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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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큰 사랑을 받는 작가들이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무라카미 하루키, 히가시노 게이고, 파울로 코엘료와 같은 작가들 말이다. 이들은 한국에서 유독 큰 사랑을 받는 해외 작가들이다. 국내 작가보다 더 큰 사랑을 받는 것 같다. 그중 하루키의 인기는 독보적이다. 거대한 선인세(先印稅)가 이를 증명한다. 선인세란 말 그대로 미리 주는 인세인데 출판사에서 총 판매량을 예상하고 주는 것이다. 2009년 출간작 『1Q84』의 선인세가 10억이라는 얘기가 정설처럼 돌았다. 그만큼 국내에서 믿고 보는 작가라는 뜻이다. 그 하루키가 6년 만의 신작을 들고 왔다.

신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지난 2017년 출간된 『기사단장 죽이기』 이후 6년 만의 장편소설이다. 1980년 발표한 이래 책으로 출간하지 못한 중편소설을 다시 손보고 확장시켜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작가가 청년 시절에 쓴 작품을 43년이 지나 세계적인 작가가 된 시점에서 완성시켰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펜을 든 시점이 2020년이다. 코로나19의 창궐로 전 세계의 벽이 세워진 때였다. 작가는 왜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자신의 미완성작을 손봐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총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열일곱 살의 남자 고교생 '나'가 한 살 아래 여고생 '너'를 좋아하면서부터 시작한다. 둘은 고등학생 에세이 대회 시상식에서 3등과 4등으로 처음 만난다. 고등학교 2학년 소년인 '나'와 1학년 소녀인 '너'의 이야기다. 너(소녀)는 나(소년)에게 "진짜 내가 사는 곳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이고, 지금 현실의 존재는 "흘러가는 그림자" 같은 대역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느 날 돌연 사라져버린다. '나'는 좋아했던 소녀를 찾아 도시로 간다. 이후 소설의 시점은 벽 안팎이 교차되며 연신 판타지적 이야기가 쏟아진다.

2부에서는 중년이 된 현실의 '나'를 그린다. 오랜 시간이 흘러 중년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도시에 사는 소녀를 잊지 못한다. 출판사 일을 그만두고 지방의 작은 도서관으로 이직한다. 그곳에서 도서관장의 일을 하며 전임 관장인 고야스, 사서인 소에다, 매일 도서관에서 엄청난 속독술로 책을 읽는 소년 M, 역 앞 커피숍을 운영하는 여성과 교류한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이곳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니면 자신이 실제인지 그림자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이 모호한 '나'의 의식 가운데서 끊임없이 판타지적인 일이 펼쳐지고 이야기는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듯 보인다.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 머릿속에서 감상을 정리하느라 혼쭐이 났다. 책을 읽은 후 되도록 남의 리뷰를 들여다보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인터넷을 검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소설은 꽤 넓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끝맺는데 이런 식의 열린 결말을 좋아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어떻게 감상하고 정리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특별한 건 없었다. 많은 독자들이 '벽'의 의미나 옐로 서브마린 소년(M)의 정체에 관심을 갖는 것 같았다. 내 감상은 달랐다. 나는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에 주목했다. '나'가 '너'를 그리워한다는 걸 핑계로 결국 '진짜 나'를 찾는 희미하면서도 열정적인 자아 찾기의 여정으로 소설을 이해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하나의 특별한 사건이나 경험이 평생에 걸쳐 영향을 줄 때가 있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나도 그런 기억이 몇 있다. 초등학교 시절 안양천 또랑에서 친구들과 팬티만 입고 가재를 잡았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당시 우리의 또랑 놀이를 지켜보던 어느 어른이 나보고 "귀엽다"고 격려해 주던 당시 그분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3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그 강렬한 기억에 의존해 내 자존감의 일부분이 만들어졌다. 소설 속 '나'는 돌연 소녀가 사라진 후 몇 번이고 기억을 재생하며 그 도시에 갈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곳에서 진짜 소녀를 만날 수 있기를 원했다. 이후 현실과 관념의 세계를 수시로 오가는 듯한 정신없는 이야기 전개는 모두 '나'에게 각인된 '너'를 찾는 갈망이었다. 전임 관장 고야스와의 신비한 접촉과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소년 M과의 소통이 나는 모두 '나'와 '너'와의 관계 속에서 읽혔다.

어쩌면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작가 하루키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 작품일지 모른다. 40년이 지난 작품을 일흔이 넘은 노 작가가 다시 꺼내들어 손보고자 한 건 창작의 부담이나 한계에 직면한 하루키의 자기 위안적 자아 찾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하루키의 문장은 여전히 유려하다. 하지만 평행 이동 식의 억지 같은 스토리 전개 때문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비록 만족스럽진 않지만 안 쓰고 내버려 두면 후회할 것 같아 인생의 느지막에 겨우 쓴 듯한 느낌을 받았다. 노년의 하루키가 3040 시절의 자기 자신에게 훈수 두는 것 같기도 했다. 특히 작가 후기에서 "작가가 일생 동안 쓸 수 있는 이야기는 한정적이고 계속 변주를 줄 뿐"이라는 보르헤스 말을 인용하는 거 보면 하루키 스스로 슬슬 창작에 한계를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너무 많은 얘기를 하려고 한 것 같다. 소설 초반부터 본체와 그림자 얘기가 나오고 분리와 구별의 개념이 나와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를 떠올리기도 했다. 심오한 철학적 존재론이나 신학적 비유가 있지는 않을까 사유했다. 결론적으로 무의미한 천착이었다.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유령으로 등장하는 고야스, 도시로 가길 원하는 소년 M 모두 주인공 '나'의 관념의 세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는 관념과 상징으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하루키의 과거였고 내면이었고 글쓰기였다.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언제부턴가 하루키 소설에 집중하기 힘들어졌다. 하루키가 변한 것인지 내가 변한 것인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나에게 『1Q84』 이후의 하루키는 예전과는 달랐다. 과거에는 항상 중2병이 든 것 같은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에 몰입이 잘 됐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아의 고독과 존재에 집착스럽게 함몰되어 있는 인물들에 공감이 잘 안됐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쟤는 왜 저러지. 그런데 그게 왜 문제가 되는데 등등. 이런 딴지 심성이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 감상을 옥죄었다. 하루키 소설을 읽을 때마다 드는 소설 구조의 기시감 같은 것도 사실상 일상의 나열이나 목적 없이 흘러가는 서사와 다름없었다. 분명 다른 소설인데 매번 엇비슷한 소설을 읽는 느낌이랄까.

나는 10년 전 하루키의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극찬하며 '하루키의 나'에 대해 내 나름의 해석을 덧붙인 바 있다. 당시 하루키의 '나'를 세계 속의 나가 아닌 자아 속의 나로 규명했다. 하루키의 '나'는 아무런 목적 없이 무의미한 것에 지나친 열정을 보임으로써 어떤 의미나 목적을 갖고 있는 '너'에 대한 우월성을 확보하는 자세에 존재하는 초월론적 자기의식이라고 고찰했다. '나' 외의 객관적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나'의 내용에 지나지 않고 타인의 자아도 '나'가 의식한 내용과 나란히 주어진 것에 불과하다며 하루키 표 주인공에 깊은 공감과 매력을 피력한 바 있다. 하지만 지금은 견해가 달라졌다. 일본 경제 황금기 때 백인 흉내 내며 문화 향유하던 권태스러운 시대상에 구속된 고독하고 우울한 인물상 이상 이하도 아닌 것이다. 위대한 작가일수록 작품 속 '나'는 우울하거나 병들어 있지 않다.

내가 하루키를 높게 평가했던 건 문장 탓이 크다. 스토리와 메시지는 좋으나 오직 문장 때문에 싫어했던 김연수와는 완전히 반대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문장은 훌륭한데 비해 스토리는 정말 빈약하다. 이런 점에서 과거 내 리뷰에서 하루키에 대한 긍정은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 이런 인식은 이번 소설에서 강하게 작용했다. 작가는 글쓰기의 물리적인 양과 노력에서 성실해야 하지만 작품 안의 서사와 플롯에서도 성실해야 한다. 이러한 작가의 내·외재적 성실함이 좋은 작품을 만든다. 아무리 판타지라 해도 서사의 인과성과 합목적성이 침해돼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뜬금없는 사건으로 다른 사건을 대체하고야 마는 하루키 식 이야기 구조는 피로감을 준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ana)'의 잦은 출현이랄까.

독자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다. 근데 호와 불호 사이의 온도가 다르다. 호는 대부분 미지근한데 불호는 거의 뜨겁다. 인터넷 리뷰에서도 호평은 고만고만한데 악평은 나름나름이다. 하루키 표 상징은 이 소설에서도 반복된다. 사랑과 그림자, 도서관, 재즈와 클래식, 맥주와 와인, 파스타와 샐러드 등 하루키 작품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이야기 곳곳에 출몰한다. 전에 비해 옅게 드러날 뿐이다. 그리고 섹스 신은 아예 없다. 그간 하루키를 관습적으로 좋아했던 독자들에게는 나쁘지 않게 읽힐 것 같다. 그러나 나에게는 무의미한 피로를 주었다. 길게도 썼다. 하루키 소설이 이렇게 지루한 적은 처음이다. 작가로서 할 얘기가 많았는지 예전엔 없던 '작가 후기'까지 보탰다. 특별한 내용은 없다.

하루키는 1949년생으로 올해 나이 일흔넷이다. 매년 노벨문학상 일 순위 후보로 거론된다. 노벨문학상의 최근 트렌드가 특정 작품이 아닌 작가의 전 문학 일생에 주는 헌사적 성격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써온 하루키만큼 노벨상에 가까운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노년으로 갈수록 소설에 힘이 빠지는 건 아쉽다. 이런 맥락에서 하루키와 나 사이에 거대한 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 건 이번 신간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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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문미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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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상 수상작은 거의 찾아보는 편이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세계문학상은 재미있고 술술 잘 읽히며 스토리가 탄탄한 소설이 주로 선정된다. 초기 수상작인 김별아의 『미실』은 너무 재미있고 흡입력이 있어 드라마 <선덕여왕>의 탄생에 영감을 주었다.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 백영옥의 『스타일』, 정유정의 『내 심장을 쏴라』는 각기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어 대중으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문학의 주요한 기능 중 하나가 '재미'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세계문학상은 대중이 좋아할 만한 보편의 문학적 기호를 담아내고 걸러내는 관문의 역할을 잘 수행해왔다. 내가 세계문학상 수상작을 탐독하는 이유다.

제19회 세계문학상은 문미순 작가의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이 수상했다. 소설은 무거운 주제를 다룬다. 전 세계에서 유례없이 빠른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이 나라 대한민국의 서민 가족의 이야기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부모 간병의 문제를 해학적인 이야기로 풀어냈다. 묵직한 주제가 흥미로운 인물과 사건을 통해 더 진지하게 고찰하게끔 만든다. 독자는 웃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오금이 저리기도 하면서 진지한 주제를 관통한다. 작가의 탁월함이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아파트 옆집에 사는 중년 여성 명주와 젊은 청년 준성이 각자 치매와 뇌졸중으로 쓰러진 부모를 홀로 감당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이와 성별과 상황이 다르지만 둘의 중요한 공통점은 경제력이 여의치 않은 채 홀로 노부모의 간병을 책임진다는 것이다. 남편과 이혼하고 13평 임대 아파트에 홀로 사는 모친을 간병하는 50대 여성 명주의 삶은 비루하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대리운전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26세 청년 준성의 삶도 박복하긴 마찬가지다. 소설은 두 화자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되다가 어느 결정적 시점에서 만나 이야기의 절정을 이룬다.

소설의 이야기는 충격적이고 엽기적으로 흘러간다. 명주는 엄마의 연금 때문에 엄마의 죽음을 숨긴다. 엄마의 시신을 아마포로 둘러싸 미라로 만들어 작은방에 모신다. 준성도 마찬가지다. 욕실에서 넘어져 사망한 아버지의 시체를 어떻게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른다. 결국 명주의 도움으로 사체은닉 공범이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의 범죄가 그저 '죄'로만 보이지 않는다는데 이 소설의 핵심이 있다. 작가의 문제 제기는 간명하다. 치매와 뇌졸중과 같은 노인 중증 환자의 간병을 오직 가족에게 일임하는 게 옳으냐, 하는 것이다. 결코 남일 같지 않고 남일이 되어서도 안 되는 이 거대한 사회적 문제를 작가는 흥미진진한 픽션으로 풀어냈다.

명주와 준성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이지만 보다 궁극의 화자는 명주다. 시간 순서상으로 먼저 범행(?)을 일으켰고 자신의 말과 행동에 자의식이 강하게 묻어 있는 인물이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남동생의 이른 죽음, 이혼과 화상 사고 장애 등 어느 누구보다 기구한 삶을 살았지만 그 처절한 현실에 짓눌리지는 않는다. 자신과 엇비슷한 처지의 준성을 설득해 '공범'으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명주라는 캐릭터를 적극적 나르시시즘에 빠진 단순하고 엽기적인 돌아이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엄마의 시체를 은닉하면서 "이건 세상이 내게 준 모욕과 멸시에 대한 보상이야. 이 세상이 내게 갚아야 할 빚이야. 사죄야"라며 묵직한 한방을 날릴 줄 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명주의 일갈은 작가의 말을 대신 전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이 소설은 전통적인 소설의 구조, 즉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순서를 충실히 따른다. 엄마를 미라로 만든 명주의 비밀이 들킬랑 말랑하는 이야기로 전개되면서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특히 정체불명의 남자가 명주의 집으로 전화해 "당신이 저지른 죄를 알고 있다"며 협박하는 일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면서 소설의 성격은 미스터리로 전환되는 듯하다. 그렇기에 결말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하며 읽는 묘미가 제법이다. 부양과 간병이라는 우리 사회의 무거운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되 누구에게나 마음속 깊은 누추한 양심 어딘가에 한 번쯤 상상해 봤을 조악한 인간성을 그려냈다는 것에 이 소설의 생명력이 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다. 더욱이 치매와 같은 병은 아무리 효자라 해도 감당하기 힘든 인간성 너머의 시험 거리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젊은이보다 노인이 많은 고령화 사회가 되어가면서 우리 사회도 간병과 부양의 문제를 세밀하고 진지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명주와 준성처럼 부모의 시신을 유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중요한 건 그 지옥 같은 일상에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준성이 술 취한 아버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상상으로 아버지를 때려죽이고, 그 죄책감에 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장면은 우리에게 많은 걸 시사한다. 부양과 간병의 문제에 신음하는 우리 주변의 여러 사람들의 불편하고 내밀한 '진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첫 장편이다. 작가 자신의 실제 체험이 집필에 토대가 되었다 한다. 코로나 시기 때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을 75일 동안 간병하면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 작가의 암묵지가 소설 속 명주와 준성의 특질에 투영된 듯하다. 간병 일 자체의 디테일은 모르겠으나 노부모 간병을 어려운 조건에서 홀로 떠안은 사람의 존재론적 고뇌와 감정이 잘 살아있다. 소설을 읽으며 다시 한번 부양과 간병의 문제를 천착했다. 나에게도 아직까지는 건강하시지만 곧 팔순을 앞두고 계신 아버지와 허리가 좋지 않아 주기적으로 어려움을 호소하는 어머니가 계시다. 그렇기에 외아들로서 많은 사유가 남았다. 개인의 책임인지 국가의 과제인지 논하기 앞서 인간성의 본질과 상식이 어디에 있는지를 새삼 곱씹었다. 이 무거운 메시지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낸 작가의 연금술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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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꿈
손보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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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딸을 키우고 있다. 큰 딸의 사춘기 진입이 예사롭지 않다. 과거에 비해 말수가 줄었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며 짜증을 많이 낸다는 걸 느낀다. 예전 같았으면 꿀밤을 한대 갈겨주었을 텐데 이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흔히 여자아이의 사춘기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최선이라고 한다. 어떤 의미인지 알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고민과 공부 없이 지나치기에는 아빠로서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책 몇 권을 골랐다. 우리 시대 가장 잘나가는 젊은 작가 손보미의 신작 『사랑의 꿈』은 그렇게 해서 내 손에 들어왔다.

『사랑의 꿈』은 단편 「불장난」으로 작년에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손보미 작가의 연작소설이다. 6개의 단편이 미세한 연결로 이어져 있고 동시에 완전히 독립된 이야기로 배치되었다. 표제작 「사랑의 꿈」을 제외하고는 전부 10대 초중반 여자아이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 그래서인지 각각의 화자들은 십 대 소녀의 기분과 감정을 잘 대변한다. 그 나이대의 관찰과 생각으로 타자와 세계를 파악하는 모습이 흥미롭게 읽힌다.

여섯 편의 단편이 공유하는 미세한 연결고리는 '정우맨션'이라는 아파트다. 사실 이 소설이 왜 '연작소설'로 분류될까 의문했다. 사건 연관성이 있는 단편을 모아 하나의 총체적인 이야기를 완성하면서 장편의 분량을 구축한 소설을 통상 연작소설로 부르는데 이 소설은 각 단편마다의 연결고리가 극히 희박하다. 그나마 연결고리가 있다면 정우맨션이다. 어렸을 때 각인된 특정 장소에 대한 기억은 유달리 오래간다. 나도 35년 전 초등학교 친구들과 토요일마다 가재를 잡았던 안양유원지를 생생히 기억한다. 또 평일 방과 후 '더블 드래곤'이라는 게임을 했던 관악역 앞 오락실을 결코 잊지 못한다. 유년 시절의 장소는 당시의 추억을 고스란히 정지 화면으로 이미지화하여 뇌에 아로새긴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 소설에서 정우맨션이 갖는 독특한 위치다.

『사랑의 꿈』에 등장하는 10대 소녀 중 일부는 가정의 파괴를 겪는다. 부모가 이혼(「불장난」)했거나 삼촌 집에서 길러지거나(「밤이 지나면」)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으려 하거나(「사랑의 꿈」) 등 상처가 있는 가정들이 배치된다. 가족의 분열이야말로 어린 시절에 겪을 수 있는 가장 참혹한 존재론적 균열이다. 아이는 그 균열을 통해 망가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의 극복을 통해 슈퍼맨이 되기도 한다. 친구를 향한 동경과 첫사랑의 발견 등 그 시절 여성으로서 외부 세계를 날 선 시선으로 바라보고 경험하게 하는 동인도 소설은 다룬다다. 아프기도 하고 눈부시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한 유년 시절의 불가해함을 작가는 노련한 필치로 그려냈다.

개인적으로 수록작 중 「불장난」에 유독 많은 감정이 이입되었다. 이상문학상 수상이라는 외연에 영향을 받은 건 아니다. 나도 어렸을 때 아파트 옥상에서 불장난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기억을 절대 잊지 못한다. 다만 소설과 다른 점은 해피엔딩이냐 새드엔딩이냐의 차이다. 소설에서 아이는 아버지의 라이터로 옥상에 올라가 종이를 태운다. 훗날 중학생이 되어 과거의 그 경험을 바탕으로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는다. 작가의 경험이 투영된 장면이라 한다. 하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 하지도 않은 남의 이불을 태웠다는 오해와 모략을 받아 소위 개 패듯이 맞았던 기억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상처로 남아 있다. 소설 속 아이는 불장난을 통해 자신을 괴롭힌 수치심과 굴욕감, 외로움을 연소시켰을지 몰라도 과거의 나는 단순한 불장난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른들로부터 확증편향을 당해 이웃의 이불을 태워버린 방화범이 되었다. 「불장난」을 읽는 내내 그때의 억울한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첫사랑」과 「이사」는 과외 선생과의 관계를 통해 겪게 되는 주인공의 성장통을 담았다. 「첫사랑」은 군 입대를 앞둔 대학생 오빠가, 「이사」는 주인공과 한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중학생 언니가 과외 선생으로 등장한다. 부모 외에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느낀 주인공의 심리묘사가 탁월하다. 처음 겪은 타인을 향한 신비로운 감정은 결국 비루한 진실 앞에서 폭파되고 해체되어 다른 형태의 감정으로 양태된다. 세상 모든 아이가 겪는 고통,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것을 극복해 내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참 나'를 발견하고 성장하는 다양한 성장통의 모습이 1인칭 시점의 발군의 묘사로 그려졌다.

소설의 막장을 덮고 많은 생각을 했다. "연약하지만 다채롭고 위태롭지만 맹렬한 세계 속에 포함되어"(192쪽)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작가의 표현대로 사춘기는 위태롭지만 맹렬한 세계다. 기성세대로서 십 대 시기의 특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오직 위태로움에 대한 방어기제로 그 시절을 재단하려 하지 않았는지 자문했다. 서두에 언급한 대로 이 소설은 딸아이의 사춘기 입성에 맞춰 아빠로서 그 시절 여자아이들의 심리와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집어 든 책이다. 최근 부쩍 말수가 줄고 가끔 내뱉는 말조차도 엄마와의 신경전에 대부분 소비하는 아이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연약하면서도 다채롭고 위태로우면서도 맹렬한 세계에 진입되고 있는 내 딸의 여정이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주기를 기대한다. 엄청난 성장과 함께.

서평을 정리하자. 반추해 보니 너무 감상적인 서평이 되었다. 앞서 고백한 내 진지한 현실이 반영된 탓일 게다. 픽션이 논픽션보다 진실되다는 평소의 내 독서 철학을 거뜬히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손보미의 소설 『사랑의 꿈』은 압도적이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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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파친코 1~2 - 전2권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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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톨스토이를 읽을 때 러시아인이 되고 디킨스를 읽을 때 영국인이 되며 헤밍웨이를 읽을 때 약간 미친 남성 미국인이 되는 것처럼,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모든 독자들을 한국인으로 만들고 싶다” - 작가 이민진

장편소설 『파친코』의 작가 이민진이 모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저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소위 뻑 갔다. 작가의 말이 내가 소설을 읽을 때 받는 감동의 본질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그랬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며 러시아 귀족이 되었고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으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시골 소년이 되었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은 나를 일본 전국시대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었고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참혹한 내전에 번민하는 스페인 민중이 되게 했다. 바로 이것이 소설의 힘이자 문학의 기능이다. 그리고 베스트셀러 『파친코』가 쓰인 이유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소설 『파친코』는 1910년 한일합방부터 1989년 일본 버블경제 붕괴까지 약 80년의 현대사를 4대에 걸친 재일교포 가족의 삶을 통해 관통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선자 가족의 치열한 삶의 이야기인 동시에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대학살, 나가사키 원폭 투하, 한국전쟁, 80년 버블경제 붕괴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족적이기도 하다. 참혹한 시대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 선배 세대의 대를 잇는 고군분투가 감동적으로 읽힌다. 전쟁과 가난, 차별과 혐오에 맞서 싸운 선자 가족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든다.

스포일러 때문에 구체적인 줄거리는 다루지 않겠다. 부산 영도에서 가난하게 살던 한 여성(선자)이 두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결혼을 해서 어떤 계기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 차별과 혐오에 맞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스토리다. 2권으로 구성된 소설은 1권에 선자의 삶과 사랑에 집중한 반면 2권은 보다 다양한 인물들을 여러 각도에 훑는 방식을 취한다. 1권의 묘사가 구체적이고 느린 시간 흐름을 택했다면 2권은 대략적이고 중반부터 빠른 시간 흐름이 특색이다. 아래 세대로 내려갈수록 점점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건 이 소설이 가진 독특한 개성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는 데 30년이 걸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선자의 손자 솔로몬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소설의 초고 『모국(motherland)』은 자이니치(재일교포) 3세를 주인공으로 했지만 결국 한 챕터만 남기고 모두 버려야 했다. 작가의 고백대로라면 "큰 이야기를 담을 수 없었고 그에 따라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견 공감한다. 하지만 솔로몬의 시대가 할머니 선자의 시대보다 크기와 무게가 부족했다고 보지 않는다. 한 시대가 갖는 의미와 가치란 각기 동등하고 평등하다. 그런 차원에서 뒷부분에도 더 많은 할애를 하여 소설을 3권 이상으로 출간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분량과 감동이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역사를 다룬 소설에는 경우에 따라 거대 서사 자체가 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과 평화』나 『레미제라블』처럼 말이다.

『파친코』는 묵직한 여러 테마가 겹쳐져 읽히는 소설이다. 여성의 위대함, 역사의 도도함, 민족의 긍지와 투혼, 가족의 찬란함 등 굵직한 여러 읽기 코드가 작동한다. 이 소설이 감동적인 이유는 이러한 거대 테마를 다루면서도 그것에 짓눌리지 않는 단단한 개인의 이야기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소설을 읽을 때면 시대에 짓눌린 인물이 나오기 마련인데 선자를 위시한 『파친코』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각자의 캐릭터성이 완전히 살아있다. 명징하고 생생하다. 선자의 인생을 뒤흔든 악역 같은 캐릭터 고한수도 자기 내면에 치열하고 남루한 번민을 가진 복잡한 인물로서 작품 속에서 그만의 개성이 완전히 살아 있다. 인물이 시대의 산물로서가 아닌 각 개인으로서 살아 숨 쉬는 이야기. 그게 바로 소설 『파친코』의 힘이다.

제목 '파친코'는 탁월한 작명이다.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 '파친코'가 어떤 의미를 상징하는지 알게 되면 무언가 묵직한 불편함이 엄습해온다. 파친코는 당시 일본에서 차별받고 멸시받던 재일조선인의 삶의 터전이다. 천한 직업이란 인식 탓으로 정작 일본인은 기피했던 것을 일제 패망 뒤 먹고사는 걸 해결하기 위해 재일교포들이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었다. 파친코는 재일한인들의 삶이자 반전이자 돌파구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냉대와 멸시를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을 통해 응수했고 극복했다. 요컨대 제목 '파친코'는 이국땅에서 김치 냄새난다는 놀림을 당하면서 식당 일로 생계를 꾸리며 자식을 키워낸 선자와 파친코 사업을 통해 부와 권력을 쟁취해낸 모자수·솔로몬 부자의 치열한 역동성을 오롯이 담아내는 명제목이다.

애플tv에서 제작한 동명의 드라마는 보지 않았다. 앞으로도 보지 않을 것이다. 소설의 좋은 느낌을 굳이 망칠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원작 소설과 대결하면 백전백패한다. 나는 지금까지 원작을 능가한 영상 장르의 예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한 데 비해 인간의 감각 유한하기 그지없다. 이 무한성과 유한성 사이의 거대한 공간이 문학이 가진 힘이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설 『파친코』를 읽고 밀려든 묵직한 감동이 내 전신을 적신다. 잘 팔리는 소설은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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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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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선각자의 말대로 삶과 죽음은 매한가지일까. 삶과 죽음이 매한가지라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고 사는 것이 죽는 것인데 무얼 두려워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인간은 대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주변 지인들의 모습과 책에서 만난 수많은 인간상의 양태는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죽음을 적극적으로 즐거워 한 이는 없다. 인간에게 죽음은 쿨하지 않다. 죽음은 공포다. 두려움 자체이며 본질이다. 그렇기에 삶과 죽음이 매한가지라는 얘기는 어불성설이다. 내 생각이다.

인간답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어느 경제학자는 인간의 본성은 자유와 이기심이라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인간은 자기 위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게 자연스러운 종족이다. 반면 어떤 철학자는 인간의 본성을 평등과 이타심으로 규정했다. 아무래도 앞선 경제학자의 말보다는 멋져 보인다. 이타적 인간이란 얼마나 세련되었나. 인간 종족의 품격이 느껴진다. 20세기 지구는 이를 실험하는 실험장이었다. 많은 직업정치인들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제도를 만들었고 집단을 창설했다. 천국과 신세계를 주장했다. 혁명에 가담했고 사람을 선동했다. 결국 수많은 인간이 죽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점점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종족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인간 활동의 많은 부분이 기계로 대체되는 중이다. 인간의 기계 필요 욕구는 점차 의존성으로 바뀌고 있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편리함을 누리지만 정신적으로는 소외되는 중이다. 가끔 섬뜩함을 느낄 때가 있다. 스마트폰이란 작은 기계를 만지작거릴 때면 스마트폰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건지 내가 스마트폰을 위해 존재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이다. 이러다 의식마저 가늘어진 조악하고 비루한 존재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 

우리 시대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 김영하가 새로운 작품을 들고 왔다. 신간 『작별인사』는 김영하가 『살인자의 기억법』 이후 9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이다. 인공지능 휴머노이드 로봇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주인공 철이는 유명한 IT 기업의 로봇 연구원인 아버지와 함께 인간으로서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외출한 어느 날 등록되지 않은 휴머노이드로 지명되어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수용소에서 여럿 로봇과 뒤엉켜 지내면서 자신이 인간인지 로봇인지를 고민하고 의심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깊은 사색에까지 도달한다.

수용소에서 만난 '민이'와 '선이'는 철이에게 소중한 친구가 되어준다. 민이는 자신을 인간으로 생각하는 로봇이고 선이는 진지한 복제인간이다. 두 친구의 도움으로 철이는 낯설고 위험한 수용소 생활을 적응하고 견디어간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남는다. 어느 날 수용소에서 동요가 생기고 그 틈을 타 셋은 수용소를 탈출한다. 자신을 인간으로 굳게 믿고 있는 철이는 아빠를 찾아 그걸 증명(확인)하기를 원한다. 아빠와 만나 집에 돌아온 철이는 자신이 몰랐던 거대한 진실과 마주한다. 독자는 철이의 여정을 통해 '인간'과 '인간답다'는 것 사이의 웅숭깊은 여백의 의미를 탐구하게 된다.

소설은 주인공 철이의 시선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쉽고 흥미로운 SF 동화와 같은 느낌으로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의 질문은 묵직하다. 로봇공학, 종교, 의식, 감정, 죽음 등과 같은 여러 철학적 주제를 조명하고 부각시킨다. 결국 소설은 거대한 하나의 명제로 나아간다. 인간성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진짜 인간, 복제인간, 휴머노이드, AI 로봇 등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형태의 종족들(?)은 끊임없이 이에 대해 질문하고 토론한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지구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장본인이 바로 인간이라는 통찰에 모두가 동의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 안에서 충돌하는 인간성과 비인간성의 사유가 이 소설의 포인트다.

인간성의 탐구야말로 인류의 오랜 학문 대상이다. 문학의 목적도 인간에 대한 성찰이 아니던가.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인간성을 천착하고 탐구하는 데 있다. 이 대목에는 나만의 사색이 있다. 사십 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다양한 책을 읽고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점점 더 명징하게 깨닫는 게 있다. 인간은 부족하고 미천하지만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종족이라는 것이다. 인간만큼 증오스럽되 사랑스러운 종족은 없다. 인간의 과학은 위대하되 절름발이이고 이성은 탁월하되 모순적이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가장 인간다운 모습은 본인의 유한함과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오직 겸손함으로써 타자와 우주를 공부(관계)하는 데 있지 않을까.

소설은 끝내 '작별'로 종결된다. 이야기의 말미는 인류의 절멸이다. 종국 기계 의식 시스템의 생존만이 남는다. 이 지점에서 소설의 제목 '작별인사'는 탁월한 작명이다. 작가가 2년 전 초고를 쓸 때의 가제가 '기계의 시간'이었다고 한다. 개작을 거치며 소설 제목이 바뀌었다. 어떻게 보면 무섭고 소름 돋는 작별이다. 하지만 나는 소설의 전개처럼 인류가 작별될 것으로 예상치 않는다.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 유일한 '단 하나의 나'로서 과학과 철학으로 복제되지 않는 신성한 개별성을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차피 아주 먼 과거와 먼 미래는 과학이 아닌 믿음의 영역이다. 어쩌면 소설과 영화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휴머노이드와 복제인간이란 소재는 현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식적이나 무의식적으로 기대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게 아닐까.

진부한 소재를 명료한 이야기 속에서 촉촉한 철학 담론으로 뽑아낸 역량은 순전히 작가 김영하의 내공이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문장은 활력을 띠고 빠른 호흡 가운데서도 소설은 서사적 흡입력을 잃지 않았다. 김영하라는 이야기꾼이기에 가능하다. 역시 김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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