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최근까지 고 이어령 교수의 저작을 두루 탐독했다. 그중 먼저 하늘로 떠난 딸을 그리워하며 쓴 편지글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두 딸을 키우는 나에게 공감이 될만한 부분이 많아 여러 부분에서 실제적인 도전을 받았기 때문이다. 딸을 향한 그리움을 표출하는 감성도 좋았지만 딸에게 보내는 편지지에 넘실거리는 아버지의 거대한 지성이 인상적이었다. 니체, 사르트르, 보부아르, 데카르트, 볼테르 등 여러 인문학적 토막을 인용해 고인 자신의 철학을 딸에게 질문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하나의 지적(知的) 로망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내 인생 최고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딸과 함께 읽고 토론해 보는 것이다. 안나의 선택을 진정한 사랑의 용기로 볼 것인지 순간 욕망에 빠진 불륜의 비극으로 볼 것인지. 톨스토이의 작품 속 분신인 레빈의 삶과 사랑을 현시대에서 어떻게 리뷰할 것인지. 삶과 죽음을 동일선상에서 천착한 톨스토이의 사상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먼저 쓰인 또 다른 걸작 『전쟁과 평화』와 비교했을 때 어떤 소설이 더 뛰어난 작품인지 등. 나눠보고 싶은 얘기가 한둘이 아니다.

이런 내 로망을 교육적 욕심이나 지적 허례의식의 발로로 보지 않기 바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을 함께 읽고 서로 간 견해의 차이를 나눠보기 위함, 그 자체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딸과 함께 스키를 타거나 여행을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빠가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고전문학을 딸이 함께 읽기를 바라는 동시에 읽은 후 자기만의 사유 속에서 아빠와는 분명히 다를 딸만의 감상을 경청해 보기 위함이다. 삶과 사랑, 연애와 결혼, 정치와 예술, 노동과 경제 등 소설 『안나 카레니나』가 다루는 모든 영역에서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작년 초 나에게 영향을 준 양서만 모아놓은 책장 하나를 큰딸 방으로 옮겼다. 본래 거실에 있던 것을 아내의 피아노 레슨을 이유로 마땅히 옮길 데가 없어 딸 방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그 책장에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찬연한 작품들, 알베르 카뮈 전집, 빅토르 위고의 소설들, 폴 존슨의 인문학 저작들, 이근식 교수의 자유주의 사상총서 5권,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시리즈 등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찬탄스러운 책들로 가득 차 있다. 내 딸이 그 책장에 꽂힌 책만 읽을 수 있다면, 그래서 나와 토론하고 서로 간의 다른 생각을 나눌 수 있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 아빠일까, 생각했다. 

가끔 훗날 딸에게 물려줄 유산이 무엇일지 생각한다. 얼마 안 되는 돈. 오랜 시간 켜켜이 쌓여 형성된 성격과 기질.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가풍 정도가 있겠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내가 수십 년에 걸쳐 읽은 거대한 책 더미를 딸에게 물려주고 싶다. 톨스토이와 헤밍웨이, 카뮈와 위고의 세계를 유산으로 남기고 싶다. 서울 도심의 어느 대형서점 입구에 쓰인 글귀처럼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 비전이 내 가슴을 웅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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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23-02-2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붉은돼지입니다. 자칭 전집선집특별판한정판 수집가입니다.ㅎㅎㅎ
서가에 꽂힌 1~7권 전집이 무엇인가? 처음보는 것 같아서 찾아보니
위에 말씀하신대로 까뮈 전집이네요...전집수집가로서 부끄럽게도 처음 보는 물건이라..
제가 뭐 까뮈를 좋아하지 않지만 아니 사실 별 관심이 없지만...저 전집은 탐나는군요
일단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한권 한권씩 구입해야겠습니다. 혹시 그사이에 절판되지는 않겠죻ㅎㅎ

다윗 2023-02-21 11:01   좋아요 0 | URL
붉은돼지님 반갑습니다. 전집 수집가라 하시니 멋집니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카뮈 전집(특별판)이 맞습니다. 당시 마누라 눈치 보면서 질렀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합니다. 관련 블로그 포스팅 참고 바랍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https://blog.naver.com/gilsamo/90195533140/

붉은돼지 2023-02-21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가지 더.. ‘거대한 책더미를 딸에게 물려주고 싶다‘ 고 하셨는데 저하고 똑 같은 생각이십니다요. ㅋㅋㅋ 하지만 제 딸은 책에는 전현 관심이 없다는 것이 함정 ㅜㅜ 제가 나름 괜찮은 귀한 책들 많이 모아 놓았거든요..몇 번 이야기했는데 전혀 관심무...ㅜㅜ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