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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에게 희망을 (반양장) 생각하는 숲 6
트리나 폴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주니어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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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는 이유는 간단하다. 시간의 풍파를 이겨낸 검증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동화에도 고전이 있다. 『어린 왕자』,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와 같은 책 말이다. 오랜 시간 동안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 위대한 이야기들이다. 나에게도 어린 시절에 감명 깊게 읽은 특별한 동화가 한 권 있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다. 초등학교에서 중학생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던 것 같다. 집 책장에 꽂혀 있던 것을 당시 진지하게 탐독했던 것만큼은 선연히 기억한다. 이후 내 '신분이 바뀔 때마다' 반복해서 읽었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은 1972년에 출간되었다. 지난 50여 년간 17개 언어로 번역되어 수백만 권이 팔려나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작가 트리나 폴러스는 올해 나이 아흔둘이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반전, 환경, 여성 운동을 아직까지도 열심히 하고 있는 행동주의 작가다. 칼 마르크스가 주장한 대로 "세계를 변혁시키는 게 지식인의 의무"라고 한다면 폴러스는 그 가장 적확한 본보기다.

호랑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가 주인공이다. 애벌레 기둥에서 만난 두 애벌레가 고치를 지나 나비에 이르는 과정이 아름답게 그려졌다. 처음부터 두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길을 알았던 건 아니다. 애벌레 기둥에 올라섰다가 실패하기도 하고 거기서 떨어지는 애벌레를 보고 낙심하기도 한다. 그 여정을 통해 두 애벌레는 서로 믿고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생각이 달랐고 가는 길이 달랐다. 호랑 애벌레는 다시 기둥으로 향하고 노랑 애벌레는 홀로 남는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고치(번데기)의 과정을 반드시 겪어야 한다는 걸 노랑 애벌레는 알게 된다. 결국 노랑나비가 된 노랑 애벌레는 기둥 높은 곳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호랑 애벌레를 향해 날아간다. 그리고 그에게 나비가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안내한다. 노랑나비의 인도에 따라 기둥을 내려간 호랑 애벌레는 노랑나비와 마찬가지로 고치의 과정을 통해 호랑나비가 된다. 둘은 함께 하늘을 훌훌 날아오른다.

이 짧은 이야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자그만 애벌레의 모습이 고단하고 남루한 우리네 삶의 현실을 오롯이 은유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와의 체제 대결에서 승리한 건 제도가 완벽해서가 아니다. 사회주의보다 더 나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에 더 맞았기 때문이다. 20세기는 인간에게 효율과 경쟁만 강조하는 자본주의는 일부분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려준 시기다. 누군가를 이기는 것에 희열을 느끼나 정작 다른 누군가가 나를 이기는 것에 결핍을 느끼는 게 인간이다. 경쟁은 세상을 윤택하게 하나 우리를 구원해 주진 못한다.

영업 경력 20년 차다. 지금 회사에서만 18년을 보냈다. 회사 인트라넷에 영업사원별 달성률이 전면에 배치된다. 치열히 경쟁했고 도전받았고 자극받았다. 경쟁과 실적은 나를 나 이상으로 만들었지만 때로는 나를 나 이하로 만들기도 했다. 이제는 안다. 경쟁에 끝은 없다는 것을. 정상은 누군가를 밟고 이김으로써 오르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 스스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올라 도달하는 것임을. 그렇기에 책 속에서 현자(賢者)와 같이 등장하는 애벌레는 "어떻게 나비가 될 수 있어요"라는 노랑 애벌레의 질문에 "한 마리의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버릴 수 있을 만큼 날기를 절실히 바랄 때 이루어진단다"라는 멋진 조언을 남긴 것이리라.

또 하나의 감상이 있다. 제목은 '꽃들에게 희망을'이지만 정작 책에는 꽃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애벌레에게 희망을'이나 '나비로 나아가는 희망을'이 맞는 제목 아닌가, 생각했던 때가 있다. 근데 지금은 그 꽃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알 것 같다. 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책을 읽고 있는 독자, 즉 나 자신일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책 속에서 약동하는 애벌레나 변이를 완성한 나비의 모습에 심취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정작 중요한 메시지는 꽃이란 존재에 있다. 나비의 행복은 정상에 오르는 게 아닌 꽃을 만드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꼭대기의 무의미함이 아닌 꽃 자체로서의 아름다움에 인간 삶의 궁극이 있다. 우리가 꽃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단순한 이야기와 가벼운 스케치의 그림으로 구성된 이 책은 매번 읽을 때마다 다른 울림을 준다. 읽을 당시 나이에 맞는 느낌과 감동이 전달된다고나 할까. 내 경험을 말하자면 이렇다. 소년 때에는 애벌레가 나비가 된 것 자체에 환희했다. 청년 때에는 두 애벌레 사이의 사랑에 감격했다. 나이가 든 후에는 나비가 되는 것의 본질을 궁구했다. 노년이 되어서는 또 어떻게 읽힐지 자못 기대한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내가 이 짤막한 동화를 내 신분이 바뀔 때마다 읽게 된 이유다.

유튜브 영상을 기획하는데 함께 일하는 정 PD가 어린이를 위한 동화를 추천하자고 권했다. 어떤 책을 추천할까 고민하다가 책장 한구석에 박혀 있던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책장을 연 순간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됐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 누군가에 의해 선물 받은 책이라는 것을. 정갈한 손 편지로 쓰인 문구가 당시 지독한 사춘기를 겪고 있던 중학교 1학년의 내 모습과 오버랩됐다. 이후 기나긴 고치의 과정을 겪었던 내 젊은 시절의 드라마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이 기분 좋은 기억의 복기가 책이 주는 감동과 혼합되어 내 눈가를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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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펭귄클래식 2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은정 옮김, 앤서니 브릭스 서문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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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은 상치되는 걸까. 인류 고전사(사상사)를 새로 쓴 위대한 사색가들은 삶과 죽음이 본질적으로 동일선상에 있는 것임을 일갈해왔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출구에서 볼 때 너무 짧다"라고 했고 헤르만 헤세는 "맨 마지막 한 걸음은 자기 혼자 걸어야 한다"라고 했다. 부처는 "진실로 삶은 죽음으로 끝난다"라고 했고 소크라테스는 "죽음은 영원히 잠을 자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삶의 종국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삶과 죽음이 단절된 게 아니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에 쉽게 도달하게 된다. 삶을 강렬히 추구함으로써 죽음에 도달하며 결국 삶은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사에서 삶과 죽음을 치열하게 성찰한 작가가 있다.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다. 그는 평생에 걸쳐 삶과 죽음의 의미를 천착했다. 그의 모든 작품이 이 테마를 관통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삶의 예찬보다 죽음의 성찰에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게 톨스토이 문학의 특징이다. 장편만을 보자면 『전쟁과 평화』는 삶을 긍정하는 웅대한 걸작이며 『안나 카레니나』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천착한 예술작품이다. 『부활』은 죽음의 의미를 깊이 고뇌하는 후기 톨스토이의 원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실제로 기차역에서 객사한 그의 죽음 또한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이색적인 죽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톨스토이의 소설 중 죽음을 다룬 가장 탁월한 작품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이 소설은 톨스토이가 산전수전을 다 겪은 후 인생 후반부에 쓴 짤막한 분량의 중편소설이다. 병상과 죽음에 관한 소설로는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독자로 하여금 어마어마한 몰입력을 선사하는데 일단 첫 장을 넘기면 도중에 정지할 수가 없다. 한달음에 달려 소설 말미에 도착한다. 소설의 3인칭 화자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한 인간의 죽어가는 과정을 고요하면서도 생생하게 들려준다.

소설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부패한 러시아 관료사회에서 승진과 성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판사이다. 사회에서 시키는 대로 공부를 했고 그에 맞춰 자신의 능력을 보여줬으며 상류층과 결혼하는 것이 옳다고 믿고 그렇게 결혼하였다. 남부러울 것 없이 뭐든 착착 해내는 인물이었기에 별다른 걱정과 근심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찾아든 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간다. 육체적 질고에 의한 극심한 고통은 그답지 않은 고성과 울부짖음을 통해 밖으로 표출된다. 가족들은 경악한다. 그는 죽음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인생은 진정 즐거운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의 삶은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덧없고 의심스러웠으며 하루 살면 하루 더 죽어가는 그러한 삶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를 추적해가는 주인공 자신의 독백과 이를 묘사하는 작가의 3인칭 서술이 압권이다.

"여러분, 이반 일리치가 사망했다는군요." 이반 일리치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장 동료들은 하나같이 그의 죽음이 자신과 다른 동료들의 승진이나 인사 발령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계산하느라 바쁘다. 동료의 죽음에 겸허히 슬퍼하기보다 어떤 득실이 있을지를 먼저 챙기는 그들의 세속적인 모습이 악랄해 보이지만 어쩌면 그것이 모든 사람의 내면에 내재된 인간 본성의 진실한 민낯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악인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소설 속 인물 중 주인공의 하인과 어린 아들은 선한 영혼의 표상으로 등장한다. 사회적 지위가 가장 낮은 두 명만이 올바른 영혼의 소유자인 점은 이채롭다. 인간 됨의 본질과 원형은 부와 지위와는 무관한 것임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소설은 결말을 먼저 알려준 뒤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목에서부터 결론이 명시되어 있다. 그렇기에 반전이 있을 리 없고 이야기의 뒤틀림이나 전환도 없다. 한 남자가 병에 걸려 죽어가는 뻔한 내용이고 결론으로서도 역시 뻔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뻔한 이야기를 중편 분량으로 몰입감 있게 풀어낸다는 게 놀랍다. 모든 문장 하나하나가 읽을수록 감탄스럽다. 책의 막장을 덮었을 때는 가슴속에 무언가의 싱숭생숭함이 남을 정도다. 가장 큰 여운은 나와 죽음 사이의 간극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을 알 때, 아니 내가 죽어간다는 것을 피부로 체감하며 시간의 흐름을 느낄 때, 과연 나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때 심정은 어떤 색깔일까. 여러 사유가 샘솟는다. 불변의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라는 것이다.

독자마다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은 가지각색이다. 혹자는 이 소설에 대해 한 개인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이야기가 아니라 톨스토이가 후세의 사람들에게 남기는 구원의 메시지라고 평가한다. 이반 일리치는 초반에 출세욕만 가득 찬 인물로 그려지지만 병마와 씨름하면서 점차 심경의 변화를 겪는다. 그러면서 현재보다 과거의 삶이 더 선하고 아름다웠음을 깨닫는다. 그가 되새기는 유년의 빛나는 기억은 찬란하다. 그렇다고 자신이 잘못된 삶을 산 건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신의 존재에 관해서도 여전히 부정적이다. 병세가 깊어지며 죽음을 앞두고 성찬식을 치렀음에도 자신의 현재 삶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 생각하며 회개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의 코앞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참회한다. 죽음의 직면에서 결국 자신을 내려놓고 객관화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인간 유한성의 처연한 한계를 엿본다. 삶이란 그저 선하고 진실되게 살아야 한다는 걸 일깨우는 것이다.

해외문학은 항시 번역의 문제에 봉착한다. 시중에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다. 어느 출판사 어떤 역자도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인다. 서점에서 대략 대여섯 개의 번역본을 훑었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잘 읽혔다. 톨스토이의 중·단편은 서사의 힘이 강하고 메시지가 분명하기 때문에 번역의 변수를 뚫는 힘이 있다. 번역의 질에 따라 작품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대개 중·단편은 여러 작품이 함께 실리기 때문에 출판사마다 함께 실린 소설이 다르긴 하지만 번역 자체가 문제 될 만한 번역본은 찾지 못했다. 중고서점에서 눈에 띄는 것 아무거나 골라잡아도 죽음에 관한 톨스토이의 혜안을 느끼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전에는 톨스토이의 웅장한 장편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가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지금도 그 견해에는 변함없다. 이제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비록 120쪽 남짓한 작은 분량이지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여느 장편에서도 느끼기 힘든 삶과 죽음에 관한 걸쭉한 사유가 담겨 있다. 죽음을 앞둔 한 남자의 독백(3인칭 서술)만으로 이렇게 웅숭깊고 통찰력 있는 메시지를 끌어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역시 톨스토이다. 이 소설이야말로 평생 곁에 두고 삶이 무료할 때마다 꺼내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죽음의 과정을 다룬 듯 보이지만 실상 삶의 희망을 맹렬히 추적한 소설이다. 고전에도 품격이 있다. 아직 안 읽은 사람이 있다면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구독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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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이체르 소나타 (반양장) 펭귄클래식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기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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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두

단언하건대 '사랑'과 '결혼'과 '섹스'는 하나다. 사랑의 결실이 결혼이며 섹스는 그것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 언제 적 얘기하느냐 투덜거릴 사람이 있겠다. 하지만 난 그렇게 믿는다. 인류는 항시 이 문제와 씨름했다. 아담과 하와 이래 가장 긴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아무리 시대와 문화가 바뀌었다 하더라도 가정을 지키기 위한 인간의 본성은 훼손되지 않았다. 이를 지키지 못한 실패자들의 변명과 울부짖음만 요란했을 뿐. 그리고 현대 시대에 들어서 모든 진리와 기준을 파괴하려 한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고약한 발악이 더해졌을 뿐.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작품은 항시 이 주제를 응시한다. 웅대한 걸작 『전쟁과 평화』가 그랬고 가장 예술적인 작품 『안나 카레니나』는 더 그랬다. 중편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그 중심에 있다. 톨스토이의 다른 중편 세 작품과 함께 실린 이 소설집은 톨스토이 결혼관의 넓은 스펙트럼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초기작인 『가정의 행복』은 결혼과 사랑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탐구한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결혼의 부정성에 주목하고, 『악마』는 결혼 안에서의 섹스조차 더러운 것으로 치부한다. 『신부 세르게이』는 인간 정신의 한계와 모순에까지 다다라서 인간의 육체적 욕망을 비난한다. 성적 욕망을 거세하고 타인을 위한 선한 행위에 복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실 나는 톨스토이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랑과 결혼은 내 평생의 주제이기 때문에 이번 서평은 꽤 긴 글이 될 것이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위시하여 총 4개의 중편소설을 순차적으로 간략히 리뷰한 뒤 톨스토이(후기) 결혼관에 대한 반론과 그의 소설이 아이로니컬한 방식으로 가정의 중요성을 지지한다는 근거를 제시하려 한다. 또한 성적 욕망은 결혼 안에서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을 통해 행복한 가정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심층적으로 논설하고자 한다. 참고로 이 주제에 관한 내 입장은 철저히 보수·기독교적 관점에 서 있다는 걸 미리 알려둔다. 그럼 본격적으로 서평을 시작한다.

2-⑴. 『가정의 행복』

『가정의 행복』을 보자. 줄거리는 아름답다. 젊은 소녀(17살)가 아버지뻘 되는 아저씨와 사랑에 빠진다. 둘 다 사랑하는 마음을 감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통해 서로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에 골인한다. 결혼 후 도시로 이사한 뒤 둘의 사랑은 위기를 맞는다. 아내가 사교계에 발을 디디면서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질투, 냉소, 조롱, 불신, 증오 등의 갈등이 싹튼다. 결혼생활은 파괴 직전까지 나아가는 듯하지만 부부관계는 반전을 맞이한다. 아이를 낳은 후 둘은 전혀 다른 차원의 행복의 단계에 올라선다. 결혼생활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결로 다가오게 된다. 아이를 키우며 오손도손 살아가며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 이 소설만 본다면 톨스토이는 결혼 예찬론자다.

『가정의 행복』은 톨스토이가 결혼 전에 쓴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사랑에 대한 소녀적 감성과 결혼에 관한 현실적 긍정이 돋보인다.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의 두 가지 원형(단계)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부부 사이의 뜨거운 애정과 열정이다. 사랑의 호르몬은 5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들도 처음에는 강렬한 사랑을 갈구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시들어지고 냉소와 의심이 쌓인다. 점차 냉랭해지고 서로 간 사랑에 무감해진다. 하지만 자식을 낳아 기르는 과정에서 두 번째 가정의 행복이 도출된다. 즉 톨스토이가 말하는 가정의 행복은 부부 사이의 관심과 사랑을 넘어 자식과 주변을 향해 점차 확대해가는 정신적 성숙에 닿아 있다. 『가정의 행복』은 그 아름다운 원형을 안정감 있게 보여준다.

2-⑵. 『크로이체르 소나타』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가정의 행복』과는 전혀 다른 결혼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의 흐름은 1인칭 화자 '나'가 기차에서 만난 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이뤄진다.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 남자의 얘기가 서술된다. 그는 사랑의 확신 없이 외적 매력에 끌려 한 여자와 결혼한다. 결혼 후 자주 불화와 권태를 이루지만 그때마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결혼생활을 이어나간다. 어느 날 아내에게 음악적 파트너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등장한다.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아내는 바이올리니스트와 베토벤의 소나타 9번(크로이체르 소나타)을 협주하고 그(남편)는 질투와 부러움이 뒤섞인 미묘한 감정으로 그들의 모습을 관찰한다. 얼마 뒤 지방으로 출장을 떠난 그는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집으로 되돌아온다. 새벽에 도착한 그는 아내가 바이올리니스트와 단둘이 식사하고 있는 장면을 본다. 광기에 휩싸인 그는 아내가 불륜을 저지른 것으로 오해하여 아내를 칼로 찔러 죽인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톨스토이 후기작이다. 『안나 카레니나』 이후 톨스토이의 작가적 세계관이 크게 변화한다는 점에서 『안나 카레니나』의 말미와 연결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끝내 말하지 않은(못한) 결혼의 무의미성 혹은 유해성을 감추지 않고 작정하듯 전달한다. 결혼은 결코 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는 것이다. 결혼은 '합법적 매춘'과 다름 아니다. 결혼은 더 이상 성스러운 의식이 아니다. 상류사회의 시장에서 벌어지는 거래로서 매매춘과 다를 바 없다. 유곽의 여성과 사교계의 여성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믿는 소설 속 화자(그)의 다음 대사는 과히 충격적이다. "엄밀히 말해서 짧은 기간의 창녀는 경멸을 당하고, 긴 기간의 창녀는 존경을 받는 거지요."

2-⑶. 『악마』

『악마』는 더 파격적이다. 이 소설은 섹스 자체를 부정한다. 참한 아내를 두고 평범한 가정을 이룬 예브게니는 아버지로부터 일부의 유산과 많은 빚을 상속받는다. 빚을 갚기 위해 물려받은 농장을 열심히 경영해나간다. 하지만 그에게는 큰 고민이 있다. 주체할 수 없는 성적 욕구 때문이다. 고민하던 중 지인으로부터 동네의 유부녀를 섹스 파트너로 소개받아 수시로 욕정을 채운다. 성적 욕망에 불타오를 때마다 그녀와 은밀한 곳에서 섹스를 한다. 그러다 동네에 소문이 나게 되고 다시 정신을 차려 가정에 충실하고 농장 일에 집중하려 하지만 섹스 파트너에 대한 욕망의 심연을 지우기란 쉽지 않다. 자기 자신과 섹스 파트너의 모습에서 '악마'의 현현을 느낀다. 이에 괴로워한 예브게니는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악마』는 톨스토이가 집필한 뒤 집 소파에 숨겨둔 작품인데 나중에 아내 소냐가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톨스토이가 숨겨둔 이유는 톨스토이 자신의 자전적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톨스토이는 이미 16세 때 매춘부에게 자신의 동정을 버렸다. 또한 결혼 전에 농노의 아내와 육체적 관계를 갖기도 했다. 그 사이에서 아들도 태어났다. 톨스토이가 그 시절 얼마나 육체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는 그의 일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시절의 자신을 '악마'로 보았던 것 같다. 후기 톨스토이는 성적 욕망 자체를 결혼과 상관없이 악하게 보는 입장이다. 결혼의 본질이 정신적인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욕구에 있다고 냉소할 정도로 결혼(가정)에 부정적이다. 『악마』는 이러한 후기 톨스토이의 결혼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2-⑷. 『신부 세르게이』

『신부 세르게이』는 조금 특별하다. 이 소설은 결혼과 사랑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우회적으로 비아냥대며 정작 중요한 삶의 본질이 있음을 강조한다. 약혼자가 황제의 정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주인공)는 파혼하고 신부가 된다. 수도원에서 철저한 금욕주의적 삶으로 일관하는 남자에게 외부의 유혹이 찾아온다. 어느 이혼녀가 은자 생활하는 곳까지 찾아와 유혹하지만 도끼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냄으로써 위기를 이겨낸다. 이후 병 고침의 기적까지 행하면서 점점 유명세를 탄다. 그러다 어느 날 치료를 위해 찾아온 22살의 금발 여성의 유혹에 결국 무너져 버리고 만다. 충격을 받은 남자는 신은 없다고 단정하고 농촌을 떠돌며 부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모든 걸 버리고 죽기로 작정한 순간 어렴풋이 어릴 때 알았던 자신의 여자친구를 기억하게 되고 그녀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삶의 진리를 발견하고 자유함을 느낀다. 그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소자에게 물 한잔 떠주는 것에 삶의 진리가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 소설이 우회적으로 결혼과 사랑을 비아냥댄다는 건 성직자의 고결한 신앙심과 과거 유혹을 이겨낸 절개마저도 젊은 여자의 유혹 앞에서 단 한순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한계의 장면에서 읽을 수 있다. 또한 사랑해서 결혼을 코앞에 두었지만 과거가 있는 예비 신부의 솔직한 고백 앞에 모든 것을 거부하는 극단적인 모습은 사랑의 궁극을 초라하게 만들 정도로 난감하다. 결국 톨스토이는 행복의 궁극을 가정이 아닌 사회에서 찾는다. 가정은 행복할 수도 없고 행복해서도 안 되는 곳이다. 진정한 삶은 신의 계시를 통해 항시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변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해 선한 행동을 하는 데 있는 것이었다. 즉 『신부 세르게이』는 금욕주의, 무정부주의, 인도주의 등으로 대변되는 '톨스토이즘(Tolstoyism)'의 가장 완성된 형태를 보여준다.

3. 정리

정리하면 『가정의 행복』은 전기 톨스토이를 대변하는 소설로 결혼과 가정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반면 『크로이체르 소나타』 외 2개 소설은 톨스토이가 노년이 되어 쓴 후기작으로 안온한 결혼생활과 정신적 사랑을 거부한다. 사실 전기 톨스토이가 옳으냐 후기 톨스토이가 옳으냐는 무의미하다. 이 글의 첫 문단에 "사랑과 결혼과 섹스는 하나다"라고 외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초기작 『가정의 행복』이 더 끌리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네 개의 중편 모두를 긍정한다. 내용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을 끌어낸다. 성과 결혼에 대한 개별적 담론이 행복하고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위해 정작 무엇이 중요한지를 가감 없이 들추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 가지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으로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라는 명언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절대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돈(능력/책임)'과 '성(性, sex)'이다. 이 두 가지는 톨스토이의 전작에 일관되게 흐르는 테마이기도 한데 실제 결혼생활에서 이것들만큼 민감하고 결정적인 건 없다. 어쩌면 톨스토이의 결혼생활도 이것이 충만했을 때 행복했고 이것이 문제였을 때 불행했을 것이다. 그렇다. 다시 말해 남편의 부양력이 중심이 된 윤택한 경제생활과 부부 사이의 친밀한 육체적 관계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가장 긴요한 전제조건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보다 심화된 논설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4-⑴. [심화]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두 가지 키워드 - ① 남자(남편)의 경제적 책임감

행복한 결혼생활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할 때 정말 어려운 건 그것이 부부 사이만 아는 내밀한 영역을 관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영역이기에 가정(결혼)과 관련한 수많은 책을 읽었고 상담자로서 많은 부부클리닉을 진행해왔다. 부부관계에 위기를 겪는 지인들과 정말 깊은 상담을 나누었다. 그러면서 결혼생활의 근본적 위기가 '남자의 경제적 무책임'과 '부부 사이의 섹스 트러블', 이 두 가지에 대부분 기인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또한 당사자들은 이 두 가지 진실을 밖으로 드러내기 싫어하고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았다. 대부분 '성격 차이'라고 전하는 이혼 사유도 기실 진실을 감추기 위한 가장 만만한 수사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성격이 차이 나서 싸우는 게 아니라 다른 내밀한 원리가 고장 났기 때문에 서로 간 맞지 않는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남자의 경제적 책임감과 부부 사이의 성적 친밀성은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절대 명제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장려되고 맞벌이가 보편화된 사회에서 '남자의 경제적 책임'을 강조하는 건 고리타분한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아니냐 항의할 사람이 있겠지만, 이는 진실이다. 아담과 하와 이래 남성의 본질은 '일하는 것'에 있다. 남성은 존재적으로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일과 사랑에 균형이 이루어질 때 자존감이 결핍되지 않은 완전한 남자가 된다. 이는 문화인류학적, 사회학적으로 "남자의 위치는 여자의 위치를 결정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라는 진실로 연결된다. 즉 남자가 잘나가면 여자는 그 영광을 따라가지만 그 거꾸로는 되지 않는 것이다. "여자(처가) 잘 만나서 복받았다"라는 세간의 얘기는 대부분 뒤에서 "쯧쯧. 남자 새끼가..."라는 험담을 전제로 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부정할 수 있을까. 내 경험은 대부분 이 진실을 지지했다.

최소한 처자식을 먹여살릴 수 있는 기초적인 부양력은 결혼한 모든 남자가 가져야 할 기묘한 숙명이다. 여자의 경제력이 이를 커버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될 경우 이상하게 잡소리가 생긴다. 남자 스스로의 자격지심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아내 돈으로 살아가는 무능한 남편은 자신만 모를 뿐, 아니 알려 하지 않을 뿐 일차적으로 아내 속 깊은 곳에 상처를 새긴다. 더 나아가 부모와 자식에게는 안줏거리가 된다. 주변 이웃들에게는 공공연한 비밀 험담의 주제가 된다. "아내가 착하고 자기도 크게 신경 쓰지 않기에 우리 가정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남자들이 있다. 착각하지 말라. 조소와 비아냥은 허공을 떠돌다 결국 자기들(당사자 부부)에게 도착해 둘 사이의 정서적 온기를 파괴하는 조악한 바이러스가 된다. 나는 이 실례를 주변에서 수없이 봐왔다.

물론 여자의 피나는 노력으로 이를 극복한 사례가 없지 않다. 그리고 정말 일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남자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것이 복이든 벌이든 신으로부터 죽을 때까지 일하는 존재로 규정된 남자의 존재적 당위에서 '일하지 않는 남자(돈 벌지 않는 남자)'는 불편하고 어색하다. 어느 문명권에서나 그랬다. 지금도 그렇다. 여권이 앞선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자의 위치는 남자의 위치를 결정하지 못한다. 부정하려 해도 기각되지 않는다. 인류 보편적 DNA로 전 지구인에게 체화된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이를 여자의 자기계발이나 경제력을 무시하거나 전업주부의 노동을 폄하하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남자의 본질과 결혼생활의 원리 면에서 보편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4-⑵. [심화]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두 가지 키워드 - ② 부부 사이의 성관계(sex)

행복한 가정을 위한 또 하나의 절대 명제는 부부 사이의 섹스다. 건강한 부부는 결코 섹스로 스트레스 받지 않는다. 내가 아는 모든 행복한 부부는 부부관계(섹스)가 원활했고 내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불행한 부부는 부부관계가 원활하지 못했다. 이는 여자(아내)의 가장 중요한 역할(의무)을 드러내는데 그건 남자(남편)의 성욕을 이해하고 거기에 봉사하는 노력이다. 물론 거꾸로(남편->아내)도 해당한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여자보다 10배나 많은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을 가진 남자의 동물적 욕구가 더 강하기 때문에 비율상 전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남자의 절제와 여자의 이해(노력)가 화합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트러블이 생긴다. 적지 않은 부부가 이 대목에서 갈등을 가진다. 하고 싶은 남편과 하기 싫은 아내 사이에 불편한 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고장 나면 서로가 싫어진다. 어색해지고 냉랭해지며 거칠어진다. 어디서 말하기도 어렵다. 비극이다.

부부의 섹스는 고결한 것이다. 흔히 사랑의 삼원성(三原性, triality)을 얘기할 때 완벽한 절대 사랑 아가페(agape)를 치열하게 밀어주는 건 바로 감각의 사랑 에로스(eros)다. 또 다른 사랑의 원형 필리아(philia)가 사랑의 태도를 규정한다면 에로스는 사랑에 감각적 열정을 더한다. 조금 난해한 원리이기 때문에 이를 설명하고 이해함에 있어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인용하고자 한다. 신약성경은 남편을 '그리스도'로 아내를 '교회'로 상징한다. 남편과 아내의 가장 중요한 책임(역할)으로 남편은 아내에 대한 사랑을, 아내는 남편에 대한 순종을 제시한다. 즉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죽으심 같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 복종한 것처럼 남편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구약성경 <아가서>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메타포 되는데 부부 사이의 성적 행위가 얼마나 고결하고 아름답게 천국의 모습을 형상화하는지를 알려준다.

<아가서>에 함의된 부부 사이의 육체적 사랑의 의미에 대해 조금 더 보태보겠다. <아가서>의 기자는 욕정에 불 타오르는 남녀 간의 사랑, 즉 에로스적 사랑을 하나님(기독교 삼위일체의 신)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노래한다. 이는 남녀 간의 연합의 의미를 통해 하나님과의 연합에 대한 좋은 통찰을 제공하는 데 결혼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부부는 이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사이이며 사랑하기에 서로가 원하는 것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사이이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연합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연합이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치이며 그 뜻에 대한 순종이라고 할 수 있다. 성도가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경험하다 보면 하나님의 뜻을 확신할 수 있다. 나아가 사랑하기에 어떤 어려운 계명도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다. 그 순종의 정점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인데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즐거움으로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즉 부부의 육체관계야말로 가장 치열한 영적 행위인 것이다.

부부관계조차도 인간의 동물적 욕정으로 본 후기 톨스토이의 시각은 지나치게 편협하고 단선적이다. 물론 사랑과 성욕 사이에 긴장감이 있다는 걸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그리스도-교회' 관계의 표상처럼 부부관계 안에서는 사랑은 성욕을 포괄하고 성욕은 사랑을 끌어준다. 분리되는 게 아니라 합일됨으로 온전한 아가페로 나아간다. 부부의 섹스는 서로에 대한 애정과 찬미, 미움과 아쉬움을 용해시키는 용광로와 같은 것이며, 서로를 가장 열정적으로 긍정하는 찬란한 천국적 행위이다. 그렇기에 본질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너를 위한 것이며 때로는 너를 위할 때 비로소 나의 것이 되기도 하는 신비의 의식이다. 결국 필연적으로 서로(부부)의 것이 되고야 마는 신성적 마술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부의 '몸의 연합'인 것이다. 이것이 무너진 부부는 행복할 수 없고 그 결혼생활은 싸늘한 공기에 사로잡힐 뿐이다. 부부관계가 냉랭하다면 반드시 이 대목을 점검하라.

톨스토이의 말대로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다. 가정을 이루는 여러 각론이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총론에 모두 묻히고 치환되기 때문이다. 정작 당사자들만 애써 부정하며 다른 소리를 할 뿐.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건강한 결혼생활은 요원하다. 여전히 부부관계를 말하는 건 어렵다. 온전히 둘만의 영역이다. 부부 사이는 은밀하고 섬세하고 예민한 공간이다. 어느 누구도 들어가면 안 된다. 부모든 자식이든 친구든 그 어떤 것이든 말이다. 부부는 촌수도 없고 세금도 없다. 서로 완벽한 합일과 연합을 이룸으로써 고된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관계다. 어쩌면 톨스토이가 말년으로 갈수록 결혼과 사랑을 부정한 이유가 본인 스스로 가정 안에서 천국적 삶을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자기 거부적(회피적) 역설이지 않았을까.

5. 마무리

서평을 정리하자. 책 리뷰보다 결혼에 관한 리뷰어의 주관이 길게 서술된 장황한 글이 됐다. 그럼에도 톨스토이의 소설을 통해 행복한 결혼생활을 탐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자평한다. 톨스토이가 위대한 건 바로 그 특유의 지나친 솔직함에 있다. 청년 시절 창녀촌에 가서 동정을 잃은 일기를 굳이 결혼 직전에 아내에게 공개할 정도로 솔직한 그의 작품에는 정말 말하기 힘든, 하지만 정작 진실을 담고 있는 많은 삶의 편린이 담겨 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그 최전선 작품이다. 허투루 지나칠 없는 고전이다. 반드시 읽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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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소여의 모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3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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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古典)은 시대(시간)의 압력을 이겨낸 작품이다. 그렇기에 고전은 위대하다. 하지만 고전이 모두 재미있는 건 아니다. 재미와 감동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른 것이다. 재미가 없어도 감동적인 작품이 있고 재미가 있는 만큼 감동적인 작품도 있다. 특히 정말 재미있는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읽기 속도를 높은 선상으로 끌어올리며 마지막 장을 확인시키게 한다. 종국에 남는 농밀한 감동은 덤이다. '미국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은 재미있는 고전 소설로서 가장 먼저 회자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1876년 출간된 이래 단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는 괴물과 같은 작품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작가의 유려하고 맛깔나는 글 솜씨와 매력적인 주인공 '톰 소여'의 활약(?)은 책장을 엄청난 스피드로 넘기게 하는 힘이다. 독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19세기 중반 미국 미시시피 강 기슭에 자리한 어느 시골 마을로 시공간을 이동한다. 하지만 독자의 시간대가 19세기 미국의 한 시골 마을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그때 그 시절의 향수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 주인공 톰 소여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 마치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 냄새가 주인공의 유년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워낙 유명해서 다루지 않겠다. 단 한 줄로 요약하자면 제목 그대로 '엉뚱하고 모험심이 많은 톰 소여가 이런저런 사건사고에 휘말리며 겪어나가는 모험 이야기' 정도로 축약할 수 있겠다. 톰 소여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내 주관적인 평가로 톰 소여는 세계 소설사에서 베스트 20 안에 들 정도로 매력적이다. 소설에서는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의 유년시절 일부만을 그린다. 오히려 그들이 성인이 된 모습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톰 소여가 더 완벽한 인물로 독자에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기에 작가 자신도 소설의 「맺는말」에서 "이 연대기는 이렇게 끝이 난다. 이것은 전적으로 한 '사내아이'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여기서 마쳐야 한다.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면 '어른'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라는 말을 남겼다. 타인을 압도하는 자유와 생명력, 나름의 정의감까지 갖춘 톰 소여는 그 시절 남자아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오롯한 형태의 매력을 뽐내고 있다는 점에서 압도적이다.


톰 소여의 매력을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은 소설의 가장 유명한 장면으로 꼽히는 '나무 울타리에 페인트칠을 하는 부분'이다. 소설에서 톰 소여는 엄마 격인 폴리 이모에게 잘못을 저질러 토요일에 집 울타리 회칠을 하는 벌을 받는다. 하지만 꾀가 많은 톰 소여는 동네 친구들과의 거래를 통해 노동을 놀이로 전환시킨다. 작가는 이 장면을 굉장히 유쾌하고 상쾌하며 통쾌하게 그리고 있다. 전혀 밉지 않게 톰 소여의 꾀를 묘사한다. 이러한 삶에 대한 톰 소여의 긍정적 태도는 소설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는데 훗날 여자친구 베키와의 연애와 두 차례의 큰 모험을 통해 삶에 대한 높은 수준의 여유와 긍정의 아우라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톰 소여의 모험』은 동 작가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함께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로 꼽힌다. 왜 미국인이 이 소설에 열광할까 생각했다. 어렵지 않게 답을 찾았다. 주인공 톰 소여가 미국과 미국인을 대표하는 전형성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미국사(美國史)는 동(東)에서 서(西)로 개척하는 역사였다. 수많은 원주민(인디언)이 희생된 역사였지만 미국인의 입장에서는 '프런티어 정신'의 역사이기도 했다. 소설 곳곳에 드러나는 톰 소여의 모험심과 영웅주의는 보편 미국인의 사상과 역사적 맥락에 근접해 있다. 또한 악인으로 등장하는 인전 조의 살인사건과 관련하여 용기 있게 법원에서 증언하는 장면은 미국인이 지향하는 도덕주의와 맞닿아 있다. 즉 작가 마크 트웨인은 그 시대를 표상하는 미국인의 전형성을 미국적 시각에서 미국적 글쓰기로 유려하게 녹여낸 것이다.


개인적으로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톰 소여와 베키 사이에 감정적 긴장감이 흐르는 부분이다. 이는 자신의 장례식(?)에 자신이 직접 등장하는 연출을 통해 일약 스타가 된 톰 소여의 명예심과 여자친구 베키에 대한 소유욕이 부딪히는 장면이다. 톰 소여와 베키는 서로 간 허영심으로 다른 친구와 더 친한 것처럼 일부러 과한 행동을 하며 마음을 숨긴다. 작가의 표현대로 '거드름을 피우면서' 서로 자기 주변에 없는 것처럼 행동하며 모른척한다. 언행이 과해지며 결국 각자 상처를 받는다. 작가는 이 대목을 굉장히 현실감 있게 묘사했는데 이는 마치 과거 아내와 내가 어린 시절에 연애할 때 모습을 옮겨다 놓은 것처럼 흡사해 소름이 끼쳤다. 두 인물의 감정적 긴장이 후일 톰 소여가 베키를 대신해 선생님으로부터 매질을 당하는 장면에서 해소된다는 점에서도 내 과거 시절의 연애담과 몹시 유사해 놀랐다. 시대와 문화와 지역을 떠나 이렇게 유년시절에 대한 유치한 감정적 유사성을 떠올리게 한 점은 인상적이다.


번역도 훌륭하다. 영미문학 번역의 권위자 김욱동 교수의 번역은 유려하고 매끄럽다. 흠잡을 데가 없다. 다만 김 교수는 마지막 「작품 해설」에서 이 소설을 지나치게 어둡고 진지한 관점에서 비평했다. 소설이 갖는 특유의 해학과 상징에 대해 긍정하면서도 작품을 지나치게 해부하여 '남성우월주의'와 '페미니즘'에 대한 분석까지 장황하게 설명한다. 작가 마크 트웨인 스스로 여성의 인권 문제와 흑인 해방 문제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목소리를 낸 진보적인 작가라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소설이 쓰인 시대적 상황과 총체적 색깔은 보지 않고 부분적인 장면과 등장인물의 대사 몇 마디로 이런저런 사상을 끌어들여 작품을 해부하는 건 적절치 않다. 굳이 불필요한 작품 해설이다. "거의 대부분의 문학작품 뒤에 부록처럼 달린 '작품 해설'은 없어져야 할 유산이다"라는 기존의 내 소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엉뚱한 감상이지만, 소설을 읽으며 든 생각 중 하나는 톰 소여와 같은 아들이 하나 있으면 어떨까, 한 것이다. 두 딸을 즐겁게 키우고 있는 나에게 굳이 아들은 필요 없지만 가끔 소설에서 멋지게 포효하는 남자아이 캐릭터를 만날 때마다 아들이 당기는 마음을 숨기기란 쉽지 않다. 작금의 페미니즘이 남성과 여성의 본래적(생래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 것이라면 나는 오히려 남자만이 갖는 그 꼴통적 생명력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다. 여자보다 굵고 단단한 뇌량을 갖지 못한 남자는 대개 단순하고 일방적이다. 그것이 단점으로 작용할 때 남자 이하가 되지만 장점으로 작용할 때 남자 이상이 된다. 톰 소여가 가진 독특한 창조성과 유별난 생명력에 매료되어 잠시 아들에 대한 내 감상을 보탰다.


서평을 정리하자. 최근 코로나19로 웃음을 잃은 사회가 됐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의 정서까지 메마르게 하고 먼 곳으로 보내버렸다. 이럴 때 마크 트웨인의 재미있는 소설 한 권으로 웃음을 회복해보는 건 어떨까. 죽기 전에 꼭 한 번 읽어야 할 고전이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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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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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 코로나19와 고전(문학)

중국에서 발생한 전염병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코로나19가 우리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밖에서 사람 만나는 일이 위험한 행동이 되었다. 아이들의 개학은 거듭 연기되고 바깥출입은 금기시되며 직장인들은 자택에서 근무 중이다. 외국 사정은 더 심각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유럽 일부 국가는 80세 이상 고령 환자들의 치료를 포기했고 물리적인 의료 시스템이 한계에 도달해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한다. 문학이야말로 현실성의 극치를 가장 치열하게 다루는 분야이다. 모든 베스트셀러는 동시대의 관심과 주제를 껴안는다. 알베르 카뮈의 장편소설 『페스트』가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tvN 독서 예능에서 이 소설을 집중적으로 소개한 영향도 컸다. 주지하다시피 『페스트』는 알제리(프랑스령)의 해안 도시 오랑에서의 전염병 사태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페스트가 창궐한 도시에서 봉쇄된 채 재앙에 대처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렸다. 소설에 묘사된 몇몇 장면에서는 현재의 우리 상황과 너무 흡사해 소름이 돋을 정도다.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에 역주행하게 된 것도 이러한 간접 공감의 열망들이 반영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에 코로나19 특집으로 카뮈의 『페스트』를 리뷰한다.

 

⑴ 이야기 (스토리 요약)

소설은 총 5부로 구성되었다. 각 부는 페스트의 양상에 따라 구분된다.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오랑시(市)에 페스트가 발병한다. 전염이 확산되고 사망이 증가한다. 도시는 봉쇄된다. 도시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지만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사망자 수는 더욱 증가한다. 자고 나면 수백 명씩 죽어 나간다. 사람들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인다. 괴소문과 가짜 뉴스가 급속히 퍼진다. 페스트균을 죽이겠다며 온 마을에 불을 놓아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인다. 폭동이 일어난다. 혼란을 틈타 불법과 탈법이 난무하다. 지옥과 같다.

 

의사 리유(리외)와 동료 타루 등은 민간 보건대를 만들어 페스트와 싸운다. 도시 밖에 있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불법까지 동원해 도시를 탈출하려고 한 신문기자 랑베르도 리유와 타루의 진정성과 연대감을 느끼고 보건대에 합류한다. 그러던 중 실험 중인 페스트 백신 혈청을 맞은 어린아이가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이의 주검 앞에서 의사 리유가 교회의 신부 파늘루에게 묻는다. "페스트가 신이 내린 형벌이라면 이 아이의 죄는 무엇입니까?" 페스트가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했던 파늘루 신부는 리유에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 이후 신부의 설교는 조금 바뀐다. 얼마 뒤 신부도 페스트―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죽는다.

 

계절이 몇 차례 바뀌고 1년이 흐른다.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던 페스트균의 매서운 기세도 점차 꺾이기 시작한다. 백신 혈청이 효능을 보인다. 혈청을 맞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회복되기 시작한다. 도시에서 사라졌던 쥐가 다시 나타나고 길고양이의 모습도 포착된다. 페스트가 종식을 향해 달리고 있을 무렵 리유와 함께 최전선에서 페스트와 싸운 타루가 페스트에 걸려 죽는다. 리유의 동료 그랑은 페스트에 걸렸지만 죽지 않고 살아난다. 도시 봉쇄가 풀어지고 사람들은 그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과 동료를 재회한다. 신문기자 랑베르는 기차 플랫폼에서 아내를 만나 포옹한다. 리유는 도시 밖에서 지병을 치료해온 아내가 끝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⑵ 인물

소설 『페스트』에 등장하는 인물은 많지 않다. 페스트를 최전선에서 치료하는 의사 리유(리외), 민간 보건대 창설을 주도한 타루, 외지에서 건너와 페스트 종식을 위해 함께 싸우기로 한 신문기자 랑베르, 소설의 서술자로부터 가장 전형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시의 하급 공무원 그랑, 페스트 확산 과정에서 가장 큰 내적 변화를 겪는 가톨릭 신부 파늘루, 전염병 사태를 즐기며 그 와중에 범법으로 사익을 추구하는 코타르 정도가 소설을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이 되겠다. 소설은 서술자의 관점과 등장인물 타루의 기록을 주축으로 뻗어나가는데 소설 말미에 서술자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독자를 놀라게 한다.

 

몇몇 인물에 대해 간략히 리뷰하고자 한다.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페스트』는 유독 다양한 인간상에 밑줄을 긋는다. 이 소설의 구조가 "무서운 질병으로 인한 참혹하고 극단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몇 가지 인간 군으로 그려낸 것"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카뮈는 역경에 처했을 때, 적극적으로 역경에 맞서 싸우는 사람(저항형), 역경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방관하는 사람(방관·회피형), 신의 뜻으로 생각하며 절대자에 의지하는 사람(종교형), 범법을 자행하며 자신의 이익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악인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전염병의 예기치 않은 심화과정을 통해 일부 인물은 큰 내적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여러 인간 군상의 모습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의 매력은 충분하다.

 

가장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할 인물은 단연 리유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리유의 경험과 생각이 소설의 주된 재료가 된다. 서술자는 유독 리유의 사유와 행동에 집중하는데 그 외의 인물들이 모두 리유를 중심으로 얽혀있기에 그렇다. 처음으로 죽은 쥐를 발견하고 감염자의 초기 증상을 검토하여 페스트의 발병을 최초로 짐작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의사였기 때문에 시종일관 페스트에 맞서 싸운다. 그의 열심과 사명의식은 기자 랑베르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된다. 랑베르의 회심은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다. 랑베르는 "자신과 페스트는 본래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랑시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굳건하게 감당하는 의사 리우에게 깊은 감명을 받는다. 결국 랑베르는 도시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남아 리유 일행과 함께 페스트와 싸우고 타인을 돕는다.

 

타루와 그랑도 리유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다. 이 세 명이 페스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전사들, 소위 '저항형'의 대표자들이다. 타루는 아버지를 차장검사로 둔 금수저 출신인데 과거 아버지가 참여한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는 과정을 목격한 뒤 사형 반대론자가 되었다. 그는 민간 보건대 창설을 주도하며 초반부터 불군의 투지를 표출한다. 리유와 두터운 우정과 신뢰의 관계를 쌓기도 하는데 페스트의 최절정기에 함께 바다에 입수해 수영하는 장면은 굉장히 감동적이다. 자신의 수첩에 일상의 기록을 남기고 그 메모를 소설의 서술자는 자주 인용한다. 서술자의 해설과 타루의 기록은 소설을 끌고 가는 두 개의 축이다. 하지만 타루는 끝내 페스트로 목숨을 잃는다.

 

소설의 서술자는 그랑을 매우 훌륭한 인간상으로 평가한다. '보건대를 살아움직이게 하는 조용한 미덕의 실질적 대표자'로 상찬해 마지않는데 선하고 모범적인 보편 시민을 상징하려는 것 같다. 하는 일이 소소하고 눈에 띄지 않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랑은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선의를 가지고 페스트와 싸워가는 인물이다. 극한의 대재앙 앞에서 한 명의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그랑은 잘 대표한다. 리유의 감사 표시에 대해 그랑이 한 다음 답변은 이 소설의 주제를 웅숭깊게 관통한다. "제일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페스트가 생겼으니 막아야 한다는 건 뻔한 이치입니다. 아! 만사가 이렇게 단순하면 좋으련만!"

 

신부 파늘루는 종교성을 대표한다. 페스트 발현 초기에는 "페스트는 신의 재앙이지만 신이 원한 게 아니다. 세상이 악과 타협하였기 때문에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다."라고 거침없이 설교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페스트의 발병을 초월적 차원의 문제로 끌어올리며 신(하느님)에게 회개해야만 함을 촉구한다. 그러나 아무런 악의도 없는 어린아이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파늘루는 동요한다. 그 이후 설교에서 '여러분'이라고 부른 회중을 '우리는'으로 바꾸어 부른다. 설교자로서 태도가 바뀐 것이다. 앞서 언급한 신문기자 랑베르와 함께 페스트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큰 심경 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페스트를 초월적 관점으로 본 그도 끝내 페스트로 목숨을 잃는다. 파늘루의 변화와 그가 강조한 종교적(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서는 [⑶ 종교]편에서 구체적으로 후술하겠다.

 

거대한 재앙 앞에 선하고 사명감 있는 사람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혼란과 공포를 역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강력하게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 코타르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평상시에 자살을 기도할 만큼 무기력하고 우울증에 빠져 있다. 하지만 페스트가 창궐해 도시가 혼돈에 빠졌을 때에는 오히려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누린다. 타인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불법을 일삼고 밀수와 같은 악의적인 행동을 벌인다. 페스트가 수그러들고 도시가 안정화되기 시작하니 또다시 불안 증세를 보인다. 결국 소동을 벌이다 경찰에 체포된다. 흥미로운 건 작가 카뮈가 코타르를 묘사함에 있어 상황과 인물에 대해서만 담담히 전할 뿐 절대로 선악의 가치판단을 독자에게 주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⑶ 종교

소설에서 가장 논쟁적인(논쟁이 될 만한) 부분은 신부 파늘루의 설교 장면이다. 파늘루의 설교는 소설에서 총 두 번 소개되는데 첫 설교와 다음 설교 사이에 묘한 온도차가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첫 번째 설교는 거침없이 강력한 메시지를 담는다. 2부 중반에 자리한 파늘루의 첫 설교는 꽤 긴 내용을 담고 있지만 요는 "페스트는 인간 악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과한 표현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제의 입장에서는 마땅한 설교였다. 교회 내부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는 세상 어떤 것도 신의 의지 밖에서 이뤄지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이 아담과 하와 이래 이 땅의 교회가 세상과 격렬히 씨름해온 주제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오통 판사의 어린 아들이 페스트와 씨름하다 죽는 장면을 보자. 여기에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총집합해 있는데 파늘루는 "주님, 이 아이를 구해주소서!"라며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하지만 아이는 죽는다. 혈청 주사 영향인지 오히려 더욱 고통스럽게 죽는다. 그 모습을 보고 리유는 "페스트가 신이 원하지 않는 불행이었다면, 이 어린아이는 무슨 죄가 있어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라고 파늘루에게 강변한다. 파늘루는 아무 답변도 하지 못한다. 결국 그도 페스트로 죽는다. 사실 이런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인 면이 있다. 교회 사제라는 자가 인류 역사상 가장 지독하게 기독교를 공격해온 논리에 대해 한 마디 말도 못 하고 후퇴하는 듯한 모습은 현실성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지기 때문이다. 카뮈가 분명한 무신론자였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작품이 반기독교적인 소설이라고 밝힌 것처럼 이 장면은 딱 그것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사실 선한 자가 고통을 받고 악한 자가 성공하는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신의 죽음(부재/비존재)을 주장하는 수많은 무신론자들의 논거도 이 부분을 정면으로 관통한다. 포이어바흐가 그랬고 러셀이 그랬다. 그들의 공격은 매서웠다. 이 부분은 코로나19로 인한 한국의 현재상과도 예민하게 연결되어 있다. 신천지 집단감염 사태와 주일예배를 강행한 일부 교회에 대한 비난과 조소가 끊이질 않는다. 절체절명의 대재앙 앞에서 종교(기독교)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신에게 엎드려 기도하고 예배하는 사람들을 하나의 문제 군상으로 묶어 조롱하는 형국이다. 신을 믿는 한 성도로서 서글프다.

 

솔직히 말해 기독교 바깥에서 지적하는 '기독교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기독교 안에서밖에 해결(이해)되지 않는다. 이는 신의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 사이의 인식 괴리로부터 출발하는 문제인데, 신은 전염병과 전쟁 같은 재앙으로 인간을 심판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직접 인간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죽기도 했다. 신의 섭리란 공의와 사랑이 항상 균형을 이루는데 바로 이 부분이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비극을 발생시킨다. 기독교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소화되지만 기독교 밖에서는 도저히 수용될 수 없는, 즉 안팎 간의 극한의 아이로니컬이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현실 기독교인으로서 갖게 되는 가장 큰 어려움이자 도전임을 고백한다.

 

 기독교에 대한 카뮈의 부정적인 묘사를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부조리의 문제를 종교가 다루는 것은 적절치 않을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뜻이다. 앞서 묘사한 카뮈의 설정은 충분히 논리적이지만 기독교의 절반만을 상대할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 절반은 전혀 다른 관점이자 차원이다. 믿음(신앙)의 영역은 그 전제 자체가 부조리하다. 그것은 그것대로의 여백으로 남겨두는 게 부조리를 극복하는 방법이 아닐까. 카뮈식 무신론에 대한 내 입장이다.

 

⑷ 카뮈와 부조리

카뮈의 작품세계를 흔히 '부조리 문학'이라고 부른다. '부조리(不條理, Absurdity)'는 카뮈 문학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데 이를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도 카뮈 전집을 가까이 두고 탐독할 만큼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지만 부조리에 대해 설명할 역량은 부족하다. 철학 전공자를 위시하여 주변의 책 좀 읽는다 하는 사람들과 밤을 새우며 깊은 대화를 나눠봐도 부조리를 명확하고 시원하게 해설하는 걸 보진 못했다. 의미의 외연 자체가 상당히 러프할 뿐만 아니라 용어를 사용하는 자의 의도된 모호성까지 추가하면 더없이 난해한 개념이다. '부조리' 자체가 부조리한 것이다.

 

카뮈는 노벨문학상을 받는 수상 연설에서 소설 『페스트』를 통해 긍정을 다루고 싶었음을 밝힌다. 반면 『이방인』은 부정(否定)을 다룬 소설이며 『페스트』와 모든 면에서 대비된다고 말한다. 『이방인』과 궤를 같이 하는 작품이 『시지프 신화』, 「칼리굴라」, 「오해」이며, 『페스트』의 편에 서있는 작품이 『반항적 인간』, 「계엄령」, 「정의의 사람들」이라고 덧붙인다. 여기서 중요한 건 순서다. 카뮈는 부정은 먼저 말했고 그다음 긍정을 말했다. 이러한 시간 순서는 소설 『페스트』의 철학적 구조를 자연스럽게 드러내준다. 그것은 외연적으로는 부정과 반항을 다루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명징한 긍정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 모든 걸 잡아먹을 것 같은 페스트의 세력이 약화되고 지옥 같던 오랑시가 점차 일상으로 회복되는 모습은 카뮈가 말한 부정에서의 긍정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맥락이다.

 

이 소설은 1947년에 발표됐다.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열심히 전후 재건사업에 열을 올리는 시기였다. 동시에 5천만 명의 사망자를 낸 지옥 같은 전쟁이 남긴 후유증을 치유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시의성 측면에서 '페스트'는 하나의 비유와 상징으로 치환할 수 있다. 그 시기의 페스트는 곧 전쟁이었다. 6년간 유럽과 전 세계를 휩쓴 '전쟁 페스트'의 발병은 인류에게 가장 현실적인 지옥의 쓴맛을 맛보게 했다. 다양한 인간상이 있었고 여러 형태의 역설이 존재했다. 현실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았다. 부조리했다. 카뮈의 말대로 어떤 현실도 전적으로 합리적이지 않고 어떤 합리도 전적으로 현실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카뮈의 작품을 읽으면서 항시 느끼는 건 그의 소설이 철학과 소설 사이의 적당한 경계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은 완벽한 소설이면서 철학을 오롯이 담아내고, 하나의 철학서이면서 소설의 구조를 포용한다. 이 기묘한 균형 상태를 유지하는 힘이야말로 카뮈 문학이 가진 마력이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카뮈가 진정 위대한 것은 사상이든 철학이든 극단적인 단정(결론)을 철저히 배제한다는 데 있다. 올바른 철학자의 태도는 "내 말이 무조건 옳다"라는 함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가 평생의 라이벌 사르트르와 구분되는 지점이다. 카뮈는 이 중용적 지성을 지켜냈기 때문에 당시 다수 지식인들이 혹했던 유행병 공산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문체 얘기를 해보자. 카뮈의 문체는 역시 담담하다. 전염병 창궐의 재앙을 묘사하면서도 그 어떤 절규도 명령도 없다. 작가 스스로 서술자임을 거부하고 다른 등장인물에게 건네줄 정도로 객관적이고 냉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렇기에 카뮈의 인물들은 작가와 완벽히 독립적이다. 카뮈 소설의 화자적 특징은 담담하고 묵묵하고 객관적이다. 사실만 건조하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카뮈식 문체는 불필요한 감정과 비본질적인 사색을 제외한 채 담백하게 텍스트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소설 『페스트』가 극한의 상황을 그리면서도 자극적이지 않게 읽히는 이유다. 독자는 다른 정서적 낭비 없이 냉정하고 차분하게 '페스트'의 본질이 무엇인지 깊이 천착하게 된다.

 

⑸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소설 『페스트』는 영웅주의와 거리를 둔다. 카뮈 스스로 영웅이라면 질색을 했던 작가다. 주제와 묘사 방식도 거대한 역경을 헤치며 분투하는 인간상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스펙터클한 장면도 없고 인간 승리의 위대한 드라마도 없다. 그런 통쾌한 이야기를 원해서 이 소설을 들었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다만 인간의 힘으로 차단하기 어려운 불가항력적 사태에 맞서는 나름의 방법을 알려줄 뿐이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서 코로나19 시대를 맞이해 우리가 소설 『페스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나는 그 대답을 소설의 서술자가 가장 높은 수준의 인간상으로 묘사한 그랑이라는 인물에게서 찾았다. 페스트에 대항해 그랑이 한 일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시의 하급 공무원으로서 늘어난 서류 작업과 행정 업무를 보조하는 것뿐이었다. 전과 달라진 건 근무시간이 늘어나 야근한 것뿐이다. 공무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한 것뿐인데 그 열심에 리유는 감복하여 "왜 그렇게 열심히 하십니까?"라고 질문한다. 그렇다. 자기 위치에서 사명감을 갖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재난에 닥친 모든 인간들이 해야 할 유일한 책무인 것이다.

 

그랑의 모습은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소설 속 오랑시의 모습은 지금 현재 우리 도시의 모습과 닮아 있다. 확인되지 않은 괴소문과 가짜 뉴스가 판을 친다. 혼란한 상황을 틈타 마스크를 불법 유통하려다 적발된 이들이 수두룩하다. 정치인들은 표심을 얻기 위해 여러 무리수를 둔다. 기회주의가 흘러넘친다. 이러한 혼란과 위기 속에서 자기 자리를 냉정히 지키는 건 매우 중요하다. 대통령은 대통령의 위치에서 책임을 다하고, 교사는 교사의 위치에서 역할을 다하며, 의사는 의사의 위치에서 자기 할 일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부모의 책임을 다해 아이를 살피고, 아이는 아이의 위치에서 부모의 통제를 받으면 된다. 영웅은 없다. 각자 본분을 잊지 말고 자기 일에 전심을 다하면 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카뮈는 페스트의 완전한 종식을 선언하지 않는다. 언젠가 다시 올 가능성을 전제한다. 인간은 예기치 않은 자연재해나 질병을 이겨낼 수 있는 궁극의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저 반항하고 저항할 뿐이다. 하지만 그 반항마저도 승리한다는 믿음을 전제한 건 아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반항하는 것이다. 인간 한계에 대한 소중한 깨달음은 결국 겸손의 문제로 환원된다. 위기일수록 겸손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인간성 자체에 대해 끊임없이 겸손해야 한다.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페스트가 우리 내면에 똬리를 틀어 우리의 영혼을 좀먹기 때문이다. 이 경고야말로 카뮈가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 에필로그 : 중소기업 영업사원이 맞이한 '코로나19'라는 페스트

'다윗의 서재'를 자주 방문한 분이라면 내가 오랜 연차의 중소기업 영업사원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몇몇 일상을 기록한 글에 종종 내 직업과 이력을 소개한 바 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는 컴퓨터 전산용품과 모바일 액세서리를 전문적으로 제조 판매하는 중소기업이다. 거의 대부분의 품목을 중국으로부터 수입(OEM)한다. 할인점을 위시하여 다양한 채널에 공급 판매한다. 1/4분기는 전통적인 시장 성수기다. 하지만 지난 2월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직격탄을 맞았다. 오프라인 채널은 고객이 없어 매출이 급감했고, 중국에서 건너와야 할 품목은 공장이 돌아가지 않아 품절 대란이 지속됐다. 매출실적은 곤두박질쳤고 지난 3월에는 목표 대비 70%밖에 채우지 못했다. 편차야 있겠지만 당분간 이런 기조는 계속될 것이다. 실적이 곧 인격인 영업사원으로서 존재가 휘둘릴 수밖에 없는 서글픈 일이다.

 

최근 팀장님 주관으로 매출목표 수정회의를 진행했다. 나를 비롯한 전 영업사원들은 원안을 고수하기로 했다. 전대미문의 국제적 전염병 사태를 맞이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매출 목표로 조정(인하)하는 건 합리적인 판단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카뮈의 말을 인용했듯이 현실은 전적으로 합리적이지 않다. 비합리야말로 현실을 이끌어가는 코드다. 매출목표 조정회의를 준비하면서 나는 카뮈가 『페스트』를 통해 던진 메시지에 주목했다. 부조리한 현 상황을 깊이 사유했다. 그리고 결단했다. 저항해보기로. 부조리한 내 현실의 '페스트' 앞에서 작정하고 반항할 것을 용단했다. 모험도 아니고 체념도 아니다. 현실은 항시 불합리와 섞여 있는 것이기에 담담히 그것을 인정하고 용기 내서 부딪혀보려는 것이다. 영업사원이라는 내 위치에서 내 할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도전한 것이다. 소설에서 리유와 그랑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결단이 비단 나만의 선언은 아닐 것이다. 수능 시험에 지장 있는 고3 수험생부터 학원업계 관계자들,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대표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힘겨워 하고 있다. 그들 모두가 힘을 내 이 난국을 잘 견디기를 바란다. 역사적으로 모든 재앙은 결말이 있었다. 코로나19도 반드시 지나간다. 이를 견디는 힘은 본질적으로 나 자신 안에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와 너 사이를 잇는 공감과 연대의식에 있다. 우리 모두 이 지독한 2020년의 '페스트'를 잘 견뎌내자! 바로 그것이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베르 카뮈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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