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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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미국의 1920년대를 '풍요와 쾌락의 시대'로 명명한다. 1920년대는 미국뿐 아니라 서방세계가 여러 분야에서 호황을 맛본 시기다. 미국에선 '재즈 시대'로 불렸고 독일에서는 '황금의 20년대'라고 불렸다. 경제적 풍요뿐 아니라 문화, 예술, 사회 모든 면에서 활활 타오른 역동적인 시기였다. 하지만 20년대의 번영은 1929년 월스트리트 주가의 대폭락으로 끝을 맞이했다. 이후 1930년대는 대공황의 시대였고 그동안 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기존 체제의 모순이 하나둘씩 폭발되기 시작했다. 결국 1939년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1920년대의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1인칭 화자 닉 캐러웨이가 소설의 실질적 주인공 제이 개츠비를 관찰하고 조명하는 이야기다. 대략적인 스토리는 이렇다. 뉴욕의 큰 섬 롱아일랜드에 닉의 대학 동창 톰 뷰캐넌이 살고 있다. 톰은 닉의 친척인 데이지와 결혼한 사업가다. 자신감 넘치지만 건방지고 거만한 성격을 가졌다. 톰은 데이지 몰래(?) 정부와 바람을 피운다. 그 때문인지 부부 사이가 좋지 않다.

개츠비는 닉의 옆집에 산다. 개츠비는 수시로 지인과 유명 인사를 자기 집에 초대해 화려한 파티를 여는 것으로 유명하다. 평소 개츠비에 호기심을 갖고 있던 닉은 우연히 그의 파티에 초대를 받아 처음 그를 만난다. 개츠비의 첫인상에 엄청난 매력을 느낀 닉은 그와 점점 더 가까워지며 여러 가지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된다. 개츠비의 엄청난 재력에 대해 세간에 여러 소문이 떠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금주법 시대에 불법 밀주와 도박으로 돈을 벌었고 데이지의 과거 연인이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소설의 이야기는 급물살을 타며 긴장을 배가시킨다.

단순히 보면 데이지를 잊지 못한 개츠비가 과거 사랑을 되찾기 위해 발버둥 친 사랑가로 읽힌다. 하지만 소설은 더 무겁고 복합적인 여러 상징을 심어놓음으로써 그 시대의 미국적인 것과 미국적이지 않은 것 사이의 긴장과 충돌을 묘사한다. 숭고함과 비루함, 정신과 물욕, 인내와 욕망이라는,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인 가치를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탐구하고 고발한다. 통속적인 연애소설을 넘어 1920년대의 미국 사회의 모순적 단면을 상징적으로 그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전은 문학사에 영웅을 남긴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통해 피예르와 나타샤를 남겼고,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와 로테를 남겼다. 카뮈는 뫼르소를, 도스토옙스키는 로쟈(라스콜니코프)를, 헤세는 싱클레어를 남겼다. 이 소설도 여지없이 매력적인 인물을 탄생시켰다. 개츠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일편단심은 눈물겹다. 순수하고 진지하고 희생적이다. 개츠비의 모든 관심과 언행은 오롯이 데이지를 초점으로 한다. 가난에서 거부(巨富)가 되고, 매일 성대한 파티를 열고, 닉에게 접근한 것도 모두 데이지와의 사랑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개츠비의 사랑은 대상의 실체와 무관하게 불변적이었다는 점에서 진한 감동이 있다.

반면 데이지는 속물적이다.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척하지만 내면에는 물욕이 가득 찬 여성이다. 남편 톰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개츠비에게 다시 돌아가는 건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한다. 자신에게 다시 오라는 개츠비의 요청에 데이지는 잠시 흔들린다. 하지만 개츠비가 밀수와 도박이라는 불법으로 떼돈을 벌었다는 사실을 알린 톰의 고발에 마음이 다시 닫힌다. 개츠비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었지만 데이지의 사랑은 조건적이었다. 개츠비는 자동차 사망사고를 낸 데이지를 대신해 범인이 되고자 한다. 이 사건의 오해로 결국 총에 맞아 사망한다. 자기 때문에 죽게 되었는데도 개츠비의 장례식에 얼굴조차 내밀지 않는 데이지의 모습은 악랄하기까지 하다. 시대의 상징성 면에서 개츠비가 정신을 은유한다면 데이지는 물질을 은유한다.

소설에서 마음을 뺏긴 인상적인 문장이 있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자기 집에 처음 데려온 장면을 묘사한 문장이다. "그는 (...) 그녀의 무척 사랑스러운 눈이 보이는 반응 정도에 따라 집에 있는 모든 것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것 같았다." 시인이자 번역가인 황유원은 일간지 칼럼에서 이 문장을 인용하며 "타인은 가끔 지옥이지만 세상을 새로이 보는 창문이 되기도 한다"고 해석했다. 매일 보는 집안의 풍경이 사랑하는 사람(데이지)의 눈으로 보니 전혀 새롭게 보인다는 의미다. 사랑이 자기 자신의 시각과 통찰을 더 깊고 넓게 만드는 것이다. "상대에게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의 눈이 내 눈을 대체하기 때문"이라는 황유원의 관찰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소설의 명장면(명문장)을 제대로 읽어내는 계기가 됐다.

또한 소설의 마지막 문장도 인상적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라는 마지막 문장은 영미문학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무리로 평가받는다. 언뜻 보면 문장이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과거로 떠밀려가는 것'과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은 양립 난해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문장의 여백이다. 과거로 떠밀리면서도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불가능이란 현실을 이겨내는 '일관된 노젓기'가 있어야 한다. 이 노젓기는 한 사람이나 한 세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여러 세대에 걸친 누적된 공감과 노력에 기반한다. 그것이 개인의 삶을 바꾸고 우리의 인생을 바꾸며 세계의 역사를 바꾼다. 작가는 물질주의의 팽배로 정신과 신앙이 오염된 미국 사회가 언젠가는 위대하게 부활할 것임을 유려한 명문장으로 희망하고 있다.

소설의 제목을 고찰하자. 개츠비는 왜 위대한 것일까. 매력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온갖 불법을 저지르고 끝내 사랑을 되찾지 못한 채 총에 맞아 죽은 비극적인 인물에게 '위대함'을 수여하기엔 쉽지 않다. 그 위대함이 데이지에 대한 사랑의 집념일 수도 있고, 아메리칸드림의 화려함일 수도 있고, 화자 닉의 시선에 비친 '위대함'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나는 '아이러니로서의 위대함'으로 풀이한 문학평론가 사라 처치웰(Sarah Churchwell)의 견해를 지지한다. 즉 첫사랑을 되찾기 위한 성공과 열정의 외면적 찬사를 뜻함과 동시에 도덕적·실체적 삶의 붕괴와 비극적 죽음의 허망한 위대함을 역설적으로 함의한 것이다. 이러한 긍정과 냉소의 다층적 의미는 독자에게 열린 해석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소설의 폭을 과히 넓히는 특별한 장치가 된다.

서평을 정리하자. 대학생 때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서 처음으로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알게 됐다.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 속 등장인물을 통해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만 자신과 친구를 할 수 있다"라며 이 작품을 극찬했다. 하루키의 미화에는 호불호가 갈릴 것이지만,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인기 순문학 작가의 극찬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분명한 건 개츠비라는 매혹적 인물을 탄생시킨 것 하나만으로도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가치는 충분하다. 시대와 나이, 정신과 물질, 좌절과 희망이라는 인간 세계의 여러 층위를 묘사하고 탐구한 고전 『위대한 개츠비』를 이웃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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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분자반 - 성경과 역사에서 배우는 올바른 직분자의 모습 건강한 교회 세움 시리즈 4
안재경 지음 / 세움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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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갖는 여러 오해가 있다. 그중 가장 지독한 것이 목사를 교회의 '대표이사'로 여기는 것이다. 이들에게 성도 수 많고 예배당이 큰 대형교회 목사는 경영 수완이 출중한 대기업 CEO다. 반대로 성도 수와 예배당 평수가 적은 소교회 목사는 무능력한 자영업자다. 한편 장로와 안수집사는 다른 성도보다 서열이 높은 임원급으로 생각한다. 장로가 되려면 돈 좀 있어야 하고 장로들이 카르텔을 형성해 목사의 경영권을 견제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이는 전부 잘못된 인식으로 작금의 한국교회가 세상에서 얼마나 큰 조롱을 받고 있는지 보여주는 방증이라 하겠다.

교회 직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안재경 목사(예장고신)의 『직분자반』은 소중한 책이다. 이 책은 성경과 역사에서 배우는 올바른 직분의 정의를 알려준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직분의 주체가 인간의 의지나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주권에 있음을 전달한다. 1부는 직분의 성경적 의미를 다루고, 2부는 성경에서 세워진 다양한 형태의 직분을 다룬다. 3부는 목사를 비롯해 현재 교회에 존재하는 직분의 종류를 소개한다. 4부는 교회 직원을 세우는 실제적인 방법과 임직 훈련을 설명한다. 즉 직분의 의의부터 역사와 직무를 넘어 실제 교회에서 세우고 교육하고 임직하는 모든 과정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대중성이 이 책의 강점이다. 난해하고 전문적인 신학 용어를 배제하고 평범한 목회적 언어로 쓰인 점은 이 책의 타깃층을 분명히 한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성도라면 누구나 부담 없이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직분론을 쉽게 정리해 볼 수 있다. 직접적인 성경적 근거가 있는 직분인 목사와 장로와 안수집사를 무게 있게 다루었다. 매 장마다 내용을 요약하고 토론 주제를 실어 복습할 수 있도록 했다. 불필요하거나 본질에 벗어난 부분은 다루지 않은, 제목 그대로 '직분자반'에 충실한 기술이 돋보인다.

교회 직분의 의의를 신·구약의 통일성의 관점에서 설명한 점은 이 책의 가장 탁월한 부분이다. 구약과 신약을 율법과 복음으로 무 자르듯이 구분하는 건 적절치 않다. 구약과 신약의 본질은 동일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장 6항은 신·구약의 차이를 "본질이 다른 두 개의 은혜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동일한 은혜언약이 다양한 경륜들로 나타난 것이다."라고 정리한다. 구약의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통합되고 완성되었다. 그리스도의 승천 후 초대 교회에 세워진 다섯 직분 중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는 교회를 세우기 위한 '창설직'으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남아 있다. 이 세 직분은 주님 오실 때까지 교회 내에 항상 존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항존직'으로 불린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계획에 따른 신·구약의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교회 직분을 이해하는 훈련은 매우 중요하다.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바로 장로의 직무에 관한 내용이다. 통상 장로의 역할이란 천국 열쇠를 쥔 치리회의 일원으로 성도를 잘 다스리는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우선하는 장로의 역할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장로가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을 보호하는 직분'이라는 점이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면 장로는 그 말씀을 보호한다. 목사를 감시하고 설교권에 간섭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일에 (목사와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저자는 이것이 장로를 세운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장로는 말씀에 정통해야 한다. 말씀의 바른 이해와 통치 안에서 치리회(당회)에 참여하고 성도를 심방하고 교회를 세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안수집사에 대한 바른 이해도 중요하다. 흔히 안수집사를 장로로 가는 관문이나 사전 훈련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강력한 안수집사회를 구축해 장로회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장로와 안수집사(이후 집사라 칭함)는 직무와 성격이 뚜렷이 구분되는 직분이다. 장로가 다스리는 자라면 집사는 구제를 위해 부름을 받은 자이다. 성도들의 교제로부터 소외되는 이들이 없는지 돌아보고 긍휼을 베풀기 위해 세움을 입은 직분이 바로 집사이다. 그렇기에 집사는 교회에서 가난하고 상처받고 소외된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목사는 말씀을 바르게 선포함으로, 장로는 그 말씀으로 다스림으로, 집사는 그 말씀으로 돌봄으로써 교회는 건강하고 아름답게 서나 갈 수 있다.

고백하자면 6월 초 섬기는 교회에서 안수집사로 피택되었다. 이 책은 교회 임직자 교육 과정의 교재로 만났다. 이 서평도 그 교육의 일환이다. 임직을 준비하면서 직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성경적 고찰이 절실하다. 앞으로 내 남은 인생에서 교회 직분에 대해 이토록 신학적이고 실제적으로 배우고 가다듬을 날이 또 있을까 싶다. 그래서 더 열심히 배우고 훈련받고자 한다. 하나님은 직분자를 수단으로 통치하신다. 사람에게 만족을 주는 중직이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중직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나아갈 뿐이다.

서평을 정리한다. 『직분자반』은 교회 직분자 교육 교재로 손색없는 탁월한 책이다. 한국 교회의 대부분의 문제가 직분자의 문제라는 점을 인식할 때 직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는 건 매우 긴요하다. 교회 직분에 서열과 계급은 없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모든 직분은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다. 단 질서와 구별이 있을 뿐이다. 직분 공부를 해본 적 없는 일반 신자부터 중직에 있으면서도 이에 대한 조예가 부족한 직분자들에게 안재경 목사의 『직분자반』을 추천한다. 부디 한국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자신의 직무를 행사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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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턴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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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무료한가. 그래서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싶은가. 하지만 가벼운 장르소설은 싫은가. 그렇다면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중 하나를 선택하기 바란다. 이시구로의 소설은 한결같이 재미있고 묵직하고 감동적이다. 초기작 『창백한 언덕 풍경』(1982)부터 최신작 『클라라와 태양』(2021)까지 그의 소설은 삶과 시간과 기억 너머에 있는 인간성의 희망을 추적한다. 대부분 1인칭 화자를 주인공으로 배치해 역사와 추리, SF까지 다양한 장르를 다룬다. 인간 문명의 이기와 한계를 고발하는 동시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 또한 인간 내면에 존재하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녹턴』은 2009년에 출간된 이시구로의 유일한 소설집이다.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 매력적인 부제가 눈에 띈다. 총 다섯 개의 단편소설을 담고 있는데 부제가 암시하듯 단편 곳곳에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인물이 정면에 배치된다. 이시구로는 음악을 문학적 소재로 차용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작가로 평가받는다. 『녹턴』에는 자신의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실존적 질문을 던지는 다양한 삶의 양태가 녹아 있다. 음악적 예술혼 위에서 사랑과 기억과 시간을 관통하는 애잔한 단편들이 독자의 가슴을 적신다.

첫 번째 소설 「크루너」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광장에서 밴드로 활동하는 기타리스트 얀(야네크)이 화자로 등장한다. 그가 광장에서 연주하던 중 한물간 가수 토니 가드너를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얀의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토니의 광팬이었다. 얀은 토니에게ㅡ어머니와의 관계도 있고 해서ㅡ적극적으로 다가가 말을 건다. 근데 토니는 아내 린디와 헤어지기 위한 이별 여행 중이다. 토니는 린디의 인생 여정을 얀에게 자세히 들려주고 린디의 호텔 창문 밖 곤돌라 위에서 그녀를 위한 세레나데를 준비한다. 토니가 노래를 부르고 얀은 기타 반주로 합류한다. 몇 달의 시간이 흐른 뒤 얀은 토니와 아내의 이별 소식을 전해 듣고 그날 밤(베네치아에서의 만남)을 회상한다.

두 번째 소설 「비가 오나 해가 뜨나」는 레이 찰스의 곡 'come rain or come shine'에서 따온 제목이다. 레이먼드는 자신의 절친 찰리의 요청으로 런던에 있는 찰리 집으로 향한다. 레이먼드가 친구 집에서 겪는 예기치 않은 에피소드가 소설의 주된 이야기다. 찰리는 아내 에밀리와의 부부 생활에 위기가 닥쳤다. 에밀리는 레이먼드의 대학 동기여서 서로 아는 사이다. 아내와의 위기를 회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친구 레이먼드밖에 없다고 여긴 찰리는 레이먼드에게 도움을 청하고 해외로 출장을 떠난다. 찰리의 요청을 수락하긴 했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레이먼드의 의도하지 않은 실수가 발생한다. 그런데 레이먼드와 에밀리가 옛 시절에 음악을 매개로 공유했던 기억 너머의 공감대로 인해 이야기는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열린 결말을 통해 독자는 사랑과 우정과 시간을 관통하는 음악의 힘에 대해 깊이 숙고하게 된다.

표제작 「녹턴」은 첫 단편 「크루너」와 연결된다. 토니 가드너의 아내 린디가 「녹턴」에도 등장한다. 린디는 「크루너」에서 화자 얀과 남편 토니로부터 언급되고 수식되는 수동적 인물이었다. 하지만 「녹턴」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린디는 재능은 있지만 추한 외모 때문에 저평가를 받는 색소폰 연주자 스티브와 함께 위험하고 대담한 일을 벌인다. 스티브와 린디 모두 전과 다른 인생을 살기 위해 당대 최고의 의사 보리스로부터 성형수술을 받는다. 같은 병원에서 같은 의사에게 수술을 받고 서로 옆방에 놓이게 된 두 사람은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만나 서로 인정하고 의지하는 관계가 된다. 그러던 중 생각지 못한 사건에 휘말린다. 블랙코미디와 같은 이야기 속에서 삶과 사랑과 자존의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아직 꿈을 이루지 못한 무명의 젊은 뮤지션 '나'가 시골 카페를 운영하는 누이 부부의 집에 머물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말번 힐스」는 수록작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 화자는 누나의 카페에 종종 들리는 스위스인 부부 틸로와 소냐와 가까워진다. 그들은 관광차 영국에 방문했는데 음악과 예술에 대한 명확한 철학을 가진 프로 뮤지션이다. 그러나 두 부부 사이에 벽이 존재하고 갈등이 있음을 화자는 알아차린다. 소설의 말미에 남편 틸로가 산책하는 동안 화자와 소냐가 대화하는 장면은 삶과 성공의 방정식에 지친 수많은 독자에게 위로를 안긴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마지막 단편 「첼리스트」다. 헝가리 출신 첼리스트 청년 티보르는 우연히 미국의 중년 여인 엘로이즈를 만나 첼로 개인 교습을 받는다. 티보르는 교습을 받을 때마다 엘로이즈에게 빨려 드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런데 엘로이즈는 말로만 코칭할 뿐 자신이 직접 첼로를 켜진 않는다. 티보르의 의심이 쌓이는 만큼 소설의 긴장은 고조되며 무언가의 비밀이 밝혀진다. 짧은 이야기 속에서 절정으로 치닫는 서사의 전개 과정이 몰입감 있게 펼쳐진다.

다섯 편의 소설 모두 음악을 소재로 하여 인간이 처한 현실과 이상의 문제를 관통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낭만을 꿈꾼다. 그러나 낭만으로만 살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실력과 경쟁이라는 냉엄한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진짜 사랑과 진짜 행복을 발견하는 건 쉽지 않다. "'참 나'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옳은 명제임에도 일부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나'가 '나 외의 것'과 명확하게 구분된다는 인식 하에서만 인간 문명의 발전은 가능하(했)다. 나를 발견하는 것. '참 나'를 인식하는 것. 그것이 타자와 어떻게 분리되는지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로 사랑하고 진실한 행복을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인 것이다.

『녹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꿈과 사랑을 채우지 못한 결핍의 존재들이다. 부재와 결핍은 인간에게 그늘을 드리운다. 흥미로운 건 인물들의 또 하나의 공통점이 모두 음악을 갈망한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노래하고 어떤 이는 연주하며 어떤 이는 교습한다. 음악은 인간에게 종교와 사상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게 하는 윤활유가 되지만 동시에 개인적인 침잠 속에서 외부를 잠시 잊게 하는 힐링과 위안을 제공하기도 한다. 음악은 모든 공간을 채우고 전 시간을 장악한다. 소설 『녹턴』의 주인공은 음악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201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노벨상위원회는 이시구로에 대해 “위대한 ‘감정적 힘’을 가진 소설을 통해 세계를 연결하는 우리의 환상적 감각 아래에 있는 심연을 발견했다”고 높게 평가했다. 또 “그는 과거를 이해하는데 큰 관심을 보여왔고, 개인이자 사회로서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탐구하고 있다”며 “제인 오스틴과 프란츠 카프카를 섞어놓은 듯하다. 여기에 마르셀 프로스트의 성향도 약간 가미돼 있다”고 극찬했다. 카프카와 프로스트의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 한림원의 평이 낯설긴 하지만 이시구로의 소설 속에 오스틴의 로맨스와 유머감각, 카프카의 꿈과 기억, 프로스트의 시간과 의식의 흐름이 여러 층위에 긴밀하게 뒤섞여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서평의 서두로 돌아가자.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 지루하고 난해하고 만연한 소설은 질색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교훈과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소설의 존재 목적은 '인간성의 탐구'이다. 즉 '좋은 소설'은 재미있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인간성을 옹호하고 성찰하는 소설이다. 이 명제에 가장 가까이 있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녹턴』을 아낌없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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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의 길
김욱동 지음 / 연암서가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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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입장에서 번역된 책을 읽을 때마다 궁금한 게 있었다. 역자가 얼마나 거대한 엉덩이의 힘을 사용했을까, 하는 것이다. A4 용지 한 장 분량의 서평 한 편 쓰는 것도 이렇게 어려울진대 방대한 원문을 읽고 이해하고 분석하며 다른 언어로 변환하는 번역가들의 수고는 감히 어림잡기 힘들다. 존경스럽기도 하다. 글쓰기는 고통이다. 글은 써본 사람만이 안다. 시든 소설이든 평론이든 하나의 완결된 형태의 텍스트를 직접 써본 사람만이 아는 고통의 영역이란 게 있다. 그것을 알기에 역자의 수고는 그 자체만으로 경이로워 보인다.

고전을 즐겨읽는 나에게 세계문학 번역가들은 모두 지적이고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채권자다. 특히 원문을 잘 이해하여 탁월한 한국어 역량으로 군더더기 없이 번역한 명망 있는 번역가들의 수고는 찬란하다. 가령 고 박형규 명예교수(고려대 노어노문학과)와 김화영 명예교수(고려대 불문학과)는 톨스토이와 카뮈의 작품세계를 안정적으로 탐독하는 데 도움을 준 분들이다. 세계 문학사에서 난해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10년 동안 매일 같이 6시간씩 번역 작업에 매진해 완역본을 낸 김희영 명예교수(한국외대)의 집념도 대단하다. 우리 같은 일반 독자는 이들의 수고와 헌신에 기대어 문학을 향유하고 있음을 부인해선 안 된다.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 등 오랫동안 영미문학을 번역해온 김욱동 명예교수(서강대)가 번역을 주제로 책을 출간했다. 『번역가의 길』은 작가이자 학자이며 번역가인 김욱동 교수가 번역에 관한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밝힌 책이다. 총 다섯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번역에 관한 여러 주제를 훑는다. 책의 구성은 이렇다. 번역의 의미와 성격을 가장 먼저 배치했고 여러 오역 사례를 실었다. 속담에서 드러난 성차별을 꼬집고 성경 번역의 긴요성을 논지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명대사를 일제강점기 이후 지금까지 국내에서 어떻게 번역해왔는지 추적한다.

저자가 소개한 고전문학의 오역 사례는 일반 독자가 놓치기 쉬운 부분이라 흥미를 끈다. 저자는 우리가 서점에서 쉽게 선택하는 피츠제럴드, 포크너, 헤밍웨이 번역본의 오역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저자가 진단하는 오역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그중 번역자가 원천어에 대한 문해력이 부족하거나 소설의 시대적·문화적·사회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가 대표적이다. 가령 무라카미 하루키가 번역한 『위대한 개츠비』와 『호밀밭의 파수꾼』은 가독성은 좋지만 정확성은 떨어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에 영향받은 것으로 보이는 한국 모 소설가의 『위대한 개츠비』 번역은 오역을 넘어 졸역 수준임을 여러 사례를 들어 증명한다. 잘 읽히는 유려한 번역은 정확성을 전제할 때만이 의미가 있음을 저자는 끊임없이 강조한다.

사실 잘 읽히는 번역과 정확한 번역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은 독자들 사이에서도 뜨겁게 토론하는 주제다. 오래전 카뮈 번역의 올바름을 놓고 신생 출판사 대표가 국내 최고 카뮈 전문가에게 도전장을 던진 일이 있었다. 당시 많은 논란과 토론이 있었으나 결국 기존 권위를 전복하지 못한 채 싱겁게 끝이 났다. 그 사건은 번역에서 독창성보다 정확성이 더 중요하다는 당연한 원리를 독자에게 일깨웠다. 원문이 난해하면 난해한 대로 가벼우면 가벼운 대로, 즉 있는 그대로를 옮기는 게 가장 정확한 번역인 것이다. 16세기 번역 이론가 에티엔 돌레가 번역가로서 염두해야 할 가장 중요한 선결조건으로 '원천어와 목표어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꼽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장 「성경 번역에 대하여」 또한 흥미롭게 읽힌다. 사실 성경의 문체는 지나치게 예스럽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성경은 '개역개정'이다. '개역개정' 번역 당시 보수적인 역자들이 문체를 조선어식으로 고집한 탓에 사어가 많고 의미가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에 개인적으로 '개역개정'을 기본으로 하되 명확하지 않은 부분은 불가피하게 주석을 보거나 '새번역'이나 '쉬운성경'을 참고하곤 한다. 한편 '새번역'의 경우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에서 번역했고 쉬운 말로 되어 있어 의미 파악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시편》을 전부 산문으로 번역해 가독성과 시적 느낌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말씀의 음미성 차원에서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다. 신학적인 부분과 맞물려 있어 평신도가 뭐라 논설하긴 적절치 않지만 시대와 상황을 고려할 때 '개역개정'만 고집하는 게 맞는 건지 의구심이 드는 건 사실이다. 개신교단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이고 통합적인, 합의된 성경 번역에 대한 갈망은 지나친 욕심이자 환상일까.

서평을 정리하자. 작년 말 한강의 노벨문학상 쾌거에 온 국민은 열광했다. 평소 책을 거의 읽지 않던 사람도 서점에 나가 소설을 손에 쥐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노벨상 효과일 것이다. 한국 첫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환호 속에서 놓치기 쉬운 헌신이 있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의 성취 과정에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의 수고가 있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성실하고 적확한 번역이 없었다면 한국 작가가 쓴 한국어 소설의 노벨상 수상은 요원했을 것이다. 번역은 그만큼 중요하다. 어쩌면 우리는 작가의 글이 아닌 번역가의 글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번역의 현실과 중요성을 진솔한 에세이로 풀어낸 김욱동의 『번역가의 길』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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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총회 신학연구위원회 지음 / 영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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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바다에 빠져 살고 있다. 지난 1년 반 동안 교회에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하 '웨민'을 칭함) 강의를 수강해 끝마쳤다. 강의와 더불어 웨민의 깊이 있는 탐구를 위해 정요석 박사와 스프로울 박사의 해설서를 각 3독씩 병행했다. 이 과정을 통해 웨민이 얼마나 풍성하고 엄밀하며 유기적인지를 새삼 실감했다. 스프로울의 말대로 기독교 역사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보다 더 꼼꼼하고, 더 정확하고, 더 철저하고 그리고 더 포괄적인 신앙고백서는 없다.

18개월 동안 웨민의 바다에 빠져 살면서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다. 강의 프린트와 병독(倂讀)한 해설서마다 번역이 가지각색이라는 점이다. 웨민은 밀도 있고 엄밀한 문장을 담고 있어 일부 절을 통째로 외우는 게 유익할 때가 있다. 그런데 해설서마다 번역이 조금씩 달라 어떤 번역본에 방점을 찍을지 고민스러웠다. 같은 교단(예장합신) 안에서 출간된 텍스트가 안정적일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정성호 목사(수원 선목교회 담임)가 번역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들』을 주로 참조하곤 했다.

교회 웨민 강의를 끝마칠 때쯤 개인이 아닌 총회(예장합신) 차원의 번역본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음사에서 출간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예장합신 신학연구위원회가 번역을 주도해 신앙고백서뿐 아니라 대·소요리문답, 예배모범, 교회정치까지 웨스트민스터 5개 문서를 모두 담았다. 교단 내에 목사나 교수 차원의 개인적 번역은 많았으나 교단 차원의 공적 번역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 간략히 책의 몇 구절을 훑어봤는데 번역의 질이 상당히 높았다. 긴 문장을 짧고 명료한 단문장으로 변환시킨 게 아주 좋았다.

이 책의 탁월함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가진 신학적 엄밀성을 현대적 번역에 담아냈다는 점이다. 앞서 만났던 여러 번역본의 부딪힌 긴 문장, 어색한 표현, 애매한 문장 구조, 비문 등을 없애고 명료한 문장으로 가다듬었다. 불필요한 접속사로 연결해 비대한 문장이 되었던 것을 명료한 단문장으로 나눠서 처리했다. 의미 부여를 위해 쉼표를 적극 활용한 부분도 돋보인다. 특히 기존에 고착된 한자의 신학용어를 일반 성도들도 알기 쉽게 평이한 단어로 바꾼 것은 인상적이다. 가령 '칭의(稱義)'를 '의롭다 하심'으로, '승귀(昇貴)'를 '높아지심'으로 번역했다. 특히 소요리문답은 교회 아이들의 교리 공부에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쉬운 문장으로 번역했다.

이번 번역 작업은 무려 7년에 걸쳐 연인원 644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영어 원문뿐 아니라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번역본을 병행 참조했고 조사와 대명사의 사용 적절성을 입체적으로 분석하여 문장을 다듬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신학자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믿음이 갔다. 번역위원으로 참여한 이남규 교수는 나와 같은 교회를 다녔고 같은 교육기관에서 교역자와 교사로 일한 경험이 있다. 삶과 신학이 일치한다는 면에서 이 교수는 내 주변 최고의 모범이다. 정요석 목사는 일면식은 없지만 명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를 통해 호감을 가진 바 있다. 내가 지금껏 읽어본 웨민 해설서 중 정 목사의 책은 단연 최고다.

번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바벨탑 사건 이래 사람은 각기 다른 언어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에 번역 작업의 엄존함은 실로 무겁다. 번역은 사람의 작업이기에 흠과 오류가 불가피하다. 이 세상 텍스트 중 하나님에게 직접 영감된 성경 원어(히브리어 구약, 그리스어 신약)를 제외하고는 모두 오류와 한계가 있다. 또한 시대마다 언어는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장로교회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들을 시대에 맞게 주기적으로 개정·번역하는 작업은 긴요하다. 이런 차원에서 내가 속한 교단에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공적 번역한 것은 상당한 자부심이라 할만하다. 이 거룩한 자부심 위에 신간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놓여 있다.

근자에 장로교회 안에서도 자유주의 신학이 득세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을 내세우면서도 성도들에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가르치는 교회가 많지 않은 실정이다. 먹고살기 힘들고 멘토와 힐링을 원하는 현대인에게 죄와 회개는 따분한 얘기일 수 있다. 어린이 영어캠프나 부흥회와 같은 실용적이고 촉촉한 터치를 갈망하는 신자들이 많다. 강단(하나님의 말씀)보다 '어와나(Awana)'의 시행 여부로 교회를 선택하는 시대가 됐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보다 인간의 기호에 목회적 스탠스를 두는 한국교회의 현실이 안타깝다.

단언컨대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성경의 일부 구절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이단적 세계관에 함몰되는 경우가 많은 시대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반드시 '전체 성경(tota scriptura)'과 함께 가야 한다. 신학자 신원군 교수의 말대로 성경과 교리는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비루한 시대적 맥락을 직시할 때 예장합신 신학연구위원회의 헌신적 수고로 쓰인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보석과 같은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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