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여러 출판사에서 리커버리 출간이나 기념 이벤트를 준비할 것으로 예측된다. 나도 이런 분위기에 살짝 편승하려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명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조만간 다시 읽으려 계획 중이다. 전에 읽은 것과 다른 번역본을 찾았다. 현재 소장 중인 민음사판(김연경 교수 역)이 문제 있어서는 아니다. 도스토옙스키의 문체가 다분히 찰지고 개성 있기 때문에 권위 있는 다른 번역본으로 읽어보는 것도 감상의 확장을 위해 좋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은 게 김학수 교수가 번역한 범우사판이다. 절판되진 않았지만 중고를 찾았다. 이유는 앞서 얘기한 리커버리 출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번지르르한 새 책은 그때 구입하면 된다.

 

도스토옙스키 얘기로 글 문을 열었지만 실제 내 현재 관심사는 톨스토이다. 지금도 톨스토이의 소설을 손에 들고 있다. 톨스토이의 3대 장편을 걸쭉한 감동으로 읽은 나에게 그의 중·단편들은 또 다른 성격의 울림으로 읽히고 있다. 특히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뻑 간 나머지 서평을 어떻게 쓸지 고민스러울 정도다. 지금 읽고 있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도 압권이다. 이에 그의 모든 작품을 섭렵하기로 결심했다. 톨스토이 전작에 뛰어든 것이다. 아이로니컬하다. 도스토옙스키 200주기를 맞이해 톨스토이에 빠지게 됐으니 말이다. 이런 와중에 주변 지인들로부터 톨스토이에 대한 관심을 문의 받았다. 총 두 사람인데 교회의 협동목사님과 친동생처럼 지내는 회사 후배이다. 이에 그들에게 책 선물을 하기로 했다.

 

톨스토이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쓴 78편의 전작(全作)을 소화하는 게 가장 입체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효율과 압축을 위해 보통 3대 장편(『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을 꼽는 편이다. 3개 대작 중 앞선 두 개는 문학적·예술적인 면에서 단연 걸작으로 꼽히지만 뒤의 것은 그에 미치지 못하다고 평가받는다. 톨스토이의 작가적 세계관은 『안나 카레니나』를 전후로 크게 구분되는데 이 소설을 정점으로 이후 작품들이 지나친 종교적 관점과 금욕(절제)주의에 함몰되어 다소 따분해진 측면이 없지 않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나에게도 후기작 『부활』은 한없이 밋밋했다. 이러한 톨스토이 문학의 변화를 음미하는 것도 나름 굉장한 쾌감이다.

 

톨스토이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누가 뭐래도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다. 『안나 카레니나』는 제법 대중적인 작품으로 주변에 읽어본 사람이 적지 않지만 『전쟁과 평화』는 읽은 사람이 거의 없다. 과거 서평에서 지적한 대로 대부분 『전쟁과 평화』의 존재와 명성은 알고 있지만 정작 실제 읽은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총 4권으로 2200페이지가 넘고 등장인물만 550여 명에 달하는 이 거대한 소설을 읽어낸다는 건 웬만한 독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힘든 일일 것이다. 더 흥미로운 건 읽지 않은 사람 중 일부는 자기 책장에 자신도 모르게 이 소설을 꼽아놓고 있다는 점이다. 과히 신비의 소설이라 할 만하다.


톨스토이 마니아나 러시아 문학 그룹 사이에서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 중 어떤 작품이 더 훌륭한가"라는 질문이 간혹 화두가 될 때가 있다. 쉽지 않은 질문이다. 사람마다 문학적 취향과 작품의 해석은 다르기 마련이다. 문학평론가 이현우 씨(필명:로쟈)의 말대로 『전쟁과 평화』는 '소설을 초과하는 작품'이고 『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의 끝장을 보여준 작품'이다. 『전쟁과 평화』는 스케일과 구조 면에서 전무후무한 독자성(獨自性)을 가진 소설이고 『안나 카레니나』는 장편소설이란 장르로서 최고의 예술적 경지에 오른 소설이다. 무엇이 더 훌륭하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있는 작품들이 아니란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하나를 꼽아야만 한다면 나는 『전쟁과 평화』를 선택하겠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전쟁과 평화』에 조금 더 애착이 간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을 때보다 『전쟁과 평화』를 읽을 때 내 컨디션이 좋았고 내 마음의 크기가 컸기 때문이다. 『전쟁과 평화』는 과히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소설이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의 한복판에서 사랑하고 성장하는 젊은 남녀들의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진다.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 아래서 포효하고 방황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다채롭게 그려졌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인상과 역동은 숨이 멎을 정도다. 안드레이의 진지함, 니콜라이의 일관성, 피에르의 자유분방함, 나타샤의 생명력 등은 이 소설이 역사소설을 넘어 삶과 사랑에 대한 웅대한 예찬서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완독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소설 말미에 도착했을 때의 농밀한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삶이란 무엇일까.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100년도 채 되지 않는 한 사람의 인생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인생의 후반부로 갈수록 평소 중요하고 민감하게 생각해온 것이 실제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진실에 마주하게 된다. 이런저런 걱정과 고난에 번민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미워하며 조금 더 가지기 위해 발버둥 치는 추악하고 고단한 일상은 우리에게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톨스토이는 답한다. 삶이란 그저 그렇게 사는 것임을. 보잘것없는 농노 한 사람의 지혜가 황제 나폴레옹의 패기를 전복하고 귀족 피에르에게 깊은 깨우침을 선사한 것처럼 인생이란 크고 작은 것과 무관하게 그냥 그렇게 묵묵하게 살아가는 것임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평화'의 의미라는 걸 알려준다.

 

책 선물을 한다는 얘기에 너무 장황한 서설이 붙었다. 톨스토이의 대작 『전쟁과 평화』를 두 명의 지인에게 선물한다. 번역본은 박형규 전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의 문학동네판을 골랐다. 박 교수는 해방 후 러시아 문학 1세대ㅡ1.5세대로 보는 사람도 있음ㅡ학자로서 학구열이 대단한 번역가이다. 90세의 노년임에도 그의 번역 활동은 끊임없이 현재진행형이다. 성실하고 세심한 번역으로 정평이 나 있다. 특히 그의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고 오류가 없으며 한국어 어휘 구사력이 탁월하여 통상 옛 번역의 한계로 지적되는 '투박함'이란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잘 읽히는 번역이 세련되고 현대적이라 하여 각광을 받는 추세라 한다. 최근 몇 년간 『전쟁과 평화』도 수많은 번역본이 쏟아졌다. 그중 젊은 번역가 연진희 씨의 민음사판도 좋다. 문학동네판이 우아한 문어체의 맛을 살렸다면 민음사판은 젊은 세대의 가독성을 염두에 둔 듯 문장을 잘라서 구어체를 부각시켰다. 두 번역본 모두 훌륭하다. 기호에 맞게 선택하면 될 일이다.

 

책 선물을 받을 두 분에게 큰 감동이 있기를 바란다. 두 분 모두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내 인생 소설을 공유하게 되어 기쁘다. 그들이 『전쟁과 평화』의 완독에 성공하여 서로 다른 리뷰를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간만의 책 선물에 가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일상의 흔적을 남긴다.




 

 

 

http://blog.naver.com/gilsam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근 <부부의 세계>, <우리 이혼했어요> 등 이혼을 다룬 TV 프로가 인기를 끌고 있다. 방송국에서는 수요가 있기 때문에 제작했을 것이기에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이혼을 금기시하지 않는다는 걸 자연스럽게 방증하는 현상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2019년 통계청이 발표한 대한민국 조이혼율(천 명당 이혼건수)은 2.2로 세계 27위다. OECD 국가 중에서도 높은 편에 속한다. 경제 발전의 속도만큼 이혼율도 급격히 올라갔다. 그에 따라 대중의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이혼을 바라보는 시선이 과거에 비해 크게 여유 있어졌다. 물론 이런 변화는 장단점이 있다.


나는 '가정주의자'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가정이며 인생이란 결국 거기서 시작해서 거기서 끝난다고 보는 사람이다. 행복한 가정이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고 믿는 보수주의자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견해는 틀렸다. 그는 인간의 제도와 이성으로 사회를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역사는 그의 오만한 생각을 비웃었다. 진실은 달랐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경도된 다양한 직업정치인들이 20세기에 등장했다. 그들은 낭만적이었고 여러 가지 제도와 실험을 실행했다. 20세기에 벌어진 다양한 사회공학적 시도들은 인류를 기아, 살육,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사회는 인류를 구원하지 못한다. 천국의 원형은 가정에 있다. 사회가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가정이 천국이 될 때 비로소 세상은 살기 좋아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은 어떻게 천국이 되는가. 많은 사회학자, 심리학자, 범죄학자, 교육학자들이 여기에 천착했다. 답은 간단했다. 부부관계였다. 그렇다. 행복한 가정의 필요충분조건은 단연 건강한 부부관계다. 가정이 화목하기 위해서는 남편(아빠)과 아내(엄마)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존중해야 한다. 이 당위가 무너질 경우 천국이 되어야 할 가정은 지옥이 되고 사회는 고통스럽다.


이혼을 다룬 TV 프로를 보며 가장 마뜩지 않았던 건 바로 방송국의 기획 태도이다. TV조선 <우리 이혼했어요>를 보자. 이혼 당사자들이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고 이런저런 속 얘기를 나눈다. 이혼 후의 소소한 일상이 주를 이루지만 가끔 진지한 모습도 비친다. 하지만 대부분 가볍고 경박한 모습이다. 자식들의 모습도 보인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이혼을 자랑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혼 당사자 만큼 가슴 아픈 사람이 누가 있겠냐 마는 미디어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기 때문에 "굳이 저런 모습까지 방송에 나와야 하나" 하는 불편함이 있다. 보는 내내 씁쓸하다.


이혼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자랑할 것도 아니다. 나는 이혼의 부정적 영향을 냉정히 우려하면서도 이혼 자체에 대해 선악의 가치판단을 매기는 건 지지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외도(바람) 외에는 이혼은 삼가야 한다고 보는 보수적 입장이지만 이혼 당사자들의 고뇌와 결단을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꼴불견은 아니다. 이혼은 어마어마한 상처다. 어느 누가 애초부터 이혼을 바랐겠는가. 살다 보니 연애할 때는 알지(보이지) 못했던(않았던) 상대의 여러 디테일이 확인될 것이다. 둘 사이 원치 않은 크고 작은 분쟁과 더불어 두 사람 바깥에서도 예기치 않은 갈등이 발생할 것이다. 지옥 같은 삶을 오직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명제 만으로 참고 산다는 건 부당하다. 그렇기에 용기 있게 이혼을 결정하고 홀로서기한 사람들을 나는 진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한다.


문제는 세상 일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혼의 아픔은 개인의 상처로만 끝나지 않는다. 가족과 주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부모에게도 불효다. 더욱이 자식이 있는 경우라면 그 영향은 고스란히 아래로 흘러내린다. 물론 부양자의 피나는 노력과 성공한 재혼의 삶을 통해 자식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최소화하는 경우도 있다. 재혼 없이 혼자서 자식을 성공적으로 키워낸 편부모도 있다. 그들의 노력과 성공은 찬란하다. 나는 그들의 용기와 기백을 지지한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부모의 재혼은 자식의 상처를 안고 가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어머니 콤플렉스'를 극복해 '아버지의 위치'를 찾아 나서는 존재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증상을 책과 실례를 통해 수없이 목도했다.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정태기 총장은 말한다. 유태인 자녀교육의 핵심은 부부 사이에 절대 싸우지 않는다는 것임을. 자식이 부모가 대판 싸우는 모습을 지켜본 충격은 생사의 전쟁터에서 가장 친한 전우가 총에 맞아 내장이 터져 나오는 모습을 본 충격과 동일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하루에 600회 이상 반복되어 아이의 정서와 심리를 파괴한다고 한다. 그래서 유태인 부모는 절대로 아이가 보는 앞에서 싸우지 않는다. 부모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마음속에 커다란 항아리를 품는다. 그 항아리에 자아는 물론 타인과 세계, 물질과 정신, 꿈과 미래를 넣는다. 항아리가 클수록 큰 사람이 된다. 바로 그것이 소수민족 유태인이 초강대국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 등의 전 영역을 휩쓴 비결이라고 정 총장은 일갈한다.


내가 이혼을 다룬 TV 프로의 기획 태도를 문제 삼고 강하게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이 대목이다. 이혼을 둘만의 문제로 다루는 미디어의 단견이 꼴사납다. 마치 이혼을 자랑하고 미화하는 듯한 뉘앙스는 아무리 쿨하게 보려 해도 지나치다. 더욱이 그 어느 때보다 영상 및 방송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진 작금의 세태를 감안했을 때 해당 TV 프로의 조악성과 위험성은 충분히 지적할 만하다. 이혼은 죄도 아니고 감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당히 드러내고 자랑할 것도 아니다. 가정의 파괴를 한낱 이혼 당사자의 후일담 정도로 각색하는 세간의 트렌드가 정말이지 짜증 나서 못 견디겠다. 차라리 밝고 건강한 가정을 세우기 위한 방법론이나 이혼 이후의 상처를 치유하는 실례 등을 다루라.


주변에 이혼한 사람이 여럿 있다. 이혼 전후 상담을 해준 사례도 적지 않다. 절반은 후회한다고 말하고 절반은 시원하다고 말한다. 흔히 부부관계는 내밀한 영역이기에 어느 누구도 모르고 오직 두 사람만 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 진솔하게 속 깊은 곳까지 오픈해서 상담하다 보면 이혼의 원인은 결국 '두 가지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비밀을 알게 된다. 정작 당사자들만 모를 뿐. 아니 알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 애써 부정하려고 할 뿐. 여기서 그 '두 가지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예민할 뿐만 아니라 많은 지면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별도로 다루겠다.


바야흐로 가정이 파괴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가정(가족)은 인간 공동체를 지탱하는 최소단위로서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온 숭고한 아이콘이다. 본질적으로 천국은 죽어서야 갈 수 있다. 그러나 가정만은 인간이 살아서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작은 천국'이다. 이혼은 가정이 파괴된 외형이다. 이혼에 따른 당사자의 고통이 적지 않겠지만 어찌 되었든 파괴이고 상처이고 아픔이다. 그렇기에 이혼 후(後)가 아닌 이혼 전(前)이 중요하다. 결혼은 신중해야 한다. 배우자를 고르는 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다. 결혼생활을 잘 해내는 지혜는 지상 최대의 과제이다. 그렇기에 젊은 나이에 막 살지 말고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훈육하라. 그리고 결혼했으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정말이지, 최선을 다하라. 천국은 결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http://blog.naver.com/gilsam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좌파 문화권력 3인방 - 백낙청·리영희·조정래 비판
조우석 지음 / 백년동안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근혜의 탄핵 이후 한국 보수는 피폐했다. 멸망 수준까지 망가졌다. 과거에는 보수정권이 아무리 헛발질해도 흔들리지 않는 35% 전후의 고정 팬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끄러웠던 '최순실 게이트'는 절대 부동의 35% 팬심을 와해시켰고 한국 정치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문재인은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집권 4년 차인데도 여전히 실력(성과)보다 높은 지지율을 구가하고 있다. 국회도 넉넉히 과반수를 넘겼다. 법원도 기울었다. 언론도 바뀌었다.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보수는 여전히 지리멸렬하다.


나는 이전까지 한국 사회의 이념적 지형이 북한과 분단의 영향으로 우익(右翼, right)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해왔다. 공산주의 자체가 풍기는 썩은 냄새가 역겨울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꾸준히 헛짓거리를 해주기 때문에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최소 30%의 국민은 고정된 보수·우익이 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틀렸다. 한국 사회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상당히 왼쪽으로 기운 운동장이었다. 한반도 상황에서의 자연스러운 반공 정서만 생각했지 문화와 지식 권력에 스며든 단단한 진보·좌익적 세계관을 낮게 평가한 것이다.


조우석의 『좌파 문화권력 3인방』은 이러한 나의 뒤늦은 인식에 적절한 말미를 제공해 준 책이다. 이 책은 한국 사회에 우뚝 서 있는 문화·지식 권력의 좌경화를 신랄하게 꼬집고 고발한다. 큰 틀에서 지식인 세 명을 대놓고 두들겨까는데 그 논증과 문체가 흥미롭다. 출판사 '창비'의 설립자이자 발행인 백낙청, 진보 계열 인사들이 사상의 은사로 모셔온 리영희, 『태백산맥』의 저자 소설가 조정래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 대부분이 그들을 향한 비판과 분노로 가득하다. 탄탄한 증거와 일관된 맥락이 뒷받침하고 있어 책 자체는 어설프거나 조악하지 않다.


저자의 첫 타깃은 백낙청이다. 백낙청이 누구인가. 1966년 계간지 「창작과 비평」을 창간해 한국 문단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 아닌가. 저자는 그 영향이 절대부정적이었다고 지적한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창비」와 백낙청은 한국 문단을 구조적으로 좌편향하여 본질적 수준에서 황폐화시킨 주범이다. 그 방식이 상당히 악질적인데 선호하는 작가를 전진 배치해 문학사의 주류로 끌어올리고 선호하지 않은 작가를 뒤로 밀쳐내는 방식이다. 그렇게 띄운 작가가 대표적으로 시인 김수영이다. 저자는 상당히 많은 지면으로 김수영과 그의 작품을 비판한다. 또한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과 시인 고은의 성추행 사건 때 백낙청이 보여준 이중적 태도를 위선적이고 치졸하다고 꼬집는다.


저자는 고 리영희 교수를 '종북 지식인 1호'로 명명한다. 리영희가 1970년대에 젊은이들에게 끼친 악영향은 전방위적인 것이었다고 질타한다. 사실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등이 리영희의 명저로 꼽히는데 세 권을 모두 읽어본 나로서도 이 책들이 왜 좋은 평가를 받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봤는가. 어설픈 반미와 조악한 반 대한민국 내용으로 일관하는 쓰레기 같은 내용이다. 더욱이 모택동과 현대 중국의 찬양과 숭배는 과히 못 봐줄 수준이다. 훗날 전향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중국에서 북한으로 시선만 바꿨을 뿐이다. 끝까지 비겁한 지식인으로 남은 리영희는 백낙청보다 더 나쁜 숙주다.


소설가 조정래는 저자에 의해 '남로당에 사로잡힌 영혼'으로 규정된다. 한국 근현대사 전체를 포괄한 조정래의 대하소설 3부작, 즉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은 낱권 기준 1,550만 부 이상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많이 팔린 만큼 대중의 한국 근현대사 통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저자는 조정래의 소설은 '문학의 옷을 걸친 반역 소설'이라고 기각한다. 이를 논증할 만한 소설 속 여러 장면과 상황을 소개하는데 충분히 고개가 주억거린다.


오래전 『태백산맥』을 완독한 내 감상도 저자의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태백산맥』이란 작품은 순수 문학적 관점에서 수준 높은 소설로 평가하기 힘들다. 소설은 캐릭터와 우연성을 다루는 장르이다. 『태백산맥』 속 캐릭터는 작가에 짓눌려 작품 속에서 기계처럼 움직인다는 인상을 많이 받는다. 빨치산을 낭만적 전사로 그린 것에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주인공들의 매력과 생명력은 만화 캐릭터처럼 굳어 있다. 더욱이 역사소설은 사실의 명백한 토막 사이에 작가적 상상력을 붙여야 한다. 그러나 자주 발견되는 역사적 오류는 큰 흠이다. 박경리의 『토지』보다 한참 못하다.


저자는 세 지식인 외에도 그들의 영향을 받은 몇몇 아류의 비판도 놓치지 않는다. 철학자 김용옥(도올), 소설가 한강,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 등이다. 개신교·천주교 등의 일부 종교권의 좌익 현상과 현 집권 여당 더불어민주당의 심각한 좌경화 역사에 대해서도 흥미롭게 기술한다. 저자는 이런 것들이 끼친 한국 사회의 해악에 대해 분노에 찬 필치로 서술한다. 반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할 참 지식인을 소개한다. 저자가 추천한 참 지성 2인은 소설가 복거일과 교수 양동안이다. 그들의 저작과 일갈을 인용하며 한국 지식계가 마냥 죽은 건 아니라고 희망을 엿보기도 한다. 부정과 긍정이 분명하기 때문에 읽는 이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은 비판 대상을 에두르지 않고 직선으로 파고들어 공격한다. 얄짤없다. 시원시원하다. 언론인이며 문화평론가인 저자의 필력은 돋보인다. 사실관계의 정확한 편재 위에서 자기 주관을 덧붙이니 문장에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다. 물론 진영적으로 다분히 오른쪽에 있는 저자의 이념 지도를 모르지 않는다. 평소 저자가 이승만과 박정희를 높게 평가해오고 관련 그룹에서 활발히 활동해온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이력이 저자의 논리를 기각하지는 못한다. 사실은 사실이고 주관은 주관이며 입장은 입장이기 때문이다. 장장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할애하여 거침없고 일관되게 쏟아내는 저자의 좌파 비판은 충분한 힘과 논리가 있다.


언제부턴가 보수·우익이란 게 서글퍼졌다. 보수라 하면 마치 똥 쳐다보듯이 한다. 적어도 한국에선 그렇다. 전 세계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나라 대부분이 보수의 세상이 됐다고 떠들썩한데 한국의 보수는 거의 파멸 직전이다. 사실관계도 먹히지 않는 것 같다. 개인과 가족을 강조하면 이기주의자가 되고 능력과 효율을 언급하면 물질만능주의자가 된다.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에 파묻혀 악한 것이 되었다. 사회주의의 폐해를 얘기하면 '지금이 어느 때인데'라며 비웃는다. 반미, 페미니즘, 동성애는 세련됨의 아이콘이 됐다. 운동장은 기울어진 게 아니라 뒤집어졌다. 어떻게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었나. 우리의 선배 세대가 쌓아올린 위대한 대한민국은 어디 갔나. 그 원인을 분석하고 공부하는 연장선상에 이 책이 놓여 있다. 저자의 말이 전부 옳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 스며든 좌익적 세계관의 뿌리를 천착한다는 차원에서 참고할 만하다.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http://blog.naver.com/gilsam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공간의 절대성을 주창한 뉴턴의 우주론은 2백 년 이상 세계를 지배했다. 뉴턴의 우주는 갈릴레오의 절대 시간과 유클리드 기하학의 직선의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사람들은 세계가 직선과 평면으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각이 짜인 직선과 직각의 세계는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하지만 영원하지는 않았다. 강력한 망원경이 개발되면서 이런저런 오차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후 과학이 발전하고 여러 법칙이 증명되면서 뉴턴의 이론은 수정이 불가피했다.


1905년 유대계의 젊은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거리가 줄어들고 시계가 느려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시공간이 절대적인 척도가 아니라 상대적인 척도에 불과하다는 걸 의미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직선과 평면으로 이루어진 올곧은 우주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진실은 복잡했다. 곡선과 굴곡으로 이루어진 시공간은 보다 머리 아프고 복잡한 세계였다. 직선의 세계에서 곡선의 우주로 인식과 세계관이 바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혼란스러웠다. 역사가들은 '현대(contemporary)'가 탄생했다고 떠들었다.


오랜만에 두 딸과 함께 외장 하드에 담긴 과거의 추억을 살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여러 장면이 외장 하드 3개에 걸쳐 빼곡하게 차 있었다. 수많은 사진과 동영상을 흥미롭게 둘러봤다. 두 아이는 "저 아이가 정말 나야?"라며 신기한 표정으로 즐겁게 반응했다. 아이들이 자라온 모습이 오롯이 박힌 사진과 영상을 둘러보면서 시간 흐름의 입체적 신비성에 새삼 놀랐다. 지난 10년의 시간은 사진으로 볼 때는 늘어져서 보였다. 그러나 현재 내 체감은 하나의 점처럼 느껴졌다. 신기했다.


가장 놀라운 건 기시감의 인식에 관한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본 지난 추억은 분명히 알고 있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안다고 할 수 없는 이미지였다. 사실적·역사적으로는 명확히 일어난 사실이지만 정서적·체감적으로는 생소한 일로 여겨지는 골 때린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지나간 것은 세월의 고단함 가운데 흐려진다고 하지만 과연 이 정도일까 생각했다. 이것이 내가 느낀 시간의 역설이요 비밀이었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나이가 들면서 시간이 더 빠른 속도로 흐른다는 걸 느낀다. 여기에 아이를 키우면 그 가속력은 더 빨라진다. 정신없이 하루가 흐른다. 학창 시절에는 거북이처럼 느려서 죽을 것만 같았던 시간의 속도가 불혹의 나이가 넘으니 과히 총알같이 흐르고 있다. 인생의 선배들은 더 빠르다고 아우성이다. 가령 아버지는 "나이 칠순이 넘으니 눈 깜빡하면 일주일이 지나간다"라고 말씀하신다. 100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인생의 후반부로 갈수록 시간이 더없이 빨라진다는 걸 알기에 나이가 들수록 인생을 탐구하는 통찰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나를 겸허하게 한다.


후회도 든다. 이렇게 시간이 빠르게 흐를 것을 알았다면 그때 더 현재에 충실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 것을. 아이의 말을 더 집중해서 듣고 아이의 행동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할 것을. 아이와 함께 한 여러 크고 작은 일을 기억과 가슴에 아로새기며 살아갈 것을. 지나간 시간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한 것에 대한 후회보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크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의 의미가 있다.


육아를 준비하고 이제 갓 육아에 입문한 초보 부모들에게 권유하겠다. 아이와 함께 한 시간을 머리와 가슴에 꾹꾹 누르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아이를 목욕시키고 아이의 몸에 로션을 발라주고 자장가를 불려주면서 아이를 재우는 일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일인지 잊지 않기를 바란다. 훗날 육아의 각론은 망각의 세계로 빠지고 '많이 힘들었다'는 추상적인 기억만 남는다. 사진과 영상 많이 찍고 아이와 좋은 추억 많이 만들기를 바란다. 꼰대처럼 들리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진실이며 지혜이다. 그것에 부족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며 새삼 시간의 비밀에 대해 사유한다.




http://blog.naver.com/gilsam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에세이
허지웅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통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아픈 사람은 달라진다. 아파본 사람은 삶의 깊이를 밀도 있게 천착한다. 죽도록 아파본 사람은 삶과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것인지를 웅숭깊게 깨닫는다. 아픔은 일상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을 새삼 강렬히 인식하고 그것에 감사하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그래서일까. 전보다 성숙해졌다. 현명해졌다. 겸손해졌다. 글에 살기가 덜하다. 분노와 비난은 절제되었고 자기주장은 정제되었다. 권위와 질서에 대한 조롱도 사그라들었다. 타인과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마음의 자세가 함양됐다. 방송인 허지웅 얘기다.


허지웅의 신간 『살고 싶다는 농담』은 저자가 암 투병을 극복하고 쓴 첫 번째 에세이다. '다윗의 서재'를 자주 방문한 분이라면 내가 그를 평소 얼마나 싫어하고 비판해왔는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과거 서평에서 그의 두 권의 에세이(2014 『버티는 삶에 대하여』, 2016 『나의 친애하는 적』)를 매우 신랄하게 기각한 바 있다. 내가 그를 싫어한 이유는 간단하다. 선배 세대를 향한 조롱과 기존 권위를 경멸하는 그의 싸가지 없음 때문이다. 어설픈 지식 몇 토막으로 선배 세대가 힘겹게 쌓아올린 공()과 업적을 불인정하고 조롱하는 그의 언행은 과히 역겨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신간에서는 그의 그런 기질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살고 싶다는 농담』은 저자의 에세이 중 유일하게 바깥세상을 향한 분노와 시기의 칼날이 보이지 않는 텍스트다. 암 투병이라는 삶의 극한의 '바닥'에서 정신의 단련을 통해 '천장'으로 올라가는 성숙한 젊은 방송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책 곳곳에 자기 자신에 관한 객관적 성찰, 과거 자신의 부적절하고 온당치 않은 언행의 후회, 삶의 여러 맥락에 관한 진지한 감사 등이 고백됐다. 허지웅이 맞나. 왜 이렇게 태도가 바뀌었지. 그의 바뀐 태도 때문인지 문체까지 온화하게 다가와 책 곳곳을 부담 없이 편하게 읽어내려갔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곳곳에 철학 얘기가 많이 나온다. 저자는 니체를 다시 읽었다고 고백한다. 한국의 젊은 포스트 모더니스트와 기독교를 사멸시키려 한 서양 근대 철학자가 어색한 조합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니체 철학의 핵심 사상인 '힘에의 의지'ㅡ저자는 '권력의지'로 표현했다ㅡ를 제외한 채 '운명애'와 '영원회귀'만을 떼어내 자기 삶의 긍정의 모멘텀으로 치환하는 건 어색하다. 니체적 삶의 희망을 얘기할 때는 반드시 '힘에의 의지'와 연결되어야 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가 맹목적인 것인데 비해 니체는 '힘(권력)에의 의지'를 통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이 우리 삶을 충만하게 넘쳐흐르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딴죽을 걸자는 게 아니다. 저자의 바뀐 태도를 긍정하며 진심으로 응원하기 위해 덧붙여보는 것이다.


라인홀드 니부어의 기도문을 인용한 건 저자의 바뀐 태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p. 191)라는 니부어의 기도문은 소위 '평정심(평온)의 기도문'으로 불리는데 기독교인으로서 세상과 씨름하며 살아갈 때 '현실-기적' 사이의 아이러니를 가장 합리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태도를 가르쳐주는 명문장이다. 이를 오스카 와일드의 소송 이야기와 니체 철학의 '위버멘쉬'와 연결 짓는 건 다소 어색했지만 저자가 결국 "신에게 매일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라는 니부어의 입장에서까지 추출해낸 대목은 흥미롭다. 아마 예전엔 보이지 않았던 자기 자신의 모순과 한계의 발견, 그리고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충만한 감사가 저자의 삶에 흘러내린 것이니라.


바뀐 저자의 태도 때문인지 책은 술술 잘 익힌다. 솔직하고 용기 있게 자기 삶을 긍정해내려는 방송인 허지웅의 의지를 높이 평가하며 응원한다. 저자의 태도는 확실히 바뀌었다. 과거 저자에게 무조건적인 저항과 비판의 대상이었던 기성세대는 '가면을 써서라도 웃어야 할 존재'로 바뀌었다.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쓸 줄 아는 건 소중한 능력"이라고 말할 수준에 이르렀다. "가면을 벗고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가면 안의 내가 탄탄해야 한다"는 조언도 첨가한다. 그렇다. 기성세대의 권위와 기존 질서의 틀은 분노와 투쟁으로 바뀌는 게 아니다. 그것이 악의적인 게 아니라면 웃음과 설득, 소통과 여유로 바뀌는 것이다. 저자가 바뀐 만큼 세상도 바뀔 것이다.


과거 저자를 비판할 때 저자의 영화 리뷰만은 까지 않았다. 저자의 영화 해설만큼은 대한민국에서 수준급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영화 장르 전반에 걸친 폭넓은 지식은 물론 각 영화를 풀어내 우리의 삶과 사유에 적용시키는 각론화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일테면 책의 말미 영화 <스타워즈> 리뷰는 높은 통찰을 보여준다. 저자는 <스타워즈>를 "재능 있는 젊은이를 질투하거나 두려워할 것인지, 아니면 축복하고 응원해 줄 것인지 관한 이야기"라고 정의한다. 충격이다. 시리즈 전편을 다 본 나에게 영화 <스타워즈>는 그저 화려한 CG로 그려낸 광활한 우주 광경이나 스펙터클한 광선검 격투신이 전부였다. 그것이 축복과 응원에 관한 이야기였다니. 최근 주변에서 능력과 다름에 관한 시기와 반발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기에 <스타워즈> 리뷰에 담긴 저자의 달견과 통찰은 시의적절하게 내 마음을 훔쳤다.


책 제목을 생각했다. 저자가 어떤 의도로 제목을 지었는지는 책에 명확히 나와 있지 않다. 살고 싶다는 농담. '살고 싶다'는 게 농담이란 걸 선언하는 것인지, '살고 싶다는 농담'을 툭 던져보는 것인지 애매모호하다. 분명한 건 책 곳곳에서 저자의 살고 싶은 의지만큼은 강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살고 싶다는 건 저자에게 진심이었을 게다. 젊은 나이에 죽음의 고비를 넘어 현재를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놀랍고 감사할까. 결국 저자는 농담이 아닌 진담으로 책의 마지막 문장을 완성한다. "살아라."(p. 274)


서평을 정리하자. 금번 허지웅의 신간은 읽어볼만했다. 좋은 느낌으로 따뜻하게 읽었다. 과거의 악평과는 독립적으로 호평이다. 분명 허지웅은 변했다. 과거의 날선 문체가 아니다. 분노와 시기도 보이지 않는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겸허한 소회도 엿보인다. 자기반성이 보인다. 정치 얘기는 일절 없다. 암 투병의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면서 사유와 마음의 크기가 더 확장된 것 같다. 물론 그만 변한 건 아니다. 동갑내기인 나도 변했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가슴의 온도가 조금 변한 것 같다. 정서적 무드도 변했다. 40대 중반을 향하니 왜 그리 감사할 게 많은 지 모르겠다. 가끔은 나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들이 감사의 대상으로 보일 정도다. 그렇다. 그도 변했고 나도 변했다. 이 변화의 하모니에 에세이 『살고 싶다는 농담』이 놓여 있다.


영화를 좋아하고 삶의 희망을 발견하려는 독자들에게 허지웅의 신간 『살고 싶다는 농담』을 추천한다. 내가 허지웅의 책을 추천할 날이 오리라고는 결코 생각지 못했다. 세상 다시 살고 볼 일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