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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 - 여행자 오소희 산문집
오소희 지음 / 북라이프 / 2021년 3월
평점 :
"작가의 작품에 세월이 입혀지는 걸 매 책에서 확인하는 것이 리뷰어에게 기쁨이라면, 리뷰어의 작품에 세월이 입혀지는 걸 매 리뷰에서 확인하는 것 또한 작가에겐 큰 기쁨이다."
그렇다. 작가 오소희는 알고 있다. 한 사람의 독자이자 북리뷰어로서 내가 얼마나 자신의 글과 생각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사실 그랬다. 14년 전 세 살배기 아들과 함께 떠난 그녀의 터키 여행기(『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는 단숨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획으로나 내용으로나 여행 에세이 분야에 한 획을 그은 그녀의 첫 에세이는 정말 많은 사람들의 찬사와 사랑을 받았다. 당시 정치·사상 관련 서적에 함몰되어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던 나에게 오소희의 산문은 촉촉한 밀크티와 같은 것이었다. 내 리뷰를 보고 인상적이라며 만남을 요청한 그녀의 제안으로 광화문의 큰 서점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이후 차곡히 쌓인 서로 간의 '평가와 우정의 양립'은 지난 십수 년 동안 변질되지 않고 유지되어 왔다.
소위 전작주의(全作主義)를 통해 한 작가를 오랫동안 관찰하다 보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작가의 변모 혹은 성장과 같은 발전 단계의 흐름을 포착할 때가 있다. 가령 내가 좋아하는 작가로 한정하면 소설가 공지영은 '산문성의 축소에 따른 소설력의 강화'라는 측면으로, 하루키는 '개별 사랑을 우주적 관점으로 확대해가는 시각'이란 측면에서 작가적 세계관을 확대해갔다. 반면 작가 오소희는 '떠남'이란 소재를 '보편 인간성의 찬란함과 비루함'이라는 코드로 풀어내면서 그 장르와 문체를 끊임없이 변화시켜갔다는 점이 독특하다. 에세이로, 소설로, 동화로, 육아서로, 페미니즘으로. 다양한 형태(외연) 속에서 생명력 있게 뽑아내는 작가의 사유와 텍스트는 그 특유의 울림과 진폭을 통해 독자의 가슴을 적셔왔다.
오소희의 신간 『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은 '여행'에 관한 사색을 그 대척점인 '집'의 재발견으로 아름답게 연결한 산문집이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떠나지 못할 것을 명령했지만 역설적으로 새삼 집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떠남에 익숙한 작가에게 코로나19는 느닷없는 불청객이었을 게다. 그러나 작가는 여행작가로서의 자신의 실존 성찰을 멈추지 않는다. 작가에게는 떠나지 않고도 보이고 사유할 것들이 있었다. '떠남'을 보충하고 완성하는 것들이었다. 바로 '머묾'이었다. 작가는 이번 신간을 통해 '떠남'과 '머묾'이라는 서로 배치된 개념을 대구적(對句的)으로 양립시키며 여행의 의미를 탐색한다.
책은 여행과 집에 관한 사유와 통찰이 대구를 이루는 구조로 쓰였다. 작가는 수시로 우붓(발리)과 부암동(서울)을 오가며 서로 다른 시공간의 차이와 조화를 꾀한다. 가령 부암동 집 옥탑방에서 동쪽 창밖을 내다보는 작가의 시선은 어느덧 파리 시내에서 종일 신문을 돌리다 옥탑방으로 돌아온 신문팔이 소년에게로, 가로등 하나 없는 필리핀 팔라완의 바닷가 마을로, 콜롬비아 보고타의 산기슭 빈민가의 미로로 옮겨간다. 옮겨진 시선은 자못 진지하고 차분한 사색을 거쳐 여행자의 내면 속으로 잠입한다. 세상 모든 여행자의 '운명적 형벌'에까지 다다른다. 그리고 작가는 선언한다. "맘대로 떠났다 돌아온 자, 너는 연옥에 머물라." 독자는 작가의 해석을 통해 여행자의 본질적 외로움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가장 인상적인 지면은 작가가 책 곳곳에 가족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을 고백한 부분이다. 책은 크게 2개의 방(챕터)으로 나눠져 있는데 첫 번째 방이 여행과 집에 관한 작가 내면의 사색이 주를 이룬다면 두 번째 방은 작가 주변 사람들, 대부분 가족에 관한 작가적 고백이 다수를 차지한다. 남편, 아들, 아버지, 오빠의 이야기가 수록되었다. 특히 남편 이야기가 상당히 감동적이다. 작가의 부부관계도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무려 열아홉 장을 할애해 오랜 시간 동안 깎이고 다듬어진 부부애의 발전사를 아름답게 기록했다. 어느덧 안정 궤도에 오른 수십 년 차 중년 부부의 영혼의 아우라가 잘 담겼다. 각자 완전히 다르지만 서로 온전히 사랑한다는 걸 문장 곳곳에서 느낀다. 매일 손잡고 부암동 골목을 걷는 작가 부부의 현재상이 멋지다. 작가의 말대로 부딪힘도 간절한 소통이다. 연마되고 버려진다. 작가보다 한참 인생 후배지만 행복한 부부관계는 반드시 이 대목을 관통한다는 걸 알기에 흐뭇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긴다.
또 하나 인상적인 감상은 집의 의미와 가치를 보다 깊이 있게 고찰해보게 된 것이다. 사상 초유의 세계적 전염병의 창궐로 우리 모두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과거에 비해 늘어났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집의 의미를 지나치게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치환해왔다. 지역, 층, 평수, 가격, 인테리어 등 한국적 의미에서의 집은 크기와 가격이라는 수학적 가치에 함몰되었다. 나도 그랬다. 2년 전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 우리 부부가 우선적으로 고려한 건 멋진 전망과 인테리어 퀄리티였다. 좋은 집이란 외적인 미(美)의 화려함이 극한까지 확보된 공간으로 이해했다. 이사 심방을 온 목사님의 일갈이 있기 전까지. 진리는 전혀 달랐다. 좋은 집을 결정하는 건 집주인이었다. 좋은 집은 좋은 주인이 사는 곳이었다. 좋은 집에 대한 작가적 정의도 바로 여기에 맞닿아 있다. 작가가 직접 짓고 꾸민 부암동의 새 집은 나만의 공간이 아닌 타자와의 나눔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살롱이었다. 여성들의 문화 공간 '부암살롱'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곳을 통해 작가는 '엄마들을 옭아맨 역할억압을 하나씩 해체하는 처방들'을 공유했다. 그것은 '언니공동체'로까지 확장되어 '구덩이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고 싶어 한 여성들'의 영혼의 항구가 되어주었다. 좋은 집에 대한 가장 적확하고 아름다운 예라 할 수 있다.
작가의 모든 책이 그러하듯이 신간 또한 감사와 행복의 테마를 진지하게 탐색한다. 작가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여행이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보는 것이다." 즉 여행의 외재적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이 있던 자리를 떠나야 한다. 떠나지 않는 여행은 성립될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책을 더욱 빛나게 하는 부분이다. 과거의 책들이 떠남으로써 머문 곳을 사색했다면 이 책은 머문 곳에서 떠남과 머묾을 동시에 천착한다. 그래서 둘은 단절된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재조명하고 피드백하는 관계임을 알려준다. 작가는 독자에게 질문한다. 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일깨운다. 결핍이든 풍요든 결국 행복의 문제는 해석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그리고 그 오래고 낡은 세상 모든 종교와 지혜의 키워드 '감사'가 항상 그 앞에 붙는다는 것을.
서평을 정리할 시점이 왔다. 내가 오소희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랑에 관한 입체적 천착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오소희는 사랑꾼이다. 그녀가 쌓아올린 십수 권의 책 더미는 한결같이 인간 사랑의 실재적 디테일을 주목하고 관통한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내 눈앞의 한 사람'을 향한 진짜 사랑말이다. 우리는 결코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세상 모든 사랑은 완전히 평등하고 고결하다. 그리고 연결되어 있다. 그녀가 떠남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내가 그녀의 글을 사랑하는 것까지. 이 숙연한 인식과 감동의 최전선에 신간 『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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