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에는 가족과 함께 수시로 서점을 드나들었다. 동탄-분당-잠실-강남-부천-강서로 이어지는 긴 코스였다. 말 그대로 '북 투어(book tour)'였다. 대부분 중고서점이었다. 첫째 딸의 『설**의 한국사 대모험』 시리즈가 이빨이 많이 빠져 상태 좋은 중고책으로 채워 넣기 위한 목적이 일차적이었다. 여기에 기왕 간 김에 내 책도 몇 권 사자는 취지가 이차적이었다. 고르다 보니 애들 책보다 내 책이 더 많아졌다. 뜻밖의 책 호사를 누렸다. 구입한 책의 절반 이상이 이미 읽은 책을 다른 번역본으로 다시 읽기 위한 것이었다.


1월에는 가족과 함께 수시로 서점을 드나들었다. 동탄-분당-잠실-강남-부천-강서로 이어지는 긴 코스였다. 말 그대로 '북 투어(book tour)'였다. 대부분 중고서점이었다. 첫째 딸의 『설**의 한국사 대모험』 시리즈가 이빨이 많이 빠져 상태 좋은 중고책으로 채워 넣기 위한 목적이 일차적이었다. 여기에 기왕 간 김에 내 책도 몇 권 사자는 취지가 이차적이었다. 고르다 보니 애들 책보다 내 책이 더 많아졌다. 뜻밖의 책 호사를 누렸다. 구입한 책의 절반 이상이 이미 읽은 책을 다른 번역본으로 다시 읽기 위한 것이었다.

집 서재에 동일 제목이 있다는 걸 눈치챈 둘째 딸이 나에게 질문했다. "아빠. 근데 왜 읽은 책을 또 사?" 아이의 질문에 나는 당황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해외문학은 번역마다 결이 다르고 읽는 맛이 다르단다"라고 답했다. 아이는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자신의 관심 코너로 이동했다. 사실 그렇잖은가. 가령 톨스토이 『부활』의 경우 시중에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그 유명한 첫 문단만을 비교해도 출판사마다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읽힌다. 그렇기에 같은 작품이라도 2편 이상의 번역본을 소장하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병독하면서 조금 다른 맛을 찾아 살피는 건 해외 고전을 입체적으로 탐독하는 나만의 즐거움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기존 정기수 번역본(민음사)이 다소 투박하고 직역 투여서 <동서문화사>의 송면 역으로 다시 고른 것이다. 위고 특유의 지난한 묘사와 잦은 장광설을 힘 있게 이겨내기 위해서는 번역의 질 또한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철 지난 프랑스어의 된소리 번역만 개의치 않는다면 송면 번역이 나에게는 더 맞으리라 기대했다. 게다가 그 유명한 비야르의 삽화 300점이 수록된 건 덤이다. 『레미제라블』은 올봄이나 여름 정도에 쉼표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전두엽에 꾹꾹 누르며 다시 읽을 계획이다.

톨스토이의 처녀작 『유년 시대』는 동완의 번역(신원문화사)으로 읽고 싶었던 책이다. Y 중고서점에 1권 있는 걸 얼른 집었다. 『유년 시대』는 톨스토이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작품이다. 『소년 시대』, 『청년 시대』와 함께 '톨스토이 자전 3부작'으로 불리는데, 개인적으로 『유년 시대』만 읽어도 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뒤의 2개는 작품성이 조금 떨어질 뿐만 아니라 톨스토이의 작품세계를 넓게 조망한다는 차원에서는 굳이 안 읽어도 되는 작품이다. 후일 『안나 카레니나』나 『고백록(참회록)』으로 충분히 포괄할 수 있는 작품이기에 『유년 시대』만으로 충분하다. 박형규 역(인디북)과 함께 골랐다.

장융의 『대륙의 딸』은 누군가의 추천을 통해 구입했다. 세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중국 현대사를 추적한 역작이다. <뉴욕 타임스>는 '중국 현대사의 비밀과 중국 민족성의 특질을 생생하게 그려낸 20세기 최고의 기록 문학'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영국 논픽션 최고상 수상 등 출간 당시 각종 상을 휩쓸었다고 한다. 모택동으로부터 본격 시작된 중화인민공화국의 현대사는 그리 아름답지 않다. 인간 말살의 측면에서 모택동은 스탈린이나 히틀러 못지않은 인물이다.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이 중국공산당의 오욕의 역사를 매우 구체적으로 다룬 책인데 이와 함께 읽으면 문화대혁명의 기치 아래 얼마나 악랄하고 엽기적인 일들이 20세기 중국 대륙에서 벌어졌는지 잘 알게 된다. 지금 읽고 있는 중이다.

『설**의 한국사(세계사) 대모험』 시리즈는 유아를 둔 부모에게 인기가 많은데 초등학생에게 한국사(세계사)의 기초적 흥미를 더해주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저자가 역사왜곡 논란으로 방송에서 하차한 상황이지만 책의 인기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팔리는 것 같다. 서점마다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판매하고 있다. 구매 관련 팁을 주자면 해당 시리즈는 굳이 새 책을 사지 않아도 된다. 중고서점에서 구입하기 바란다. 전 시리즈를 중고서점에서 구입했는데 완전히 새 책이었다. 새 책 같은 중고가 아니라 진짜 '새 책'말이다. 무슨 얘기인지는 직접 중고서점에 가서 확인해보면 알 것이다. 도서정가제가 낳은 '웃픈' 풍경이라고나 할까.

아이들과 서점에서 뒹구는 시간이 즐겁다. 가끔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책 읽는 모습을 보여줄 때 나 자신이 참으로 멋지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시쳇말로 '자뻑'이지만 솔직한 내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다. 습관과 태도는 사랑과 분노처럼 정확히 아래로 흘러내린다. 나는 두 딸이 공부를 잘 안 하고 학력은 조금 떨어져도 책 읽는 습관만큼은 어려서부터 습득할 수 있기를 바란다. 두 딸이 책상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이쁘고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다. 언젠가 두 딸과 단테의 『신곡』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함께 읽은 후 서로 다른 감상평을 나눌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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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이체르 소나타 (반양장) 펭귄클래식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기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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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두

단언하건대 '사랑'과 '결혼'과 '섹스'는 하나다. 사랑의 결실이 결혼이며 섹스는 그것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 언제 적 얘기하느냐 투덜거릴 사람이 있겠다. 하지만 난 그렇게 믿는다. 인류는 항시 이 문제와 씨름했다. 아담과 하와 이래 가장 긴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아무리 시대와 문화가 바뀌었다 하더라도 가정을 지키기 위한 인간의 본성은 훼손되지 않았다. 이를 지키지 못한 실패자들의 변명과 울부짖음만 요란했을 뿐. 그리고 현대 시대에 들어서 모든 진리와 기준을 파괴하려 한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고약한 발악이 더해졌을 뿐.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작품은 항시 이 주제를 응시한다. 웅대한 걸작 『전쟁과 평화』가 그랬고 가장 예술적인 작품 『안나 카레니나』는 더 그랬다. 중편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그 중심에 있다. 톨스토이의 다른 중편 세 작품과 함께 실린 이 소설집은 톨스토이 결혼관의 넓은 스펙트럼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초기작인 『가정의 행복』은 결혼과 사랑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탐구한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결혼의 부정성에 주목하고, 『악마』는 결혼 안에서의 섹스조차 더러운 것으로 치부한다. 『신부 세르게이』는 인간 정신의 한계와 모순에까지 다다라서 인간의 육체적 욕망을 비난한다. 성적 욕망을 거세하고 타인을 위한 선한 행위에 복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실 나는 톨스토이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랑과 결혼은 내 평생의 주제이기 때문에 이번 서평은 꽤 긴 글이 될 것이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위시하여 총 4개의 중편소설을 순차적으로 간략히 리뷰한 뒤 톨스토이(후기) 결혼관에 대한 반론과 그의 소설이 아이로니컬한 방식으로 가정의 중요성을 지지한다는 근거를 제시하려 한다. 또한 성적 욕망은 결혼 안에서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을 통해 행복한 가정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심층적으로 논설하고자 한다. 참고로 이 주제에 관한 내 입장은 철저히 보수·기독교적 관점에 서 있다는 걸 미리 알려둔다. 그럼 본격적으로 서평을 시작한다.

2-⑴. 『가정의 행복』

『가정의 행복』을 보자. 줄거리는 아름답다. 젊은 소녀(17살)가 아버지뻘 되는 아저씨와 사랑에 빠진다. 둘 다 사랑하는 마음을 감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통해 서로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에 골인한다. 결혼 후 도시로 이사한 뒤 둘의 사랑은 위기를 맞는다. 아내가 사교계에 발을 디디면서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질투, 냉소, 조롱, 불신, 증오 등의 갈등이 싹튼다. 결혼생활은 파괴 직전까지 나아가는 듯하지만 부부관계는 반전을 맞이한다. 아이를 낳은 후 둘은 전혀 다른 차원의 행복의 단계에 올라선다. 결혼생활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결로 다가오게 된다. 아이를 키우며 오손도손 살아가며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 이 소설만 본다면 톨스토이는 결혼 예찬론자다.

『가정의 행복』은 톨스토이가 결혼 전에 쓴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사랑에 대한 소녀적 감성과 결혼에 관한 현실적 긍정이 돋보인다.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의 두 가지 원형(단계)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부부 사이의 뜨거운 애정과 열정이다. 사랑의 호르몬은 5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들도 처음에는 강렬한 사랑을 갈구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시들어지고 냉소와 의심이 쌓인다. 점차 냉랭해지고 서로 간 사랑에 무감해진다. 하지만 자식을 낳아 기르는 과정에서 두 번째 가정의 행복이 도출된다. 즉 톨스토이가 말하는 가정의 행복은 부부 사이의 관심과 사랑을 넘어 자식과 주변을 향해 점차 확대해가는 정신적 성숙에 닿아 있다. 『가정의 행복』은 그 아름다운 원형을 안정감 있게 보여준다.

2-⑵. 『크로이체르 소나타』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가정의 행복』과는 전혀 다른 결혼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의 흐름은 1인칭 화자 '나'가 기차에서 만난 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이뤄진다.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 남자의 얘기가 서술된다. 그는 사랑의 확신 없이 외적 매력에 끌려 한 여자와 결혼한다. 결혼 후 자주 불화와 권태를 이루지만 그때마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결혼생활을 이어나간다. 어느 날 아내에게 음악적 파트너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등장한다.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아내는 바이올리니스트와 베토벤의 소나타 9번(크로이체르 소나타)을 협주하고 그(남편)는 질투와 부러움이 뒤섞인 미묘한 감정으로 그들의 모습을 관찰한다. 얼마 뒤 지방으로 출장을 떠난 그는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집으로 되돌아온다. 새벽에 도착한 그는 아내가 바이올리니스트와 단둘이 식사하고 있는 장면을 본다. 광기에 휩싸인 그는 아내가 불륜을 저지른 것으로 오해하여 아내를 칼로 찔러 죽인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톨스토이 후기작이다. 『안나 카레니나』 이후 톨스토이의 작가적 세계관이 크게 변화한다는 점에서 『안나 카레니나』의 말미와 연결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끝내 말하지 않은(못한) 결혼의 무의미성 혹은 유해성을 감추지 않고 작정하듯 전달한다. 결혼은 결코 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는 것이다. 결혼은 '합법적 매춘'과 다름 아니다. 결혼은 더 이상 성스러운 의식이 아니다. 상류사회의 시장에서 벌어지는 거래로서 매매춘과 다를 바 없다. 유곽의 여성과 사교계의 여성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믿는 소설 속 화자(그)의 다음 대사는 과히 충격적이다. "엄밀히 말해서 짧은 기간의 창녀는 경멸을 당하고, 긴 기간의 창녀는 존경을 받는 거지요."

2-⑶. 『악마』

『악마』는 더 파격적이다. 이 소설은 섹스 자체를 부정한다. 참한 아내를 두고 평범한 가정을 이룬 예브게니는 아버지로부터 일부의 유산과 많은 빚을 상속받는다. 빚을 갚기 위해 물려받은 농장을 열심히 경영해나간다. 하지만 그에게는 큰 고민이 있다. 주체할 수 없는 성적 욕구 때문이다. 고민하던 중 지인으로부터 동네의 유부녀를 섹스 파트너로 소개받아 수시로 욕정을 채운다. 성적 욕망에 불타오를 때마다 그녀와 은밀한 곳에서 섹스를 한다. 그러다 동네에 소문이 나게 되고 다시 정신을 차려 가정에 충실하고 농장 일에 집중하려 하지만 섹스 파트너에 대한 욕망의 심연을 지우기란 쉽지 않다. 자기 자신과 섹스 파트너의 모습에서 '악마'의 현현을 느낀다. 이에 괴로워한 예브게니는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악마』는 톨스토이가 집필한 뒤 집 소파에 숨겨둔 작품인데 나중에 아내 소냐가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톨스토이가 숨겨둔 이유는 톨스토이 자신의 자전적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톨스토이는 이미 16세 때 매춘부에게 자신의 동정을 버렸다. 또한 결혼 전에 농노의 아내와 육체적 관계를 갖기도 했다. 그 사이에서 아들도 태어났다. 톨스토이가 그 시절 얼마나 육체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는 그의 일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시절의 자신을 '악마'로 보았던 것 같다. 후기 톨스토이는 성적 욕망 자체를 결혼과 상관없이 악하게 보는 입장이다. 결혼의 본질이 정신적인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욕구에 있다고 냉소할 정도로 결혼(가정)에 부정적이다. 『악마』는 이러한 후기 톨스토이의 결혼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2-⑷. 『신부 세르게이』

『신부 세르게이』는 조금 특별하다. 이 소설은 결혼과 사랑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우회적으로 비아냥대며 정작 중요한 삶의 본질이 있음을 강조한다. 약혼자가 황제의 정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주인공)는 파혼하고 신부가 된다. 수도원에서 철저한 금욕주의적 삶으로 일관하는 남자에게 외부의 유혹이 찾아온다. 어느 이혼녀가 은자 생활하는 곳까지 찾아와 유혹하지만 도끼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냄으로써 위기를 이겨낸다. 이후 병 고침의 기적까지 행하면서 점점 유명세를 탄다. 그러다 어느 날 치료를 위해 찾아온 22살의 금발 여성의 유혹에 결국 무너져 버리고 만다. 충격을 받은 남자는 신은 없다고 단정하고 농촌을 떠돌며 부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모든 걸 버리고 죽기로 작정한 순간 어렴풋이 어릴 때 알았던 자신의 여자친구를 기억하게 되고 그녀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삶의 진리를 발견하고 자유함을 느낀다. 그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소자에게 물 한잔 떠주는 것에 삶의 진리가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 소설이 우회적으로 결혼과 사랑을 비아냥댄다는 건 성직자의 고결한 신앙심과 과거 유혹을 이겨낸 절개마저도 젊은 여자의 유혹 앞에서 단 한순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한계의 장면에서 읽을 수 있다. 또한 사랑해서 결혼을 코앞에 두었지만 과거가 있는 예비 신부의 솔직한 고백 앞에 모든 것을 거부하는 극단적인 모습은 사랑의 궁극을 초라하게 만들 정도로 난감하다. 결국 톨스토이는 행복의 궁극을 가정이 아닌 사회에서 찾는다. 가정은 행복할 수도 없고 행복해서도 안 되는 곳이다. 진정한 삶은 신의 계시를 통해 항시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변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해 선한 행동을 하는 데 있는 것이었다. 즉 『신부 세르게이』는 금욕주의, 무정부주의, 인도주의 등으로 대변되는 '톨스토이즘(Tolstoyism)'의 가장 완성된 형태를 보여준다.

3. 정리

정리하면 『가정의 행복』은 전기 톨스토이를 대변하는 소설로 결혼과 가정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반면 『크로이체르 소나타』 외 2개 소설은 톨스토이가 노년이 되어 쓴 후기작으로 안온한 결혼생활과 정신적 사랑을 거부한다. 사실 전기 톨스토이가 옳으냐 후기 톨스토이가 옳으냐는 무의미하다. 이 글의 첫 문단에 "사랑과 결혼과 섹스는 하나다"라고 외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초기작 『가정의 행복』이 더 끌리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네 개의 중편 모두를 긍정한다. 내용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을 끌어낸다. 성과 결혼에 대한 개별적 담론이 행복하고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위해 정작 무엇이 중요한지를 가감 없이 들추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 가지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으로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라는 명언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절대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돈(능력/책임)'과 '성(性, sex)'이다. 이 두 가지는 톨스토이의 전작에 일관되게 흐르는 테마이기도 한데 실제 결혼생활에서 이것들만큼 민감하고 결정적인 건 없다. 어쩌면 톨스토이의 결혼생활도 이것이 충만했을 때 행복했고 이것이 문제였을 때 불행했을 것이다. 그렇다. 다시 말해 남편의 부양력이 중심이 된 윤택한 경제생활과 부부 사이의 친밀한 육체적 관계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가장 긴요한 전제조건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보다 심화된 논설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4-⑴. [심화]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두 가지 키워드 - ① 남자(남편)의 경제적 책임감

행복한 결혼생활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할 때 정말 어려운 건 그것이 부부 사이만 아는 내밀한 영역을 관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영역이기에 가정(결혼)과 관련한 수많은 책을 읽었고 상담자로서 많은 부부클리닉을 진행해왔다. 부부관계에 위기를 겪는 지인들과 정말 깊은 상담을 나누었다. 그러면서 결혼생활의 근본적 위기가 '남자의 경제적 무책임'과 '부부 사이의 섹스 트러블', 이 두 가지에 대부분 기인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또한 당사자들은 이 두 가지 진실을 밖으로 드러내기 싫어하고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았다. 대부분 '성격 차이'라고 전하는 이혼 사유도 기실 진실을 감추기 위한 가장 만만한 수사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성격이 차이 나서 싸우는 게 아니라 다른 내밀한 원리가 고장 났기 때문에 서로 간 맞지 않는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남자의 경제적 책임감과 부부 사이의 성적 친밀성은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절대 명제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장려되고 맞벌이가 보편화된 사회에서 '남자의 경제적 책임'을 강조하는 건 고리타분한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아니냐 항의할 사람이 있겠지만, 이는 진실이다. 아담과 하와 이래 남성의 본질은 '일하는 것'에 있다. 남성은 존재적으로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일과 사랑에 균형이 이루어질 때 자존감이 결핍되지 않은 완전한 남자가 된다. 이는 문화인류학적, 사회학적으로 "남자의 위치는 여자의 위치를 결정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라는 진실로 연결된다. 즉 남자가 잘나가면 여자는 그 영광을 따라가지만 그 거꾸로는 되지 않는 것이다. "여자(처가) 잘 만나서 복받았다"라는 세간의 얘기는 대부분 뒤에서 "쯧쯧. 남자 새끼가..."라는 험담을 전제로 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부정할 수 있을까. 내 경험은 대부분 이 진실을 지지했다.

최소한 처자식을 먹여살릴 수 있는 기초적인 부양력은 결혼한 모든 남자가 가져야 할 기묘한 숙명이다. 여자의 경제력이 이를 커버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될 경우 이상하게 잡소리가 생긴다. 남자 스스로의 자격지심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아내 돈으로 살아가는 무능한 남편은 자신만 모를 뿐, 아니 알려 하지 않을 뿐 일차적으로 아내 속 깊은 곳에 상처를 새긴다. 더 나아가 부모와 자식에게는 안줏거리가 된다. 주변 이웃들에게는 공공연한 비밀 험담의 주제가 된다. "아내가 착하고 자기도 크게 신경 쓰지 않기에 우리 가정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남자들이 있다. 착각하지 말라. 조소와 비아냥은 허공을 떠돌다 결국 자기들(당사자 부부)에게 도착해 둘 사이의 정서적 온기를 파괴하는 조악한 바이러스가 된다. 나는 이 실례를 주변에서 수없이 봐왔다.

물론 여자의 피나는 노력으로 이를 극복한 사례가 없지 않다. 그리고 정말 일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남자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것이 복이든 벌이든 신으로부터 죽을 때까지 일하는 존재로 규정된 남자의 존재적 당위에서 '일하지 않는 남자(돈 벌지 않는 남자)'는 불편하고 어색하다. 어느 문명권에서나 그랬다. 지금도 그렇다. 여권이 앞선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자의 위치는 남자의 위치를 결정하지 못한다. 부정하려 해도 기각되지 않는다. 인류 보편적 DNA로 전 지구인에게 체화된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이를 여자의 자기계발이나 경제력을 무시하거나 전업주부의 노동을 폄하하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남자의 본질과 결혼생활의 원리 면에서 보편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4-⑵. [심화]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두 가지 키워드 - ② 부부 사이의 성관계(sex)

행복한 가정을 위한 또 하나의 절대 명제는 부부 사이의 섹스다. 건강한 부부는 결코 섹스로 스트레스 받지 않는다. 내가 아는 모든 행복한 부부는 부부관계(섹스)가 원활했고 내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불행한 부부는 부부관계가 원활하지 못했다. 이는 여자(아내)의 가장 중요한 역할(의무)을 드러내는데 그건 남자(남편)의 성욕을 이해하고 거기에 봉사하는 노력이다. 물론 거꾸로(남편->아내)도 해당한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여자보다 10배나 많은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을 가진 남자의 동물적 욕구가 더 강하기 때문에 비율상 전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남자의 절제와 여자의 이해(노력)가 화합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트러블이 생긴다. 적지 않은 부부가 이 대목에서 갈등을 가진다. 하고 싶은 남편과 하기 싫은 아내 사이에 불편한 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고장 나면 서로가 싫어진다. 어색해지고 냉랭해지며 거칠어진다. 어디서 말하기도 어렵다. 비극이다.

부부의 섹스는 고결한 것이다. 흔히 사랑의 삼원성(三原性, triality)을 얘기할 때 완벽한 절대 사랑 아가페(agape)를 치열하게 밀어주는 건 바로 감각의 사랑 에로스(eros)다. 또 다른 사랑의 원형 필리아(philia)가 사랑의 태도를 규정한다면 에로스는 사랑에 감각적 열정을 더한다. 조금 난해한 원리이기 때문에 이를 설명하고 이해함에 있어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인용하고자 한다. 신약성경은 남편을 '그리스도'로 아내를 '교회'로 상징한다. 남편과 아내의 가장 중요한 책임(역할)으로 남편은 아내에 대한 사랑을, 아내는 남편에 대한 순종을 제시한다. 즉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죽으심 같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 복종한 것처럼 남편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구약성경 <아가서>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메타포 되는데 부부 사이의 성적 행위가 얼마나 고결하고 아름답게 천국의 모습을 형상화하는지를 알려준다.

<아가서>에 함의된 부부 사이의 육체적 사랑의 의미에 대해 조금 더 보태보겠다. <아가서>의 기자는 욕정에 불 타오르는 남녀 간의 사랑, 즉 에로스적 사랑을 하나님(기독교 삼위일체의 신)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노래한다. 이는 남녀 간의 연합의 의미를 통해 하나님과의 연합에 대한 좋은 통찰을 제공하는 데 결혼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부부는 이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사이이며 사랑하기에 서로가 원하는 것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사이이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연합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연합이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치이며 그 뜻에 대한 순종이라고 할 수 있다. 성도가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경험하다 보면 하나님의 뜻을 확신할 수 있다. 나아가 사랑하기에 어떤 어려운 계명도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다. 그 순종의 정점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인데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즐거움으로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즉 부부의 육체관계야말로 가장 치열한 영적 행위인 것이다.

부부관계조차도 인간의 동물적 욕정으로 본 후기 톨스토이의 시각은 지나치게 편협하고 단선적이다. 물론 사랑과 성욕 사이에 긴장감이 있다는 걸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그리스도-교회' 관계의 표상처럼 부부관계 안에서는 사랑은 성욕을 포괄하고 성욕은 사랑을 끌어준다. 분리되는 게 아니라 합일됨으로 온전한 아가페로 나아간다. 부부의 섹스는 서로에 대한 애정과 찬미, 미움과 아쉬움을 용해시키는 용광로와 같은 것이며, 서로를 가장 열정적으로 긍정하는 찬란한 천국적 행위이다. 그렇기에 본질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너를 위한 것이며 때로는 너를 위할 때 비로소 나의 것이 되기도 하는 신비의 의식이다. 결국 필연적으로 서로(부부)의 것이 되고야 마는 신성적 마술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부의 '몸의 연합'인 것이다. 이것이 무너진 부부는 행복할 수 없고 그 결혼생활은 싸늘한 공기에 사로잡힐 뿐이다. 부부관계가 냉랭하다면 반드시 이 대목을 점검하라.

톨스토이의 말대로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다. 가정을 이루는 여러 각론이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총론에 모두 묻히고 치환되기 때문이다. 정작 당사자들만 애써 부정하며 다른 소리를 할 뿐.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건강한 결혼생활은 요원하다. 여전히 부부관계를 말하는 건 어렵다. 온전히 둘만의 영역이다. 부부 사이는 은밀하고 섬세하고 예민한 공간이다. 어느 누구도 들어가면 안 된다. 부모든 자식이든 친구든 그 어떤 것이든 말이다. 부부는 촌수도 없고 세금도 없다. 서로 완벽한 합일과 연합을 이룸으로써 고된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관계다. 어쩌면 톨스토이가 말년으로 갈수록 결혼과 사랑을 부정한 이유가 본인 스스로 가정 안에서 천국적 삶을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자기 거부적(회피적) 역설이지 않았을까.

5. 마무리

서평을 정리하자. 책 리뷰보다 결혼에 관한 리뷰어의 주관이 길게 서술된 장황한 글이 됐다. 그럼에도 톨스토이의 소설을 통해 행복한 결혼생활을 탐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자평한다. 톨스토이가 위대한 건 바로 그 특유의 지나친 솔직함에 있다. 청년 시절 창녀촌에 가서 동정을 잃은 일기를 굳이 결혼 직전에 아내에게 공개할 정도로 솔직한 그의 작품에는 정말 말하기 힘든, 하지만 정작 진실을 담고 있는 많은 삶의 편린이 담겨 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그 최전선 작품이다. 허투루 지나칠 없는 고전이다. 반드시 읽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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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여러 출판사에서 리커버리 출간이나 기념 이벤트를 준비할 것으로 예측된다. 나도 이런 분위기에 살짝 편승하려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명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조만간 다시 읽으려 계획 중이다. 전에 읽은 것과 다른 번역본을 찾았다. 현재 소장 중인 민음사판(김연경 교수 역)이 문제 있어서는 아니다. 도스토옙스키의 문체가 다분히 찰지고 개성 있기 때문에 권위 있는 다른 번역본으로 읽어보는 것도 감상의 확장을 위해 좋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은 게 김학수 교수가 번역한 범우사판이다. 절판되진 않았지만 중고를 찾았다. 이유는 앞서 얘기한 리커버리 출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번지르르한 새 책은 그때 구입하면 된다.

 

도스토옙스키 얘기로 글 문을 열었지만 실제 내 현재 관심사는 톨스토이다. 지금도 톨스토이의 소설을 손에 들고 있다. 톨스토이의 3대 장편을 걸쭉한 감동으로 읽은 나에게 그의 중·단편들은 또 다른 성격의 울림으로 읽히고 있다. 특히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뻑 간 나머지 서평을 어떻게 쓸지 고민스러울 정도다. 지금 읽고 있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도 압권이다. 이에 그의 모든 작품을 섭렵하기로 결심했다. 톨스토이 전작에 뛰어든 것이다. 아이로니컬하다. 도스토옙스키 200주기를 맞이해 톨스토이에 빠지게 됐으니 말이다. 이런 와중에 주변 지인들로부터 톨스토이에 대한 관심을 문의 받았다. 총 두 사람인데 교회의 협동목사님과 친동생처럼 지내는 회사 후배이다. 이에 그들에게 책 선물을 하기로 했다.

 

톨스토이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쓴 78편의 전작(全作)을 소화하는 게 가장 입체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효율과 압축을 위해 보통 3대 장편(『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을 꼽는 편이다. 3개 대작 중 앞선 두 개는 문학적·예술적인 면에서 단연 걸작으로 꼽히지만 뒤의 것은 그에 미치지 못하다고 평가받는다. 톨스토이의 작가적 세계관은 『안나 카레니나』를 전후로 크게 구분되는데 이 소설을 정점으로 이후 작품들이 지나친 종교적 관점과 금욕(절제)주의에 함몰되어 다소 따분해진 측면이 없지 않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나에게도 후기작 『부활』은 한없이 밋밋했다. 이러한 톨스토이 문학의 변화를 음미하는 것도 나름 굉장한 쾌감이다.

 

톨스토이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누가 뭐래도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다. 『안나 카레니나』는 제법 대중적인 작품으로 주변에 읽어본 사람이 적지 않지만 『전쟁과 평화』는 읽은 사람이 거의 없다. 과거 서평에서 지적한 대로 대부분 『전쟁과 평화』의 존재와 명성은 알고 있지만 정작 실제 읽은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총 4권으로 2200페이지가 넘고 등장인물만 550여 명에 달하는 이 거대한 소설을 읽어낸다는 건 웬만한 독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힘든 일일 것이다. 더 흥미로운 건 읽지 않은 사람 중 일부는 자기 책장에 자신도 모르게 이 소설을 꼽아놓고 있다는 점이다. 과히 신비의 소설이라 할 만하다.


톨스토이 마니아나 러시아 문학 그룹 사이에서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 중 어떤 작품이 더 훌륭한가"라는 질문이 간혹 화두가 될 때가 있다. 쉽지 않은 질문이다. 사람마다 문학적 취향과 작품의 해석은 다르기 마련이다. 문학평론가 이현우 씨(필명:로쟈)의 말대로 『전쟁과 평화』는 '소설을 초과하는 작품'이고 『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의 끝장을 보여준 작품'이다. 『전쟁과 평화』는 스케일과 구조 면에서 전무후무한 독자성(獨自性)을 가진 소설이고 『안나 카레니나』는 장편소설이란 장르로서 최고의 예술적 경지에 오른 소설이다. 무엇이 더 훌륭하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있는 작품들이 아니란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하나를 꼽아야만 한다면 나는 『전쟁과 평화』를 선택하겠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전쟁과 평화』에 조금 더 애착이 간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을 때보다 『전쟁과 평화』를 읽을 때 내 컨디션이 좋았고 내 마음의 크기가 컸기 때문이다. 『전쟁과 평화』는 과히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소설이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의 한복판에서 사랑하고 성장하는 젊은 남녀들의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진다.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 아래서 포효하고 방황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다채롭게 그려졌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인상과 역동은 숨이 멎을 정도다. 안드레이의 진지함, 니콜라이의 일관성, 피에르의 자유분방함, 나타샤의 생명력 등은 이 소설이 역사소설을 넘어 삶과 사랑에 대한 웅대한 예찬서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완독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소설 말미에 도착했을 때의 농밀한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삶이란 무엇일까.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100년도 채 되지 않는 한 사람의 인생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인생의 후반부로 갈수록 평소 중요하고 민감하게 생각해온 것이 실제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진실에 마주하게 된다. 이런저런 걱정과 고난에 번민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미워하며 조금 더 가지기 위해 발버둥 치는 추악하고 고단한 일상은 우리에게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톨스토이는 답한다. 삶이란 그저 그렇게 사는 것임을. 보잘것없는 농노 한 사람의 지혜가 황제 나폴레옹의 패기를 전복하고 귀족 피에르에게 깊은 깨우침을 선사한 것처럼 인생이란 크고 작은 것과 무관하게 그냥 그렇게 묵묵하게 살아가는 것임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평화'의 의미라는 걸 알려준다.

 

책 선물을 한다는 얘기에 너무 장황한 서설이 붙었다. 톨스토이의 대작 『전쟁과 평화』를 두 명의 지인에게 선물한다. 번역본은 박형규 전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의 문학동네판을 골랐다. 박 교수는 해방 후 러시아 문학 1세대ㅡ1.5세대로 보는 사람도 있음ㅡ학자로서 학구열이 대단한 번역가이다. 90세의 노년임에도 그의 번역 활동은 끊임없이 현재진행형이다. 성실하고 세심한 번역으로 정평이 나 있다. 특히 그의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고 오류가 없으며 한국어 어휘 구사력이 탁월하여 통상 옛 번역의 한계로 지적되는 '투박함'이란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잘 읽히는 번역이 세련되고 현대적이라 하여 각광을 받는 추세라 한다. 최근 몇 년간 『전쟁과 평화』도 수많은 번역본이 쏟아졌다. 그중 젊은 번역가 연진희 씨의 민음사판도 좋다. 문학동네판이 우아한 문어체의 맛을 살렸다면 민음사판은 젊은 세대의 가독성을 염두에 둔 듯 문장을 잘라서 구어체를 부각시켰다. 두 번역본 모두 훌륭하다. 기호에 맞게 선택하면 될 일이다.

 

책 선물을 받을 두 분에게 큰 감동이 있기를 바란다. 두 분 모두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내 인생 소설을 공유하게 되어 기쁘다. 그들이 『전쟁과 평화』의 완독에 성공하여 서로 다른 리뷰를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간만의 책 선물에 가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일상의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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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부부의 세계>, <우리 이혼했어요> 등 이혼을 다룬 TV 프로가 인기를 끌고 있다. 방송국에서는 수요가 있기 때문에 제작했을 것이기에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이혼을 금기시하지 않는다는 걸 자연스럽게 방증하는 현상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2019년 통계청이 발표한 대한민국 조이혼율(천 명당 이혼건수)은 2.2로 세계 27위다. OECD 국가 중에서도 높은 편에 속한다. 경제 발전의 속도만큼 이혼율도 급격히 올라갔다. 그에 따라 대중의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이혼을 바라보는 시선이 과거에 비해 크게 여유 있어졌다. 물론 이런 변화는 장단점이 있다.


나는 '가정주의자'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가정이며 인생이란 결국 거기서 시작해서 거기서 끝난다고 보는 사람이다. 행복한 가정이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고 믿는 보수주의자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견해는 틀렸다. 그는 인간의 제도와 이성으로 사회를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역사는 그의 오만한 생각을 비웃었다. 진실은 달랐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경도된 다양한 직업정치인들이 20세기에 등장했다. 그들은 낭만적이었고 여러 가지 제도와 실험을 실행했다. 20세기에 벌어진 다양한 사회공학적 시도들은 인류를 기아, 살육,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사회는 인류를 구원하지 못한다. 천국의 원형은 가정에 있다. 사회가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가정이 천국이 될 때 비로소 세상은 살기 좋아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은 어떻게 천국이 되는가. 많은 사회학자, 심리학자, 범죄학자, 교육학자들이 여기에 천착했다. 답은 간단했다. 부부관계였다. 그렇다. 행복한 가정의 필요충분조건은 단연 건강한 부부관계다. 가정이 화목하기 위해서는 남편(아빠)과 아내(엄마)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존중해야 한다. 이 당위가 무너질 경우 천국이 되어야 할 가정은 지옥이 되고 사회는 고통스럽다.


이혼을 다룬 TV 프로를 보며 가장 마뜩지 않았던 건 바로 방송국의 기획 태도이다. TV조선 <우리 이혼했어요>를 보자. 이혼 당사자들이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고 이런저런 속 얘기를 나눈다. 이혼 후의 소소한 일상이 주를 이루지만 가끔 진지한 모습도 비친다. 하지만 대부분 가볍고 경박한 모습이다. 자식들의 모습도 보인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이혼을 자랑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혼 당사자 만큼 가슴 아픈 사람이 누가 있겠냐 마는 미디어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기 때문에 "굳이 저런 모습까지 방송에 나와야 하나" 하는 불편함이 있다. 보는 내내 씁쓸하다.


이혼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자랑할 것도 아니다. 나는 이혼의 부정적 영향을 냉정히 우려하면서도 이혼 자체에 대해 선악의 가치판단을 매기는 건 지지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외도(바람) 외에는 이혼은 삼가야 한다고 보는 보수적 입장이지만 이혼 당사자들의 고뇌와 결단을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꼴불견은 아니다. 이혼은 어마어마한 상처다. 어느 누가 애초부터 이혼을 바랐겠는가. 살다 보니 연애할 때는 알지(보이지) 못했던(않았던) 상대의 여러 디테일이 확인될 것이다. 둘 사이 원치 않은 크고 작은 분쟁과 더불어 두 사람 바깥에서도 예기치 않은 갈등이 발생할 것이다. 지옥 같은 삶을 오직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명제 만으로 참고 산다는 건 부당하다. 그렇기에 용기 있게 이혼을 결정하고 홀로서기한 사람들을 나는 진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한다.


문제는 세상 일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혼의 아픔은 개인의 상처로만 끝나지 않는다. 가족과 주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부모에게도 불효다. 더욱이 자식이 있는 경우라면 그 영향은 고스란히 아래로 흘러내린다. 물론 부양자의 피나는 노력과 성공한 재혼의 삶을 통해 자식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최소화하는 경우도 있다. 재혼 없이 혼자서 자식을 성공적으로 키워낸 편부모도 있다. 그들의 노력과 성공은 찬란하다. 나는 그들의 용기와 기백을 지지한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부모의 재혼은 자식의 상처를 안고 가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어머니 콤플렉스'를 극복해 '아버지의 위치'를 찾아 나서는 존재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증상을 책과 실례를 통해 수없이 목도했다.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정태기 총장은 말한다. 유태인 자녀교육의 핵심은 부부 사이에 절대 싸우지 않는다는 것임을. 자식이 부모가 대판 싸우는 모습을 지켜본 충격은 생사의 전쟁터에서 가장 친한 전우가 총에 맞아 내장이 터져 나오는 모습을 본 충격과 동일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하루에 600회 이상 반복되어 아이의 정서와 심리를 파괴한다고 한다. 그래서 유태인 부모는 절대로 아이가 보는 앞에서 싸우지 않는다. 부모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마음속에 커다란 항아리를 품는다. 그 항아리에 자아는 물론 타인과 세계, 물질과 정신, 꿈과 미래를 넣는다. 항아리가 클수록 큰 사람이 된다. 바로 그것이 소수민족 유태인이 초강대국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 등의 전 영역을 휩쓴 비결이라고 정 총장은 일갈한다.


내가 이혼을 다룬 TV 프로의 기획 태도를 문제 삼고 강하게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이 대목이다. 이혼을 둘만의 문제로 다루는 미디어의 단견이 꼴사납다. 마치 이혼을 자랑하고 미화하는 듯한 뉘앙스는 아무리 쿨하게 보려 해도 지나치다. 더욱이 그 어느 때보다 영상 및 방송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진 작금의 세태를 감안했을 때 해당 TV 프로의 조악성과 위험성은 충분히 지적할 만하다. 이혼은 죄도 아니고 감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당히 드러내고 자랑할 것도 아니다. 가정의 파괴를 한낱 이혼 당사자의 후일담 정도로 각색하는 세간의 트렌드가 정말이지 짜증 나서 못 견디겠다. 차라리 밝고 건강한 가정을 세우기 위한 방법론이나 이혼 이후의 상처를 치유하는 실례 등을 다루라.


주변에 이혼한 사람이 여럿 있다. 이혼 전후 상담을 해준 사례도 적지 않다. 절반은 후회한다고 말하고 절반은 시원하다고 말한다. 흔히 부부관계는 내밀한 영역이기에 어느 누구도 모르고 오직 두 사람만 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 진솔하게 속 깊은 곳까지 오픈해서 상담하다 보면 이혼의 원인은 결국 '두 가지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비밀을 알게 된다. 정작 당사자들만 모를 뿐. 아니 알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 애써 부정하려고 할 뿐. 여기서 그 '두 가지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예민할 뿐만 아니라 많은 지면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별도로 다루겠다.


바야흐로 가정이 파괴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가정(가족)은 인간 공동체를 지탱하는 최소단위로서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온 숭고한 아이콘이다. 본질적으로 천국은 죽어서야 갈 수 있다. 그러나 가정만은 인간이 살아서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작은 천국'이다. 이혼은 가정이 파괴된 외형이다. 이혼에 따른 당사자의 고통이 적지 않겠지만 어찌 되었든 파괴이고 상처이고 아픔이다. 그렇기에 이혼 후(後)가 아닌 이혼 전(前)이 중요하다. 결혼은 신중해야 한다. 배우자를 고르는 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다. 결혼생활을 잘 해내는 지혜는 지상 최대의 과제이다. 그렇기에 젊은 나이에 막 살지 말고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훈육하라. 그리고 결혼했으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정말이지, 최선을 다하라. 천국은 결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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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문화권력 3인방 - 백낙청·리영희·조정래 비판
조우석 지음 / 백년동안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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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탄핵 이후 한국 보수는 피폐했다. 멸망 수준까지 망가졌다. 과거에는 보수정권이 아무리 헛발질해도 흔들리지 않는 35% 전후의 고정 팬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끄러웠던 '최순실 게이트'는 절대 부동의 35% 팬심을 와해시켰고 한국 정치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문재인은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집권 4년 차인데도 여전히 실력(성과)보다 높은 지지율을 구가하고 있다. 국회도 넉넉히 과반수를 넘겼다. 법원도 기울었다. 언론도 바뀌었다.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보수는 여전히 지리멸렬하다.


나는 이전까지 한국 사회의 이념적 지형이 북한과 분단의 영향으로 우익(右翼, right)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해왔다. 공산주의 자체가 풍기는 썩은 냄새가 역겨울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꾸준히 헛짓거리를 해주기 때문에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최소 30%의 국민은 고정된 보수·우익이 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틀렸다. 한국 사회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상당히 왼쪽으로 기운 운동장이었다. 한반도 상황에서의 자연스러운 반공 정서만 생각했지 문화와 지식 권력에 스며든 단단한 진보·좌익적 세계관을 낮게 평가한 것이다.


조우석의 『좌파 문화권력 3인방』은 이러한 나의 뒤늦은 인식에 적절한 말미를 제공해 준 책이다. 이 책은 한국 사회에 우뚝 서 있는 문화·지식 권력의 좌경화를 신랄하게 꼬집고 고발한다. 큰 틀에서 지식인 세 명을 대놓고 두들겨까는데 그 논증과 문체가 흥미롭다. 출판사 '창비'의 설립자이자 발행인 백낙청, 진보 계열 인사들이 사상의 은사로 모셔온 리영희, 『태백산맥』의 저자 소설가 조정래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 대부분이 그들을 향한 비판과 분노로 가득하다. 탄탄한 증거와 일관된 맥락이 뒷받침하고 있어 책 자체는 어설프거나 조악하지 않다.


저자의 첫 타깃은 백낙청이다. 백낙청이 누구인가. 1966년 계간지 「창작과 비평」을 창간해 한국 문단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 아닌가. 저자는 그 영향이 절대부정적이었다고 지적한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창비」와 백낙청은 한국 문단을 구조적으로 좌편향하여 본질적 수준에서 황폐화시킨 주범이다. 그 방식이 상당히 악질적인데 선호하는 작가를 전진 배치해 문학사의 주류로 끌어올리고 선호하지 않은 작가를 뒤로 밀쳐내는 방식이다. 그렇게 띄운 작가가 대표적으로 시인 김수영이다. 저자는 상당히 많은 지면으로 김수영과 그의 작품을 비판한다. 또한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과 시인 고은의 성추행 사건 때 백낙청이 보여준 이중적 태도를 위선적이고 치졸하다고 꼬집는다.


저자는 고 리영희 교수를 '종북 지식인 1호'로 명명한다. 리영희가 1970년대에 젊은이들에게 끼친 악영향은 전방위적인 것이었다고 질타한다. 사실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등이 리영희의 명저로 꼽히는데 세 권을 모두 읽어본 나로서도 이 책들이 왜 좋은 평가를 받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봤는가. 어설픈 반미와 조악한 반 대한민국 내용으로 일관하는 쓰레기 같은 내용이다. 더욱이 모택동과 현대 중국의 찬양과 숭배는 과히 못 봐줄 수준이다. 훗날 전향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중국에서 북한으로 시선만 바꿨을 뿐이다. 끝까지 비겁한 지식인으로 남은 리영희는 백낙청보다 더 나쁜 숙주다.


소설가 조정래는 저자에 의해 '남로당에 사로잡힌 영혼'으로 규정된다. 한국 근현대사 전체를 포괄한 조정래의 대하소설 3부작, 즉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은 낱권 기준 1,550만 부 이상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많이 팔린 만큼 대중의 한국 근현대사 통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저자는 조정래의 소설은 '문학의 옷을 걸친 반역 소설'이라고 기각한다. 이를 논증할 만한 소설 속 여러 장면과 상황을 소개하는데 충분히 고개가 주억거린다.


오래전 『태백산맥』을 완독한 내 감상도 저자의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태백산맥』이란 작품은 순수 문학적 관점에서 수준 높은 소설로 평가하기 힘들다. 소설은 캐릭터와 우연성을 다루는 장르이다. 『태백산맥』 속 캐릭터는 작가에 짓눌려 작품 속에서 기계처럼 움직인다는 인상을 많이 받는다. 빨치산을 낭만적 전사로 그린 것에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주인공들의 매력과 생명력은 만화 캐릭터처럼 굳어 있다. 더욱이 역사소설은 사실의 명백한 토막 사이에 작가적 상상력을 붙여야 한다. 그러나 자주 발견되는 역사적 오류는 큰 흠이다. 박경리의 『토지』보다 한참 못하다.


저자는 세 지식인 외에도 그들의 영향을 받은 몇몇 아류의 비판도 놓치지 않는다. 철학자 김용옥(도올), 소설가 한강,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 등이다. 개신교·천주교 등의 일부 종교권의 좌익 현상과 현 집권 여당 더불어민주당의 심각한 좌경화 역사에 대해서도 흥미롭게 기술한다. 저자는 이런 것들이 끼친 한국 사회의 해악에 대해 분노에 찬 필치로 서술한다. 반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할 참 지식인을 소개한다. 저자가 추천한 참 지성 2인은 소설가 복거일과 교수 양동안이다. 그들의 저작과 일갈을 인용하며 한국 지식계가 마냥 죽은 건 아니라고 희망을 엿보기도 한다. 부정과 긍정이 분명하기 때문에 읽는 이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은 비판 대상을 에두르지 않고 직선으로 파고들어 공격한다. 얄짤없다. 시원시원하다. 언론인이며 문화평론가인 저자의 필력은 돋보인다. 사실관계의 정확한 편재 위에서 자기 주관을 덧붙이니 문장에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다. 물론 진영적으로 다분히 오른쪽에 있는 저자의 이념 지도를 모르지 않는다. 평소 저자가 이승만과 박정희를 높게 평가해오고 관련 그룹에서 활발히 활동해온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이력이 저자의 논리를 기각하지는 못한다. 사실은 사실이고 주관은 주관이며 입장은 입장이기 때문이다. 장장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할애하여 거침없고 일관되게 쏟아내는 저자의 좌파 비판은 충분한 힘과 논리가 있다.


언제부턴가 보수·우익이란 게 서글퍼졌다. 보수라 하면 마치 똥 쳐다보듯이 한다. 적어도 한국에선 그렇다. 전 세계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나라 대부분이 보수의 세상이 됐다고 떠들썩한데 한국의 보수는 거의 파멸 직전이다. 사실관계도 먹히지 않는 것 같다. 개인과 가족을 강조하면 이기주의자가 되고 능력과 효율을 언급하면 물질만능주의자가 된다.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에 파묻혀 악한 것이 되었다. 사회주의의 폐해를 얘기하면 '지금이 어느 때인데'라며 비웃는다. 반미, 페미니즘, 동성애는 세련됨의 아이콘이 됐다. 운동장은 기울어진 게 아니라 뒤집어졌다. 어떻게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었나. 우리의 선배 세대가 쌓아올린 위대한 대한민국은 어디 갔나. 그 원인을 분석하고 공부하는 연장선상에 이 책이 놓여 있다. 저자의 말이 전부 옳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 스며든 좌익적 세계관의 뿌리를 천착한다는 차원에서 참고할 만하다.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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