하늘에 나타나던 하나의 별을 보며 정다운 나의 별로 불렀던 것을 기억한다고 황석영은 고백한다. 어쩌면 '개밥바라기별'은 황석영 자신이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젊은 시절의 방랑을 전체적으로 표상하는 상징적 메타포이자, 누구나 겪을 그 시기를 가슴에 잘 안착시키길 기원하는 생명력 있는 호소의 메시지일 것이다.

  황석영 문학의 변화를 감지한다. 그가 오랜 수감생활을 마감한 후 창조한 작품들에는 일관된 흐름이 있다. 『오래된 정원』, 『심청』, 『손님』, 『바리데기』는 모두 한반도의 문제를 세계의 무대로 이슈화시키며 고민한 작품들이다. 같은 민족이면서 총과 칼을 맞대고 싸우는 한반도의 아이러니한 비극적 현재상에 대한 황석영의 무게감 있는 작가의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개인보다는 국가와 사회와 이념을 향해 쏟아냈던 황석영 문학에서 『개밥바라기별』이 갖는 상징적 위치는 응당 소중할 수밖에 없다. 그는 『개밥바라기별』이 작품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문학적 연대기의 기술에서 하나의 새로운 표지석이 될 것이라 고백한다. 이러한 고백은 앞으로 그의 문학이 어떻게 진화될 것인지를 예견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현장을 곁에서 지켜봤을 때도 이미 집단의 시대, 조직의 시대는 갔고 개인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내 문학도 그간 사회와 이념의 문제에 치중하느라 개인의 상처는 땜질하고 지나갔던 것 같습니다."   - 황석영

  사춘기부터 스물한 살 무렵까지의 길고 긴 방황의 이야기를 그려낸 이 작품은 읽는 이마다 독특한 기호의 공감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든다. 시대는 변했고, 사춘기 시절의 사회상도 급변했다. 하지만 질풍노도의 시기에 경험하며 고민하는 내적 번민들의 본질적 속성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기 직전까지의 자신의 청소년기를 투영시킨 작가 황석영의 기백과 투혼이 생명력 있게 녹아있는 역작이라 평할 만하다.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 황석영의 과거를 엿보고, 현재를 천착하며, 미래까지 가늠해볼 수 있는 신작 『개밥바라기별』에 나는 별 다섯 개를 아낌없이 선사한다. 그리고 누구나 겪었을 그 시절에 대한 읽는 이마다의 다양한 공감을 보증하며 이 한 권의 장편을 자신있게 추천한다. 역시 황석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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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8-08-04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읽으셨네요. 담아갑니다.^^

다윗 2008-08-04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더운데 평온하신지요. 개인적으로 최고로 좋아하는 작가이기에 출간되자마자 바로 질렀답니다. 혜경님도 곧 만나보실 예정이시군요. 멋진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 - 장하준의 경제 정책 매뉴얼
장하준.아일린 그레이블 지음, 이종태.황해선 옮김 / 부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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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회사 업무차 춘천에 갔을 때 회식자리에서 거래처 바이어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현재 한국의 완제품 TV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며, 유럽에서는 LG의 엑스캔버스 PDP TV나 삼성의 파브 LCD TV는 최고급품으로 대우받아 굉장히 비싼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SONY는 이제 더이상 삼성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게 시작된 철강회사 포스코는 이미 세계 최고의 철강회사가 되어 있다. 비단 TV뿐만 아니라 반도체, 휴대폰, 철강, 조선 등의 분야에서 한국의 대기업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시장점유율을 뽐내고 있다. 세계 최고급 품질의 브랜드를 국내에서 저렴한 가격에 고민하지 않고 구입할 수 있는 한국 소비자들은 외국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축복받은 백성이라는 게 거래처 바이어가 주장한 내용의 요지였다.

  그렇다면 불과 50년 전만 해도 식민 지배와 전쟁으로 세계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어떻게 그토록 짧은 기간에 세계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초일류기업을 여러 개 거느리는 산업국가가 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가 시장의 논리를 극대화로 지배하는 작금의 세계 경제의 성질을 통찰한다면 이러한 질문은 매우 유의미한 것이 될 수 있으리라.

  현재 삼성, LG, 현대자동차, 포스코, 현대중공업 등은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주도하고 있는 한국의 일류 대기업들이다. 이러한 한국의 일류기업들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국가의 철저한 보호주의 정책 아래에서 탄생했다. 결코 옳다고 말할 수 없는 박정희식 개발독재 시대를 시작으로 국가주의 경제정책으로 빛을 본 것만큼은 엄연한 사실이다. 국가가 유치산업을 적극적으로 보호 장려했고, 외국 선진기업들의 국내 진입을 적절히 통제했으며, 보조금과 지원 정책으로 받쳐 주었기에 한국의 대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굴지의 초일류기업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실례로 필립스의 핀란드가 그랬고, 도요타의 일본이 그랬으며, 르노의 프랑스가 또한 그랬다.

  하지만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로 불리우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첨병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경제를 발전시켜 왔음에도 불구하고 개발도상국에게는 그와는 배치된 논리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논리는 이미 선진국이 된 국가들에게만 이익과 패권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당시의 패권국가 영국을 향해 '사다리를 걷어차 버렸다'고 비난하며 "정상의 자리에 도달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뒤따라 올 수 없도록 자신이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것은 아주 흔히 쓰이는 영리한 방책"이라고 꼬집은 이유가 바로 이러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앞뒤가 안맞는 비겁한 행동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25년간의 신자유주의의 포효는 현대 자본주의의 완전한 체제로 부각되고 있을 정도로 매섭다. 그렇기에 신자유주의에 대해 '아니오'를 외친다는 것은 정확한 통찰과 발군의 용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장하준 교수는 이미 수차례의 논문과 저서를 통해 신자유주의 체제의 허와 실에 대해 날카롭게 꼬집어 왔다. 그의 저서 『사다리 걷어차기』,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신자유주의의 많은 모순과 내밀한 속성에 가려져 있는 허구성을 정확하고 날카롭게 파헤친다. 더욱이 현재 선진국이라 일컫는 산업국가들의 경제 발전 역사에서 신자유주의 논리와 상치되는 정책이 비일비재했음을 소개한다. 그리고 그들이 왜 '나쁜 사마리아인'이 될 수밖에 없음을 증명한다.

  신간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는 장하준 교수가 덴버 대학교 국제대학원 아일린 그레이블 교수와 공동 집필한 책이다. 이 책은 전 저서인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연장에 놓여 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선진국의 경제 개발 역사 속에 내재된 반신자유주의 노선을 파헤치며 그들의 논리가 어불성설이었음을 입증하는 교과서였다면, 이 책은 한 발 더 나아가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요컨대 신자유주의의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하며, 동시에 적절한 대안책까지 내놓은 균형있는 경제정책매뉴얼이라 할 수 있다.

  책의 구성이 흥미롭다. 1부에서는 기존의 신자유주의 노선들을 몇 가지 정책에서 '신화'로 설정하면서 '그릇된 신화 -> 신화의 내용 -> 신화의 기각'의 구성적 형태로 논리를 도출한다. 신자유주의는 그릇된 신화에 불과하며, 그 내용은 어떻게 되고, 왜 그 신화가 '기각'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한다. 또한 2부에서는 다양한 신자유주의 담론들을 소개하며 이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관점과 반대 입장로서의 기각, 그리고 정책 대안의 형식으로 풀이한다. 이러한 구성은 신자유주의 시각과 이와 배치되는 저자의 관점을 동시에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균형적이고 일목요연하다.

  만약 이 책이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만 일관했다면 그리 매력적인 책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기존 논설의 답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미 장하준 교수는 몇 권의 저서를 통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 담론을 수없이 논지한 바 있다. 책 제목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라는 강렬한 문제제기는 이 책이 다양한 부문에서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기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한다. 무역, 산업, 민영화, 지적재산권, 외국 은행 차입, 포트폴리오 투자와 외국인 직접투자, 국내 금융 규제, 환율과 통화, 중앙은행과 통화 정책, 그리고 정부 수입과 지출을 포괄하면서 대안과 해법을 제시한다. 

  더욱 이 책이 와 닿는 것은 경제학자로서의 겸손함이 묻어 있다는 점이다. 어떠한 경제 정책이든 지구상 모든 국가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 특정 국가에 어떤 정책이 적절한지는 그 나라 고유의 조건들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싱가포르에 적합한 정책이 있고, 한국에 알맞은 정책이 있으며, 멕시코에 적절한 정책이 있는 법이다. 신자유주의가 모든 나라들에게 희망을 가져다 줄 것이라며 무조건적인 예찬을 늘어놓는 '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들과 장 교수는 격이 다르다. 자신이 주장하는 경제 논리가 무조건적인 절대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기호와 특성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 수밖에 없음을 전제하는 장 교수의 고백은 겸손한 경제학자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시대는 급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분명 대세다. 작금의 세계 경제는 힘에 의해 좌우되는 정글의 논리로 흘러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에만 함몰되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세계화의 물줄기 속에서 어떻게 해야 부흥하고 발전할 수 있는지, 국민의 행복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강국들과의 경쟁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위정자들의 지혜와 땀흘림이 모아져야 할 때다. 비판과 분석을 넘어 대안과 실행을 창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다시 발전을 요구'하며 기존의 주류 시각에서 벗어난 비주류 시각으로 세계 경제의 과거와 현재를 통찰하고, 더 나아가 다양한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미래까지 엿보는 장하준 교수의 작업에 작은 경외를 표한다. 이런 경외의 연장에서 이 책의 가치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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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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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비단보
권지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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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류작가들의 글솜씨는 하나같이 찬연하다. 몇몇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페미니즘의 클리셰(Cliche)에 함몰되었다거나 지나친 공주병에 빠져 있다는 조소를 받기도 하지만, 각기 뛰어난 필력으로 한국 문단을 주도하는 그녀들의 활력이 나는 좋다. 공지영의 대중성과 신경숙의 섬세한 문체, 은희경의 냉소주의와 심윤경의 문학적 진화, 정이현의 동시대적 공감성과 전경린의 연애 서사 등은 한국 문단을 빛내는 여류작가들의 대표적 아이콘들이다. 바로 그 연장선상에 권지예가 있다.

  1997년 단편 「꿈꾸는 마리오네트」로 등단한 후 2002년 이상문학상과 2005년 동인문학상을 수상, 한국 문단에서 가장 권위있는 양대산맥을 동시에 석권한 권지예의 외연적 존재성은 그녀의 활자 곳곳에 내면을 증명하듯이 배어 있다. 그녀와는 2002년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뱀장어 스튜」라는 단편으로 처음 만났다. 권지예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뱀장어 스튜」는 일상 속에 존재하는 권태와 애증, 이를 벗어나고자 하는 일탈의 욕망과 바깥의 낭만적 로맨스, 환상적 도발이 허무의 확인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정교하게 엮고 있는 작품이다. 뛰어난 포스트 모더니즘 기법이 돋보이는 이 짧은 단편소설은 체질적으로 단편과 거리가 먼 내 자신에게 단편만이 가질 수 있고 단편만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치의 문학적 만족을 내게 안겨주었다. 권지예는, 나에게 그리 기억되는 작가다.

  권지예의 신작 장편소설 『붉은 비단보』는 그녀의 기존 작품들과는 다른 배경에서 펼쳐지는 서사다. 권지예는 시간의 무대를 조선의 어느 한 시대로 되돌려 여성의 삶과 사랑과 예술을 처연하면서도 찬란하게 그려냈다. 종당에는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길 수밖에 없는 우주의 내면적 속성을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48년간의 삶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작중화자 항아恒我의 꿋꿋하면서도 담대한 삶은 거대한 서사의 맥으로서 웅숭깊게 그려진다.

  작가는 세 명의 여인을 배치한다. 1인칭시점의 주인공 화자 항아恒我는 뛰어난 자색과 화려한 춤 솜씨를 갖춘 초롱草籠, 총명하며 지혜로워 문필 신동이라 불리는 가연佳然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다. 각기 독특한 성정과 능력을 갖고 있는 동갑네 세 여인의 우정이 서사의 초반부를 이끌어가는 씨줄이다. 여기에 초롱의 친오라비 준서와 항아의 애틋하면서도 절제된 사랑이 날줄로 엉켜 들어가면서 이야기는 조합된다.

  서사의 흐름 속에서 항아와 준서의 사랑은 농밀해져만 간다. 하지만 둘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역모 혐의로 초롱과 준서의 집안은 몰락하고, 준서는 항아와 훗날에 다시 만나 평생을 함께 할 것을 약속한 후에 금강산으로 피신한다. 여동생 초롱은 한양으로 팔려가 기생이 된다. 가장 뼈대가 튼튼한 사대부 가문의 자녀였던 가연이 제일 먼저 혼사를 치르기 위해 떠나고, 항아는 준서가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부모의 거짓계략으로 준서가 죽은 줄만 알았던 항아는 사랑하지 않는 남정네와 혼사를 치르면서 일평생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 준서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의 세월로 들어가게 된다.

  기나긴 세월이 흐르면서 항아와 초롱과 가연의 삶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시댁의 핍박과 계속된 유산으로 삶의 방향성을 잃고 방황하던 가연은 목매달아 자살함으로써 짧은 인생을 마감한다. 한편 항아는 기생이 된 초롱과의 연락이 요원하기만 하다. 그리고 훗날 알게 되는 준서와 관련된 진실들. 하지만 항아의 삶에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을 속인 부모에 대한 한과 준서를 향한 원망만이 존재할 뿐. 훗날 항아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인식하고 일평생 자신의 한과 사랑과 그리움이 내밀하게 깃들어 있는 붉은 비단보를 불에 태우려고 한다. 과거 흔적들을 하나씩 태우면서 항아는 다른 세상으로 떠나간다.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이 소설에는 명징한 두 가지의 본류가 흐르고 있다. 하나는 항아와 준서의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이며, 다른 하나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한 여성의 예술가로서의 번민과 열정이다. 항아에 대한 준서의 끈질긴 사랑과 준서를 향한 항아의 애절한 그리움은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흐름이다. 항아가 준서와의 추억을 기억하며 봉인한 '붉은 비단보'의 존재는 종국까지 멸하지 않았던 두 사람의 고결한 정신적 사랑의 극치를 담아낸 메시지가 되고 있다.

  또한 예술을 향한 항아의 꿈과 긍정의 부여는 이 소설의 존재 가치가 된다. 딸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어느 하나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간 한 여인의 웅숭깊은 삶의 여정 속에는 그녀 자신의 예술적 자아가 발현되면서 더욱 찬란한 빛을 뿜어낸다. '여성의 예술'을 인정치 않았던 시대에 태어나서 자신의 예술이 곧 점잖치 못한 '끼'로 재단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그 시대 모든 여성들의 고뇌와 몸부림이 문장 속에 오롯이 배어 있기에 처연하다.

  예술과 사랑은 어떤 함수 관계일까. 세계의 수많은 고전들은 예술 속에서 사랑을 천착하며, 사랑을 통해 예술을 발현시켜 왔다. 소설의 제목 '붉은 비단보'는 한 여인의 마음속에서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일렁였던 사랑의 그림자와 자신의 전생애를 지탱하며 실존케 했던 예술에 대한 열정이 만나 현존存되어진 메타포다. 요컨대 붉은 비단보 안에 봉인된 글과 옷과 그림들은 이 소설의 본류로 작동했던 사랑과 예술의 혼합이 일구어낸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소설 속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독특한 시각이 있다. 다섯째 아이 빈彬에 대한 항아의 특별한 사랑이다. 소설의 시작과 말미는 항아의 1인칭시점의 이야기를 빈이 중심이 된 전지적시점의 이야기가 감싸서 두르고 있다. 빈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영특했다. 항아는 빈을 통해 마치 자신의 어렸을 적 모습을 보는 듯했고, 무지하고 무능했던 남편과 비견되면서 옛사랑 준서를 떠올리기도 했다. 즉 빈은 항아 자신의 예술적 자아가 투영된 거울이자 꿈이요 희망이었으며, 이루지 못한 사랑이 현현된 준서의 또 다른 부활이었으리라.

  나는 인간의 삶을 잘 그려낸 서사에 최고의 찬탄을 선사한다. 문학은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공복을 느끼며, 인간은 문학을 통해 인간 본연의 내면을 더욱 천착한다. 이러한 인간과 문학의 방정식에 동의한다면, 인간을 얼마나 잘 조명했고 성찰했는지에 따라 문학적 평가가 가름된다는 논리에 동의하게 된다. 작가 권지예가 빚어낸 항아라는 여인의 삶과 사랑, 불타는 예술혼이 선사하는 감동의 빛깔은 지극히 찬란하며 눈부시다. 너무 잘 담아냈고 흠이 없는 완전한 서사로 그려냈다. 이런 소설이 있기에 독자의 머리는 잠시 정지할 수 있고, 가슴은 농밀한 감성으로 차오를 수 있다. 미국에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있다면 한국에는 『붉은 비단보』가 있다. 정말 잘 쓴 '완벽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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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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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8-07-30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님 독서의 계절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여름은 더 적절한 계절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도 전 이래저래 책을 오래 손에 잡지 못하고 이러구 있네요.
늘 꾸준히 읽고 쓰는 일을 즐거이 하시는 다윗님^^ 좋은 리뷰 또 보고 갑니다.

다윗 2008-07-31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더운 날씨에 평온하시지요. 피서 계획은 세우셨는지요. 그리고 독서 컨디션은 어떠하신지요. 간만에 혜경님의 덧글을 만나니 시원해집니다. 평온하세요. ^^

뒷북소녀 2008-09-23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에 반한 분이 계셔서 선물하려구요... 땡스 투~ 날립니다. :)

다윗 2008-10-04 0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 뒷북소녀님, 언제나 관심과 격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