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들의 이야기 1 - 분열왕국의 시작
한홍 지음 / 두란노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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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최근 내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리더십의 교체를 보며 무언가의 열망이 들끓었다. 리더십에 관한 지혜가 목말랐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책을 찾기 위해 서재를 뒤졌다. 한홍 목사의 『왕들의 이야기』는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책이다. 오래전 탐독했었다. 2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고대 이스라엘 왕조사를 훑는다. 통일 이스라엘의 3대 왕 솔로몬을 시작으로 분열 왕국 이후의 수많은 열왕들을 다룬다. 구약성경 <열왕기서>를 쉽게 정리했다고 볼 수 있다. 책 전면 표지에는 '이스라엘 왕조사로 훑는 하나님의 리더십 코드'라는 부제를 달았다. 정말 흥미진진하고 스펙터클하다.

주지하다시피 <열왕기서>는 솔로몬 때부터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최후 주전 586년까지, 약 400년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42명의 왕들, 북방 이스라엘의 19명, 남방 유다의 23명과 12명의 선지자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스라엘 열왕의 역사에는 야합과 시드기야 같은 악한 군주가 많았다. 반면 요시야나 히스기야 같은 거룩하고 탁월한 지도자도 있었다. 각 왕들마다 공과는 무엇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땠으며 결국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생생하게 들려준다. 『왕들의 이야기』는 저자가 <열왕기서>를 현대적 언어로 정리하고 풀어낸 해설서다.

성경을 읽다 보면―오롯이 인간적 기준에서―너무 재미있어 술술 읽히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지독하게 지루해서 한 장도 넘기기 힘든 부분이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가령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얼마나 재미있는가. 하지만 재미도 잠시 바로 이어지는 레위기의 지루함은 얼마나 곤욕스러운가. 물론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인간의 지적·언어적 한계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열왕기서>가 훑는 이스라엘 왕국의 드라마는 정말 재미있고 박진감 넘친다.

『왕들의 이야기』에서 저자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질문은 '왕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왕은 세상 왕과는 달라야 하며 그 최고의 전범과 다수의 좋지 않은 사례들을 기술한다. 왕권을 가장 모범적으로 행사한 자는 다윗이다. 다윗이야말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왕권이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가장 아름답게 보여준 사례다. 그렇기에 제법 괜찮은 이스라엘 왕이 죽을 때마다 성경은 최고의 극찬으로 "다윗과 같이 정직했다"라는 문장으로 평가한다. 남유다의 세 왕, 즉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만이 그 영광스러운 닉네임을 선사받았다. 대부분 악하고 교만하고 어리석었다. 하나님은 분노하셨고 왕국은 비참했다.

북이스라엘은 선한 왕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악했고 어리석었다. 특히 아합과 므낫세의 집권기는 악함의 극치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그 구조와 형태가 하나의 패턴이 되어 여호와 하나님을 두고두고 노엽게 한다. 마치 누가 더 악한지 악의 올림픽 대회를 펼치는 것 같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남유다보다 130년이나 먼저 멸망해 앗수르 제국의 노예가 되어 고통을 당한다. 당시 앗수르의 잔인한 동화정책으로 인해 사마리아인들은 인종이 섞이게 되었고 훗날 70년 바벨론 포로기 후 복귀한 유다인들에게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할 정도로 치욕적인 신세가 된다.

남·북 이스라엘 왕정사에 왜 그렇게 악한 왕이 많았을까 생각했다. 선에도 전범이 있듯 악에도 시조가 있다. 난 후자의 타깃을 솔로몬으로 잡는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왕들이 저지른 가장 악랄한 범죄가 바로 우상숭배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이기 때문에 모세에게 율법을 전달할 때 첫 번째로 기록했는데도 말이다. 지혜를 구함으로 찬란하게 시작된 솔로몬의 왕권은 집권 후반기로 가면서 이방 여인을 취하고 그들의 우상을 허용함으로써 몰락의 길을 걷는다. 두 번이나 주어진 회계의 기회도 무시할 만큼 솔로몬의 지혜와 영성은 사라졌다. 아버지 잘 둔 덕에 목숨은 부지하였고 자기 집권기에 왕국 분열은 막을 수 있었다. 솔로몬의 죄로 인해 그의 사후 왕국이 남북으로 갈라지고 우상숭배라는 이스라엘의 씻을 수 없는 죄의 패턴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걸 <열왕기서>는 잘 보여준다.

우상숭배를 비롯하여 온갖 죄에 찌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말로는 비참함 그 자체였다. 북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남유다는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다.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다. 남유다는 다윗과의 언약을 충실히 지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인해 다윗의 혈통이 계속해서 왕이 된 데 비해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반역을 포함 총 9번이나 왕조가 바뀐다. 모두 선왕을 배반하고 독살한 쿠데타에 의해서다. 300년도 채 되지 않을 동안 왕조가 9번 바뀌었다면 말 다 한 것 아닌가. <사무엘서>의 희망적 메시지와는 달리 <열왕기서>의 참혹한 왕조사는 결국 왕직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이스라엘의 왕직은 진짜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저자 한홍 목사의 필치는 힘 있고 세련됐다. <열왕기서>를 일반 성도들도 알기 쉽도록 체계적으로 잘 정리했다. 강조해야 할 부분을 잘 강조했고 각 파트마다 목사로서의 자신의 강해를 덧붙였다. 왕의 이야기에만 함몰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입장을 대변한 선지자의 목소리를 비중 있게 기술했다. 이스라엘 왕직이 선지자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고유한 특징을 잘 부언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연도, 도표, 지도를 적절히 배치했고 남·북 이스라엘 왕조를 동시대에서 구분·비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책을 참고한다면 <열왕기서>를 폭넓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세상 누구나 왕이 되려 한다. 대접하는 것보다 대접받으려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큰 사회이든 작은 조직이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권력을 추구하고 있는 자화상을 마주할 때가 있다. 인식할 때 즈음은 이미 늦었다. 사람들 앞에 왕처럼 군림하는 맛은 마치 마약과 같은 것이어서 한 번 빠지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회복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든 다니지 않든, 예수를 믿든 믿지 않든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왕 맛'에 함몰되어 자신의 영혼을 파괴시키고 있다. 성경 <열왕기서>는 단호히 일갈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진정한 왕은 따로 있다는 것을. 이 거대한 메시지를 쉽고 박력 있고 세련되게 풀어냈다는 점 만으로도 이 책 『왕들의 이야기』는 값지다. 리더십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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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이야기'는 인류의 문화 역량을 몇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매개체다. 인간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노래를 흥얼거리며 감정을 추슬러왔다. 또한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자기와 타자를 연결시켰다. 개인과 세계를 확대시켰다. 여기에 인간이 직접 흉내 내는 액션이 더해질 때면 더욱 다채로운 조화요 무대요 세계가 되었다. 인류 문화사는 말에서 글로, 글에서 이야기로, 이야기에서 연극으로, 연극에서 음악이 입혀짐으로, 영화 외 다양한 영상문화로 진보해왔다. 이 진보 선상에 뮤지컬(musical)이란 매혹적인 장르가 있다.

개인적으로 뮤지컬에 조예가 부족하다. 대개 책 좋아하는 사람이 음악도 좋아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대중음악의 일부분과 가스펠(gospel) 정도다. 노래를 잘 부르지도 못하고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다. 그 유명한 『레미제라블』도 소설로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이런 내 기호는 그대로 우리 가족에게 영향을 미쳤다. 다른 집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뮤지컬과 공연을 즐겨 관람한 것에 무감했다. 뮤지컬에 무지한 아빠 때문에 아이들이 수준 높은 문화예술을 향유할 기회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것이다. 이런 부채감을 안고 금번 설 연휴를 맞이하여 처음으로 아이들과 뮤지컬 무대를 찾았다.

뮤지컬 '장화 신은 고양이 비긴즈'는 순전히 아이들과 함께 보기 위해 선택한 공연이다. 시끄럽거나 요란하지 않아야 했고 어렵거나 자극적이지 않았야 했다. 그렇다고 유치해서는 안 됐다. 지루한 것은 절대 불가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장화 신은 고양이 비긴즈'는 이러한 내 입맛에 완벽히 부합한 뮤지컬이다. 쉽고 재미있고 가족적이며 감동까지 갖추었다. 뮤지컬이란 장르가 갖추어야 할 기술적·구조적·음악적 수준 또한 나무랄 데 없었다.

'장화 신은 고양이' 이야기는 유명하다. 동화로 잘 알려진 내용을 뮤지컬은 더욱 단순하게 축약시켰다. 러시아 대표 가족 뮤지컬을 국내 제작진이 재창작했다고 한다. 고양이가 어떻게 장화를 신게 됐는지, 왜 주인을 돕게 됐는지, 동화 이면의 이야기를 담았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가난한 제분소의 아들로 태어난 장 피에르는 착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인물이다. 아버지를 여의고 빚독촉에 시달리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유산)은 고양이 샤샤밖에 없다. 샤샤는 주인 장 피에르에게 장화를 선물로 주면 자신이 호강시켜주겠다고 말한다. 믿기지 않는 말이지만 장 피에르는 결국 고양이에게 장화를 내어준다. 그런데 믿기지 않았던 일이 현실이 된다. 장 피에르는 고양이 샤샤 덕분에 부귀영화와 사랑을 얻는다.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스토리다. 뻔하고 단순하다. 그럼에도 이 뮤지컬이 감동적인 건 쉴 새 없는 빠른 전개와 탄탄한 구성력에 있다. 극을 이끌어가는 주체는 대부분 고양이들이다. 주인공 샤샤를 위시하여 출연하는 고양이는 전부 의인화되어 있는데 고양이의 세계와 인간 세상이 자유롭게 연결되어 있다. 왕과 영주를 비롯해 대부분의 인간들은 어리석고 탐심이 많은 것으로 묘사된 데 비해 고양이들은 지혜롭고 리더십 있는 군상으로 표현된다. 장 피에르와 에텐셀 공주를 이어주는 것도 고양이들이다. 인간보다 더 나은 내면의 모습을 가진 고양이의 세계는 '동물-인간' 대비를 통해 더욱 극적으로 인간성의 본질을 사유하게 한다. 선함, 희생, 용기, 정직, 인내. 이런 것들 말이다.

음악적·기술적 역량 또한 이 뮤지컬이 가진 강점이다. 초대형 무대에서 펼쳐진 웅장한 스케일은 아니지만 무대와 객석을 꽉 채우고도 남는 파워가 있다. 객석으로 수월하게 전달되는 대사와 음악은 집중력을 높인다. 출연진 19명의 합창도 많은 연습을 증명하듯 퀄리티 있는 하모니를 들려준다. 특히 고양이 샤샤 역을 맡은 배우 신선우의 가창은 인상적이다. 대사 전달력이 월등히 뛰어나고 쉴 새 없이 춤추며 연기하면서도 목이 잠기거나 음정이 불안하지 않다. 특히 초고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은 뮤지컬의 음악적 요소를 보다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다.

뮤지컬 말미 15분간 진행되는 스페셜 커튼콜은 '장화 신은 고양이 비긴즈'가 가족 뮤지컬을 지향한다는 점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는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사진 찍는 호사를 누리게 되는데 출연진 대부분 객석으로 내려와 친절하게 응대한다. 관객의 다양한 요구에 적극적으로 화답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프로다움을 느낀다. 코로나19로 인해 수년간 공연업계 종사자들의 활력 있는 활동이 요원했다. 하루속히 실력 있고 프로다운 배우들이 무대에서 가감 없이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생애 처음으로 아빠, 엄마와 뮤지컬을 관람한 초등학생 두 딸도 즐겁게 관람한 듯 보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또 보고 싶다며 아우성이다. 극장이라면 치를 떠는 둘째 녀석도 정말 재미있었다며 호들갑이다. 두 아이의 눈빛에서 만족스러운 문화생활을 만끽한 여유와 기쁨을 발견한다. 벌써부터 다음 뮤지컬을 고민해야 할 상황이 됐다. 문제는 오직 지갑뿐이다. 즐거운 고민이다.

뮤지컬 '장화 신은 고양이 비긴즈'는 서울 이촌동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절찬 공연 중이다. 공연시간은 총 70분이며 인터미션은 없다. 주차는 무료(설 연휴 당시, 평일은 2,000원)다. 예매할 때 되도록 좌석을 2층보다 1층으로, 안쪽보다 통로 쪽으로 아이들을 배치하기를 추천한다. 15분 스페셜 커튼콜을 더욱 풍성히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가족 뮤지컬로서는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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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내 주변에서 리더십의 대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두 곳인데 하나는 회사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다. 전자는 오랜 시간 동안 동고동락한 내 바로 위 팀장이 회사를 떠난 것이고 후자는 교회 후임목사 청빙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두 곳이 가정과 더불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시공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런 변화는 전회(轉回)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거대한 전환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무엇보다 이 대전환에 내가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게 가장 놀랍다. 회사에서는 조직 최고 선임이 되었고 교회에서는 청빙위원으로 임명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작년 연말부터 리더십 관련 책을 집중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리더십 전환기에는 큰 혼란이 따른다. 제국이나 왕조가 바뀔 때마다 또는 왕 한 명이 바뀔 때조차도 엄청난 변화와 혼란이 있었다. 간혹 좋은 변화도 있었지만 대부분 좋지 않은 변화가 뒤따랐다. 중요한 건 어떤 변화든지 간에 인간 역사는 끝내 발전했고 그 변화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문명을 도약시켰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기독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강한 종이 살아남는 것도, 가장 지능이 높은 종이 살아남는 것도 아니다.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는다."라는 찰스 다윈의 말에 공감하는 편이다. 변화를 예민하게 읽어내고 그것을 기회로 하여 한두 단계 도약해 내는 지혜와 용기는 신이 인간에게 준 고결한 선물이다.

가장 먼저 손에 집어 든 책은 진 에드워드의 『세 왕 이야기』이다. 젊은 시절에 다윗이라는 고대(성경) 인물에 빠져들게 한 이 얇은 책은 왕권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추적한다. 가끔 삶에 지치고 영혼이 목마를 때마다 펴서 읽곤 했는데 이번에는 작정해서 연속 3독을 했다. 문장 하나하나를 꾹꾹 누르며 읽었다. 놀라운 건 이 책을 처음 선물한 사람이 교회 담임목사님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나와 동갑인 그 친구는 현재 국내 모 대학 심리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오래전 교회 청년부 리더가 된 나에게 리더십의 정수를 도전 주기 위해 선물했던 것이다. 그런 책을 22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의 아버지의 목사 은퇴를 준비하며 다시 읽고 있다는 점에서 전율을 느낀다.

그다음 읽은 책은 『왕들의 이야기』 1, 2권과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이다. 전자는 한국교회에 리더십 도전을 강조해온 한홍 목사의 <열왕기서> 안내서이며 후자는 김진수 합동신학원 교수가 쓴 <사무엘서> 깊이 읽기이다. 잘 알다시피 <열왕기서>와 <사무엘서>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스라엘 왕조사를 다루는데 과히 술술 읽힌다. 조금 오버해서 말하면 『삼국지』보다 재미있고 『초한지』보다 감동적이다.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이사야와 같은 불세출의 인물들이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주·조연으로 등장한다. 두 권의 책을 연이어 읽으며 느낀 건 <열왕기서>는 결국 <사무엘서>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을 구도적으로 조망하면 <사무엘서> 이전의 이야기는 <사무엘서>로 빨려 들어가고 <사무엘서> 이후의 이야기는 <사무엘서>로 회귀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중심에 다윗이라는 독특한 인물이 서 있다. 이곳 블로그 '다윗의 서재'의 명칭이 되기도 한 인물이다. 다윗에 대해서는 후일 다른 지면을 통해 본격적으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후임목사 청빙위원으로 임명된 후 며칠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청빙이라는 사명이 가진 거대한 무게 때문이다. 개신교에서 목사는 특별하고 영광스러운 직분이다. 목사는 장로이면서 강도자(講道者)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목사의 영적 권위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 성경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직(職)이기 때문에 성도는 존경과 순종의 마음으로 목사를 대해야 한다. 지난 40년간 오직 한 분 목사님에게 설교를 듣고 가르침을 받았다. 삶이 힘들고 영혼이 고달플 때마다 목사님을 찾았다. 그럴 때마다 목사님은 별다른 묘수를 얘기하지 않았고 오직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주문하셨다. 바로 그 정공(正攻)의 힘이 비록 흔들렸으나 멸망하지 않은 비밀이었다. 그랬던 내가 어느덧 4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그 목사님의 후임을 청빙하는 일에 쓰임을 받게 된 것이다. 실로 충격이자 도전이다.

작년 11월 28일 발족된 교회 후임목사 청빙위원회는 지금까지 총 여덟 차례 회의를 진행했다. 5인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열띤 논의와 토론을 벌였다. 장로, 권사, 집사 할 것 없이 소위 계급장 떼고 민주적·수평적으로 토의했다. 이제 대략 청빙 심의의 마지막 지점에 와 있다. 청빙위원으로서 비밀유지 서약서에 사인을 했기 때문에 여기서 구체적인 내용을 밝힐 수는 없겠다. 다만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 건 청빙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성경적 리더십의 궁극을 새삼 공부하고 일깨워 갔다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나 스스로 교회 왕직에 관한 성경적 원리를 학습하는 중심인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교회 공동의회를 통과해 후임목사 청빙이 완료되면 본건에 대한 내 소회를 후술하겠다.

회사로 시선을 돌려보자. 오랜 기간 동안 리더의 자리에 있던 팀장이 사정에 의해 회사를 떠났다. 그와 나는 18년이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나이는 나보다 서너 살 위다. 과거 소(小) 부서의 팀장-팀원 관계였던 것이 회사가 성장하면서 조직이 커졌고 그에 따라 팀장은 영업과 무역을 총괄하는 마케팅 팀장으로 나는 영업파트 내부를 단속하는 중간관리자(부팀장 격)로 역할을 분담했다. 각기 성격이 다르고 일하는 스타일도 달랐다. 정말 많이 달랐다. 그러나 오랫동안 함께 하며 켜켜이 쌓인 시간의 세례는 우리 사이에 큰 신뢰를 쌓아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간의 믿음과 의지가 더 커졌다. 그 신뢰의 최고점에서 팀장은 회사를 떠났다. 이후 조직은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팀장의 부재는 곧바로 사장님의 친정(親政) 체제ㅡ직접 팀을 관리ㅡ로 이어졌다. 자수성가한 사장님은 실력과 효율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분이다. 미국식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를 지향하는 경영인이다. 결단이 빠르고 의사결정이 시원하며 직원들의 의견을 귀담아들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교회 담임목사님이 나의 영적 스승이었다면 회사 사장님은 나에게 물적 원리를 가르친 교사였다. 지난 18년 동안 사장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삶 측면에서 결단과 냉정을 배웠고 철학적으로 이성과 합리를 배웠다. 사장님이 결정한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역사가 쌓인 시공간 위에 내가 직립해 있다. 언제까지 회사에 남아 있을지 모르겠으나 단언하건대 남는 건 감사뿐이리라.

이 대목에서 내가 집어 든 책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노벨상으로 이끈 『노인과 바다』와 또 다른 노벨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이다. 두 권 모두 예전에 읽은 것을 다시 집어 든 것인데 세밀히 재독했다기 보다 의미를 반추하는 선에서 스킵 하며 빠르게 훑었다. 두 소설의 공통점은 외연 면에서 노벨문학상 작가의 책이라는 점과 주제 면에서 인간 삶의 의미와 세월의 본질을 탐구한 메시지에 있다. 40대 중반의 영업차장으로서 조직 내 중간관리자의 역할을 감당하며 삶과 시간, 타자와 세계에 대한 보다 농밀한 곱씹음이 갈급했다. 두 권의 고전은 이런 내 갈증에 가장 적확히 반응하며 울림을 주었다.

헤밍웨이가 말년에 쓴 『노인과 바다』는 어른 됨의 궁극을 관통한다. 소설의 주인공 산티아고가 가진 근원의 매력은 며칠 동안 청새치와 씨름하고 상어떼와 사투를 벌이는 데 있지 않다. 산티아고의 진정한 위대함은 물고기와의 죽음을 건 혈투가 끝난 후 별일 없다는 듯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시는 데 있다. 강렬하고 지독한 삶의 순간순간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노인 산티아고가 가진 생명력의 본질이다. 삶이란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나이 듦에 관한 깊은 의미를 관통하지 못했더라면 헤밍웨이는 노벨상 문턱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은 더 구체적이다. 이 작품은 삶의 최선에 대해 질문한다. 주인공 스티븐스가 끊임없이 질문한 주제는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였다. 이는 결국 '품격'에 관한 것으로 귀결되는데 스티븐스의 철학은 명징하다. 위대한 집사란 주인에 대한 절대적 믿음, 복종, 이를 넘어선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준에서 자신은 최선을 다했고 완벽했음을 자부한다. 또한 주인 달링턴 경이 순수했던 나머지 나치 정권에 이용당한 사실에 대해서도 자기 영역(책임) 바깥에 있는 것임을 강조하며 개인의 죄의식과는 거리를 둔다. 이는 위대함과 품격에 관한 본질적 의미를 묻는 지점인데 이 부분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답변을 강요하거나 선악의 가치판단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소설의 메시지는 현재 회사에서의 나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병렬된다.

이 글을 쓴 목적으로 돌아가자. 좋은 리더란 무엇인가. 훌륭한 리더십이란 어떤 것인가. 한 곳은 하나님의 왕권을 회복하라 말하고 한 곳은 생존과 효율을 우선하라 말한다. 서로 다른 것인가. 내가 조금만 어렸더라면 즉시 답을 냈겠다. 선언했겠다. 자신감 넘치는 필치로 리더십의 정수를 기술했겠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내 앞에 펼쳐진 거대한 리더십의 전환을 실감 나게 목도하면서 외롭고 보잘것없는 한낱 쓸쓸하기 그지없는 성도(직원)의 현존을 직시할 뿐이다. 그러면서 앞서 소개한 책들이 공통적으로 주목하는 주제에 맞닥뜨린다. 그것은 바로 '겸손'과 '현실 인식'이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장엄한 파도에 올라타 있을 때 정작 할 수 있는 건 그저 겸손한 자세로 정확하게 현실을 인식하는 것뿐이다. 그 파도에 나를 맡길 뿐이다. 시인 류시화의 말대로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나는 바다 그 자체이므로.

항상 독서는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 책 읽기가 남긴 위대한 유산을 사유한다. 거대한 리더십 교체기의 중심에 서있음으로 새삼 왕직의 본연을 심도 있게 천착한다. 이 흥미로운 탐구와 학습 과정에 이 졸필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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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 2017 신판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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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읽은 책을 다시 집어 든 건 순전히 저자 이어령 때문이다. 최근 모 신문에 게재된 그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암 투병 중인 건 알았지만 그사이 너무 초췌해진 그의 외연에서 예전의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저 사람이 과연 내가 아는 이어령 전 문화체육부 장관이 맞나 하는 생각이 강렬했다. 힘 있고 열정적인 지성 활동으로 동분서주했던 그의 과거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인터뷰 내용을 훑으며 외연은 많이 초췌해졌지만 영혼만큼은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느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여전히 귀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그 직감의 연장선상에서 그가 종교적 회심 후 쓴 참회론적 메시지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다시 잡았다.

서평을 쓰기 전 이 책을 에세이로 구분할지 기독교 서적으로 구분할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개인 이어령의 회심기이기도 하지만 딸과 자신 사이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이 큰 뼈대를 이루고 있다. 결국 개인 이어령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책 전반에 흐르는, 여기까지 이끄신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이라는 관점에서 기독교 서적으로 구분하여 서평을 남기기로 했다.

그렇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기독교 서적이다. 우리 시대가 가장 존경하는 지식인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 석좌교수가 거대한 지성에서 거룩한 영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고백하는 책이다. 띠지에 적힌 문구처럼 "시대의 지성이 전하는 영성에 대한 참회론적 메시지"이다. 과거에 굳게 닫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어떤 계기로 열리고 그로 인해 어떻게 변화되었으며 결국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저자 자신의 현존을 좇는 이야기다. 책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내면을 여는 한 지식인의 진솔한 자기 부정과 신앙고백이 오롯이 담겨 있다.

저자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장면으로 일본에서 세례 받은 사건을 꼽는다. 관련 일화의 전후 맥락과 그 뒷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당시 지식인 이어령 전 장관이 세례 받는다는 소식은 국내 대부분의 언론에서 대서특필로 보도했다.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이 인본주의적 성과를 뛰어넘어 영성의 세계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주변의 엄청난 궁금증에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책 제목대로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전하는 전도자적 삶을 사는데 앞장서 왔다.

워낙 글재주가 뛰어나기에 책 곳곳에 감미롭고 촉촉하며 탁월한 문장들이 독자의 가슴을 사로잡는다. 문학평론으로 시작해 에세이, 소설, 드라마, 시나리오, 심지어 올림픽 개폐회식 대본까지 쓴 그였다. 어떤 부분에서는 시로, 어떤 내용에서는 철학적 탐구로, 어떤 대목에서는 드라마틱한 표현으로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내러티브를 펼친다. <시편>을 쓴 다윗 같기도 하고 『고백록』의 저자 성 아우구스티누스와도 엇비슷하다. 저자가 세상의 지식과 학문이 아닌 기독교 신앙을 다룬 첫 번째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신앙서적보다 진솔하고 감동적이다.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저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끌기 위해 평생을 기도해온 딸의 이야기다. 딸 이민아 목사에게 자신이 존경하는 아버지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현실은 상당히 괴로운 숙제였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믿지 않는 가족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더욱이 아버지(저자)는 한국에서 가장 지성 있는 인물로 존경받는 소위 세상 지식의 거대한 기둥이다. 거꾸로 저자의 입장에서는 미국에서 검사라는 직업을 가졌던, 지성을 사랑하던 딸이 어찌하여 하나님을 믿게 됐고, 봉사하는 삶을 살게 됐는지가 궁금했을 것이다. 환언하자면 이 책은 부녀간의 엇갈린 스탠스에서 기독교 영성이라는 존재론적 합치를 이루어가는 아름다운 과정에 관한 고백록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은 기독교 서적이다. 그러나 꼭 기독교인만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비기독교인도 조금 넉넉하게 시야를 넓히면 거북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분명한 기독교 신앙 이야기지만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저자의 해박한 지식이 담담한 문체 속에 녹아들어 가 비신앙인이나 이웃 종교인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또한 아버지를 향한 딸의 오롯한 존경과 사랑, 동시에 딸을 향한 아버지의 웅숭깊은 애정을 이 나라 최고 지성의 글발로 만날 수 있다. 바로 이점이 기독교 서적을 뛰어넘어 이 책을 한 권의 보편 에세이로 읽을 수 있는 동력이다. 그렇기에 출간된 지 오래되었지만 신자든 비신자든 무난하게 추천할 수 있겠다.

서평을 정리하자. 저자는 작년 연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대재앙을 겪고 있는 전 인류를 향해 "역사적으로 항상 대 역병이 지나가고 나면 이전보다 나은 번영이 이뤄졌다"면서 "이 팬데믹 패러독스의 마지막 희망은 기독교"라고 밝힌 바 있다. 세상과 대중을 향해 서슴없이 하나님을 외치는 저자의 기백이 멋지다. 저자는 수년째 암 투병 중이다. 저자가 지성을 넘어서 만난 하나님이 그의 말년을 축복하며 존귀하게 사용하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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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가즈오 이시구로는 신간 『클라라와 태양』으로 처음 만났다. 그가 일본계 영국 작가이며 부커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소설을 읽은 뒤에서야 알았다. 그의 소설은 지루하지 않았고 가볍지 않았으며 재미없지 않았다. 문학의 기능이 교훈과 재미라는 양대 축에 있다는 걸 주지한다면 대중성의 최전선에 위치한 소설이란 장르는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 교훈은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이다. 유능한 작가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교훈을 선물했다. 이 기준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가장 근접해 있는 작가다. 이에 그의 대표작들을 역주행해 보기로 했다. 『남아 있는 나날』은 그렇게 내 손에 들어왔다.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은 『나를 보내지 마』와 함께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이다. 소설은 재미있고 잔잔하며 교훈적이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 전해오는 울림이 상당하다. 인물과 서사, 주제와 메시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 시점이 과거 현재를 수시로 오가지만 산만하지 않고 인물들의 절제된 감정이 독자에게 오롯이 전달된다. 이야기 곳곳에 묘한 긴장감이 계속해서 흐르는데 적절한 호흡으로 소설의 막장까지 독자를 흡입력 있게 안내한다. 작가의 탁월한 내공은 앤서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 주연이 열연한 영화로까지 제작되는 힘을 만들어냈다.

작품 속 일인칭 화자 스티븐스는 영국의 저명한 대저택 달링턴 홀의 집안일을 돌보는 집사이다. 최고의 집사였던 아버지를 존경하며 아버지처럼 훌륭한 집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35년간 주인 달링턴 경을 성심성의껏 모셔온 스티븐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최고의 집사는 최고의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믿는 그에게 달링턴 경이 국제 외교의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충심을 다해 돕고 보좌한다.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떠나가는 사랑을 붙잡을 여유도 없을 정도로 오직 집사의 일에 집중하고 매달린다. 그러나 평생을 바쳐 일한 집사의 일이 뿌듯하지만 달링턴 경이 나치 협력자로 이용당한 여러 정황이 드러나면서 회의가 생긴다.

평생 집사 일에 여념이 없었던 스티븐스에게 과거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생긴다. 저택의 새로운 미국인 주인의 권유로 포드 자동차를 몰고 장거리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소설은 스티븐스가 6일 동안 여행하면서 추억하는 과거의 회상과 현재의 여행 시점을 교차시킨다. 오래전 자신과 함께 일한 여인 켄턴 양의 편지를 받고 여행길에 그녀를 만날 기대에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막상 오랜만에 그녀를 만났지만 표면상 서로 간 달라진 건 없다. 소설의 말미 켄턴 양과 헤어진 후 우연찮게 만난 한 노인의 말이 스티븐스의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죽 뻗고 즐길 수 있어요."

이 소설은 크게 세 가지 주제에서 나에게 농밀한 울림을 주었다. 주인공 스티븐스가 끊임없이 질문한 주제는,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품격'에 관한 것인데 스티븐스의 철학은 명징하다. '위대한 집사'란 주인에 대한 절대적 믿음, 복종, 이를 넘어선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준에서 자신은 최선을 다했고 완벽했음을 자부한다. 또한 주인 달링턴 경이 순수한 나머지 나치 정권에 이용당한 사실에 대해서도 자기 영역 바깥에 있는 일음을 강조하며 개인의 죄의식과는 거리를 둔다. 위대함과 품격의 본질적 의미를 묻는 지점인데 이 부분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답변을 강요하거나 선악의 가치판단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일과 직업에 있어 '위대함'과 '품격'이란 항시 뜨거운 주제다. 스티븐스가 제기한 질문을 현재의 나에게 그대로 치환해 보자. 위대한 영업사원이란 무엇인가. 전문적 역량과 탁월한 실적을 통해 회사와 대표에게 큰 영업이익을 안겨주는 것일까. 뜨거운 동료애를 발휘함으로써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우선하는 걸까. 훌륭한 조율자로서 부서와 개인 사이의 소통의 다리를 잘 연결해 주는 것일까. 물론 가장 좋은 건 이 모든 역량을 다 갖춘 것이겠지만 경쟁이 있는 곳, 특히 숫자로 실적을 다투는 곳은 감히 불가능한 얘기라 할 수 있다. 위대함과 품격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회사와 학교를 위시하여 실력과 전문성을 겨루는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음미해 봐야 할 주제임은 틀림없다.

또 하나는 스티븐스와 켄턴 사이의 이뤄지지 못한 사랑의 절절함이다. 소설에서는 단 한 번도 서로에 대한 호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말과 행동이 나오지 않는다. 에두른 심리묘사와 정황적 상상을 통해 스티븐스와 켄턴 사이의 사랑의 기류를 살포시 포착할 뿐이다. 가장 극적으로 갈등이 해소된다고 볼 수 있는 마지막의 둘의 재회에서도 후회나 그리움에 관한 직접적인 묘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참인지 거짓인지 모를 듯 묵묵하게 전하는 켄턴 자신의 결혼생활의 고백 은 애절하다 못해 서글프기까지 하다. 결국 둘은 '마지막 말'을 하지 않은(못한) 채 헤어진다. 사랑했지만 자신의 위대한 책무에 복무함으로써 들여다보지 못했고 거꾸로 그것을 알기에 다가서지 못했던 둘의 사랑은 애잔하고 서글프며 가혹하다. 독자에게 눈물을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서사 하나만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기술이 과히 노벨상 작가답다.

마지막 주제는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의 대비다. 소설은 여행의 현재 시점과 과거 회상의 교차 구조로 이루어졌다. 현재에서 과거를 반추하는 흐름이다. 자신의 선택과 최선에 후회 없이 살아왔다고 믿는 주인공에게 우연의 어느 노인과의 대화는 정작 잊고 있던 것을 알게 해주었다. 자기 자신에게 미래 또한 남아있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산 것과는 무관하게 앞으로도 상당히 많은 '남아 있는 나날'이 존재한 것이다.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있고 현재는 총알같이 지나가고 미래는 머뭇거리며 온다"는 말이 있다. 총알같이 지나가는 현재에서 영원히 정지해있는 과거의 회상에만 빠져 있는 주인공 스티븐스에게 머뭇거리면서 다가오는 미래가 있다는 깨달음은 그뿐 아니라 정신없이 살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만 잠시 잊고 있는 지혜이다.

자연스럽게 내 삶과 나이로 감상을 옮겨가고자 한다. 어느덧 내 나이 사십 대 중반이다. 평균적인 기준에서 대략 반평생 정도를 산 것 같다. 불혹은 남자에게 가장 도전적이고 전회적인 연령대로 불린다. 한 남자로서 가장 빛나고 역동적인 황금기이다. 반면 과거와 미래를 동시 천착하며 깊은 존재론적 번민에 빠지는 극한의 걱정기이기도 하다. 빛나지만 남루하고 두렵지만 역동적인 나이 대다. 나이가 더할수록 시간의 속도는 더욱 빠르게 흐른다는 사실에 숙연해진다. 나는 과연 좋은 남편이고 아빠일까. 훌륭한 아들일까. 위대한 직원일까.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남은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에게 남아 있는 나날은 어떻게 펼쳐질까. 여러 진지한 사유가 머릿속을 주유한다. 이토록 인생의 심연을 깊게 탐색하게 한 것만으로도 이 소설의 가치는 충분하다.

노벨문학상 심사위원회 측은 "이시구로는 초기작에서 이미 가장 깊이 다루는 주제 '기억, 시간, 자기 기만'을 드러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의 글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 조심스럽고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한다"고 평가했다. 그렇다. 이시구로의 소설이 무거운 주제를 관통하면서도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독자의 내면에 침잠할 수 있는 건 독자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민하고 성찰하되 사유의 종국은 실존 독자의 몫으로 넘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스티븐스가 '위대한 집사'였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오직 독자의 평가로 남아 있다. 나(독자) 자신의 '남아 있는 나날'에 대한 평가와 해석에 관해서도 말이다. 나이를 먹어가며 두고두고 읽어야 하는 소설이다. 위대한 책 더미에 한 권을 더 얹을 수 있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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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1-15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좋아합니다. 안소니 홉킨스가 주연한 영화도 좋았어요. 이시구로 작품 중 클라라와 태양은 아직인데 읽어봐야겠어요. 다윗 님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

다윗 2021-11-15 16:11   좋아요 1 | URL
알라딘은 거의 댓글이 달리지 않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ㅋㅋ 영화는 하도 오래전에 봐서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엠마 톰슨의 미모가 빛났던 것 외에는...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