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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가즈오 이시구로는 신간 『클라라와 태양』으로 처음 만났다. 그가 일본계 영국 작가이며 부커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소설을 읽은 뒤에서야 알았다. 그의 소설은 지루하지 않았고 가볍지 않았으며 재미없지 않았다. 문학의 기능이 교훈과 재미라는 양대 축에 있다는 걸 주지한다면 대중성의 최전선에 위치한 소설이란 장르는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 교훈은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이다. 유능한 작가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교훈을 선물했다. 이 기준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가장 근접해 있는 작가다. 이에 그의 대표작들을 역주행해 보기로 했다. 『남아 있는 나날』은 그렇게 내 손에 들어왔다.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은 『나를 보내지 마』와 함께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이다. 소설은 재미있고 잔잔하며 교훈적이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 전해오는 울림이 상당하다. 인물과 서사, 주제와 메시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 시점이 과거 현재를 수시로 오가지만 산만하지 않고 인물들의 절제된 감정이 독자에게 오롯이 전달된다. 이야기 곳곳에 묘한 긴장감이 계속해서 흐르는데 적절한 호흡으로 소설의 막장까지 독자를 흡입력 있게 안내한다. 작가의 탁월한 내공은 앤서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 주연이 열연한 영화로까지 제작되는 힘을 만들어냈다.
작품 속 일인칭 화자 스티븐스는 영국의 저명한 대저택 달링턴 홀의 집안일을 돌보는 집사이다. 최고의 집사였던 아버지를 존경하며 아버지처럼 훌륭한 집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35년간 주인 달링턴 경을 성심성의껏 모셔온 스티븐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최고의 집사는 최고의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믿는 그에게 달링턴 경이 국제 외교의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충심을 다해 돕고 보좌한다.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떠나가는 사랑을 붙잡을 여유도 없을 정도로 오직 집사의 일에 집중하고 매달린다. 그러나 평생을 바쳐 일한 집사의 일이 뿌듯하지만 달링턴 경이 나치 협력자로 이용당한 여러 정황이 드러나면서 회의가 생긴다.
평생 집사 일에 여념이 없었던 스티븐스에게 과거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생긴다. 저택의 새로운 미국인 주인의 권유로 포드 자동차를 몰고 장거리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소설은 스티븐스가 6일 동안 여행하면서 추억하는 과거의 회상과 현재의 여행 시점을 교차시킨다. 오래전 자신과 함께 일한 여인 켄턴 양의 편지를 받고 여행길에 그녀를 만날 기대에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막상 오랜만에 그녀를 만났지만 표면상 서로 간 달라진 건 없다. 소설의 말미 켄턴 양과 헤어진 후 우연찮게 만난 한 노인의 말이 스티븐스의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죽 뻗고 즐길 수 있어요."
이 소설은 크게 세 가지 주제에서 나에게 농밀한 울림을 주었다. 주인공 스티븐스가 끊임없이 질문한 주제는,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품격'에 관한 것인데 스티븐스의 철학은 명징하다. '위대한 집사'란 주인에 대한 절대적 믿음, 복종, 이를 넘어선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준에서 자신은 최선을 다했고 완벽했음을 자부한다. 또한 주인 달링턴 경이 순수한 나머지 나치 정권에 이용당한 사실에 대해서도 자기 영역 바깥에 있는 일음을 강조하며 개인의 죄의식과는 거리를 둔다. 위대함과 품격의 본질적 의미를 묻는 지점인데 이 부분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답변을 강요하거나 선악의 가치판단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일과 직업에 있어 '위대함'과 '품격'이란 항시 뜨거운 주제다. 스티븐스가 제기한 질문을 현재의 나에게 그대로 치환해 보자. 위대한 영업사원이란 무엇인가. 전문적 역량과 탁월한 실적을 통해 회사와 대표에게 큰 영업이익을 안겨주는 것일까. 뜨거운 동료애를 발휘함으로써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우선하는 걸까. 훌륭한 조율자로서 부서와 개인 사이의 소통의 다리를 잘 연결해 주는 것일까. 물론 가장 좋은 건 이 모든 역량을 다 갖춘 것이겠지만 경쟁이 있는 곳, 특히 숫자로 실적을 다투는 곳은 감히 불가능한 얘기라 할 수 있다. 위대함과 품격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회사와 학교를 위시하여 실력과 전문성을 겨루는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음미해 봐야 할 주제임은 틀림없다.
또 하나는 스티븐스와 켄턴 사이의 이뤄지지 못한 사랑의 절절함이다. 소설에서는 단 한 번도 서로에 대한 호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말과 행동이 나오지 않는다. 에두른 심리묘사와 정황적 상상을 통해 스티븐스와 켄턴 사이의 사랑의 기류를 살포시 포착할 뿐이다. 가장 극적으로 갈등이 해소된다고 볼 수 있는 마지막의 둘의 재회에서도 후회나 그리움에 관한 직접적인 묘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참인지 거짓인지 모를 듯 묵묵하게 전하는 켄턴 자신의 결혼생활의 고백 은 애절하다 못해 서글프기까지 하다. 결국 둘은 '마지막 말'을 하지 않은(못한) 채 헤어진다. 사랑했지만 자신의 위대한 책무에 복무함으로써 들여다보지 못했고 거꾸로 그것을 알기에 다가서지 못했던 둘의 사랑은 애잔하고 서글프며 가혹하다. 독자에게 눈물을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서사 하나만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기술이 과히 노벨상 작가답다.
마지막 주제는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의 대비다. 소설은 여행의 현재 시점과 과거 회상의 교차 구조로 이루어졌다. 현재에서 과거를 반추하는 흐름이다. 자신의 선택과 최선에 후회 없이 살아왔다고 믿는 주인공에게 우연의 어느 노인과의 대화는 정작 잊고 있던 것을 알게 해주었다. 자기 자신에게 미래 또한 남아있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산 것과는 무관하게 앞으로도 상당히 많은 '남아 있는 나날'이 존재한 것이다.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있고 현재는 총알같이 지나가고 미래는 머뭇거리며 온다"는 말이 있다. 총알같이 지나가는 현재에서 영원히 정지해있는 과거의 회상에만 빠져 있는 주인공 스티븐스에게 머뭇거리면서 다가오는 미래가 있다는 깨달음은 그뿐 아니라 정신없이 살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만 잠시 잊고 있는 지혜이다.
자연스럽게 내 삶과 나이로 감상을 옮겨가고자 한다. 어느덧 내 나이 사십 대 중반이다. 평균적인 기준에서 대략 반평생 정도를 산 것 같다. 불혹은 남자에게 가장 도전적이고 전회적인 연령대로 불린다. 한 남자로서 가장 빛나고 역동적인 황금기이다. 반면 과거와 미래를 동시 천착하며 깊은 존재론적 번민에 빠지는 극한의 걱정기이기도 하다. 빛나지만 남루하고 두렵지만 역동적인 나이 대다. 나이가 더할수록 시간의 속도는 더욱 빠르게 흐른다는 사실에 숙연해진다. 나는 과연 좋은 남편이고 아빠일까. 훌륭한 아들일까. 위대한 직원일까.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남은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에게 남아 있는 나날은 어떻게 펼쳐질까. 여러 진지한 사유가 머릿속을 주유한다. 이토록 인생의 심연을 깊게 탐색하게 한 것만으로도 이 소설의 가치는 충분하다.
노벨문학상 심사위원회 측은 "이시구로는 초기작에서 이미 가장 깊이 다루는 주제 '기억, 시간, 자기 기만'을 드러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의 글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 조심스럽고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한다"고 평가했다. 그렇다. 이시구로의 소설이 무거운 주제를 관통하면서도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독자의 내면에 침잠할 수 있는 건 독자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민하고 성찰하되 사유의 종국은 실존 독자의 몫으로 넘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스티븐스가 '위대한 집사'였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오직 독자의 평가로 남아 있다. 나(독자) 자신의 '남아 있는 나날'에 대한 평가와 해석에 관해서도 말이다. 나이를 먹어가며 두고두고 읽어야 하는 소설이다. 위대한 책 더미에 한 권을 더 얹을 수 있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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