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 - 잃어버린 나를 찾는 인생의 문장들
전승환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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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았다. 여러 책 속의 명문장을 끄집어내 통찰력 있는 해설을 덧붙인 에세이일 것으로 기대했다. 외연은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었지만 정작 사유의 깊이와 문장력은 지나치게 평범하고 밋밋하다. 고만고만하고 말랑말랑한 얘기들로 가득 차 있다. 최소한의 인문학적 무게를 느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오히려 자기계발서의 오류와 한계로 지적받는 ' 저자만의 기준', '무의미한 합리주의', '뜬구름 잡는 달콤한 소리' 등이 책 곳곳을 메우고 있다.

 

저자는 '책 읽어주는 남자'로 불린다고 한다. 여러 채널을 통해 책 속의 좋은 글귀를 소개하며 매주 150만 명의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달한다고 한다. 그의 이력을 모른 채 "인문 고전, 철학, 역사는 물론,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려 뽑은 130여 편의 ‘인생의 문장들’을 작가 개인의 진솔한 경험담과 함께 전한다"라는 모 인터넷서점의 홍보문구에 혹해 구입했다. 개인적으로 위로는 전혀 받지 못했고 몇몇 책 속 명문장을 소개받는 선에서 내 독서는 갈음되었다.

 

책의 구성은 심플하다. 고전 속의 여러 문장들을 독자에게 소개하며 그것에 대한 저자의 사유를 풀어놓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한 일관적인 구조로 쓰여 있다. 평가하자면 인용과 해석 둘 다에 문제가 있다. 고전 속 여러 문장을 인용했다고는 하지만 그리 와닿지 않는 평범한 문장들이 많아 호감스럽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것을 자기 방식으로 녹여내는 저자의 해설에 깊이와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 울림이 없었다. 더욱이 '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라는 제목은 왜 갖다 붙였는지 책 내용과 괴리적이다. 이런 말랑말랑한 책에 '인문학'이라는 수식어구를 붙인다는 게 조악하고 어색하다.

 

언제부턴가 '인문학'이라는 용어를 표지 전면에 배치한 자기계발서들이 범람하고 있다. 읽어보면 분명 자기계발서인데 책의 띠지와 출판사의 광고 카피는 '인문 에세이'라며 독자를 호도시킨다. 괴테나 프루스트의 글 몇 줄을 인용한다고 해서 인문서적이 되는 건 아니다. 저자(작가)만의 인문학적 콘텍스트가 그 재료들을 견인하고 조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즉 저자의 문장 자체에서 깊이 있는 인문학적 사유와 울림 있는 전달력이 빛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누구나 일기장에 쓸 수 있는 말랑말랑한 수준 이상을 담아내지 못한다.

 

내가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저자의 위상을 책 한 권으로 재단하는 게 아닐까 저어된다. 하지만 이 글은 서평이며 솔직하고 냉정하게 책에 대한 평가만을 우선할 수밖에 없는 텍스트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힐링서적 중에서 이 책은 최하위급에 속한다. 위로에도 수준이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평이한 말과 글로 타자(독자)를 위로할 수 있다는 용기가 가상하고 그런 위로에 따뜻함을 느끼는 독자의 수준도 안타깝다. 책이란 모름지기 차가움과 따뜻함을 혼용해서 읽어야 한다. 그래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다.

 

여기저기서 멘토와 힐링을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한 권의 책이 인간에게 본질적 위로를 줄 수 있을지에 답하기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수많은 양서들을 통해 위로받았고 힘을 얻었다. 그 책들은 대개 '진짜'였고 탁월했다. 수없이 많은 책을 읽으며 깨달은 건 이 세상에는 굳이 시간을 내서 읽지 않아도 되는 책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이다. 인생은 짧고 독서는 기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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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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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소설가 김연수는 어려운 존재다. 한국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던 시절 유독 김연수의 소설만은 잘 읽히지 않았다. 주제나 소재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그의 소설을 싫어한 이유는 오직 문장 탓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젊은 여성 독자들이 문장을 이유로 그의 소설을 즐겨 읽는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문장 때문에 그의 소설을 멀리한다. 관찰과 사유의 깊이는 제법인데 그것을 문장력이 못 받친다고나 할까. 예나 지금이나 그의 문장을 읽는 내 평가는 여전히 냉소적이다.

『소설가의 일』은 2014년에 출간된 김연수의 소설론을 정리한 산문집이다. 작가의 창작론 정도로 보면 되겠다. 책 속에는 국내 거의 모든 문학상을 휩쓴 중년 작가의 집필 내공이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소설의 구조, 플롯, 인물, 주제 등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의 거의 모든 설명서가 기록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폴 오스터, 무라카미 하루키, 레이먼드 카버, 오르한 파묵 등 작가가 평소에 좋아하고 영감받아온 세계적인 소설가들의 명문장이 곳곳에 소개되며 작가의 주관을 돕는다.

김연수에게 소설 쓰기란 '무조건 닥치는 대로 쓰는 일'이다. 초반부터 완벽히 와꾸를 잡고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면 소설의 길이 열린다는 게 김연수의 논리다. 그가 이 깨달음의 절정에서 쓴 소설이 바로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다. "내가 소설을 쓴 게 아니라 소설이 나를 쓴다는 느낌이 들었다"라는 작가의 고백을 통해 글쓰기(특히 소설 쓰기)에 대한 운명론적 견인을 엿본다. 그리고 자신을 소설가로 이끈 다음 문장을 소개하는 대목은 일류 소설가 다운 걸쭉한 집념을 확인하게 한다.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가는가? 그 이유는 그 길이 죽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작가가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차이를 '캐릭터'와 '플롯'의 견인으로 설명한 대목이다. 동기를 중요시하는 캐릭터가 이끄는 소설이 본격소설이고, 사건 중심의 플롯이 이끄는 소설이 장르소설이라는 얘기다. 작가는 전자(본격소설)를 더 좋아한다고 고백하는데 소설에서 사건보다 인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소설 인물의 전형성이라는 측면과 맞닿아 있는데 외부 상황에 의해 이끌려가는 인물보다 자기 내면의 천착과 성찰을 통해 꾸준히 성장해가는 인물이 더 매력적이고 생명력이 크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으리라. 바로 그것이 본격문학의 위대함 아니겠는가.

소설의 시점을 얘기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소설가는 전지적 시점으로 소설을 써야만 하며 전지적 작가가 될 때까지 최대한 느리게 소설을 써야 한다고 작가는 강조한다. 일인칭 소설이라 해서 작가가 일인칭 안에 구속돼서는 안 된다. 일인칭 안에는 일인칭의 시선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인칭 시점에는 이인칭 시점이 숨어 있다. 늘 타인의 시선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상정하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너로서의 나'와 '내가 보는 나' 사이의 간극과 균열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궁극의 힘이라는 사실에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유명한 소설 제목이 '싱클레어'가 아니라 '데미안'이 된 것을 가장 좋은 예로 소개한 작가의 설명은 탁월하다.

작가의 말을 계속해서 빌리자면, 종국적으로 소설가는 전지적 시점에서 소설을 쓸 수 있어야 한다. 일인칭과 이인칭의 시점이 '너-나'의 관계를 넘나드는 공간적 관점의 입체성을 부여한다면 전지적 시점이란 소설 안팎의 구분을 넘어서 절대적인 시간의 차원을 확보한다는 걸 의미한다. 작가는 이를 신(神)의 존재와 등치시킨다.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를 창조하되 자신은 그 시간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작가가 전지적 작가가 될 때 비로소 그 작품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객관적 예술성을 확보하는 고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귀스타브 플로베르나 레오 톨스토이나 제임스 조이스가 한 일, 그러니까 '소설가의 일'이다,라고 끝맺는 작가의 마지막 문장은 감동적이다.

이제 이 서평의 첫 문단으로 돌아가자. 나는 서두에서 작가의 문장력에 호감을 갖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작가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교정되지 않은 난잡하고 장황한 장문장에 대한 거부감을 발산해왔다. 작가는 이 책에서 생각(사유)보다 문장이 우선한다고 수없이 강조한다. 일단 생각하지 말고 그냥 쓰라는 것이다. 오히려 생각이 아니라 감각이 필요하다고까지 말한다. 소설을 쓰지 않을 때에도 이 세계를 감각하라고 일갈한다.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나는 작가의 작품에서 유독 생각이 많은 소설의 전형을 발견해왔다. 화려하고 무언가 있는 것 같지만 정작 문장 자체는 제대로 잘 읽히지 않는 역설이랄까.

많은 독자들이 김연수의 문장을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문장에 대한 대중적 찬사에 동의하기 힘들다. 김연수의 문장은 확실히 현란하다. 하지만 그 현란함은 문체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언어와 사유가 철저히 호혜적인 관계를 이룰 때 성립될 수 있다는 점을 주지한다면 김연수의 문장은 사유의 빈곤을 감추려는 수사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김연수의 문장에 뭔가 있어 보이는 것은 우선 의미 파악이 쉽게 안 되기 때문이다. 평론가 조영일은 이에 대해 '문장이 사유에 짓눌렸다'고 비평했다. 즉 생각이 너무 많아 문장을 억누르고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조영일의 입장에 있다.

서평을 정리하자. 김연수의 문장에 관한 내 개인적 호오와는 별개로 『소설가의 일』은 탁월한 산문이다. 오직 '소설 쓰기'라는 창작론을 주제로 이만큼 실제적이고 집중력 있는 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플롯 포인트, 불안과 무기력, 욕망(혹은 사랑)과 결핍이 채워주는 핍진성, 퇴고의 중요성, 캐릭터와 플롯 중심 소설의 차이, 30초 안에 소설을 잘 쓰는 법 등등 작가의 20년 내공이 담긴 많은 충고들이 돋보인다. 소설을 위시한 창작 글쓰기를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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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2-1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연수 소설집은 재미없었는데 이 책은 재미있었어요. 에세이와 소설 문장의 온도 차 무엇...
 
눈물의 생각
김호랑 지음, 김리연 그림 / 바른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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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포근한 시집을 만났다. 신간 『눈물의 생각』은 작가 김호랑의 따뜻한 시선과 화가 김리연의 수준 높은 그림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시집이다. 책에 실린 시는 작가가 대학생 때부터 쓴 습작시를 묶은 것이라 한다. 책 곳곳에는 삶과 자연, 인간과 사랑에 대한 작가의 따뜻하고 낭만적인 통찰이 가득하다. 작가는 우리 일상에서 쉽게 포착되는 평범한 소재들로 아름다운 시를 읊어준다. 

 

누군가 시인을 '천상의 영역에서 글을 쓰는 자'로 정의했던가. 그렇다. 시는 언어를 넘어선 세계이며 언어 이상의 우주이다. 세상의 수많은 소설가와 수필가들은 시인이 되지 못한 자신의 범상함을 한탄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엉덩이의 힘으로 글을 쓰고 있다. 문학에 계급은 없지만 시는 모든 글쟁이들의 이상이자 로망이다. 시 쓰지 못하는 사람이 소설 쓰고 소설 쓰지 못하는 사람이 비평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러한 시의 위상을 증명이라 하듯이 작가는 몇 개 되지 않는 단어의 조합으로, 즉 극한의 압축으로 독자의 마음을 노크하며 농밀한 감동을 선사한다.

 

수록 시 중 가장 탁월한 시는 단연 「그리움」이다.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라는 후렴구를 가진 이 시는 '그리움'에 대한 작가의 심원한 통찰을 의도된 산문체로 들려준다. 함께 있어도 알지 못하고, 멀리 떠나와도 모르며, 아무리 그리워도 보이지 않는다,는 작가의 사색은 그리움의 본질을 관통하는 놀라운 천착이다. 이 시를 통해 작가의 과거를 엿본다. 작가 스스로 그리움의 끝장을 겪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삶에 무언가 '부재(不在)'한 것이 있었던 걸까. 부재는 '비존재(非存在)'와는 달라서 자신 곁에 없이도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이기에.

 

표제작 「눈물의 생각」도 인상적이다. '눈물의 생각'은 기묘한 제목이다. 눈물도 생각할 수 있을까. 눈물에도 생각이 있을까. 여러 사유가 쌓인다. 시를 곱씹으며 나름으로 풀이했다. 눈물과 눈물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의미라는걸. 눈물 자체만으로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하지만 눈물과 눈물 사이의 여백과 시간까지를 담아낼 때 그 눈물은 관찰자로 하여금 수많은 생각을 포착할 수 있게 해준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눈물 자체만을 보려 하고 눈물 앞뒤로 존재하는 시공간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에는 인색한 존재일지 모른다. 눈물과 눈물 사이를 탐색할 때 눈물 자체의 순도는 더욱 농밀해진다. 

 

이 시집이 더욱 매력적인 것은 화가 김리연의 수채화들 덕분이다. 책에 수록된 그림들은 거의 대부분 풍경과 자연을 대상으로 했는데 화가 자신이 직접 가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릴 수 없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명징하고 생동하다. 시집 절반의 생명력은 김호랑의 시를 발군의 터치로 수식한 화가 김리연의 내공에 있다. 시와 그림이 시집 안에서 정겹게 조화한다. 시집 『눈물의 생각』은 김호랑의 시가 김리연의 그림을 견인하고 김리연의 그림이 김호랑의 시를 재해석하는 관계로 아름답게 포개져 있다.

 

고백하지만 시 읽기를 즐기지 않는다. 시가 가진 고밀성과 탁월성을 인정하면서도 텍스트에 관한 개인적 호오 탓으로 시를 멀리하는 편이다. 시의 운명론적 구조, 즉 압축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역량)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 시는 무겁고 억압적이다. 반면 산문은 가볍고 자유롭다. 소설가 황순원은 "시는 젊었을 때 쓰고, 산문은 나이 들어서 쓰는 것이다. 시는 고뇌를, 산문은 인생을 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의 문학적 감성은 다분히 늙은 것일까. 고뇌 없는 인생을 살기 때문일까. 이 진지한 정체성을 질문하게 한 것만으로도 시집 『눈물의 생각』은 탁월하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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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가 예전 같지 않다. 양과 질 모두 총각 때와는 전혀 다른 독서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아이들이 좀 크면 방해받지 않고 독서를 즐길 수 있겠지, 생각한 건 큰 오산이었다. 아이들의 성장과는 무관하게 내 스스로 점점 나이를 먹어가며 체감하는 시간의 지독한 부족 현상이 내 독서를 방해하는 궁극의 요인이었다. 한 달에 스무 권씩 읽어냈던 좋은 시절은 끝났다. 이제 오늘만 지나면 내 나이 마흔둘이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점이다. 요컨대 꼭 필요한 책만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2020년에 무조건 읽어야 할 책을 두 편 골랐다. 첫 번째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과거 한차례 읽기를 시도했다가 중도에 포기한 이력이 있다. 내용 자체가 어렵다기보다 집중하기 힘든 프루스트 특유의 미로찾기 식 만연체에 초반부터 녹다운 됐던 기억이 선연하다. 가령 잠들기 전 뒤척이는 장면을 묘사하는 데에만 30페이지를 할애한다. 오죽하면 프루스트의 동생이 "이 소설을 읽으려면 중병이 들거나 한쪽 다리가 부러져야만 한다"라고 말했겠는가. 여하튼 새로운 번역으로 곧 재도전하려 한다. 내가 이 난해한 소설을 다시 읽으려 하는 이유는 시간과 인생 사이의 고밀한 함수성을 프루스트 식 조망으로 통찰해보기 위함이다. 나이가 들면서 '시간'의 의미를 보다 폭넓게 천착해보려는 버릇이 생겼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가장 매끄러운 번역으로 평가받는 김희영 교수 번역(민음사 판)은 아직 완간이 되지 않아 古 김창석 시인의 완역본 세트(10권)를 물망에 올려놓는다.

 

   또 다른 책은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 강>이다. 소설가 박경리가 그토록 추천해 마지않았다고 알려진 유명한 소설이다. 그래서 예전부터 읽기를 갈망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땅한 번역본을 찾지 못해 차일피일 해왔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가볍게 완독한 작년 말의 기억을 긍정하며 또다시 러시아 대작에 침잠해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러시아 소설에 잘 감응하는 편이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 파스테르나크, 솔제니친 등 지금까지 만난 러시아 작가들은 모두 내 기호와 부합했다. '방대한 서사를 유려한 문체로 힘 있게 이끌어가는 힘'이야말로 러시아 문학이 가진 매력이 아닐까 한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동서문화사 판으로 만날 예정이다.

 

   고전은 하나의 거대한 산맥이다. 시대가 흐르고 문화가 바뀌어도 변질되지 않는 거대한 산맥 말이다. 작품 자체의 스케일이 크고 웅장할수록 독자로서 받는 정신적 확장의 사이즈가 커진다. 큰 작품이 큰 독자를 만든다. 2020년에는 시공간은 물론 정신과 의식의 확대 영역에서 굉장히 큰 사람이 되고 싶다. 크게 생각하고 크게 사랑하고 크게 꿈꾸고 크게 일하고 싶다. 내가 두 편의 고전을 예약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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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손글씨다. 손으로 직접 쓰셔서 어머니에게 전달한 편지라고 한다. 글씨도 명필이지만 내용도 아름답다. 단순히 사변적인 글이 아니라 자신의 일평생에 걸쳐 증명해온 글이기에 더욱 찬연하다. 저 짧은 편지 속에는 아버지의 삶과 철학과 인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난한 고통의 나날을 지불해야만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연륜의 축적이 정직하게 손글씨를 떠받치고 있다. 그것이 아들인 나를 감동시킨다.

 

훌륭한 아버지를 둔 건 한 사람 일생의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차마 존경하지 못하는, 혹은 존경할 수 없는 주변의 친구들이 여럿 있다. 그들은 젊었을 때부터 나에게 부러움을 표했다. "친구야, 너는 정말 좋은 아버지를 두었다. 나는 그런 네가 부럽다." 그때는 확 와닿지 않았던 말이 왜 나이가 들수록 더 선명하게 깨달아지는지 모르겠다. 인생의 진리가 대개 시간차를 통해 각인된다는 사실은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서글픈 비극이다.

 

남자에게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라는 게 있다.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처음 발표한 이론으로 "남성이 부친을 증오하고 모친에 대해서 품는 무의식적인 성적 애착" 정도로 정의된다. 프로이트는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는 무의식적 소망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에 나오는 고전적 신화의 내용과 연결했다. 그의 학설의 과학성과 면밀성은 차치하고, 내가 정말 감사한 것은 나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 할 만한 경험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부모님을 동시에 인정하고 사랑했지만, 나에게 있어 아버지는 아버지였고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과하게 미워하지 않았고 어머니에게 과하게 애착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핵심이 되는 여러 개념들이 멘델의 법칙, 유전자에 관한 염색체 이론, 선천성 대사 장애, 호르몬의 존재, 신격 자극 장치 등의 생물학의 원리 앞에 무기력하게 기각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일면의 원리만은 남아서 아직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구조를 해석하는 연결고리가 되어 있다. 여자의 뇌구조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골 때린 알고리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버지의 존재론적 크기를 넘어서야 한다. 여기서 넘어선다는 건 앞서거나 누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관통'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현존을 관통하지 못한 아들의 실존은 대개 슬프고 절망적이다.

 

세상의 많은 아들들이 아버지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아버지와의 틀어진 관계로 인해 인생을 좀먹는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아 내적으로 소화하지 못한 채 밖으로까지 흘러내려 가족과 지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특히 자기 자식에게 수직으로 흘러내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유산은 과히 지독한 것이어서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전술한 바 있지만 나는 내 주변 친구와 지인의 예를 통해 '보통 남자'가 갖는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인상의 디테일을 수없이 목도했다. 그들은 대개 어둡고 건조하고 폭력적이었다. 슬픈 일이다.

 

고백하겠다. 나는 아버지를 통해 아버지라는 존재를 극복했다. 만약 그가 내가 인정할 수 없는 존재였다면 나는 나의 여느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술자리에서 분노를 표출하며 내 영혼을 좀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아버지가 너무 크고 웅장했기에, 그것을 순수히 인정함으로써, 자연스럽고 안정적인 방법으로, 그를 관통하고 넘어설 수 있었다. 그렇다. 아버지가 '참 아버지'가 될 때 아들은 아버지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어느 것에 속박되지 않는 '진짜 남자'가 되어 자유롭게 세계와 타자를 주유(舟遊)할 수 있다.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내밀한 방정식이다.

 

나는 아버지가 너무 멋있고 사랑스럽고 존경스럽다. 올해로 아버지의 연세가 일흔셋이다. 그의 일생의 말년이 건강하고 멋지고 품격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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