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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4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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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 다시 읽은 소설 『죄와 벌』

오래전 읽은 소설을 다시 집어 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최근 내 주변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결국 사람들 간의 문제인데 이런저런 일들을 지켜보면서 '인간은 어디까지 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인간의 악함의 크기와 종류는 과히 천차만별인 것 같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악랄하고 교만하고 싹수없을 수 있겠다.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이성(理性)이 없고, 예의가 없고, 절제가 없다. 제발 적당히들 했으면 좋겠다.

이런 씁쓸함은 비단 타인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나 자신 또한 역시 추악하다는 진실을 자주 직시한다. 신은 인간의 마음에 양심이란 씨앗을 심어놓았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양심을 '벌레'와 '천명의 증인'으로 비유했다. 총신대학교 문병호 교수는 전자를 '내부에서 끊임없이 갉아먹는 고통'으로, 후자는 '모든 변명을 반박하는 압도적 확증'으로 주석했다. 서글픈 건 세상에는 (나를 포함해)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 불편한 진실을 극적이고 적나라하게 마주한 순간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다시 내 손에 들어왔다.

⑴ 죄(罪), 그리고 인물

죄는 무엇인가. 국어사전을 펼치니 '잘못이나 허물로 인하여 벌을 받을 만한 일'로 설명되어 있다. 죄를 기독교적으로 접근하면 의미는 조금 달라진다. 기독교에서는 죄의 기준이 타인이나 사회에 있지 않다. 하나님에게 있다. 기독교에스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어기는 것"으로 정의된다. 즉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언약적인 관계에서 발생한 불순종은 모두 죄이다. 그렇기에 죄는 상태이고 현상이다. 죄를 존재나 물질로 본 마니주의자들의 오만한 어불성설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오래전 폐기처분되었다. 흥미로운 건 세상의 죄의 개념과 기독교의 죄의 개념이 많은 부분 겹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법은 소위 '도덕법'이라는 명명으로 역사 이래 인간의 법에 녹아들었다. 그렇기에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살인을 저지르거나 도둑질을 하는 건 예외 없이 죄로 인식되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규정한 법조항(십계명, 곧 도덕법)의 많은 부분이 지금 우리가 지키고 있는 각 국가의 실정법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에서 바로 이 죄의 문제를 천착한다. 도스토옙스키가 만들어낸 대부분의 인물이 그렇듯이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불안하고 극단적인 인물이다. 가난한 삶을 살지만 진지하고 독특한 사색을 가진 청년이다. 자신의 자취방에서 "사회에 불필요한 인간을 없애 더 큰 공공의 선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은 정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공상에 빠진다. 공상은 곧 현실이 된다. 자신의 사상을 시험해 볼 요량으로 동네에 있는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계획적으로 직접 살해한 것이다. 범행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막상 살인을 저지르고 나니 극심한 혼란과 망상의 증세가 그를 억누른다. 며칠간 고열과 의식의 혼탁 상태가 이어진다. 그러던 중 지인과 경찰을 만나 대화하는 과정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범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아슬아슬하게 노출되고 방어된다. 소설은 에필로그 직전까지 그 긴장감을 철저히 유지한다.

상식적으로 볼 때 아무 이유 없이 노파를 죽이고 우발적으로 그 여동생까지 죽인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는 분명 엽기적 중범죄다. 그는 마지막까지 반성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살인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자신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비범성, 즉 특별함과 초월함을 갖고 있다는 망상으로 자기 자신을 합리화한다. 범행 후 여러 사람과의 만남에서 그의 예민하고 망상적인 행태는 점점 심해진다. 긴 소설 분량 대부분이 라스콜리니코프의 내적 혼란으로 채워져 있다. 그는 자신을 제대로 회복시키지 못한다. 자기우월과 자기혐오가 뒤섞인 정신분열적 실존이 인간 라스콜리니코프의 진본이다.

라스콜리니코프를 변화시키는 존재는 소냐이다. 술주정뱅이 마르멜라도프의 딸로서 아버지가 마차 사고로 치여 죽은 후 아버지 장례 과정에서 라스콜리니코프를 만난다. 소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춘을 택한 불운한 여인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자기희생을 잘 드러내며 작가적 장치라는 면에서 신앙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마치 순종과 희생으로 자기를 부정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오버랩되기도 한다. 소냐는 인간의 진정한 구원(부활)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하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그녀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수시로 신약성경의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를 들려준다. 죄를 비껴가지 말고 자수함으로써 정면 승부해야 할 것을 권면하기도 한다. 이런 대목은 기독교적 상징과 은유를 잘 담아낸다. 소냐는 종국 라스콜리니코프를 자수시키고 참회의 가능성으로 이끈다.

도스토옙스키는 왜 그토록 병적인 인간을 전면에 내세웠을까. 솔직히 라스콜리니코프는 위대한 고전의 주인공으로는 전형성과 일상성이 거의 없는 또라이다. "비범한 인간은 도덕법칙을 초월할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사상에 도취되어 사람을 둘이나 도끼로 찍어 죽인 인물이다. 미친놈이다. 이 막장극을 통해 도스토옙스키는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그건 아마 '역설'이 아니었을까 싶다. 인간성의 추악한 실체를 극한까지 몰고 감으로써 결국 하나님 없이는 인간은 어떤 선도 행할 수 없음을 깨우치고야 마는 그런 역설 말이다. 즉 도스토옙스키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극단적인 망가짐을 보여줌으로써 은혜로 살 수밖에 없는 인간론을 강하게 설파한다.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는 인류의 사상과 종교의 역사에서 항시 뜨거운 주제였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선하게 본 몇 안 되는 철학자다. 죄의 문제를 부조리(absurdism)란 신조어로 비껴간 카뮈 같은 자도 있다. 그러나 인간 본성을 악하거나 타락했다고 본 전통이 훨씬 두텁고 오래된 흐름이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위시하여 그를 계승한 루터와 칼빈은 인간을 전적 타락(Total Depravity)한 존재로 규정했다. 홉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주장하며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이기적 욕망에 지배된다고 말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 에로스, 타나토스 등을 통해 인간의 악성을 탐구했고, 니체는 선과 악을 권력 투쟁의 산물로 해석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인간을 '믿을 만한 존재'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철저히 인간은 절대적으로 악하다는 입장에 서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칼빈의 계보인 것이다.

많은 책을 읽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명확하게 깨달은 게 있다. 인간은 절대로 선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에게 인간은 "가만히 놔두면 자신의 자유의지로 악에 빠질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규정된다. 법과 도덕은 인간의 악을 감소시키기 위한 마지노선일 뿐이다. 인간 구원은 인간 밖에 존재한 강력한 외부의 힘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성실한 친구 라주미힌은 소설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밝고 친절하고 합리적인 사람으로서 나중에 두냐와 결혼해 건강한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소설에서 멀쩡한 사람은 그 하나밖에 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라주미힌은 끝내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일말의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도덕적으론 성공했지만 구원의 성취에는 다가서지 못한 인물이다.

또한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죄가 일상화된 형태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극단적이되 이론적이라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일상화된 죄의 얼굴이다. 그는 하인을 학대하고 미성년자를 성추행한 의심을 받는다. 아내를 살해했다는 의혹도 받는데 이에 대해 인물 간의 심증만 있을 뿐 소설에서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현대인의 내밀한 일상에 실재한 죄의 형상을 은유한 것 같다. 그는 죄를 설명하거나 변명하지도 않는다. 죄와 함께 살아가는 인물로서 죄가 일상을 넘어 권태에 도달한 완성형 악인이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양심의 고통이 없고 회개 또한 불필요하다. 자기 욕망의 목적이었던 두냐(라스콜리니코프의 여동생)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결국 그는 자기 부정과 자기 소멸의 길을 택한다. 신도 없고 절대적 의미와 가치가 없는 세계는 공허하며 그 어떤 삶의 본질도 찾을 수 없기에 결국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예심판사(수사관) 포르피리는 『죄와 벌』을 신학소설이나 인간론 사상서로 읽히게 하는 주요한 인물이다. 포르피리는 가장 이른 시점에 라스콜리니코프가 범인이라는 내적 확신을 갖는다. 명확한 확신을 갖고 있음에도 라스콜리니코프를 체포하려 하지 않는다. 고발하지 않고 도망칠 길을 막지도 않는다. 대신 라스콜리니코프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다. 대화 속에서 논리적 우위를 점하는 방식이다. 확신은 가득하지만 정죄하지는 않는다. 합리적이고 냉정하고 통찰력이 있지만 그 또한 라주미힌과 같이 라스콜리니코프의 영혼을 구하지는 못한다. 왜 틀렸는지는 알지만 어떻게 부활할 것인지는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냐에게 바통을 넘긴다.

⑵ 소냐 - 구원이 작동하는 자리

반면 소냐는 라주미힌과 포르피리가 도달하지 못한 '특별한 은혜'를 아름답게 웅변해낸다.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서는 가능성의 통로의 길 위에 서 있다. 소설 『죄와 벌』에서 소냐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건 이 소설의 단 하나의 명료한 주제, 즉 '인간의 죄와 구원의 문제'를 관통하는 핵심 작업이다. 소냐의 삶은 고단하고 가난하고 비루해 보인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팔았다. 라주미힌처럼 도덕적 고지(高地)에 올라선 인물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소녀가 위대한 건 '자기 위치'를 안 다는 것에 있다. 그녀는 스스로 죄인임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를 판단하지 않는다(못한다). 어떤 이론이나 지적도 없다. 남의 눈의 티끌이 아닌 자기 눈의 들보에 주목한 소냐의 겸손함은 율법적 정죄가 아닌 은혜의 통로만이 인간의 살 길임을 명징히 보여준다.

성경에 대한 소냐의 태도 또한 주목할 만하다. 소냐가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반복적으로 읽어주는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는 신약성경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기적의 메시지다. 죽은 지 나흘 동안 무덤에 있던 나사로를 예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살려낸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 사역 중 마지막이자 최대의 표적이다. 중요한 건 소냐는 이 본문을 설명하지 않고 그저 읽어주기만 한다는 점이다. 적용도, 논증도, 교훈도 덧붙이지 않는다. 그저 말씀을 있는 그대로 소리 내어 읽을 뿐이다. 이는 정통 기독교의 말씀론(성경론)과 깊게 맞닿아 있다. 말씀은 인간의 해석으로 효력을 얻지 않는다. 말씀은 스스로 살아 역사한다(sola Scriptura + viva vox evangelii). 라스콜리니코프는 말씀을 듣고 즉시 회개하지 않지만 "죽은 자라 불려 나오는 사건"이 그의 내면에 깊이 심어진다. 이는 성령의 사역이지 설득의 결과가 아니다.

많은 독자들이 소냐를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감상하는 것 같다. 여러 온라인 리뷰를 읽어본 결과 소냐를 구원의 주체이자 동력으로 이해하는 후기가 제법 많이 눈에 띈다. 정통 기독교 신학에서 대속은 오직 그리스도의 몫(Solus Christus)이다.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자백을 요구하지 않고 회개를 재촉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고난의 길로 갈 때 "함께 가겠다"고 말할 뿐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아닌 교회의 역할과 정확히 일치한다. 교회는 죄를 사하지 못한다. 회개하는 죄인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는 곳이다.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구원이 작동하는 자리이다. 대속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이며 동행은 교회의 역할이다. 소냐는 인간을 구원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대체나 은혜의 생산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은혜를 피할 수 없게 만드는 환경이다. 결국 소냐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 안에서 '머무를 수 있는 자리'가 어떤 모습인가"를 농밀하게 상징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일갈한다. 인간은 인간 밖에 실재한 '강력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도스토옙스키에게 인간은 구원에 있어 절대 무능력한 존재다. 그래서 그는 그의 모든 작품에서 일관되게 은혜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을 탐구했다. 노파와 그의 여동생을 잔인하게 죽인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 행동에 끊임없이 괴로워하지만 끝까지 죄책감을 느끼거나 회개하지 않는다. 범행 후 공포와 혼란, 신경증과 피해 망상을 겪지만 그것들은 윤리적 죄책감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자기 힘이나 이성, 내면의 양심이 아닌 오직 소냐의 절대적 사랑에서 무너진다. 벌을 받을 때보다 사랑받을 때 더 붕괴하는 도스토옙스키 인간관의 절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냐는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않고 라스콜리니코프의 옆에 함께 있을 뿐이다. 죄책감이나 회개로 인해 구원으로 간 게 아니라 구원의 가능성을 먼저 만났기 때문에 죄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은혜인 것이다. 신(하나님)은 그 은혜를 인간이 피하거나 거부할 수 없도록 작정하셨다. 그래서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다. 『죄와 벌』이 윤리나 도덕 소설이 아닌 '은혜 소설'로 불리는 이유다.

⑶ 영향받은 작가와 기독교

도스토옙스키는 독실한 기독교(러시아정교회) 신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진 건 아니다. 젊었을 때 벨린스키, 생시몽, 푸리에와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던 중 급진적 사회주의 모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총살 직전 차르의 특사로 구제받은 경험을 통해 인간의 불완전성과 유한성을 경험한다. 이후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보내며 신약성경을 깊이 탐독한다. 이런 과정이 도스토옙스키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원인으로 분석된다. 산상수훈 정도의 도덕적 기독교에 머문 톨스토이와 달리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십자가와 부활을 온전히 붙잡았다는 점에서 그의 신앙은 정통 기독교에 머물러 있다.

아이러니한 건 도스토옙스키에게 영향을 받은 사상가 중 반기독교인이 수두룩하다는 점이다. 니체, 사르트르, 프로이트와 같은 이들은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거나 신을 부정한 사람들이다. "그는 내가 무언가를 배운 유일한 심리학자다."라고 도스토옙스키를 치켜세운 프리드리히 니체는 동시에 "신은 죽었다."를 외쳤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역설적 문장을 차용한 장 폴 사르트르는 본질에 앞서야만 하는 실존적 인간론을 설파했다. 도스토옙스키를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꼽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죄의 기준을 신이 아닌 인간 내면의 심리적 억압의 기제로 천착했다. 헤르만 헤세는 기독교 탈주 후의 영성을 그렸고, 앙드레 지드는 반기독교적 개인주의를 탐색했다. 흥미로운 건 이들을 통해 도스토옙스키의 기독교성이 더 강해진다는 사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믿는 자리에서' 인간을 쓰지 않고 '믿음이 무너지는 자리까지' 인간을 데려간 뒤 거기서도 예수를 놓지 않았던 작가였다. 니체, 카뮈, 사르트르는 인간의 죄·고통·자유를 끝까지 밀어붙였지만 '은혜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이라는 도스토옙스키의 통찰 앞에서는 멈춰 섰다. "인간은 스스로 책임질 수 있을 만큼 강한가."라는 질문 앞에 도스토옙스키의 대답은 일관된다. "아니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합니다." 철학적으로 불편하고 윤리적으로 모욕적인 답변이겠지만 소설이라는 장르 안에서 답변했기 때문에 그 일관됨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 문학의 힘이 있다.

소설의 힘은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데 있다. 이야기로 그저 보여줄 뿐이다. 철학자와 심리학자는 '전제->논리->결론'이나 '개념->체계->설명'의 방식으로 논증한다. 논박이 가능하고 회피가 가능하다. 그러나 소설은 전제와 결론보다 과정과 경험으로 말한다. 라스콜리니코프, 소냐, 라주미힌, 스비드리가일로프 등은 사유의 결과물이 아니라 삶의 실험체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모두 '신 없이는 못 버티는 인간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단 한 번도 신 존재 증명을 하지 않았다. 신이 없는 인간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인간의 선의를 끝까지 시험한다. 자유를 무한히 부여하고 책임을 전부 떠넘긴다. 그리고 질문한다.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독자는 이 질문에서 도망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 인간으로 살아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의 기독교는 '설득'이 아니라 '피할 수 없음'이 된다. 정리하자면 도스토옙스키는 신이 없으면 '끝까지 살 수 없다'는 것을 서사로 증언해낸 것이다.

⑷ 도체스토옙스키의 시간, 그리고 톨스토이

『죄와 벌』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시간이 굉장히 압축되어 있다는 점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오랫동안 읽었는데ㅡ길고 무거운데ㅡ실제 소설 속에서 이야기가 흐르는 시간은 아주 짧다. 소설 시작부터 결말까지 1년 남짓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기 전까지는 몇 달밖에 되지 않는다. 더욱이 핵심 사건들은 2-3개월 안에 몰려 있다. 살인 전후의 핵심 드라마는 2주 정도다. 즉 노파 살인, 정신 혼미, 경찰 조사, 소냐와의 만남, 인물들 간의 심리전, 스비드리가일로프 사건, 자백 등등. 소설 전체를 덮고 있는 이 모든 게 약 10일~2주 안팎에 벌어진다. 더욱이 재판 과정은 생략되었고 시베리아 유형은 에필로그 몇 장으로 요약되었다. 정리하면 『죄와 벌』은 분명 긴 소설이지만 이야기 속 시간은 짧고 인간의 내면만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난 소설이다.

이는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백치』도 실제 서사 기간은 1년에 불과하며 주요 사건은 특정 시기에 집중되었다. 가장 충격적인 작품 『악령』도 이야기가 흐른 시간은 수개월이다. 이 소설 또한 결정적 며칠에 모든 사건이 폭발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인물들 간의 설교와 토론이 많지만 사건 자체는 매우 빠르고 흐른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야기 전체가 1년 안에 이뤄지지만 핵심 서사는 부친 살해 전후 며칠에 불과하다. 이는 톨스토이의 작품들과 명백히 대조되는 지점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결혼-불륜-파국'으로 이어지는 긴 세월을 다룬다.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 전쟁 초기부터 몰락까지 약 15년의 역사를 관통한다. 『부활』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장기적 회고 구조를 갖는다. 이러한 차이는 두 작가의 소설의 결이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시간의 단위는 대화다. 그의 소설은 상황이나 배경 묘사가 축소되어 있다. 정확히 말해 의식과 대화가 배경을 압도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을 항상 떠든다. 이에 대해 미하일 바흐친은 '폴리포니(polyphony) 서사'로 정의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작가의 목소리가 중심이 되지 않고 여러 인물의 말이 서로 충돌하면서 의미가 만들어지는 구조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 세계관에서 시간의 흐름은 중요하지 않다. 결정적 순간이 중요하고 이를 따라가는 인간의 의식이 시간의 압축성을 주도해낸다. 반면 톨스토이에게 시간은 일상과 반복이다. 순간이 아닌 변화와 축적의 시간이다. 톨스토이의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인간은 단 한순간에 드러나고 톨스토이의 인간은 시간 속에서 형성된다.

내가 청소년기나 이십 대 때에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면 지금보다 더 매료되었을 것이다. 아직 인생의 희로애락을 다 겪어보지 못한 청춘의 시기는 많은 걸 모르지만 동시에 모든 질문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시간대다. 이 시기는 지혜의 응축과 깨달음의 밀도보다는 직감이 우선한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나 이반과 같은 인물에 더 몰입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삶은 변하기 마련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부모의 늙음을 보면 '왜 살아야 하는가'보다 '어떻게 오늘을 견디는가'가 더 중요한 주제가 된다. 더욱이 아이를 키우는 순간 톨스토이는 더 넓게 열린다. 아이는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서서히 자라고 배우고 멀어진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는 거의 없는 경험이다. 반면 톨스토이에게는 핵심 주제다. 내가 톨스토이의 소설에 더 깊이 감동받는 이유이다.

# 에필로그 : 4대 장편으로 향하는 관문

나는 이미 여러 지면에서 도스토옙스키보다 톨스토이가 더 탁월한 소설가임을 수차례 주장해왔다. 지금도 그 견해에는 변함이 없다. 인간은 단 한순간에 드러난다고 보는 도스토옙스키적 극단보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는 톨스토이적 일상이 보편 인간의 경험과 성찰에 더 부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내 입장은 내가 소설의 배경, 상황 전개, 심리의 축적, 인간이 환경 속에서 변해가는 과정 등을 주목하는 내 소설관의 기준에 깊이 종속되어 있다. 소설을 삶의 형식으로 읽어내는 나 같은 독자에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여전히 불편한 텍스트로 남는다. 하지만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 불편하긴 하지만 꼭 읽어야 하는 대상으로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시각이 변모했다는 점이다. 이는 과거 그의 소설에서 내가 붙잡지 못했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라는 측면에서의 독서를 리셋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제 <프롤로그>로 돌아가자. 나는 이 글을 열면서 "최근 내 주변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여러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배경이 되어 『죄와 벌』을 다시 집어 들었음을 고백했다. 대략 50년의 삶의 경험을 통해 얻은 내 통찰은 인간은 오류가 많고 추악하며 불완전한 존재라는 깨달음을 여실히 축적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독교 신앙은 '인간은 사랑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당위를 지시한다. 서로 부딪히는 진실과 당위의 혼합 속에서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는 건강한 인간론을 다듬어보길 원했다. 이에 마냥 "인간을 사랑하라."라는 교훈을 주기보다 "그런 인간을 보고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가혹하고 정직한 질문을 던지는 도스토옙스키를 손에 들게 된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 중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었다. 이번에 『죄와 벌』을 재독했으니 이제 순서대로 『백치』 - 『악령』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재독) 순으로 4대 장편을 독파할 예정이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역동적으로 관통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대작들을 통해 더 깊고 풍성한 인간론의 백미를 탐구해 보려 한다. 그래서 나의 지향은 "인간은 혐오스러울 만큼 타락했지만, 결국 바로 그 자리에서만 은혜가 의미를 갖는다."라는 궁극의 깨달음에 더 감동적으로 도달하는 것이다. 『백치』와 『악령』은 기존 소장본인 열린책들본으로 읽을 것이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만 김연경 번역의 민음사본으로 읽을 것이다. 번역에 대한 사유는 나중에 각 책들의 리뷰에서 밝히겠다.

서평을 마무리하자. 나는 옳다는 확신에 가득 차 타인을 무시하고 배제하고 끝내 '죽여버리는' 라스콜리니코프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이 있다. 그런데 정작 『죄와 벌』을 읽는 동안 "네가 혐오하는 그 인간의 씨앗이 사실은 네 안에도 있다"라는 불편한 속삭임이 끊임없이 귓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이 긴 여정(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독파)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에게 간절히 울부짖는다. 하나님!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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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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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미국의 1920년대를 '풍요와 쾌락의 시대'로 명명한다. 1920년대는 미국뿐 아니라 서방세계가 여러 분야에서 호황을 맛본 시기다. 미국에선 '재즈 시대'로 불렸고 독일에서는 '황금의 20년대'라고 불렸다. 경제적 풍요뿐 아니라 문화, 예술, 사회 모든 면에서 활활 타오른 역동적인 시기였다. 하지만 20년대의 번영은 1929년 월스트리트 주가의 대폭락으로 끝을 맞이했다. 이후 1930년대는 대공황의 시대였고 그동안 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기존 체제의 모순이 하나둘씩 폭발되기 시작했다. 결국 1939년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1920년대의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1인칭 화자 닉 캐러웨이가 소설의 실질적 주인공 제이 개츠비를 관찰하고 조명하는 이야기다. 대략적인 스토리는 이렇다. 뉴욕의 큰 섬 롱아일랜드에 닉의 대학 동창 톰 뷰캐넌이 살고 있다. 톰은 닉의 친척인 데이지와 결혼한 사업가다. 자신감 넘치지만 건방지고 거만한 성격을 가졌다. 톰은 데이지 몰래(?) 정부와 바람을 피운다. 그 때문인지 부부 사이가 좋지 않다.

개츠비는 닉의 옆집에 산다. 개츠비는 수시로 지인과 유명 인사를 자기 집에 초대해 화려한 파티를 여는 것으로 유명하다. 평소 개츠비에 호기심을 갖고 있던 닉은 우연히 그의 파티에 초대를 받아 처음 그를 만난다. 개츠비의 첫인상에 엄청난 매력을 느낀 닉은 그와 점점 더 가까워지며 여러 가지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된다. 개츠비의 엄청난 재력에 대해 세간에 여러 소문이 떠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금주법 시대에 불법 밀주와 도박으로 돈을 벌었고 데이지의 과거 연인이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소설의 이야기는 급물살을 타며 긴장을 배가시킨다.

단순히 보면 데이지를 잊지 못한 개츠비가 과거 사랑을 되찾기 위해 발버둥 친 사랑가로 읽힌다. 하지만 소설은 더 무겁고 복합적인 여러 상징을 심어놓음으로써 그 시대의 미국적인 것과 미국적이지 않은 것 사이의 긴장과 충돌을 묘사한다. 숭고함과 비루함, 정신과 물욕, 인내와 욕망이라는,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인 가치를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탐구하고 고발한다. 통속적인 연애소설을 넘어 1920년대의 미국 사회의 모순적 단면을 상징적으로 그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전은 문학사에 영웅을 남긴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통해 피예르와 나타샤를 남겼고,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와 로테를 남겼다. 카뮈는 뫼르소를, 도스토옙스키는 로쟈(라스콜니코프)를, 헤세는 싱클레어를 남겼다. 이 소설도 여지없이 매력적인 인물을 탄생시켰다. 개츠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일편단심은 눈물겹다. 순수하고 진지하고 희생적이다. 개츠비의 모든 관심과 언행은 오롯이 데이지를 초점으로 한다. 가난에서 거부(巨富)가 되고, 매일 성대한 파티를 열고, 닉에게 접근한 것도 모두 데이지와의 사랑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개츠비의 사랑은 대상의 실체와 무관하게 불변적이었다는 점에서 진한 감동이 있다.

반면 데이지는 속물적이다.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척하지만 내면에는 물욕이 가득 찬 여성이다. 남편 톰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개츠비에게 다시 돌아가는 건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한다. 자신에게 다시 오라는 개츠비의 요청에 데이지는 잠시 흔들린다. 하지만 개츠비가 밀수와 도박이라는 불법으로 떼돈을 벌었다는 사실을 알린 톰의 고발에 마음이 다시 닫힌다. 개츠비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었지만 데이지의 사랑은 조건적이었다. 개츠비는 자동차 사망사고를 낸 데이지를 대신해 범인이 되고자 한다. 이 사건의 오해로 결국 총에 맞아 사망한다. 자기 때문에 죽게 되었는데도 개츠비의 장례식에 얼굴조차 내밀지 않는 데이지의 모습은 악랄하기까지 하다. 시대의 상징성 면에서 개츠비가 정신을 은유한다면 데이지는 물질을 은유한다.

소설에서 마음을 뺏긴 인상적인 문장이 있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자기 집에 처음 데려온 장면을 묘사한 문장이다. "그는 (...) 그녀의 무척 사랑스러운 눈이 보이는 반응 정도에 따라 집에 있는 모든 것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것 같았다." 시인이자 번역가인 황유원은 일간지 칼럼에서 이 문장을 인용하며 "타인은 가끔 지옥이지만 세상을 새로이 보는 창문이 되기도 한다"고 해석했다. 매일 보는 집안의 풍경이 사랑하는 사람(데이지)의 눈으로 보니 전혀 새롭게 보인다는 의미다. 사랑이 자기 자신의 시각과 통찰을 더 깊고 넓게 만드는 것이다. "상대에게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의 눈이 내 눈을 대체하기 때문"이라는 황유원의 관찰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소설의 명장면(명문장)을 제대로 읽어내는 계기가 됐다.

또한 소설의 마지막 문장도 인상적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라는 마지막 문장은 영미문학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무리로 평가받는다. 언뜻 보면 문장이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과거로 떠밀려가는 것'과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은 양립 난해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문장의 여백이다. 과거로 떠밀리면서도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불가능이란 현실을 이겨내는 '일관된 노젓기'가 있어야 한다. 이 노젓기는 한 사람이나 한 세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여러 세대에 걸친 누적된 공감과 노력에 기반한다. 그것이 개인의 삶을 바꾸고 우리의 인생을 바꾸며 세계의 역사를 바꾼다. 작가는 물질주의의 팽배로 정신과 신앙이 오염된 미국 사회가 언젠가는 위대하게 부활할 것임을 유려한 명문장으로 희망하고 있다.

소설의 제목을 고찰하자. 개츠비는 왜 위대한 것일까. 매력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온갖 불법을 저지르고 끝내 사랑을 되찾지 못한 채 총에 맞아 죽은 비극적인 인물에게 '위대함'을 수여하기엔 쉽지 않다. 그 위대함이 데이지에 대한 사랑의 집념일 수도 있고, 아메리칸드림의 화려함일 수도 있고, 화자 닉의 시선에 비친 '위대함'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나는 '아이러니로서의 위대함'으로 풀이한 문학평론가 사라 처치웰(Sarah Churchwell)의 견해를 지지한다. 즉 첫사랑을 되찾기 위한 성공과 열정의 외면적 찬사를 뜻함과 동시에 도덕적·실체적 삶의 붕괴와 비극적 죽음의 허망한 위대함을 역설적으로 함의한 것이다. 이러한 긍정과 냉소의 다층적 의미는 독자에게 열린 해석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소설의 폭을 과히 넓히는 특별한 장치가 된다.

서평을 정리하자. 대학생 때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서 처음으로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알게 됐다.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 속 등장인물을 통해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만 자신과 친구를 할 수 있다"라며 이 작품을 극찬했다. 하루키의 미화에는 호불호가 갈릴 것이지만,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인기 순문학 작가의 극찬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분명한 건 개츠비라는 매혹적 인물을 탄생시킨 것 하나만으로도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가치는 충분하다. 시대와 나이, 정신과 물질, 좌절과 희망이라는 인간 세계의 여러 층위를 묘사하고 탐구한 고전 『위대한 개츠비』를 이웃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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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에게 희망을 (무선) 생각하는 숲 6
트리나 폴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주니어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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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는 이유는 간단하다. 시간의 풍파를 이겨낸 검증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동화에도 고전이 있다. 『어린 왕자』,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와 같은 책 말이다. 오랜 시간 동안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 위대한 이야기들이다. 나에게도 어린 시절에 감명 깊게 읽은 특별한 동화가 한 권 있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다. 초등학교에서 중학생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던 것 같다. 집 책장에 꽂혀 있던 것을 당시 진지하게 탐독했던 것만큼은 선연히 기억한다. 이후 내 '신분이 바뀔 때마다' 반복해서 읽었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은 1972년에 출간되었다. 지난 50여 년간 17개 언어로 번역되어 수백만 권이 팔려나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작가 트리나 폴러스는 올해 나이 아흔둘이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반전, 환경, 여성 운동을 아직까지도 열심히 하고 있는 행동주의 작가다. 칼 마르크스가 주장한 대로 "세계를 변혁시키는 게 지식인의 의무"라고 한다면 폴러스는 그 가장 적확한 본보기다.

호랑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가 주인공이다. 애벌레 기둥에서 만난 두 애벌레가 고치를 지나 나비에 이르는 과정이 아름답게 그려졌다. 처음부터 두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길을 알았던 건 아니다. 애벌레 기둥에 올라섰다가 실패하기도 하고 거기서 떨어지는 애벌레를 보고 낙심하기도 한다. 그 여정을 통해 두 애벌레는 서로 믿고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생각이 달랐고 가는 길이 달랐다. 호랑 애벌레는 다시 기둥으로 향하고 노랑 애벌레는 홀로 남는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고치(번데기)의 과정을 반드시 겪어야 한다는 걸 노랑 애벌레는 알게 된다. 결국 노랑나비가 된 노랑 애벌레는 기둥 높은 곳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호랑 애벌레를 향해 날아간다. 그리고 그에게 나비가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안내한다. 노랑나비의 인도에 따라 기둥을 내려간 호랑 애벌레는 노랑나비와 마찬가지로 고치의 과정을 통해 호랑나비가 된다. 둘은 함께 하늘을 훌훌 날아오른다.

이 짧은 이야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자그만 애벌레의 모습이 고단하고 남루한 우리네 삶의 현실을 오롯이 은유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와의 체제 대결에서 승리한 건 제도가 완벽해서가 아니다. 사회주의보다 더 나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에 더 맞았기 때문이다. 20세기는 인간에게 효율과 경쟁만 강조하는 자본주의는 일부분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려준 시기다. 누군가를 이기는 것에 희열을 느끼나 정작 다른 누군가가 나를 이기는 것에 결핍을 느끼는 게 인간이다. 경쟁은 세상을 윤택하게 하나 우리를 구원해 주진 못한다.

영업 경력 20년 차다. 지금 회사에서만 18년을 보냈다. 회사 인트라넷에 영업사원별 달성률이 전면에 배치된다. 치열히 경쟁했고 도전받았고 자극받았다. 경쟁과 실적은 나를 나 이상으로 만들었지만 때로는 나를 나 이하로 만들기도 했다. 이제는 안다. 경쟁에 끝은 없다는 것을. 정상은 누군가를 밟고 이김으로써 오르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 스스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올라 도달하는 것임을. 그렇기에 책 속에서 현자(賢者)와 같이 등장하는 애벌레는 "어떻게 나비가 될 수 있어요"라는 노랑 애벌레의 질문에 "한 마리의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버릴 수 있을 만큼 날기를 절실히 바랄 때 이루어진단다"라는 멋진 조언을 남긴 것이리라.

또 하나의 감상이 있다. 제목은 '꽃들에게 희망을'이지만 정작 책에는 꽃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애벌레에게 희망을'이나 '나비로 나아가는 희망을'이 맞는 제목 아닌가, 생각했던 때가 있다. 근데 지금은 그 꽃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알 것 같다. 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책을 읽고 있는 독자, 즉 나 자신일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책 속에서 약동하는 애벌레나 변이를 완성한 나비의 모습에 심취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정작 중요한 메시지는 꽃이란 존재에 있다. 나비의 행복은 정상에 오르는 게 아닌 꽃을 만드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꼭대기의 무의미함이 아닌 꽃 자체로서의 아름다움에 인간 삶의 궁극이 있다. 우리가 꽃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단순한 이야기와 가벼운 스케치의 그림으로 구성된 이 책은 매번 읽을 때마다 다른 울림을 준다. 읽을 당시 나이에 맞는 느낌과 감동이 전달된다고나 할까. 내 경험을 말하자면 이렇다. 소년 때에는 애벌레가 나비가 된 것 자체에 환희했다. 청년 때에는 두 애벌레 사이의 사랑에 감격했다. 나이가 든 후에는 나비가 되는 것의 본질을 궁구했다. 노년이 되어서는 또 어떻게 읽힐지 자못 기대한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내가 이 짤막한 동화를 내 신분이 바뀔 때마다 읽게 된 이유다.

유튜브 영상을 기획하는데 함께 일하는 정 PD가 어린이를 위한 동화를 추천하자고 권했다. 어떤 책을 추천할까 고민하다가 책장 한구석에 박혀 있던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책장을 연 순간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됐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 누군가에 의해 선물 받은 책이라는 것을. 정갈한 손 편지로 쓰인 문구가 당시 지독한 사춘기를 겪고 있던 중학교 1학년의 내 모습과 오버랩됐다. 이후 기나긴 고치의 과정을 겪었던 내 젊은 시절의 드라마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이 기분 좋은 기억의 복기가 책이 주는 감동과 혼합되어 내 눈가를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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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펭귄클래식 2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은정 옮김, 앤서니 브릭스 서문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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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삶과 죽음은 상치되는 걸까. 인류 고전사(사상사)를 새로 쓴 위대한 사색가들은 삶과 죽음이 본질적으로 동일선상에 있는 것임을 일갈해왔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출구에서 볼 때 너무 짧다"라고 했고 헤르만 헤세는 "맨 마지막 한 걸음은 자기 혼자 걸어야 한다"라고 했다. 부처는 "진실로 삶은 죽음으로 끝난다"라고 했고 소크라테스는 "죽음은 영원히 잠을 자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삶의 종국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삶과 죽음이 단절된 게 아니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에 쉽게 도달하게 된다. 삶을 강렬히 추구함으로써 죽음에 도달하며 결국 삶은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사에서 삶과 죽음을 치열하게 성찰한 작가가 있다.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다. 그는 평생에 걸쳐 삶과 죽음의 의미를 천착했다. 그의 모든 작품이 이 테마를 관통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삶의 예찬보다 죽음의 성찰에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게 톨스토이 문학의 특징이다. 장편만을 보자면 『전쟁과 평화』는 삶을 긍정하는 웅대한 걸작이며 『안나 카레니나』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천착한 예술작품이다. 『부활』은 죽음의 의미를 깊이 고뇌하는 후기 톨스토이의 원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실제로 기차역에서 객사한 그의 죽음 또한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이색적인 죽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톨스토이의 소설 중 죽음을 다룬 가장 탁월한 작품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이 소설은 톨스토이가 산전수전을 다 겪은 후 인생 후반부에 쓴 짤막한 분량의 중편소설이다. 병상과 죽음에 관한 소설로는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독자로 하여금 어마어마한 몰입력을 선사하는데 일단 첫 장을 넘기면 도중에 정지할 수가 없다. 한달음에 달려 소설 말미에 도착한다. 소설의 3인칭 화자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한 인간의 죽어가는 과정을 고요하면서도 생생하게 들려준다.

소설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부패한 러시아 관료사회에서 승진과 성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판사이다. 사회에서 시키는 대로 공부를 했고 그에 맞춰 자신의 능력을 보여줬으며 상류층과 결혼하는 것이 옳다고 믿고 그렇게 결혼하였다. 남부러울 것 없이 뭐든 착착 해내는 인물이었기에 별다른 걱정과 근심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찾아든 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간다. 육체적 질고에 의한 극심한 고통은 그답지 않은 고성과 울부짖음을 통해 밖으로 표출된다. 가족들은 경악한다. 그는 죽음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인생은 진정 즐거운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의 삶은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덧없고 의심스러웠으며 하루 살면 하루 더 죽어가는 그러한 삶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를 추적해가는 주인공 자신의 독백과 이를 묘사하는 작가의 3인칭 서술이 압권이다.

"여러분, 이반 일리치가 사망했다는군요." 이반 일리치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장 동료들은 하나같이 그의 죽음이 자신과 다른 동료들의 승진이나 인사 발령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계산하느라 바쁘다. 동료의 죽음에 겸허히 슬퍼하기보다 어떤 득실이 있을지를 먼저 챙기는 그들의 세속적인 모습이 악랄해 보이지만 어쩌면 그것이 모든 사람의 내면에 내재된 인간 본성의 진실한 민낯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악인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소설 속 인물 중 주인공의 하인과 어린 아들은 선한 영혼의 표상으로 등장한다. 사회적 지위가 가장 낮은 두 명만이 올바른 영혼의 소유자인 점은 이채롭다. 인간 됨의 본질과 원형은 부와 지위와는 무관한 것임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소설은 결말을 먼저 알려준 뒤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목에서부터 결론이 명시되어 있다. 그렇기에 반전이 있을 리 없고 이야기의 뒤틀림이나 전환도 없다. 한 남자가 병에 걸려 죽어가는 뻔한 내용이고 결론으로서도 역시 뻔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뻔한 이야기를 중편 분량으로 몰입감 있게 풀어낸다는 게 놀랍다. 모든 문장 하나하나가 읽을수록 감탄스럽다. 책의 막장을 덮었을 때는 가슴속에 무언가의 싱숭생숭함이 남을 정도다. 가장 큰 여운은 나와 죽음 사이의 간극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을 알 때, 아니 내가 죽어간다는 것을 피부로 체감하며 시간의 흐름을 느낄 때, 과연 나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때 심정은 어떤 색깔일까. 여러 사유가 샘솟는다. 불변의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라는 것이다.

독자마다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은 가지각색이다. 혹자는 이 소설에 대해 한 개인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이야기가 아니라 톨스토이가 후세의 사람들에게 남기는 구원의 메시지라고 평가한다. 이반 일리치는 초반에 출세욕만 가득 찬 인물로 그려지지만 병마와 씨름하면서 점차 심경의 변화를 겪는다. 그러면서 현재보다 과거의 삶이 더 선하고 아름다웠음을 깨닫는다. 그가 되새기는 유년의 빛나는 기억은 찬란하다. 그렇다고 자신이 잘못된 삶을 산 건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신의 존재에 관해서도 여전히 부정적이다. 병세가 깊어지며 죽음을 앞두고 성찬식을 치렀음에도 자신의 현재 삶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 생각하며 회개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의 코앞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참회한다. 죽음의 직면에서 결국 자신을 내려놓고 객관화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인간 유한성의 처연한 한계를 엿본다. 삶이란 그저 선하고 진실되게 살아야 한다는 걸 일깨우는 것이다.

해외문학은 항시 번역의 문제에 봉착한다. 시중에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다. 어느 출판사 어떤 역자도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인다. 서점에서 대략 대여섯 개의 번역본을 훑었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잘 읽혔다. 톨스토이의 중·단편은 서사의 힘이 강하고 메시지가 분명하기 때문에 번역의 변수를 뚫는 힘이 있다. 번역의 질에 따라 작품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대개 중·단편은 여러 작품이 함께 실리기 때문에 출판사마다 함께 실린 소설이 다르긴 하지만 번역 자체가 문제 될 만한 번역본은 찾지 못했다. 중고서점에서 눈에 띄는 것 아무거나 골라잡아도 죽음에 관한 톨스토이의 혜안을 느끼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전에는 톨스토이의 웅장한 장편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가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지금도 그 견해에는 변함없다. 이제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비록 120쪽 남짓한 작은 분량이지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여느 장편에서도 느끼기 힘든 삶과 죽음에 관한 걸쭉한 사유가 담겨 있다. 죽음을 앞둔 한 남자의 독백(3인칭 서술)만으로 이렇게 웅숭깊고 통찰력 있는 메시지를 끌어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역시 톨스토이다. 이 소설이야말로 평생 곁에 두고 삶이 무료할 때마다 꺼내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죽음의 과정을 다룬 듯 보이지만 실상 삶의 희망을 맹렬히 추적한 소설이다. 고전에도 품격이 있다. 아직 안 읽은 사람이 있다면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구독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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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이체르 소나타 (반양장) 펭귄클래식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기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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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두

단언하건대 '사랑'과 '결혼'과 '섹스'는 하나다. 사랑의 결실이 결혼이며 섹스는 그것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 언제 적 얘기하느냐 투덜거릴 사람이 있겠다. 하지만 난 그렇게 믿는다. 인류는 항시 이 문제와 씨름했다. 아담과 하와 이래 가장 긴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아무리 시대와 문화가 바뀌었다 하더라도 가정을 지키기 위한 인간의 본성은 훼손되지 않았다. 이를 지키지 못한 실패자들의 변명과 울부짖음만 요란했을 뿐. 그리고 현대 시대에 들어서 모든 진리와 기준을 파괴하려 한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고약한 발악이 더해졌을 뿐.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작품은 항시 이 주제를 응시한다. 웅대한 걸작 『전쟁과 평화』가 그랬고 가장 예술적인 작품 『안나 카레니나』는 더 그랬다. 중편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그 중심에 있다. 톨스토이의 다른 중편 세 작품과 함께 실린 이 소설집은 톨스토이 결혼관의 넓은 스펙트럼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초기작인 『가정의 행복』은 결혼과 사랑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탐구한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결혼의 부정성에 주목하고, 『악마』는 결혼 안에서의 섹스조차 더러운 것으로 치부한다. 『신부 세르게이』는 인간 정신의 한계와 모순에까지 다다라서 인간의 육체적 욕망을 비난한다. 성적 욕망을 거세하고 타인을 위한 선한 행위에 복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실 나는 톨스토이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랑과 결혼은 내 평생의 주제이기 때문에 이번 서평은 꽤 긴 글이 될 것이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위시하여 총 4개의 중편소설을 순차적으로 간략히 리뷰한 뒤 톨스토이(후기) 결혼관에 대한 반론과 그의 소설이 아이로니컬한 방식으로 가정의 중요성을 지지한다는 근거를 제시하려 한다. 또한 성적 욕망은 결혼 안에서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을 통해 행복한 가정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심층적으로 논설하고자 한다. 참고로 이 주제에 관한 내 입장은 철저히 보수·기독교적 관점에 서 있다는 걸 미리 알려둔다. 그럼 본격적으로 서평을 시작한다.

2-⑴. 『가정의 행복』

『가정의 행복』을 보자. 줄거리는 아름답다. 젊은 소녀(17살)가 아버지뻘 되는 아저씨와 사랑에 빠진다. 둘 다 사랑하는 마음을 감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통해 서로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에 골인한다. 결혼 후 도시로 이사한 뒤 둘의 사랑은 위기를 맞는다. 아내가 사교계에 발을 디디면서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질투, 냉소, 조롱, 불신, 증오 등의 갈등이 싹튼다. 결혼생활은 파괴 직전까지 나아가는 듯하지만 부부관계는 반전을 맞이한다. 아이를 낳은 후 둘은 전혀 다른 차원의 행복의 단계에 올라선다. 결혼생활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결로 다가오게 된다. 아이를 키우며 오손도손 살아가며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 이 소설만 본다면 톨스토이는 결혼 예찬론자다.

『가정의 행복』은 톨스토이가 결혼 전에 쓴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사랑에 대한 소녀적 감성과 결혼에 관한 현실적 긍정이 돋보인다.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의 두 가지 원형(단계)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부부 사이의 뜨거운 애정과 열정이다. 사랑의 호르몬은 5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들도 처음에는 강렬한 사랑을 갈구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시들어지고 냉소와 의심이 쌓인다. 점차 냉랭해지고 서로 간 사랑에 무감해진다. 하지만 자식을 낳아 기르는 과정에서 두 번째 가정의 행복이 도출된다. 즉 톨스토이가 말하는 가정의 행복은 부부 사이의 관심과 사랑을 넘어 자식과 주변을 향해 점차 확대해가는 정신적 성숙에 닿아 있다. 『가정의 행복』은 그 아름다운 원형을 안정감 있게 보여준다.

2-⑵. 『크로이체르 소나타』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가정의 행복』과는 전혀 다른 결혼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의 흐름은 1인칭 화자 '나'가 기차에서 만난 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이뤄진다.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 남자의 얘기가 서술된다. 그는 사랑의 확신 없이 외적 매력에 끌려 한 여자와 결혼한다. 결혼 후 자주 불화와 권태를 이루지만 그때마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결혼생활을 이어나간다. 어느 날 아내에게 음악적 파트너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등장한다.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아내는 바이올리니스트와 베토벤의 소나타 9번(크로이체르 소나타)을 협주하고 그(남편)는 질투와 부러움이 뒤섞인 미묘한 감정으로 그들의 모습을 관찰한다. 얼마 뒤 지방으로 출장을 떠난 그는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집으로 되돌아온다. 새벽에 도착한 그는 아내가 바이올리니스트와 단둘이 식사하고 있는 장면을 본다. 광기에 휩싸인 그는 아내가 불륜을 저지른 것으로 오해하여 아내를 칼로 찔러 죽인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톨스토이 후기작이다. 『안나 카레니나』 이후 톨스토이의 작가적 세계관이 크게 변화한다는 점에서 『안나 카레니나』의 말미와 연결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끝내 말하지 않은(못한) 결혼의 무의미성 혹은 유해성을 감추지 않고 작정하듯 전달한다. 결혼은 결코 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는 것이다. 결혼은 '합법적 매춘'과 다름 아니다. 결혼은 더 이상 성스러운 의식이 아니다. 상류사회의 시장에서 벌어지는 거래로서 매매춘과 다를 바 없다. 유곽의 여성과 사교계의 여성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믿는 소설 속 화자(그)의 다음 대사는 과히 충격적이다. "엄밀히 말해서 짧은 기간의 창녀는 경멸을 당하고, 긴 기간의 창녀는 존경을 받는 거지요."

2-⑶. 『악마』

『악마』는 더 파격적이다. 이 소설은 섹스 자체를 부정한다. 참한 아내를 두고 평범한 가정을 이룬 예브게니는 아버지로부터 일부의 유산과 많은 빚을 상속받는다. 빚을 갚기 위해 물려받은 농장을 열심히 경영해나간다. 하지만 그에게는 큰 고민이 있다. 주체할 수 없는 성적 욕구 때문이다. 고민하던 중 지인으로부터 동네의 유부녀를 섹스 파트너로 소개받아 수시로 욕정을 채운다. 성적 욕망에 불타오를 때마다 그녀와 은밀한 곳에서 섹스를 한다. 그러다 동네에 소문이 나게 되고 다시 정신을 차려 가정에 충실하고 농장 일에 집중하려 하지만 섹스 파트너에 대한 욕망의 심연을 지우기란 쉽지 않다. 자기 자신과 섹스 파트너의 모습에서 '악마'의 현현을 느낀다. 이에 괴로워한 예브게니는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악마』는 톨스토이가 집필한 뒤 집 소파에 숨겨둔 작품인데 나중에 아내 소냐가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톨스토이가 숨겨둔 이유는 톨스토이 자신의 자전적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톨스토이는 이미 16세 때 매춘부에게 자신의 동정을 버렸다. 또한 결혼 전에 농노의 아내와 육체적 관계를 갖기도 했다. 그 사이에서 아들도 태어났다. 톨스토이가 그 시절 얼마나 육체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는 그의 일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시절의 자신을 '악마'로 보았던 것 같다. 후기 톨스토이는 성적 욕망 자체를 결혼과 상관없이 악하게 보는 입장이다. 결혼의 본질이 정신적인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욕구에 있다고 냉소할 정도로 결혼(가정)에 부정적이다. 『악마』는 이러한 후기 톨스토이의 결혼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2-⑷. 『신부 세르게이』

『신부 세르게이』는 조금 특별하다. 이 소설은 결혼과 사랑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우회적으로 비아냥대며 정작 중요한 삶의 본질이 있음을 강조한다. 약혼자가 황제의 정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주인공)는 파혼하고 신부가 된다. 수도원에서 철저한 금욕주의적 삶으로 일관하는 남자에게 외부의 유혹이 찾아온다. 어느 이혼녀가 은자 생활하는 곳까지 찾아와 유혹하지만 도끼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냄으로써 위기를 이겨낸다. 이후 병 고침의 기적까지 행하면서 점점 유명세를 탄다. 그러다 어느 날 치료를 위해 찾아온 22살의 금발 여성의 유혹에 결국 무너져 버리고 만다. 충격을 받은 남자는 신은 없다고 단정하고 농촌을 떠돌며 부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모든 걸 버리고 죽기로 작정한 순간 어렴풋이 어릴 때 알았던 자신의 여자친구를 기억하게 되고 그녀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삶의 진리를 발견하고 자유함을 느낀다. 그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소자에게 물 한잔 떠주는 것에 삶의 진리가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 소설이 우회적으로 결혼과 사랑을 비아냥댄다는 건 성직자의 고결한 신앙심과 과거 유혹을 이겨낸 절개마저도 젊은 여자의 유혹 앞에서 단 한순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한계의 장면에서 읽을 수 있다. 또한 사랑해서 결혼을 코앞에 두었지만 과거가 있는 예비 신부의 솔직한 고백 앞에 모든 것을 거부하는 극단적인 모습은 사랑의 궁극을 초라하게 만들 정도로 난감하다. 결국 톨스토이는 행복의 궁극을 가정이 아닌 사회에서 찾는다. 가정은 행복할 수도 없고 행복해서도 안 되는 곳이다. 진정한 삶은 신의 계시를 통해 항시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변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해 선한 행동을 하는 데 있는 것이었다. 즉 『신부 세르게이』는 금욕주의, 무정부주의, 인도주의 등으로 대변되는 '톨스토이즘(Tolstoyism)'의 가장 완성된 형태를 보여준다.

3. 정리

정리하면 『가정의 행복』은 전기 톨스토이를 대변하는 소설로 결혼과 가정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반면 『크로이체르 소나타』 외 2개 소설은 톨스토이가 노년이 되어 쓴 후기작으로 안온한 결혼생활과 정신적 사랑을 거부한다. 사실 전기 톨스토이가 옳으냐 후기 톨스토이가 옳으냐는 무의미하다. 이 글의 첫 문단에 "사랑과 결혼과 섹스는 하나다"라고 외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초기작 『가정의 행복』이 더 끌리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네 개의 중편 모두를 긍정한다. 내용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을 끌어낸다. 성과 결혼에 대한 개별적 담론이 행복하고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위해 정작 무엇이 중요한지를 가감 없이 들추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 가지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으로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라는 명언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절대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돈(능력/책임)'과 '성(性, sex)'이다. 이 두 가지는 톨스토이의 전작에 일관되게 흐르는 테마이기도 한데 실제 결혼생활에서 이것들만큼 민감하고 결정적인 건 없다. 어쩌면 톨스토이의 결혼생활도 이것이 충만했을 때 행복했고 이것이 문제였을 때 불행했을 것이다. 그렇다. 다시 말해 남편의 부양력이 중심이 된 윤택한 경제생활과 부부 사이의 친밀한 육체적 관계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가장 긴요한 전제조건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보다 심화된 논설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4-⑴. [심화]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두 가지 키워드 - ① 남자(남편)의 경제적 책임감

행복한 결혼생활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할 때 정말 어려운 건 그것이 부부 사이만 아는 내밀한 영역을 관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영역이기에 가정(결혼)과 관련한 수많은 책을 읽었고 상담자로서 많은 부부클리닉을 진행해왔다. 부부관계에 위기를 겪는 지인들과 정말 깊은 상담을 나누었다. 그러면서 결혼생활의 근본적 위기가 '남자의 경제적 무책임'과 '부부 사이의 섹스 트러블', 이 두 가지에 대부분 기인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또한 당사자들은 이 두 가지 진실을 밖으로 드러내기 싫어하고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았다. 대부분 '성격 차이'라고 전하는 이혼 사유도 기실 진실을 감추기 위한 가장 만만한 수사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성격이 차이 나서 싸우는 게 아니라 다른 내밀한 원리가 고장 났기 때문에 서로 간 맞지 않는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남자의 경제적 책임감과 부부 사이의 성적 친밀성은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절대 명제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장려되고 맞벌이가 보편화된 사회에서 '남자의 경제적 책임'을 강조하는 건 고리타분한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아니냐 항의할 사람이 있겠지만, 이는 진실이다. 아담과 하와 이래 남성의 본질은 '일하는 것'에 있다. 남성은 존재적으로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일과 사랑에 균형이 이루어질 때 자존감이 결핍되지 않은 완전한 남자가 된다. 이는 문화인류학적, 사회학적으로 "남자의 위치는 여자의 위치를 결정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라는 진실로 연결된다. 즉 남자가 잘나가면 여자는 그 영광을 따라가지만 그 거꾸로는 되지 않는 것이다. "여자(처가) 잘 만나서 복받았다"라는 세간의 얘기는 대부분 뒤에서 "쯧쯧. 남자 새끼가..."라는 험담을 전제로 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부정할 수 있을까. 내 경험은 대부분 이 진실을 지지했다.

최소한 처자식을 먹여살릴 수 있는 기초적인 부양력은 결혼한 모든 남자가 가져야 할 기묘한 숙명이다. 여자의 경제력이 이를 커버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될 경우 이상하게 잡소리가 생긴다. 남자 스스로의 자격지심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아내 돈으로 살아가는 무능한 남편은 자신만 모를 뿐, 아니 알려 하지 않을 뿐 일차적으로 아내 속 깊은 곳에 상처를 새긴다. 더 나아가 부모와 자식에게는 안줏거리가 된다. 주변 이웃들에게는 공공연한 비밀 험담의 주제가 된다. "아내가 착하고 자기도 크게 신경 쓰지 않기에 우리 가정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남자들이 있다. 착각하지 말라. 조소와 비아냥은 허공을 떠돌다 결국 자기들(당사자 부부)에게 도착해 둘 사이의 정서적 온기를 파괴하는 조악한 바이러스가 된다. 나는 이 실례를 주변에서 수없이 봐왔다.

물론 여자의 피나는 노력으로 이를 극복한 사례가 없지 않다. 그리고 정말 일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남자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것이 복이든 벌이든 신으로부터 죽을 때까지 일하는 존재로 규정된 남자의 존재적 당위에서 '일하지 않는 남자(돈 벌지 않는 남자)'는 불편하고 어색하다. 어느 문명권에서나 그랬다. 지금도 그렇다. 여권이 앞선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자의 위치는 남자의 위치를 결정하지 못한다. 부정하려 해도 기각되지 않는다. 인류 보편적 DNA로 전 지구인에게 체화된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이를 여자의 자기계발이나 경제력을 무시하거나 전업주부의 노동을 폄하하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남자의 본질과 결혼생활의 원리 면에서 보편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4-⑵. [심화]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두 가지 키워드 - ② 부부 사이의 성관계(sex)

행복한 가정을 위한 또 하나의 절대 명제는 부부 사이의 섹스다. 건강한 부부는 결코 섹스로 스트레스 받지 않는다. 내가 아는 모든 행복한 부부는 부부관계(섹스)가 원활했고 내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불행한 부부는 부부관계가 원활하지 못했다. 이는 여자(아내)의 가장 중요한 역할(의무)을 드러내는데 그건 남자(남편)의 성욕을 이해하고 거기에 봉사하는 노력이다. 물론 거꾸로(남편->아내)도 해당한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여자보다 10배나 많은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을 가진 남자의 동물적 욕구가 더 강하기 때문에 비율상 전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남자의 절제와 여자의 이해(노력)가 화합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트러블이 생긴다. 적지 않은 부부가 이 대목에서 갈등을 가진다. 하고 싶은 남편과 하기 싫은 아내 사이에 불편한 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고장 나면 서로가 싫어진다. 어색해지고 냉랭해지며 거칠어진다. 어디서 말하기도 어렵다. 비극이다.

부부의 섹스는 고결한 것이다. 흔히 사랑의 삼원성(三原性, triality)을 얘기할 때 완벽한 절대 사랑 아가페(agape)를 치열하게 밀어주는 건 바로 감각의 사랑 에로스(eros)다. 또 다른 사랑의 원형 필리아(philia)가 사랑의 태도를 규정한다면 에로스는 사랑에 감각적 열정을 더한다. 조금 난해한 원리이기 때문에 이를 설명하고 이해함에 있어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인용하고자 한다. 신약성경은 남편을 '그리스도'로 아내를 '교회'로 상징한다. 남편과 아내의 가장 중요한 책임(역할)으로 남편은 아내에 대한 사랑을, 아내는 남편에 대한 순종을 제시한다. 즉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죽으심 같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 복종한 것처럼 남편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구약성경 <아가서>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메타포 되는데 부부 사이의 성적 행위가 얼마나 고결하고 아름답게 천국의 모습을 형상화하는지를 알려준다.

<아가서>에 함의된 부부 사이의 육체적 사랑의 의미에 대해 조금 더 보태보겠다. <아가서>의 기자는 욕정에 불 타오르는 남녀 간의 사랑, 즉 에로스적 사랑을 하나님(기독교 삼위일체의 신)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노래한다. 이는 남녀 간의 연합의 의미를 통해 하나님과의 연합에 대한 좋은 통찰을 제공하는 데 결혼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부부는 이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사이이며 사랑하기에 서로가 원하는 것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사이이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연합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연합이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치이며 그 뜻에 대한 순종이라고 할 수 있다. 성도가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경험하다 보면 하나님의 뜻을 확신할 수 있다. 나아가 사랑하기에 어떤 어려운 계명도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다. 그 순종의 정점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인데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즐거움으로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즉 부부의 육체관계야말로 가장 치열한 영적 행위인 것이다.

부부관계조차도 인간의 동물적 욕정으로 본 후기 톨스토이의 시각은 지나치게 편협하고 단선적이다. 물론 사랑과 성욕 사이에 긴장감이 있다는 걸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그리스도-교회' 관계의 표상처럼 부부관계 안에서는 사랑은 성욕을 포괄하고 성욕은 사랑을 끌어준다. 분리되는 게 아니라 합일됨으로 온전한 아가페로 나아간다. 부부의 섹스는 서로에 대한 애정과 찬미, 미움과 아쉬움을 용해시키는 용광로와 같은 것이며, 서로를 가장 열정적으로 긍정하는 찬란한 천국적 행위이다. 그렇기에 본질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너를 위한 것이며 때로는 너를 위할 때 비로소 나의 것이 되기도 하는 신비의 의식이다. 결국 필연적으로 서로(부부)의 것이 되고야 마는 신성적 마술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부의 '몸의 연합'인 것이다. 이것이 무너진 부부는 행복할 수 없고 그 결혼생활은 싸늘한 공기에 사로잡힐 뿐이다. 부부관계가 냉랭하다면 반드시 이 대목을 점검하라.

톨스토이의 말대로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다. 가정을 이루는 여러 각론이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총론에 모두 묻히고 치환되기 때문이다. 정작 당사자들만 애써 부정하며 다른 소리를 할 뿐.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건강한 결혼생활은 요원하다. 여전히 부부관계를 말하는 건 어렵다. 온전히 둘만의 영역이다. 부부 사이는 은밀하고 섬세하고 예민한 공간이다. 어느 누구도 들어가면 안 된다. 부모든 자식이든 친구든 그 어떤 것이든 말이다. 부부는 촌수도 없고 세금도 없다. 서로 완벽한 합일과 연합을 이룸으로써 고된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관계다. 어쩌면 톨스토이가 말년으로 갈수록 결혼과 사랑을 부정한 이유가 본인 스스로 가정 안에서 천국적 삶을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자기 거부적(회피적) 역설이지 않았을까.

5. 마무리

서평을 정리하자. 책 리뷰보다 결혼에 관한 리뷰어의 주관이 길게 서술된 장황한 글이 됐다. 그럼에도 톨스토이의 소설을 통해 행복한 결혼생활을 탐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자평한다. 톨스토이가 위대한 건 바로 그 특유의 지나친 솔직함에 있다. 청년 시절 창녀촌에 가서 동정을 잃은 일기를 굳이 결혼 직전에 아내에게 공개할 정도로 솔직한 그의 작품에는 정말 말하기 힘든, 하지만 정작 진실을 담고 있는 많은 삶의 편린이 담겨 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그 최전선 작품이다. 허투루 지나칠 없는 고전이다. 반드시 읽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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