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발전을 요구한다 - 장하준의 경제 정책 매뉴얼
장하준.아일린 그레이블 지음, 이종태.황해선 옮김 / 부키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회사 업무차 춘천에 갔을 때 회식자리에서 거래처 바이어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현재 한국의 완제품 TV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며, 유럽에서는 LG의 엑스캔버스 PDP TV나 삼성의 파브 LCD TV는 최고급품으로 대우받아 굉장히 비싼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SONY는 이제 더이상 삼성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게 시작된 철강회사 포스코는 이미 세계 최고의 철강회사가 되어 있다. 비단 TV뿐만 아니라 반도체, 휴대폰, 철강, 조선 등의 분야에서 한국의 대기업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시장점유율을 뽐내고 있다. 세계 최고급 품질의 브랜드를 국내에서 저렴한 가격에 고민하지 않고 구입할 수 있는 한국 소비자들은 외국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축복받은 백성이라는 게 거래처 바이어가 주장한 내용의 요지였다.

  그렇다면 불과 50년 전만 해도 식민 지배와 전쟁으로 세계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어떻게 그토록 짧은 기간에 세계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초일류기업을 여러 개 거느리는 산업국가가 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가 시장의 논리를 극대화로 지배하는 작금의 세계 경제의 성질을 통찰한다면 이러한 질문은 매우 유의미한 것이 될 수 있으리라.

  현재 삼성, LG, 현대자동차, 포스코, 현대중공업 등은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주도하고 있는 한국의 일류 대기업들이다. 이러한 한국의 일류기업들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국가의 철저한 보호주의 정책 아래에서 탄생했다. 결코 옳다고 말할 수 없는 박정희식 개발독재 시대를 시작으로 국가주의 경제정책으로 빛을 본 것만큼은 엄연한 사실이다. 국가가 유치산업을 적극적으로 보호 장려했고, 외국 선진기업들의 국내 진입을 적절히 통제했으며, 보조금과 지원 정책으로 받쳐 주었기에 한국의 대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굴지의 초일류기업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실례로 필립스의 핀란드가 그랬고, 도요타의 일본이 그랬으며, 르노의 프랑스가 또한 그랬다.

  하지만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로 불리우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첨병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경제를 발전시켜 왔음에도 불구하고 개발도상국에게는 그와는 배치된 논리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논리는 이미 선진국이 된 국가들에게만 이익과 패권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당시의 패권국가 영국을 향해 '사다리를 걷어차 버렸다'고 비난하며 "정상의 자리에 도달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뒤따라 올 수 없도록 자신이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것은 아주 흔히 쓰이는 영리한 방책"이라고 꼬집은 이유가 바로 이러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앞뒤가 안맞는 비겁한 행동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25년간의 신자유주의의 포효는 현대 자본주의의 완전한 체제로 부각되고 있을 정도로 매섭다. 그렇기에 신자유주의에 대해 '아니오'를 외친다는 것은 정확한 통찰과 발군의 용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장하준 교수는 이미 수차례의 논문과 저서를 통해 신자유주의 체제의 허와 실에 대해 날카롭게 꼬집어 왔다. 그의 저서 『사다리 걷어차기』,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신자유주의의 많은 모순과 내밀한 속성에 가려져 있는 허구성을 정확하고 날카롭게 파헤친다. 더욱이 현재 선진국이라 일컫는 산업국가들의 경제 발전 역사에서 신자유주의 논리와 상치되는 정책이 비일비재했음을 소개한다. 그리고 그들이 왜 '나쁜 사마리아인'이 될 수밖에 없음을 증명한다.

  신간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는 장하준 교수가 덴버 대학교 국제대학원 아일린 그레이블 교수와 공동 집필한 책이다. 이 책은 전 저서인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연장에 놓여 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선진국의 경제 개발 역사 속에 내재된 반신자유주의 노선을 파헤치며 그들의 논리가 어불성설이었음을 입증하는 교과서였다면, 이 책은 한 발 더 나아가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요컨대 신자유주의의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하며, 동시에 적절한 대안책까지 내놓은 균형있는 경제정책매뉴얼이라 할 수 있다.

  책의 구성이 흥미롭다. 1부에서는 기존의 신자유주의 노선들을 몇 가지 정책에서 '신화'로 설정하면서 '그릇된 신화 -> 신화의 내용 -> 신화의 기각'의 구성적 형태로 논리를 도출한다. 신자유주의는 그릇된 신화에 불과하며, 그 내용은 어떻게 되고, 왜 그 신화가 '기각'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한다. 또한 2부에서는 다양한 신자유주의 담론들을 소개하며 이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관점과 반대 입장로서의 기각, 그리고 정책 대안의 형식으로 풀이한다. 이러한 구성은 신자유주의 시각과 이와 배치되는 저자의 관점을 동시에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균형적이고 일목요연하다.

  만약 이 책이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만 일관했다면 그리 매력적인 책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기존 논설의 답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미 장하준 교수는 몇 권의 저서를 통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 담론을 수없이 논지한 바 있다. 책 제목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라는 강렬한 문제제기는 이 책이 다양한 부문에서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기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한다. 무역, 산업, 민영화, 지적재산권, 외국 은행 차입, 포트폴리오 투자와 외국인 직접투자, 국내 금융 규제, 환율과 통화, 중앙은행과 통화 정책, 그리고 정부 수입과 지출을 포괄하면서 대안과 해법을 제시한다. 

  더욱 이 책이 와 닿는 것은 경제학자로서의 겸손함이 묻어 있다는 점이다. 어떠한 경제 정책이든 지구상 모든 국가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 특정 국가에 어떤 정책이 적절한지는 그 나라 고유의 조건들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싱가포르에 적합한 정책이 있고, 한국에 알맞은 정책이 있으며, 멕시코에 적절한 정책이 있는 법이다. 신자유주의가 모든 나라들에게 희망을 가져다 줄 것이라며 무조건적인 예찬을 늘어놓는 '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들과 장 교수는 격이 다르다. 자신이 주장하는 경제 논리가 무조건적인 절대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기호와 특성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 수밖에 없음을 전제하는 장 교수의 고백은 겸손한 경제학자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시대는 급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분명 대세다. 작금의 세계 경제는 힘에 의해 좌우되는 정글의 논리로 흘러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에만 함몰되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세계화의 물줄기 속에서 어떻게 해야 부흥하고 발전할 수 있는지, 국민의 행복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강국들과의 경쟁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위정자들의 지혜와 땀흘림이 모아져야 할 때다. 비판과 분석을 넘어 대안과 실행을 창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다시 발전을 요구'하며 기존의 주류 시각에서 벗어난 비주류 시각으로 세계 경제의 과거와 현재를 통찰하고, 더 나아가 다양한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미래까지 엿보는 장하준 교수의 작업에 작은 경외를 표한다. 이런 경외의 연장에서 이 책의 가치는 존재한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