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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뒤랑 - 부서진 삶에서 버텨낸 믿음 ㅣ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연감 11
조병수 지음 / 가르침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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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병수 명예교수(프랑스 위그소 연구소장)는 『마리 뒤랑. 부서진 삶에서 버텨낸 믿음』을 통해 프랑스 위그노 박해사의 한 여인, 마리 뒤랑의 생애를 추적한다. 위그노를 다룬 책이나 순교사, 신앙 위인전은 시중에 적지 않게 나와 있지만, 이 책은 그 가운데서도 유독 깊고 담백하고 은혜롭다. 학문적 무게와 신앙적 사색이 균형을 이루면서도 결코 어렵지 않게 읽힌다. 한 인물의 생애를 다루되 그것을 딱딱한 역사서로 그치지 않고 오늘 우리의 삶까지 끌어당긴 흔적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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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위그노는 16~18세기 프랑스의 개신교도, 곧 칼빈주의 개혁파 신자들을 일컫는다. 1598년 앙리 4세가 낭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를 잠시 허락했으나 1685년 루이 14세가 이를 철회하며 위그노에 대한 조직적 박해가 재개되었다. 개종을 거부한 이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투옥되거나 갤리선 노잡이로 끌려갔으며 여성 신자들은 프랑스 남부 애그모흐뜨의 꽁스땅스 탑에 수감되는 경우가 많았다. 마리 뒤랑(Marie Durand)은 바로 그 탑에 갇혀 신앙을 지킨 대표적 인물이며, 그가 갇혀 있던 탑의 바닥에 새겨졌다고 전해지는 'REGISTER(저항하라)'라는 글자는 지금도 위그노 신앙의 상징으로 회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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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구성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는 마리 뒤랑의 삶과 그가 후대에 남긴 정신을 간략히 추모한다. 2부는 그의 가족을 소개하고, 3부는 마리와 함께 수감되었던 여러 여성 수감자들을 조명한다. 4부는 마리의 삶과 신앙을 본격적으로 추적한다. 마지막 5부에서는 마리의 삶으로 대변되는 '저항'의 본질적 의미를 탐구한다. 마리 개인에서 출발해 그를 둘러싼 사람들로 시야를 넓혔다가 다시 마리 개인의 신앙 여정으로 좁혀 들어간 뒤, 마지막에는 그 개인을 통해 시대와 신앙 전체를 조망하는 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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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뒤랑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711년 세벤 지방의 위그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열아홉이라는 어린 나이에 개신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꽁스땅스 탑에 갇힌다. 그는 그곳에서 서른여덟 해를 살아낸다. 젊음이 통째로 지나가고 몸이 늙어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768년, 늙은 몸으로 풀려나 얼마간의 여생을 보내다 1776년에 생을 마감한다. 짧게 요약하면 이렇지만 이 몇 줄 안에 담긴 시간의 무게는 결코 몇 줄로 다 담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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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탁월함은 저자가 직접 보고 느끼고 사색한 내용을 중심으로 씌어졌다는 점이다. 저자는 마리의 발자취가 서린 남프랑스의 광활한 현장들을 수없이 답사했고, 꽁스땅스 돌탑은 다녀온 횟수를 잊을 정도로 자주 찾았다. 그 열정과 성실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 곳곳에 삽화와 사진이 많이 인용되었는데 대부분 저자가 현지를 방문할 때 촬영한 사진들이다. 마리의 생가는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으로 실려 있다. 저자가 꽁스땅스 탑의 좁은 계단을 오르며 마리가 오랜 세월 올려다보았을 그 습한 벽과 창을 몸으로 느낀 뒤에 쓴 문장들에는, 문헌만 뒤진 사람이 쓸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다. 그 현장성이 이 책을 단순한 전기가 아니라 순례의 기록처럼 읽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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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또 다른 탁월함은 마리 뒤랑을 '성경의 여인'으로 조명한다는 점이다. 마리가 남긴 글의 대부분은 편지였는데 저자는 그 편지들을 하나하나 인용하며 그가 얼마나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기대어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감옥이라는 극한의 공간에서 자기 억울함이나 인간적 사색을 늘어놓을 법도 한데 그의 편지는 오히려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추적하는 쪽으로 향해 있다. 예컨대 마리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존재, 조카 안느(오빠 삐에르의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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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아, 언제나 공손함을 잃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을 네 삶의 법도로 삼거라. 또한 부지런한 마음으로 일하렴. 사도 바울께서 말씀하셨듯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란다.” [p.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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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가정 안에서의 신앙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 책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해준다. 위그노 신앙을 수호하다 끝내 순교한 오빠 삐에르에 대한 마리의 선망과 존경은 책 곳곳에서 묻어난다. 조카 안느에게 아버지의 모범을 따르라고 거듭 권면하는 대목은 오빠에 대한 깊은 경외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그 존경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에띠엔느 뒤랑이 어릴 적부터 심어준 신앙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38년의 수감 생활 동안 신앙의 순수성을 잃지 않고 성경 말씀으로 힘과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기초 동력은 바로 신앙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에 있었다. 가정이 흔들리고 신앙 교육이 힘을 잃어가는 지금,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결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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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마지막 5부에서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마리에게 저항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마리에게 신앙과 저항이 별개의 가치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한 인격을 이루는 두 얼굴, 곧 '신앙하는 저항'이자 '저항하는 신앙'이었다. 저항이 빠진 신앙은 무력하고, 신앙이 빠진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저항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향했는가. 저자는 세 겹의 저항을 짚어낸다. 첫째는 시대에 대한 거부다. 신앙을 강요하고 회유하는 왕정과 교권을 향해 '아니오'라고 선언하는 것인데, 이는 무력 투쟁이 아니라 고난을 온몸으로 당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저항이었다. 둘째는 교회를 향한 저항이다. 마리는 박해받는 형제자매에게 무관심한 채 안일함에 젖어가는 동시대 교회를 향해서도 거침없이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셋째, 가장 치열했던 저항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끝없는 수감 생활에 지쳐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 적당한 타협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마음과 맞서 싸우는 일이었다. 조카 안느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리는 "복음을 따라 네 자신을 난폭하게 대하라"고 권면하는데, 이는 유혹과 세속화 앞에서 스스로에게 엄격해지라는 자기 자신을 향한 저항의 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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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이야말로 이 책이 전기를 넘어 신학적 텍스트로 서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마리 뒤랑의 '버팀'은 단지 한 개인의 강인함을 기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자의 언어를 빌리면 시대와 교회와 자기 자신이라는 세 전선에서 동시에 벌어진 일상의 저항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마리를 초월적 영웅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는 우리와 본성이 다르지 않은 한 사람이었을 뿐이며, 그렇기에 안일하고 세속화된, 장신구 같은 신앙에 저항하라는 그의 요청은 오늘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겨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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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나는 개인적인 기억 하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25년 전, 나는 연애 문제로 삶과 신앙을 둥개고 있던 불안한 청년이었다. 옆에서 안타깝게 지켜보시던 담임목사님은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26:3)”라는 이사야서 말씀을 직접 손으로 써서 나에게 건네주셨다. 그때는 나이도 어리고 신앙도 성숙하지 못해서 심지를 견고히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임한다는 그 특별한 메시지를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말씀이 내 삶을 지탱하는 중심 말씀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첫사랑과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한 것도, 한 회사에서 22년간 견뎌낸 것도, 초등학생 때 처음 출석한 교회에서 여러 고비를 버텨내 안수집사의 직분을 받은 것도, 돌아보면 모두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일으킨 감사한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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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가 감옥의 벽 앞에서 붙든 것과 내가 삶의 여러 국면에서 붙들었던 것은 규모도 무게도 감히 견줄 수 없다. 그러나 '심지를 견고히 함으로써 얻는 평강'이라는 원리만큼은 서른여덟 해를 탑 안에서 산 여인의 삶과 내 삶 사이에 다르지 않게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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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에 신앙도, 인내도, 버팀도 낡은 미덕처럼 취급받는 시대다. 조금만 힘들어도 관계를 정리하고, 조금만 불편해도 공동체를 떠나는 게 자연스러운 시대에 '서른여덟 해를 한자리에서 버텨낸 여인'의 이야기는 낯설다 못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불편함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심지를 견고히 하는 훈련 없이는 어떤 신앙도, 어떤 가정도, 어떤 회사도 오래 버텨낼 수 없다. 편리함과 즉각적 위안에 길들여진 지금 세대가 정말이지 놓치고 있는 게 바로 이 '버팀의 영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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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스땅스 탑에서 하루하루 고된 삶을 살아야만 했던 그때의 마리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250년이 지난 지금, 지구 반대편 어느 작은 나라에서 한 사람이 그의 삶과 신앙을 더듬으며 '부서진 삶에서 버텨낸 믿음'의 의미를 자신의 이야기로 끌어안게 될 줄을. 습한 감옥에서 써 내려간 그의 서신 한 줄 한 줄이, 세대를 건너 지금 이곳까지 흘러와 나의 심지를 다시 붙들어 세울 줄은. 조병수 교수의 『마리 뒤랑. 부서진 삶에서 버텨낸 믿음』은 바로 그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역사를 찬양하는 증언록이다. 부서졌으나 무너지지 않았던 한 여인의 생애 앞에서, 나는 오늘도 심지를 다잡는다. 나뿐 아니라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 일상의 비루함을 견디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이 용기와 도전을 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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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기독교 변증
김기호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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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질문을 두려워하는 교회

청년부 부장을 맡은 지 몇 해가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여러 이유를 지켜봐 왔다. 학업과 취업, 관계의 피로, 신앙의 권태 등 원인은 다양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유독 눈에 밟히는 이유가 하나 있다. 바로 '질문하는 것을 싫어하는 교회 문화'다. 지금의 청년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익숙한 세대다. 근거를 묻고 논증을 요구하는 게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으로 체화된 세대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오래된 권위와 질서의 문법은 이 질문 자체를 불경하게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믿음은 순종이지 논쟁이 아니다"라는 익숙한 문장으로 질문을 서둘러 봉합해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랫동안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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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단 한 번도 교회에게 세상과 단절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사도 바울은 아덴 아레오바고 광장에 서서 이방 철학자들과 논쟁했다. 그는 그들의 시인을 인용했고 그들의 논리 위에서 대화를 시작했다. 무시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교회는 세상과 소통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다. 그리고 소통이란 예의와 실력을 함께 요구하는 행위다. 예의만 있고 실력이 없으면 답변은 공허해지고, 실력만 있고 예의가 없으면 소통은 폭력이 된다. 나는 이 균형 잡힌 소통의 실력을 '변증(辨證, Apologetics)'이라 부른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다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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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변증이 정답은 아니다. 인간의 논증으로 사람을 회심시킬 수 있다는 오만은 개혁주의 신앙과 어울리지 않는다. 구원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다. 하지만 변증이 정답이 아니라고 해서 무용한 것은 결코 아니다. 변증은 회심의 원인이 아니라 회심의 장애물을 걷어내는 작업이다. 세상 친구들의 질문에 성실히 답하려면 성경과 교리라는 뼈대 위에 과학과 철학에 대한 깊은 조예가 살로 붙어야 한다. 이 균형 잡힌 실력을 갖춘 책을 최근 만났다. 김기호의 『한 권으로 읽는 기독교 변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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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변증이라는 이름의 성실함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 다루는 이슈의 폭에 있다. 동성애, 종교다원주의, 기적, 부활, 칼람 우주론, 유신진화론까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마주치는 거의 모든 논쟁적 전선을 한 권 안에 촘촘히 배치했다. 저자는 단순히 성경 구절을 나열하며 정답을 선포하지 않는다. 각 이슈마다 상식과 이성의 층위를 먼저 통과시킨 뒤 성경의 진리를 겹쳐 놓는 방식을 택한다. 이 이중 구조가 이 책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동시에 은혜롭게 만든다. 논증은 차갑지 않고 신앙은 맹목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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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학에는 오랜 계보가 있다. 아퀴나스의 자연신학적 전통도 있고, C. S. 루이스의 문학적 변증도 있고, 코넬리우스 반틸의 전제주의적 변증도 있다. 이 책은 그 어느 한 학파에 온전히 투항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슈마다 유연하게 무기를 바꿔 든다. 과학의 영토에서는 과학의 언어로, 철학의 영토에서는 철학의 언어로 응수한다. 이런 유연함은 자칫 산만함으로 흐를 위험이 있지만, 저자는 매 챕터를 성경적 진리로 다시 수렴시키는 원심력과 구심력의 균형을 놓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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⑵ 유신진화론이라는 뇌관 — 존 스토트, 톰 라이트, 팀 켈러를 넘어서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머문 챕터는 유신진화론이었다. 나는 최근 이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존 스토트, 톰 라이트, 팀 켈러와 같이 내가 좋아했던 저명한 신학자들이 어째서 유신진화론을 받아들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 궁금증의 절반은 풀렸고 나머지 절반은 오히려 경계심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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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진화론은 흔히 "하나님이 진화라는 매커니즘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다"라는 온건한 문장으로 소개된다. 이 정도라면 논쟁의 여지는 있을지언정 신앙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이 책이 정확히 짚어내듯 문제의 핵심은 창조 방식이 아니라 '역사적 아담'의 존재 여부에 있다. 진화의 점진적 과정 안에서는 단 한 사람에게서 인류 전체가 유전적으로 발원했다는 명제가 성립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아담은 역사적 개인이 아니라 문학적 상징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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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는 창세기를 넘어선다. 로마서 5장과 고린도전서 15장은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그리스도)을 언약적 대표성의 구조로 정확히 병치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이 역사적 실재가 아니라 상징이라면, 이 병치 구조는 절반이 무너진다. 그리고 절반이 무너진 구조는 결국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곧 둘째 아담의 언약적 순종이라는 복음의 심장부까지 흔들게 된다. 유신진화론은 그러므로 "어떻게 창조되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구원받는가"의 문제로 귀결되는, 훨씬 더 무서운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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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와 톰 라이트와 팀 켈러가 이 위험을 몰랐을 리 없다. 그들은 과학적 정직성과 성경적 권위 사이에서 자신들 나름의 균형점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학문적 정직함을 존중한다. 하지만 존중과 동의는 다른 문제다. 이 책이 제시하는 대로 역사적 아담을 견고히 붙드는 것은 단순한 창조과학적 고집이 아니라 복음의 언약적 구조를 지키는 최전선의 문제다. 이 챕터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값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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⑶ 종교다원주의, 그리고 물러설 수 없는 배타성

종교다원주의를 다룬 챕터도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각 종교의 기본 로직, 즉 구원론의 내적 구조를 하나씩 해부한다. 불교의 자력적 해탈, 이슬람의 율법적 순종, 힌두교의 윤회적 업보. 이들은 저마다 정교한 체계를 갖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를 구원의 동력으로 삼는다는 한계와 모순을 이 책은 정확히 짚어낸다. 반면 기독교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을 구원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궤도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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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챕터를 읽으며 나는 이 이슈가 결코 신학교 세미나실에나 어울리는 관념적 사변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국내 장로교 교단 하나가 갈라질 만큼 무겁고 실제적인 문제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는 명제, 곧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를 붙드는 일은 편협함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정체성 자체를 지키는 일이다. 관용이 미덕인 시대에 배타성을 말하는 일은 불편하다. 그러나 진리는 애초에 다수결이나 여론의 문제가 아니다. 저자는 이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 정직함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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⑷ 도킨스의 시대, 그리고 응답하는 신앙

지금 세계는 유물론자와 무신론자의 사상이 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시대다. 리처드 도킨스,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유발 하라리. 이들은 저마다의 달변과 베스트셀러를 무기로 기독교를 조롱해왔다. 그들의 저작은 서점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대중의 지성을 대변하는 목소리처럼 행세한다. 반면 교회는 그 조롱 앞에서 침묵하거나, 침묵할 수 없을 때는 감정적으로 격앙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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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말하는 것은 "무조건 우리가 옳다"는 방어적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적 태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진짜 필요한 것은 탄탄한 변증력이다. 도킨스의 논증이 왜 허술한지, 하라리의 역사 해석이 어디서 전제를 슬쩍 바꿔치는지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는 실력 말이다. 신앙은 겁먹을 필요가 없다. 다만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베드로전서의 저 유명한 권면처럼, 우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 이 책은 바로 그 '준비'를 위한 실용적 병기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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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깊이보다 폭이 필요한 시대

솔직히 말하겠다. 이 책이 다루는 각 이슈의 깊이는 전문 신학서에 비할 바가 아니다. 칼람 우주론 하나만 해도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의 저작들이 훨씬 정교하고, 유신진화론 논쟁도 각 잡고 파고들면 수백 페이지의 전문서가 따로 필요한 주제다. 이 책의 정직한 한계다. 나는 이 한계를 굳이 숨기고 싶지 않다. 깊이를 기대하고 이 책을 편다면 실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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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책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 이슈의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세상에 나가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을 정도의 균형 잡힌 지도(地圖)다. 이 책이 다루는 정도의 지형만 익혀도 청년은 대학 강의실에서, 직장 동료 앞에서, 그리고 스스로의 회의(懷疑)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최소한의 근력을 갖추게 된다. 넓은 지도가 있어야 비로소 깊이 파고들 지점을 스스로 고를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입문서라기보다 나침반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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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부를 맡으며 나는 매번 확인한다. 청년들은 순진한 확신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직한 답변을 원한다. 질문을 억누르는 교회에는 남지 않지만, 질문에 성실히 응답하는 교회에는 남는다. 나는 이 책을 청년들의 손에 쥐여주고 싶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이 책이 열어놓은 문 하나하나를 더 깊이 걸어 들어가려 한다. 질문을 두려워하는 신앙은 이미 죽은 신앙이다. 질문에 응답하는 신앙만이 다음 세대에게 상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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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록 - 라틴어 원전 완역판 ㅣ 세계기독교고전 8
성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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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이나 읽은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읽을 당시 그은 밑줄을 따라가며 빠르게 문장을 복기해 서평을 남긴다. 이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최근 교회에서 '기독교 고전 읽기'라는 수업을 개강했다. 올해 처음 부임한 부교역자가 해당 과목을 맡았다. 강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신앙에 유익을 줄 기독교 고전을 선택해 한 시즌 동안 읽고 내용을 나누는 수업이다. 그 첫 책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선정됐다. 소위 '아우구스티누스빠'를 자처하는 나로서는 일 순위로 수강을 원했으나 도저히 시간대가 맞지 않았다. 아쉬웠다. 이런 배경에서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을 다시 집은 것이다. 그리고 남기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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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전 가운데 흔히 “세계 3대 고백록”이라는 말이 회자된다. 그러나 세 책을 실제로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표현은 격에 맞지 않은 문학적 관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같은 범주에 놓일 작품이 아니다.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이 인간 자아의 노출이라면, 레프 톨스토이의 고백록은 윤리적 각성의 기록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은 그 차원을 단숨에 넘어선다. 이 책은 인간이 자신을 고백하는 책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 존재 전체가 해석되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하나님을 향한 신학적 찬가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단호한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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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세 번 읽으며 깨달았다. 이 책의 주인공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인공은 하나님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범죄하고 넘어지고 시험 들고, 어느 순간 중생을 경험하고 성화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정작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은 일관되게 외부로 향해 있다. 과거의 크고 작은 일들이 현재의 나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구체적 섭리였다는 것이다. 보존하시고 운행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시각을 견지하지 않는 한 『고백록』은 오독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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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은 실패와 방황의 연속이다. 그는 젊은 시절 쾌락을 좇았고 명예를 탐했으며, 한때는 이단 사상 속에서 진리를 찾겠다고 헤매기도 했다. 그는 결코 모범적인 청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과거를 가차 없이 폭로한다. 사소한 도둑질, 허영심, 정욕, 교만—그는 인간 내면의 어둠을 조금도 미화하지 않는다. 이 대목은 자연스럽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들과 연결된다. 도스토옙스키 역시 인간 영혼의 가장 어두운 심연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작가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인물들이 보여주듯, 그는 인간의 죄와 자기 기만을 조금도 낭만화하지 않는다.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타락했고, 그 타락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극복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세계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은 서로 만난다. 인간 내면의 심연을 끝까지 내려가 보면 결국 하나의 진리에 도달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개선이 아니라 구원이며, 그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주어진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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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의인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죄인을 변화시켜 사용하신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이야기다. 기독교 신학이 강조하는 가장 위대한 진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인간을 도와주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근원이시며 역사의 절대 주권자이며 모든 것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섭리하는 분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생은 이 교리를 설명하는 교과서다. 어머니의 눈물 어린 기도, 철학적 방황, 학문적 갈망, 밀라노에서의 회심—그 모든 사건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한 신학자를 빚어 가신 과정이다. 인간의 눈에는 실패처럼 보이던 사건들이 하나님 손에서는 신학자를 만드는 재료가 된다. 이것이 섭리다. 이것이 주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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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창세기》 강해는 이 작품의 정점이다. 많은 독자들이 이 부분에서 당황한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 부분이야말로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핵심이다. 그는 창조 이야기를 단순한 성경 해설로 다루지 않는다. 그는 거기서 시간, 기억, 존재, 창조의 신비를 묻는다. 하나님은 시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다. 그의 내재적이고 필연적인 사역은 영원 전에 자신의 지극히 거룩하고 지혜로운 경륜에 따라 이루어졌다. 시간성의 거부, 즉 영원(永遠, Eternity)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과 기독교 신학은 절대로 온전히 소화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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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위대함은 그의 시대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사상은 이후 서양 신학 전체의 토대를 형성했다. 중세 신학은 물론이고 종교개혁의 신학자들까지도 그의 사상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특히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읽어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얼마나 자주 호출되는지 금세 알 수 있다. 인간의 전적 타락,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삼위일체, 은혜에 의한 구원이라는 핵심의 교리에서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단순히 인용하는 수준을 넘어 사실상 신학적 동지로 대우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의 교리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미 분명히 가르쳤던 복음의 회복이라고 확신했다. 이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순한 교부가 아니다. 그는 서방 교회의 신학적 지형을 결정적으로 형성한 인물이며, 이후 수 세기 동안 이어질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한 뿌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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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아우구스티누스는 당대 교부들과 달리 헬라어를 거의 알지 못했다. 동방 교부들이 헬라어 문화 속에서 신학을 전개했던 것과 달리 그는 철저히 라틴 세계의 사람이었다. 그는 헬라어 공부를 몹시 싫어했다고 스스로 고백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그는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라틴 고전 교육을 받았다. 학교에서 그는 문장을 암송하며 수사학을 연마했다. 특히 키케로와 같은 고전 작가들의 문장을 달달 외우며 언어 감각을 단련했다. 그 혹독한 교육은 훗날 놀라운 열매를 맺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신학자가 되었다. 그의 문장은 논리적이면서도 음악적이다. 철학적이면서도 기도문처럼 울린다. 신학이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이 바로 『고백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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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정리하자. 앞서 언급한 대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한 사람의 자전적 고백이 아니다. 젊은 시절 방탕하게 살았던 한 인간이 훗날 교회사 최고의 신학자가 된다. 겉으로 보면 극적인 인생 역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독자는 점차 깨닫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에는 우연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린 시절의 사소한 사건들, 학문을 향한 갈망, 끝없이 이어진 방황, 어머니의 눈물 어린 기도,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회심의 순간까지—그의 생애 곳곳에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조용히 개입해 있다. 한 인간이 길을 잃을 때마다 하나님은 그 길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으시고, 때로는 멀리 돌아가게 하시면서도 결국 자신에게로 이끌어 가신다. 그렇게 그의 인생의 구석구석을 인도하시고 붙드시며 마침내 한 신학자를 빚어 가신다. 그러므로 이 책의 중심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서 있지 않다. 그의 삶을 끝까지 붙드신 하나님이 서 계신다. 설명은 하나뿐이다. 하나님의 은혜다. 그리고 이 책의 모든 문장은, 그 은혜를 향해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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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분자반 - 성경과 역사에서 배우는 올바른 직분자의 모습 ㅣ 건강한 교회 세움 시리즈 4
안재경 지음 / 세움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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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갖는 여러 오해가 있다. 그중 가장 지독한 것이 목사를 교회의 '대표이사'로 여기는 것이다. 이들에게 성도 수 많고 예배당이 큰 대형교회 목사는 경영 수완이 출중한 대기업 CEO다. 반대로 성도 수와 예배당 평수가 적은 소교회 목사는 무능력한 자영업자다. 한편 장로와 안수집사는 다른 성도보다 서열이 높은 임원급으로 생각한다. 장로가 되려면 돈 좀 있어야 하고 장로들이 카르텔을 형성해 목사의 경영권을 견제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이는 전부 잘못된 인식으로 작금의 한국교회가 세상에서 얼마나 큰 조롱을 받고 있는지 보여주는 방증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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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직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안재경 목사(예장고신)의 『직분자반』은 소중한 책이다. 이 책은 성경과 역사에서 배우는 올바른 직분의 정의를 알려준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직분의 주체가 인간의 의지나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주권에 있음을 전달한다. 1부는 직분의 성경적 의미를 다루고, 2부는 성경에서 세워진 다양한 형태의 직분을 다룬다. 3부는 목사를 비롯해 현재 교회에 존재하는 직분의 종류를 소개한다. 4부는 교회 직원을 세우는 실제적인 방법과 임직 훈련을 설명한다. 즉 직분의 의의부터 역사와 직무를 넘어 실제 교회에서 세우고 교육하고 임직하는 모든 과정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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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대중성이 이 책의 강점이다. 난해하고 전문적인 신학 용어를 배제하고 평범한 목회적 언어로 쓰인 점은 이 책의 타깃층을 분명히 한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성도라면 누구나 부담 없이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직분론을 쉽게 정리해 볼 수 있다. 직접적인 성경적 근거가 있는 직분인 목사와 장로와 안수집사를 무게 있게 다루었다. 매 장마다 내용을 요약하고 토론 주제를 실어 복습할 수 있도록 했다. 불필요하거나 본질에 벗어난 부분은 다루지 않은, 제목 그대로 '직분자반'에 충실한 기술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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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직분의 의의를 신·구약의 통일성의 관점에서 설명한 점은 이 책의 가장 탁월한 부분이다. 구약과 신약을 율법과 복음으로 무 자르듯이 구분하는 건 적절치 않다. 구약과 신약의 본질은 동일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장 6항은 신·구약의 차이를 "본질이 다른 두 개의 은혜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동일한 은혜언약이 다양한 경륜들로 나타난 것이다."라고 정리한다. 구약의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통합되고 완성되었다. 그리스도의 승천 후 초대 교회에 세워진 다섯 직분 중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는 교회를 세우기 위한 '창설직'으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남아 있다. 이 세 직분은 주님 오실 때까지 교회 내에 항상 존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항존직'으로 불린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계획에 따른 신·구약의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교회 직분을 이해하는 훈련은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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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바로 장로의 직무에 관한 내용이다. 통상 장로의 역할이란 천국 열쇠를 쥔 치리회의 일원으로 성도를 잘 다스리는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우선하는 장로의 역할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장로가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을 보호하는 직분'이라는 점이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면 장로는 그 말씀을 보호한다. 목사를 감시하고 설교권에 간섭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일에 (목사와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저자는 이것이 장로를 세운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장로는 말씀에 정통해야 한다. 말씀의 바른 이해와 통치 안에서 치리회(당회)에 참여하고 성도를 심방하고 교회를 세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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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집사에 대한 바른 이해도 중요하다. 흔히 안수집사를 장로로 가는 관문이나 사전 훈련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강력한 안수집사회를 구축해 장로회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장로와 안수집사(이후 집사라 칭함)는 직무와 성격이 뚜렷이 구분되는 직분이다. 장로가 다스리는 자라면 집사는 구제를 위해 부름을 받은 자이다. 성도들의 교제로부터 소외되는 이들이 없는지 돌아보고 긍휼을 베풀기 위해 세움을 입은 직분이 바로 집사이다. 그렇기에 집사는 교회에서 가난하고 상처받고 소외된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목사는 말씀을 바르게 선포함으로, 장로는 그 말씀으로 다스림으로, 집사는 그 말씀으로 돌봄으로써 교회는 건강하고 아름답게 서나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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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6월 초 섬기는 교회에서 안수집사로 피택되었다. 이 책은 교회 임직자 교육 과정의 교재로 만났다. 이 서평도 그 교육의 일환이다. 임직을 준비하면서 직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성경적 고찰이 절실하다. 앞으로 내 남은 인생에서 교회 직분에 대해 이토록 신학적이고 실제적으로 배우고 가다듬을 날이 또 있을까 싶다. 그래서 더 열심히 배우고 훈련받고자 한다. 하나님은 직분자를 수단으로 통치하신다. 사람에게 만족을 주는 중직이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중직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나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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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정리한다. 『직분자반』은 교회 직분자 교육 교재로 손색없는 탁월한 책이다. 한국 교회의 대부분의 문제가 직분자의 문제라는 점을 인식할 때 직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는 건 매우 긴요하다. 교회 직분에 서열과 계급은 없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모든 직분은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다. 단 질서와 구별이 있을 뿐이다. 직분 공부를 해본 적 없는 일반 신자부터 중직에 있으면서도 이에 대한 조예가 부족한 직분자들에게 안재경 목사의 『직분자반』을 추천한다. 부디 한국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자신의 직무를 행사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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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총회 신학연구위원회 지음 / 영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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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바다에 빠져 살고 있다. 지난 1년 반 동안 교회에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하 '웨민'을 칭함) 강의를 수강해 끝마쳤다. 강의와 더불어 웨민의 깊이 있는 탐구를 위해 정요석 박사와 스프로울 박사의 해설서를 각 3독씩 병행했다. 이 과정을 통해 웨민이 얼마나 풍성하고 엄밀하며 유기적인지를 새삼 실감했다. 스프로울의 말대로 기독교 역사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보다 더 꼼꼼하고, 더 정확하고, 더 철저하고 그리고 더 포괄적인 신앙고백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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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개월 동안 웨민의 바다에 빠져 살면서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다. 강의 프린트와 병독(倂讀)한 해설서마다 번역이 가지각색이라는 점이다. 웨민은 밀도 있고 엄밀한 문장을 담고 있어 일부 절을 통째로 외우는 게 유익할 때가 있다. 그런데 해설서마다 번역이 조금씩 달라 어떤 번역본에 방점을 찍을지 고민스러웠다. 같은 교단(예장합신) 안에서 출간된 텍스트가 안정적일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정성호 목사(수원 선목교회 담임)가 번역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들』을 주로 참조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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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웨민 강의를 끝마칠 때쯤 개인이 아닌 총회(예장합신) 차원의 번역본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음사에서 출간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예장합신 신학연구위원회가 번역을 주도해 신앙고백서뿐 아니라 대·소요리문답, 예배모범, 교회정치까지 웨스트민스터 5개 문서를 모두 담았다. 교단 내에 목사나 교수 차원의 개인적 번역은 많았으나 교단 차원의 공적 번역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 간략히 책의 몇 구절을 훑어봤는데 번역의 질이 상당히 높았다. 긴 문장을 짧고 명료한 단문장으로 변환시킨 게 아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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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탁월함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가진 신학적 엄밀성을 현대적 번역에 담아냈다는 점이다. 앞서 만났던 여러 번역본의 부딪힌 긴 문장, 어색한 표현, 애매한 문장 구조, 비문 등을 없애고 명료한 문장으로 가다듬었다. 불필요한 접속사로 연결해 비대한 문장이 되었던 것을 명료한 단문장으로 나눠서 처리했다. 의미 부여를 위해 쉼표를 적극 활용한 부분도 돋보인다. 특히 기존에 고착된 한자의 신학용어를 일반 성도들도 알기 쉽게 평이한 단어로 바꾼 것은 인상적이다. 가령 '칭의(稱義)'를 '의롭다 하심'으로, '승귀(昇貴)'를 '높아지심'으로 번역했다. 특히 소요리문답은 교회 아이들의 교리 공부에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쉬운 문장으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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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번역 작업은 무려 7년에 걸쳐 연인원 644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영어 원문뿐 아니라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번역본을 병행 참조했고 조사와 대명사의 사용 적절성을 입체적으로 분석하여 문장을 다듬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신학자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믿음이 갔다. 번역위원으로 참여한 이남규 교수는 나와 같은 교회를 다녔고 같은 교육기관에서 교역자와 교사로 일한 경험이 있다. 삶과 신학이 일치한다는 면에서 이 교수는 내 주변 최고의 모범이다. 정요석 목사는 일면식은 없지만 명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를 통해 호감을 가진 바 있다. 내가 지금껏 읽어본 웨민 해설서 중 정 목사의 책은 단연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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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바벨탑 사건 이래 사람은 각기 다른 언어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에 번역 작업의 엄존함은 실로 무겁다. 번역은 사람의 작업이기에 흠과 오류가 불가피하다. 이 세상 텍스트 중 하나님에게 직접 영감된 성경 원어(히브리어 구약, 그리스어 신약)를 제외하고는 모두 오류와 한계가 있다. 또한 시대마다 언어는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장로교회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들을 시대에 맞게 주기적으로 개정·번역하는 작업은 긴요하다. 이런 차원에서 내가 속한 교단에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공적 번역한 것은 상당한 자부심이라 할만하다. 이 거룩한 자부심 위에 신간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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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에 장로교회 안에서도 자유주의 신학이 득세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을 내세우면서도 성도들에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가르치는 교회가 많지 않은 실정이다. 먹고살기 힘들고 멘토와 힐링을 원하는 현대인에게 죄와 회개는 따분한 얘기일 수 있다. 어린이 영어캠프나 부흥회와 같은 실용적이고 촉촉한 터치를 갈망하는 신자들이 많다. 강단(하나님의 말씀)보다 '어와나(Awana)'의 시행 여부로 교회를 선택하는 시대가 됐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보다 인간의 기호에 목회적 스탠스를 두는 한국교회의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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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성경의 일부 구절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이단적 세계관에 함몰되는 경우가 많은 시대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반드시 '전체 성경(tota scriptura)'과 함께 가야 한다. 신학자 신원군 교수의 말대로 성경과 교리는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비루한 시대적 맥락을 직시할 때 예장합신 신학연구위원회의 헌신적 수고로 쓰인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보석과 같은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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