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
성석제 지음 / 하늘연못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성석제는 섬세한 관찰력을 가진 작가다. 그 관찰력이라는 것이 제법 흥미롭다. 옆집 강아지부터 여행중의 맛집 간판의 문구, 방문한 치과의사의 외모, 과거 명시의 어느 한 구절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찰력은 다양함의 다양함의 다양함의 쌩뚱함이다.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것을 끄집어 내서 글의 재료로 삼을 뿐만 아니라 적잖은 지식의 내공을 풀어놓기도 한다. 그의 글은 엉뚱하기도 하고 유쾌한 면도 있으며 신선하면서 쌩뚱맞다. 순간적으로 발견한 것들과 세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상식 이상의 지식들을 수다스럽게 이야기한다.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도 이러한 성석제표 브랜드를 여과없이 보여주는 책이다. 

  이미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을 통하여 성석제가 굉장히 뛰어난 관찰력을 가진 작가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소소한 일상에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잊지 않고 메모하면서 활자로 풀어놓는다. 문체 또한 유쾌하고 유머러스하기 그지 없어 독자는 그의 글에서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이 <재미>있어 한다. 그의 최근 출간작인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는 바로 이러한 그의 특질에 더하여 범박한 지식을 총망라한, 그야말로 책속의 책이라 할 만하다.  

  「이야기의 힘」, 「관점에 따라 다르다」, 「오후의 국수 한 그릇」, 「문자의 예술」, 총 4개의 큰 카테고리를 구분하여 수없이 많은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마치 코믹한 백과사전이라 정의할 만큼 그의 경험담과 지식이 특유의 유머러스한 필치에 양념되어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특히 「오후의 국수 한 그릇」편에서는 음식의 기원 및 맛나는 음식에 대한 소개 등의 풍성한 음식에 대한 경험과 정보를 얘기하고 있어 읽는 내내 입 안에서 침샘의 활성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더불어 「문자의 예술」편에서는 재미있는 <문자>이야기를 다양하게 들려주고 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문자의 예술」편을 꽤 흥미있게 읽었다. 성석제가 언급한대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은 세계 최고수준의 문자라 할 만하다. 한글의 과학성과 예술성은 이미 국내외의 저명한 전문가들로부터 공감되고 있다. 세계의 공용어인 영어가 동사가 발달한 언어라면, 한국어는 형용사가 발달한 언어이다.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으나,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데에는 적잖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번역계의 정설이다. 한국어의 깊이있고 다채로운 형용문구를 영어의 어휘로는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뛰어난 문자를 지녔음에도 노벨문학상을 단 한 번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씁쓸함을 넘어서서 억울하기까지 하다. 번역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국력의 신장과 자국문학의 사랑을 고양시킬 수 밖에 없는 노릇이리라. 

   문학은 다양한 기능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비단 문학의 교화적 기능이니 쾌락적 기능이니 하는 전문적 문구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문학은 오롯하게 인간을 자극한다. 성석제의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그의 글이 독자들에게 부담 없고 걸죽하게 <재미>와 <지식>을 제공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의 글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높낮이가 교차되지 않으며, 냉정함이나 강렬한 느낌도 추구하지 않는다. 전복적이며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재미>가 있다. 그것이 성석제표 활자의 매력이자 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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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 - End of Pacific Series 2
오소희 지음 / 에이지21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여행이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보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여행에 대해 이만큼 명확하고 본질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말이 어디 있을 수 있을까? 여행의 외연적 의미에서부터 내포적 본질에까지 아우르는 깊은 통찰적 정의라 할 수 있는 명문장이다. 어린 아들과 함께 세계의 오지를 탐구하는 여행가이자 블로거 오소희씨는 자신이 있던 자리를 떠나서 자신이 있던 자리를 깊이있고 냉철하게 보기를 좋아하는, 바로 그런 여자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로 처음 만난 그녀의 여행수기는 충격, 그 자체였다. 세 살 배기 어린 아들을 데리고 한 달동안 터키의 오지 곳곳을 수색(?)하고 다닌 점도 대단하지만, 무엇보다 여느 여행서적과 달리 여행에 대한 물리적이며 기술적인 설명 외의 웅숭깊은 삶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여행수기는 그저 다른 나라의 지리와 문화를 둘러보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우주 탐구를 보여준다. 그녀의 독특한 여행세계에 책을 통해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서 어느새 그녀의 팬이 되어 버렸다. 매일같이 그녀의 블로그에 들어가 새로운 흔적을 확인하지 않으면 좀이 쑤실 수 밖에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러한 팬의 입장에서 이번에 출시된 그녀의 두 번째 신간은 내 머리속의 도파민과 베타-엔도르핀 호르몬의 분비량을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미 읽기가 예약되어 있는 적잖은 도서들에 새치기하여 우선 구독하는 것을 손쉽게 결정하게 했다. 

  『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 는 전작에 비해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사진이 상대적으로 많이 실렸고, 설명보다는 시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많다. 총 분량이 대략 300페이지 정도의 평범한 두께지만, 사진은 많고 글자는 적어서 완독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완독을 한 후에 느낀 것이지만, 라오스가 갖는 소박함과 안정감, 고즈넉함과 모자람 등을 표현함에 있어 장황한 설명보다는 어쩌면 짧고 간결한 글귀들의 시적 표현이 더 어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의 의도와 내 느낌이 부합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 속에 빠져 들어 읽었다는 점에서는 전작과의 차이가 없다고 하겠다.  

  라오스가 어떤 나라인가? 연간 3억불의 원조를 받는 세계 최빈국으로서 초등학교 수료율은 41%, 15세 이상의 문맹률은 43% 수준인 극도의 후진국이다. 유럽이나 미주여행이 해외여행의 교과서가 되어가고 있는 한국의 해외여행기호에서 라오스라는 국가는 쌩뚱맞은 선택일 수 있다. 그곳에서 과연 무엇을 보고 배울 수 있는가?, 라는 냉소적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저자가 언급한 여행의 목적과 동기에 철저하게 배치된다. 여행이라는 스승을 통해, 삶에 대해 더 낮아질 것을 배우게 되며, 엎드려 고개를 숙이면 더 많은 것이 보인다는 것이 저자 오소희씨의 여행철학이다. 낮추면 보인다는 것이다. 
지독하게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 때는 언제나 더 이상 내가 나를 낮추고 있지 않을 때였고, 스스로 그 직립이 피로할 때였고, 피로함으로 인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중에서> 

  라오스는 매우 조용한 곳이다. 시간의 속도가 더디게 흘러가는 곳이다. 바쁘지 않고, 바쁠 이유가 없고, 바쁨이 무언지도 모르는 곳처럼 보인다. 풍선이라는 작은 놀이기구 하나에도 새로움을 느끼며 흥분하는 아이들, 주고자 하는 돈과 받으려 하는 돈의 높낮이가 상하로 출렁거리는 최소한의 경제적 행위에도 익숙지 않은 시장상인들, 두 시간에 한 번씩 고장나는 버스를 타며 몇 시간을 이동해도 서두르거나 조급해 하지 않는 사람들, 상대방이 준비되지 않을 때 자발적으로 물러날 줄 아는 사람들, 개와 고양이까지도 조용하고 착한 그곳.. 라오스는 바로 그런 곳이다.  

  라오스의 남쪽과 북쪽의 지방색이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이 흥미롭다. 남쪽에 비해 북쪽에 대도시가 많고 경제적 활동이 활발하다. 한결같이 순수하고 고요함에 가득차 있는 남쪽 지역과는 달리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원하는 것보다 원하지 않은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사반나켓은 여행자가 봉이 될 가능성이 있는 곳이며, 수도 비엔티엔은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좋지 않은 곳(?)이다. 제법 북쪽에 위치한 방비엥이라는 작은 마을은 사랑하는 자와 싫어하는 자로 여행객들이 양분되는 두개의 얼굴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자연과 볼거리, 할거리들이 적잖은 방비엥이 해외의 수많은 배낭여행가들의 침범으로 인해 그 영혼을 잃어가는 모습은 씁쓸하기만 하다.
쏭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석회 카르스트 가운데 위치한 이 작은 마을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둘로 나뉜다. 이곳을 사랑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p170> 

  역시나 저자의 자녀교육은 철저하다. 축구공을 강력한 소통의 무기로 들고간 중빈이는 남부 시골에서 그곳 아이들과 쉽게 축구를 하며 교제를 이룬다. 하지만 라오스 4대 도시 가운데 하나인 사반나켓에서는 중빈이의 축구공에 신기해하는 아이도, 관심을 가져주는 아이도 없다. 내가 놀 수 있는 아이는 없어, 라며 결론 짓는 중빈에게 저자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뒤 자전거에 몸을 실은 채 자리를 비켜준다. 용기내어 말을 걸어보고, 축구공을 굴려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뿐이다. 중빈의 얼굴에 울기 직전의 모습이 역력하지만 저자는 자녀의 사회성 학습에 절대 개입하지 않은 채 관찰자로만 일관한다. 중빈의 접촉 시도와 상대방의 무시가 반복의 반복을 거듭하던 끝에 아이들중 나이 많은 여자아이의 종용으로 축구공은 중빈과 아이들 사이를 오가게 되고 사회성 학습은 성공으로 마무리 짓는다. 무려 1시간 30분의 지리한 긴장감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의 힘으로 멋지게 성취한 중빈에게 돌아온 면류관은 엄마의 안아줌과 "JB!", "JB!" 라고 외치는 아이들의 환호성이다. 다른 나라에서 다른 생김새를 지닌 공동체 속으로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침투한 중빈의 용기와 인내, 그리고 그것을 이룬 성취감은 훗날 그의 당찬 미래의 보증수표가 될 것임을 믿는다.
아이가 해낼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부모의 무지이자 욕심이다. 그러나 아이가 해낼 수 있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부모의 무능력이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중에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왜 그토록 그녀의 여행수기에 매료를 느끼는 지를 말이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나의 독서 기호와 그녀의 여행 목적이 완벽하게 부합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문학을 위시한 다양한 장르의 도서를 읽는 내게, 독서는 인간 탐구의 또다른 성격의 학습으로 정의된다. 책 안에서 다양한 인간상들을 만나면서 인생과 사랑 등의 다양한 삶의 본질적 가치들을 목도할 때면 내 전두엽은 활발하게 작동하고 내 마음속의 감성량은 충만하게 흘러 넘친다. 그녀의 여행에세이도 철저하게 인간과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자연경관의 웅장함이나 문화재의 화려함보다는 나와 다른 너에 대한 깊은 천착을 거듭한다. 특별하지 않아 놓치기 쉬운 소소한 것에서 대단한 것을 이끌어 내며, 보편적 정서와 상식을 뒤엎어 한단계 높은 차원에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기도 하며, 아무 생각 없이 동일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약간 다르게 봄으로써 우주의 이치를 멋지게 해석하기도 한다. 깊은 사색에서 오는 주옥같은 언어로 정제된 독백적 문장들. 내가 그녀의 글귀를 좋아하는 이유다.  

  한 명의 애독자로서 앞으로 저자의 후속 신간들이 봇물 터지길 기대한다. 저자의 신간이 늘어나고 책의 판매량이 증가할 때마다 중빈이의 지성과 감성의 수치도 지수적으로 증가하길 축복하는 바이다. 

 

[인상깊은 구절]


현명함이란, 가진 것에 시선을 고정시킬 때 찾아온다.
그러나 시선을 제대로 고정시킬 수 있는 힘은
세상에 널린, 내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들을
오랫동안 두루두루 바라본 뒤에야 얻어진다.
젊음과 현명함이 공존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p242>
 
남자들은 사랑을 <한다>.
면도를 <하고> 사업을 <하고> 산책을 <하>듯.
그러나 여자들은 사랑에 생을 건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녀의 전부가 <된다>.
호흡을 하고 걸음을 내딛는 순간순간이 사랑과 결부된다.
사랑이 있는 여자와 없는 여자는 같은 여자여도 다른 여자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게 진화되어 왔다.
일단 사랑에 빠지면 다른 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도록.
오직 사랑하는 대상만이 존재하도록.
그렇게 진화되어 오직 않았다면
유난히 긴 양육기간을 필요로 하는 인간은
더러운 기저귀를 떼기도 전에 모성으로부터 버림받았을 것이다.
<p243>

모든 소망에는 그것을 높게 하거나 낮게 하는 장애가 있다.
생의 절반을 지나 엄밀하게 생각해 보니.
소망을 이룰 때까지
모든 장애는 단지 변명의 크고 작은 다른 이름이었다.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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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9-05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누르고 가요, 다윗님^^
 
신도 버린 사람들
나렌드라 자다브 지음, 강수정 옮김 / 김영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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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시절이다. 세계사 공부를 할 때에 소위 '밑줄 짝~'이라는 교육문구가 강조되면서 시험마다 출제되는 중요한 용어가 있었다. 바로 '카스트 제도'라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인도만이 갖고 있는 유일무이한 제도로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계급이 정해져있고 그 계급에 할당된 정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3,000년 전에 탄생한 그 제도가 21세기에 이른 작금의 시대까지 한 국가의 정신적, 이념적 체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에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카스트 제도라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을 크게 네 가지의 계급으로 나누는데 최상위 계층은 '브라만'으로 사제들이고, 군인계층 '크샤트리아'가 그 다음이며, '바이샤'라는 계층은 상인이나 평민이 속하고, 마지막으로 최하위 카스트인 '수드라'는 노예들이 속한다는 계급 제도다. 더욱이 아웃카스트라고 해서 카스트 안에 들지 못하는 계층이 있는데 '불가촉천민'으로 불리는 달리트가 그들이다. 현재 인도에 1억 7천만명의 불가촉천민이 있다고 한다. '불가촉천민'의 개념은 접촉을 하지 말아야 하는 천한 계층이라는 의미라고 하니 명칭만 들어도 그들의 일상을 대략 유추해 볼 수 있으리라.  

  사실 카스트 제도는 인도의 독립 이후 1950년 인도헌법에서 법적으로 폐지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도 사회에서 카스트는 엄연히 존재하며 인도의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전 부분에 걸쳐서 억누르고 있다. 카스트는 인도의 국교라 할 수 있는 힌두교에서 연유한다. 힌두교에서는 신이 카스트 제도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기원전 1,000년경에 만들어진 힌두경전 '리그베다'는 인간의 계급이 어떻게 탄생되는지 언급하였다. 그에 따르면, 태초에 우주의 본질을 상징하는 거대한 신 푸루샤가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를 창조했는데, 푸루샤의 입은 사제인 브라만이 되었고 팔은 군인계층 크샤트리아가 되었다. 허벅지에서는 상인 계급 바이샤가, 두 발에서는 노예인 수드라 계층이 탄생하였다. 이 네 계급을 색깔이라는 의미의 바르나 제도, 곧 사성제라고 불렀다. 여기에 사성제에 들지 못하여 아웃카스트로 불린, 앞서 언급한 불가촉천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인도 사람들은 아직도 이 카스트 제도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미 법적으로는 폐지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인도인들의 삶과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윤회사상에 기인하여 현세에 낮은 카스트로 태어나면 다음 세상에는 높은 카스트로 환생한다고 세뇌하고 있다. 이에 나름의 안정감을 얻은 인도인들은 아직도 카스트라는 제도에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비인간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비과학적인 제도에 앞서 다음 세상에 대한 강한 믿음(?)을 기약하며 자신의 의지와 관계되지 않은 운명적 카스트 안에서 계급에 따른 지위와 명성, 생활양식 등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의 인도인들인 것이다. 

  이러한 카스트 제도라는 불가항력의 테두리를 벗어나고자 애쓰며 투쟁하여 나름의 성공한 삶을 산 사람이 있다. 『신도 버린 사람들』은 닿는 것조차, 같이 숨쉬는 것조차 금지된 불가촉천민의 위대한 드라마를 다룬 책이다. 그림자만 닿아도 오염되는 불가촉천민에서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지도자가 된 나렌드라 자다브는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카스트에 맞서 어떻게 싸워왔으며 그 힘겨운 싸움과 삶의 열정이 종국에 어떤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저자의 아버지인 다무와 어머니인 소누의 일기와 회상이 이 책의 8할 정도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두 사람이 만나서 결혼을 시작하여 불가촉천민으로 인간 이하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고된 수난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철저하게 부모의 일기 기록을 반영하고 있다. 다무와 소누의 1인칭 서술이 교차되면서 당시의 삶을 생동감있게 들려주고 있다. 다무와 소누의 일기식 회상담이 이 책 분량의 8할이라면, 그 중 4할은 바바사헤브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빔라오 람지암베드카르 박사의 달리트 인권 운동이 크게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2할은 저자 자신이 화자가 되어 말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받은 유산과 당신들의 철저한 교육과 가르침으로 인해 저자 자신을 위시한 자녀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성공했는 지를 고백하고 있다. 더욱이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저자의 딸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받은 고도의 정신과 경외심을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즉, 이 책은 불가촉천민으로서의 잘못된 제도와의 싸움과 투쟁, 그리고 적극적 삶의 방식을 통해 성공화를 이룬 한 가문의 3대에 걸친 자유와 용기, 정의라는 인간의 숭고한 가치에 대한 경험적 회고를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아버지는 잘못된 전통과 제도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는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개인적 잠재력과 꿈을 무시당한채 살아갈 수 없음을 자각하고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아버지 다무의 자각은 그의 또다른 내포적 힘인 용기와 결합한다. 당시 달리트들의 기본권을 위한 투쟁이 바바사헤브가 지도자가 되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그를 정신적 지주로 삼아 지리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투쟁에 선봉에 서기도 한다. 저자는 뒷부분의 고백에서 아버지 다무를 경외와 상찬의 대상으로 말하고 있다. 비굴하지 않고 옳지 않은 것에 순응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용기와 집념이 지금의 자신을 만든 원동력이었음을 고백한다.
  다다(아버지 다무를 자식들은 다다라 부름)는 결의와 용기라는 더없이 소중한 유산을 남겼다. 다다는 우리의 아버지였을 뿐만 아니라, 철학과 삶의 방식 그 자체였다. 살다가 힘이 필요한 순간이 닥치면, 우리는 우리 안에 간직한 다다를 찾아본다.   <p344>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강렬하게 관찰한 부분은 아버지 다무와 어머니 소누의 흔들리지 않는 깊은 사랑이었다. 불과 10세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가 나이 많고 까무잡잡한 청년의 아내로 결혼하여 수십 년의 지난한 삶을 버텨내는 과정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비록 둘다 불가촌천민으로 태어난 소외계층으로 가난하고 억울한 삶을 살아야했지만 서로 의지하고 존중하며 살아갈 때에,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의 판단과 결정을 항상 존중하여 우군 역할을 해주었고 남편도 고생하는 아내를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아이를 10년동안 낳지 못해 다른 아내를 얻어야 한다는 주변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아내를 지켜주고 보듬어 준 남편의 기백과 강단은 같은 남자로서 멋있기 그지 없는 장면이다. 부부 사이의 사랑이라는 강력한 내포적 힘이 가난과 주변환경이라는 외연적 겉치레를 충분히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러한 두 부부의 흔들리지 않는 사랑에 기반한 가정적 안정감이 자녀들 모두 훌륭한 동량으로 길러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천이었을 것이다.
  다다가 세상을 떠난 후 바이(어머니 소누를 자녀들은 바이라 부름)는 부쩍 늙었다. 바이는 까마귀에게 먹이를 주며 말을 거는 걸 좋아했다. 색깔 말고는 까마귀와 다다가 비슷한 점이라곤 없었지만, 바이는 다다가 까마귀가 되어 당신을 만나러 온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매일 밥을 먹기 전에 부랴부랴 까마귀가 먹을 부스러기를 주러 나가서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자다브가 온 것 같으네."   <p353> 

  책의 마지막 부분에 저자가 비토바 신당을 처음으로 찾았던 때를 회상하는 장면은 압권이라 할 만하다. 한 명의 불가촉천민을 맞이하기 위해 사원의 관계자들이 총출동한다. 저자는 이른바 VIP였고, 사원의 높으신 분들이 앞 다투어 환영했다고 한다. 저자는 어쨌거나 불가촉천민이었다. 사원출입이 금지되었던 카스트 출신이었다. 불가촉천민은 하다못해 그림자도 사원에 드리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힌두 사원 권력의 심장부와 같은 비토바 신당에 사제들의 환영을 받으며 들어가는 것이다. 사원의 운영회장과 대사제가 세계적인 지도자가 된 저자를 맞이했다. 특히 저자가 사제들에게 돈을 주고 사제들이 갈구하며 돈을 받는 장면은 왠지 모를 전율이 느껴진다. 일개의 불가촉천민이 부모님의 정신과 교육을 이어받아 제도와 전통을 극복한 불세출의 인물로 성장하고 마치 카스트를 비웃기라도 하듯 최상위 카스트인 브라만에게 돈다발을 건네는 것이다.
  나는 있으나마나한, 천하에 쓸모없는 불가촉천민이었다. 주머니에서 빳빳한 100루피 다발을 꺼내어 사제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한껏 내밀어 갈구하는 가촉민의 손바닥에 누르듯 쥐어 주기 시작했다. 그들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달려들었다.   <p355> 

  그렇다. 한 개인의 능력과 열정은 공동체의 관습과 전통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우리 주변에는 무수히 많은 공동체가 있다. 가족, 학교, 교회, 회사, 국가 등 크고 작은 수많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모든 공동체의 습속과 문화가 옳고 선한 것만은 아니다. 사회적 환경의 불순함과 비상식에서 개인의 자유와 상식은 침범을 받기도 한다. 인간의 내면적 숭고함 중에 극치라 할 수 있는 용기와 정의감이라는 가치가 많은 사람들에게 지향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다브 가문이 보여준 절대적 선한 가치에 대한 용기와 정의감이 어떤 인과물을 탄생시켰는지를 이 책은 경험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잘못된 것에 맞서는 용기와 공동체에 대한 희생의 가치가 찬란하게 빛날 때에 인류는 더욱 아름다운 지구에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떠한 잘못된 관습과 체제도 한 인간의 인권과 자유에 우선할 수 없다. 그것이 수천 년동안의 12억의 인구를 억누르고 있는 카스트라 할 지라도 말이다.

  나는 비겁한 사람들을 자주 본다. 작든 작지 않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절대적 선의 기준이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하며 그 전통과 제도에 순응하는 자들이 적잖다. 그리고 그 잘못된 기준으로 약한 자들을 핍박한다. 어쩌면 나도 그러한 사람일 수도 있다. 이 세상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 당하는 자로 철저하게 이등분된다. 현대적인 언어로 다시 표현하자면, 프로그래밍 하는 자와 프로그래밍 당하는 자로 양분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도 그 유명한 팔레토의 법칙은 적용된다. 2할의 지배자가 8할의 피지배자를 다스리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일 수도 있고 경제와 사회, 문화 등의 외연적 결과물로 나타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을 가르는 동기다. 2할과 8할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내면적 원천은 정의에 대한 용기와 공동체에 대한 희생과 사랑의 가치라는 것, 나는 그리 믿는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우리 할아버지와 암베드카르 박사의 노력이 우리 세대에 이르러 결실을 맺었다. 나는 달리트를 나타내는 어떤 표식도 달고 있지 않으며, 내 또래와 다르다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우리 조상들은 내가 이 세상 모든 소녀들과 똑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피땀을 흘렸다. 나는 그들이 나를 위해 밝힌 횃불을 받아 들었고, 이제 나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p354>
- 아푸르바 자다브(저자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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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02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정성스런 글 잘보고 갑니다. 다윗님의 글을 읽고나니 이 책에 관심이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ㅎㅎ

프레이야 2007-09-03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님, 성실한 리뷰,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꾸욱^^
 
유지니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 스포일러 없음. 안심하고 읽어도 되는 서평임. 

극작술에서 인과성의 질서는 매우 중요하다. 한 이야기 다음에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것과 한 이야기의 결과로써 다음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이다. 이는 영화에서나 소설에서나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이야기가 잘 흐르는 듯하다가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상황이 발생하거나 난데없는 인물이 등장하여 사건이 마무리 되면 관객과 독자는 어리둥절하기 마련이다. 최근 「디-워」 논쟁에서 문화평론가 진중권이 2,500년 전의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작술에서부터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는 어려운 문구를 인용하면서까지 흥분한 것이 이해될 만하다. 원인과 결과의 질서가 상식 안에서 정리되어야 관객과 독자는 허무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야기(story)와 플롯(plot)은 다른 개념이다. 이야기는 일정한 시간적 연속성에 의해서 정리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처럼 정리된 것은 아무런 흥미가 유발되지 않고 단순한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한 시간의 흐름 말이다. 흔히 접하는 일기나 신문의 기사같은 것, 바로 그러한 일반적인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플롯은 그 흐름 속에 끼어들어 앞뒤의 관계를 밝혀주는 구성원리가 된다. 즉 "왕이 죽고 여왕도 죽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만을 전제로 전달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하나의 사건만이 제시된 '스토리'에 해당된다. 하지만 "왕이 죽고 나서 여왕은 슬픔에 못 이겨 죽었다"고 하면 무언가 달라진다. 물론 여기서도 시간 순서는 있다. 왕이 죽고 여왕도 죽었다는 시간이 존재한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여왕이 죽었는지에 대한 원인과, 또 그래서 여왕이 죽었다는 결과가 확실히 존재함으로써 왕이 죽고 여왕이 죽었다는 시간순서를 압도하게 되는 것이다.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이다. 이것을 플롯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플롯은 한 사건의 이야기의 재구성에 작용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구성이 제법 탄탄한 영화나 연극, 문학이 제법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면서 재미있게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꽤 훌륭한 구성력을 갖춘 소설을 만났다. 온다 리쿠의 최신 출간작 『유지니아』를 읽었다. 쓰나미처럼 한국 도서계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 문학의 거대함에 대해 새삼 새로울 것은 없다. 다만 온다 리쿠와 같이 짧은 시일에 한꺼번에 그리 많은 작품을 출간한 작가가 없다는 점이 흥미롭다. 지난 2년간 19편이 출간되었고, 더욱이 지난 한 달간 7편이 쏟아졌으니 봇물 터진다는 얘기가 여기에 쓰는 말일 것이다. 현재 온다 리쿠 소설은 하나의 존(zone)을 형성하여 두꺼운 매니아층을 거느리고 있을 정도다. 그 유명하고 위대한(?) 아줌마 작가와의 첫만남이 『유지니아』라는 미스테리 소설로 이뤄진 것이다. 

  '2006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이라는 객관적인(?) 평가와 '노스텔지어의 마법사'라는 자극적인 문구가 책의 첫 장을 넘기는데 기대감과 흥분을 고조시킨다. 소설의 구성은 미스테리 소설답게 매우 복잡하다. 각 장이 바뀔 때마다 1인층과 3인층의 서술 시점이 교차되며 소설의 흐름을 이끌어간다. 또한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의 시공간 변화가 수시로 이뤄진다. 한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인물들의 인터뷰 내용과 각 장의 인물들의 현재적 플롯이 교차되면서 탄탄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지방 재력가문인 아오사와 가의 잔칫집에서 일가족을 비롯해 친적과 이웃사람들까지 열일곱 명이 희생된 독살사건이 이 소설의 핵심사건이다. 현장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녀 아오사와 히사코만이 유일하게 화를 면한다(소설을 읽다보면 가정부도 한 명 살아남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장에는 수수께끼 같은 편지가 남겨져 있다. “유지니아, 나의 유지니아.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줄곧 외로운 여행을 해왔다.” 몇 달 뒤, 한 남자가 자신이 아오사와 가 독살 사건의 범인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결정적인 몇 가지 증거로 인해 사내가 범인이라는 결론이 내려지고 사건은 종결된다. 그러나 진범은 따로 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는다. 소설은 이미 밝혀진 범인 이외의 또 다른 진범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며 마치 퍼즐을 맞춰나가는 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그 퍼즐이 하나 하나씩 맞춰질 때마다 명확하고 확실함이 아닌, 항상 2% 부족한 공간을 남겨놓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간상들은 철저하게 과거에 얽매여있다. 20년 전의 사건의 영향 아래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인물들의 과거로의 회귀를 매우 뛰어난 감각으로 그려내고 있다. 각 인물들마다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부 다르다. 다른 시각, 다른 관찰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소설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사건과 진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독자를 압도한다. 더욱이 저기압이 몰고오는 후텁지근하고 끈끈한 공기, 갑자기 불어닥치는 비바람, 숨이 멎을 듯 옥죄어드는 더위에 대한 묘사는 전율이 느껴질만큼 생생하다. 이러한 묘사는 무언가 명확하지 않고 베일에 가려져있는 듯한, 앞으로 완성될 퍼즐로 향하는 서사 전개와 좋은 궁합을 이루기도 한다. 

  이 소설은 고전적인 추리소설과는 맥을 달리한다. 작가는 범인이 누구인지, 범행동기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것 이상의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사실 범인의 존재는 도입부에서부터 암시된다. 그 작은 암시가 소설의 서사구조가 완성되어가면서 보다 뚜렷하고 좁혀져가는 듯 보인다. 마지막 한 존재를 향해 밀려가는 소설의 흐름 속에서 결말은 시원함을 제공하지 못한다. 진범의 존재감, 범행의 동기, 편지가 의미하는 뜻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주지 않은 채, 작가는 오히려 독자들에게 그것에 대한 의무를 넘기고 있다. 무언가 시원한 한 방을 원했던 독자는 무언가 흐릿흐릿하고 몽환적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자신의 전두엽을 활발하게 작동시키는 것이다. 

  소설 속의 중심 화자 두 명은 어느 한 존재감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고 있다. 강렬하게 그 존재를 향해 몰입한다. 그들의 목마름은 소설의 서사가 완성되어가면서 더욱 확연해진다. 그 목마름의 본질은 호기심을 넘어선 연민으로 보이지만, 어쩌면 사랑의 감정이었을 지도 모른다. 왜 그랬을까, 하는 마음을 넘어선 마치 내 자신이 네가 되려고 하는 심정으로 강렬하게 갈구한다. 두 명의 인물, 즉 인터뷰를 진행하는 자와 당시 사건을 소설로 재탄생시킨 자의 시간성과 방향성은 철저하게 과거의 그 존재에 구속되어 있는 것이다. 

  과연 사실은 존재하는 것일까? 혹시 우리가 흔히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 "어느 한 방향에서 본 주관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과연 이 세상에 명확한 사실은 존재하는 걸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이 세상의 전부일까? 깊은 사색이 밀려온다. 

  복잡하면서 잘 짜여진 뛰어난 플롯과 흐릿하고 명확한 답이 없는 무의식적 세계가 잘 조합되어 서사의 훌륭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 소설은 온다 리쿠라는 거대한 이름값에 대한 첫만남을 풍성한 만족감으로 채워주었다. 온다 리쿠의 다른 소설 속으로 침투하고 싶다. 그녀의 다른 소설들이 어떤 완성도와 무게감으로 읽힐 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을 꺼리며 내내 한 사람의 시점에 갇히는 것이 자기에게 잘 맞지 않는다, 라는 온다 리쿠의 고백이 진실이라면 그 자체만으로 내가 그녀의 작품세계를 천착할 가치는 충분하다.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더 나아가 그 탐구의 다각적인 시선과 다채로운 해석에 전적으로 내 독서기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왠지 전작주의에 빠질 것 같다. 온다 리쿠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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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28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님, 굿모닝! 온다리쿠의 소설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님의 리뷰가
상당히 치밀합니다. 꾸욱^^
 
내 안의 창의력을 깨우는 일곱가지 법칙
켄 로빈슨 지음, 유소영 옮김, 백령 감수 / 한길아트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책의 제목과 표지 비쥬얼에서 언뜻 강한 도전을 주는 자기계발서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책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착각은 자유였다. 이 책은 철저한 인문학 도서다. 굉장히 지루하고 건조하며 재미없는 책이다. 다루고자 하는 본질인 '창의력을 깨우는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교육체계의 문제점과 역사적 원인에 대해서만 거의 논문 수준으로 다루고 있다. 인문학을 위시하여 심리학, 사회학, 미학, 철학, 뇌의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두루 다루고 있지만 난해한 학문적 외침과 비본질적인 정보의 부각으로 굉장히 힘 없는 책이 되었다. 17,000원이라는 책 값도 어리둥절하다. 양장본도 아니고 300페이지가 채 안되는 분량에 17,000원의 책 값은 비합리적인 가격이다. 이벤트 당첨 도서로 받은 것이기에 개인적 출혈은 없다손치더라도 너무한 것은 너무한 것이다. 여튼 책에 대한 전체적 평가는 여기서 각설하고 내용을 얘기해보자.
 

 저자는 공교육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저자의 모국인 영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이 특정한 학문적 능력을 지능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면서 개인의 창의력을 계발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아카데미시즘(academicism)은 특정한 학문적 능력(academic ability)을 전반적인 지능과 혼동하여 다른 능력을 무시하고 오직 그것만 개발하는 편견일 뿐이라고 질타한다.
 

  사실 그렇다. 거의 대부분의 국가의 교육체계는 '경제적' 모델과 '지적' 모델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현재 세계 많은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는 서구 교육체계의 기반이 되는 경제적 모델은 '산업주의'의 산물이며 지적 모델은 '아카데미시즘'의 연장이다. 그런데 경제적 모델은 작금의 시대상황에 낡았을 뿐만 아니라 지적 모델은 전혀 부적절하며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산업경제에서 노동력을 공급하는 데 적합하도록 디자인 된 교육체계가 아직까지 대부분의 국가에 보편적 공교육의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더욱이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정이 초유의 짧은 시간으로 점철된 한국의 경우 공교육의 심각한 문제점은 거의 비교 거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교육체계의 오류와 비합리성을 지적하면서 명제적 지식과 논리-연역적 추론 능력만을 강조하고 있는 보편적 교육방식을 질타하고 있다. 대부분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들은 학문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창의력과 표현력, 리더쉽과 의사소통 등의 능력은 그들의 '우수함'의 영역에는 반영되지 않고 있다. 그렇기때문에 기업과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상과 공교육과 대학에서 길러낸 인재상의 차이는 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점을 지적하면서 산업사회와 아카데미시즘의 잔재라 할 수 있는 작금의 교육체계에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뤄줘야 한다고 역설한다.
 

  몇 년 전 미국 타임즈지 기사에서 한국인의 지능지수(IQ)가 세계 1위임을 발표했었다. 대만이 2위, 일본이 6위, 유태인이 9위, 미국인이 16위였다. 한 민족이 지능지수의 보편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략 천년이 걸린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와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는 한국인이 아직도 노벨상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노벨평화상의 경우 비학문분야이며 상징적이라는 점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상 수상은 제외하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철저하게 대한민국의 교육의 문제점에서 연유한다. '국영수'로 대변되는 대한민국 공교육은 천성적으로 훌륭한 두뇌구조를 갖고 있는 한국인들의 잠재능력을 사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세계 역사상 초유의 빠른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쳤다는 점과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뜨거운 교육열의 방향이 '대학입학'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은  한국의 교육체계가 오로지 '대학입시제도'의 관문으로만 디자인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개인마다의 다면적 지능이 빛을 보지도 못하고 완전 차단 당하고 있는 현실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세상을 단 한 번 살아간다. 초기에 꺾여버린 싹처럼 처절한 비극도 없으며, 외부에서 주어진 한계를 스스로의 한계로 잘못 인식하여 노력할 기회, 희망을 가질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것만큼 부당한 일도 없다."   <스티븐 제이 굴드, p77>
 

  암기식이고 주입식인 대한민국의 교육제도는 많은 부작용을 생산하고 있다. 명제적 지식과, 논리-연역적 추론 능력만을 지극히 강조하고 있어 인간이 아닌 기계나 계산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작금의 젊은 세대들의 말하는 능력과 글쓰기 수준은 민망할 정도다. 더욱이 토론수준은 저급함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참여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실시된 '대통령과 검사와의 대화'를 상기해보자.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라 할 수 있는 현직 검사들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대통령과의 십대 일의 토론에서 무참하게 무너졌다. 사안을 바라보는 통찰력은 물론이요, 주장하는 논리와 인과성의 전 부분에서 토론의 최저수준을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의 획일적이고 비합리적인 교육환경이 어떤 수준의 엘리트들을 생산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를 짊어질 동량을 길러내는 데 있다. 거기에는 뛰어난 학문적 능력도 중요하지만 창의력과 리더쉽, 예절과 도덕성 등의 가치도 매우 중요하다. 특정 부분의 논리적, 수학적 능력만 계발하다보니 감성능력을 개발할 기회가 적다. 이는 바로 감정과 이성의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고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며 조절하지 못하는 냄비근성의 국민성에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감정의 주체가 되지 못한 성인의 경우 비사회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가능성도 적잖다. 도덕적이고 정직함은 물론, 날카로운 이성과 풍성한 감성, 그리고 뛰어난 소통능력을 길러내는 전인교육이 필요함이 여기에 있다. 
 

  1,900만명이 안되는 유태민족이 66억 인류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의학의 전 분야를 대부분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 2억 3천의 미국 인구 중 유태인은 900만이 채 되지 않는다. 900만이 채 안되는 유태민족이 미국 부의 51.7%를 차지하고 있다. 사실 전쟁을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는 미국 국가 정부의 문제가 아니라 유태인의 문제이다. 유태인의 뛰어남에 대해 유태인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일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독특하고 철저한 가정교육이다. 아이들 앞에서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을 유지하면서 성경과 삶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바로 그 가르침이 유태인 자녀들 마음 속에 큰 그릇이 만들어지는 원인이 되면서, 그 마음의 그릇에 나와 너와 우리와 자연과 우주를 품는 위대한 대인으로 서나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교육의 힘은 바로 그런 것이다. 
 
 
[인상 깊은 구절]
창의적인 조직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본 특징이 있다.
첫째, 사람들에게 위험을 무릅쓸 자유를 주는 곳이다.
둘째, 사람들이 자신이 타고난 지성을 발견하고 발전시키게 해주는 곳이다.
셋째, '어리석은' 질문, '옳은' 대답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넷째, 불손함, 생기발랄함, 역동성, 놀라운 것, 장난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곳이다.
<책 내용중,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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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28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들이 하나하나 참 좋습니다. 다양하게 읽고 쓰시네요. 대문에 걸어둔 서재인사말,
독서에 대한 정의도 과장없이 본질적입니다. 그냥 가려다 인사드리고 가는 게 옳겠다
싶어서 몇자 남깁니다. 종종 들러야겠습니다.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