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교과서 문제로 나라가 시끄럽다. 박근혜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층인 37%정도가 국정화에 찬성하고
있다. 반대는 절반을 넘어섰다. 시간이 갈수록 무응답층의 비중이 반대쪽으로 돌아서고 있다. 국정화 문제는 최근 우리사회의 가장 큰 이슈였다.
그렇기에 공중파를 비롯한 여러 채널에서 열띤 토론이 진행 중이다. 그중 13일 방송된 JTBC <밤샘토론>은 단연 눈에 띄었다.
국정화 반대 패널로 출연한 유시민의 활약이 타 패널들을 압도하며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토론을 시청하며 "내공있는
지식인의 '말'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봤다.
학창시절을 떠올려보자. 어느 학년이나 유독 잘 가르치는 교사가 있고
유난히 못 가르치는 교사가 있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강의는 말로 하는 것이다. 명강의로 학생을 압도하는 교수가 있는 반면 강의 내내 졸음과
지루함을 유발시키는 교수도 있다. 중요한 건 가르치는 자의 학벌과 이력이 '잘 가르침'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인의 학벌과 지력이
높다고 해서 잘 가르치는 건 아니다. 말을 잘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능력이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누구나 말을 잘하지는 않는다. 물론 똑똑한 사람이 말 잘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적 콘덴츠를 갖춘 건 맞다. 하지만 그것이 '말
잘함'의 하드웨어적 시스템까지 규정하지는 못한다. 달변에는 여러 스타일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듣는 이의 동의와 공감을 이끌어내는 역량은 필수적인
요소로 고려된다. 자기 혼자 허공에 대고 지껄이는 행위를 말 잘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화자와 페이퍼 사이의 교류는 말 잘함의 학습과정에
불과하다. 말을 잘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자신의 내면 속에 있는 감정과 정보를 외부로 잘 표출해내는 능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이 오롯하게
형성될 수 있는 역량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페이퍼에 기록된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는 1차원적 행위를 참된 지식인의 역할로
보는 것 같다. 입시와 학벌 위주의 사고방식에 경도되어 있는 한국의 사정을 고려했을 때 그 동인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지식인의 역할은 공부가 아니다. 지식인의 참된 역할은 자기 내면에 'input'된 지식과 정보를 정갈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소매화하여
바깥(대중)으로 'output'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output'된 지식과 정보를 타자가 어떤 긍정으로 'input'하는가에 따라
지식인의 자질과 역량은 결정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내공있는 지식인의 원형이 도출된다.
아무리 고매한 지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타자에게 전달되어 생동하지 않는 한 그것은 죽은 정보에 불과하다. 예컨대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가. 공산주의자들은 페이퍼에
기록된 지식과 정보만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오만한 착각에 함몰됐다. 인간 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공산주의자들의 사상적 기초다.
그들은 '시장(market)'으로 불리는 인간 내면 속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지식과 정보의 교류 혹은 부딪힘의 장을 철저히 무시했다. 인간들
사이에 발생하는 다양한 부딪힘의 점증과정은 인간 내면에 체화된 지식으로 남는다. 페이퍼적 지식은 그것을 담지 못한다. 그렇기에 힘이 없다. 참된
지식은 반드시 사람들 사이를 휘젓고 날아다닌다.
오래전 마르크스는 지식인의 임무를 해석에서 변혁의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지식인이 가진 지식과 정보가 자기 안에 고착된 상태로 정지해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바깥으로 내보내는
방식이 조악하고 경박해서 종국적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태에 직면해서도 안 된다. 꾸준한 학습과 자기관리, 현실 문제에 대한 객관적 인식,
대중여론의 분석과 수렴, 극단과 거리를 두는 중용적 자세, 세련된 말과 글 등은 내공있는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요소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필수조건이다.
나는 아무런 교훈과 의미를 담지 않은
쓰레기 같은 배설물을 토해내는 우리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의 모습에 자주 분노한다. 얼핏 봐서는 정의를 위해 울부짖는 모양새지만 진지하게 그들의
분출물들을 천착해보면 치졸한 허위와 졸렬한 가식으로 가득 차 있다. 대개 실력 없는 사람이 태도도 꼴불견이다. 물론 공부는 많이 했다. 서울대를
나왔고 외국에서 공부했으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머릿속 지식은 녹록지 않다. 그러나 말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말 할 능력이 부재하다. 즉
'output'의 역량이 보잘것없기에 그 공백을 단순적 말장난으로 감추는 것이다. 그런 싸구려 수사를 지식인의 위트와 재치로 바라보는 혹자들의
'박애주의'가 안쓰럽다.
이런 배경에서 유시민이라는 지식인의 존재는 한국사회에서 보물과 같은 것이다. 과거 "옳은 말도 싸가지
없게 한다"는 비아냥이 그를 따라다니곤 했다. 그러나 최근 그의 언행에서 그런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다. 국회의원과 장관을 지낸 국정경험과
그간의 겪은 아픈 상처들이 그를 태도까지 겸비한 완벽한 논객으로 성숙시킨 에너지였을 것이다. 당대에 유시민과 붙어서 말로 이길 논객은 없어
보인다. 나와는 인간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과 정치·사상적 이념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그가 선택한 정치적 결단과 정책적 입장도 대부분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지식을 소매단계로 끌어올려 대중에게 적확하게 전달하는 능력 만큼은 항상 최고의 수준에서 나를 고무하며 설레게
했다. 보수에 유시민과 같은 논객이 없다는 건 서글프다.
유시민의 말은 수정없이 그대로 옮겨놓으면 책이 될 정도로 정교하다.
그는 구어의 한계인 주술관계의 오류도 범하지 않는다. 말의 마지막을 얼버무리지 않고 정확한 서술어로 끝맺는다. 또한 자신의 'text'에
'context'를 그대로 담아낸다. 즉 말이 맥락이요 맥락이 곧 말이 된다. 그래서 논점을 흐리지 않고 항상 고밀한 논리의 수준을 유지해낸다.
표정과 어휘의 적확성도 뛰어나다. 부드럽게 말해야 할 때는 부드럽다. 힘주어 말해야 할 때는 억양을 높이며 제스처를 부가시킨다. 미리 준비하지
않은 실시간의 감각적 교정으로 감성과 이성의 조화된 언변을 토해낸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 달변가의 모습인 것이다. 응당 지식인의 말빨은 이래야
한다.
글을 정리하자. 지식인이라면 유시민처럼 말해야 한다. "나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 따위를 띠고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그야말로 멋진 웅변이었다. 선술했듯이 말이라는 건 내 안의 감정과 정보를 꺼내 나를 뚫고 타자에게 전달하는 과정이다. 말을
잘 한다는 건 그 과정이 세련되고 정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말 잘할 권리'가 있다. 한나 아렌트가 역설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 타인의 입장에서 말하고 생각하지 못한 무능과 결핍의 산물이었음을 상기하자. 유시민의 사자후가
돋보인 토론을 보며 참된 지식인의 아우라와 말 잘함의 본질에 대해 궁구해봤다.
[사진출처 : 프레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