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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지난 주 「MBC 100분 토론」은 꽤 흥미있었다. 개인적으로 정치와 시사에 관심이 많아 토론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편이다. 지난 주에 방송된 「MBC 100분 토론」의 경우 심형래 감독의 『디-워』 논쟁을 주제로 하였는데 주제도 주제거니와 토론 패널로 참석한 진중권이라는 한 지식인의 존재감이 방송 내내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진중권이 누구인가? 유시민과 더불어 글빨과 말빨로는 절대로 당해낼 자가 없다는 시사평론가가 아닌가? "글 싸움에서 시사평론가 진중권 씨에게 이길 사람이 없다면, 말싸움에서 유시민 씨에게 이길 사람은 없어 보인다."라는 어느 기사의 구절은 진중권이라는 한 지식인의 기질과 위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유시민 씨는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장관을 거친 이후 강연과 집필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특유의 독설과 조소 섞인 입담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정치인으로서 품의를 지키자는 차원에서는 반갑다고 할 수 있으나 그래도 무언가 아쉽기는 하다. 보건복지부장관으로 내각 밥을 먹은 이후 유시민은 이전 자신의 이미지를 철저하게 과거에 정지시켜 놓고 있는가 반면, 진중권은 여전히 현재적이다. 단 유시민과 진중권의 현재적 교집합이 있다면 극렬팬과 강렬한 안티로 아직까지도 철저하게 양분되어 평가받고 있다는 것 하나 뿐이다.
진중권은 말을 할 때나 글을 쓸 때 굉장히 지식적이고 전문적인 경향이 강하다. 앞서 언급한 「MBC 100분 토론」에서 상대 패널과의 논지 전쟁은 싱겁기만 했다. 상대 패널들은 애당초 진중권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비합리적인 정념주의와 어설픈 논지 주장으로 답답하기 그지 없던 『디-워』 긍정 패널들은 시니컬하고 날카롭고 학구적인 진중권의 공세에 초토화된다. 2500년 전의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작술부터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대중들이 소화하기 힘든 용어에 이르기까지 진중권의 공세는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토론 후반 한 여성 시민논객과 진중권과의 일대일 토론은 그날 방송의 압권이라 할 만했다. 예기치 않은 방청석의 날카로움에 심히 당황한 진중권은 얼굴을 붉히며 감정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심형래 영화를 왜 평론해야만 합니까? 그게 무슨 국가보안법입니까?"라는 강한 조소의 외침으로 말이다. 진중권은 그런 사람이다.
진중권의 신간 『호모 코레아니쿠스』를 읽었다. 예상했던대로 쉽지 않은 책이다. 술술 읽히는 곳도 있지만 앎과 지혜의 부족과 지극히 전문적인 용어들의 즐비함 속에서 허우적 거리며 어렵게 책장을 넘긴 곳도 적잖았다. 진중권은 이 책에서 한국인과 그들의 문화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날카로운 비판을 감행한다. 한국인의 '국민성'이나 '정체성'보다는 '하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습속'이라는 것인데 특정 사회 성원들의 사고방식, 감정구조, 행동양식의 총합이라 할 수 있는 의미이다. 즉 진중권은 이 책을 통하여 한국인들의 사고방식과 감정의 구조, 행동양식을 최대한의 낯선 시각으로 관찰하면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진중권이 소재로 삼은 한국인의 습속들은 거의 대부분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다. 군대적 기질, 빨리빨리 문화, 박정희 신드롬, 거짓말 문화, 냄비근성, 정념성, 체면문화, 명품족, 짝퉁문화 등은 이미 대한민국의 국민적 특성을 알려주는 충분히 인지된 것들이다. 다만 이에 대한 접근방식이 신선한데 다분히 시대 분류적이다. 한국인의 이러한 '습속'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과거의 원인을 설명하고 이를 서구사회의 그것과 대조하고 있다. 중세에서 전근대와 근대로, 그리고 탈근대에 이르는 시대적 구분을 통해 매우 자세하고 학구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앞서 열거한 한국인의 특성 중 가장 독특한 한국인 브랜드는 뭐니뭐니해도 엽기적인 속도감일 것이다. 진중권은 사회 전반에 걸쳐 습속화되어 있는 한국인들의 놀라운 속도감은 박정희식 산업주의의 산물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효율적 스피드는 낮은 차원의 것이라 강변한다.
비릴리오를 따라 속도를 두 종류로 구별하는 게 좋겠다. 하나는 신체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속도. 이를 '외연적 속도'라 부르기로 하자. 다른 하나는 발명, 발견, 개발, 디자인과 같은 창의성의 속도. 이를 '내포적 속도'라 부르자. 인간의 몸은 기계가 아니기에 신체를 가속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가속화의 특정한 단계에서 양적인 속도는 질적인 속도로, 외연적 속도는 내포적 속도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발전이 내포적 속도로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는 신체의 동작은 굳이 빠를 필요가 없다. 그런 사회는 또한 내포적 가속화의 성과를 번잡한 생활의 외연적 속도를 떨어뜨리는 데에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로써 삶의 질을 높이려는 것이다. 서구 사회의 느림은 게으름도 아니고, 비효율도 아니고, 경쟁의 배제도 아니고, 역동성의 결여도 아니다. 그저 속도의 다른 차원일 뿐이다. 그리고 삶은 전쟁이 아니다. <p68>
글쓰기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작금의 글쓰기 열풍의 질적 배고픔을 지적하기도 한다. 대입 논술 시험 여파와 인터넷 블로그와 홈페이지의 대중적 보편화로 글쓰기의 르네상스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풍성한 글쓰기의 내면을 관찰하면 심각함이 목도된다. 오랜 사색으로 정제해낸 생각을 주옥같은 언어에 담는 독백적 글쓰기가 아니라, 반응이 오가는 상황에서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곧바로 글자로 옮겨 적는 대화적 글쓰기가 팽배한 것이다. 이의 경우 21세기 사회의 주요한 소통매체가 문자에서 영상으로 바뀌는 이른바 '도상적 전회(iconic turn)'의 시대를 맞아 큰 위험성을 내포하게 마련인데, 이는 서구와 한국의 영상문화의 연단과정의 차이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으며 아래와 같이 진중권은 얘기한다.
한국의 영상문화는 서구처럼 문자문화의 강력한 저항을 받지 않았다. 문자문화의 전통이 약한 게 외려 신속하게 디지털 영상문화로 이행하는 데에 유리한 조건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게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서구는 속도는 느려도 문자문화의 바탕 위에서 서서히 영상문화로 이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자 없는 그림은 선사시대의 주술적 상상력이고, 문자로 그린 그림은 디지털 시대의 기술적 상상력이다. <p209>
21C는 영상문화가 지배하는 도상적 전회의 시대가 됨은 자명하다. 다만, 그 기반에 단단한 문자문화가 받침이 되느냐 안되느냐의 차이가 종국을 결정한다. 문자문화의 기본적 토양 위에 세워지지 못한 영상문화는 사람을 디지털 '기능공'으로 추락시킨다. 최근 러시아에서는 TV를 끄고 독서를 하자는 캠페인이 국가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또한 한국의 경우 기업에서 대학에게 학부생의 집필능력을 향상시키라는 요구가 많은 실정이다. 이 모두는 21C 문자문화와 영상문화의 통합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곧바로 국가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혜안에서 나온 것임을 입증한다. 진중권은 바로 이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문화가 강한 곳에서는 네트워크를 통해 지식과 정보가 오가지만, 문자문화가 약한 곳에서는 그저 뜨거운 교감과 반감이 오갈 뿐이라는 진중권의 주장은 백 번, 천 번 옳은 말이다. 네트워크는 강하지만 콘덴츠가 약한 한국의 인터넷 문화의 가벼움과 공허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미래의 생산은 엔지니어, 아티스트, 인문학자의 삼각 컨소시엄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모할 것이라는 주장도 공감할 만하다. 엔지니어는 기술을 가지고, 아티스트는 상상력을 가지고, 인문학자는 콘덴츠를 가지고 생산 속에서 서로 결합하게 된다는 것이다.
21세기의 기술은 과거의 기술과 달리 '꿈꾸는 기술'이다. 꿈이 기술을 통해 현실이 되면, 기술은 예술이 되고, 상상력은 생산력이 된다. '꿈꾸는 과학 예술가'는 기술과 예술과 인문학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디지털 유리알 유희의 명인이다. 카리스마의 명령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군대식 신체가 아니라, 스스로 발명하고 창안하는 예술적 신체다. <p228>
박정희 향수에 젖어 파시즘적이고 개발주의적인 사고로 국민적 에너지를 엉뚱한 곳에서 결합하려는 시도가 언제까지 여론의 대세가 되어야 하는가? 이미 시대는 바뀌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단련되어 있던 기계적이고 군대식의 신체가 아닌 창조적이고 예술적 신체가 필요한 시대다. 다윈의 진화론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진리가 한 가지 있다면 결국에 살아남는 종은 힘이 쎄거나 지적능력이 뛰어난 종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라는 것이다. 습속만큼 보수적인 것이 없는만큼 과거 산업사회의 낡은 전사적 신체에서 '기술적 상상력'을 갖춘 미학적 신체로 하루 빨리 거듭나야 할 것이다.
진중권은 황우석 사태를 통해 큰 충격과 허무함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책 내용 중에 황우석 사건이 의견 개진의 실례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더욱이 「MBC 100분 토론」 생방송에서 심형래의 이름을 황우석으로 잘못 말했던 실수에서 알 수 있듯이 황우석 논문 파동은 그의 두뇌저장소에 무의식적인 강렬한 메세지로 각인되어 잇는 듯하다. 사실 황우석 사태는 대한민국의 저급한 정념문화를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논문을 허위 조작하는 과학자는 많아도, 논문이 허위 조작되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절대 지지를 받는 나라는 한국뿐일 것이다. 본질보다 비본질이 우선하고, 거짓말에 대해 관대하며, 지나친 정념적 근성이 빚어낸 헤프닝이 아닐 수 없다. 『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에서 김주하가 언급했듯이 만약 MBC가 아닌 외국의 언론이나 과학계로부터 진실이 밝혀졌다면, 생각만 해도 소름 돋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외에도 한국인의 습속과 관련된 진중권의 관찰과 접근은 다양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이르는 다양한 대상을 미학, 역사학, 경제학, 사회학에 이르는 폭넓은 시선으로 접근하고 있다. 관찰과 비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너 자신을 디자인하라, 는 강렬한 어조로 미래지향적 돌파구를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인이 어떻게 한국인을 낯설게 읽을 수 있냐는 의심이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의 독일 유학생활을 최대한 반영하였고 나름대로 객관적 시선을 견지하기 위한 역사적이고 학문적 고찰이 돋보인다. 미학을 위시한 인문학을 두루 훑고 있어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적지 않지만 진중권 특유의 시니컬한 비평과 득도에 다다른 예술적 필치가 결합되어 꽤 괜찮은 인문학 도서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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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다윗