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뒤랑 - 부서진 삶에서 버텨낸 믿음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연감 11
조병수 지음 / 가르침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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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병수 명예교수(프랑스 위그소 연구소장)는 『마리 뒤랑. 부서진 삶에서 버텨낸 믿음』을 통해 프랑스 위그노 박해사의 한 여인, 마리 뒤랑의 생애를 추적한다. 위그노를 다룬 책이나 순교사, 신앙 위인전은 시중에 적지 않게 나와 있지만, 이 책은 그 가운데서도 유독 깊고 담백하고 은혜롭다. 학문적 무게와 신앙적 사색이 균형을 이루면서도 결코 어렵지 않게 읽힌다. 한 인물의 생애를 다루되 그것을 딱딱한 역사서로 그치지 않고 오늘 우리의 삶까지 끌어당긴 흔적이 역력하다.

주지하다시피 위그노는 16~18세기 프랑스의 개신교도, 곧 칼빈주의 개혁파 신자들을 일컫는다. 1598년 앙리 4세가 낭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를 잠시 허락했으나 1685년 루이 14세가 이를 철회하며 위그노에 대한 조직적 박해가 재개되었다. 개종을 거부한 이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투옥되거나 갤리선 노잡이로 끌려갔으며 여성 신자들은 프랑스 남부 애그모흐뜨의 꽁스땅스 탑에 수감되는 경우가 많았다. 마리 뒤랑(Marie Durand)은 바로 그 탑에 갇혀 신앙을 지킨 대표적 인물이며, 그가 갇혀 있던 탑의 바닥에 새겨졌다고 전해지는 'REGISTER(저항하라)'라는 글자는 지금도 위그노 신앙의 상징으로 회자된다.

책의 구성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는 마리 뒤랑의 삶과 그가 후대에 남긴 정신을 간략히 추모한다. 2부는 그의 가족을 소개하고, 3부는 마리와 함께 수감되었던 여러 여성 수감자들을 조명한다. 4부는 마리의 삶과 신앙을 본격적으로 추적한다. 마지막 5부에서는 마리의 삶으로 대변되는 '저항'의 본질적 의미를 탐구한다. 마리 개인에서 출발해 그를 둘러싼 사람들로 시야를 넓혔다가 다시 마리 개인의 신앙 여정으로 좁혀 들어간 뒤, 마지막에는 그 개인을 통해 시대와 신앙 전체를 조망하는 구조이다.

마리 뒤랑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711년 세벤 지방의 위그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열아홉이라는 어린 나이에 개신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꽁스땅스 탑에 갇힌다. 그는 그곳에서 서른여덟 해를 살아낸다. 젊음이 통째로 지나가고 몸이 늙어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768년, 늙은 몸으로 풀려나 얼마간의 여생을 보내다 1776년에 생을 마감한다. 짧게 요약하면 이렇지만 이 몇 줄 안에 담긴 시간의 무게는 결코 몇 줄로 다 담을 수 없다.

이 책의 탁월함은 저자가 직접 보고 느끼고 사색한 내용을 중심으로 씌어졌다는 점이다. 저자는 마리의 발자취가 서린 남프랑스의 광활한 현장들을 수없이 답사했고, 꽁스땅스 돌탑은 다녀온 횟수를 잊을 정도로 자주 찾았다. 그 열정과 성실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 곳곳에 삽화와 사진이 많이 인용되었는데 대부분 저자가 현지를 방문할 때 촬영한 사진들이다. 마리의 생가는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으로 실려 있다. 저자가 꽁스땅스 탑의 좁은 계단을 오르며 마리가 오랜 세월 올려다보았을 그 습한 벽과 창을 몸으로 느낀 뒤에 쓴 문장들에는, 문헌만 뒤진 사람이 쓸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다. 그 현장성이 이 책을 단순한 전기가 아니라 순례의 기록처럼 읽히게 만든다.

이 책의 또 다른 탁월함은 마리 뒤랑을 '성경의 여인'으로 조명한다는 점이다. 마리가 남긴 글의 대부분은 편지였는데 저자는 그 편지들을 하나하나 인용하며 그가 얼마나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기대어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감옥이라는 극한의 공간에서 자기 억울함이나 인간적 사색을 늘어놓을 법도 한데 그의 편지는 오히려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추적하는 쪽으로 향해 있다. 예컨대 마리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존재, 조카 안느(오빠 삐에르의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사랑하는 딸아, 언제나 공손함을 잃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을 네 삶의 법도로 삼거라. 또한 부지런한 마음으로 일하렴. 사도 바울께서 말씀하셨듯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란다.” [p. 132]

한편 가정 안에서의 신앙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 책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해준다. 위그노 신앙을 수호하다 끝내 순교한 오빠 삐에르에 대한 마리의 선망과 존경은 책 곳곳에서 묻어난다. 조카 안느에게 아버지의 모범을 따르라고 거듭 권면하는 대목은 오빠에 대한 깊은 경외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그 존경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에띠엔느 뒤랑이 어릴 적부터 심어준 신앙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38년의 수감 생활 동안 신앙의 순수성을 잃지 않고 성경 말씀으로 힘과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기초 동력은 바로 신앙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에 있었다. 가정이 흔들리고 신앙 교육이 힘을 잃어가는 지금,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마지막 5부에서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마리에게 저항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마리에게 신앙과 저항이 별개의 가치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한 인격을 이루는 두 얼굴, 곧 '신앙하는 저항'이자 '저항하는 신앙'이었다. 저항이 빠진 신앙은 무력하고, 신앙이 빠진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저항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향했는가. 저자는 세 겹의 저항을 짚어낸다. 첫째는 시대에 대한 거부다. 신앙을 강요하고 회유하는 왕정과 교권을 향해 '아니오'라고 선언하는 것인데, 이는 무력 투쟁이 아니라 고난을 온몸으로 당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저항이었다. 둘째는 교회를 향한 저항이다. 마리는 박해받는 형제자매에게 무관심한 채 안일함에 젖어가는 동시대 교회를 향해서도 거침없이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셋째, 가장 치열했던 저항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끝없는 수감 생활에 지쳐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 적당한 타협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마음과 맞서 싸우는 일이었다. 조카 안느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리는 "복음을 따라 네 자신을 난폭하게 대하라"고 권면하는데, 이는 유혹과 세속화 앞에서 스스로에게 엄격해지라는 자기 자신을 향한 저항의 언어였다.

이 대목이야말로 이 책이 전기를 넘어 신학적 텍스트로 서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마리 뒤랑의 '버팀'은 단지 한 개인의 강인함을 기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자의 언어를 빌리면 시대와 교회와 자기 자신이라는 세 전선에서 동시에 벌어진 일상의 저항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마리를 초월적 영웅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는 우리와 본성이 다르지 않은 한 사람이었을 뿐이며, 그렇기에 안일하고 세속화된, 장신구 같은 신앙에 저항하라는 그의 요청은 오늘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겨눠진다.

이 지점에서 나는 개인적인 기억 하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25년 전, 나는 연애 문제로 삶과 신앙을 둥개고 있던 불안한 청년이었다. 옆에서 안타깝게 지켜보시던 담임목사님은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26:3)”라는 이사야서 말씀을 직접 손으로 써서 나에게 건네주셨다. 그때는 나이도 어리고 신앙도 성숙하지 못해서 심지를 견고히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임한다는 그 특별한 메시지를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말씀이 내 삶을 지탱하는 중심 말씀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첫사랑과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한 것도, 한 회사에서 22년간 견뎌낸 것도, 초등학생 때 처음 출석한 교회에서 여러 고비를 버텨내 안수집사의 직분을 받은 것도, 돌아보면 모두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일으킨 감사한 역사였다.

마리가 감옥의 벽 앞에서 붙든 것과 내가 삶의 여러 국면에서 붙들었던 것은 규모도 무게도 감히 견줄 수 없다. 그러나 '심지를 견고히 함으로써 얻는 평강'이라는 원리만큼은 서른여덟 해를 탑 안에서 산 여인의 삶과 내 삶 사이에 다르지 않게 흐르고 있었다.

근자에 신앙도, 인내도, 버팀도 낡은 미덕처럼 취급받는 시대다. 조금만 힘들어도 관계를 정리하고, 조금만 불편해도 공동체를 떠나는 게 자연스러운 시대에 '서른여덟 해를 한자리에서 버텨낸 여인'의 이야기는 낯설다 못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불편함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심지를 견고히 하는 훈련 없이는 어떤 신앙도, 어떤 가정도, 어떤 회사도 오래 버텨낼 수 없다. 편리함과 즉각적 위안에 길들여진 지금 세대가 정말이지 놓치고 있는 게 바로 이 '버팀의 영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꽁스땅스 탑에서 하루하루 고된 삶을 살아야만 했던 그때의 마리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250년이 지난 지금, 지구 반대편 어느 작은 나라에서 한 사람이 그의 삶과 신앙을 더듬으며 '부서진 삶에서 버텨낸 믿음'의 의미를 자신의 이야기로 끌어안게 될 줄을. 습한 감옥에서 써 내려간 그의 서신 한 줄 한 줄이, 세대를 건너 지금 이곳까지 흘러와 나의 심지를 다시 붙들어 세울 줄은. 조병수 교수의 『마리 뒤랑. 부서진 삶에서 버텨낸 믿음』은 바로 그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역사를 찬양하는 증언록이다. 부서졌으나 무너지지 않았던 한 여인의 생애 앞에서, 나는 오늘도 심지를 다잡는다. 나뿐 아니라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 일상의 비루함을 견디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이 용기와 도전을 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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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기독교 변증
김기호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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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질문을 두려워하는 교회

청년부 부장을 맡은 지 몇 해가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여러 이유를 지켜봐 왔다. 학업과 취업, 관계의 피로, 신앙의 권태 등 원인은 다양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유독 눈에 밟히는 이유가 하나 있다. 바로 '질문하는 것을 싫어하는 교회 문화'다. 지금의 청년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익숙한 세대다. 근거를 묻고 논증을 요구하는 게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으로 체화된 세대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오래된 권위와 질서의 문법은 이 질문 자체를 불경하게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믿음은 순종이지 논쟁이 아니다"라는 익숙한 문장으로 질문을 서둘러 봉합해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랫동안 불편했다.

성경은 단 한 번도 교회에게 세상과 단절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사도 바울은 아덴 아레오바고 광장에 서서 이방 철학자들과 논쟁했다. 그는 그들의 시인을 인용했고 그들의 논리 위에서 대화를 시작했다. 무시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교회는 세상과 소통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다. 그리고 소통이란 예의와 실력을 함께 요구하는 행위다. 예의만 있고 실력이 없으면 답변은 공허해지고, 실력만 있고 예의가 없으면 소통은 폭력이 된다. 나는 이 균형 잡힌 소통의 실력을 '변증(辨證, Apologetics)'이라 부른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다시 배웠다.

물론 변증이 정답은 아니다. 인간의 논증으로 사람을 회심시킬 수 있다는 오만은 개혁주의 신앙과 어울리지 않는다. 구원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다. 하지만 변증이 정답이 아니라고 해서 무용한 것은 결코 아니다. 변증은 회심의 원인이 아니라 회심의 장애물을 걷어내는 작업이다. 세상 친구들의 질문에 성실히 답하려면 성경과 교리라는 뼈대 위에 과학과 철학에 대한 깊은 조예가 살로 붙어야 한다. 이 균형 잡힌 실력을 갖춘 책을 최근 만났다. 김기호의 『한 권으로 읽는 기독교 변증』이다.

⑴ 변증이라는 이름의 성실함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 다루는 이슈의 폭에 있다. 동성애, 종교다원주의, 기적, 부활, 칼람 우주론, 유신진화론까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마주치는 거의 모든 논쟁적 전선을 한 권 안에 촘촘히 배치했다. 저자는 단순히 성경 구절을 나열하며 정답을 선포하지 않는다. 각 이슈마다 상식과 이성의 층위를 먼저 통과시킨 뒤 성경의 진리를 겹쳐 놓는 방식을 택한다. 이 이중 구조가 이 책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동시에 은혜롭게 만든다. 논증은 차갑지 않고 신앙은 맹목적이지 않다.

변증학에는 오랜 계보가 있다. 아퀴나스의 자연신학적 전통도 있고, C. S. 루이스의 문학적 변증도 있고, 코넬리우스 반틸의 전제주의적 변증도 있다. 이 책은 그 어느 한 학파에 온전히 투항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슈마다 유연하게 무기를 바꿔 든다. 과학의 영토에서는 과학의 언어로, 철학의 영토에서는 철학의 언어로 응수한다. 이런 유연함은 자칫 산만함으로 흐를 위험이 있지만, 저자는 매 챕터를 성경적 진리로 다시 수렴시키는 원심력과 구심력의 균형을 놓치지 않는다.

⑵ 유신진화론이라는 뇌관 — 존 스토트, 톰 라이트, 팀 켈러를 넘어서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머문 챕터는 유신진화론이었다. 나는 최근 이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존 스토트, 톰 라이트, 팀 켈러와 같이 내가 좋아했던 저명한 신학자들이 어째서 유신진화론을 받아들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 궁금증의 절반은 풀렸고 나머지 절반은 오히려 경계심으로 바뀌었다.

유신진화론은 흔히 "하나님이 진화라는 매커니즘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다"라는 온건한 문장으로 소개된다. 이 정도라면 논쟁의 여지는 있을지언정 신앙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이 책이 정확히 짚어내듯 문제의 핵심은 창조 방식이 아니라 '역사적 아담'의 존재 여부에 있다. 진화의 점진적 과정 안에서는 단 한 사람에게서 인류 전체가 유전적으로 발원했다는 명제가 성립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아담은 역사적 개인이 아니라 문학적 상징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는 창세기를 넘어선다. 로마서 5장과 고린도전서 15장은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그리스도)을 언약적 대표성의 구조로 정확히 병치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이 역사적 실재가 아니라 상징이라면, 이 병치 구조는 절반이 무너진다. 그리고 절반이 무너진 구조는 결국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곧 둘째 아담의 언약적 순종이라는 복음의 심장부까지 흔들게 된다. 유신진화론은 그러므로 "어떻게 창조되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구원받는가"의 문제로 귀결되는, 훨씬 더 무서운 논리다.

존 스토트와 톰 라이트와 팀 켈러가 이 위험을 몰랐을 리 없다. 그들은 과학적 정직성과 성경적 권위 사이에서 자신들 나름의 균형점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학문적 정직함을 존중한다. 하지만 존중과 동의는 다른 문제다. 이 책이 제시하는 대로 역사적 아담을 견고히 붙드는 것은 단순한 창조과학적 고집이 아니라 복음의 언약적 구조를 지키는 최전선의 문제다. 이 챕터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값을 한다.

⑶ 종교다원주의, 그리고 물러설 수 없는 배타성

종교다원주의를 다룬 챕터도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각 종교의 기본 로직, 즉 구원론의 내적 구조를 하나씩 해부한다. 불교의 자력적 해탈, 이슬람의 율법적 순종, 힌두교의 윤회적 업보. 이들은 저마다 정교한 체계를 갖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를 구원의 동력으로 삼는다는 한계와 모순을 이 책은 정확히 짚어낸다. 반면 기독교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을 구원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궤도 위에 있다.

이 챕터를 읽으며 나는 이 이슈가 결코 신학교 세미나실에나 어울리는 관념적 사변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국내 장로교 교단 하나가 갈라질 만큼 무겁고 실제적인 문제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는 명제, 곧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를 붙드는 일은 편협함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정체성 자체를 지키는 일이다. 관용이 미덕인 시대에 배타성을 말하는 일은 불편하다. 그러나 진리는 애초에 다수결이나 여론의 문제가 아니다. 저자는 이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 정직함이 고맙다.

⑷ 도킨스의 시대, 그리고 응답하는 신앙

지금 세계는 유물론자와 무신론자의 사상이 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시대다. 리처드 도킨스,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유발 하라리. 이들은 저마다의 달변과 베스트셀러를 무기로 기독교를 조롱해왔다. 그들의 저작은 서점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대중의 지성을 대변하는 목소리처럼 행세한다. 반면 교회는 그 조롱 앞에서 침묵하거나, 침묵할 수 없을 때는 감정적으로 격앙되곤 했다.

이 책이 말하는 것은 "무조건 우리가 옳다"는 방어적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적 태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진짜 필요한 것은 탄탄한 변증력이다. 도킨스의 논증이 왜 허술한지, 하라리의 역사 해석이 어디서 전제를 슬쩍 바꿔치는지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는 실력 말이다. 신앙은 겁먹을 필요가 없다. 다만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베드로전서의 저 유명한 권면처럼, 우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 이 책은 바로 그 '준비'를 위한 실용적 병기고다.

에필로그 : 깊이보다 폭이 필요한 시대

솔직히 말하겠다. 이 책이 다루는 각 이슈의 깊이는 전문 신학서에 비할 바가 아니다. 칼람 우주론 하나만 해도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의 저작들이 훨씬 정교하고, 유신진화론 논쟁도 각 잡고 파고들면 수백 페이지의 전문서가 따로 필요한 주제다. 이 책의 정직한 한계다. 나는 이 한계를 굳이 숨기고 싶지 않다. 깊이를 기대하고 이 책을 편다면 실망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책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 이슈의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세상에 나가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을 정도의 균형 잡힌 지도(地圖)다. 이 책이 다루는 정도의 지형만 익혀도 청년은 대학 강의실에서, 직장 동료 앞에서, 그리고 스스로의 회의(懷疑)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최소한의 근력을 갖추게 된다. 넓은 지도가 있어야 비로소 깊이 파고들 지점을 스스로 고를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입문서라기보다 나침반에 가깝다.

청년부를 맡으며 나는 매번 확인한다. 청년들은 순진한 확신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직한 답변을 원한다. 질문을 억누르는 교회에는 남지 않지만, 질문에 성실히 응답하는 교회에는 남는다. 나는 이 책을 청년들의 손에 쥐여주고 싶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이 책이 열어놓은 문 하나하나를 더 깊이 걸어 들어가려 한다. 질문을 두려워하는 신앙은 이미 죽은 신앙이다. 질문에 응답하는 신앙만이 다음 세대에게 상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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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록 - 라틴어 원전 완역판 세계기독교고전 8
성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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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이나 읽은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읽을 당시 그은 밑줄을 따라가며 빠르게 문장을 복기해 서평을 남긴다. 이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최근 교회에서 '기독교 고전 읽기'라는 수업을 개강했다. 올해 처음 부임한 부교역자가 해당 과목을 맡았다. 강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신앙에 유익을 줄 기독교 고전을 선택해 한 시즌 동안 읽고 내용을 나누는 수업이다. 그 첫 책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선정됐다. 소위 '아우구스티누스빠'를 자처하는 나로서는 일 순위로 수강을 원했으나 도저히 시간대가 맞지 않았다. 아쉬웠다. 이런 배경에서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을 다시 집은 것이다. 그리고 남기는 글이다.

서양 고전 가운데 흔히 “세계 3대 고백록”이라는 말이 회자된다. 그러나 세 책을 실제로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표현은 격에 맞지 않은 문학적 관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같은 범주에 놓일 작품이 아니다.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이 인간 자아의 노출이라면, 레프 톨스토이의 고백록은 윤리적 각성의 기록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은 그 차원을 단숨에 넘어선다. 이 책은 인간이 자신을 고백하는 책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 존재 전체가 해석되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하나님을 향한 신학적 찬가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단호한 선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세 번 읽으며 깨달았다. 이 책의 주인공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인공은 하나님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범죄하고 넘어지고 시험 들고, 어느 순간 중생을 경험하고 성화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정작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은 일관되게 외부로 향해 있다. 과거의 크고 작은 일들이 현재의 나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구체적 섭리였다는 것이다. 보존하시고 운행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시각을 견지하지 않는 한 『고백록』은 오독되기 쉽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은 실패와 방황의 연속이다. 그는 젊은 시절 쾌락을 좇았고 명예를 탐했으며, 한때는 이단 사상 속에서 진리를 찾겠다고 헤매기도 했다. 그는 결코 모범적인 청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과거를 가차 없이 폭로한다. 사소한 도둑질, 허영심, 정욕, 교만—그는 인간 내면의 어둠을 조금도 미화하지 않는다. 이 대목은 자연스럽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들과 연결된다. 도스토옙스키 역시 인간 영혼의 가장 어두운 심연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작가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인물들이 보여주듯, 그는 인간의 죄와 자기 기만을 조금도 낭만화하지 않는다.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타락했고, 그 타락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극복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세계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은 서로 만난다. 인간 내면의 심연을 끝까지 내려가 보면 결국 하나의 진리에 도달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개선이 아니라 구원이며, 그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주어진다는 걸 말이다.

하나님은 의인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죄인을 변화시켜 사용하신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이야기다. 기독교 신학이 강조하는 가장 위대한 진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인간을 도와주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근원이시며 역사의 절대 주권자이며 모든 것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섭리하는 분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생은 이 교리를 설명하는 교과서다. 어머니의 눈물 어린 기도, 철학적 방황, 학문적 갈망, 밀라노에서의 회심—그 모든 사건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한 신학자를 빚어 가신 과정이다. 인간의 눈에는 실패처럼 보이던 사건들이 하나님 손에서는 신학자를 만드는 재료가 된다. 이것이 섭리다. 이것이 주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책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창세기》 강해는 이 작품의 정점이다. 많은 독자들이 이 부분에서 당황한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 부분이야말로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핵심이다. 그는 창조 이야기를 단순한 성경 해설로 다루지 않는다. 그는 거기서 시간, 기억, 존재, 창조의 신비를 묻는다. 하나님은 시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다. 그의 내재적이고 필연적인 사역은 영원 전에 자신의 지극히 거룩하고 지혜로운 경륜에 따라 이루어졌다. 시간성의 거부, 즉 영원(永遠, Eternity)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과 기독교 신학은 절대로 온전히 소화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위대함은 그의 시대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사상은 이후 서양 신학 전체의 토대를 형성했다. 중세 신학은 물론이고 종교개혁의 신학자들까지도 그의 사상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특히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읽어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얼마나 자주 호출되는지 금세 알 수 있다. 인간의 전적 타락,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삼위일체, 은혜에 의한 구원이라는 핵심의 교리에서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단순히 인용하는 수준을 넘어 사실상 신학적 동지로 대우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의 교리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미 분명히 가르쳤던 복음의 회복이라고 확신했다. 이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순한 교부가 아니다. 그는 서방 교회의 신학적 지형을 결정적으로 형성한 인물이며, 이후 수 세기 동안 이어질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한 뿌리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아우구스티누스는 당대 교부들과 달리 헬라어를 거의 알지 못했다. 동방 교부들이 헬라어 문화 속에서 신학을 전개했던 것과 달리 그는 철저히 라틴 세계의 사람이었다. 그는 헬라어 공부를 몹시 싫어했다고 스스로 고백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그는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라틴 고전 교육을 받았다. 학교에서 그는 문장을 암송하며 수사학을 연마했다. 특히 키케로와 같은 고전 작가들의 문장을 달달 외우며 언어 감각을 단련했다. 그 혹독한 교육은 훗날 놀라운 열매를 맺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신학자가 되었다. 그의 문장은 논리적이면서도 음악적이다. 철학적이면서도 기도문처럼 울린다. 신학이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이 바로 『고백록』이다.

서평을 정리하자. 앞서 언급한 대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한 사람의 자전적 고백이 아니다. 젊은 시절 방탕하게 살았던 한 인간이 훗날 교회사 최고의 신학자가 된다. 겉으로 보면 극적인 인생 역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독자는 점차 깨닫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에는 우연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린 시절의 사소한 사건들, 학문을 향한 갈망, 끝없이 이어진 방황, 어머니의 눈물 어린 기도,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회심의 순간까지—그의 생애 곳곳에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조용히 개입해 있다. 한 인간이 길을 잃을 때마다 하나님은 그 길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으시고, 때로는 멀리 돌아가게 하시면서도 결국 자신에게로 이끌어 가신다. 그렇게 그의 인생의 구석구석을 인도하시고 붙드시며 마침내 한 신학자를 빚어 가신다. 그러므로 이 책의 중심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서 있지 않다. 그의 삶을 끝까지 붙드신 하나님이 서 계신다. 설명은 하나뿐이다. 하나님의 은혜다. 그리고 이 책의 모든 문장은, 그 은혜를 향해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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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개정판)
박민규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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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박민규를 처음 만난 건 대부분의 독자가 그러했듯이 바로 ‘그’ 작품을 통해서였다. 제8회 한겨레문학상은 매우 신선하고 유쾌한 작품에게 돌아갔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통해 2003년 혜성처럼 등장한 박민규는 한국 문단에 큰 충격이었다. 어느덧 그 충격은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 잡았고, 그는 동시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의 박민규가 되었다.

그를 지금에 있게 한 작품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소위 ‘삼미’는 여느 소설가의 처녀작들보다 인상적이다. 독특한 소재와 개성 있는 문체로 술술 읽히면서도 절대 가볍지만은 않은 박민규식의 이단아적인 텍스트는 그에게 ‘무규칙 이종 소설가’라는 별칭을 안겼다. 한때 김애란과 더불어 ‘한국 문단의 미래’로 거론되던 그는 이제 그 수식어를 넘어 하나의 확고한 이름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발표했던 이 특별한 로맨스가 바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다.

최근 OTT 영화 <파반느>의 공개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나는 아직 영화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영상화 자체만으로도 이 작품이 다시 현재로 호출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한 시대의 문제작으로 읽히던 소설이 새로운 매체를 통해 재해석되고, 또 다른 세대의 관객에게 전달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외모와 이미지의 가치가 더욱 노골적으로 소비되는 오늘의 환경 속에서,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오히려 당시보다 더 현재적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영화대로의 해석이 있겠지만 원작 소설이 품고 있는 내면의 밀도와 독백의 사유는 여전히 활자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살아 있다.

이 소설은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다. 하지만 사랑 그 자체만을 조명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가 양산한 부조리적 산물을 소설 소재의 전면에 내세운다. 여성 권력의 핵심으로 작동하는 ‘외모’라는 테마를 통해 위대한 사랑의 가치를 이끌어낸다. 외형이 실존의 가치를 결정하는 풍토에 대한 비판은 소설이 발표되었던 당시보다도 지금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또한 소설 속 화자의 독백은 기존 박민규 문체의 특징이었던 유쾌함과는 다소 거리를 둔다. 술술 잘 읽히지만 이야기 전반에 걸쳐 흐르는 무게감 있는 독백 서술은 독자의 몰입도를 더욱 깊이 있게 이끈다.

작가는 20대 성장소설의 형식으로 못생긴 여자를 사랑했던 평범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다. 각기 다른 상처를 갖고 있는 세 인물이 이야기 전개의 핵심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 중반의 서울, 아버지로부터의 트라우마를 지닌 소설 속 화자 ‘나’와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게 된 못생긴 ‘그녀’, 그리고 ‘나’의 정신적 멘토 요한, 세 인물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그녀’에 대한 ‘나’의 변함없는 사랑과 철학 강의하듯 ‘나’에게 자신의 사유들을 풀어놓는 요한의 멘토링이 화자 ‘나’의 독백적 서술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소설의 전체적인 구성이 특이하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서사 구도와 멀티 엔딩을 통한 반전 효과는 인상적이다. 독자의 주관으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두 가지 이상의 해석이 가능하다. 소설의 뒷부분, 독자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 흐름이 바뀔 수 있게 한 박민규의 의도는 소설의 간절한 메시지를 고려해 볼 때 매우 적절하다. 400페이지가 넘는 적지 않은 분량의 독백 서사를 통과하면 마지막에는 뒤통수를 후려치는 이야기 구도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 다시 읽어도 그 결말의 힘은 유효하다.

박민규는 마이너리티의 편에 서 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부와 아름다움의 권력 시스템에서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서 있다. 작가는 미美가 곧 선善을 결정하는 세계, 외연의 미적 퀄리티가 곧 존재의 크기를 결정하는 굴절된 세계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을 가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행복의 근원과 사랑의 본질마저도 왜곡시키는 미의 권력화가 우리 삶 곳곳에 얼마나 깊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었다."라고 박민규는 말한다. 이어 그는 "부끄러움과 부러움의 벽을 넘지 못하고서는 인간은 근원적인 불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라고 꼬집는다. 자기 행복의 절대적 가치 기준은 바로 자기 자신임이 분명한데 자본주의 시스템의 과도한 맹신은 종내 자아의 행복을 타자의 현재성에 견주는 오류를 양산한다. 부끄러워하면 할수록, 부러워하면 할수록 내 행복의 척도를 가늠하는 최저점의 마지노선은 상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호도된 자아상에 대한 올바른 예방법은 부끄럽고 부러워해야 할 것들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박민규는 일깨운다. 그것들이 내 안에서 시시해질 때야 비로소 외연보다는 내면이, 비본질보다는 본질이 우선하는 진정한 행복의 세계의 문이 열릴 수 있다. 이 통찰은 시간이 흐른 지금 더욱 날카롭게 들린다.

박민규는 이를 사랑의 가치로까지 발전시킨다. 우주의 모든 좋은 것들을 단 하나의 절대선으로 축약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무조건 ‘좋은’ 것이며 타협과 토론이 필요 없는 절대적 선善이다. 이 거대한 본질은 그 어떤 외형적 조건에 의해서도 변질될 수 없다. 이는 진리다. 작가 박민규는 거대하고도 오묘한 사랑의 카테고리 안에서 부富와 미美라는 외형성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인지를 간절한 메시지로 증거한다. 사랑을 통해서만 진정 인간은 아름다워지고 안정될 수 있다는 올곧은 진리를 설파한 소설의 메시지에 깊은 여운이 남는다.

영화 <파반느>가 이 작품을 다시 오늘로 불러냈다면, 소설은 여전히 더 깊은 자리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술술 잘 읽히면서도 녹록지 않은 사유를 이끌어내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지금 읽어도 충분히 유효하다. 역시 박민규다.

이 글을 처음 썼던 것도 벌써 오래전의 일이다. 그때의 나는 이 소설을 통해 사랑과 자본주의, 부끄러움과 부러움에 대해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이 글을 꺼내 읽는 지금, 나는 여전히 같은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딘가 조금은 다른 자리에서 이 작품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낀다. 어쩌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매번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읽는 이의 나이에 따라 다른 질문을 건네는 소설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 오래된 독후감을 고쳐 쓰며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무엇을 부끄러워하고, 무엇을 부러워하며,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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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4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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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 다시 읽은 소설 『죄와 벌』

오래전 읽은 소설을 다시 집어 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최근 내 주변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결국 사람들 간의 문제인데 이런저런 일들을 지켜보면서 '인간은 어디까지 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인간의 악함의 크기와 종류는 과히 천차만별인 것 같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악랄하고 교만하고 싹수없을 수 있겠다.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이성(理性)이 없고, 예의가 없고, 절제가 없다. 제발 적당히들 했으면 좋겠다.

이런 씁쓸함은 비단 타인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나 자신 또한 역시 추악하다는 진실을 자주 직시한다. 신은 인간의 마음에 양심이란 씨앗을 심어놓았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양심을 '벌레'와 '천명의 증인'으로 비유했다. 총신대학교 문병호 교수는 전자를 '내부에서 끊임없이 갉아먹는 고통'으로, 후자는 '모든 변명을 반박하는 압도적 확증'으로 주석했다. 서글픈 건 세상에는 (나를 포함해)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 불편한 진실을 극적이고 적나라하게 마주한 순간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다시 내 손에 들어왔다.

⑴ 죄(罪), 그리고 인물

죄는 무엇인가. 국어사전을 펼치니 '잘못이나 허물로 인하여 벌을 받을 만한 일'로 설명되어 있다. 죄를 기독교적으로 접근하면 의미는 조금 달라진다. 기독교에서는 죄의 기준이 타인이나 사회에 있지 않다. 하나님에게 있다. 기독교에스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어기는 것"으로 정의된다. 즉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언약적인 관계에서 발생한 불순종은 모두 죄이다. 그렇기에 죄는 상태이고 현상이다. 죄를 존재나 물질로 본 마니주의자들의 오만한 어불성설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오래전 폐기처분되었다. 흥미로운 건 세상의 죄의 개념과 기독교의 죄의 개념이 많은 부분 겹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법은 소위 '도덕법'이라는 명명으로 역사 이래 인간의 법에 녹아들었다. 그렇기에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살인을 저지르거나 도둑질을 하는 건 예외 없이 죄로 인식되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규정한 법조항(십계명, 곧 도덕법)의 많은 부분이 지금 우리가 지키고 있는 각 국가의 실정법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에서 바로 이 죄의 문제를 천착한다. 도스토옙스키가 만들어낸 대부분의 인물이 그렇듯이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불안하고 극단적인 인물이다. 가난한 삶을 살지만 진지하고 독특한 사색을 가진 청년이다. 자신의 자취방에서 "사회에 불필요한 인간을 없애 더 큰 공공의 선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은 정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공상에 빠진다. 공상은 곧 현실이 된다. 자신의 사상을 시험해 볼 요량으로 동네에 있는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계획적으로 직접 살해한 것이다. 범행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막상 살인을 저지르고 나니 극심한 혼란과 망상의 증세가 그를 억누른다. 며칠간 고열과 의식의 혼탁 상태가 이어진다. 그러던 중 지인과 경찰을 만나 대화하는 과정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범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아슬아슬하게 노출되고 방어된다. 소설은 에필로그 직전까지 그 긴장감을 철저히 유지한다.

상식적으로 볼 때 아무 이유 없이 노파를 죽이고 우발적으로 그 여동생까지 죽인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는 분명 엽기적 중범죄다. 그는 마지막까지 반성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살인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자신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비범성, 즉 특별함과 초월함을 갖고 있다는 망상으로 자기 자신을 합리화한다. 범행 후 여러 사람과의 만남에서 그의 예민하고 망상적인 행태는 점점 심해진다. 긴 소설 분량 대부분이 라스콜리니코프의 내적 혼란으로 채워져 있다. 그는 자신을 제대로 회복시키지 못한다. 자기우월과 자기혐오가 뒤섞인 정신분열적 실존이 인간 라스콜리니코프의 진본이다.

라스콜리니코프를 변화시키는 존재는 소냐이다. 술주정뱅이 마르멜라도프의 딸로서 아버지가 마차 사고로 치여 죽은 후 아버지 장례 과정에서 라스콜리니코프를 만난다. 소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춘을 택한 불운한 여인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자기희생을 잘 드러내며 작가적 장치라는 면에서 신앙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마치 순종과 희생으로 자기를 부정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오버랩되기도 한다. 소냐는 인간의 진정한 구원(부활)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하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그녀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수시로 신약성경의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를 들려준다. 죄를 비껴가지 말고 자수함으로써 정면 승부해야 할 것을 권면하기도 한다. 이런 대목은 기독교적 상징과 은유를 잘 담아낸다. 소냐는 종국 라스콜리니코프를 자수시키고 참회의 가능성으로 이끈다.

도스토옙스키는 왜 그토록 병적인 인간을 전면에 내세웠을까. 솔직히 라스콜리니코프는 위대한 고전의 주인공으로는 전형성과 일상성이 거의 없는 또라이다. "비범한 인간은 도덕법칙을 초월할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사상에 도취되어 사람을 둘이나 도끼로 찍어 죽인 인물이다. 미친놈이다. 이 막장극을 통해 도스토옙스키는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그건 아마 '역설'이 아니었을까 싶다. 인간성의 추악한 실체를 극한까지 몰고 감으로써 결국 하나님 없이는 인간은 어떤 선도 행할 수 없음을 깨우치고야 마는 그런 역설 말이다. 즉 도스토옙스키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극단적인 망가짐을 보여줌으로써 은혜로 살 수밖에 없는 인간론을 강하게 설파한다.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는 인류의 사상과 종교의 역사에서 항시 뜨거운 주제였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선하게 본 몇 안 되는 철학자다. 죄의 문제를 부조리(absurdism)란 신조어로 비껴간 카뮈 같은 자도 있다. 그러나 인간 본성을 악하거나 타락했다고 본 전통이 훨씬 두텁고 오래된 흐름이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위시하여 그를 계승한 루터와 칼빈은 인간을 전적 타락(Total Depravity)한 존재로 규정했다. 홉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주장하며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이기적 욕망에 지배된다고 말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 에로스, 타나토스 등을 통해 인간의 악성을 탐구했고, 니체는 선과 악을 권력 투쟁의 산물로 해석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인간을 '믿을 만한 존재'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철저히 인간은 절대적으로 악하다는 입장에 서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칼빈의 계보인 것이다.

많은 책을 읽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명확하게 깨달은 게 있다. 인간은 절대로 선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에게 인간은 "가만히 놔두면 자신의 자유의지로 악에 빠질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규정된다. 법과 도덕은 인간의 악을 감소시키기 위한 마지노선일 뿐이다. 인간 구원은 인간 밖에 존재한 강력한 외부의 힘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성실한 친구 라주미힌은 소설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밝고 친절하고 합리적인 사람으로서 나중에 두냐와 결혼해 건강한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소설에서 멀쩡한 사람은 그 하나밖에 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라주미힌은 끝내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일말의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도덕적으론 성공했지만 구원의 성취에는 다가서지 못한 인물이다.

또한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죄가 일상화된 형태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극단적이되 이론적이라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일상화된 죄의 얼굴이다. 그는 하인을 학대하고 미성년자를 성추행한 의심을 받는다. 아내를 살해했다는 의혹도 받는데 이에 대해 인물 간의 심증만 있을 뿐 소설에서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현대인의 내밀한 일상에 실재한 죄의 형상을 은유한 것 같다. 그는 죄를 설명하거나 변명하지도 않는다. 죄와 함께 살아가는 인물로서 죄가 일상을 넘어 권태에 도달한 완성형 악인이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양심의 고통이 없고 회개 또한 불필요하다. 자기 욕망의 목적이었던 두냐(라스콜리니코프의 여동생)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결국 그는 자기 부정과 자기 소멸의 길을 택한다. 신도 없고 절대적 의미와 가치가 없는 세계는 공허하며 그 어떤 삶의 본질도 찾을 수 없기에 결국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예심판사(수사관) 포르피리는 『죄와 벌』을 신학소설이나 인간론 사상서로 읽히게 하는 주요한 인물이다. 포르피리는 가장 이른 시점에 라스콜리니코프가 범인이라는 내적 확신을 갖는다. 명확한 확신을 갖고 있음에도 라스콜리니코프를 체포하려 하지 않는다. 고발하지 않고 도망칠 길을 막지도 않는다. 대신 라스콜리니코프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다. 대화 속에서 논리적 우위를 점하는 방식이다. 확신은 가득하지만 정죄하지는 않는다. 합리적이고 냉정하고 통찰력이 있지만 그 또한 라주미힌과 같이 라스콜리니코프의 영혼을 구하지는 못한다. 왜 틀렸는지는 알지만 어떻게 부활할 것인지는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냐에게 바통을 넘긴다.

⑵ 소냐 - 구원이 작동하는 자리

반면 소냐는 라주미힌과 포르피리가 도달하지 못한 '특별한 은혜'를 아름답게 웅변해낸다.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서는 가능성의 통로의 길 위에 서 있다. 소설 『죄와 벌』에서 소냐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건 이 소설의 단 하나의 명료한 주제, 즉 '인간의 죄와 구원의 문제'를 관통하는 핵심 작업이다. 소냐의 삶은 고단하고 가난하고 비루해 보인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팔았다. 라주미힌처럼 도덕적 고지(高地)에 올라선 인물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소녀가 위대한 건 '자기 위치'를 안 다는 것에 있다. 그녀는 스스로 죄인임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를 판단하지 않는다(못한다). 어떤 이론이나 지적도 없다. 남의 눈의 티끌이 아닌 자기 눈의 들보에 주목한 소냐의 겸손함은 율법적 정죄가 아닌 은혜의 통로만이 인간의 살 길임을 명징히 보여준다.

성경에 대한 소냐의 태도 또한 주목할 만하다. 소냐가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반복적으로 읽어주는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는 신약성경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기적의 메시지다. 죽은 지 나흘 동안 무덤에 있던 나사로를 예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살려낸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 사역 중 마지막이자 최대의 표적이다. 중요한 건 소냐는 이 본문을 설명하지 않고 그저 읽어주기만 한다는 점이다. 적용도, 논증도, 교훈도 덧붙이지 않는다. 그저 말씀을 있는 그대로 소리 내어 읽을 뿐이다. 이는 정통 기독교의 말씀론(성경론)과 깊게 맞닿아 있다. 말씀은 인간의 해석으로 효력을 얻지 않는다. 말씀은 스스로 살아 역사한다(sola Scriptura + viva vox evangelii). 라스콜리니코프는 말씀을 듣고 즉시 회개하지 않지만 "죽은 자라 불려 나오는 사건"이 그의 내면에 깊이 심어진다. 이는 성령의 사역이지 설득의 결과가 아니다.

많은 독자들이 소냐를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감상하는 것 같다. 여러 온라인 리뷰를 읽어본 결과 소냐를 구원의 주체이자 동력으로 이해하는 후기가 제법 많이 눈에 띈다. 정통 기독교 신학에서 대속은 오직 그리스도의 몫(Solus Christus)이다.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자백을 요구하지 않고 회개를 재촉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고난의 길로 갈 때 "함께 가겠다"고 말할 뿐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아닌 교회의 역할과 정확히 일치한다. 교회는 죄를 사하지 못한다. 회개하는 죄인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는 곳이다.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구원이 작동하는 자리이다. 대속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이며 동행은 교회의 역할이다. 소냐는 인간을 구원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대체나 은혜의 생산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은혜를 피할 수 없게 만드는 환경이다. 결국 소냐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 안에서 '머무를 수 있는 자리'가 어떤 모습인가"를 농밀하게 상징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일갈한다. 인간은 인간 밖에 실재한 '강력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도스토옙스키에게 인간은 구원에 있어 절대 무능력한 존재다. 그래서 그는 그의 모든 작품에서 일관되게 은혜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을 탐구했다. 노파와 그의 여동생을 잔인하게 죽인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 행동에 끊임없이 괴로워하지만 끝까지 죄책감을 느끼거나 회개하지 않는다. 범행 후 공포와 혼란, 신경증과 피해 망상을 겪지만 그것들은 윤리적 죄책감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자기 힘이나 이성, 내면의 양심이 아닌 오직 소냐의 절대적 사랑에서 무너진다. 벌을 받을 때보다 사랑받을 때 더 붕괴하는 도스토옙스키 인간관의 절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냐는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않고 라스콜리니코프의 옆에 함께 있을 뿐이다. 죄책감이나 회개로 인해 구원으로 간 게 아니라 구원의 가능성을 먼저 만났기 때문에 죄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은혜인 것이다. 신(하나님)은 그 은혜를 인간이 피하거나 거부할 수 없도록 작정하셨다. 그래서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다. 『죄와 벌』이 윤리나 도덕 소설이 아닌 '은혜 소설'로 불리는 이유다.

⑶ 영향받은 작가와 기독교

도스토옙스키는 독실한 기독교(러시아정교회) 신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진 건 아니다. 젊었을 때 벨린스키, 생시몽, 푸리에와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던 중 급진적 사회주의 모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총살 직전 차르의 특사로 구제받은 경험을 통해 인간의 불완전성과 유한성을 경험한다. 이후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보내며 신약성경을 깊이 탐독한다. 이런 과정이 도스토옙스키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원인으로 분석된다. 산상수훈 정도의 도덕적 기독교에 머문 톨스토이와 달리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십자가와 부활을 온전히 붙잡았다는 점에서 그의 신앙은 정통 기독교에 머물러 있다.

아이러니한 건 도스토옙스키에게 영향을 받은 사상가 중 반기독교인이 수두룩하다는 점이다. 니체, 사르트르, 프로이트와 같은 이들은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거나 신을 부정한 사람들이다. "그는 내가 무언가를 배운 유일한 심리학자다."라고 도스토옙스키를 치켜세운 프리드리히 니체는 동시에 "신은 죽었다."를 외쳤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역설적 문장을 차용한 장 폴 사르트르는 본질에 앞서야만 하는 실존적 인간론을 설파했다. 도스토옙스키를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꼽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죄의 기준을 신이 아닌 인간 내면의 심리적 억압의 기제로 천착했다. 헤르만 헤세는 기독교 탈주 후의 영성을 그렸고, 앙드레 지드는 반기독교적 개인주의를 탐색했다. 흥미로운 건 이들을 통해 도스토옙스키의 기독교성이 더 강해진다는 사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믿는 자리에서' 인간을 쓰지 않고 '믿음이 무너지는 자리까지' 인간을 데려간 뒤 거기서도 예수를 놓지 않았던 작가였다. 니체, 카뮈, 사르트르는 인간의 죄·고통·자유를 끝까지 밀어붙였지만 '은혜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이라는 도스토옙스키의 통찰 앞에서는 멈춰 섰다. "인간은 스스로 책임질 수 있을 만큼 강한가."라는 질문 앞에 도스토옙스키의 대답은 일관된다. "아니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합니다." 철학적으로 불편하고 윤리적으로 모욕적인 답변이겠지만 소설이라는 장르 안에서 답변했기 때문에 그 일관됨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 문학의 힘이 있다.

소설의 힘은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데 있다. 이야기로 그저 보여줄 뿐이다. 철학자와 심리학자는 '전제->논리->결론'이나 '개념->체계->설명'의 방식으로 논증한다. 논박이 가능하고 회피가 가능하다. 그러나 소설은 전제와 결론보다 과정과 경험으로 말한다. 라스콜리니코프, 소냐, 라주미힌, 스비드리가일로프 등은 사유의 결과물이 아니라 삶의 실험체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모두 '신 없이는 못 버티는 인간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단 한 번도 신 존재 증명을 하지 않았다. 신이 없는 인간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인간의 선의를 끝까지 시험한다. 자유를 무한히 부여하고 책임을 전부 떠넘긴다. 그리고 질문한다.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독자는 이 질문에서 도망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 인간으로 살아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의 기독교는 '설득'이 아니라 '피할 수 없음'이 된다. 정리하자면 도스토옙스키는 신이 없으면 '끝까지 살 수 없다'는 것을 서사로 증언해낸 것이다.

⑷ 도체스토옙스키의 시간, 그리고 톨스토이

『죄와 벌』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시간이 굉장히 압축되어 있다는 점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오랫동안 읽었는데ㅡ길고 무거운데ㅡ실제 소설 속에서 이야기가 흐르는 시간은 아주 짧다. 소설 시작부터 결말까지 1년 남짓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기 전까지는 몇 달밖에 되지 않는다. 더욱이 핵심 사건들은 2-3개월 안에 몰려 있다. 살인 전후의 핵심 드라마는 2주 정도다. 즉 노파 살인, 정신 혼미, 경찰 조사, 소냐와의 만남, 인물들 간의 심리전, 스비드리가일로프 사건, 자백 등등. 소설 전체를 덮고 있는 이 모든 게 약 10일~2주 안팎에 벌어진다. 더욱이 재판 과정은 생략되었고 시베리아 유형은 에필로그 몇 장으로 요약되었다. 정리하면 『죄와 벌』은 분명 긴 소설이지만 이야기 속 시간은 짧고 인간의 내면만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난 소설이다.

이는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백치』도 실제 서사 기간은 1년에 불과하며 주요 사건은 특정 시기에 집중되었다. 가장 충격적인 작품 『악령』도 이야기가 흐른 시간은 수개월이다. 이 소설 또한 결정적 며칠에 모든 사건이 폭발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인물들 간의 설교와 토론이 많지만 사건 자체는 매우 빠르고 흐른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야기 전체가 1년 안에 이뤄지지만 핵심 서사는 부친 살해 전후 며칠에 불과하다. 이는 톨스토이의 작품들과 명백히 대조되는 지점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결혼-불륜-파국'으로 이어지는 긴 세월을 다룬다.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 전쟁 초기부터 몰락까지 약 15년의 역사를 관통한다. 『부활』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장기적 회고 구조를 갖는다. 이러한 차이는 두 작가의 소설의 결이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시간의 단위는 대화다. 그의 소설은 상황이나 배경 묘사가 축소되어 있다. 정확히 말해 의식과 대화가 배경을 압도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을 항상 떠든다. 이에 대해 미하일 바흐친은 '폴리포니(polyphony) 서사'로 정의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작가의 목소리가 중심이 되지 않고 여러 인물의 말이 서로 충돌하면서 의미가 만들어지는 구조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 세계관에서 시간의 흐름은 중요하지 않다. 결정적 순간이 중요하고 이를 따라가는 인간의 의식이 시간의 압축성을 주도해낸다. 반면 톨스토이에게 시간은 일상과 반복이다. 순간이 아닌 변화와 축적의 시간이다. 톨스토이의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인간은 단 한순간에 드러나고 톨스토이의 인간은 시간 속에서 형성된다.

내가 청소년기나 이십 대 때에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면 지금보다 더 매료되었을 것이다. 아직 인생의 희로애락을 다 겪어보지 못한 청춘의 시기는 많은 걸 모르지만 동시에 모든 질문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시간대다. 이 시기는 지혜의 응축과 깨달음의 밀도보다는 직감이 우선한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나 이반과 같은 인물에 더 몰입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삶은 변하기 마련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부모의 늙음을 보면 '왜 살아야 하는가'보다 '어떻게 오늘을 견디는가'가 더 중요한 주제가 된다. 더욱이 아이를 키우는 순간 톨스토이는 더 넓게 열린다. 아이는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서서히 자라고 배우고 멀어진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는 거의 없는 경험이다. 반면 톨스토이에게는 핵심 주제다. 내가 톨스토이의 소설에 더 깊이 감동받는 이유이다.

# 에필로그 : 4대 장편으로 향하는 관문

나는 이미 여러 지면에서 도스토옙스키보다 톨스토이가 더 탁월한 소설가임을 수차례 주장해왔다. 지금도 그 견해에는 변함이 없다. 인간은 단 한순간에 드러난다고 보는 도스토옙스키적 극단보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는 톨스토이적 일상이 보편 인간의 경험과 성찰에 더 부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내 입장은 내가 소설의 배경, 상황 전개, 심리의 축적, 인간이 환경 속에서 변해가는 과정 등을 주목하는 내 소설관의 기준에 깊이 종속되어 있다. 소설을 삶의 형식으로 읽어내는 나 같은 독자에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여전히 불편한 텍스트로 남는다. 하지만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 불편하긴 하지만 꼭 읽어야 하는 대상으로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시각이 변모했다는 점이다. 이는 과거 그의 소설에서 내가 붙잡지 못했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라는 측면에서의 독서를 리셋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제 <프롤로그>로 돌아가자. 나는 이 글을 열면서 "최근 내 주변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여러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배경이 되어 『죄와 벌』을 다시 집어 들었음을 고백했다. 대략 50년의 삶의 경험을 통해 얻은 내 통찰은 인간은 오류가 많고 추악하며 불완전한 존재라는 깨달음을 여실히 축적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독교 신앙은 '인간은 사랑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당위를 지시한다. 서로 부딪히는 진실과 당위의 혼합 속에서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는 건강한 인간론을 다듬어보길 원했다. 이에 마냥 "인간을 사랑하라."라는 교훈을 주기보다 "그런 인간을 보고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가혹하고 정직한 질문을 던지는 도스토옙스키를 손에 들게 된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 중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었다. 이번에 『죄와 벌』을 재독했으니 이제 순서대로 『백치』 - 『악령』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재독) 순으로 4대 장편을 독파할 예정이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역동적으로 관통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대작들을 통해 더 깊고 풍성한 인간론의 백미를 탐구해 보려 한다. 그래서 나의 지향은 "인간은 혐오스러울 만큼 타락했지만, 결국 바로 그 자리에서만 은혜가 의미를 갖는다."라는 궁극의 깨달음에 더 감동적으로 도달하는 것이다. 『백치』와 『악령』은 기존 소장본인 열린책들본으로 읽을 것이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만 김연경 번역의 민음사본으로 읽을 것이다. 번역에 대한 사유는 나중에 각 책들의 리뷰에서 밝히겠다.

서평을 마무리하자. 나는 옳다는 확신에 가득 차 타인을 무시하고 배제하고 끝내 '죽여버리는' 라스콜리니코프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이 있다. 그런데 정작 『죄와 벌』을 읽는 동안 "네가 혐오하는 그 인간의 씨앗이 사실은 네 안에도 있다"라는 불편한 속삭임이 끊임없이 귓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이 긴 여정(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독파)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에게 간절히 울부짖는다. 하나님!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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