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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새움출판사에서 새롭게 번역한
카뮈의 <이방인>이 번역 논쟁에 휘말리며 출판계의 뜨거운 감자로 군림하고 있다. 지금도 출판사 홈페이지에서는 역자와 출판사, 댓글러들
간의 치열한 토론이 전개 중이다. 출판사의 요란한 마케팅 방법과 역자의 공격적인 논조, 즉 '태도'를 비판하는 댓글이 주류를 이루지만 개중에는
이번 논쟁의 핵심인 '번역'의 디테일을 놓고 시시비비를 따지는 댓글도 적지 않이 눈에 띈다. 긴 연휴 기간(어린이날-석가탄신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출판사 측에서 그간의 댓글들을 일괄 삭제하기도 했지만 당분간 이 논쟁은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 않다.
개인적으로 이번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한 사람의 독자이자 리뷰어로서 다양한 주관적 해석을 엿보고, 그 와중에
간주관적(intersubjective)인 것을 추출하며, 종국적으로 가장 '카뮈적'인 게 무엇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불어를 전혀 모르는 내 입장을 생각할 때 역자의 논증과 새 번역본의 가치를 깊게 탐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한계 때문에 생산적이고 학습적인 책읽기에 더욱 열정을 발휘하게 됨으로써 <이방인> 탐구의 선순환적 피드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설 본문과 긴 역자후기
모두 꼼꼼히 읽었다. 단어와 쉼표, 어느것 하나 허투루 읽지 않고 세밀히 살폈다. 느린 속도는 불가피했다. 물론 모든 책은 느리게 읽어야 한다.
이는 평소 내 독서 신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에 우선하는 특별한 이유가 존재했다. 역자(이정서)가 지금까지 최고의 번역으로 꼽혀왔던
기존 번역(김화영 역)이 오역이었다고 지적하며 강렬한 논리로 비판하고 재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자가 자신의 번역이 카뮈의 의도와
<이방인>의 본래성을 가장 완벽하게 담아냈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치열한 정독은
불가피했다.
전반적으로 잘 읽힌다. 문장이
매끄럽다. 낱말의 의미를 풀어내는 일차적인 해독력은 무난하다. 딱히 막히는 부분은 없다. 번역본이 매끄럽게 읽힌다는 건 일단 장점이다. 사실
기존의 김화영 역은 매끄러운 문장과는 거리가 있었다. 사유의 밀도나 표현상의 의도와 무관하게 문장 자체만으로 불안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맞춤법, 주술 호응, 문단의 전후 맥락, 단어 선택 등에서 김화영 역은 다소 투박한 듯 읽혔고 일부분에서는 조악한 느낌마저 들었다.
최소한 가독성에 있어 김화영의 번역은 그리 좋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두 번역본(김화영 역, 이정서 역)을 비교한 결과 단어와
문장이 주는 외연상의 어감에서 상당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화영 역은 마치 교정이 되지 않은 글을 읽는 듯한 단절성의 비문을 자주 사용한
데 비해, 이정서 역은 거침없이 미끄러울 정도로 유려하고 속도감 있는 문장을 일관적으로 사용했다. 물론 매끄러운 문장이 무조건적으로 옳거나
좋다는 뜻은 아니다. 번역의 핵심은 원문을 얼마나 충실히 옮겼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카뮈의 문체가 본래적으로 가독성과는 거리가 먼,
투박함과 불명확성을 구조적으로 내재한 것이라면 그 고유성을 그대로 살리는 게 제대로 된 번역이다. 어려운 건 어려운대로 모호한 건 모호한대로
오류는 오류대로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게 최고의 번역인 것이다.
선술했듯이 각 사건의 전개과정을 파악하고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이정서 역이 보다 높은 가독성을 가진다. 또한 주인공 뫼르소를 위시한 소설 속 주요인물의 개별성을 각인하는 데에도 이정서 역이 명확한
입장에 서 있다. 역자 이정서 씨는 이례적으로 긴 역자후기에서 김화영의 오역을 거침없이 지적한다. 무려 58개의 오역을 제시하며 자신의 논리를
펼친다. 오역으로 규정한 문장과 문단을 세밀게 해부하며 소설 <이방인>의 개별적 각론들을 주석한다. 역자의 논증은 구체성, 성실성,
일관성에서 부분적으로 어느정도의 설득력을 확보한다. 그래서인지 출판계의 잡음과는 별개로 서점에서 불티나게 판매되고 있다.
기존 번역을 재단하는 역자의 논거 중 핵심은 단연 주인공 뫼르소의 살인 동기다. <이방인>이 부조리 문학으로 불리게 된 핵심적인
이유는 뫼르소의 이해할 수 없는 살인 동기와 법정 태도에 있었다. 기존 번역서들은 공통적으로 뫼르소의 살인 동기를 '태양'에서 찾았다. 그러나
역자 이정서 씨는 '칼날'에서 찾고 있다. 태양은 칼날을 수식하는 형용적 위치에 있을 뿐이다. 역자는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한 것은 자연스러운
정당방위였고 사건 전후에 우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야기 진행과 사건 전개가 명징한 인과관계로 구성된 필연성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우연성만을 기반으로 한 소설을 두고 위대한 소설이라고 하면 카뮈를 모욕하는 것이며 노벨문학상 위원회를 모독하는 행위"라고 힘을 주어 강변하기도
한다. 즉 역자는 부조리 문학으로서 소설 <이방인>이 분출해왔던 특질에 대한 기존 통념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그렇게 해석하는 자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상당히 도발적이다. 김화영
교수의 오역으로 한국인들이 여태까지 <이방인>을 잘못 이해해왔다,는 역자의 주장이 탄력을 받기 위해서는 프랑스 현지뿐만 아니라 해외의
출판계와 비평가, 독자들도 역자와 비슷한 선상에서 <이방인>을 읽어내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여태까지 쏟아낸 역자의
논증 중에서 이에 대한 디테일을 찾기란 쉽지 않다. 즉 사르트르의 해설을 위시하여 <이방인>에 대한 해외의 권위있는 비평과 해석에
대한 대응도 함께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역자의 일차적인 공격 대상은 김화영 번역본이지만, 논쟁의 내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역시 핵심은
<이방인>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입장은 역자의 주장에 다소 회의적이다. 역자의 정당방위 주장은
철저히 역자 자신의 '해석적 관점'에 기반해 있다. 실제로 역자의 번역이나 김화영 교수의 번역이나 뫼르소의 살인 장면에서 보이는 사건 전후의
인과적 전개과정에는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과 필연의 문제로 볼 사안도 아니다. 위대한 소설은 우연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고 역자는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그러나 뫼르소의 행동이 우연인지 아닌지는 뫼르소 당사자의 머리속에 들어가보지 않은 이상은 불가해하다. 시종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1인칭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뫼르소가 가진 생명력을 외면한 채 소설 구조의 형식적 기제에 해당하는 우연과 필연을 연역적으로
대입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인 것이다. 뫼르소가 소설 속 가상인물이 아니라 살아숨쉬는 생명력 있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라도 우·필연의 프레임은
불필요하다. 그렇기에 이는 번역을 넘어서는 영역, 즉 열려있는 텍스트로서의 '소설적 자유'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개별 수용자가 가진 하나의 해석에
불과한 것이다. 역자는 정당방위라는 연역적 결론을 상정하고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이에 구속시키는 논리를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번역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다.
역자가 카뮈의 세계에 그토록 자신이 있다면 <이방인>뿐만 아니라 <시지프 신화>,
<페스트> 등을 비롯한 카뮈의 다른 작품에 대해서도 번역하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시지프 신화>의 번역은
필수적이다.
<이방인>이 부조리의 사상을 '이미지'로 펼쳐 보인 것이라면, <시지프의 신화>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전개한 것으로,
신화상의 인물 시지프처럼 인간은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부조리에 반항하면서 살아야 하는 숙명임을 강조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부조리는 우리가 인간의 내재적 가치와 삶의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과,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갈등을 의미한다. 이를 카뮈가 어떻게 픽션화했는지, 그리고 두 텍스트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와 긴장이 어떻게
부조리라는 개념을 입체적으로 천착해가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라도 <시지프 신화>의 번역은 꼭 필요하다. <이방인> 한 권으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언어학자 롱랑 바르트는 <이방인>의 문체를 두고 가장 '이상적인 문체'라며 극찬했다. 주인공의
행동이나 발언을 전부 안다는 식으로 설명하거나, 혹은 주인공의 내면에 파고드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는 작가로서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해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거리두기로 수렴될 수 있다. 그 결과 신비스럽게도 사실만을 담담하고 적확하게 기술하는 건조하고 울림
좋은 문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바르트 개인의 해석이지만 최소한 작가와 주인공, 즉 카뮈와 뫼르소 간에 존재하는 '객관적 여백'은 분명 존재해
있는 것이다. 카뮈도 이럴진대 이정서 씨의 주장은 타언어권 번역자의 입장치고 지나치게 일방적인 면이 있다.
양비론을 싫어하지만 김화영 교수의 침묵도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이미 논쟁의 흐름상 가만히 있어야 할 단계를 넘어섰다. 물론 새움출판사와 역자
이정서 씨의 문제제기 방식과 태도에 문제점이 없지 않다. 선술했듯이 아무리 자신의 번역에 확신을 가졌다 하더라도 선학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갖췄어야 했다. 오해를 살 만했고 비판 받을 만했다. 김 교수로서는 불편할 만하다. 그러나 이번 논쟁의 핵심은 번역의 질이다. 어떤 번역이
카뮈와 <이방인>을 제대로 읽어내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정서 씨는 집요하고 일관되게 기존 번역의 오류와 한계를 구체적으로
지적해왔다. 또한 김 교수에게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한 김 교수의 응답은 없다. 개정판에 참고하겠다는 말 외에는 침묵으로 일관 중이다.
지식인의 참된 실력은 질문을 대하는 태도와 실력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성실한 답변은 지식인이라면 의무적으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원칙이다. 한낱
어린아이의 질문에도 성실히 답하는 게 위대한 학자의 태도다. 이런 차원에서 김 교수의 적절한 답변을 기다리는 독자가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나에게 이번 번역 논쟁은 참 많은 생각을 갖게 했다. 책을 읽을 때에는 단어 하나와 쉼표 하나도 허투루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작가의 의도와는 별반으로 텍스트의 해석은 개별 독자에게 자유롭게 열려있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된 것이다. 구심을 잃고
허공을 떠도는 내 책읽기의 부끄러운 현재상을 직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인식이 있었다. 그랬다. 고백컨대 난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카뮈가 얼마나 위대한 작가인지를. 쉼표 하나도 무의미하게 사용하지 않는 천재 작가의 숨결을 뒤늦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이 책(새 번역본, 이정서 역)이 나에게 준 선물은 녹록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