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턴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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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무료한가. 그래서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싶은가. 하지만 가벼운 장르소설은 싫은가. 그렇다면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중 하나를 선택하기 바란다. 이시구로의 소설은 한결같이 재미있고 묵직하고 감동적이다. 초기작 『창백한 언덕 풍경』(1982)부터 최신작 『클라라와 태양』(2021)까지 그의 소설은 삶과 시간과 기억 너머에 있는 인간성의 희망을 추적한다. 대부분 1인칭 화자를 주인공으로 배치해 역사와 추리, SF까지 다양한 장르를 다룬다. 인간 문명의 이기와 한계를 고발하는 동시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 또한 인간 내면에 존재하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녹턴』은 2009년에 출간된 이시구로의 유일한 소설집이다.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 매력적인 부제가 눈에 띈다. 총 다섯 개의 단편소설을 담고 있는데 부제가 암시하듯 단편 곳곳에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인물이 정면에 배치된다. 이시구로는 음악을 문학적 소재로 차용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작가로 평가받는다. 『녹턴』에는 자신의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실존적 질문을 던지는 다양한 삶의 양태가 녹아 있다. 음악적 예술혼 위에서 사랑과 기억과 시간을 관통하는 애잔한 단편들이 독자의 가슴을 적신다.

첫 번째 소설 「크루너」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광장에서 밴드로 활동하는 기타리스트 얀(야네크)이 화자로 등장한다. 그가 광장에서 연주하던 중 한물간 가수 토니 가드너를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얀의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토니의 광팬이었다. 얀은 토니에게ㅡ어머니와의 관계도 있고 해서ㅡ적극적으로 다가가 말을 건다. 근데 토니는 아내 린디와 헤어지기 위한 이별 여행 중이다. 토니는 린디의 인생 여정을 얀에게 자세히 들려주고 린디의 호텔 창문 밖 곤돌라 위에서 그녀를 위한 세레나데를 준비한다. 토니가 노래를 부르고 얀은 기타 반주로 합류한다. 몇 달의 시간이 흐른 뒤 얀은 토니와 아내의 이별 소식을 전해 듣고 그날 밤(베네치아에서의 만남)을 회상한다.

두 번째 소설 「비가 오나 해가 뜨나」는 레이 찰스의 곡 'come rain or come shine'에서 따온 제목이다. 레이먼드는 자신의 절친 찰리의 요청으로 런던에 있는 찰리 집으로 향한다. 레이먼드가 친구 집에서 겪는 예기치 않은 에피소드가 소설의 주된 이야기다. 찰리는 아내 에밀리와의 부부 생활에 위기가 닥쳤다. 에밀리는 레이먼드의 대학 동기여서 서로 아는 사이다. 아내와의 위기를 회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친구 레이먼드밖에 없다고 여긴 찰리는 레이먼드에게 도움을 청하고 해외로 출장을 떠난다. 찰리의 요청을 수락하긴 했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레이먼드의 의도하지 않은 실수가 발생한다. 그런데 레이먼드와 에밀리가 옛 시절에 음악을 매개로 공유했던 기억 너머의 공감대로 인해 이야기는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열린 결말을 통해 독자는 사랑과 우정과 시간을 관통하는 음악의 힘에 대해 깊이 숙고하게 된다.

표제작 「녹턴」은 첫 단편 「크루너」와 연결된다. 토니 가드너의 아내 린디가 「녹턴」에도 등장한다. 린디는 「크루너」에서 화자 얀과 남편 토니로부터 언급되고 수식되는 수동적 인물이었다. 하지만 「녹턴」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린디는 재능은 있지만 추한 외모 때문에 저평가를 받는 색소폰 연주자 스티브와 함께 위험하고 대담한 일을 벌인다. 스티브와 린디 모두 전과 다른 인생을 살기 위해 당대 최고의 의사 보리스로부터 성형수술을 받는다. 같은 병원에서 같은 의사에게 수술을 받고 서로 옆방에 놓이게 된 두 사람은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만나 서로 인정하고 의지하는 관계가 된다. 그러던 중 생각지 못한 사건에 휘말린다. 블랙코미디와 같은 이야기 속에서 삶과 사랑과 자존의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아직 꿈을 이루지 못한 무명의 젊은 뮤지션 '나'가 시골 카페를 운영하는 누이 부부의 집에 머물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말번 힐스」는 수록작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 화자는 누나의 카페에 종종 들리는 스위스인 부부 틸로와 소냐와 가까워진다. 그들은 관광차 영국에 방문했는데 음악과 예술에 대한 명확한 철학을 가진 프로 뮤지션이다. 그러나 두 부부 사이에 벽이 존재하고 갈등이 있음을 화자는 알아차린다. 소설의 말미에 남편 틸로가 산책하는 동안 화자와 소냐가 대화하는 장면은 삶과 성공의 방정식에 지친 수많은 독자에게 위로를 안긴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마지막 단편 「첼리스트」다. 헝가리 출신 첼리스트 청년 티보르는 우연히 미국의 중년 여인 엘로이즈를 만나 첼로 개인 교습을 받는다. 티보르는 교습을 받을 때마다 엘로이즈에게 빨려 드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런데 엘로이즈는 말로만 코칭할 뿐 자신이 직접 첼로를 켜진 않는다. 티보르의 의심이 쌓이는 만큼 소설의 긴장은 고조되며 무언가의 비밀이 밝혀진다. 짧은 이야기 속에서 절정으로 치닫는 서사의 전개 과정이 몰입감 있게 펼쳐진다.

다섯 편의 소설 모두 음악을 소재로 하여 인간이 처한 현실과 이상의 문제를 관통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낭만을 꿈꾼다. 그러나 낭만으로만 살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실력과 경쟁이라는 냉엄한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진짜 사랑과 진짜 행복을 발견하는 건 쉽지 않다. "'참 나'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옳은 명제임에도 일부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나'가 '나 외의 것'과 명확하게 구분된다는 인식 하에서만 인간 문명의 발전은 가능하(했)다. 나를 발견하는 것. '참 나'를 인식하는 것. 그것이 타자와 어떻게 분리되는지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로 사랑하고 진실한 행복을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인 것이다.

『녹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꿈과 사랑을 채우지 못한 결핍의 존재들이다. 부재와 결핍은 인간에게 그늘을 드리운다. 흥미로운 건 인물들의 또 하나의 공통점이 모두 음악을 갈망한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노래하고 어떤 이는 연주하며 어떤 이는 교습한다. 음악은 인간에게 종교와 사상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게 하는 윤활유가 되지만 동시에 개인적인 침잠 속에서 외부를 잠시 잊게 하는 힐링과 위안을 제공하기도 한다. 음악은 모든 공간을 채우고 전 시간을 장악한다. 소설 『녹턴』의 주인공은 음악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201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노벨상위원회는 이시구로에 대해 “위대한 ‘감정적 힘’을 가진 소설을 통해 세계를 연결하는 우리의 환상적 감각 아래에 있는 심연을 발견했다”고 높게 평가했다. 또 “그는 과거를 이해하는데 큰 관심을 보여왔고, 개인이자 사회로서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탐구하고 있다”며 “제인 오스틴과 프란츠 카프카를 섞어놓은 듯하다. 여기에 마르셀 프로스트의 성향도 약간 가미돼 있다”고 극찬했다. 카프카와 프로스트의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 한림원의 평이 낯설긴 하지만 이시구로의 소설 속에 오스틴의 로맨스와 유머감각, 카프카의 꿈과 기억, 프로스트의 시간과 의식의 흐름이 여러 층위에 긴밀하게 뒤섞여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서평의 서두로 돌아가자.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 지루하고 난해하고 만연한 소설은 질색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교훈과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소설의 존재 목적은 '인간성의 탐구'이다. 즉 '좋은 소설'은 재미있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인간성을 옹호하고 성찰하는 소설이다. 이 명제에 가장 가까이 있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녹턴』을 아낌없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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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의 길
김욱동 지음 / 연암서가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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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입장에서 번역된 책을 읽을 때마다 궁금한 게 있었다. 역자가 얼마나 거대한 엉덩이의 힘을 사용했을까, 하는 것이다. A4 용지 한 장 분량의 서평 한 편 쓰는 것도 이렇게 어려울진대 방대한 원문을 읽고 이해하고 분석하며 다른 언어로 변환하는 번역가들의 수고는 감히 어림잡기 힘들다. 존경스럽기도 하다. 글쓰기는 고통이다. 글은 써본 사람만이 안다. 시든 소설이든 평론이든 하나의 완결된 형태의 텍스트를 직접 써본 사람만이 아는 고통의 영역이란 게 있다. 그것을 알기에 역자의 수고는 그 자체만으로 경이로워 보인다.

고전을 즐겨읽는 나에게 세계문학 번역가들은 모두 지적이고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채권자다. 특히 원문을 잘 이해하여 탁월한 한국어 역량으로 군더더기 없이 번역한 명망 있는 번역가들의 수고는 찬란하다. 가령 고 박형규 명예교수(고려대 노어노문학과)와 김화영 명예교수(고려대 불문학과)는 톨스토이와 카뮈의 작품세계를 안정적으로 탐독하는 데 도움을 준 분들이다. 세계 문학사에서 난해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10년 동안 매일 같이 6시간씩 번역 작업에 매진해 완역본을 낸 김희영 명예교수(한국외대)의 집념도 대단하다. 우리 같은 일반 독자는 이들의 수고와 헌신에 기대어 문학을 향유하고 있음을 부인해선 안 된다.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 등 오랫동안 영미문학을 번역해온 김욱동 명예교수(서강대)가 번역을 주제로 책을 출간했다. 『번역가의 길』은 작가이자 학자이며 번역가인 김욱동 교수가 번역에 관한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밝힌 책이다. 총 다섯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번역에 관한 여러 주제를 훑는다. 책의 구성은 이렇다. 번역의 의미와 성격을 가장 먼저 배치했고 여러 오역 사례를 실었다. 속담에서 드러난 성차별을 꼬집고 성경 번역의 긴요성을 논지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명대사를 일제강점기 이후 지금까지 국내에서 어떻게 번역해왔는지 추적한다.

저자가 소개한 고전문학의 오역 사례는 일반 독자가 놓치기 쉬운 부분이라 흥미를 끈다. 저자는 우리가 서점에서 쉽게 선택하는 피츠제럴드, 포크너, 헤밍웨이 번역본의 오역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저자가 진단하는 오역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그중 번역자가 원천어에 대한 문해력이 부족하거나 소설의 시대적·문화적·사회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가 대표적이다. 가령 무라카미 하루키가 번역한 『위대한 개츠비』와 『호밀밭의 파수꾼』은 가독성은 좋지만 정확성은 떨어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에 영향받은 것으로 보이는 한국 모 소설가의 『위대한 개츠비』 번역은 오역을 넘어 졸역 수준임을 여러 사례를 들어 증명한다. 잘 읽히는 유려한 번역은 정확성을 전제할 때만이 의미가 있음을 저자는 끊임없이 강조한다.

사실 잘 읽히는 번역과 정확한 번역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은 독자들 사이에서도 뜨겁게 토론하는 주제다. 오래전 카뮈 번역의 올바름을 놓고 신생 출판사 대표가 국내 최고 카뮈 전문가에게 도전장을 던진 일이 있었다. 당시 많은 논란과 토론이 있었으나 결국 기존 권위를 전복하지 못한 채 싱겁게 끝이 났다. 그 사건은 번역에서 독창성보다 정확성이 더 중요하다는 당연한 원리를 독자에게 일깨웠다. 원문이 난해하면 난해한 대로 가벼우면 가벼운 대로, 즉 있는 그대로를 옮기는 게 가장 정확한 번역인 것이다. 16세기 번역 이론가 에티엔 돌레가 번역가로서 염두해야 할 가장 중요한 선결조건으로 '원천어와 목표어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꼽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장 「성경 번역에 대하여」 또한 흥미롭게 읽힌다. 사실 성경의 문체는 지나치게 예스럽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성경은 '개역개정'이다. '개역개정' 번역 당시 보수적인 역자들이 문체를 조선어식으로 고집한 탓에 사어가 많고 의미가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에 개인적으로 '개역개정'을 기본으로 하되 명확하지 않은 부분은 불가피하게 주석을 보거나 '새번역'이나 '쉬운성경'을 참고하곤 한다. 한편 '새번역'의 경우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에서 번역했고 쉬운 말로 되어 있어 의미 파악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시편》을 전부 산문으로 번역해 가독성과 시적 느낌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말씀의 음미성 차원에서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다. 신학적인 부분과 맞물려 있어 평신도가 뭐라 논설하긴 적절치 않지만 시대와 상황을 고려할 때 '개역개정'만 고집하는 게 맞는 건지 의구심이 드는 건 사실이다. 개신교단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이고 통합적인, 합의된 성경 번역에 대한 갈망은 지나친 욕심이자 환상일까.

서평을 정리하자. 작년 말 한강의 노벨문학상 쾌거에 온 국민은 열광했다. 평소 책을 거의 읽지 않던 사람도 서점에 나가 소설을 손에 쥐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노벨상 효과일 것이다. 한국 첫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환호 속에서 놓치기 쉬운 헌신이 있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의 성취 과정에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의 수고가 있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성실하고 적확한 번역이 없었다면 한국 작가가 쓴 한국어 소설의 노벨상 수상은 요원했을 것이다. 번역은 그만큼 중요하다. 어쩌면 우리는 작가의 글이 아닌 번역가의 글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번역의 현실과 중요성을 진솔한 에세이로 풀어낸 김욱동의 『번역가의 길』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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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총회 신학연구위원회 지음 / 영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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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바다에 빠져 살고 있다. 지난 1년 반 동안 교회에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하 '웨민'을 칭함) 강의를 수강해 끝마쳤다. 강의와 더불어 웨민의 깊이 있는 탐구를 위해 정요석 박사와 스프로울 박사의 해설서를 각 3독씩 병행했다. 이 과정을 통해 웨민이 얼마나 풍성하고 엄밀하며 유기적인지를 새삼 실감했다. 스프로울의 말대로 기독교 역사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보다 더 꼼꼼하고, 더 정확하고, 더 철저하고 그리고 더 포괄적인 신앙고백서는 없다.

18개월 동안 웨민의 바다에 빠져 살면서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다. 강의 프린트와 병독(倂讀)한 해설서마다 번역이 가지각색이라는 점이다. 웨민은 밀도 있고 엄밀한 문장을 담고 있어 일부 절을 통째로 외우는 게 유익할 때가 있다. 그런데 해설서마다 번역이 조금씩 달라 어떤 번역본에 방점을 찍을지 고민스러웠다. 같은 교단(예장합신) 안에서 출간된 텍스트가 안정적일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정성호 목사(수원 선목교회 담임)가 번역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들』을 주로 참조하곤 했다.

교회 웨민 강의를 끝마칠 때쯤 개인이 아닌 총회(예장합신) 차원의 번역본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음사에서 출간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예장합신 신학연구위원회가 번역을 주도해 신앙고백서뿐 아니라 대·소요리문답, 예배모범, 교회정치까지 웨스트민스터 5개 문서를 모두 담았다. 교단 내에 목사나 교수 차원의 개인적 번역은 많았으나 교단 차원의 공적 번역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 간략히 책의 몇 구절을 훑어봤는데 번역의 질이 상당히 높았다. 긴 문장을 짧고 명료한 단문장으로 변환시킨 게 아주 좋았다.

이 책의 탁월함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가진 신학적 엄밀성을 현대적 번역에 담아냈다는 점이다. 앞서 만났던 여러 번역본의 부딪힌 긴 문장, 어색한 표현, 애매한 문장 구조, 비문 등을 없애고 명료한 문장으로 가다듬었다. 불필요한 접속사로 연결해 비대한 문장이 되었던 것을 명료한 단문장으로 나눠서 처리했다. 의미 부여를 위해 쉼표를 적극 활용한 부분도 돋보인다. 특히 기존에 고착된 한자의 신학용어를 일반 성도들도 알기 쉽게 평이한 단어로 바꾼 것은 인상적이다. 가령 '칭의(稱義)'를 '의롭다 하심'으로, '승귀(昇貴)'를 '높아지심'으로 번역했다. 특히 소요리문답은 교회 아이들의 교리 공부에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쉬운 문장으로 번역했다.

이번 번역 작업은 무려 7년에 걸쳐 연인원 644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영어 원문뿐 아니라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번역본을 병행 참조했고 조사와 대명사의 사용 적절성을 입체적으로 분석하여 문장을 다듬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신학자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믿음이 갔다. 번역위원으로 참여한 이남규 교수는 나와 같은 교회를 다녔고 같은 교육기관에서 교역자와 교사로 일한 경험이 있다. 삶과 신학이 일치한다는 면에서 이 교수는 내 주변 최고의 모범이다. 정요석 목사는 일면식은 없지만 명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를 통해 호감을 가진 바 있다. 내가 지금껏 읽어본 웨민 해설서 중 정 목사의 책은 단연 최고다.

번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바벨탑 사건 이래 사람은 각기 다른 언어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에 번역 작업의 엄존함은 실로 무겁다. 번역은 사람의 작업이기에 흠과 오류가 불가피하다. 이 세상 텍스트 중 하나님에게 직접 영감된 성경 원어(히브리어 구약, 그리스어 신약)를 제외하고는 모두 오류와 한계가 있다. 또한 시대마다 언어는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장로교회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들을 시대에 맞게 주기적으로 개정·번역하는 작업은 긴요하다. 이런 차원에서 내가 속한 교단에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공적 번역한 것은 상당한 자부심이라 할만하다. 이 거룩한 자부심 위에 신간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놓여 있다.

근자에 장로교회 안에서도 자유주의 신학이 득세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을 내세우면서도 성도들에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가르치는 교회가 많지 않은 실정이다. 먹고살기 힘들고 멘토와 힐링을 원하는 현대인에게 죄와 회개는 따분한 얘기일 수 있다. 어린이 영어캠프나 부흥회와 같은 실용적이고 촉촉한 터치를 갈망하는 신자들이 많다. 강단(하나님의 말씀)보다 '어와나(Awana)'의 시행 여부로 교회를 선택하는 시대가 됐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보다 인간의 기호에 목회적 스탠스를 두는 한국교회의 현실이 안타깝다.

단언컨대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성경의 일부 구절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이단적 세계관에 함몰되는 경우가 많은 시대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반드시 '전체 성경(tota scriptura)'과 함께 가야 한다. 신학자 신원군 교수의 말대로 성경과 교리는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비루한 시대적 맥락을 직시할 때 예장합신 신학연구위원회의 헌신적 수고로 쓰인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보석과 같은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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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차인표 지음, 제딧 그림 / 해결책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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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은 배우 차인표의 첫 창작소설 데뷔작이다. 15년 전 발표한 소설 『잘가요 언덕』을 제목을 바꿔 재출간했다. 차인표는 97년 여름 고국을 떠나 70년 만에 필리핀의 한 작은 섬에서 발견된 훈 할머니에 관한 뉴스를 보며 슬픔과 수치심과 분노를 느낀다. 훈 할머니는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위안부로 강제 징용되어 캄보디아로 끌려갔다. 소설은 그녀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담았다. 기구한 운명 가운데서도 양심과 용서와 사랑을 통해 극복해가는 잔잔한 인간상을 그렸다. 올해 영국 명문 옥스퍼드 대학의 아시아중동학부 한국학 필수 교재로 지정되어 화제가 됐다. 최근에는 모 예능에 소개되면서 베스트셀러 1위에 진입하기도 했다.

15년 만에 이 소설을 다시 잡았다. 당시 영화배우 차인표가 장편소설을 썼다는 소식은 솔깃했다. 연예인의 책 출간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포토집이나 에세이가 아닌 소설ㅡ그것도 장편ㅡ을 집필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개성 있는 연기를 펼치는 것과 소설이라는 상상력의 세계를 써내는 것은 전혀 다른 작업이다. 당시 연예인들이 이런저런 에세이를 쏟아내는 풍토가 있었다. 이에 책을 읽기 전 차인표 부부의 잉꼬 같은 부부애나 잦은 선행으로 굳어진 긍정적 이미지는 모두 간과하기로 했다. 오직 작품 자체만을 감상하고자 했다. 결론은, 참 잘 쓴 소설이(었)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은 1931년 가을 백두산의 어느 자그만 마을로 독자의 시공간을 옮겨놓는다. 호랑이 마을로 불리는 작은 마을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제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던 오욕의 때였다. 그곳에서 평화로운 삶을 사는 순진하고 마음씨 착한 처녀 순이. 포수 아빠와 함께 엄마를 죽인 원수 백호를 사냥하러 나갔다가 호랑이 마을에 안착한 용이. 일본제국주의 군인으로서 소대장의 지위로 호랑이 마을에 도착하는 가즈오. 이 세 명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주인공들이다. 세 인물의 애절한 사랑과 엇갈린 운명이 뒤섞이며 소설은 절정을 이룬다.

소설 속에서 일본군 대위로 등장하는 가즈오 마쯔에다는 매우 인상적인 인물이다. 소설은 따뜻한 문체로 쓰인 이야기의 본류와 각 장마다 반복되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가즈오의 편지를 교차해서 들려준다. 순수한 애국심에 자원입대했지만 가즈오가 목도한 전쟁의 현실은 반인륜적 폐륜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가즈오의 내면에는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한 여인을 뜨겁게 사랑하는 진정성이 있었다. 양심의 문제에 깊이 고뇌하고 한 여인을 사랑한 나머지 죽음에까지 이르는 가즈오의 기구한 운명을 작가는 애절하면서도 차분하게 잘 그려냈다.

흥미로운 관점이 있다. 소설 속에서 인간의 시공간을 초월한 두 개의 시점이 존재한다. 순이가 용이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밤하늘의 '엄마별'이라는 존재와 이야기 곳곳에 등장하며 신적 권능으로 등장인물들의 시공간을 조망하는 '새끼 제비'가 바로 그것이다. 순이는 볼 수 있었지만 용이는 볼 수 없었던 엄마별은 일차적으로 모성의 상징적인 현현이다. 소설 전체의 서사적 관점에서 '용서'라는 찬란한 절대선을 이끌어내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이야기의 말미, 용이의 살아생전에는 볼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별의 실재가 자신의 죽음을 넘어 70년의 세월이 지나 순이에게 "따뜻하다, 엄마별."이라는 짤막한 고백으로 전해지는 모습은 이 소설의 가장 감동적인 명장면이다. 엄마별. 그것은 용서의 다른 이름이었다.

'새끼 제비'의 존재 또한 소설 속에서 특이하게 상징된다. 새끼 제비는 서사 안에 갇혀 있지만 동시에 위에서 서사를 조망해 내는 독특한 캐릭터다. 일본군의 동태를 살피고 순이와 용이의 러브 스토리를 응원한다. 인간의 악한 성품에 실망하는가 하면 한순간 하늘로 치솟아 시공간을 광각화하기도 한다. 어쩌면 새끼 제비는 작가 차인표의 작품 속 개입일 수도 있으리라. 소설 말미에 70년 만에 고향 호랑이 마을 찾은 쑤니(순이) 할머니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그때 파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제비떼가 인상적으로 묘사된다. 어디엔가 있을 따스한 나라를 찾아 멀리 날아가는 제비떼의 모습은 이 세상 모든 치유되어야 할 자들을 향해 날아가는 작가 차인표의 또 다른 분신이지 않을까.

작가는 소설에서 의도적으로 존어체를 사용했다. 엄마가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선생님이 학생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듯 포근하고 따뜻한 문체로 이야기를 이끈다. 만약 존어체가 아니었다면 소설이 주는 감동은 희석되었을 것이다. 엇비슷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문체에 따라 소설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진다. 용서하지 못함으로써 번민하고 비루하게 살아가는 이 땅의 깨어지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겸손한 문체는 용기와 겸손이 필요하다는 작가적 메시지를 오롯이 전하는 외적 기능이 된다.

포근한 문체와 흡입력 있는 전개, 잘 짜인 서사와 명확한 메시지가 돋보인다. 차인표의 첫 소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은 성공한 소설의 전형을 두루 갖추었다. 차인표의 문장은 공손했고 따뜻했고 평온했다. 차인표는 작가 후기에서 소설의 초고를 손볼 때 어머니로부터 들은 조언을 소개한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조언한다. "상상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실을 배제한 상상력은 모래로 성을 쌓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 상상력과 사실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작가 차인표의 상상력이 정지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그가 원하고 갈망하는 모든 상상력이 결국 사실이 되어 우리 앞에 당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 한 마리의 '새끼 제비'가 되어 깨어져야 할 모든 용기 없는 자들의 전도자가 될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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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 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정요석 지음 / 크리스천르네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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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신앙서적을 만났다. 정요석 박사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Ⅰ·Ⅱ』는 장로교회의 표준 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후 '웨민'으로 칭함)를 주해한 해설서다. 웨민 해설서는 시중에 많이 출간되어 있다. 로버트 쇼나 R. C. 스프로울의 책을 필두로 국내 출간된 해설서만 수십여 권에 이른다. 단언컨대 지금껏 내가 읽어본 웨민 해설서 중 최고다. 깊고 풍성하고 은혜롭다. 사역자와 평신도, 학생과 성인 모두를 아우를만큼 폭넓은 수준으로 쓰였다. 웨민을 딱딱한 교리적 관점을 넘어 우리의 삶까지 적용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런 귀한 책을 왜 이제서야 만났을까,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눈부시다.

주지하다시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는 1647년 영국에서 여러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경건과 학식을 겸비한 121명의 목사와 신학자, 귀족과 하원의원 등 159명으로 구성된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Westminster Assembly, 이하 WA)가 5년 8개월간 기도와 금식을 동반한 마라톤 회의와 충분한 숙려 끝에 완성했다. 문장 하나하나 매우 신중하게 다듬고 수정하여 처음부터 아예 논쟁을 배태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는 게 현대 신학자들의 일관된 견해다. 영국과 미국은 물론 미국에 영향을 받은 한국 장로교회의 공식적인 표준 문서로 지금까지 채택되어오고 있다.

교회에 새롭게 부임한 담임목사님 주관으로 웨민 교리 공부를 하던 중에 보다 깊은 흐름을 통찰하고 싶었다. 웨민 신앙고백과 소요리 문답은 이미 오래전 수차례 훑어본 교리서라 색다를 건 없었으나 무언가 '깊이'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가령 삼위일체와 예정론을 교리적으로 아는 것 이상으로 그것을 평소 내 삶과 언어에 어떻게 녹여내는가에 대한 방법적·언어적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즉 뜬구름 잡는 신학 교리가 아닌 삶과 신앙의 실제적인 적용을 원했다. 이런 내 갈증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는 적확했고 탁월했다.

2권으로 구성된 책은 웨민 33장을 매우 자세히 살핀다. 1권은 '14장 - 구원하는 믿음'까지 다루고 2권은 이후 33장 끝까지 다룬다. 각 항의 한 문장 한 문장을 떼어내 깔끔한 개혁주의적 해석과 일반 신자도 이해하기 쉬운 비유와 설명으로 주해한다. 이 책의 탁월함은 신앙고백의 문장 독해만을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웨민 8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신성/인성)을 다룰 때에 "신성과 인성은 변환이나 혼합이나 혼동됨이 없이, 한 위격 안에서 분리할 수 없게 서로 연합되었다"는 문장의 주석 외에도 테스토리우스의 두 인격과 유티케스의 단성론의 문제점, 그리고 교리 논쟁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함께 다룬다. 그럼으로써 '칼케돈 공의회(451)'의 교회사적 유의미성을 독자에게 알기 쉽게 전달해 준다.

이 책의 또 다른 탁월함은 각 장을 다룰 때 연관성 있는 다른 장·항을 수시로 인용한다는 점이다. 이런 설명 방식은 웨민이 전체적으로 얼마나 유기적이고 통일성 있게 조직되어 있는지를 드러냄과 동시에 해당 장을 더욱 풍성하고 입체적으로 풀어내는 기술적 장치가 된다. 예컨대 소명, 중생,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로 이어지는 구원론의 논리적 서정을 다루면서 '3장 - 하나님의 작정'과 '8장 - 예수 그리스도'의 주요 항들을 수시로 인용·반복하는 것이다. 독자는 전체에서 부분을 들여다보는 '전체 성경적' 안목을 고양할 수 있고, 매장마다 수시로 소환되는 앞선 장들을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교리 공부의 효율도 높일 수 있다. 근거 성경 구절을 직접 수록해 성경을 찾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은 덤이다.

두꺼운 책을 정독하면서 "교리가 이토록 은혜로울 수 있구나" 하는 감동과 도전이 적지 않았다.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 은혜로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교리 학습은 앎의 영역을 넘어 실천의 차원에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게 아니라 나 같은 사람조차도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는 걸 알려주기에 주변에 예수 믿지 않은 사람을 전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나를 올려놓는다. 모든 게 예정되어 있어 우리의 기도는 무의미한 게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에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그래서 나를 기도하는 사람으로 각성시킨다. 자만과 교만은 줄어들고 겸손과 섬김이 증가한다. 교리가 삶을 바꾸는 것이다.

근자에 자유주의 신학이 득세하면서 개혁주의 신학을 고집하는 장로교회에서도 신자에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가르치는 교회가 많지 않다고 한다. 먹고살기 힘들고 멘토와 힐링을 원하는 현대인들에게 죄와 회개는 따분한 얘기일 수 있다. 어린이 영어 학교나 부흥회와 같은 실용적이고 촉촉한 터치를 갈망하는 신자들이 많다. 교회는 양적 부흥을 위해서라면 일단 온갖 이벤트를 다하고 본다. 하지만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없다. 더욱이 성경의 일부 구절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이단적 세계관에 함몰되는 경우가 많은 시대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항시 전체 성경(tota scriptura)과 함께 가야 한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신앙)은 성경->신조->신학->신앙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수적인 개혁주의 장로교 신자 중에서도 '이중예정'이나 '제한속죄'와 같은 교리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분들이 꽤 있다. 가령 제한속죄는 도르트 신조가 결의한 칼빈주의 5대 강령 중 하나로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과 함께 구원론의 핵심을 이루는 교리다. 이 5대 교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하나님의 절대적인 속성을 인정하지 않고 시간의 문제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불가해한 신정론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웨민은 신론(2~5장)을 다룰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의 속성과 존재방식(2장)을 다루고 그 후에 작정과 섭리(3~5장)로 넘어간다. 웨민은 그만큼 성경의 완벽함과 신자의 부족함 사이를 잘 가늠한다.

신천지나 알미니안이 요동치고 있는 혼탁한 시대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존재는 귀하다. 나는 목사, 장로, 집사뿐 아니라 교회의 가르치는 직분 모두, 즉 구역장과 교사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가르침을 신봉하고 순종할 것에 선서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고약한 사조가 교회 안까지 침범해 참된 진리를 허물어뜨리려 하는 세태가 정말이지 짜증 나서 못 견디겠다. 이럴 때 성경을 붙잡고 성령의 조명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 그 거룩한 컨택의 건강한 안내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의 가장 풍성한 강해서로 정요석 박사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가 놓여 있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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