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키우며 놀랄 때가 많다. 자녀를 양육한다는 건 청년 때에는 경험하거나 상상하기 힘든 지혜와 역량을 공급받는다는 것과 동의어다. 아이가 성장할수록 부모도 성장한다. 아니 성장해야만 한다. 아이의 성장에서 배우지 못하는 부모는 못난 부모다. 아이가 커갈수록 부모의 배움의 깊이도 커진다. 자녀 양육을 통해 얻는 지혜는 감미롭다. 지난 주말 우리 가족에게 흥미롭고 감동적인 일이 있었다. 이를 소개하면서 자식 키우는 보람과 감동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한다.
잘 알다시피 나에게는 초등학생 두 딸이 있다.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둘째 딸은 몇 가지 버릇이 있는데 그중 가장 고약한 게 샤워할 때 멍 때리며 물을 사용하는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해 샤워기로 자기 몸 적시는 것에 중독이 됐다. 우리나라가 UN이 정한 물 부족 국가이고 물과 가스와 같은 자원은 아껴 써야 한다는 걸 거듭 알려주어도 좀처럼 버릇이 고쳐지지 않는다. 고집과 자존감도 제법 센 편이라 혼날 때는 개선하는 듯하다가 다시 제자리다. 아주 골치 아픈 버릇이다.
지난주 토요일 오전의 일이다. 이 녀석이 또 샤워기로 물을 몸에 흘리고 있는 게 아닌가. 아내가 물 잠그고 얼른 나오라고 아우성이다. 몇 차례 경고를 주었는데도 함흥차사다. 아내의 목소리가 커지자 거실에 있던 내가 나섰다. 화장실 문을 열었더니 녀석이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다. 나는 매섭게 훈계했다. "왜 계속 물을 틀어놓니. 엄마 말은 왜 안 듣냐"며 나무랐다. 그랬더니 "이제 곧 나가려고 하잖아."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눈을 부릅뜨고 말대답하는 모양새가 거슬려 아이 이마에 딱밤을 한 대 때려주었다. 녀석은 아팠는지 울면서 화장실 밖으로 휑 나가버린다. 상황은 일단락된 듯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역시 말 안 들을 때는 혼나야 해"라며 나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는데 갑자기 초등학교 6학년인 첫째 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가와 이의를 제기한다. "아빠! 근데 서윤이(둘째 딸) 왜 때린 거야?" 어이가 없어 바로 답변한다. "서윤이가 물 낭비하는 게 어제오늘 일이니. 엄마 말도 안 듣고 말이지. 잘못했으면 혼나야지." 그랬더니 첫째 아이가 대응한다. "서윤이가 물 낭비하는 건 잘못했어. 하지만 엄마가 화장실에서 나오라고 해서 손 씻고 수건 준비하는데 아빠가 다짜고짜 와서 꿀밤을 때렸잖아. 서윤이 얘기 들어보지도 않고. 그렇지 않아도 엄마한테 한소리 들어서 속상한데 막 나가려고 하는 서윤이를 때린 건 아빠가 잘못했다고 봐." 순간 멈칫했다. 아이 말이 맞기도 맞았거니와 살짝 떤 채로 눈물을 애써 참으며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분히 방금 전 상황을 복기했다. 그랬다. 둘째 아이는 이미 엄마에게 혼이 난 상황이었고 엄마 지시대로 샤워를 마치고 나오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빠가 중간에 끼어들어 정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이마에 꿀밤을 갈긴 것이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첫째 아이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용기를 내 아빠를 찾아와 항의한 것이다. 첫째 딸이 눈앞에서 목격한 장면은 정당하지 않았고 납득되지 않았다. 동생이 억울해 보였다. 이런 억울한 일이 집에서 일어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략 상황이 정리됐다. 순간! 나의 첫째 딸 다인이가 너무 멋있고 자랑스러웠다.
논리적으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답변을 주어야 했다. 아이에게 변명하지 않았다. 내 잘못을 바로 인정했다. 방안에 토라져 있던 둘째 아이를 불러 정중히 사과했다. 아빠가 오해했고 방금 전 자초지종도 물어보지 않은 채 이마에 딱밤을 때린 건 아빠의 과오였음을 인정했다. 둘째 아이는 그제야 억울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며 함지박 같은 눈물을 흘렸다. 옆에 있던 첫째도 덩달아 울었다. 나는 두 딸을 안아주면서 아빠가 잘못했음을 다시 한번 사과했다. 그리고 잠시 후 첫째 아이를 따로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방금 전 그 용기 너무 멋졌어. 앞으로 집에서뿐 아니라 학교와 학원에서,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 억울한 사람을 만나거나 정의롭지 못한 장면을 본다면 지금처럼 용기 있게 말할 수 있지? 첫째는 답변했다. "네!"
그런데 정작 더 중요한 감동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갑자기 첫째 아이가 나에게 귓속말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아빠. 잘못을 바로 인정하고 사과한 아빠가 너무 멋있어." 나는 그 순간 일시 정지되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끌어 오르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속으로 속삭였다. 녀석은 다 알고 있구나. 첫째 아이를 다시 한번 꼬옥 안아주었다. "고맙다. 내 딸." 내면에서 솟아오른 작은 눈물이 내 눈에 고여있음을 발견했다. 첫째가 대견했고 나도 멋져 보였다.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다. 주말 오전 우리 가족이 만들어낸 감동의 한 장면이 며칠 동안 내 가슴을 휘어잡았다. 이게 자식을 키우는 보람이자 묘미구나, 생각했다.
올해 열세 살이 된 첫째 딸은 이제 더 이상 심통과 어리광을 부리던 과거의 그 녀석이 아니다.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지만 동시에 가장 무섭다고 말해온 아이였다. 엄청난 독서량으로 중무장한 파워블로거이자 회사에서는 영업팀 최고 선임인 사십 대 중반의 아빠에게 공정과 정의(正義)를 질문하는 아이로 성장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날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와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하고 토론해야 할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아이의 날카로운 논리에 진땀을 빼야 할 것이고 아이를 설득하기 위해 수고해야 할 것이다. 부모의 힘과 권위만으로 자식을 제압하던 시대는 종말했다. 두 아이를 나와 동등한 존재로 여기고 그 어떤 핸디캡 없이 평등하게 소통하고 토론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대다. 그래야 아이는 부모 너머의 세계로 안정감 있게 나아갈 수 있다.
부모와 자식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소통해서는 곤란하다. 얼마나 많은 부모가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어렸을 때는 부모의 절대 권력에 짓눌리는 것 같지만 커서도 자식이 부모 마음대로 될 것 같은가. 부모는 자식이 세상에 나가 독립적인 주체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잠시 맡아서 기르는 존재다. 부모도 완전하지 않아 실수하고 넘어진다. 오류도 있다. 모순적이기도 하다. 자식에게 잘못한 게 있다면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 자식이 나중에 부모가 되었을 때에 동일한 모습을 자식에게 발현할 수 있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필히 부모도 자라야 하는 이유다.
전술한 대로 두 딸은 점점 더 커갈 것이다. 몸이 자라는 만큼 마음의 크기도 자랄 것이다. 논리와 실력으로 부모에게 대항할 때도 많아질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이 부모 권력을 동원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동일한 운동장에서 서로 간 동등하게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두 딸이 나를 넘어설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세상 못난 부모들이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결국 자식은 부모라는 존재를 관통하면서 세상과 조우한다. 나와 내 아내가 두 딸의 상처가 되지 않기를, 진심 두 아이의 용기와 자신감의 영감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지난 주말의 한 토막 일화가 생일날의 내 가슴을 웅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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