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울고 난 뒤에 바라보는 풍경은 늘 울기 이전과 다르다. 맺혔던 것이 울음으로 대신 터져 가슴속에 후련한 여백이 생기는 까닭이다. 여백을 지닌 가슴으로 바라보면 같은 풍경도 그 흐름이 완만해진다. 완만함 속에 순순히 몸을 맡기게 된다. 그 순간 버리지 못할 것은 없다.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다. <p. 36>
그런 사람들이 있다. 주변상황이 자신을 위해 빈틈없이 봉사할 때 목이 졸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 사람들. 잘 구획된 시스템 안에 들어가기보다, 엉성하더라도 스스로 시스템을 구축해나갈 때 살아 있음을 느끼는 사람들. 안정과 명성보다는 새로움과 호기심에 높은 가치를 두는 사람들. 나는 그들이 좋다. 절대 다수가 세상을 존속시킬 때,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p. 48>
우리가 언제, 무엇을 입고, 누구와 함께, 무엇을 타고, 어디로 향해 가는가 등에 따라 풍경은 전혀 다른 정서를 전한다. 풍경은 늘 그곳에 같은 모습으로 있으나 작은 변화에도 이리저리 들썩이는 우리의 유동적인 마음이 전혀 다른 해석으로 풍경을 건져올리는 것이다. <p. 109>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이 오직 그 순간의 무게만큼만 짊어진 공기처럼 가벼운 존재들이었다. <p. 221>
어떤 것이 먼저 오고 어떤 것이 나중에 오느냐의 차이일 뿐, 모든 순간은 동등하다. <p. 236>
우리가 심장에 정직하게 반응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 사실 그것은 어른이 되는 과정과 동일하다. '절제'나 '인내'라는 고무적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억압'이나 '위선'이란 어두운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과정. 그러나 모두가 다 육중하고 진지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심장에 정직한 이들의 경박함을 만날 때 막힌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심장에 정직한 이들은 적어도 계산하지 않는다. 계산은 심장 박동을 '안정'적으로 뛰게 하기 때문이다. <p. 275>
나이가 들수록, 사랑의 정의는 단순해진다. 십대에 빚는 사랑의 정의가 거대한 금빛 천사의 형상을 하고 있다면, 이십대에는 거기서 금빛을 벗겨내고 날개를 떼어낸다. 그리고 삼십대가 거의 다 끝나는 중년의 지점에 이르면, 천사의 척추만이 남는다. 서로의 최고점과 최저점을 겪고 나서도 여전히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앞에 겸허해지고 다시 정중해지며, 주는 것에도 받는 것에도 감사하게 된다. 제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을 주고받더라도. <p. 277>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 속에 깨달았다. 그동안 한 번도 '완전한' 세상을 보지 못했음을. 내가 보았던 것은 인간의 세상이었다. 이미 인간의 손에 의해 일정 부분 거세되고 손질되고 격리되거나 치장된 것들의 세상. 그토록 수많은 동물과 식물이 '인간'이라는 긴장을 조성하는 존재로부터 자유로이 흩어져 거니는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다. 신이 "보기에 참 좋더라" 하셨던 '보기 좋은' 태초의 모습은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p. 318>
지평선이란 우리의 시각적 한계일 뿐, 그 어떤 지평선도 기어이 둥근 지구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잇는 그물망의 한 획일 뿐임을. 달리고 또 달린다는 것은 닿고 또 닿아 있는 일임을. <p. 332>
미래란, 그리로 다가갈 구체적인 수단과 목적이 주어질 때만 존재하는 시제인지도 모른다. 수단과 목적을 찾지 못해 암담한 이들에게 미래란 허공과 다름없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다만 어두운 오늘의 반복일 뿐이다. 그러나 한줄기 빛을 잡고 나아가는 이들에게 미래는 길이다. 발밑에 놓인 단단한 길, 한 발자국이 다음 발자국을 이끄는 길. <p. 403>
어떤 여행지는 도착하자마자 여행자를 손아귀에 움켜쥔다. 반면, 어떤 여행지는 여행자가 정지한 채 기다려야 한다. 이동을 거듭하던 여행자에게 더 차분해질 것을 명한다. 고여 있을 것을 명한다. <p. 446>
모든 여행마다 배터리가 방전되고 충전되는 주기가 있다. 방전될 때 여행자는 길 잃은 미아가 되고 충전될 때 이름 없는 철학자가 된다. <p. 521>
서평 : http://blog.naver.com/gilsamo/900389976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